2월 18일
볼타 Alessandro Giuseppe Antonio Anastasio Volta 1745. 2. 18 롬바르디아 코모~1827. 3. 5 코모.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코모 출생. 어릴 때에는 문학 방면에 흥미를 가졌다. 화학과 전기현상을 연구하고, 코모의 왕립학원 졸업 후, 이 학원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1764). 그 후 스위스에서 지내다가 1779년 파비아대학 교수가 되었다. 초기에는 주로 기체의 성질을 연구, 소기(沼氣)에 관한 연구나 ‘볼타의 유디오미터(eudiometer)’ 등을 다루었다. 한편 전기현상도 연구하여 최초의 논문 <전기화(電氣火)의 인력에 관하여>(1769)에 있는 라이덴병의 작용에 관한 연구, 전기쟁반의 고안(1775), 축전기의 발명, 미량의 전기를 검출하는 검전기(檢電器)의 제작 등을 했으며, 1791년 영국 왕립학회 회원이 되었다. 1791년 갈바니가 보여준 유명한 ‘개구리 다리의 실험’을 보고 곧 ‘갈바니전기’ 연구에 착수, 그것을 생명현상으로 취급될 것이 아니라 그 기원은 물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통찰, 동물전기설을 비판했다(1792). 이러한 생각에 입각하여 금속물질의 볼타계열을 만들고(1794), 이어 접촉전기를 착상(1796), 1800년 ‘볼타의 열전기더미[熱電推]’를 고안하여 처음으로 화학작용에 의하여 전류를 만들어냈다. 이는 전지의 발명이며, 그 후의 전기현상 연구에 크게 공헌했다. 이 업적으로 영국 왕립학회에서 코플리상을 수상했으며(1794), 나폴레옹 1세의 초청으로 파리 학사원에서 강연하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크루아를 받았다(1801). 후에 이탈리아의 통령정부에 의해 백작 ·원로원의원이 되었으며, 1815년부터는 파도바대학 교수를 겸하였다. 전압의 단위인 볼트(V)는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요코이 Mor Jokai 1825. 2. 18 헝가리 코마롬~1904. 5. 5 부다페스트. 헝가리의 소설가. 헝가리에서 가장 중요한 19세기 소설가로 꼽히며, 신문잡지에 기고한 중요한 글들이 빠진 작품집(1894~98 출간)만도 100권에 이른다. 〈평일 Hétköznapok〉(1845) 같은 초기 작품은 프랑스 낭만주의의 영향을 나타내고 있지만, 원숙기의 소설들은 현실과 개인적 경험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헝가리인 대부호 Egy magyar Nábob〉(1853~54)·〈황금 인간 Az aranyember〉(1873)은 당시 헝가리를 다룬 가장 중요한 소설에 속한다.
샤누트 Octave Chanute 1832. 2. 18 파리~1910. 11. 23 시카고. 미국의 항공기 조종사. 토목기술자로서 철도와 철교 건설에 명성이 있었으나, 1890년대에 비행기에 흥미를 느껴 비행기의 여명기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고정익(固定翼) 항공기의 안정과 조종에 관심을 두고 스스로 설계한 글라이더로 수많은 실험을 한 끝에, 1897년 구조설계를 글라이더에 적용하여 복엽(複葉)의 날개에 지주(支柱)와 선을 사용하는 구조를 고안하였다. 그 방식은 그뒤에 복엽식 비행기의 표준적인 구조가 되었다. 1900년경 라이트형제와 알게 되어, 그들의 연구에 많은 조언과 도움을 주었다.
라마크리슈나 Ramakrishna Gadadhar Chatterji, Gadadhar Chattopadhyaya라고도 함. 1836. 2. 18 인도 벵골 후글리~1886. 8. 16 캘커타. 힌두인의 종교지도자. 종교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증명한 사람으로는 현대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일 것이다. 라마크리슈나는 모든 것에서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서 신을 보았다. 모든 길은 같은 목표로 향한다고 그는 믿었다. 라마크리슈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웅덩이에는 온갖 가트(ghat : 물길)가 있다. 힌두교도는 그 액체를 떠와서 '잘'이라고 부른다. 이슬람교도는 그 액체를 떠와서는 '파니'라고 부른다. 그리스도교도는 그 액체를 '워터'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같은 물질이며 본질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다." 그의 이름으로 된 교단이 캘커타를 본부로 전세계에 전도사를 파견한다. 가장 주목할 만한 제자인 비베카난다는 1893년 힌두교 대표로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회의에 참석했다 .
마흐 Ernst Mach 1838. 2. 18 오스트리아 모라비아 치를리츠투라스~1916. 2. 19 독일 하르.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철학자. 광학·역학·파동동역학의 중요한 원리들을 세웠으며, 모든 지식은 감각 경험과 관찰을 개념적으로 조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14세까지 집에서 교육을 받다가 잠시 김나지움을 다닌 뒤 17세에 빈대학교에 들어갔다. 1860년 물리학박사학위를 받고 1864년까지 빈에서 역학과 물리학을 가르치다가 그라츠대학교로 옮겨 수학교수가 되었다. 스스로를 물리학자라고 칭하고 그의 생애를 통해 물리 연구를 계속 지도해왔지만 그는 예전부터 감각의 심리학과 생리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1860년대에는, 밝기가 확연히 다르게 조명된 두 곳을 볼 때 그 경계 부위에서 밝거나 어두운 띠가 보이는 생리적인 현상을 발견했는데 나중에 이 띠는 ' 마흐의 띠'라고 불렸다. 1867년 그라츠를 떠나 프라하에 있는 찰스대학교의 실험물리학교수가 된 뒤 28년 동안 머물렀다. 그곳에서 그는 움직이거나 가속도를 받을 때 느끼는 근육운동의 지각(知覺)을 연구했다. 1873~93년 음파와 파동의 진행을 측정할 수 있는 광학 및 사진상의 기법을 개발했다. 1887년 초음속학의 원리를 세우고 음속에 대한 물체의 속도비를 나타내는 마하수의 개념을 도입했다 . 〈감각 분석에 대한 연구 Beiträge zur Analyse der Empfindungen〉(1886 발간, 1897 영역)에서 모든 지식은 감각에서 나오기 때문에 과학적인 관찰로 얻은 현상들은 오직 그 현상을 관찰할 때의 경험이나 '감각'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는 자연과학에 있어서 어떠한 설명도 실험을 통해 검증할 수 없으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는 검증 가능성에 대해 매우 철저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절대시간이나 절대공간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개념들을 거부했는데, 이것은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견하는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마흐는 또한 관성(정지해 있는 물체는 계속 정지해 있으려 하고 움직이는 물체는 움직이던 방향으로 계속 움직이려고 하는 경향)은 한 물체와 우주의 모든 나머지 물체들 사이의 관계에서 생겨난다는 마흐의 원리를 발표했다. 그는 관성이 한 물체와 다른 모든 물체(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사이의 상호작용 함수로만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마흐의 관성이론은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창안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1895년에 다시 빈대학교로 돌아와 귀납철학을 가르쳤으나 2년 뒤 발작이 일어나 고통받았다. 1901년 그는 적극적인 연구활동을 그만두고 의회로 진출했다. 은퇴한 후에도 강의를 계속했으며 저서 〈인식과 오류 Erkenntnis und Irrtum〉(1905)와 자서전(1910)을 펴냈다.
헬란 Alexander Kielland 1849. 2. 18 노르웨이 스타방게르~1906. 4. 6 베르겐. 노르웨이의 소설가·단편작가·극작가. 입센, 비외른손, 요나스 리와 함께 19세기 노르웨이 문학의 '4거두'로 꼽힌다. 귀족의 후손으로 1871년 법학학위를 받았고, 벽돌 공장을 인수하여 9년간 경영했지만 만족하지 못해 1878년 파리로 가서 이듬해 단편집을 출판했다. 19세기 자유주의 문학을 폭넓게 섭렵하고 자신의 창조력을 사회개혁에 바친 공리주의 작가로서 명대의 탁월한 기질 때문에 종종 사회비판의 날이 무뎌지기도 했다. 그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주된 공격목표는 관료주의(1881년의 〈노동자들 Arbeidsfolk〉)와 성직자(1887년의 〈성 한스 축제 Sankt Hans Fest〉)였는데, 교회와 사제들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는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공격한 것은 결코 그리스도교 자체가 아니라 다만 교회 정치주의였을 뿐이다. 1890년대 신낭만주의 운동이 나타난 후에는 거의 글을 발표하지 않았다. 1891년 고향에서 시장으로 선출되었고, 1902년 톰스달의 지방장관이 되었다.
소른 Anders (Leonard) Zorn 1860. 2. 18 스웨덴 모라~1920 모라. 스웨덴의 화가, 에칭 판화가. 모라 출생. 처음에는 스톡홀름의 미술학교에서 조각을 배웠으나 뒤에 수채화로 바꾸었다. 1880년대에는 유럽에서 아프리카까지 여행하고, 그 사이 런던에서 동판화의 기술을 익혔다. 1888∼1896년까지는 파리에 살면서 마네 ·드가 등의 작품과 에스파냐회화를 혼합한 작품으로 성공하였다. 만년에는 고국 스웨덴으로 돌아가 정감이 넘친 사실적인 작품을 제작하다가 모라에서 죽었다. 대표작에 《암초에서, 바다의 님프》(1894, 오슬로국립미술관 소장) 《화가와 모델》(1896, 스톡홀름국립미술관 소장) 등이 있다.
마르크스 Gerhard Marcks 1889. 2. 18 독일 베를린~1981. 11. 13 쾰른. 독일의 구상주의 조각가. 1900~25년 에른스트 바를라흐, 빌헬름 렘브루크와 더불어 독일의 조각 예술을 되살리는 데 이바지했다. 1918년 리하르트 샤이베의 작업실에서 공부한 뒤 베를린 미술·공예학교의 교수가 되었으며 1920~25년에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에서, 그뒤 할레 미술·공예학교에서 가르치다가 1933년 나치에 의해 쫓겨났고, 1937년 작품 전시까지 금지당했다. 종전 후 1946~50년에는 함부르크에서 가르쳤다. 그의 작품은 단순하고 구상적이며 다소 표현주의적인데, 〈어머니와 딸 Mother and Daughter〉(1940)은 차분한 느낌을 준다. 또한 아우구스트 가울에게 큰 영향을 받은 동물 조각으로도 유명하다. 1950년대에 미국과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말년에는 서독에서 살았다. 그가 주문을 받고 제작한 주요작으로는 쾰른과 함부르크에 있는 전쟁기념비들이 있다. 마크데부르크에 있는 수녀원의 청동문은 1977년 세상에 공개되었다.
윌키 Wendell L(ewis) Willkie 1892. 2. 18 미국 인디애나 엘우드~1944. 10. 8 뉴욕 시. 미국의 정치가. 1940년 미국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으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패배했다. 국제적 협력을 강조하는 '하나의 세계'라는 용어로 유명해졌다. 1916년 인디애나대학교에서 법학학위를 받은 그는 아버지와 함께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국육군에 입대했다. 전후 합동법률사무소에서 일했으며, 1929년 뉴욕으로 이주하여 코먼웰스앤드서던사(社)의 법률 담당 부서에서 근무했다. 4년 후 이 정력적인 법률가는 거대한 공익사업지주회사 대표가 되었다. 1933년 이후 그는 연방 정부의 테네시 강 유역 개발공사와 맞서 경합을 벌인 개인소유 공익사업회사의 지도자로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티모셴코 Semyon Konstantinovich Timoshenko 1895. 2. 18(구력 2. 6) 러시아 우크라이나 푸르만카~1970. 3. 31 모스크바. 소련의 장군. 제2차 세계대전 때 적군(赤軍)이 독일군에 맞서는 데 도움이 되도록 훈련 및 엄격한 규율의 체계를 확립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에 참가했기 때문에 1930년대에도 몇몇 지역 군사지휘권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다. 러시아-핀란드 전쟁중이던 1940년 1월 그는 소비에트군의 지휘를 맡아 3월경 핀란드로 하여금 화평을 요청하게 만들었다. 1940년 5월 소련의 육군원수 겸 국방인민위원으로 지명된 그는 엄격한 훈련 정책을 밀고 나갔다. 그 가운데는 소련 장교가 명령에 따르지 않는 부하를 사살해도 된다는 규칙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투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소련의 장군으로 제2차 세계대전중에도 중요한 지휘권을 연속적으로 보유했다.
브르통 Andre Breton 1896. 2. 18 프랑스 탱슈브레~1966. 9. 28 파리. 프랑스의 시인·수필가·평론가·편집자. 오른현(縣) 탱슈브레 출생. 초현실주의의 주창자로 14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보들레르, 말라르메, 위스망 등 상징파 시인에게 열중했으며 발레리와도 사귀었다. 의학생(醫學生)으르 파리대학 재학 중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각지의 육군병원 정신과 및 신경과에 근무하면서 프로이트의 저서를 애독하게 되었다. 프로이트를 통하여 계발된 인간정신의 무의식 영역에 관한 인식은 후일 그가 초현실주의 이론을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1917년 이후는 아폴리네르, 아라공, T.수포, P.차라 등과 지내면서 오토마티슴(自動記述法)에 의한 작품 《자장(磁場)》(1921)을 수포와 함께 지었으며, 다다이즘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하고, 꿈 ·잠 ·무의식을 인간정신의 자유로운 발로로 보는 시(詩)의 혁신운동을 궤도에 올려 놓았다. 그 후 이 운동은 많은 동조자들이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등, 몇 차례 이합집산을 거듭하였으나, 브르통만은 끝가지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문학 Littrature》 《초현실주의 혁명 La Rvolution Surraliste》 등 중요한 기관지를 발간하는 한편, 소설 《나자 Nadja》(1928), 수필집 《연통관(連通管) Les Vases communicants》(1932) 등의 중요한 작품을 많이 발표하였다.
김기창 金基昶 1913. 2. 18 서울~2001.1. 23 충북 청원. 동양화가. 서울 출생. 7세 때 장티푸스로 청각을 잃고, 17세에 승동(勝洞)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당화숙(以堂畵塾)에서 김은호(金殷鎬)에게 그림을 배워 6개월만에 《판상도무(板上跳舞) 널뛰기)》(1931)로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처음 입선한 후, 연 5회의 입선과 연 4회 특선을 기록했다. 《수조(水鳥)》(제11회), 《여인》(제12회), 《정청》(제13회), 《엽귀》(제14회), 《해녀》(제15회)로 입선, 《고담(古談)》(제16회), 《하일(夏日)》(제17회), 《고완》(제18회), 《여일(麗日)》(제19회)로 특선하여 추천작가가 되었다. 1946년에 우향 박래현과 결혼하였고, 1956년 국전 초대작가·심사위원·수도여자사범대학과 홍익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며, 백양회(白陽會)의 중심인물로 활약하는 동시에 수많은 해외전을 가졌다. 김기창의 작품은 대략 다섯 단계로, 초기의 사실적 작품을 그린 구상미술 시기, 예수의 일생을 한국인의 모습으로 담은 신앙화 시기, 구상미술에서 추상으로 변하는 전환기의 복덕방 연작 시기, 청록 및 바보산수화 시기, 그리고 말년의 추상미술 시기로 나눈다. 산수·인물·화조·영모(翎毛)·풍속 등에 능하며, 형태의 대담한 생략과 왜곡으로 추상과 구상의 모든 영역을 망라하고, 활달하고 힘찬 붓놀림, 호탕하고 동적인 화풍으로 한국화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1만 원짜리 지폐에 세종대왕 얼굴을 그렸으며, 1993년 예술의 전당 전시회 때 하루에 1만 명이 입장한 진기록도 세웠다. 대표작으로 《가을》(1934), 《보리타작》(1956), 《새와 여인》(1963), 《소와 여인》(1965), 《태양을 먹은 새》(1968), 《나비의 꿈》(1968), 《군마도》(1970), 《웅(雄)》(1970), 《달밤》(1978) 등이 있다. 5·16민족상(1986)·서울시문화상(1986)·색동회상(1987)을 받았다.
1930.02.18 클라이드 톰보, 명왕성 발견
1960.02.18 제8회 동계올림픽 개막(미국 아이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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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소른... 뉘신지는 모르지만 노젓는 아지매?가 생동감있구먼유~! ^&*
마르크스 고양이 재미있네
저 농악 우표 그림이 김기창의 작품인감요??? ^.^)
넵~~ 어디선가 관련정보를 본 기억이 나는디 찾지를 못하겠심더.....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