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U에 대하여,,,,,,,,,,,
한글명 : 해병상륙공작대
영문명 : MIU = Marine Intelligencd Unit 또는 Mission Impossible Unit
(해병첩보부대) 또는 (불가능한 임무 부대 = 불가능이 없는 부대 정도로 해석)
별 칭 : 마니산 까치부대
아래부터는 퍼 온글인데 여기서 잘못된 부분은 제가 아는 한도내에서 파란색으로 표시하며
정정하도록 하겠습니다.
- 퍼온글 -
해병대 베일속 첩보부대 까치부대원들의 자질은 정말 뛰어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분들의 부대 휘장 더 정확히는 훈련휘장은 1979년을 기준으로 우리 해병대에서 자취를 감
추게 되는데 그 이유는 수년전 부대가 해군 유사부대와 통합 해체 되었는데다 까치부대원 출
신으로 청룡 특수수색대의 기간요원이 되었던 분들이 이 시기를 전후로 갖가지의 사유로 해
병대를 떠나게 되고또 이미 까치부대 출신으로 실무부대에 계시던 극소수의 분들도
차츰 제대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명찰처럼 긴 국방색 바탕위에 검은 실로 양쪽에서 길게 파도를 상징하는
물결을 그려오다 중앙에서 두마리의 돌고래나 상어로 보이는 형상이 점프하고 있는듯한 오로
지 이 부대 출신들만 가슴에 박고 다니던 마크도 1979년 중반을 넘기면서는 보기가 어려워지
고 이윽고는 잊혀진 마크가 되었습니다. (이 부분은 잘못되었슴 이건 우리가 보통 말하는 잠
수함 마크임,,유디티 돌고래 마크를 애기 하는것 같음)
제가 이부대 출신 청룡특색대 하사관 선배님들과 친분 관계를 갖게된것은 제가 사격관리대에
근무하면서 맡은 여러가지 직책으로 여단 본부에서 자주 뵙게 되기도 하고 또 이분들이 자주
사격 연습하러 들리기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울러 당시 하사관들은 여단 전체에 걸쳐(강화및 섬에 유배되는 하사관 제외)선후배간의 연
결과 정보가 교환되고 있는 체제에따라 자연스레 관계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MID(까치부대)(MIU입니다.)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는 것은 포항에서 받은 후
반기 하사관학교때 였습니다.
이때 1소대장님을 맡으신분이 고참 해병상사 소대장님이셨는데 역시 가슴에
그 마크를 달고 가끔 옛 훈련받을때 얘기를 하셨습니다.
물론 까치부대란 말씀은 없으셨고 이분뿐 아니라 다른 까치부대 선배님들도 부대와 임무 그
리고 훈련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하신적이 없읍니다.철저한 침묵뿐이셨지요 다만 무인도에서
1년에 걸친 기초훈련을 받았고 무척 배고팠다는 말씀을 가끔씩 하셨습니다.
그 연세에 실무에서도 먹거리만 보면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의 지나친 음식에 대한 집착을 보
며 나름데로 과거 훈련의 강도를 짐작하였는데 여단에 와서 다른분을 만나고야 그분도 까치
부대 출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분들은 제가 직접본것들만 해도 고공침투,수중침투,폭파, 사격 쏨씨는가히 신기에 가
까웠던 기억이 납니다.
1978년초 이분들이 국군의 시간에 고공 수중낙하와 이어 수중침투 폭파및
사격술 시범을 보이고 마지막 일부대원이 그린베레를 쓰고 나온 모습이
전파를 타고 전국에 방송됨으로서 해병대 그린베레가 시중에 널리 알려진 계기가 되
었는데 저도 이때 이분들께 얻어쓴 그린베레를 쓰고 시중을 활보할때 많은 사람들이 이때 방
송 얘기를 하며 술한잔씩을 권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또 이때 시범을 보이신 어느 중사선배
님 아나운서가 통속적으로 묻는"한겨울에 수중훈련 춥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에 뜻밖에도
" 네 춥고 무척 떨립니다.그러나 참습니다"라는 솔직한 대답을 하여 "춥지 않습니다.
견딜만 합니다"라는 이때까지 통속적인 군인들의 대답을 기다리던 아나운서
를 놀라게 만들기도 하였지요.
그러나 이분 얼마후에 후배의 폭발물을 이용한 자폭을 막다 그만 두손을 잃고 통합병원에 후
송 해병대를 떠나야 하는 불행을 맞게 되었습니다.
일전에 말씀드렸지만 다른 한분은 1977년 5월경 인천 육군부대 지역에 대 간첩요원으로 2인
1조 야간 수중침투하다 사고사 하셨는데 이분의 군인정신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까닭은야
간 수중침투시 연결한 두 침투대원간의 연결줄로 충분한 구조 요청을 할수있었음에도 불구
훈련일지라도 임무완수를 위해 연결줄을 개방 자신을 희생하며 지키려 했던 까치부대와 특수
수색대의 명예에 대한 자부심입니다.
또 1979년초 충남 홍성에 침투한 3인의 무장공비 추격이 우리 2여단 지역까지 이동 저녁6시
이후 통금이 실시되며 진도개 작전이 한창일때도
비밀리에 한강탐색을 시행하던 선배님들중 어느 한분은 미 2사단이 도하작전 훈련중 탱크를
그만 임진강에 빠트려 그걸 건지려 노력하다 못해 우리 2여단 특수수색대에 지원을 요청했는
데 이분들이 가셔서 강속 갯벌속에 파묻혀 있던 수십톤의 미제 탱크를 인양하는데 주도 역활
을 하여 미8군사령관의 표창장을 받으셨는데 중사 진급을 하지않고 전역하셨지요.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은 아래에 실제 작전을 하신 선배님의 글이 있습니다.)
또한 당시 석계호 중사님은 75~76년도부터 2여단에서 수색교육 교관을 맡으셨는데 얼마나
수중잠수 쏨씨가 뛰어나시고 열정적인(?) 교관이었는지 오늘날 벽암지의 김학로선배님처럼
당시 2여단에서 유명하셨던 분입니다.
이런 정말 뛰어나셨던 선배님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진정 우리 해병대가 오늘날에도 건재 하
는 것이겠습니다만 이분들이 모두 끝까지 해병대에서 머물지 못했던 여러 사유가 안타깝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재 창설된 초창기 청룡특수수색대는 까치부대 출신을 제외한 대원 선발을 위해 여단전체에서
(까치부대 출신을 제외 한것이 아니라 그 외 인원 충당을 여단에서 다시 뽑았다는 것)
수색교육을 받은자를 2대대 7중대에 모았다가 이중에서도 뛰어난자를 재 선발 하는 과정을
거쳐 재창설의 깃발을 높이 들었는데 초창기엔 솔직히 많은 대원들이 부대내 말썽장이들과
골통들의 집합체이기도 하였다합니다.
그러나 군 생활을 해보신분들은 다 인정하는 것이지만 이런자들을 어떻게 다듬냐는 방법과
절차에 따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막강 전투대원으로 태어나는 것을 보셨을 것이고 또 이런
대원들이 더 뛰어난 전투대원의 자질을 갖고 있었다는 걸 아실겁니다. 문제는 보통 사람들이
이들을 다듬기에 역부족인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겠지요.
-중략-
일명 MIU-MID(정확한 명칭은 모르겠습니다)(정확한 명칭은 위에서 이야기 했습니다.)
는 1사단특수수색대 하사관 중에서 뽑아 강화도 마니산 지역에서 북파에 대한 교육훈련을 받
았다 ( 1사단이나 2여단 (현 2사단) 수색대와는 별도로 운영되었슴..훗날 부대해체후 청룡특
수수색대를 재창설함)
이들은 북파공작원들의 안내와 복귀작전에 투입되었으며 제한된 북파 공작도 실시했으
며 그당시 현역으로써는 HID등의 북파부대에 차출되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684부대의 난
동사건으로 인해 마니산 부대가 해체되었고(실미도 부대로 알려진 이부대원중 해병대 출신
이 몇있었다고 합니다) 이후에 해군UDU로 백령도로 갈라지고 아니면 제대하시구 남아 있던
분들은 청룡특수수색대의 창설멤버로 남게되었다 저또한 마지막 근무한 부대에서 MIU 출신
선임하사관님을 두분 만났는데 복무기록을 보면 교육받은 내용이 너무 많아서 종이 한장을
덧붙였더군요 물어봐도 군대이야기는 안하더라구요
물런 그당시 복무기록은 MIU가 아닌 다른 부대로 되어 있더군요 하지만 다른 북파부대완
다르게 현역인지라 그리고 지원해서 간 이들이라 다들 침묵을 지키더군요 이 선임하사관님은
TV신고합니다 내무반에도 출연하신적이 있죠^^
청룡특수수색대는 예전 마니산 일대에 일명 "마니산 까치부대"로 칭하는 MIU 의 전신이다 이
MIU는 HID,UDU와 함께 당시 북파부대로 활동했었으나 불가피한 연유로 인해 이후 해체(684
유격부대-실미도 부대관련)되었다 해체이후 MIU 출신(부대장을 제외 1사단특수수색대에서
차출을 통해 전원하사관으로 이루어져 있었슴 - 사실무근)들은 해군의 UDU로 해병대의 여러
부대로 갈려지게 되었고 남아 있던 잔류인원들이 청룡특수수색대의 창설멤버가 되었다
(77.1.13창설-당시 초대 수색대장 대위 박만희)
청룡수색대를 방문하게 되었을때 부대입구에서는 이런 문구가 있다
"하늘!땅!바다! 그리고 지옥에서의 도전!"
청룡특수수색대는 중대급편재로 이루어진 그야말로 소수의 병력이다 이 부대의 상징은 "흑상
어" 모토는 간단하다 "언제 어디서든-Any time! Any where!) "마니산 까치부대"의 후예라는
상당한 자부심을 가진 이들은 해병대에서 천리행군을 최초로 실시한 이부대는
년 야외훈련만 8개월 이상 이루어져 있다
역사가 짧다는 점에서 전술적인 발전을위해 더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이곳 부대장은 지적한다
하지만 결코 기술적인 측면에서 뒤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며 오히려 더 나은 점이 많다고
한다 "저희 수색대는 기본 교육장소가 저수지 와 한강 하류 염화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일
반적으로 통상 저수지 가 바다보다 훈련하기에 더 쉬울것만 같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반대
입니다" 그는 이점에 대해서 설명하며 저수지는 일단 물속에 들어가면 시야 확보가 어렵고 한
치 앞도 내다 보이지 않는다는 데 가장 큰 문제점이 있다고 말한다 특히 염화강 같은 경우 유
속이 7-8노트로 빨라 일반인들은 들어가는것조차 엄두를못낼 정도라 한다 또한 수온이 5도
이하로 물에서 교육받아야 하는 부대원들에게는 혹독한 추위와의 싸움도 감수해야 하는 이중
고를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악조건에서도 대원들은 모든 훈련을 아니 더 강도 높은 훈련을 해내고 있다고
수색대장은 강조한다
"여하튼 적지와의 근접거리로 인해 지속되는 긴장감 속에서도 이러한 강인한 교육을 받고 있
는 우리 수색대는 그야말로 언제 어디서건 명령이 떨어지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임무완수를
위해 철저히 대비하고 있다"고 힘주어 말하는 수색대장은 이렇게 잘 따라주는 대원들에게 고
마움을 전했다
또한 "청룡수색대원들은 접적지역 즉 전쟁발발 동시에 가장 집중 포화가 예상되는 중심으로
투입되기 때문에 임무 완수를 위해선 교육훈련의 고통쯤은 감수해야 한다고 한다"
"수색대의 작전명령은 팀이 임무수행을 하는 것인데 이에 따른 팀별 교범이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있다 물런 이점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고 다른 부대들 또한 똑같습니다"라고 지적한
다 어려운 개념만을 나열하는 것이 교범이 되어선 안된다는 그의 주장은 실제 상황 속에서 습
득할 수 있는 것들로 예를 들어 교범이 세부적으로 짜여진다면 부대원들은 손쉽게 소화할 것
이며 이해가 빠르다는 것이다
청룡특수수색대의 작전환경은 거야말로 다양하다 이들의 임무가 말해주듯 교육훈련또한 기
초교육과정인 특수수색교육에서 과거 MIU부대가 사용하던 마니산 일대에서의 암벽등
반과 각종 산악침투,폭파 훈련 서측도서와 서해해상,한강하구와 염화강 일대에서의
잠수,수중폭파와 해상침투,목표타격 훈련,수색매복정찰,생존,도피,저항,탈출,회수,통
신,각종화기 조작법등 을 실시하며 강원도 00에서는 동계혹한기 일환으로 7주간의 훈련
이 이루어 지며 특전사와 해군특수전여단에 기본공수에서 고공침투훈련과 UDT교육등의 위
탁교육을 실시하며 1사단,6여단 특수수색대와 미해병 폴스리컨은 물런 특전사,해군특수전여
단과의 연합훈련을 통해 전술전기를 연마하고 있다
이부대 이00 하사의 경우 8개월 이상의 야외훈련으로 인해 학교를 잘가지 못해 항상 교수님
들께 미안한 맘 가지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요즘은 해룡지역에서 청룡 흑룡이 통합수색교육을 받고 통합 동계특수전 훈련을 받기때문에 교육기간이 줄었다. 동계는 7주에서 *주 , 수색교육은 16주에서 *주 그리고 청룡은 해룡에서 교육을 받고 오면 다시 바로 인명구조교육과 스쿠바 재교육을 다시하고 마니산으로 늑대훈련을 들어간다고 합니다.)
끝으로 부대장은"부대에서 고등훈련을 이수한 베테랑 하사관 자원을 잘 활용하여 이를 지휘
체계에서도 고급인력의 생생한 현장 체험을 수색대원들에게 전파하여 개선점을 찾아 이끄는
체제가 되었을때 작전 능력은 배가 됩다 그리고 해병대의 하사관 TO관련해서 베테랑 하사관
들이 매년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가게 되는데 이또한 해병대가 풀어야 될 과제 이기도 하다"라
고 전했다
윗글중 마니산까치부대(MIU : Marine intelligence unit)의 구성원을 1사단 특수수색대 중 하사관으로 뽑았다고 하는데 전혀 사실무근이며 그 당시 까치부대원들은 1사단 특수수색대와 임무와 작전 구성원등이 전혀 별개인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잘못된 글이 더 이상 유포되지 않도록 수정되길 바랍니다 [2004/08/29]
안녕하세요 이글을 읽다보니 불연듯 옛생각이 나네요,저는 마니산 까치부대에 있다가75년말에 이 첩보부대가 해체되어 당시 2여단에 배속되어 있다가77년도에 박만희 대위님과 석계호 중사님과같이 2여단 특수수색중대를 창설한 유재천 하사 입니다,당시 미군탱크도 (임진강에서)제가 건져 올렸지요.이글을 읽고나니 감회가 [2004/08/29]
새롭네요,ㅎㅎㅎ오늘 우리 마니산첩보부대에 있던 옛동지를 만나는 날이었습니다,이자리에서 김동철님이 이곳을 알려주워서 집에 오자마자 이곳으로 들어왔지요.이곳을 오니 마치 우리집에 온것같은 느낌입니다.저는 80년1월에 제대하여 지금은 행복한 가정(1남1녀)을 꾸미며 살고 있습니다,오늘부터이카페에 많은 분들이 알고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희 해병 상륙공작대 전국4차모임을 하는 사진을 몇장 찍었습니다,M.I.U#마니산 방에 올려놓겠습니다,그리고 카페지기님과 김영빈 상무님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모습을보아주세요,우리의 동지 모습을요.다음에는 더좋은 글을 올리겠습니다. 충~~~~~~~~~성! [2004/08/29]
마니산 까치부대원들을 1사단이나 2여단(현 2사단) 특수수색대에서 뽑은것은 아니고 부대 해체후 2-3명은 해군 UDU,20명정도중에서 한두명을 제외한 나머지는1사단 해병대 일반 보병 부대로 각기 흩어졌으며 나머지 인원 12~3명 정도가 2여단(현 2사단) 청룡특수수색중대를 재창설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임진강에서 미군탱크를 건진대원은 석계호 중사님과 저 하사 유재천 입니다.이로 인하여 여단 본부에서 저희들에게 미군2사단 표창창과 메달을 수여 했었지요,그당시 목숨을 걸고 약5일동안 고군분투 하여 탱크(당시 최신예장비,M60A1이라는 첨단무기 였지요) 당시,미군에서는 한국군 목숨을 100명을버려가면서도 필히 건져 올리라는 엄명이 떨었졌고, 이를 우리해병2여단에서는 혼쾌히 건져 올릴수있다고 판명되어 작업을 저희들한태 2여단의 명예를걸고 목숨을 걸고 건지라는 지시를 받고 저희들은 기필코 탱크를 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