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소원 시인의 시집
ㅡ『슬픔만큼 따뜻한 기억이 있을까』
■ 시집 속의 시 소개
나는 왼쪽이다 / 박소원
어디서부터 내 몸의 오른쪽과 왼쪽이 우회도로를 걷기 시작했을까 어느 날 목 디스크로 인한 근육통이 왼쪽에 마비증상으로 오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그늘을 지날 때는 절임증세가 엄살처럼 더 도졌다
비는 집중적으로 내리다 한순간 눈으로 바뀌었다 나이테를 그리며 백년 만에 내리는 폭설로 차량통행이 통제되고 아래지방으로 내려갈수록 길이 막혔다 제설차량끼리 충돌하는 뉴스를 보며 사람들은 외출을 줄였다
기온이 수시로 바뀌고 모든 안부는 한쪽으로 쏠렸다 물리치료실 치료사는 지극한 손길로 전기치료를 완수해 갔으나, 그림자는 균형을 잃었다 예각으로 기운 왼쪽이 늘 앞서서 걷는다
사람들은 왼쪽의 안부로 나의 근황을 물었고 나는 어느새 왼쪽이 되었다 며칠 전 세 번째, 근육통으로 정형외과 병실침상에 침목처럼 다시 누웠을 때 의사는 십년 이 훌쩍 지나서야 처음으로 오른쪽의 안부를 물었다 나의 반쪽 당신, 거기에 아직도 있는가
온몸이 귀가 되어 / 박소원
아버지 집 대문 틈에 손수건 한 장 남몰래
끼워두고 돌아오던 길 나는,
꿈쩍 않는 높은 침묵을 따라
마을 끝 공동묘지까지 걸어간다
무덤과 무덤사이에 더 작은 무덤하나 베고
온 몸을 지렁이처럼 끌어 모은다
뗏장을 건들고 가던 바람이
섬뜩한 고요에 끼여 펄럭이는 소리
할미꽃이 허리를 곧추 세우는 소리
무덤과 무덤사이를 건너다니는
흰나비의 날개소리
작은 벌레들, 엉겅퀴 꽃에 붙어 말라죽는 소리
이마에 붉은 인장을 찍는 여름 볕의 발자국 소리
우물처럼 긴 두레박을 내려뜨리고
죽음과 죽음사이에서 삭은 뼈를 길어 올리는 소리
미나리 제비 과의 묘화가 겹꽃을 펴는 소리
내 몸은 구멍마다 묘지의 소리로 채워지고
뒤늦게 저녁 짓는
어머니의 마른 솔가지 태우는 소리에
나는, 더럭 겁이 나서 몸을 일으킨다
죽음 위를 천천히 지나가는
어둠의 발자국소리를 그믐달의 발자국소리를
가만가만 세고 있는 커다란 귀 한 짝,
어둠을 털고 어슬렁 공동묘지를 빠져 나간다
능소화야 능소화야 / 박소원
바람은 높은 곳에서부터 거래를 트기 시작했다
몸 군데군데 죽은 핏물이 뭉치던,
지붕까지 뻗어 올라 온 줄기의 흡반들이
정체불명의 바람 앞에서 뜯겨진다
허공의 발자국 소리가 담장 속까지
파고들어 흘러흘러 허공 길을 낸다
긴 허공길이 밑뿌리까지 닿았다
긴 뿌리가 들썩이기 시작하자
거추장스러운 비밀처럼
불안한 꿈처럼 살아내기 위해 꽃들이 제 얼굴을
한 묶음씩 쥐어 뜯어낸다
바람의 지뢰, 어둠의 지뢰위에
다시 실패하라 더 실패하라*
내 몸이 짐이다 팔순 넘으신 노모처럼
푸르딩딩 스스로 몸줄이며
남모른 거래로 몸 가볍게 버티는 시간들
얼결에 휘갈겨 쓴 합의서가 몇 백 장인가
민박집 마당에서 뿌리가 굵어질수록
능숙해지는 질 나쁜 그동안의 거래는
쉽게 몸에 들러붙어
언제나 나를 버리게 하는 것은 나였다
밤이 새도록 빠른 리듬에 맞추어 추는
경쾌한 댄스댄스
무더운 아침이 마을입구까지 들이 닥친다
나는 너를 모른다
아침이 오기 전에 세 번이나 나는 나를 부정한다
화장실에 가기도 무섭던 밤이 경쾌한 리듬에 맞추어
마당 밖으로 신사처럼 물러나고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
새들은 백리 밖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보다 혹독한 밤이면 어떤가
보라!
태풍이 지나간 바람이 떨어진 꽃들에게도
제각각 날개를 달아주고 있지 않는가
* 진은영의 시 '나에게' 인용된 Samuel Nobow On (1989)
이별법 / 박소원
손금이 다 닳은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 안에서 금과 금이 제 운명을 달리하는구나 내리막길에서 고개를 돌리고 슬쩍 옆길로 새어버린 운명선, 손금의 틈새마다 스며있는 기장 미역 냄새. 타지에서 자신을 탕진한 아버지는 끝내 연락이 닿지 않고 낮은 담장 아래로 빙 둘러 여름 볕이 돌고 당신이 심어 놓은 장미꽃이 한 송이 한 송이 각혈을 하며 피어나던 날, 황소자리 물고기자리가 욱욱昱昱 해독할 수 없는 언어를 타전하는 밤 중환자실 복도에서 내 어깨의 불 주사 자국이 유독 욱신거린다 보름이 넘도록 달이 뜨지 않는다 누구의 표정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장미꽃은 지고 다시 피지 않는가 미안하다 이것밖에 해줄 게 없구나, 온종일 산모 밥을 짓고 끼니마다 미역국을 끓이고 신생아 푸른똥이 묻은 기저귀를 빨고 열흘 두통 끝에 저녁밥을 죄다 토하신 어머니 중환자실 침대위에 앙상한 시간처럼 쓰러져 있다 눈을 떠 보세요 당신의 마지막 패를 이제는 보여 주셔야죠?
미안하다
이것밖에 해줄 게 없구나
전생에서 네가 나를 이렇게 버렸으니,
나도 너를 이렇게 버릴 수밖에 없구나
■ 생의 비극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초월을 위한 노력
이 승 하 (시인․중앙대 교수)
말로써 절을 지을 수 있는 것이 시詩라고 했다. 그 절에서 우리는 들끓는 욕망을 순화시키고 인생살이가 주는 지긋지긋한 고통의 뜻을 깨닫는다. 말로써 지은 절에서 우리는 생과 사의 비의悲意를 탐구하고 언젠가 나를 찾아올 죽음의 사신을 맞을 준비를 한다. 종교는 죽음의 의미를 우리에게 말해주지만 시는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의 이유까지 말해준다. 시의 가장 고결한 가치는 감동에 있다고 하는데 감동이란 무엇인가. 느낄 감, 움직일 동,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을 다룬 몇 줄의 시를 읽고 감동받을 때, 아! 나 지금 이렇게 살아 있구나 하고 실감하는 것이다. 때로는 우리는 시를 읽다 시인의 감정 선에 동화되어 전율하기도 한다. 이때, 독자는 악기이고 시인은 연주자이다.
문학의 제 장르 중에서 시가 으뜸의 지위를 상실한 것에 대해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시인은 많은데 시집은 안 팔리고, 시는 쏟아져 나오는데 뇌리에 남는 시가 없다고 하는 말도 들려온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시인들은 밤을 밝히며 시를 쓰고 있다. 시집이 날개 돋친 듯 팔리면 이미 그것은 시집이 아니라 상품이다. 우리는 한 시인의 사색의 결정체인 시를, 모국어의 정수인 시를 흡사 카타콤에 숨어든 경배자들처럼 숨어서 읽어보아야 한다. 조용히 음미하고 느껴보아야 한다.
동서양 공히 시의 역사는 다른 장르의 역사를 압도한다. 『시경詩經』에 수록된 305편의 시는 2500~3000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다. 즉, 3000년의 시간을 시는 지탱해 왔다. 서양 최초의 서정시인 사포가 우리에게 들려준, 사랑의 환희와 이별의 아픔을 담은 노래는 260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지구상 그 누군가가 읊조리며 공감한다. 사랑의 감정이란 것이 시대가 바뀐다고 해서 바뀔 리가 없는 것. 하지만 시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의미를 전달하면서도 의미를 넘어서는 오묘한 것이다. 애매성과 다의성은 현대시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박소원은 2004년에 등단하여 2010년에 첫 번째 시집을 묶으려고 한다. 「네 사소한 이름을 부르고 싶다」 등 등단작부터 유심히 봐 온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이 세상에 펴내는 시집의 첫 독자가 된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한다. 한 시인의 수년 동안의 남모를 자아 성찰과 자기 점검의 기록을 먼저 열람하여 해설을 쓰기란, 가히 설레고도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63편 시에 대한 소감을 전부 쓸 수는 없다. 내 마음에 파장을 일으킨 10여 편의 시에 대한 느낌을 지금부터 적어볼까 한다.
시집의 제일 첫머리에 놓인 시는 아주 중요하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도 첫인상을 중요시하고 첫눈에 반하면 뭐에 씐 듯 넋이 나가버리지 않던가.
백구의 목줄을 내게 쥐어주고
슬슬 잡아당기라고 아버지가 눈짓을 하였다
내 손끝에 힘이 들어가고
오줌 얼룩이 든 마포 자루 속으로
두 눈 껌뻑이며 백구가 기어 들어갔다
댓잎 뒤척이는 소리에도
앞발을 치켜들고 커 엉 컹, 짖던
민감하게 짖던 그도
입가에 완벽한 체념을 물고,
ㅡ「손맛」 전반부
시골에서 키우는 개는 집을 지켜주는 경비견의 역할보다는 복날 식용으로 주인댁에 봉사(?)하는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어른들은 키운 개를 내다팔기도 하고 잡아먹기도 하지만 아이들은 그때 정든 친구 하나를 잃게 된다. 아이들이 개를 잃고 입은 마음의 상처는 오래 간다. 이 시의 내용은 아마도 시인의 실제 체험이었을 공산이 큰데, 정든 친구의 생명을 빼앗는 일에 가담한 기억은 지금까지도 큰 상처로 남아 있나 보다. “입가에 완벽한 체념을 물고” 있던 백구에 대한 가슴 아픈 인상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줄기차게 따라다닌다.
백구의 목줄은
내 손끝에서 수십 년을 떨고 있다
아무리 늙어도 손맛처럼 느껴지는 이 떨림
이 떨림 속으로,
아직도 나는 내 목줄을 따라다닌다
수완이 좋은 그는 어디에서
또, 뒷거래를 트고
슬슬 내 목줄을 당기는가 끈적거리는 손맛이 느껴진다
ㅡ「손맛」 후반부
백구의 목을 죄었던 목줄은 어느덧 내 목줄이 되어 나를 끌고 다닌다. 그래서 “나는 내 목줄을 따라다니”는 것이다. 민감하기도 했지만 수완이 좋은 백구였다. 백구는 식용으로 처리되었겠지만 그때의 기억이 내 목줄을 죄고 있어서 ‘끈적거리는 손맛’이 지금도 느껴지는 것이다.
이 시를 통해 시인은 생의 비극성에 대한 때 이른 깨달음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음을 말해주려 한 것 같다. 어찌 보면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비극의 탄생이 아닌가. 생의 비극성에 대한 인식은 박소원 시인의 첫 시집을 떠받들고 있는 가장 큰 기둥이다. 「검은 잉크 1」 같은 시를 봐도 시인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이 ‘희로애락’ 중 ‘희락喜樂’보다는 ‘노애怒哀’에 가까운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어릴 때 백구의 죽음에 자신이 가담했던 것에 대한 죄의식이 아직도 강하게 작용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하지의 햇빛 한 올이나
그믐날 달빛 한 조각도 바람 반 토막도
뚜껑 안을 기웃거리다가 한 번 발목을 빠트리면
블랙홀처럼 천형 같은
암흑의 내면을 빠져 나가지 못한다
밖에서 단색들을 움켜쥐고 너무 고독한 걸까
한 방울, 반말처럼 튕겨나가는 불손한 태도들을
그러니 가끔씩 용서해 주시라
ㅡ「검은 잉크 1」 부분
검은 잉크는 글을 쓰는 데 필요한 것, 즉 내 마음을 풀어내는 데 쓰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시인의 시론으로 봐도 될 터인데, 이번 시집은 확실히 환희의 송가가 아니라 비애의 탄식이다. 하지만 검은 잉크로 그려낸 세계는 결코 검지 않다. 다섯 색깔, 일곱 색깔, 열 색깔…… 총천연색이다. 이 시에 동원된 죄목․형벌․천형․암흑․고독․불손․용서 등의 시어로 미루어보건대 「검은 잉크 1」은 희망의 노래로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망의 노래는 아니다. 능소화를 노래하고 있는 듯하지만 일종의 자화상으로 읽히는 「능소화야 능소화야」를 보아도 시인의 비극적인 세계관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이런 시에서는 삶을 고해苦海로 인식하는 불교적 세계관을 느끼게 되지만,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볼 때도 원죄의식과 속죄를 논외로 칠 수 없다. 시인은 바로 이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시작행위란 것이 어찌 보면 용서하고 용서받는 과정인 것.
기독교에서는 인간이라면 너나없이 하느님 앞에 죄인인지라 하느님을 믿고 진정한 참회를 해야지 하느님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인간으로 태어나 살아가게 되었을 때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시를 많이 해야 윤회의 업에서 헤어날 수 있다고 한다. 그럼 시인 박소원은 왜 이렇게 비탄에 잠겨 있는 것일까.
긴 뿌리가 들썩이기 시작하자
거추장스러운 비밀처럼
불안한 꿈처럼 살아내기 위해 꽃들이 제 얼굴을
한 묶음씩 쥐어 뜯어냈다
바람의 지뢰, 어둠의 지뢰 위에
다시 실패하라 더 실패하라
내 몸이 짐이다 팔순 넘으신 노모처럼
푸르딩딩 스스로 몸 줄이며
남모른 거래로 몸 가볍게 버티는 시간들
얼결에 휘갈겨 쓴 합의서가 몇 백 장인가
ㅡ「능소화야 능소화야」 부분
인용한 부분에 나오는 “팔순 넘으신 노모처럼”이나 다른 부분의 “거추장스러운 비밀처럼”, “불안한 꿈처럼” 등 직유법이 구사된 부분을 보면 시인을 괴롭히는 것이 생로병사에 따른 생의 비극성임을 바로 알 수 있다. 이 세속사회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산다는 것 자체가 비극이 아니겠는가. 시인이기에 그것을 더욱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일 듯. 시인 박소원은 자신에 대한 믿음은 약하지만 생로병사에 대한 인식은 강하다. 시인은 내 몸이 짐이라고도 하는데 “언제나 나를 버리게 하는 것은 나였다”, “나는 너를 모른다”, “아침이 오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부정한다”고 하면서 자신에 대해서 자주 회의하고 있다.
밤이 새도록 빠른 리듬에 맞추어 추는
경쾌한 댄스 댄스
무더운 아침이 마을 입구까지 들이닥친다
나는 너를 모른다
아침이 오기 전에 세 번이나 나는 나를 부정한다
화장실에 가기도 무섭던 밤이 경쾌한 리듬에 맞추어
마당 밖으로 신사처럼 물러나고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새들은 백리 밖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ㅡ「능소화야 능소화야」 부분
밤이 가면 아침이 오게 마련, 아침이 되었을 때 시인은 희망의 실마리를 찾는다. 밤에 세 번이나 자신을 부정했지만 아침이 오자 이렇게 말한다. “이보다 혹독한 밤이면 어떤가” 하고. “태풍이 지나간 바람들이 떨어진 꽃들에게도/ 제각각 날개를 달아주고 있지 않은가” 하고. 생의 비극성을 누구보다 깊이 깨닫고 절망했지만 동이 터올 무렵, 시인은 비극의 우물에 몸을 던지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비극의 늪지대 혹은 절망의 진흙탕 길에서 비상하려는 노력은 “누구에게나 말할 수 있는 고통으로도 자주 한숨을 날리던 그의 눈빛이 짓푸른 물 위에서 솜사탕처럼 달게 녹았다”(「봄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 같은 시구를 통해서 엿볼 수 있다. 내 몸은 짐이기도 하지만 길이기도 하다. 지렁이를 보라. 자동차 바퀴에 신음도 없이 터져버리기도 하지만 고행의 수도승처럼 부단히 길 떠나는 존재가 아닌가. 지렁이를 노래하면서 시인은 생의 비극성 앞에서 침몰하지 않고 자기 구원을 달성하기 위해 길을 찾아 나선다.
아무리 뒤돌아보아도
한번 떠나온 길은
내가 결코 갈 수 없는 길이다
비가 그치고 달궈지기 시작하는 아파트 주차장에서
방향을 잃고 벌겋게 익고 있는 몸
내 몸이 내 길이다
ㅡ「지렁이」 부분
지렁이로 태어나 차에 깔려 죽는 것도 생의 비극성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 인간도 백화점에 물건 사러 갔다가 백화점이 무너져 죽기도 한다. 버스를 타고 출근하다 다리가 무너져 익사하기도 하고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추락사하기도 한다. 타인의 실수로 물에 빠져 죽고 불에 타 죽는다. 이 나라에서는 교통사고 사망자도 많지만 그에 못지않게 자살자도 많다. 하지만 엉금엉금 기어서 가건 마라토너처럼 달려서 가건 저마다의 험한 인생행로를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가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내 몸이 내 길”이라고 하는 대목을 보니 이 시의 대상은 지렁이가 아니라 우리 인간이다. 비극에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좌절하고 절망하지만, 또다시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럼 이번에는 시인이 직간접으로 체험한 비극의 양상들을 한번 살펴보자.
내 입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세 사람의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뇌졸중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와
태어나서 삼 개월을 살았다는 언니와
마흔에 목매달아 죽은 내 친구와
내 목소리 속에 또 다른 목소리로 섞여 나온다
ㅡ「아, 아」 부분
통 소식을 안 주는가
지금도 이 환자 저 환자 서랍을 뒤져
입원실을 발칵 뒤집어놓고
뒤꼍 잎 지는 나무 아래에서
훔쳐낸 담배를 남몰래 태우고 있는지
오십이 넘어서도
똥오줌도 못 가린 채
늦가을 나무 차고 오르는 물소리를
혼자서 쓸쓸히 엿듣고 있는지
ㅡ「용영이 형」 부분
두 시의 사연이 사실인지 허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비극은 우리 주변에도 첩첩이 널려 있고 겹겹이 쌓여 있다. 이런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생의 비극성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자가 바로 시인 박소원이다. 시인은 죽은 세 사람의 목소리를 대신하여 발하기도 하고, 더한 비극 앞에 말문이 막혀 “참혹한 전쟁에 패한 병사처럼/ 거칠고 지친 목소리”로 아, 아, 부르짖기도 한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용영이 형에 얽힌 사연도 참 딱한 노릇이다. “찬 이슬이 내리는 한로가 다가오고/ 이 가을에도 동공이 풀린 형의 눈동자에/ 여전히 드들강의 그 흐린 물빛이 반짝이는지”로 끝나는 이 시에서는 시인이 슬픔에 젖어 있지 않고 그 슬픔을 애이불비哀而不悲의 차원으로 승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보고 싶다 용아/ 땅바닥에 헌 운동화 끝으로/ 이름을 썼다 쓱쓱 지운다”(「이름 하나 외우며」)는 화자가 자식을 잃고 쓴 시인 듯하다. “용아, 먼지 낀 유리창에 대고/ 지나가는 허공에 대고 너의 이름을/ 또박또박 눌러 쓴다”란 대목에 이르면 정지용의 「유리창」이 떠오른다. “서로 낯선 얼굴이 되어서도/ 허공에서 사라지는 이름 한 송이/ 아직도 눈이 아프게 환하다”가 시의 결구인데 참척慘慽의 슬픔을 억누르면서 그야말로 잃어버린 자식의 이름을 또박또박 눌러 쓴 어머니의 암담한 심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가족사도 시인의 비극적 세계 인식에 한몫을 한 것 같다. 일부는 허구일 테지만 한편 생각해보면 이 나라 수많은 집안의 슬픈 풍경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마침내 생활비를 끊자
어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서울행 기차를 탔다
ㅡ「실어증」 부분
어머니의 야윈 목을 누르던
두터운 아버지의 손도 정말
용서할 것 같다
병상의 얇은 시트 속에서 두 발이
새알처럼 따뜻해지고
파리한 입술이 동백꽃같이 붉어진다
ㅡ「투석」 부분
아버지를 황토 흙에 묻은 오월梧月인데요 형은 요양원 독한 약 탓에 위가 망가져 죽밖에 못 먹는다는데요
ㅡ「고깃집에서」 부분
가족이 등장하는 이런 시를 보면 화자의 아버지는 때때로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는데 가장의 의무를 팽개치고 떠돌다가 결국 병에 걸려 임종을 맞이한다. 화자의 어머니는 생활전선에 나서야 했고 집안의 장남은 정신지체아로 태어나 어머니와 누이의 가슴에 더욱 큰 못을 박는다. 가족 상호간의 갈등은 가족이기에 끊을 수가 없다. 친구간이 또는 부부지간이라면 갈라서면 그만이지만 부모 형제는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는 동아줄로 엮여 있다. 시어 중 눈길을 끌어당기는 것이 있는데 ‘아버지 집’이다.
아버지 집 대문 틈에 손수건 한 장 남몰래
끼워두고 돌아오던 길 나는,
꿈쩍 않는 높은 침묵을 따라
마을 끝 공동묘지까지 걸어간다
무덤과 무덤 사이에 더 작은 무덤 하나 베고
온몸을 지렁이처럼 끌어 모은다
ㅡ「온몸이 귀가 되어」 부분
방문을 닫고 도란도란 밥 먹는
아버지 식구들의 그릇 부딪치는 소리
문 밖에서 접시꽃같이
표가 나게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ㅡ「붉은 길」 부분
장교복이 멋들어진 네 아버지, 퇴근길에 졸졸 따라오는 처자가 한둘이 아니었어야 조근조근 내 애들 애비라 돌려보냈던 거라 딴살림 차린 아버지는 이복동생을 넷이나 낳았다는데 어머니의 긴 기다림이 (곤혹스럽다)
ㅡ「즐거운 어머니」 부분
이 세 편의 시를 종합해보면 장교였던 화자의 아버지는 딴살림을 차렸다. 그 집에서는 배다른 형제들 넷이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화자는 아버지가 밉고 어머니가 불쌍하다. 아버지 집 대문 틈에 손수건 한 장 남몰래 끼워두고는 공동묘지를 찾아가 온몸을 오그리고 누운 아이를 상상해보라. (손수건은 어머니의 눈물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이보다 더 비극적일 수 있을까. 아버지에 윀 눈원망, 자신의 처지에 윀 눈슬픔, 그리고 환멸감, 수치심, 증오심, 그리움 등이 뒤범벅이 된 채 어린 화자는 자기처럼 어린 아이의 무덤을 베고 누워 있다. 시인이 직접 체험 눈것이든 상상력의 산물이든 이 장면은 모든 비극의 총화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몰락한 집안의 비극을 지워내는 병 깊은 그와 나는 퇴색한 앨범과 남루한 옷들을 모두 두엄더미 위로 날라”(「울음을 손질하다」) 불태운다. 즐거운 추억과 가슴 아픈 기억 모두를 불에 태운다는 것은 비극에 함몰되어 허우적거리지 않고 어떻게든 이 삶을 감당하겠다는 다짐의 상징적 표현이다. 지렁이도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지 않는가. 이번 시집에는 오른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시적 화자가 자주 등장한다. 신체상의 말 못할 장애도 비극이리라.
병풍 뒤에서 향냄새를 맡고 있는
너를 둔 채,
나는 간신히 집으로 돌가갔다
난청이 심한 오른쪽 귀를 기울이며
우리는 제각각 힘주는 곳으로 멀어졌다
도시의 저녁은 아파트 유리창에
붉은 손금을 문지르며 얼마나 속살거리는지
어둠도 힘닿는 곳으로 뿌리를 내렸다
ㅡ「그 이별에 대한 변명」 제1연
화자는 오른쪽 귀가 난청이 심하다고 했는데 그 원인에 대해 말해놓은 시도 있다. “어느 날 목 디스크로 인한 근육통이 왼쪽에 마비증상으로 오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그늘을 지날 때는 저림 증세가 엄살처럼 더 도졌다”(「나는 왼쪽이다」)고 한 시구는 사실에 기초한 것이 아닐까. 육신의 아픔이 왕왕 정신까지도 불구로 만들지만 시인은 이 세상 모든 슬픔을 따뜻하게 감싸 안는다. 아래 인용하는 시는 이번 시집의 모든 시를 대표할 수 있을 만한 것이다.
사람마다 상처가 서로 다르듯이
상처를 저장하는 저장고도 다르다
나는 울음이 터질 때마다 가슴을 치던
두 주먹에 상처들을 저장하였을까
(……)
그 먼 사막의 밤을 뚫고 가는
슬픔의 저장고 하나
반짝반짝 불을 켜고 답장을 보내왔다
멀리서 생각해도 괜히 가슴이 저릿저릿한
당신, 슬픔만큼 따뜻한 기억도 없다
ㅡ「슬픔만큼 따뜻한 기억이 있을까」 부분
그렇구나, 상처도 아름다울 수 있고 슬픔도 따뜻할 수 있다는 것을 이 한 편의 시를 통해 깨닫게 된다. 시인은 하루하루 세속도시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가면서 비극의 연못 속으로 빠져들지만, 그곳에서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시의 꽃을 피워 올릴 수 있다.
어둠과 죽음의 쌍생아를 잉태 중인
유리창에 기대어 나는, 누구도 훼방할 수 없는
사람들 속에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힘
내 편들이 척척 들어앉는 소리를 듣고 있다
ㅡ「죽음 한 접시」 끝부분
‘내 편들’이 누구일까. 화자의 가족과 친구, 동료와 문우 등을 떠올려볼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시가 아닐까. 시를 통해서 시인은 자신을 구원하고 생의 비극성에서 헤어날 수 있었던 것이리라. “국어선생도/ 서예가도 뭣도 못 되었지만 그러나/ 나는 이름도 모르는 시인이 되어/ 스스로 반성을 하고 스스로 부끄럽다”(「너와 나」)고 한다. “세상에 나를 막 꺼내놓았네”로 끝나는 시 「세상에 그녀들을 막 꺼내놓았네」를 보니 시(그녀)를 꺼내놓는 과정에서 시인 자신을 꺼내놓았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이제 첫 시집을 낸다. 앞으로 큰 시인이 되려면 이런 점은 유의해 주었으면 하고 요망사항을 첨부한다. 언어의 간결미 추구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을까. 말이 많은 시는 운문정신에 위배되는 경우가 많은데 불필요한 수식까지 주렁주렁 달고 있다면 묘사가 아닌 설명에 치우치게 된다. 그리고 초점이 안 잡히는 시가 간간이 보인다. 그 시 한 편으로는 해석이 안 되는데 다른 시들과 연관을 지으면 대충 납득이 되는 시들이 있다. 시란 주저리주저리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은유나 상징화를 통해 암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독자와 소통을 해야 하므로 나만 아는 독백의 차원에 머물지 말았으면 한다. 또 한 가지, 문장을 길게 쓰는 습관이 있다. 간결미를 추구하면서도 리듬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기를 바란다. 시마다 음악성이 부족한 것도 해결해야 될 점이라고 생각한다.
시를 통해 생의 비극성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초월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온 박소원 시인의 조촐한 첫 시집 앞에서 해설자는 가슴에서 우러나는 박수를 친다. 이제 비로소 시인은, 출발선을 막 떠난 것이다.
박소원 시인
전남 화순 출생
경희사이버대 문창과, 단국대 대학원 문창과 졸업(석사)
《문학·선》등단
'시산맥' 회원
시집『슬픔만큼 따뜻한 기억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