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
2. |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
3. |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
4. |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찌라도 변치 아니하며 |
5. |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
⑤ 잠언 15장
○ 지혜로운 혀와 미련한 입 | |
1. |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 |
2. |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
3. |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
4. | 온량한 혀는 곧 생명 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
5. |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니라 |
6. |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어도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되느니라 |
7. |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하여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정함이 없느니라 ![]() |
8. |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
9. | 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의를 따라가는 자는 그가 사랑하시느니라 |
10. | 도를 배반하는 자는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요 견책을 싫어하는 자는 죽을 것이니라 |
11. | 음부와 유명도 여호와의 앞에 드러나거든 하물며 인생의 마음이리요 |
12. | 거만한 자는 견책 받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며 지혜 있는 자에게로 가지도 아니하느니라 |
○ 마음의 즐거움에 대한 보답 | |
13. |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
14. |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요구하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즐기느니라 |
15. | 고난 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 ![]() |
16. |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 |
17. |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 |
18. |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
19. |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 |
20. |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 |
○ 지혜로운 가르침들 | |
21. | 무지한 자는 미련한 것을 즐겨하여도 명철한 자는 그 길을 바르게 하느니라 |
22. |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파하고 모사가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 |
23. |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 |
24. |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 있는 음부를 떠나게 되느니라 |
25. |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 과부의 지계를 정하시느니라 |
26. | 악한 꾀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라도 선한 말은 정결하니라 |
27. | 이를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나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사느니라 |
28. |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 |
29. |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
30. | 눈의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 |
31. |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 있느니라 |
32. | 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 |
33.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
� 오늘의 역사
① 광복절(1945) : 강제로 일본의 식민지로 병합된 우리 나라는 1945년 오늘, 일본이 연합국과의 전쟁에서 지게됨으로써 36년 만에 국권 을 되찾게 됐다.
해방된 우리 나라는 38선으로 남과 북으로 갈려 통일을 못하고
1948년 대한 민국의 독립을 선포, 한반도에서 유일한 국가로 유엔의 인정을 받았다.
아 ! 감격의 8.15 !
그날
펄럭이는 태극기를
누가 감격없이
바라 볼 수 있었으랴!
온 국민이 한 마음 되어
독립만세를 외치며
나라를
도로 찾은
감격으로
가슴이
부풀었다.
② 일본 무조건 항복(1945) : 1945년 오늘 !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히로히토 일본 국왕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합니다.
공식 항복문서는 18일이 지난 9월 2일 미국 군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조인됩니다.
만 6년여에 걸친 제2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끝나는 순간입니다.
일본의 항복을 받아들인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승자와 패자 모두 밝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자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합니다.
일본의 항복으로 우리나라는 35년간의 일본 압제로부터 벗어나 해방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8월 20일과 25일 우리나라에 진주 소련군과 미군이 38도선을 경계로 우리나라를 분할 점령하겠다고 발표합니다.
미군과 소련군의 주둔으로 해방의 기쁨이 우리 민족에게는 분단의 슬픔으로 바뀝니다.
③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 : 해방 3주년을 맞이한 1948년 오늘 공식적인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됩니다.
3년간의 미 군정을 끝내고 이승만 박사와 이시영 선생을 정.부통령으로 한 제1공화국이 탄생한 것입니다.
남북이 분단된 상태에서 출발한 남한만의 단독정부 !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부여받습니다.
정부가 수립되고 1년이 지난 1949년 오늘 !
정부 수립식이 거행됐던 중앙청에서는 정부 수립 1주년 기념식이 성대하게 열립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의 단결과 반공을 강조하는 기념사를 낭독합니다.
******대한민국 출범 : 1945년 8월 14일 정오,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 선언으로 제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었고, 다음 날인 8월 15일 한국이 독립을 맞이했다.
그러나 '자주 독립'을 성취하지 못함으로서 독립과 동시에 북위 38도를 경계선으로 남과 북에서 각각 미국과 소련이 군정이 실시되었다.
1946년 12월 이승만이 미국을 방문,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추진한 결과 그 해 9월에 한반도 문제가 유엔에 정식으로 상정된다.
국내에서도 이승만 중심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한민당과 연대하여,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추진하는 가운데 11월 유엔 감시 하에 총선거 실시라는 안이 가결되었다.
이에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통일 정부 수립을 촉구했다.
그러나 1948년 5월 10일 유엔의 감시하에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었으며, 788만 전체 유권자 가운데 90.8%가 참여한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86석, 한국민주당 38석, 대동청년당 12석 등의 의원이 선출되었다. 5월 31일 제헌의회 개원, 7월 17일 헌법 공포에 이어, 7월 20일 국회에서 실시한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었다.
④ 국가 원수 저격 사건, 육영수 여사 피살(1974) : 1974.8.15.
10시 23분 !
서울 국립극장의 제29회 광복절 경축식전에서 북한 공산집단의 지령을 받은 하수인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한 사건.
대통령은 무사했으나 부인 육영수 여사가 별세, 범인은 현장에서 체포된 후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 당하였다.
1974년 오늘 !
광복 29주년 기념식이 거행되던 국립극장 !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북한의 지령을 받은 문세광의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납니다.
머리에 총탄을 맞은 육영수 여사는 곧바로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져 5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았지만 끝내 숨을 거둡니다.
당시 나이 마흔 아홉 !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교직생활을 하다가 스물여섯살이 되던해인 1950년 당시 박정희 중령과 결혼했던 육영수 여사 !
대통령 부인이 된 후 육여사는 적극적으로 육영사업과 적십자 활동 등 각종 사회활동을 벌여왔습니다.
육영수 여사의 유해는 8월 19일 국립묘지에 안장됐습니다.
**** 8·15대통령저격사건(八一五大統領狙擊事件) : [요약] 1974년 8월 15일 서울특별시 국립극장에서 거행된 광복 제29주년 기념식에서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文世光)이 대통령 박정희(朴正熙)에게 권총을 발사한 사건.
언제 1974년 8월 15일
어디서 서울 국립극장
누가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
무엇을 대통령 박정희
어떻게 권총을 발사
왜 암살
[본문] 오전 10시 23분, 광복절 경축사를 낭독하던 대통령을 향하여 청중석 뒤에서 문세광이 뛰어나와 권총을 발사하였다.
다행히 총탄이 빗나가 대통령은 연설대 뒤에 몸을 피하여 무사하였으나, 이어 발사한 제2탄이 단상에 앉아 있던 대통령 부인 육영수(陸英修)의 머리에 명중하였다.
범인은 계속 2발을 발사, 합창단의 한 여학생이 유탄에 맞아 절명하였다.
범인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육영수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급송되어 5시간 이상의 응급수술을 받았으나, 오후 7시 사망하였다.
범인 문세광은 재일조총련계 한국교포 2세로서 일본식 이름은 난조 세이코[南條世光]였고, 일본인 요시이 유키오[吉井行雄]라는 이름의 여권으로 입국한 자였다.
조사결과 1974년 5월에 북한의 대일공작선이며 재일교포 북송선이기도 한 ‘만경봉호(萬景峰號)’에서 그해의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대통령을 저격하라는 지령을 받았음이 밝혀졌다.
그런데 범인이 사용한 권총이 일본의 경찰관서에서 절취한 것이라는 사실, 범인이 소지하였던 위조여권을 발부한 데 대한 책임, 저격범의 공범 중에 일본인이 끼어 있다는 사실 등으로 일본정부는 법률적 내지 도의적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때 한일관계가 불편해졌으나, 일본정부가 책임을 솔직이 인정하였다.
9월 19일 집권당인 일본자유민주당 부총재인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가 수상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의 친서를 휴대하고 진사특사(陳謝特使)로 한국을 다녀감으로써 양국관계는 다시 회복되었다.
범인 문세광은 그해 12월 17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20일 집행되었다.
(두산백과사전)
⑤ 서울 지하철(종로선;1호선)․수도권 전철 개통(1974) : 수도권 고속교통 시대의 막이 올랐다.
서울역-청량리역 간 1호선(9.5㎞)의 종로선 지하철과 서울-인천(98.6㎞)․서울-수원․청량리-성북역 간의 수도권 전철이 광복절 29돌인 15일 역사적인 개통을 보았다.
이로써 한국은 일본․중공에 이어 아시아에서 3번째 전철 보유국이 됐다.
그 후 2호선은 1984년에, 3․4호선은 1985년 10월에 각각 개통되었다.
⇨4월 12일.
⇨1월 10일.
****‘제29회 광복절인 15일 전동차의 우렁찬 시동소리와 함께 서울 지하철시대의 막이 올랐다.’(동아일보 1974년 8월 15일자)
오전 11시 10분이었다.
시승열차 1호는 예정대로 서울 청량리역을 출발해 서울역에 이르 는 지하철 1호선 종로선 구간(9.54km)을 달렸다.
광복절의 지하철 개통식은 화려하게 치러져야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조촐하게 치러졌다.
테이프 커팅을 하기로 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 다.
지하철 개통 직전에 박 대통령에 대한 저격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 다.
당일 청와대 대변인의 발표 내용.
‘괴(怪)청년 한 명이 15일 오전 10시 20분 국립국장에서 거행중 인 광복절 기념식에서 경축사를 낭독하던 대통령을 저격했으나 좌절됐으며 저격범은 현장에서 즉각 체포됐다.’
사실 박정희 정권과 지하철의 ‘악연(惡緣)’은 1년 전부터 시작됐다.
남한보다 1년 앞선 1973년 9월 북한 평양에 먼저 지하철이 개통됐기 때문이다.
북한 전문가들 가운데에는 지하철 1호선을 체제경쟁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마치 냉전이 한창이던 1957년 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쏘아 올리자 이듬해 초 미국이 부랴부랴 익스플로러 위성을 띄운 것처럼.
지하철 1호선은 많은 화제를 남겼다.
우선 공사기간에서 당시 기준으로 최단 기록을 세웠다.
착공에서 개통까지 걸린 기간은 3년 4개월.
같은 길이의 일본 오사카 5호선 공사는 5년이 걸렸다.
공사비도 km당 30억 원으로 앞서 개통된 런던(52억 원), 도쿄(89억 원)보다 적었다.
대통령 저격사건이 있었지만 지하철 개통은 시민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거리 곳곳에 축하 현수막이 나부꼈고 시민들은 ‘땅 밑으로 다니는 기차’를 보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몰려들었다.
본보는 지하철역 분위기를 ‘지하(地下) 서울에 지상(地上)의 탄성’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도 오래갈 수 없었다.
비보(悲報)가 전해진 것은 오후 7시였다.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머리에 총을 맞은 육영수 여사가 숨을 거둔 것.
들떴던 분위기는 어둠과 함께 비탄(悲嘆)으로 바뀌어 갔다.
(차지완 기자 cha@donga.com.2007)
⑥ 옛 조선총독부 해체(1995) : 광복 50주년인 1995년 오늘.
1926년 당시 동양최대의 식민지 관리청사였고 또 민족 수탈의 역사를 대표했던 옛 조선총독부 건물이 해체작업에 들어갑니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 시절 독일인 게오르게 라반데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시작합니다.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근세 르네상스식입니다.
일제 지배의 총본산으로 해방 이후에는 3년동안 미 군정청사로 쓰이던 건물. 건국과 함께 중앙청으로 불리며 정부청사로 사용됩니다.
북한군의 점령과 함께 인공기가 나부꼈고 3개월만에 다시 태극기가 걸리지만 1.4후퇴때 다시 폐허가 되다시피 합니다.
1983년 이 건물은 공사비 2백억원이 투입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바뀝니다.
****옛 총독부 건물 첨탑 제거(1995) : 광복 50주년 되던 해,내무부는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전국에서 쇠말뚝 20개를 제거했고,일본식으로 교묘하게 개명된 지명 129곳을 우리 식으로 고쳤다.
또한 1926년에 건립된 옛 조선총독부 건물의 첨탑을 제거했다.
⑦ 가경절(嘉慶節) : [요약] 대종교(大倧敎)에서 교주 나철(羅喆:弘巖大宗師)의 순명(殉命:순교,1916.음8.15)을 기념하는 날.
대종교(大倧敎)에서의 경절의 하나.
대종교조천절(大倧敎朝天節).
[본문] 음력 8월 15일.
가경일이라고도 한다.
1909년(융희 3)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이 16년 음력 8월 15일 구월산(九月山) 삼성사(三聖祠)에서 '한배검(한얼님)'에게 선의식(儀式:祭天儀式)을 올린 뒤, 순명삼조(殉命三條)와 여러 가지 유서를 남기고 순교했다.
그후 이 일을 신도들은, 나철이 인간의 죄악을 대속(代贖)한 것이라 여겨 이날을 기려 선의식과 함께 경하식(慶賀式)을 베푼다.
(두산백과사전)
⇨1월 15일.
⑧ 소수 서원(紹修書院) 개원(1542) : 주세붕이 창건한 우리 나라 최초의 서원.
「길이길이 후세에 이어 영재(英才)를 수련할 서당」이라는 뜻을 지닌 소수서원(사적55호)이 문을 연 것은 1542(중종 37).8.15 주세붕이 풍기(豊基)군수였던 시절이다.
주세붕은 안향(安珦)의 고거지(故居地)로 알려진 백운동(白雲洞)에 사묘를 세우고 다음해인 중종38년 8월에 학사(學舍)를 이건한 뒤 중국 송대(宋代)의 4대서원 중의 하나를 본떠 백운동서원을 창건한데서 비롯되었다.
⑨ 독산성 및 세마대지(洗馬臺址) : 경기도 오산시 세마동에 있는 백제시대의 산성과 임진왜란 때 적을 속이기 위해 쌀로 말을 씻겼다는 전승유적지.
1964년 8월 29일 사적 제140호로 지정되었다.
성 둘레 3,240m, 석축 약 400m와 4개의 성문이 남아 있다.
백제시대에 축조하여 통일신라·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까지 사용되었다.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임진왜란 때는 1593년(선조 26) 7월 전라도관찰사 겸 순변사 권율(權慄)이 2만의 근왕병(勤王兵)을 모집, 이 성에 진을 치고 왜적을 물리친 것으로 유명하다. 1594년 9월 11일부터 14일까지 인근 백성들이 합심하여 허술한 성의 모양을 다시 갖추고 1602년 변응성(邊應星)의 지휘 아래 다시 수축하였으며 1796년(정조 20) 개축하였다.
이 당시 성의 둘레는 1,800보(步), 4개의 문이 있었다.
한편 1593년 권율이 이 성에 주둔하고 있을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은 벌거숭이산[禿山]에 축조한 이 성에 물이 없을 것으로 짐작하고 물을 부어 조선군을 조롱하였다.
그러나 권율은 물이 풍부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백마를 산위로 끌어올려서 쌀을 말에 끼얹어 목욕시키는 시늉을 하자 왜군은 이에 속아 퇴각하였다.
이때부터 이곳을 세마대라 불렀다 하며, 1592년 여기에 세마대를 세우고 병기창을 두어 무예연습을 하게 하였다.
1957년8월15일 세마대를 옛 자리에 복원하였다.
⇨7월 6일.
⑩ 남북 이산가족 200명 서울-평양에서 50년만에 혈육 상봉(-18일)(2000) : 50년만의 혈육상봉 !
남북한의 이산가족들이 광복절인 2000년 8월15일부터 18일까지 3박4일간 서울과 평양에서 애타게 그리던 혈육들을 만나 울고 또 울었다.
북한 고려항공 특별기편으로 도착, 서울 쉐라톤 워커힐 호텔을 숙소로 정한 북한 방문단 100명은 15일 오후 4시 40분 서울 종합전시장(COEX) 3층 컨벤션 홀에서 그리던 가족을 50년만에 처음 만났다.
평양으로 간 남한 방문단도 고려호텔에 짐을 푼 뒤 호텔 2-3층에 마련된 단체 상봉장에서 부인과 아들, 딸, 형제들과 감격적인 상봉을 했다.
상봉장은 반세기의 슬픔을 한꺼번에 토해내는 이산가족들의 울음소리로 순식간에 통곡의 바다로 변했다.
상봉가족들은 끌어안고 울다가 얼굴을 바라보고 다시 흐느꼈다. 잃어버린 50년 세월을 목이 메여 말을 찾지 못한 채 이들은 그렇게 슬퍼하고, 감격하고, 서러워했다.
상봉단은 3박4일 간의 일정을 마치고 8월 18일 대한항공편으로 각각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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⑪ 흐루시초프 베이징 방문(1958) : 흐루시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마오쩌뚱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1958년 오늘 베이징을 방문합니다.
후르시초프는 나흘간 베이징에 머물면서 두나라의 우호관계와 중동의 평화문제를논의합니다.
이 회담이 있은 직후 흐루시초프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에게 중국이 빠진 안보리 정상회담에서 중동의 평화문제를 다룰 수없다는 메시지를 보냅니다.
⑫ 방글라데시 라만 대통령 피살(1975) : 1975년 오늘
방글라데시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무지부 라만 대통령이 가족과 함께 피살됩니다.
1971년 파키스탄으로부터 분리독립한 방글라데시 인민 공화국 !
방글라데시 정부의 초대 수상이 된 무지부 라만은 1975년 1월 헌법 개정을 통해 방글라데시의 초대 대통령이 됩니다.
라만 대통령은 취임 후 재야 정치 세력을 탄압하고 족벌정치 체제를 구축합니다.
라만 정권의 부정부패와 지나친 친인도, 친소련 정책은 국내외적으로 불안을 초래합니다.
결국 달림 소령이 이끄는 군부 민족주의 소장파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이 쿠데타로 라만 대통령의 5년간이 걸친 통치가 마감되고 라만 대통령은 가족과 함께 살해됩니다
⑬ 인도.파키스탄 분리독립(1947) :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갈등이 끊이지 않았던 인도대륙 !
1947년 오늘 인도대륙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지만 끝내 인도 공화국과 파키스탄 공화국으로 분리됩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쟁은 계속됩니다.
인도의 지도자 간디는 두 공화국의 화합과 분쟁종식을 위해 무기한 단식에 들어갑니다.
이러한 간디의 노력으로 1948년 1월 델리에서 두 공화국사이에 화해가 이뤄집니다.
그러나 며칠뒤인 1월 30일 간디는 힌두교 광신자에게 암살당합니다.
1950년과 1956년 각각 공화국을 선언한 인도와 파키스탄 두 나라는 민족적인 갈등과 종교문제로 끊임없는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⑭ 베를린 장벽을 감시하던 동독 군인 콘라트 슈만, 서독으로 탈출(1961) : 이틀 전부터 동서 베를린간의 통행이 차단되고 있었다.
열아홉 살의 동독 병사 콘라트 슈만은 철조망 부근을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명령서에는 '국경을 수비하라'고 쓰여 있었다. 다른 사람의 탈주를 저지해야 할 그가 1961년 8월 15일 서베를린으로 탈출했다.
완전무장을 한 군복차림으로 자동권총을 어깨에 메고 대담하게 철조망을 뛰어넘어 자유의 나라로 넘어왔다.
다음날 그 모습은 전세계 신문의 일면을 장식했다. 철조망을 뛰어넘는 도약의 순간을 카메라가 잡은 것이다.
베를린 장벽 건설은 전후 독일의 가장 암울한 비극이었다.
동독에서는 1953년 6월 17일에 발생한 동베를린 노동자의 봉기 이후, 국민과 정치 체제와의 알력이 확대일로를 걷고 있었다.
1959년 한 해 동안 무려 14만 5천명이 서독으로 망명했다. 1960년에는 젊은층을 중심으로 5만 6천명이 동독을 등졌다.
1961년 7월 한 달동안만 망명자수가 3만을 넘어서자 동독 국가평의회 의장 울브리히트는 마침내 제동을 걸었다.
장벽건설을 명령한 것이다. 장벽설치가 시작된 것은 8월 13일 새벽 2시였다.
46킬로미터에 이르는 베를린 시내 지역 경계선을 따라 장갑차가 배치되고 경찰, 군인, 민병대가 출동했다.
그들은 포석과 포장을 떼어내고 철조망을 둘러쳤다. 작업은 며칠 동안이나 계속됐다.
슈만은 그 경계선의 감시를 맡고 있었다.
동베를린에 있는 할아버지 집에 놀러왔다가 장벽설치로 돌아가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던 한 어린이의 애절한 소식과 자신의 사상성을 시험한 동독 비밀경찰의 비열한 행위에 분노한 것이 슈만이 탈출을 결심한 이유였다.
⑮ 파나마 운하 개통(1904.2.1-1914) : 1914년 8월 15일 대서양과 태평양을 이어주는 호수-갑문식 운하인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었다.
파나마 운하는 수에즈 운하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전략적인 인공수로로서, 중앙아메리카의 파나마 지협을 통해 대서양 심해에서 태평양 심해까지 81.6㎞에 걸쳐 뻗어 있다.
1879년 프랑스의 외교관 페르디낭 드 레셉스가 대양간운하만국회사를 설립하고 이듬해 지협을 통과하는 수평식 수로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1889년 사업이 붕괴되었고, 1894년 신(新)파나마운하회사로 재조직되었다.
1903년 파나마와 미국 사이에 헤이-뷔노바리야 조약이 체결되어 미국이 운하 건설권과 파나마 운하지대에 대한 관리․통제의 독점권을 얻었다.
신파나마운하회사의 운하소유권은 1904년 미국에 팔렸다.
1904년2월1일부터 미국의 감독하에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1906년 미국 파나마 지협 운하위원회의 존 F. 스티븐스가 프랑스의 공학자 아돌프 드 레피네의 안을 기초로 최종 설계도를 작성했다.
설계도가 채택된 후 공사는 급속히 진척되어 마침내 1914년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었다.
운하가 개통된 후 수로 지배권을 놓고 미국과 파나마 간에 갈등이 빚어졌으나 1977년 파나마 운하조약이 성사되어 2000년 이후 파나마 공화국이 운하 통제에 대한 전권을 갖게 되었다.
⑯ 지옥의 묵시록 개봉(1979) : "코폴라 감독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영화를 선사했다.
" 베트남전 배경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이 개봉되었을 때《뉴스위크》지는 이렇게 격찬했고,《타임》지는 "근래 10년동안 펼쳐진 예술행위 중 가장 어리석은 짓을 담은 영화이며, 이로 인해 코폴라는 예술적 자멸을 초래했다."고 비난.
연출자는 "전쟁의 이면에 잠재되어 있는 도덕적 문제를 거론하고자"
이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Have you ever considered any real freedoms?
Freedoms from the opinions of yourself."
이 영화에서 커츠대령이, 비밀명령에 따라 자신을 사살하러 정글로 들어온 위라드 대위와 처음 만났을 때 한 말.
⑰ 제1회 우드스톡(Woodstock) 축제(1969) : [요약] 우드스톡은 미국 뉴욕주(州) 남동부에 있는 도시.
위치 미국 뉴욕주 남동부
인구 2,365 명 (2006)
[본문] 미국 뉴욕주 남동부의 킹스턴에서 북쪽으로 16km 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아쇼칸 저수지 근처의 남부 캣스킬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사계절 휴양지이자 주목받는 예술인촌이다.
낙농업과 축산업이 발달해 있다.
1902년에 랠프 R.화이트헤드(Ralph R. Whitehead)가 이 마을 북쪽에 수공예 가공단지를 조성한 뒤로 발전하였다.
1906년 뉴욕의 아트스튜던트리그의 하계학교가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우드스턱의 이름을 딴 록페스티벌인 우드스턱음악예술축제(Woodstock Art and Music Fair)가 1969년 8월 15∼17일 뉴욕주의 설리번군(郡)에 가까운 베셀에서 열렸다.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조안 바에즈(Joan Baez) 등 당대 최고 가수들이 참가했던 이 행사는 1960년대 베트남전쟁 등 격변의 시기를 살았던 젊은이들의 문화적 갈증을 해소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 축제에는 45만 명이 몰려 1960년대 반문화운동의 정점을 이루었다.
1994년에는 25주년 기념 페스티벌로 다시 부활되어 축제가 열렸다.
미술품과 공예품을 취급하는 화랑들이 많이 있으며, 연극학교와 음악회가 빈번하게 열린다.
(두산백과사전)
*********美우드스톡 페스티벌 개최(1969) : 1969년 7월 미국인 닐 암스트롱은 인류 최초로 달 표면을 걸었다.
그러나 이런 국가적 경사 앞에서 미국인들은 예상외로 담담했다. 이를 축하할 만큼 그들의 심경은 편치 못했다.
대외적으로 미국은 베트남전쟁에 점점 깊이 빠져들고 있었고, 국내적으로는 인종차별에 도전하는 민권운동이 불붙고 있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 풍요 속에서 자란 미국 젊은이들에게는 극도로 혼란한 시기였다.
한편에서는 정치적 저항 정신이 싹텄고, 다른 한편에서는 일탈과 쾌락의 문화가 지배했다.
이 두 가지 시대정신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일어난 극적인 사건이 바로 우드스톡 페스티벌이었다.
이 행사는 원래 포크가수 밥 딜런의 고향인 우드스톡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히피 젊은이들이 몰려들 것을 우려한 우드스톡 주민들의 반대로 행사는 결국 인근 소도시인 베텔에서 열리게 됐다.
1969년 8월 15일부터 사흘 동안 열린 축제에는 조앤 바에즈, 재니스 조플린, 지미 헨드릭스, 제퍼슨 에어플레인, 그레이트풀 데드 등 당대 최고의 록․포크 가수들이 총출동했다.
참가자는 45만-50만 명에 이르렀다. 주최 측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10배 정도 많았다.
사흘 내내 장대비가 내렸다. 행사장은 진흙탕으로 변했고 식량, 화장실, 의료장비도 절대 부족했다.
뉴욕 주는 행사장 주변을 재난지역으로 선포하기 직전까지 갔다. 반전 구호를 외치며 군대에 혐오를 드러내던 젊은이들이 군 헬리콥터로 음식물과 의료품을 조달받는 아이러니도 발생했다.
마약과 섹스가 난무했지만 별다른 폭력 사고는 없었다.
이후 우드스톡은 워터게이트와 마찬가지로 미국 사회의 한 시대를 규정짓는 고유명사가 됐다.
사회운동가 애비 호프먼은 기성세대의 가치를 부정하는 젊은이들의 공화국이자 해방구라는 의미에서 우드스톡 네이션(국가)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다.
사흘 동안 우드스톡 페스티벌을 톱뉴스로 보도했던 뉴욕타임스는 행사가 끝난 후 첫 번째 사설에서 이런 난장판이 무슨 문화인가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다음 날 신문의 논조는 훨씬 부드러워졌다.
비록 세상을 바꾸겠다는 일관된 세계관은 없었지만 그들은 훗날 이날을 기억하며 순수의 시간을 되돌아볼 것이다.
헨리 5세가 전투를 앞두고 했던 유명한 연설처럼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오늘을 보내고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자는 오늘의 일들이 화제에 오를 때마다 가슴이 뛸 것이다.
그리고 이웃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노라고….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2006)
⑱ 테마파크 ‘티볼리’ 세계 첫선(1843) : 팝콘 터지는 소리, 달콤한 솜사탕 냄새가 경쾌한 왈츠와 뒤엉킨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목마 주위로 까르르 아이들 웃음소리가 퍼져가고, 순식간에 피었다 지는 불꽃이 화려한 퍼레이드 행렬을 덮는다.
엇비슷하게 이어지는 일상을 잊게 만드는 ‘꿈의 나라’.
놀이공원, 테마파크는 축제가 잦고 공원이 많은 유럽에서 태동했다.
1133년 영국에서 열린 ‘바르톨로뮤 페어’를 시초로 삼는다.
옷감 및 축산물 전시였는데 오락실, 식당이 세워졌고 곡예 등 익살스러운 쇼가 함께 펼쳐져 많은 관중을 끌었다.
산업혁명 초기에 놀이공원은 동네 유원지 수준을 넘어서는 성장을 이뤘다.
이때 교외에 자리를 잡으면서 복잡한 도시 환경에서 탈출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17, 18세기에 걸쳐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오스트리아 빈 등에 전원의 여유로움과 공연을 즐길 수 있는 놀이공간이 속속 마련됐다.
1843년 8월 15일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티볼리 가든스’가 개장했다.
이날 3615명이 새로운 도시형 공원을 찾았다.
세계 최초의 테마파크로 꼽히는 티볼리는 지금도 같은 자리에서 고색창연한 자태를 자랑한다.
옛 정취를 맛볼 수 있도록 이곳에서는 네온 불빛, 플라스틱 제품의 사용을 피한다.
외교관의 아들로,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보고 온 게오르그 카르스텐센은 국왕 크리스티안 8세에게 “시민들이 즐길 수 있게 해주면 정치는 잊을 것”이라면서 놀이공원 건립을 건의했다.
당시 덴마크는 주변 국가들과 분쟁이 잇따라 불안한 상황이었다.
왕가의 정원을 개조해 공원을 만들고 운영 주체를 시민이 주주로 참여하는 주식회사 형태로 했다.
입장료는 공원을 환경친화적으로 조성하는 일에 사용했다.
동화작가 한스 안데르센은 자주 티볼리를 찾아 새로운 동화를 구상했다.
공원 내 중국식 건물과 정원은 고대 중국 황실을 배경으로 한 안데르센의 작품 ‘나이팅게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티볼리는 초창기부터 이국적인 분위기의 건물, 야외 연주용 음악당, 극장, 식당과 카페, 꽃밭, 기계식 놀이기구 등 다양한 즐길 거리를 갖췄다.
어둠이 내려앉으면 색색 빛깔 전등이 불을 밝혔다.
티볼리는 전통과 처음의 매력을 내다버리지 않으면서도 늘 진화해왔다.
1914년에 만들어진 ‘마운틴 롤러코스터’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제 롤러코스터다.
카르스텐센은 “티볼리에는 결코 끝이란 없다”는 선언을 남기기도 했다.
월트 디즈니는 1950, 60년대에 몇 차례나 이곳을 방문해 디즈니랜드 설립을 위한 영감을 얻어갔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2008)
⑲ 미국자유연맹(American Liberty League) : 1934년 8월15일, 미국 워싱턴.
듀폰과 모건, 유에스 스틸, GM, 스탠더드 오일 등 내로라 하는 기업이 모였다.
미국자유연맹을 결성하기 위해서다.
‘개인의 권리와 재산권 존중’이라는 자유연맹의 기치에는 ‘뉴딜 정책에 스며 있는 반(反)시장적 요소의 제거’라는 목적이 깔려 있었다.
대통령의 경제정책에 대놓고 반대하는 이 모임에는 야당인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 보수파까지 끼어들었다.
한때 회원 수가 12만5,000명까지 불어났던 자유연맹의 주력 사업은 교육홍보. 빈민구제와 사회보장, 최저 임금의 부당성을 알리는 데 자금을 쏟아 부었다.
1936년 대선을 앞두고는 흑색선전도 서슴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유대인 정신병자에 매독 환자, 알코올 중독자’라는 비난에서 ‘영부인이 차기 대통령직을 물려받아 나라를 통째로 소련에 넘길 것’이라는 헛소문까지 버젓이 신문에 실렸다.
무력으로 정부를 전복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맥아더 장군이 ‘미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인’이라고 칭송했던 예비역 해병 소장 스메들리 버틀러는 ‘파시스트의 모임인 자유연맹이 예비역 군인 50만명을 동원한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고 말해 충격을 던지기도 했다.
버틀러의 폭로는 증인과 증거가 나왔음에도 보수파가 지배하는 대법원에서 흐지부지되고 말았지만 자유연맹은 점차 일반인들의 지지를 잃었다.
자유연맹이 성과를 올리지 못했던 가장 큰 원인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처신. 맞대응하지 않고 오히려 정책자문까지 받았다.
결국 자유연맹은 1940년 해산하고 말았다.
자신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이고 ‘뉴딜은 공산화 정책’이라며 터무니없는 공세를 퍼붓던 상대조차 껴안았던 루스벨트는 불황 극복과 4선 성공, 2차대전 승리라는 업적을 남겼다.
(서경.2008.인터넷한국일보)
⑳ 프랑스 페탱 장군 사형선고(1945) : 1945년 오늘 프랑스의 전쟁영웅 페탱 장군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진다.
페탱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아르투아(Artois) 전투와 베르됭(Verdun)전투에서 무훈을 세워 전쟁 영웅이 됐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때인 1940년 5월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하자 히틀러에 협조해 같은 해 7월 독일에 대한 협력정책으로 괴뢰 '비시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결국 대전이 끝난 뒤 전범으로 몰려 89살의 나이에 사형선고를 받게 됐다.
하지만 드골은 곧바로 페탱을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해준다.
페탱은 1951년 7월 23일 복역 중에 사망한다.
⇨7월 23일.
㉑ 기타 오늘의 역사
1376(고려 우왕 2) 무위소, 신무기 수차 등 제조
1534 이그나티우스 폰 로욜라, 예수회 창설
1658 제 71 차 라인동맹체결
1902 애국사 제정. 공포
1912 조선국유삼림 미간지및 삼림축물특별처분법 공포 시행
1917 레닌의 '국가와 혁명' 완성
1923 독일 바이마르에서 바우하우스전 개최
1924 형평사 통일대회, 대전에서 열림, 31개 단체 참가
1931 현대과학과 기독교 발행.편집자 유형기.발행자 케이블.발행처 기독교조선감리회교육국.이책은 19세기초 과학의 발달로 종 교와 과학의 마찰 해소.
1944 수풍발전소 송전 시작
1944 수풍발전소 발전
1945 여운형,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결성
1945 8.15 해방으로 옥중 성도 풀려남
1945 대한민국, 일제에서 해방
1945 일본 포츠담선언 수락, 제2차 세계대전서 무조건 항복
1945 일본 왕 히로히토 항복 방송
1945 여운형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결성
1947 인도공화국 수립(초대 수상 네루)
1947 영국으로부터 인도연방과 파키스탄 분리독립
1947 인도네시아 단일공화국 선포
1948 한글맞춤법통일안 발표
1949 헝가리 인민공화국 선언
1952 네델란드 인도네시아 서이리안 조약 조인
1953 코리아헤럴드 창간
1953 정부, 서울환도
1954 전국 댄스홀 폐쇄령
1954 경부선 통일호 개통, 서울-부산간 9시간 30분
1960 콩고, 프랑스로부터 독립
1961 농업협동조합 발족
1961 베를린 장벽을 감시하던 동독 군인 콘라트 슈만, 서독으로 탈 출
1962 화란-인도네시아 서이리안 조약 조인
1966 나트랑에 주월(駐越)야전사령부 신설
1966 중앙텔레비전방송, 동양방송으로 상호를 다시 변경.
1967 농업협동조약 발족
1968 세계종교연합법황청 창설.방수원에 의해 충남 논산군 두마면 부남리 120번지에서 창설된 신흥종교집단.
1968 정치활동 정화법 시효만료
1969 세계 종교연합 법황청 창립(년)
1970 남산1호 터널 개통
1970 교계 3원로(백낙준, 한경직, 박태준) 무궁화 훈장 수상(년)
1970 박대통령 남북통일안 8.15 선언 발표
1970 병무청 발족
1971 바레인, 영국으로부터 독립
1974 박정희 대통령 저격 미수사건 발생, 육영수여사 피격 사망
1974 새마을호 운행 개시
1974 전국주교 창간.기독교교육잡지.편집자 오영호.발행자 김기열.
발행처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전국주일학교연합회.
1975 국회의사당 준공
1975 방글라데시 군부쿠데타
1977 77민족 복음화 성회 개최(여의도)
1979 캄보디아 헹 삼린 정권, 폴 포트 정권 4년동안 300만명이 학 살되고 사원 2800개소가 파괴됐다고 발표
1979 국방부, 국군방송 FM송신 시작 101.㎒
1980 폴란드노조 파업 반체제운동화
1980 국보위, 사회악사범 1만9천여명 군부대서 순화교육중이라고
발표
1982 현대종교 발행.[성별]지의 후신으로 발행됨.편집겸 발행자 탁 명환.발행처 현대종교사.신흥종교집단에 대해서 썼음.
1983 독립기념관 천안 목천서 기공
1984 한국 개신교 백주년 선교대회
1985 보타 남아공대통령, 인종차별정책 폐기요구 거부
1987 시카고, 350mm 넘는 집중호우로 1억달러 넘는 재산피해
1987 독립기념관 개관
1989 중앙대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 이내창군 의문사
1989 임수경 문규현신부,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후 판문점 통해 귀환
1991 미국정부, 3천6백20억달러 연방적자 발표
1991 마다가스카르서 대통령 친위대가 반정부시위대 138명 학살
1992 범민족청년학생연합회 결성
1992 마이애미 근처의 나이트클럽에서 총기난사사고. 4명사망
1995 김수환 추기경, 5.18 학살자 처벌해 민주질서 바로잡자는 메 시지 발표
1997 뮤지컬 '명성황후' 국내 공연사상 최초로 뉴욕 공연
1998 이란 성지순례단, 18년만에 처음으로 양국 국경선을 통해
이라크를 방문
1998 정부 건국50주년 맞아 공안사범 103명 등 총 7천7명 특별 사면복권 가석방
1998 북아일랜드 폭탄테러로 30년만에 최대 유혈참극 발생
2000 세계선교대회(kWMA 주최) 서울에서 개최
2000 북한 민항기 50년만에 한국에 첫 취항
2001 북한에서 개최된 '6․15 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 8․15공동행 사'에 참석한 남측 대표단, 북한 통일탑 개․폐막식행사에 참석 해 파문
� 오늘의 인물
① 육영수(陸英修 ; 1925.11.29 - 1974.8.15) :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삼가 명복(冥福)을 빕니다.』....
(*註 ; 1974.8.15 조선일보 사설 제목)
[요약] 대통령 박정희(朴正熙)의 부인.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각종 사회 ·육영사업을 벌였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국립중앙극장 단상에서 조총련계 문세광에게 저격되어 죽었다.
출생지 충북 옥천
[본문] 충청북도 옥천 출생.
1942년 배화여고(培花女高)를 졸업, 옥천여중 교사를 지냈다.
1950년 육군 중령 박정희와 결혼하였다.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각종 사회 ·육영사업을 벌였다.
자선봉사단체인 양지회(陽地會) 결성, 전국 9개소에 여성회관 건립, 미망인회(未亡人會) 자활공장 설치 등을 하였으며, 헌혈운동 등 적십자사 활동에도 솔선 ·참여하였다.
육영사업 일환으로 어린이대공원 ·어린이회관 건립을 주도하고, 소년소녀 잡지 《어깨동무》를 발간하였다.
불우 청소년들의 직업보도를 위한 정수직업훈련원(正修職業訓練院)을 설치하고, 서울대학교에 기숙사 정영사(正英舍)를 설치하였다.
양로 ·구호사업도 활발히 전개하여, 월요경로회(月曜敬老會)를 만들어 노인 위로연을 개최하고, 나환자촌에 자활사업지원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국립중앙극장 단상에서 조총련계 문세광(文世光)에게 저격되어 죽었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집행,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박정희와의 사이에 지만(志晩) ·근혜(槿惠) ·근영(槿映) 등 1남 2녀를 두었다.
(두산백과사전)
⇨11월 29일.
********육영수 생가지(陸英修生家址) : ⇨4월 26일.
********육영수 저격사건 :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은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재일 교포 문세광이 당시 영부인 육영수 여사를 살해한 사건이다.
1974년 8월 15일 장충동 국립중앙극장에서 박정희 대통령 연설 도중 육영수 여사가 재일 교포 문세광의 총에 피격당하였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에서 오후 7시에 사망하였다.
목차 [숨기기]
1 사건 개요
2 사건의 진행
3 사건의 의의
사건 개요[편집] 범인이 사용한 권총이 일본의 경찰관서에서 절취한 것이라는 사실, 범인이 소지였던 위조여권을 발부한 데 대한 책임, 저격범의 공범 중에 일본인이 끼어 있다는 사실 등으로 일본정부는 법률적 내지 도의적 책임을 면할 수가 없게 되었다.
사건의 진행[편집]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23분, 서울 장충동 국립중앙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이 열렸다.
그런데 갑자기 광복절 기념식 도중 청중석에서 총성이 울렸고, 박정희 대통령은 연설대 위에 몸을 피하여 무사하였으나, 이어 발사한 여러 총탄 중 하나가 단상 옆에 앉아 있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머리에 명중하고, 범인과 경호원 간의 총격 속에서 합창단의 한 여학생이 유탄에 맞아 절명하였다.
범인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육영수 여사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급송되어 5시간 이상의 응급수술을 받았으나, 오후 7시 48세로 사망하였다.
사건의 의의[편집] 그러므로, 한일관계가 불편해졌으나, 일본정부가 책임을 솔직히 인정하였다.
9월 19일 집권당인 일본자유민주당 부총재인 시나 에쓰사부로가 수상 다나가 가쿠에이의 친서를 휴대하고 진사특사로 한국을 다녀갔다.
문세광은 대법원에서 사형선고 후 그해 12월 20일 사형 집행 되었다.
② 숙종대왕(肅宗大王 ; 1661.8.15 ~ 1720.6.8) : ⇨6월 8일.
[요약] 조선 제19대 왕.
현종의 외아들.
대동법을 전국에 실시하여 실효를 거두었으며 임진왜란 · 병자호란 이후 계속된 토지사업을 추진해 완결을 보았다.
주전을 본격적으로 실시해 상평통보를 주조, 중앙관청 및 지방관청 등에 통용하도록 했다.
영토 회복 운동을 전개했고 금위영을 추가로 설치하여 5영체제를 완결했다.
재위 1674년~1720년
왕비 인경왕후(仁敬王后), 인현왕후(仁顯王后), 인원왕후(仁元王后)
아버지 현종(顯宗)
어머니 명성왕후(明聖王后)
[본문] 자 명보(明譜). 휘 순(焞).
현종의 외아들.
어머니는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
비는 김만기(金萬基)의 딸 인경왕후(仁敬王后), 계비는 민유중(閔維重)의 딸 인현왕후(仁顯王后), 제2계비는 김주신(金柱臣)의 딸 인원왕후(仁元王后).
1667년(현종 8) 왕세자에 책봉되고, 1674년 즉위하였다.
즉위한 이듬해 대흥산성(大興山城)을 완성하고 용강(龍岡)의 황룡산성(黃龍山城)을 수축하였다.
정치에 관심이 많았으나 당시 예론(禮論)에 치우쳐 논쟁이 분분하였고, 당쟁이 심하여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의 파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러나 왕은 숙원(淑媛) 장씨(張氏)를 총애하여 1688년 소의(昭儀)로 승격시켰으며, 이듬해 장씨에게서 출생한 왕자(景宗)의 명호(名號)를 정하고자 하였다.
서인들이 이를 반대하자 송시열(宋時烈) ·김수항(金壽恒) 등을 유배하고 왕자의 명호를 정하였으며, 왕비 인현왕후를 폐위, 희빈(禧嬪)으로 승격된 장씨를 1690년에 왕비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인현왕후 폐위를 후회하던 왕은 폐비복위운동을 꾀하는 서인을 민암(閔黯) 등이 타도하려고 하자 1694년 남인을 추방하고 다시 서인을 등용시켜 폐비를 복위시켰다.
이어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키고, 1701년 무고죄(誣告罪)로 사사(賜死)하였다.
왕의 재위기간은 국내적으로 당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였으나 대외적인 전쟁이 없어 사회가 점차 안정기로 접어든 때로 선조 말 이후 계속된 대동법(大同法)을 평안도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실시하여 실효를 거두었으며,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계속된 토지사업을 추진하여 완결을 보았다.
또 주전(鑄餞)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여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 중앙관청 및 지방관청 등에 통용하도록 하였다.
특히 폐한지(廢閑地)로 버려둔 압록강 주변의 무창(茂昌) ·자성(慈城)의 2진(鎭)을 개척하여 영토회복운동을 전개하였고, 1712년 함경감사 이선부(李善溥)로 하여금 백두산(白頭山) 정상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게 하여 국경선을 확정하였으며, 금위영(禁衛營)을 추가로 설치하여 5영체제를 완결하였다.
또 재위기간에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대명집례(大明集禮)》 등이 간행되었고, 《대전속록(大典續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이 편찬되었다.
능은 명릉(明陵)이다.
(두산백과사전)
*****숙종대왕지장(肅宗大王誌狀) : [요약] 숙종의 행장(行狀) ·애책문(哀冊文) ·시책문(諡冊文) ·명릉지(明陵誌) 등을 수록한 책.
구분 활자본
저자 이관명(李觀命) 등
시대 조선(1721년)
소장 규장각도서
[본문] 활자본.
1권 1책.
규장각도서.
1721년(경종 1) 간행.
이관명(李觀命) 등 편저.
숙종이 승하한 후에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로 있던 이관명이 제진(製進)한 행장, 좌참찬(左參贊)으로 있던 정호(鄭澔)가 제진한 애책문, 예조판서로서 대제학이었던 이명관이 제진한 시책문, 숭록대부중추부판사(崇祿大夫中樞府判事)였던 이이명(李頤命)이 제진하고 조태구(趙泰耉)가 글씨를 쓴 명릉지를 한데 묶어, 숙종의 인산(因山)이 끝난 후 조정에서 간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두산백과사전)
******숙종실록(肅宗實錄) : [요약] 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즉위년인 1674년 8월~1720년 6월의 실록.
구분 활자본
저자 이광좌(李光佐) 등
시대 조선시대(1728)
[본문] 활자본.
65권 73책.
1728년(영조 4) 간행.
원표제는 《숙종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실록(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實錄)》이다.
경종 즉위년인 1720년 11월~28년 3월에 걸쳐 편찬하였다.
실록에 실린 기사의 분량이 많은데다가 편찬 도중 노소당론(老少黨論)의 정변이 빈번하여 편찬 책임자의 교체가 잦았던 까닭으로 편찬기간이 9년씩이나 소요되었다.
인쇄가 진행될 무렵 정미환국(丁未換局)이 발생하여 27년(영조 3) 소론이 다시 집권하게 되자 노론측 사관(史官)의 기록이 불공정하므로 실록보궐청(實錄補闕廳)을 설치하여 총재관(總裁官) 이광좌(李光佐)의 주재로 보궐정오(補闕正誤)를 편찬하고 28년 3월 인쇄를 완료하여 원편(原編) 각 끝권에 합본하였다.
(두산백과사전)
******숙종시사(肅宗時事) : ⇨3월 5일.
******공주 숙종대왕태실비([公州肅宗大王胎室碑) : ⇨12월 8일.
나철(羅喆 ; 1863.12.2 ~ 1916.8.15) : 대종교의 창시자이며,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나두영(羅斗永), 나인영(羅寅永)이며, 아호는 홍암(弘巖)이다.
전라남도 보성 출생이다.
한학을 공부하고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을 하였으나, 강진의 오기호, 부안의 이기 등 호남 출신의 지식인들과 함께 비밀 조직인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고 일본에 건너가 동양 평화를 위한 단식농성을 하는 등 일찍부터 민족주의적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에는 을사오적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점차 한일 병합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자, 그는 민족 종교 운동에로 관심을 돌려 1909년 1월 15일 한성부에서 대종교를 창시했다.
한일 병합 조약 이후로는 일제의 박해를 피해 교단을 만주 쪽으로 이동했는데, 이때 서일을 비롯한 대종교인들이 독립 운동에 대거 뛰어들었다.
1916년 구월산 삼성사에서 수행하다가 자결했다.
저서에 대종교 경전인 《신리대전(神理大全》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맏아들 나정련, 둘째 아들 나정문도 대통령 표창을 받은 독립운동가이다.
③ 박인환(朴寅煥 ; 1926.8.15 ~ 1956.3.20) : 강원도 인제에서 출생.
박인환은 1949년 김경린 김수영 양병식과 함께 합동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내면서 모더니스트 대열에 합류했다.
생전에 낸 개인 시집으로 '박인환 선시집(選詩集)'(1955)이 있고, 이 시집의 작품들과 거기 수록되지 못한 작품들을 시인의 아들 세형(世馨)이 한 자리에 모아 1976년에 '목마와 숙녀'라는 표제 아래 묶었다.
전쟁, 불안, 허무 같은 것이 시집 '목마와 숙녀'의 배음(背音)을 이루고 있다.
친구인 김수영은 자기 글 여기저기서 박인환의 작품과 삶의 스타일에 경멸을 감추지 않았다.
비판의 요점은 박인환의 시가 겉멋의 세계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실상 박인환이 최고 수준의 시인에 끼일 수 있다고 판단하는 문학 전문가들은 많지 않다.
그러나 그의 몇몇 작품은, 더러 음악의 도움을 받아, 독자들의 열광적 사랑을 받았다.
예컨대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로 시작하는 '세월이 가면'은 이진섭이 곡을 붙인 노래가 널리 불리면서 사람들에게 익숙해졌다.
김수영이 표나게 혹평했던 시 '목마와 숙녀'도 1970년대에 가수 박인희씨의 토크송에 실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상하게 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고종석, 2002)
⇨3월 20일.
④ 나철(羅喆 ; 1863 - 1916.음8.15) : [요약] 대종교(大倧敎)의 교조(敎祖).
을사조약 이후 매국(賣國) 대신들의 암살을 기도하다 유배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호 홍암
활동분야 종교
출생지 전남 보성군 벌교
주요수상 건국훈장 독립장(1962)
주요저서 《신리대전》
[본문] 호 홍암(弘巖).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에서 출생하였다.
벼슬이 부정자(副正字)에 이르렀으나,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의분을 참지 못하여 1907년 매국(賣國) 대신들의 암살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거사 직전에 탄로가 나 신안군의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
그후 특사로 풀려나 1909년 음력 1월 15일 중광절(重光節)에 대종교를 창시하고 포교를 시작하였다.
음력 3월 15일을 단군승천기념절(檀君昇天紀念節)로 정하고 대제(大祭)를 지냈다.
1916년 음8월 15일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삼성사(三聖詞)에서 일제의 학정을 통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저서에 《신리대전(神理大典)》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두산백과사전)
⇨1월 15일.
⑤ 조셉 요하임 사망(1907) : ⇨6월 28일.
⑥ 월터 스코트(Walter Scott ; 1771.8.15 - 1832.9.21) : 영국의 시인․소설가.
처음에는 변호사가 되었으나 문학에 흥미를 가져 문학을 하게 되었다.
요한 괴테의 글을 영문으로 번역하였으며 시와 소설을 썼다.
대표작 <아이반호> 등.
⑦ 윌 로저스(Will Rogers ; 1879 - 1935.8.15) : 미국의 배우로서 유머 문학가.
가벼운 희극과 영화에 출연, 그 중에는 자작 자연(自作自演)한 것도 있다.
뉴욕 타임즈에 토피컬한 테마의 경묘하고 풍자적인 문장을 기고했다.
⑧ 토머스 로렌스(Thomas Edward Lawrence ; 1888.8.15 ~ 1935.5.
19) : 영국의 군인이자 고고학자이며 아라비라 민족운동의 원조자이다.
웨일스 트레마독 출생.
옥스퍼드대학 재학 중에 중동의 조사여행을 하였고, 졸업 후 1910∼1914년 메소포타미아의 유적발굴에 종사하고 일대를 여행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육군 정보장교로 카이로에 파견되어 투르크의 후방교란에 임하였다.
파이살과 제휴하여 스스로 아라비아인(人)으로 분장하고는 사막의 유목민인 베두인족(族)의 유격대를 지휘하여 철도 폭파 ·게릴라 활동을 벌였으며, 1917년 아카바를 기습하여 점령하였고, 터키군(軍)에 체포되었다가 탈출하여 1918년에 다마스쿠스를 공격하여 점령하는 등 세칭 ‘아라비아의 로렌스’로서 그 이름을 떨쳤다.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하였고, 1921년 식민장관(植民長官) 처칠의 아랍문제 고문으로서 아라비아의 독립에 힘을 기울였다.
즉, 파이살을 왕으로 하는 이라크 왕국과 압둘 이븐 후세인의 트란스 요르단을 인정하게 하는 등 아랍 처리문제 해결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정부의 중동정책 및 전후의 처리문제에 불만을 품고 1922년에 고문직을 사임하였다.
그 뒤 가명으로 전차대 및 공군의 병사로 복무하다가 1935년에 제대한 후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하였다.
주요저서에 《지혜의 일곱 기둥 The Seven Pillars of Wisdom》(1926)이 있다.
⇨ 5월 19일.
⑨ 나폴레옹 1세(Bonaparte Napoleon ; 1769.8.15 - 1821.5.5) : “평화란 다음 전쟁의 준비기간이다.”라고 말한 코르시카섬 출생의 프랑스 황제.
보나파르트가(家)의 시조.
혁명 때 군공을 세운 그는, 1799년 쿠데타로써 통령정부를 세워
종신 통령에 취임하였고, 1802년 황제가 되었다.
그는 대외 정복 전쟁을 일으켜 유럽의 대부분을 제압하였으나, 러시아 원정의 실패와 제국의 해방 전쟁에 패하여 1814년 엘바섬에 유형되었다가 이듬에 탈출하였다.
탈출 후 다시 정권을 쥐었으나 워털루 싸움에서 패하여 세인트 헤레나 섬에 귀양가 죽었다.
⇨1월 9일.
⑩ 르네 마그리트( René Magritte ; 1898.11.21 ~ 1967.8.15) :
벨기에의 화가.
⇨11월 21일.
⑪ 기타 오늘의 인물⑫⑬⑭⑮
0423 서로마 제국의 황제(393-423) 호노리우스 사망
1613 테일러 출생.영국의 주교로서 신학자이자 경건 서적류 작가.
1803 콜브뤼게 출생.엘버펠트의 네덜란드 개혁파 회중교회의 창설 자.
1837 브란 출생.로마가톨릭교도.그는 뉴욕주 포트 워싱턴의 성 엘 리자베드교회의 주임사제로 임명되었다.그는 대주교 관구의 서적 검열관이었다.
1838 드루리 출생.개혁교회(화란) 목사.신학에 있어서 드루리는 진 보적인 칼빈주의자였다.
1839 유진길(1791-). 정하상(1795-) 새남터에서 참수
1886 인도의 종교가 라마크리슈나 세상 떠남
1887 소설가 엔다 퍼버 출생
1889 최경학 출생.장로교 목사,교육가,독립운동가.호는 상일.대구
1896 유예도 출생.기독교 여류독립운동가.일명 예다.유관순의 사촌 언니.
1899 이운용 출생.기독교인 교육자.1957년 서울중앙방송국 국장으 로 승진
1916 대종교 도사도(都司徒) 나철, 구월산서 자살
1925 배우 마이크 코너스 출생
1946 작곡가 지미 웹 출생
1950 영국 앤공주 출생
1951 샤프출생.예수전도단 여선교사.목사,간호원.한국명 신애숙.
1976년8월에 예수전도단 선교사로 파송함.
1956 독일 극작가 브레이트 세상 떠남
1975 방글라데시 무지브라 라만 대통령 피살
1996 일본 행동파 지성 마루야마 마사오 사망
� 오늘의 세시
① 추석(秋夕) : 음력 8월 15일.
추석 또는 가배일(嘉俳日)․중추절(中秋節)․가위․한가위 등으로 불리어지는 우리 민족의 오랜 옛날부터 큰 명절로 치는 날의 하나이다.
춥지도 덥지도 않으며 높고 맑은 하늘, 풍성한 과일과 햇곡식, 저녁이면 동산에 둥글게 떠오르는 달, 농사일도 거의 끝나 한숨을 돌리게 된 일손, 어느 모로보나 1년 중 가장 좋은 이 때를 최고의 명절로 삼아왔다.
옛부터 우리는 추석이 되면, 아침 일찍 일어나 새 옷으로 갈아 입고, 햇곡으로 빚은 송편과 술과 그리고 갖가지 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차례를 지냈다.
차례가 끝나면 어른들을 앞세우고 조상들의 자랑스럽던 이야기를 들어가며 멀고 가까운 조상의 묘들을 찾아가 성묘를 한다.
저녁이 되면, 먼 곳에서 찾아온 친척과 이웃끼리 모여 앉아 돋아 오르는 달을 바라보며 여러 가지 놀이를 하고 즐기거나 장만한 음식들을 나누어 먹으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꽃 피우고 오뉴월의 염천 아래서 땀 흘려 일한 보람을 느끼는 것이다. 이때야 말로 농부들이 「오월 농부, 팔월 신선」이란 말을 실감하는 때다.
지금도 추석 명절을 지내는 풍습은 옛날과 다름없어 이때만 되면 고향을 찾아가는 귀성객들로 열차가 붐비고 조상의 묘를 찾는 성묘객들의 행렬이 꼬리를 잇고 있다.
⇨ 2월 29일.
② 강강 수월래 : 강강 수월래 놀이는 전라남도 남해안 지방의 부녀자들의 특유한 놀이이다.
추석날 밤에 추석 비음(庇陰)으로 곱게 단장한 마을 부녀자들이 수십명씩 한 곳에 모여 서로 손을 잡고 둥글게 원을 그리며 뛰노는 민족 전래의 놀이이다.
남자는 전연 관여할 수 없는 강강 수월래는 부인은 부인끼리 소녀들은 소녀끼리 따로 하기도 하지만, 어린 아이를 제외하고는 젊은 아낙네와 처녀가 함께 섞여서 놀기도 한다.
③ 손수건(handkerchief)의 유래 : 나폴레옹 1세의 왕비인 조세핀 왕후는 앞니가 빠져서 웃을 때에는 꼭 손수건으로 입을 가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행커치프는 구라파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부인용 모자가 아직 고안되지 않았던 먼 옛날 유럽에서는 부녀자들이 비단이나 마포 혹은 여러 가지 종류의 천을 정방형으로 잘라서 머리에다 보기 좋게 두르고 다녔다고 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커치프’라는 것으로서 ‘행커치프’라는 어휘 자체는 여기서 생긴 것이다.
④ 해방동이,팔삭동이 : 우리 겨레가 해방되던 1945년에 탄생한 아이를「해방동이」라고 하며, 그들의 성장과 조국의 변모가 비교되어 매스컴의 화제로 곧잘 등장하고 있다.
정상적으로 열달만에 때어나지 않고 , 여덟달만에 태어난 아이를「팔삭동이」라고 한다.
대표적 인물로는 역사상 한명회가 등장한다(?). ⑤⑥⑦⑧⑨⑩
⑤ 월망 : 오늘은 8월의 월망 !
음력으로 매월 15일을 ‘월망’이라 한다.
⇨구약성경 시편81편 3절.
⑥
� 오늘의 ?????
=
CCCC
=
한국나다나엘선양회
=
한국사이버<인터넷>사관학교
=
O군사관학교
=
CI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