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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와 성경
1. 서론
윤동주는 직∙간접적으로 여러 사람을 만났고 그 중에 예수님이 계시다. 윤동주는 우리나라 사람들 누구나가 좋아하는 시인이다. 선생님은 전공자로서 처음에는 윤동주를 만들어진 우상쯤으로 생각했다. 70, 80년대 국어책에 실린 대부분의 시가 모윤숙, 노천명, 이광수 등 친일파 시인들의 시였는데 유일하게 이육사, 윤동주만이 예외였다. 윤동주는 친일파, 군사독재 시대에 시인 자신과 그 시의 진의와는 전혀 다르게 왜곡되고 인용되었다. 한편 윤동주는 상품화, 우상화의 대상이 되어 왔다. 윤동주의 서시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시 중에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말을 음미해 보는 것만으로도 윤동주의 시를 결코 가벼이 함부로 대할 수 없음을 알 것이다. 내년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윤동주에 대한 우상화와 상품화의 시도가 각 구청 등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를 유족 및 가족들이 적극 반대하고 있다. 윤동주는 시를 통해 정확히 신앙을 고백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윤동주는 시를 통해 신앙적 삶을 살아야 함을 말했다. 이 시대는 죽어가는 것을 사랑함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이다. 윤동주는 우리나라 시인 중에 세계적으로 알려진 시인이다. 일본인들 앞에서 윤동주에 대해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이들이 우리가 아주 맑은 영혼의 한국인을 죽여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윤동주는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으로 명칭이 바뀌고 중국의 만주지역에 일본의 괴뢰정부인 만주국이 들어선 시대에 부자(富者) 4명이 모여 만든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이곳에 학전(學田)이 들어섰는데 고구마, 옥수수를 재배하며 학교를 세운 곳이다. 윤동주가 만난 영혼들이라는 책을 준비하고 계신데 윤동주의 독서량은 보통 학자들의 2배쯤 된다. 키에르케고르, 도스트예프스키, 맹자, 빈센트 반 고흐, 정지용, 폴 발레리, 투르게네프, 기타하리 하쿠슈 등의 책을 섭렵했다. 특히 맹자는 윤동주가 7살 때 이를 떼었을 정도로 이후 그의 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별 헤는 밤이라는 시는 전적으로 백석, 릴케, 고흐 이 세 사람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를 가게 되는데 이는 최현배에게 사사를 받기 위해서였다. 윤동주는 학생시절 절친인 문익환, 사촌형인 송몽규에 비해 공부에 있어 1등은 아니고 우수한 축에 속했다. 문익환이 숭실학교를 들어갈 때 윤동주는 숭실학교 시험에 떨어져 재수해서 들어갔다. 문익환의 늦봄이라는 시를 보면 윤동주에 대한 평생의 콤플렉스가 있었고 평생 이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한 삶을 살았다. 윤동주가 일본어로 완독한 폴 발레리는 현재까지도 한국에 전체가 번역돼 나오지 않았다. 윤동주는 폴 발레리를 일본어로 꼼꼼히 읽고 일본어와 중국어로 책 곳곳에 메모를 적었다.
묵자(墨子)는 노동자였을 가능성이 높고 그의 책을 보면 노동자철학이 잘 드러난다. 공자의 경우 논어에서 삼년상을 얘기했지만 묵자는 노동자의 삶의 정황을 고려해 세 달을 주장했다. 중국의 사상가 중에 성서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묵자고 그 다음이 맹자다. 정지용은 가톨릭 신자로 두 딸을 수녀로 보냈다. 백석은 세례를 받았다. 투르게네프는 진실한 기독교인으로 시간이 되면 꼭 공부를 해야 할 사람이다. 투르게네프와 톨스토이 두 사람만이 러시아 제정 말기에 수천 명에 달하는 농노를 해방시켰다. 릴케는 기도시를 많이 쓴 사람이다. 최현배는 국어학자로 예문을 들 때 성경을 많이 인용했다. 도스트예프스키는 감옥을 다녀온 이후 성경을 배경으로 그의 대표작들을 썼고 맨 앞에 성경을 인용했다. 키에르케고르는 가슴 속에 늘 유서를 지니고 다닐 정도로 당시 교조화되고 국교화된 기독교 지도자에 맞서 죽음을 각오하고 논쟁을 통해 투쟁했다.
윤동주 시의 가장 밑바닥에는 성경이 있고, 그 위에 동서고근(東西古近)이 그 다음에 계보학이 있다. 계보학은 꿀벌과 같은 것으로 좋은 것을 계속 따먹는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자기가 찾아서 공부하는 것이 계보학의 핵심이다. 윤동주는 철저히 계보학에 따라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읽어가면서 동양, 서양, 고대, 근대의 책들을 종횡무진하면서 엄청난 독서를 했다. 윤동주는 외삼촌 김약연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김수영 시인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으면서 엄청나게 성경을 많이 읽었으며 당시 자신을 지탱해준 책이 성경이라고 했다. 그리고 성경을 함부로 열어서는 안 되는 책이라고도 했다. 니체는 당대의 철학자들을 비판하면서 기억에 의존하는 사이비 철학자라고 비판했다. 칸트, 헤겔 등을 기억하여 인용할 뿐 자기만의 철학을 하는 이들이 없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들뢰즈는 니체와 철학에서 니체를 기존의 철학과 전혀 다르다고 했다. 오늘 강의의 본론인 어떻게 윤동주가 예수를 받아들였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2. 본론(청소년기)
윤동주는 성경을 2개로 봤다. 관주성경은 일본어로 된 것으로 해설과 인용이 달린 것이었다. 윤동주의 초기 시절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김약연목사다. 김약연은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대부 역할을 했다. 안중근이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해 사격연습을 했던 곳이 명동마을이고 이 장소를 마련해 준 것이 김약연이다. 아리랑으로 유명한 나윤규도 김약연이 후원을 했다. 김약연은 우리나라 최고의 맹자 전문가로 당시 독립운동의 대부역할을 했다. 김약연은 맹자를 만독을 했을 정도로 학문에 뛰어났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1년만에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명동마을에 기독교를 전파했다. 김약연이 세운 학교에서 강원용 등 걸출한 인물들이 무수히 배출되었다.
윤동주가 17세 때인 1934년 12월 24일 쓴 시인 ‘초 한대’를 보자.
초 한대 ―
내 방에 품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光明)의 제단(祭壇)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리고도 그의 생명(生命)인 심지(心志)까지
백옥(白玉)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 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가듯이
암흑(暗黑)이 창구멍으로 도망간
나의 방에 품긴
제물(祭物)의 위대(偉大)한 향(香)내를 맛보노라.
첫 구절 ‘내 방에 풍긴 향내를 맡는다’에 나오는 평범한 양초가 마지막 구절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에서 위대한 향내가 된다. 12월 24일은 크리스마스 이브다. 이 시는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를 그린 시이다. 윤동주는 17세에 예수를 강렬하게 만난 것이다. 윤동주는 사촌형인 송몽규가 17살 때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김구에게 간 것을 보고 많은 부채의식을 갖게 된다. 당시 윤동주는 숭실학교에 떨어진 상황에서 사촌형인 송몽규와 비교해 자신의 초라한 처지에 대해 적지 않게 낙담했다. 윤동주는 1935년 9월부터 1936년 3월까지의 기간 동안 그의 전체 시인 113편 가운데 11편을 이 기간 중에 집중적으로 창작했다. ‘조개껍질’ 이라는 시는 대동강 주변에 있는 용수리에 문익환과 함께 겨울성경학교 선생님으로 봉사활동 가서 쓴 시이다. 용수리는 문익환과 윤동주가 손 잡고 기도한 곳이다.
‘이불’이라는 시는 1936년 12월에 쓴 것이다.
지난밤에
눈이 소-복이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 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내리지
당시 겨울 추위는 사람이 얼어 죽을 정도였다. 우풍이라는 말을 요즘 세대는 잘 알지 못하는데 표준어로는 외풍이다. 예전에 겨울에는 겨울 추위가 매서워 방에 불을 때도 집안 온도는 거의 영하에 가까웠다. 윤동주는 그런 눈을 이불이라고 표현한다. 윤동주의 마음은 적까지 사랑하는 따스한 마음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18세의 청년이 눈을 덮어주는 이불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윤동주가 1936년에 지은 오줌 싸개 지도다.
빨래줄에 걸어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 밤에 내 동생
오줌싸 그린 지도
꿈에 가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간 아빠 계신
만주땅 지돈가?
윤동주는 동시를 많이 썼다. 언뜻 보면 아이들의 동심을 묘사한 가벼운 시쯤으로 여길 수 있다. 하지만 2연에서 엄마는 죽었고 아빠는 이국타향에 가있다. 아이들만 고아처럼 남아 있는 집안에서 형이 동생의 오줌 싼 이불을 말리기 위해 빨래줄에 이불을 걸어 놓은 상황을 그려보며 이 시가 결코 가벼이 다가오지 않는다. 윤동주는 동시에서 맹자의 핵심사상인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주제를 녹여 냈다.
호주머니라는 동시를 보자.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갑북갑북은 가득가득의 의성어와 의태어의 조합이다. 선생님이 노숙자분들을 상대로 강의를 하곤 하는데 이분들이 이 동시를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교도소재소자분들, 노숙자분들, 어쩔 수 없이 몸을 팔아야 하는 분들에게 호주머니가 갑북갑북하다는 것이 큰 위로가 되는 것이다.
윤동주는 ‘거짓부리’라는 동시를 썼다. 윤동주는 한자로 尹東柱다. 동시를 쓰면서는 尹童舟라는 한자를 썼다. 그래서 1999년 전까지 두 사람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윤동주의 시에서 제외했다. 이후 유족과 여러 자료를 통해 이 둘이 동일인임이 확인됐다. 이렇듯 윤동주는 자기를 숨기고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윤동주가 쓴 동시 중에 반딧불이 있다.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을 주으러
숲으로 가자.
그믐밤 반딧불은
부서진 달조각
그믐밤은 가장 어두운 시간이다. 달은 그맘밤을 비추는 빛으로 아주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달이 부서져 조각으로 남아 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는 것을 이 시에 담았다. 부모가 자녀에게 모든 것을 아낌 없이 주고 예수님이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셨다. 가장 소중한 것을 쪼개서 주는 것이 참된 것이다.
마태복음 26:26~29을 보자.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반딧불은 이 본문에서 영감을 받아 쓴 시이다.
1937년 3월에 지은 나무라는 시가 있다.
나무가 춤을 추면
바람이 불고,
나무가 잠잠하면
바람도 자오
이 시를 보면 역설적이다. 바람이 불어야 나무가 춤을 추고 바람이 잠잠해야 나무가 잠잠한데 반대로 돼 있다. 나무가 바람을 움직인다는 것은 키에르케고르의 단독자 개념에서 유래한 것이다. 윤동주의 시를 이해할 때 단독자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단독자는 외토리 개인으로도 쓰인다. 윤동주가 쓴 산문을 보면 대장부라는 단어가 나온다. 우리는 윤동주를 떠올릴 때 유약하고 가냘픈 이미지를 떠올린다. 실제 윤동주는 그 반대다. 윤동주는 어린 시절 맹자를 뗄 정도로 맹자의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성경의 존재론은 ‘이다(sein)’이지 ‘되어라(sollen)’가 아니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소금과 빛이지 소금과 빛이 되어라가 아니다. 소금이 되어야 하고 빛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소금과 빛 그 자체인 것이다. 소금과 빛의 관계에서 소금이 먼저고 그 다음이 빛이다. 소금은 小金, 작은 금이다. 소금의 특징은 스스로 녹아 없어지는 것이다. 윤동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키가 컸다. 축구선수도 했고 연희전문 시절 농구선수로 센터도 했다.
3. 대학시절
윤동주는 1938년 5월 10일 새로운 길이라는 시를 쓴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에 그해 4월 8일 입학했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길 새로운길
문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길은 언제나 새로운길
오늘도……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니체는 인생에서 매일 새로움과 풍성함을 찾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고 했다. 이 시는 매일의 일상에서 새로움을 찾아야 함을 말하고 있다.
같은 해 발표한 시 중에 ‘해바라기 얼굴’이 있다.
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 얼굴.
해가 금방 뜨자
공장일터에 간다.
해바라기 얼굴은
누나의 얼굴.
얼굴이 숙어들어
집으로 온다.
이 시에서 주목할 것은 원래 시에는 일터가 아닌 공장으로 돼 있었다는 것이다. 윤동주의 신앙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히 실천적인 것이었다. 윤동주는 대학에 들어간 이후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시에 표현했다. 윤동주가 영향을 많이 받은 빈센트 반 고흐는 성경이 있는 정물화를 그렸다. 목사였던 아버지가 자신이 창녀와 동거하는 것을 알고 부자의 인연을 끊은 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4개월 후에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성서 이사야서와 에밀 졸라의 소설 삶의 기쁨이 불꺼진 촛불과 함께 표현돼 있다. 고흐는 이 그림을 통해 목사인 아버지가 우리가 발딛고 있는 현실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공장(현실)을 모르고 세상을 얘기할 수 없다.
이후 ‘슬픈 族屬’이라는 시를 쓴다.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일제 치하 우리 민초의 고단한 삶의 현실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윤동주가 1938년 6월 19일에 쓴 ‘異蹟’이라는 시가 있다.
발에 터분한 것을 다 빼어 버리고
황혼(黃昏)이 호수(湖水) 위로 걸어오듯이
나도 사뿐사뿐 걸어보리이까?
내사 이 호수(湖水)가로
부르는 이 없이
불리어 온 것은
참말 이적(異蹟)이외다.
오늘따라
연정(戀情), 자홀(自惚), 시기(猜忌), 이것들이
자꾸 금메달처럼 만져지는구려.
하나, 내 모든 것을 여념(餘念)없이,
물결에 써서 보내려니
당신은 호면(湖面)으로 나를 불러내소서.
이 시는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 이적 장면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윤동주는 물 위를 걷는 것이 이적이 아니라 부름의 자리로 불린 그 자체가 이적이라고 말한다. 시 중간에 나오는 연정, 자홀(나라시즘), 시기는 윤동주 내면의 인간적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이 끼니를 거른 후에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셨다. 그리고 자신을 스스로 숨기셨다. 이게 참다운 복음이다. 오병이어의 이적으로 스타의 자리에 올랐을 때 스스로를 숨길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적이 넘어지는 걸림돌이 된다.
1939년 9월부터 1940년 12월까지 윤동주는 시를 쓰지 않는다. 윤동주가 최현배선생을 보고 연희전문학교를 택했는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감옥에 갇힌 후 교직에서 해고당하고 연희전문학교 수위가 된다. 1939년에는 일제가 창씨개명과 국어사용을 금지하고 일본어 사용을 강제하던 때이다. 국어를 사용할 경우 퇴학조치를 당하고, 기차표를 살 수 없고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탄압이 심해지던 시기였다. 윤동주는 1942년 2월에 창씨개명을 한다.
1940년 2월에 ‘팔복’이라는 시를 쓴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永遠)히 슬플 것이오.
혹자는 이 시를 두고 윤동주가 신앙을 잃었다고 보기도 하지만 이 시야말로 윤동주가 복음의 진수를 완전히 깨달은 시다. 같은 날에 쓴 ‘병원’이라는 시를 보면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 준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윤동주가 살던 식민지 치하의 현실 속에서 모든 이들이 겪는 아픔을 의사는 알지 못한다.
오늘날도 시대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는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누구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는 구절처럼 그 자리에 함께함으로 우리는 시대의 고통을 함께 나눠지고 연대할 수 있다. 성경의 예수님은 아픔의 자리에 늘 함께하셨다. 기도와 말씀으로 그치지 않고 그 자리에 늘 함께하셨다. 오늘 우리가 고통의 자리에 함께하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의 소설에 이런 주제가 너무 잘 나타난다.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는 함께함으로 새 아침을 맞이하고 부활에서 네홀류도프백작과 카츄사는 함께함으로 부활의 새벽을 맞이한다. 맹자사상의 핵심은 여민동락(與民同樂)에 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우셨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원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다. 이는 창자가 끊어질 정도로 아파하며 우는 것이다.
1941년 2월 7일에 쓴 ‘무서운 시간’은 갈보리 기도를 연상시킨다. 이웃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기투(企投)하는 다짐이 들어 있다.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이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1941년 5월 31일에 지은 ‘또 태초의 아침’이라는 시가 있다.
하얗게 눈이 덮이었고
전신주가 잉잉 울어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
무슨 계시일까.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아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전신주가 잉잉 울 정도로 하나님 말씀을 체험한 적이 있는가?
이 시를 지은 이후 종로구 누상동 9번지로 정병욱과 함께 거처를 옮긴다. 윤동주가 새로 옮긴 하숙집은 김송의 집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여러 번 다녀온 사람이다. 그런 김송의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주저없이 김송의 하숙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1941년 5월 31일에 지은 ‘십자가’라는 시는 윤동주가 자기를 기투하겠다는 다짐을 담은 시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종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오늘날과 같이 모든 양심이 침묵하는 절망의 시대를 표현한 것이다. 서성거리는 것은 오늘날 가나안신자와 같이 교회의 언저리에서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와 그리스도 중간에 점이 찍혀있는데 이는 갈리리 앞바다의 역사적 예수를 강조한 것이다. “처럼”이라는 조사를 따로 한 구절로 떼어놓은 것은 예수가 아닌 예수처럼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의도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1941년 11월 20일 연희전문학교 졸업을 앞두고 징집돼 전쟁터에 갈 지 유학을 갈 지의 기로에 서서 ‘서시’라고 알려진 실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의 겉표지에 ‘병원’이라고 연필로 쓰고 지운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당시에 병원이라는 말을 쓰는 것 자체가 불온한 것이어서 정식 시집을 낼 때 이를 의도적으로 지운 것이다. 서시의 원제는 ‘병원’인 것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시는 윤동주의 시에 지대한 영향을 준 성서와 맹자의 사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는 것은 맹자의 仰不愧於天을 인용한 것이다.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한다는 다짐은 정말 무섭고 어려운 것이다. 이 정도의 사랑은 혁명을 뛰어넘는 것이다. 진짜 성지는 예루살렘에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죽어가는 것이 있는 현장이다. 혁명은 고독에서 시작된다. 윤동주의 마음이 있으면 이 세상을 얼마든지 살릴 수 있다. 윤동주는 우상화나 상품화의 대상이 아니다. 윤동주라는 정말 참 인간처럼 살 때 이 윤동주의 시를 제대로 읽은 것이다. 예수를 아는 것도 예수처럼 삶을 살 때 제대로 아는 것이다.
김응교 교수의 윤동주와 성경(2016년 10월 18일 하나님나라연구소 강의).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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