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 2009.12.25. 23:04
인간의식과의 투쟁-당당했던 조선여인 나혜석 [1]
나혜석(1896-1946)
나기정(羅基貞)의 5남매 중 2녀로 출생하였다. 14세에 수원 삼일여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오빠의 권유로 일본의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계속 공부하였다.
1914년 일본 유학생 동인지 「학지광(學之光)」에 ‘이상적 부인(婦人)’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여권 운동에 앞장섰다. 1917년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를 조직하고 「여자계」를 발간하였다. 이 회보 2호에 발표한 단편 ‘경희’는 여성적 자아의 발견을 주제로 한 원고지 140매의 작품이다. 김명순의 ‘의심의 소녀’(1917년 11월)보다 4개월 늦었으나 김동인, 염상섭보다 1년 앞선 본격적인 여성소설 1호이다. 그녀의 작품 총 6편 가운데 서간체 소설과 단편소설은 문학사상(文學史上) 그림 못지 않은 위치를 인정 받고 있다.
21세 때 나혜석은 「학지광」의 편집발행인 최승구(崔承九)와 사랑하여 약혼했다. 그러나 그가 결핵으로 일찍 사망하자 나혜석은 충격으로 신경쇠약에 빠져 방황한다. 1918년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함흥의 영생중학교와 서울 정신여학교에서 미술교사를 하였다. 1919년 동경에서 민족독립운동을 계획하고 귀국한 김마리아, 황에스터와 연락이 되어 이화학당 지하실에서 비밀히 모였다. 이화학당 교사 신마실라, 박인덕, 김활란 등과 함께 3ㆍ1운동에 참가하는 등의 독립운동으로 체포되어 5개월간 감옥생활을 했다. 그때 변호사 김우영이 나혜석의 변론을 맡아서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사랑과 결혼, 미술 작품 제작에 열중
동경 유학 시절 이광수와도 염문이 있었으나 결국 김우영과 1920년 결혼하였다. 이때 그는 첫 애인 최승구의 무덤을 찾아 비석 세우기를 요청, 약혼자의 승낙을 받아내고 자신의 과거를 청산할만큼 자신만만했다. 또한 결혼 때 그가 내건 세 가지 조건은 오늘의 여성도 감히 내세우기 어려운 것이었다.
*약혼자가 아니라, 혼인후 나혜석은 신혼여행을
옛 애인의 묘로 갔었다.
-삽입글- *나혜석의 애인 최승구의 무덤은 고흥 남계리에 있었다. 최승구는 나혜석의 오빠 나경석의 친구다.1916년 폐결핵으로 죽게되자 나혜석은 최승구 가족의 요청으로 고흥에 가서 애인 최승구를 임종했다. 그리고 1920년 4월10일 정동교회에서 김우영과 혼인하고 신혼여행 대신 최승구의 묘를 찾아 남편 김우영으로 하여금 애인이었던 최승구의 비를 세우게 하였다. 모단걸 나혜석에게 매달린 김우영도 시대의 소용돌이에 빠진 필부에 지나지 않는다.
즉 일생을 두고 자신을 사랑할 것과 그림 그리는 일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해 둘만이 살 것 등이었다.
이 모든 조건을 쾌히 승낙한 10세 연상의 변호사와의 생활은 말 그대로 행복한 나날이었다. 문예지 「폐허(廢墟)」의 창간 동인으로 활동하는 한편 화가로서도 치열한 창작열을 불살랐다. 1921년 3월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유화 70점으로 서울 최초의 개인 유화전을 개최하여 호평을 받았다.
1922년부터 고희동과 함께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鮮展)에 ‘농가’와 봄ㆍ두 작품을 출품하였다. 1923년에는 남편이 일본외무성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임명되어 만주에서 살았다. 그 해 제2회 선전에서 ‘봉황성의 남문’이 4등 입선했다. 서양화 그룹 고려미술회 창립 동인이 되었고, 1924년 제3회 선전에 ‘가을의 정원’ 등을 출품하여 4등 수상했다. 1925년 제4회 선전에서는 ‘낭랑조(娘娘朝)’로 3등 수상하고 이듬해 제5회 선전에는 천후궁(天後宮)’이 특선하였다. 아울러 단편소설 ‘원한(怨恨)’을 조선문단 4월호에 발표, 왕성한 창작활동을 보였다. 1927년 제6회 선전에 ‘봄의 오후’를 출품하고 남편과 세계 일주를 시작하였다. 그녀는 딸 하나, 아들 셋을 낳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다 이룬 듯 행복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파리에서 수업한 최초의 한국 서양화가
남편과 세계일주를 하다가 혼자 파리에 남아 8개월간 그곳의 야수파 미술을 공부하였다. 1929년 미국,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거쳐 3월에 귀국하여 수원 불교포교당에서 귀국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이어서 1930년 제9회 선전에‘화가촌’‘어린이’등을 출품하고 1931년 제10회 선전에 ‘정원’을 출품하여 특선을 차지했다. 같은 작품으로 일본의 제전(帝展)에서도 입선함으로써 인정받는 서양화가가 되었다. 계속해서 1932년 제11회 선전에 ‘금강산만물상’ ‘소녀’‘창에서’ 등을 출품하고, 세계일주 기행문 ‘구미유기(歐美遊記)’를 잡지 「삼천리(三千里)」에 연재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생애는 문인으로 보다는 아무래도 화가로서 빛을 발한다. 첫 개인전 당시 한국에는 고희동 등 10명 이내의 서양화가가 활동하였을 뿐이었다. 그녀는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하며 천부적인 재능으로 조형어법(造形語法)의 바탕을 다져 나갔다. 선전 출품작은 대개 인상파적 화풍에 대담한 터치와 생략기법으로 주제를 첨예화시킨 것들이어서 남자화가들을 제치고 당당히 입상의 영광을 얻었던 것이다. 더욱이 1923년부터 27년까지 만주 안동현 거주와 세계여행 등이 그녀에게 좋은 창작여건을 마련해 주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특히, 그녀는 파리의 야수파계 미술연구소에서 새로운 예술성에 눈을 떴다. 사실을 주관적 시각으로 재구성하고 활달한 필치와 자유분방한 색채로 표현해냈다. 작품성은 인상파 화풍의 ‘자화상’으로 절정에 달했다. 대상을 단순화시키고 색채를 강렬하게 구사함으로써 화면에 예술적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이다. 그녀의 풍경화에는 섬세한 필선, 밝고 고운 색조, 구도의 신선함이 출렁였다. 유럽의 박물관과 미술관의 엄청난 유산을 통해 30대 초반의 여류화가는 국내 어느 화가도 접하지 못한 감동을 맛보고 이를 재창조해낸 것이다.
나혜석의 여성해방에 대한 관심은 일찍부터 폭넓은 인간관계와 사회적 경험에서 자연스레 싹튼 것이었다. 그녀는 1921년에 일찌기 가부장제의 억압에 있는 여성의 처지를 시 ‘인형의 집’으로 묘사, 매일신보에 발표한 바 있다. 또 1924년부터 26년까지 그녀는 김일엽의 여성의복 개량에 대해 동아일보에 4회에 걸쳐 논쟁, 미술가적 안목으로 조선옷의 특색을 살리자는 비판적 대안을 제시하였다. 그밖에도 서구 중심이나 절대 개방이 아닌 합리적 사고를 강조하여 생활개량에 관한 글도 많이 발표하였다. 이처럼 그녀는 자신의 의견을 서슴없이 개진하는 당당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중국 시베리아 벌판을 거쳐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한 여권운동가를 만나 ‘여성은 위대한 것이오, 행복된 자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녀는 남녀관계, 여성의 지위 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해답을 얻기 위해 혼자 계속 파리에 남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때마침 그곳에 온 천도교 지도자 최린(崔麟)을 만나 파리 시내 관광 등을 안내하면서부터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귀국후 그녀는 여행기 ‘구미유기’에서 영국 참정권 운동에 참여한 영국여성운동가의 활약을 알렸다. 인간평등에 기초한 참정권운동뿐만 아니라 노동, 정조, 이혼, 산아제한, 시험결혼 등 여성문제를 소개하였다. 그 때 그녀는 최린과의 관계를 이렇게 말했다.
“남자나 여자나 다른 사람과 좋아 지내면 반면으로 자기 남편이나 아내와 더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결코 남편을 속이고 다른 남자(최린)를 사랑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나이다. 오히려 남편에게 정이 두터워지리라고 믿었사외다. 구미 일반 남녀 사이에 이러한 공공연한 비밀이 있는 것을 보고… 가장 진보된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또 정조(貞操)에 대해,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 것도 아니오, 오직 취미다. 밥먹고 싶을 때 밥먹고 떡먹고 싶을 때 떡먹는 거와 같이 임의용지(任意用志)로 할 것이오, 결코 마음의 구속을 받을 것이 아니다.’ 는 폭탄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같은 분방한 생각은 남편에게는 물론 당시 사회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1934년 1500장 분량의 ‘이혼고백서’에서, ‘조선 남성의 심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여자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이 어이한 미개의 부도덕이냐…’ 라고 사회적 인습과 몰이해를 통렬히 비판하였다.
1935년에는 사회적 비난과 생활고 속에 방황하며 ‘신생활에 들면서’를 발표하였다. “사 남매의 아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이었더라” 일찍 핀 매화는 꽃샘 추위에 얼어 죽는다던가. 안타깝게도 당시 사회는 결코 이같은 그녀의 급진적 개방사상을 수용할 수 없었다.
나혜석은 신문학을 존중하는 개화되고 부유한 가정에서 기정의 5남매 중 둘째로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도쿄에 유학중이던 오빠 나경석의 권유로 1913년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유화를 전공했다. 유학시절에는 최승구·이광수와 사귀면서 동경 유학생 동인지였던 〈학지광〉에 여권신장을 옹호하는 〈이상적 부인〉 등의 글을 발표했다. 1918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함흥 영생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 미술교사를 지내다가 3·1운동에 참가 후 체포되어 수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1920년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했고, 남편의 도움으로 1921년 서울 경성일보사 내청각(來靑閣)에서 첫 전람회를 열었다. 이 전람회는 서울에서 열린 최초의 서양화전시회로, 〈매일신보〉의 기사에 의하면 "낙역부절하여 인산인해(絡繹不絶人山人海)였다"고 할 정도로 대성황리에 열렸다고 한다. 1923년 일본 외무성 관리가 된 남편을 따라 만주에 거주했다. 어쨌든 3·1운동으로 인해 옥고를 치룬 민족의식이 강한 여성이 친일파인 남편과의 결혼 및 공존은 아이러니한 측면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1927년 모스크바를 거쳐 프랑스·영국·이탈리아·스페인 등을 여행하면서 미술관과 박물관을 견학하고 파리에서는 당시 유행하던 풍조인 야수파 계열의 그림을 그렸다. 참고로 20년 후배인 이중섭도 야수파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도 당시 시대적인 흐름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1~11회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 9번 출품하여 제3회 때 〈가을의 정원〉으로 4등상, 제4회 때 〈낭랑묘 娘娘廟〉로 3등상, 제5회 때 <천후궁 天後宮〉으로 특선을 받았다. 유럽 여행중 사귄 최린과의 만남이 문제가 되어 귀국한 뒤인 1931년 남편 김무영과 이혼했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중의 한 사람이었던 최린은 천도교 도령(道領)으로 1926년에 구미 여행길에 나서 미국을 거쳐 파리에 도착한 것이었다. 일제시대 대표적인 친일파 최린이 1933년 친일을 선언하였으니 최린의 친일선언 이전의 나혜석과의 관계가 문제되었을 것이다. 이혼 당시 나혜석의 나이 35세였다. 그 뒤 사회의 인습적인 도덕관에 저항하는 〈우애결혼, 실험결혼〉·〈이혼고백서〉 등 자신의 입장을 강변하는 글을 발표했으나 보수적인 사회의 냉대로 점점 소외되었다. 1935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시회를 열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그 뒤 친구인 김일엽이 수도중인 수덕사와 해인사 등을 전전하며 유랑생활에 들어갔으나 상당히 곤궁한 생활을 추측할 뿐으로 정확한 행적을 알 수 없다. 1946년 서울 자혜병원에서 행려병자로 쓸쓸히 인생을 50세의 나이로 마감했다.
나혜석의 작품은 크게 1918년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 졸업 때부터 1927년 무렵 만주 봉천 시기까지, 유럽 체류에서 1930년대 초반까지 그리고 미술활동을 거의 중단한 이후의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초기에는 사실주의적 경향의 작품을 그렸다. 1924년 판넬에 제작한 〈만주 봉천 풍경〉은 안정된 구도에 색채의 표현이 부드럽고,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어, 서양화 도입 초기의 사실주의적이고 인상주의적인 화풍을 견고하게 다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1924년작 만주봉천 풍경 ==
유럽 여행을 통해서는 활달한 필치와 과감한 표현으로 점차 바뀌어갔다. (자화상)(1928)에서는 강한 색채의 대비적 효과를 살린 표현기법으로,
== 1928년작 자화상 ==
〈스페인 해수욕장〉(1928경)·〈불란서 마을 풍경〉에서는 거침없는 필치에 자유분방한 기법으로 야수파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 1928년작 스페인국경 ==
== 1928년작 프랑스 마을 풍경 ==
== 1927년작 파리 풍경==
그러나 1931년 이혼 이후 생활과 정신의 불안정을 반영하듯 작품에는 생동감과 활발함이 사라졌으며 작품창작도 거의 하지 않았다. 죽은 뒤에 그의 글을 모아 〈날아간 청조〉·〈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등이 발간되었다. 홈 페이지 - http://www.arthim.com/nahyesuk0.htm 를 참고로 하였음을 밝혀둔다.
1896(출생) 나주 나씨 나기정(羅基貞)과 수성 최씨의 최시의(崔是議)의 5남매( 稽錫, 弘錫, 景錫, 蕙錫, 芝錫 :호적상으로는 계석을 제외한 4남매)중 넷째로, 딸로서는 둘째로 태어났다. 본적은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291번지(지금의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 45번지 일대)이며, 아버지 나기정은 한일합방 전후 군수를 지낸 개명관료였다.
나혜석은 1910년 신학제에 의한 제1회 졸업생 4명중 한명이었다. 현재의 매향여자경영정보고등학교로 바뀜)졸업. 두살 아래인 동생 지석도 함께 진학하여 자매는 함께 기숙사 생활을 했다.
4월 15일 둘째 오빠 경석의 권유로 일본도쿄 '사립 여자 미술학교' 서양화부 선과 보통과 1학년(4년 과정)에 입학했다.
시집 갈 것을 강하게 요구했지만 이미근대적 여성 의식에 눈을 떴고 자아 의식을 가지게 된 데다가 오빠 나경석의 친구인 게이오대학생 최승구(崔承九)와 연애관계에 있었던 혜석으로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여성문예동인지 '청탑'을 중심으로 여성해방론과 신여성 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나혜석도 그러한 지적 자장 안에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휴학했다. 아버지의 엉뚱한 결혼 권유에 맞서 여주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1년간 근무하면서 돈을 모았다. 이해 말 최승구는 결핵 병세가 악화되어 조선으로 돌아가 전남 고흥 군수로 있던 형 최승칠의 집에서 요양함. 도쿄에서 학교 생활을 하다가 도중에 잠깐 빠져 나온 것인데 나혜석이 방문한 다음날 최승구는 25세로 죽어 전남 고흥읍 남계리 오리정 공동묘지에 묻혔다. 이후 오빠의 강력한 권유로 서로 도쿄와 교토를 오가며 만남. 중간에 이광수와도 가까워졌으나 오빠 나경석의 반대로 이광수와의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유학생 모임인 학우회의 망년회에 참석했던 소감을 쓴 것임. 필명으로정월(晶月,c.w)이란 호를 사용했다. 8월 경에 건강이 안 좋아 그만 두고 집에서 그림 공부를 했다. '초하룻날'이란 주제로 4회, 모두 9점의 만평을 연재함. 신준려(이화학당 교사), 황에스터(黃愛施德, 호적명 황애덕,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학생), 김마리아(정신여학교 출신 동경유학생)등과 이화학당 지하실에서 비밀 회합을 가지며 3.1운동에 여학생 참가 계획을 추진하다가 체포되었다. 8월 4일 5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경성지방법원의 「면소 및 방면」결정으로 풀려남. 풀려 난 뒤 정신여학교 도화(미술)교사로 재직. 나혜석과 김우영은 이 날의 동아일보에 청첩장을 내었고 또한 같은 신문에 이들의 사진과 함께 결혼 소식이 보도되었다. 결혼 후 신혼 여행 대신 김우영과 함께 전남 고흥군에 있는 최승구의 묘지에 찾아가 비석을 세우고 돌아왔다. 여름, 첫 딸 나열을 임신한 탓인 듯 정신여학교를 그만 두었다. 신여자 제4호에 발표(3월 집필). 동지에 <김일엽 선생의 가정생활>을 그린 4장의 목판화를 발표했다. 임신을 했다는 초조감으로 2개월간 일본 생활. 이 시기가 가장 알차게 공부한 보람된 시기라고 회고함. (조선총독부의 일어판 기관지로 한글판은 매일 신보이다) 내청각에서 유화 개인전람회를 열었다. 이는 우리나라 서양화 전시회로서는 평양에서 열린 김관호의 전람회 다음인 두 번째, 서울에서는 처음으로 열린 유화 개인전이었다. 그림 70여점이 전시 되었고 높은 값에 작품들이 팔렸다. '양화 전람에 대하여'(「매일신보」3.17)발표 「매일신보」가 입센의 희곡을 「인형의 가(家)」란 제목으로 번역 연재하면서 제일 마지막회에 나혜석에게 가사를 지어줄 것을 청탁하여 4월 3일자 신문에 노래 가사 「 인형의 가」를 발표했다. 이 가사에는 김영환이 작곡한 악보가 함께 실렸다. 이 소설은 제2호에 계속 연재될 예정이었으나 「신가정」 제2호가 나오지 못함으로써 미완상태다. 반박하는 글 「김원주 형의 의견에 대하여 - 부인의복 개량문제」를 「동아일보」 (9.21-10.1)에 발표. 9월 일본 외무성의 관리로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 만주로 이주. 안동현 부영사 사택에서 살기 시작했다.
<봄><농가>가 입선했다. 이 분야에는 입상은 없고 입선만 61명이었는데 그중 조선인은 나혜석 외에 고희동과 정규역이 있을 뿐이었다.
== 1922년작 농촌풍경 ==
심리적 육체적 변화를 솔직하게 기록하면서 '모성'의 신화를 부정한 「모(母)된 감상기」(「동명」 1923.1.1-1.21)를 발표했다. 이에 반박하는 글 「백결생에게 답함」(「동명」1923.3.18)을 발표했다. 나혜석 김우영 부부가 도움을 주었다는 회고가 있음. 「강명화의 자살에 대하여」(「동아일보」1923.7.8)발표. 「견우화」에 표지 그림 <견우화>를 그림 「개벽」1924.7)발표. 미전을 위해 오랜 만에 서울에 온 감상을 기록한 것임. 첫 아들 선(宣) 낳음.
- 남편 김우영과 나혜석 -
(「조선일보」1926.1.3)으로 발표, 여성의 해방을 위해서 생활 개량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담음 「생활개량에 대한 여자의 부르짖음」(「동아일보」1926.1.24-30)을 발표했다. 여성에 대한 인습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구여성의 비극을 다룬 작품이다. 이 무렵 화가로서의 재능이나 예술 행위의 목적 등에 대한 회의가 생기고 예술에 대한 이해가 없는 남편에 대한 불만도 쌓이고 있었다. <지나정(支那町)>이 입선했다. 자신의 창작 과정을 쓴 「미전 출품 제작 중에」(「조선일보」 1926.5.20-23)발표. 남편 김우영의 성격을 소개하는 글이다.
1927(31세) 동래 시집에서 지내며 구미 여행을 준비함. 일본 외무성에서는 가끔 벽지 근무자에게 위로 여행을 보내주는데 김우영에게도 그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무감사 입선이란 전해에 특선한 작가에게 주는 예우이다. 「경성 온 감상의 일편」(「동아일보」1927.5.27)발표. 나열, 선, 진의 세 아이는 칠순의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남편 김우영을 따라 나선 길이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7월 파리에 도착했다. 김우영은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가고 나혜석은 파리에서 야수파의 화가인 비시에르의 화실에 다니면서 그림 공부를 했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중의 한 사람이었던 최린은 천도교 도령(道領)으로 1926년에 구미 여행길에 나서 미국을 거쳐 파리에 도착한 것이었다. 나혜석은 최린과 함께 파리관광을 하였다. 영어를 배우면서 여성 참정권 운동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진다. 파리의 비시에르의 화실에서 그림 공부를 하면서 나혜석의 그림은 야수파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유럽여행중의 소산으로 <스페인 국경>, <스페인 해수욕장>, <무희>, <파리 풍경>, <나부>등의 유화가 남아 있다.
== 1928년작 무희 ==
== 1928년작 나부, 자화상 ==
== 1927년작 파리풍경 ==
요코하마항 도착. 1주일 정도 도쿄에 머무른 뒤 김우영은 무직자로 변호사 개업준비를 하느라고 서울에 머물러 있었다. 혁명과 건설의 도시 파리의 산물임을 기념하여 이름을 '건'으로 지었다고 한다. 「구미를 만유하고 온 여류화가 나혜석 씨와의 문답기」가 실렸다. '구미사생화 전람회'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구미 여행중 그린 그림과 수집한 그림(복제품)을 함께 전시했다고 한다. 동아일보 수원 지국 주최, 중외일보 수원지국 후원 1930(34세)
경제적으로 곤궁했고 파리에서 있었던 나혜석과 최린의 연애에 관한 소문이 조선 사교계에 퍼져 나가면서 나혜석과 김우영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동아일보」3.28-4.2)발표. 이후 수 차례 나혜석은 구미 여행기를 쓴다. 파리의 풍경을 그린 <화가촌>이 입선했다. 이혼의 비극을 예방하기 위해 시험결혼이 필요하며, 시험결혼기간 동안에는 산아제한이 필요하다는 조선의 인습을 뛰어넘는 발언을 하고 있다. 서울에서 이미 다른 여성과 살림을 차리고 나혜석에게 이혼을 요구했고, 결국 나혜석은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그 뒤 나혜석은 만주 봉천에서 살고 있는 오빠 나경석에게 가서 잠시 머물렀다. 1931(35세)
다시 일제의 관료로 들어갔다. 전라남도 이사관이 되어 전남광주로 갔다. 이후 1940년까지 김우영은 광주에 살면서 산업부의 산업과장, 상공과장, 수산과장, 농촌진흥과장을 지냈다. <정원>특선 소식은 이혼 후의 나혜석에게 큰 기쁨과 힘이 되었다. (「삼천리 」1931.11)을 발표했다. 이미 한번 발표했던 글이나, 이혼 후 전업화가로서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덧붙이고 있다. 1932(36세)
「파리의 모델과 화가 생활」발표(「삼천리」1932.3-4) 그리 영광스러운 일은 아니었고 나혜석의 그림에 대한 평도 그리 좋지 못했다. 나혜석 또한 미전 제도에 대한 비판을 담은 글을 썼다. 혼미 저조의 조신미술전람회를 비판함」(「동광」1932.7)을 발표했다. 그림을 3,40점 그렸는데 머무르고 있던 집에 불이나 10여점밖에 건지지 못해 애통해하고 이때의 충격으로 몸도 아프게 되었다. 구미 여행의 기행문 「구미 유기」를 연재했다. 1933(37세)
(「신동아」1933.1)발표. 구미 여행시 베를린에서 맞았던 정월 풍속을 소개하는 글 '베를린의 그 새벽'(「신가정」1933.1)발표. 이혼과 화재의 심적 타격으로 수전증이 생겨 왼팔의 부자유를 느끼면서도 미술 개인 지도를 하는 한편 주문을 받아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했다. 「모델」(「조선일보」1933.2.28)을 발표. (「신동아 」1933.4)을 발표. 출품을 하지 않았는지 입선하지 못했는지 입선자 명단에 나혜석의 이름은 찾을 수 없다. 이후 조선전람회에서 나혜석의 그림을 볼 수 없게 된다. 대신 선전에 대한 평인 「미전의 인상」(「매일신보」1933.5.16-5.21)을 썼다. 도쿄 유학시절 일본인 화가 사또가 자기를 연모하면서 일어났던 사건을 회상하여 쓴 것임. 발표를 주선해 줄 것을 부탁했다고 하나 발표되지는 않은 것 같다. 개성 <선죽교>를 그림.
== 1933년작 선죽교 ==
「떡 먹은 이야기」가 당선되었다. 상금은 2원이었다. 「베를린의 그 새벽」과 유사한 내용이다. (「중앙」 1934.5)발표. 수원에서 삼일 여학교를 다니던 시절 삼일학교를 다녔던 남학생에 얽힌 추억담이다. (「월간 매신」1934. 8)을 발표했다. 김우영을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하고 이혼하기까지의 개인적인 생활과 심경을 솔직하게 쓰고,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정조관념을 비판화함으로써 사회적으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소송을 제기했고 이 사실이 9월 20일자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다. 최린의 압력으로 동아일보의 기사는 삭제되었고, 나혜석은 소송 취하조건으로 최린으로 부터 수천원을 받았다고 한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가 얽혀 있는 조선을 떠나 미래를 향해 다시 파리로 가고 싶다는 희망과 의지를 담은 글이며, 이혼 후 자신이 겪은 조선 사회의 인심을 비판하면서 인습에 얽매인 정조관념의 해체라는 한 시대를 앞선 주장을 했다. 수원 서호 근처에 집을 마련하고 약을 먹고 그림을 그리며 지냈다. 파리에 가고 싶다고 하던 나헤석이 파리에 가지 못하고 수원에 거처를 마련한 이유는 경제사정 등 여건의 불비함이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몇 년 간 아이들을 보지 않고 살 수는 없어서 였다. 「이성간의 우정론-아름다운 남매의 기」발표. 200여점을 전시했으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첫 아들 선, 폐렴으로 열 두 살의 나이로 요절. 구미여행 당시 있었던 일과 조선에 와서 다시 최린을 만났던 일을 소재로 한 희곡이다. 1936(40세)
「프랑스 가정은 얼마나 다를까」(「삼천리」1936. 4) <수원 서호> <인천풍경> <별장> <화령전작약> 등의 그림이 남아 있다.
== 1933년작 인천풍경 ==
==1935년작 화령전작약 ==
== 1935년작 별장 ==
이혼 후 하숙하고 있던 집에서의 경험을 소재로 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하숙집 주인 여자가 딸을 시집 보내려 하나 신식 공부한 딸이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아 일어나는 갈등을 그린 소설이다. 이해 언젠가 시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동래로 달려갔으나 김우영의 완강한 거부로 상청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다. 이해 말, 김일엽을 찾아서 수덕사 견성암으로 갔다. 1943년까지 주로 수덕사 밑의 수덕 여관에 몸붙여 있으면서 그림을 그리고 또 해인사, 다솔사 등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렸다.
== 1937년작 다솔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