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법칙-김문훈 목사 포도원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하박국 3장 17-19절】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설교 한눈에 보기
간추린 내용
사람들은 언제나 최대의 욕심을 가지고 살아간다.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욕심을 부리다 결국 좌절과 낙망을 경험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소유의 기쁨이 아닌 존재의 기쁨을 누려야 한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어떠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오직 여호와 한 분만으로 만족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시대가 어렵고 고난을 당할지라도 성도들이 열매와 결과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최소한의 감사를 회복할 때 진정한 행복을 누릴 것이다.
설교의 목적
성도들로 하여금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한 분 만으로 감사할 줄 아는 삶을 살아가도록 격려한다.
청중의 적용 포인트
나는 작은 것에서부터 감사하는 사람인가?
생물학에는 리비히의 ‘최소량의 법칙’(Law of minimun)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생물이 성장할 때 여러 가지 영양소가 필요하지만 단 한 가지만 부족해도 그 최소량의 영양소에 의해 성장에 지배를 받는다는 법칙입니다. 예컨대, 다른 영양분을 아무리 많이 섭취할지라도 철분이 모자라면 빈혈이 걸리고 성장호르몬이 모자라면 키가 제대로 크지 못합니다.
옛날 유럽의 물통은 10㎝, 20㎝, 50㎝, 1m 등 높이가 다른 여러 개의 다른 송판들을 붙여서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물이 어디까지 차겠습니까? 물통에 물을 담았을 때 제일 낮은 높이의 송판까지만 물이 차고 나머지는 다 흘러내립니다. 사람이 아무리 맛있는 것을 많이 먹는다 해도 영양소 한 가지만 부족하면 그것 때문에 건강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 하나님 앞에 감사할 것이 얼마나 될까요? 지금 이 시대는 감사하는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감사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어려워하고 힘들어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세계경제가 위기라고 합니다. 구조조정이 되고 감원과 해고의 바람이 부니까 미국에서는 구두닦이가 성업 중이라고 합니다. 언제 구조조정이 될지 모르니 구두라도 반질하게 해서 항상 반듯하게 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만큼 이 시대가 어렵고 힘든 시대이고 감사하고 기뻐할 일이 별로 없는 시대임을 보여줍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이 요즘과 비슷한 배경입니다. ‘하박국’이라는 말은 원래 하나님께서 안아주시고 감싸주시고 위로해주신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의 여러 선지서들 중에서 하박국서에는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박국이 살던 여호야김시대는 북쪽 이스라엘은 이미 망했고 남쪽 유다는 멸망하기 전, 끝에서 세 번째 남은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는, 종말의 시대였고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급속도로 부강하게 되면서 국제적으로도 긴장감은 고조된 상태였으며, 남유다 백성들이 70년의 포로로 끌려가기 직전의 시대이기에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나라가 어려움에 빠진, 감사할 것이 거의 없는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박국은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하박국서는 의문부호로 시작하여 감탄사로 끝나고, 질문으로 시작하여 응답으로 끝나고, 문제로 시작해서 기도제목으로 연결이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고난을 당해야하는지, 왜 심판을 하실 때 바벨론 같은 불의한 나라들을 들어서 의로운 사람을 심판하시고 정작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시는지, 나쁜 사람들은 왜 형통하고 잘되는지를 하나님께 계속 질문하는 중에 하나님께서는 말씀 가운데 답을 주십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 3:17)
말씀에서 없으며, 없으며,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최대의 욕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자가 되어야 되고 성공 하려고 최대한의 욕심을 부리면서 살아가지만 오늘 성경에서는 남보다 우월함과 많이 소유하고 있음을 얘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세월이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기에 많다고, 있다고, 된다고 좋아하지 말고 여호와 한 분만으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소유의 기쁨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기쁨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유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사람들의 상식적인 생각이지만 욕심은 부릴수록 점점 끝이 없습니다. 거지근성이 있으면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픈 것입니다. 감사는 오히려 최소한에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것에서 감사를 회복하면 작은 것이 차별화를 만들고 특성화되어 틈새시장을 개척해 간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는 순간에는 어떤 직장에서 근무를 했는지, 어떤 직책까지 승진을 했는지, 얼마만큼의 소유를 가지고 있었는지가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마지막 구원의 순간이 중요한데, 사람들은 구원보다는 이 땅에서 행복하고 배부른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렇기때문에 하나님은 하박국을 통해서 “너희는 결과와 소유를 말하지만 그것 때문에 좋아하지 마라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구원의 하나님만을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9)
19절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차원을 높이고 생각의 차원을 높이라는 말씀입니다. 높이 올라가면 시야가 트이고 보는 관점이 달라집니다. 은혜를 받고 영성이 높아지고 영안이 열리면 보는 것이 달라집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늙은이도 꿈을 꾸고 환상과 비전을 가지기 때문에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보는 시각에 따라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복을 주시기 전에 먼저 보여주십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기에 바라보고 꿈을 꾸면, 세월이 지난 후에는 꿈꾸는 만큼 실제 상황이 바뀌기 때문에 생각의 차원을 높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감사할 것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높은 곳이 제일 좋은 곳이라고 합니다. 높은 곳은 군사적으로 방어하기 좋고, 이슬이 맺히고 풀이 있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자원이 풍부하고 안전한 곳입니다. 믿음의 차원을 높이고 생각의 수준을 높여야하는데, 정작 우리는 살아가면서 엉뚱한 것에 슬퍼하고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법칙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내가 사업이 잘되어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있고 내 발로 걸어서 스스로 교회에 오는 것이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심각한 질병을 앓고 죽음의 단계를 경험해보면 밥 먹고 소화 잘되고 제 시간에 화장실 가는 것조차도 얼마나 감사한줄 모릅니다. 성도의 행복은 대단하고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에서부터 감사를 찾아야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최대한을 꿈꾸기에 욕심 끝에 실망하고 절망할 때 낙망이 옵니다. 욕심을 부리면 사람이 비참해지기에 최소한의 기본적인 것부터 감사하고 생각의 격을 높이면 감사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것이 인격의 크기입니다.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지는 아파트 5층의 높이를 7층으로 만들 정도로 아파트를 작게 만듭니다. 일본사람들은 마른수건을 짜도 물이 나온다고 합니다. 절약정신이 몸에 배어서 검소하고 실용적으로 살아가고 허세를 부리지 않기에 실용적으로 잘 산다고들 합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본질적인 감사가 회복되면 그곳에서 자생력이 생깁니다. 어떤 목사님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과 질병에 걸린 것과 공부를 많이 못한 것이 정말 감사하다고 고백합니다. 그것 때문에 기도하고 겸손해지고 입을 넓게 열다가 큰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자와 죄인의 차이는 감사제목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자기 죄를 합리화하고 변명하지만 성자들은 아무것도 아닌 일에 미안해하고 죄송해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도 감사하고 눈물 흘리는 사람이 착한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차이는 생각의 차이에서 나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감사하고 노래하는 사람이 있고 대단한 것을 가지고도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최소한의 법칙으로 보면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 자체가 황홀하고 행복한 일입니다.
주일날 내발로 걸어서 스스로 교회에 올 수 있는 것만해도 건강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내가 가진 소유적인 개념으로 감사하지 말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기본을 가지고 최소한의 감사를 하면 최대의 공감이 나타납니다. 때로는 아플 때도 있지만 걸어서 교회올 수 있으니 감사하고, 생활에 어려운 점이 있지만 마음만은 여유가 있으니 감사하고, 죽지 않고 살아있고 쓰임 받으니 감사하고, 부름 받음이 감사한 것입니다. 최대한의 욕망으로 나갈 때 문제가 옵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시지만 작은 자를 불러 강하게 쓰시고 미련한자를 지혜롭게 쓰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작은 것에서부터 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경상남도 창원에 창신 중·고등학교, 창신대학이 있습니다. 이 대학은 데이비스라는 선교사로 인해 세워진 것입니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선교를 위해 한국에 왔지만 다섯 달에 걸쳐 한글을 배우고, 그 이후 한 달 만에 부산에서 죽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제자와 후배가 와서 데이비스 선교사를 대신해 선교하고 의료 활동을 하면서 세운 것이 일신병원과 창신대학입니다.
전주의 예수병원도 설대위 선교사가 세웠습니다. 언더우드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한국에 와서 우리나라 최초의 고아원과 출판사, 신문사 그리고 경신중·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의 밀알이 떨어지고 썩어서 죽으면 열매를 맺습니다.
땀 흘림 없이는 성공이 없고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하심이 없고 눈물의 기도가 없이는 응답이 없습니다. 한사람이 죽어서 피 흘리고 순교하면 비록 그 사람은 죽었지만 그 사람 밑에서 새로운 족보가 만들어지고 문화가 달라집니다. 한 사람이 헌신하고 희생할 때 위대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한 사람 때문에 문화가 달라집니다.
부산의 복음병원은 장기려 박사가 6.25때 남한으로 피난 온 후 천막을 치고 사람들의 병을 치료한 데서 시작됐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동안 북한에 있는 가족들에게는 가지 못하고 평생을 환자들을 위해 헌신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최초의 의료보험을 만들었습니다. 이길녀라는 분은 시집도 안가고 ‘내 평생 드릴 것은 없지만 내 몸을 드리겠다’고 서원하고 길 재단, 가천의과 대학을 설립하고 1,500여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는 기관을 만들었습니다.
전라도 어느 작은 섬의 문준경이라는 여성은 아기를 못 낳고 남편에게 쫓겨납니다. 그 분은 목포 유달산 밑에서 삯바느질을 하다가 예수님을 믿고 난 후 전도하기로 마음먹고 자기가 소박맞은 곳으로 가서 6,000명을 전도하였습니다. 6.25때 바닷가에서 순교당할 때 그분의 별명이 늙은 씨암탉이었습니다. 많은 씨앗을 남겼다는 뜻이죠. 그분 밑에서 김준곤 목사가 나왔습니다.
김준곤 목사는 훗날 한국C.C.C 총재가 되어 수백만 명을 가르쳤고 그분 밑에서 많은 지도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김인중이라는 학생이 예수 믿고 은혜 받아 목사가 되어 개척한 안산동산교회는 지금 만 명이상이 출석하는 건강한 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또한 안산동산교회에서 안산동산고등학교를 설립했는데 그 학교가 지금은 명문학교가 되었습니다.
김인중 목사님이 주창하는 운동이 큰 숲 운동입니다. 농부가 심는 씨앗 중 제일 작은 것이 겨자씨인데 이것이 자라서 나무가 되고 숲을 이루어 새들이 와서 깃들인다는 것입니다. 숲을 만들어야 먹을 것이 생기고 그늘이 지고 사람들이 살아갈 수가 있듯이 한 사람이 그렇게 변화의 과정을 이끌어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있는 것과 되는 것, 많은 것을 말하기보다는 없는 것, 기본에서부터 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아파본 사람이 건강의 소중함을 알고 돈이 없어 쩔쩔매어본 사람이 만원이 귀한 줄 알듯이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여호와 한분만으로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건강하다고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물질이 있다고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있다고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감사할 때 무엇으로 감사해야할까요? 세계경제가 불안하고 혼란한 시대이지만 이럴 때 일수록 열매와 결과만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최소한의 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살아 있는 것이 감사하고 아직도 쓰임 받는 것이 귀하고 주변에 가족이 있으니 감사하다고 생각됩니다. 자꾸 열매와 소출을 얘기하니 인간관계가 짜증이 나고 감사가 없어지니 서로 미워하고 갈등하게 됩니다. 하박국서의 마지막 절인 19절 끝부분을 보십시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합 3:19)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하박국서는 의문부호로 시작하여 감탄사로 끝나고 질문과 오해로 시작되어 아름다운 응답으로 끝이 납니다. 지휘자의 까칠한 성격이 오히려 독특한 카리스마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악장에 맞추었다는 것은 지휘자에 맞추어 개성이 되고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서에서는 조건이 좋아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최소한의 감사를 하면 최대한의 기쁨이 나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자꾸 큰 것과 많은 것을 따지지만 진정한 행복은 조금만 여유를 가지면 누구나 느낄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영양소만 결핍하여도 여러 가지 병리증상이 나타나고 성인병이 생기지만, 이를 예방하고 싶다면 최소한의 것을 잘 보완하면 됩니다.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신대륙에 처음 들어갈 때에, 항해 과정과 정착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척박한 땅에서 농사를 짓고 처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린 것이 추수감사절입니다. 이처럼 감사할 여건이 없고 여러 가지 애로사항이 많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소박한 감사가 필요합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존재 자체가 신비고 살아가는 자체가 축복이라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각박한 마음과 욕망을 가지고 살아가면 누구인들 만족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기본적인 원판을 찾아서 작은 행복을 만드는 일부터 시작해야합니다. 가장 큰 행복의 비결은 최대한이 아니라 최소한의 감사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감사를 배우는 길은 자신이 고생을 해보고 밑바닥에 내려가 보면 감사하게 됩니다.
오늘 이 시대에 최소한의 감사를 회복해야 성도들의 삶이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못하는 것과 없는 것만을 생각하니 매사가 불평으로 생각되어집니다.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시기에 주신 자도 여호와시고 취하신 자도 여호와이시지만 우리는 하나님보다는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 보따리를 가지고 크고 작음을 비교하고 불평합니다. 하박국의 감사는 기본적인 것이고 최소한의 감사입니다.
기본적인 감사를 하고 들어가면 모든 것이 신비롭고 감사합니다. 내 마음에 짜증과 원망이 생기면 모든 것에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감사가 회복되면 세상에 멋진 분들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이 다 아름답지만, 내가 불평하고 원망하기 시작하면 세상에 부족한 것만 보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따라 보이는 시각이 너무 다르게 보입니다. 사람의 눈이 작은 것 같아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면 열방을 가슴에 품고 수천 명을 내 눈에 담을 수가 있지만, 마음이 닫히면 한사람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합니다. 그렇기에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생명을 주시고 구원해 주셨기에 우리는 감사해야 할 뿐입니다. 그럴 때에 믿음으로 구원받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과 큰 것을 가지고도 불평하는 사람은 삶의 품격과 차원이 다릅니다. 하박국의 감사처럼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감사하고 하나님 한분만으로 감사하고, 때로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정상으로 이끌어 가기위해 고통을 주실 때에도 그 고통에 대해서 이해하고 감사해야합니다.
장미꽃의 가시에도 감사하고 거절하신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의 마음속에 감사는 사라지고 없는 것과 안 되는 것 그리고 못하는 것을 불평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가정에서도 불편하고 교회에서도 외톨이로 살아가기가 쉽습니다.
하박국의 시대는 감사할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고 종말론적인 때요, 말기적 현상이 농후하게 나타나는 시대였습니다. 백성은 도탄에 빠졌고 적군은 가까이 와있고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는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을 찾아가고 최악의 컨디션에서 감사를 찾아가는 것이 최소한의 법칙입니다.
기본에 충실하면 살아있는 것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병원 중환자실에는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는 사람이 허다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걸어 다니는 것이 감사하고, 몸에 병은 있고 약함은 있지만 쓰임 받고 부름 받은 것이 감사한 것입니다. 이렇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병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내가 아프다고 약하고 없다고 부족하다고 짜증을 내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마이너스로 돌아갑니다.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흘러가면 소화도 안 되고 열등감이 생기고 수치스럽고 죄책감이 생겨서 점점 위축됩니다.
성경은, 비록 지금 내가 기진 것이 없을지라도 하나님 한분으로 말미암아 감사를 회복하고 회복과 치유의 노래를 부를 것을 이야기 합니다. 하박국은 감사할 것이 거의 없는 현실이라 할지라도 존재론적 감사를 하고 기본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내게 주신 것을 헤아려서 감사해야함을 말씀해 주십니다. 감사가 회복되면 입술의 감사가 되고 노래가 되고 찬송이 흘러나오고 그런 사람은 가족관계도 원만해지고 사회생활도 따뜻하게 되고 신앙생활도 뜨겁게 하게 됩니다.
오늘 이 시대에 최대한의 욕망을 꿈꾸지 말고 최소한의 감사를 회복하고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노래하고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