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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에는 사진들이 있어 덜 심심할텐데 딱딱해서 읽기가 힘들겠는데 우짜믄 좋십니꺼?
제51회 문학기행( 다산 정약용 그리고 남이섬)
시대를 초월한 겨레의 큰 스승 - 2011. 2.12 작성자 : 윤 고방(창혁) -
다산(茶山)의 산정(山頂)을 바라보며
경인년에서 신묘년으로 넘어오는 세월의 고갯길은 숨차도록 가팔랐다. 50년 만에 찾아 온맹추위와 싸우는 지상의 온갖 목숨들이 움츠린 채 오래오래 떨었고, 보이지도 않는 구제역의 손길에 생떼 같은 가축들을 무척 많이도 잃었다. 그렇게도 긴 어둠을 헤쳐 나오니 이제 터널의 끝이 보인다. 입춘이 지난 지 일주일, 그 겨울 끝자락이 아직 남기는 했지만 어디선가 온기 있는 봄의 손길이 51회 우리들의 문학기행을 손짓하고 있는 듯하다.
이번 제 51회 문학기행은 우리 민족의 스승인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와 실학박물관을 을 찾아 경기도 남양주로 가서, 깊고 넓은 다산학의 향기에 흠뻑 취한 다음, 뒤 이어 한국 영화의 진면목을 마주하고, 오후에는 가평군 남이섬으로 가서 별나고도 경이로운 예술의 향기에 취해 보는 여정이다.
다산 선생의 위대한 심혼이 짙게 배인 유적지를 지척에 두고 평소에 매양 오고가면서도, 그분의 학문과 문학에 대해 좀 더 정성스런 천착의 시간을 갖지 못했던 죄책감이 이번 문학기행의 저변에 깔려 있었다. 이런 길라잡이의 고백이 진정이라고 믿는다면, 대구시인 권기호(1938~ )의 대표작인 다음 시가 가진 의미가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시 법 (詩 法)
그 산정은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다
노련한 알피니스트들도
그 발밑에서 점심이나 먹고
돌아올 뿐이다
<중 략>
더구나 그 우주의 벽은
어디쯤에서 닿을 수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지금 보내고 있는 가장 강한 전파로도
다만 은하계와 은하계가
끝없이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만
추측할 뿐이다
다산 유적지에서 - 문화원, 기념관, 생가. 묘소
낮 시간이 짧은 동절기엔 수도권 일원으로 기행지를 잡기로 한 계획에 따라, 시대를 초월한 계레의 큰 스승이신 다산 선생을 이제야 찾게 되었다. 시원스레 뚫린 올림픽고속도에 올라 팔당댐을 향해 달리면, 겨우내 흰 눈에 덮여 멈추어 버린 듯하던 강물은 군데군데 푸른 등줄기를 보이며 흐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어떤 매서운 추위에도, 혹독한 역사적 수난에도 결코 멈춘 적이 없는, 어딘가 비장미를 간직하면서도 믿음직스런 한강이다.
터널 뚫린 새 길을 두고 강변을 따라 구불구불 운치 있는 옛길을 7~8km 가면 마현리(마재길) 너머 다시 아늑한 강변이 열리는데, 여기가 바로 정약용 선생의 생가가 자리 잡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다산유적지이다.
고풍스런 입구를 들어서면 다산문화원과 다산기념관이 먼저 일행을 맞는다. 최근에 지어진 어느 기념관에 비해 외양은 그저 조촐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내용물들은 눈길을 단번에 잡아끄는 마력을 지닌 듯하다. 정치, 경제, 문학, 학술, 과학, 의학, 토목 건축학 등 다산의 폭넓은 관심과 500권이 넘는 방대한 저작물을 비롯해 기발한 발명품들 앞에서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일찍이 사학자 위당 정인보 선생은 “다산 한 사람에 대한 연구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근세 사상사의 연구요, 조선의 심혼(心魂) 또는 성쇠존망(盛衰存亡)에 관한 연구다.”라고 말했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선생을 알지 못하면 근세 학문과 사상은 물론 근세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의 참모습과 특히나 당시 관리들의 천인공노할 횡포와 서민들의 고통과 염원이 무엇이었던가를 알지 못할 것이다.
기념관을 나오면 꽤 널찍한 광장 중앙 뒤쪽으로는 가슴 높이의 석대 위에 꼿꼿이 앉은 채로 책을 펴 들고 강 건너 먼 곳을 응시하는 모습으로 다산의 조각상이 자리하고 있고, 왼쪽 뒤로는 사당, 오른쪽으로는 그의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이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서 있다. 여유당 뒤쪽으로 자그마한 동산 하나. 눈 녹은 계단 길을 잠시 오르면 거기에 선생의 묘소가 있다. 솔숲이 둘러 싼 안쪽으로 단정하게 돌담을 두른 정갈한 안식처다.
소나무 상수리나무들 사이 동쪽으로는 두물머리의 너른 물길이 보이고, 남쪽으로는 남한강 북한강 두 물이 만나서 팔당으로 서울로 바다로 흘러드는 곳이다. 인도양과 태평양이 만나는 곳, 아프리카 대륙의 희망봉 같은 자리, 지도에서 보면 흡사 여인의 젖무덤 유두같이 생긴 그곳이 풍수학상으로는 어떤 자리일까 궁금해진다. 겨레의 영원한 대석학이 태어나고 또 묻힌 자리이니 틀림없이 명당일 것이라는 우자의 예측이 결코 빗나가지 않을 듯싶다. 더구나 눈 아래로는 최근에 세워진 실학박물관이 선생의 품 안에 안기듯 엎드려 있으니, 지하에서도 흐뭇하여 후손들의 정성에 고개를 끄덕이실 것만도 같다.
정다산의 문학 세계 - 문학가로 빛나는 전반기
1762년 6월, 선생은 이곳 여유당(與猶堂, 당시는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유학자이자 진주목사였던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자화상으로 유명한 선비화가 공재 윤두서의 손녀였으니, 부계와 모계의 남다른 혈통을 이어받아 태어났기 때문인지, 일곱 살 때부터 시를 짓기 시작하여 열 살 때는 <삼미자집(三尾子集)>이란 시집을 엮어내기도 했다.
천재 소년 정약용은 한창 왕성한 배움의 시기인 15세 때부터 남인의 명사들과 교유하는 한편으로, 매부 이승훈을 통해 성호 이익의 유고를 접하고서 사숙(私淑)하게 됨으로써, 실학이라는 거대한 흐름의 원류에 접하게 되는 것이다. 22세에는 회시(會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28세에는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급제를 한 정약용은, 인재를 소중히 여기던 영명한 임금 정조의 총애와 신임을 한 몸에 받게 된다.
일찍이 사학자 홍이섭(1914~1974)은 “다산 문학 자체가 한 연구 대상이 된다.”고 했고, 또한 “그가 시작(詩作)에서 보인 사회 비판 정신은 문사(文詞)를 위주로 한 관료적 문인에만 머물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를 통해서 보면, 다산의 사회 비평 정신이나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사상이 전반기 즉 청·장년까지는 시(詩)로 읊어졌고, 후반기 즉 장·노년기에 가서는 경세치용(經世致用),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방대한 저술서로 결정(結晶)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다방면에 걸친 뛰어난 활약으로 본다면 그에게 있어 문학이란 요소는 중요 업적의 일부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훌륭한 문학가로서의 다산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우선 독특한 문체의 창출과 작품의 예술성이 첫째 이유이며, 둘째는 당시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폭로 비판하고 애민 사상을 부르짖은 사실주의적 탁월한 문학성, 셋째는 2,466수(7권 3책)라는 방대한 작품에서 보듯 초인적인 창작 능력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 후세인들은, 다산의 뛰어난 문학성이 실사구시(實事求是) 이념을 집대성한 위대한 실학자의 모습에 가려져 왔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그의 문학 세계로 들어가 보자.
사실주의에 입각한 서사적 참여 문학
운문과 산문을 통틀어 다산의 문학성은 개인의 사사로운 서정성에 머물지 않고, 서민들의 참상을 숨김없이 묘사해냄으로써 당대 현실의 진면목을 보다 충실히 그려내고자 하는 사실주의적 서사성에 그 특징이 있다.
33세 되던 해에 경기도 암행어사를 제수 받게 되는데. 농촌 일대를 샅샅이 둘러보고 지은 여러 편의 시들 중 한 편을 보자.
(* 이 글에 실려진 한시들은 선생에 대한 결례를 무릅쓰고, 편의상 제목만 한문으로 제시하고 본문은 번역문을 싣기로 함. 원문은 문헌편찬위원회의 ‘정다산전서’ 번역본을 참고하기 바람.)
봉지염찰도적성촌사작(奉旨廉察到積誠村舍作)
-암행어사로 적성촌에 가서 목격한 백성들의 형편을 시로 읊음-
집안에 가진 거라곤 너무나도 쓸쓸해
모두 거둬 팔아야 7, 8냥이나 될까
조 이삭 대롱대롱 석 줄 매어 달고
닭 창자같이 비틀어진 고추 한 꿰미
헝겊 붙여 깨어진 독 구멍 막았고
찌그러진 선반대는 새끼줄로 얽었도다
놋수저는 예전에 이장이 가져갔고
쇠솥은 지금 또 옆집 양반 뺏어가네
(전 40행 분량 七言古詩의 일부)
암행어사 1년 동안에 그는 실로 많은 정치 사회적 문제와 농촌 현실을 목격했으니, 이러한 경험은 다산 문학과 사상의 근저가 되는 것이다.
당시 조선의 사정은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든 임병양란의 참혹한 전쟁을 겪은 뒤로 그 상처가 아물지 않았으며, 자주 흉년이 들어 민생은 피폐할 대로 피폐하여 기아와 절망에 울고 있는 때였다. 그 위에 관리들은 부패하여 횡포를 일삼고, 아전들은 힘없는 백성들을 침탈하고 괴롭혔다.
다음은 <기민시(饑民詩)-굶주린 백성의 노래>의 한 대목이다.
인생이 만일에 초목이라면 / 물과 흙으로만 살아 가련만
허리 구부려 땅의 털을 먹으니 / 이것이 바로 콩과 조이렸다
콩과 조는 구슬보다 귀하거니 / 그것인들 어찌 넉넉히 먹을소냐
마른 목은 여위어 따오기 같고 / 병든 살갗 주름져 닭살 같고나
우물이 있지만 밥 지을 수 없고 / 땔감은 있으나 저녁끼니 전혀 없네
사지는 제대로 움직일 때이련만 / 굶은 다리 제대로 걸을 수 없네
( 중 략 )
관가 마구간엔 마소들도 살찌는데 / 그건 바로 우리들이 살이로다
슬피 울며 고을 문을 나서니 / 눈앞이 캄캄하여 갈 길은 감감
잠시 발 멈추어 마른 풀밭 위에 / 주저앉아 우는 어린것 달래노라
고개 숙인 어린것의 서캐를 잡느니 / 두 눈에선 폭포같이 눈물이 흐르네
헐벗은 백성들이 살아가는 저 모습 / 여위고 병들어서 몰골이 말 아닐세
남부여대 나섰으나 오라는 곳 어디뇨 / 갈 곳을 모르니 어디로 향할소냐
( 생 략 )
다산의 인간적 희망과 사회적 이상
그가 보려고 한 것은 부정적이고 어두운 시대상이나 농민들의 피폐한 생활상만은 아니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흥겹게 일하는 농부들의 모습을 따뜻하고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위로 받고 희망을 살려내는 다산이기도 했다.
타 맥 행 (打 麥 行 ; 보리타작 노래)
젖빛 같은 막걸리 새로 거르고
큰 사발에 보리밥은 높이가 한 자
밥 먹자 도리깨 메고 마당 나서니
검은 윤기 두 어깨에 햇볕이 타 오른다
옹헤야 소리에 발맞추어 두드리니
삽시간에 보리알이 마당에 질펀하다
주고받는 노래가락 점점 높아가고
보일손 자욱한 보리 먼지 뿐이로세
기색 보아 하니 즐겁고 즐거울손
마음의 고통이란 조금도 없어라
낙원의 즐거움이 먼데 있지 않네
어찌하여 풍진객이 괴로움을 지을꼬 (전문)
다음 시는 나라 근심, 사회 모순으로 인한 울적한 마음들이 확 트여 실마리가 풀릴 때, 이 어찌 상쾌하지 않을 것이냐는 심정을 20가지로 읊은 것인데, 그 중 몇 편만 골라 감상하기로 한다.
불 역 쾌 재 행 (不 亦 快 哉 行 ; 이 또한 유쾌하지 아니한가)
달포 넘는 찌는 장마 곰팡이 냄새 / 아침저녁 사지는 맥없이 노곤터니
첫 가을 파란 하늘이 활짝 열려져 / 하늘은 맑아서 구름 한 점 없구나
이 어찌 상쾌하지 않을소냐
돌무더기 흙더미가 큰 강을 가로막아 / 차고 고인 물굽이가 막혀서 돌아갈 때
긴 삽으로 푹 떠서 일시에 터트리니 / 우레처럼 소리치며 쏜살같이 흘러간다
이 어찌 통쾌하지 않을소냐
푸른 매 끈에 묶여 오래도록 주리다가 / 숲속에 돌아가서 지루함에 나래쳤다
폭풍 거센 속에 끈을 풀고 훨훨 나니 / 푸른 하늘 물 같고 마음은 끝없네
이 어찌 상쾌하지 않을소냐
층층 절벽 위에 쉬며 예며 올랐더니 / 구름 안개 겹겹이 눈 아래 덮고 있네
이윽고 부는 바람 구름을 쓸어내니 / 만학천봉이 삽시간에 드러나는구나
이 어찌 통쾌하지 않을소냐
당쟁에 휘말려 굴곡이 극심했던 선생의 생애
불행하게도 그가 살았던 조선 후반기는 남인-시파(時派;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정파)와 노론-벽파(辟派;영조를 두둔하는 정파) 간의 당쟁이 극심한 때였다. 천주교도 박해를 빙자하여 노론파가 남인파를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것으로 알려진 신유옥사에 휘말려 그의 인생은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한다.
의욕 왕성한 장년에 들어 검열의 직책을 맡아 규장각의 내장 서적을 마음껏 탐독함으로써 학문의 세계를 더욱 넓히기도 했지만, 34세 이후 좌천과 회복을 거듭하다가 38세(1799년, 정조 23년)에는 형조참의에까지 승진하였으나, 당쟁이 날로 격화되자 결연히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게 되는 것이다. 그를 신뢰했던 남인의 영수 채제공이 1799년에 죽고, 지극히 총애하던 정조가 1800년에 승하하자 그의 정치 생명은 반전직하(反轉直下) 참담한 상황에 빠진다. 그리하여 장원급제 이후 약 10년 동안 성주(聖主)와 현신(賢臣)이 만나 뜻을 펼칠 수 있었던 행복한 시절은 막을 내리게 된다. 결국 이 기간은 공서파(攻西派)에 맞서서 신서파(信西派)의 영수로서 이를 옹호하며 천주교에 대한 온건정책을 펴던 재상 채제공( ~1799)의 집권 시기와도 거의 일치한다.
잘 알려진 대로 순조가 즉위한 첫 해인 1801년에 소위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는 천주교 대박해 사건의 결과로 선생의 삼형제(若銓, 若鐘, 若鏞)는 모두 체포되고 이 과정에서 약종은 참형에 처해지며 약전은 강진에, 약용은 장기에 유배되었다. 얼마 후 다소 혐의가 풀려 감형된 채로 선생은 배소 강진에서 학문에 몰두할 기회를 얻고, 손암 약전은 흑산도에 유배되어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어류학서인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짓는다.
그리하여 선생은 고향과 가족으로부터 아득히 먼 땅에서 긴 세월의 유배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다산초당의 대숲과 음각 바위
1990년대 중반 무렵 필자가 다산초당을 찾았을 때는 한여름이어서 그런지, 초당 앞에 가득 심어진 대숲이 전망을 가리고 있어 꽤나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길을 오르는 내방객에게, 대숲이 간직한 오래 묵은 세월의 향취와 고고하고 청신한 문사의 향내를 전해 주기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위해를 무릅쓰고 다산(茶山) 기슭에 있는 자신의 산정(山亭)에 이른바 유배죄인을 11년 동안이나 기거하도록 배려한 윤단에게 일말의 고마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초당의 모습은 사방의 울창한 숲으로 인해 항시 어둠침침해서 다산의 울적하고 답답한 심사를 그대로 전해 주는 듯했으나, 단정하고 말쑥한 산정의 자태를 지녔다.
정약용은 유배에서 풀려나 육순 나이가 되는 1821년에 당신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손수 썼는데, 이 글 속에 비친 초당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다산으로 거처를 옮긴 후 축대를 쌓고 연못을 파기도 하고 꽃나무를 벌여 심고 물을 끌어다 폭포를 만들기도 했다. 동서로 두 암(庵)을 만들고 장서 천여 권을 쌓아 두고 저서로서 스스로 즐겼다. 다산은 만덕사의 서쪽에 위치한 곳인데 처사 윤단의 산정이다. 석벽에 ‘정석(丁石)이라 두 자를 새겼다.”
당시 초당 안은 텅 비어 있었고 다산이 남긴 유물이란 오직 뒷 벼랑 암벽에 새긴 이 두 자뿐이었는데, 과연 ‘정석(丁石)’이란 음각자 속에 그는 무슨 의미를 숨겨 두었을까? ‘石’이란 한 글자가 지닌 밀의(密意)를 후대인들이 찾아 읽어주기를 바란 건 아니었을까?
강진 유배 18년의 명암(明暗)
“나는 신유년(1801) 겨울에 강진에 도착하여 동문 밖 주막집에 우거하였다. 을축년(1805) 겨울에는 보은산방(寶恩山房, 高麗寺)에서 기식하였고, 병인년(1806) 가을에는 학래(鶴來, 李晴)의 집에 이사 가 있다가, 무진년(1808) 봄에야 다산에 머물기 시작했으니 통계하여 18년인데, 읍내에서 살앗던 게 8년이고 다산에서 살았던 것이 11년째였다. 처음 왔을 때에는 백성들이 모두 겁을 먹고 문을 부수고 담을 무너트리고 달아나며 편안히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다산신계> 중에서)
무심한 백성들의 핍박을 받으며 유배 생활은 힘겹게 시작되었지만, 무고한 선비를 가엾이 여긴 동문 밖 주막집 노파 등 풀뿌리 서민들의 보살핌과, 그의 높은 뜻을 알아차린 스님들이나 문인 선비들의 배려 속에서 깊은 외로움을 삭이며 그는 경서학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사상 체계를 다시 세우고 천추에 남을 위대한 저작들을 집필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에 소개하는 시는 앞에서도 인용했던 <불역쾌재행 (不亦快哉行)>의 맨 마지막 20행 작품인데, 여기에 다시 소개하는 이유는 18년 동안 길고긴 귀양살이를 하는 선생의 인간적인 모습이 너무도 절절히 그리고 생생히 그려졌기 때문이다.
귀양살이 타향에서 고향 생각 끝이 없어 / 객창 등불 앞에 잠 못 이뤄 앉았더니
첫닭이 홰를 치며 새벽 소식 알릴 무렵 / 집에서 보낸 편지 이제야 뜯어 보네
이 어찌 상쾌하지 않을소냐
1813년 7월에 짓고 그렸다는 서화 는 다산의 눈물겨운 애잔함이 묻어난다.
(* 이 시는 분량이 적고 시적 분위기를 위해 원문을 실었음.)
<* 다산의 작품 ‘매화와 새’ > - 아내가 보낸 치마폭을 오려 그렸다는 ‘매화와 새’ -
매화와 새
파르르 날아간 새가 뜰 매화에 앉네 (翩翩飛鳥 息我庭梅)
향기 사뭇 진하여 홀연히 찾아왔네 (有熱其芳 惠然其來)
이제 여기 머물며 너의 집을 삼으렴 (爰止爰棲 樂爾家實)
만발한 꽃이라 열매도 무척 많단다 (華之旣榮 有賁其實)
이 시가 바로 부인 홍씨가 보낸 치마 여섯 폭 중에서 네 폭은 첩(帖)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고, 두 폭을 골라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려 딸에게 보냈다는 유명한 작품이다. 그러나 딸에게보다는 오히려 아내에게 그려 보낸 순정 어린 남편의 정한(情翰)이 아니었을까?
1표(表) 2(書)와 그의 업적
그가 강진 유배 시절에 지은 대표적 저작물인 <경세유표(經世遺表)>와 <목민심서(牧民心書)> 그리고 <흠흠신서(欽欽新書)>를 가리켜 1표 2서라 하는데, 잘 알려져 있으므로 간략하게만 소개할까 한다.
<경세유표(經世遺表)>
총 40권 16책(사본)으로 실학자의 입장에서 국가 체제 전반을 비판하고 부국강병을 논한책이다. 유배 중인 1817년에 착수하여 이듬해에 완성했는데, 임란 이후 더욱 고질화한지배층의 기강해이, 국가재정의 궁핍, 토지 제도의 문란, 농민에게만 가중되는 조세징수제도를 비판하고 그 해결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보다 실제적인 문제는 <목민심서>에서 다루었다.
<목민심서(牧民心書)>
고금의 여러 책에서 지방 장관의 사적을 가려뽑아 치민(治民)에 대한 도리를 논술한 책으로 48권 16책이다. 경세유표가 정부기구의 제도적 개혁을 주장한 것이라면, 이 책은 지방 관헌의 윤리적 각성과 농민 경제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것이다.
내용은 모두 12편으로 각 편을 6조으로 나누어 전체를 72조로 엮었는데, 맨 앞의 부임편(赴任篇)부터 맨 뒤의 해관편(解官篇)까지 당시 우리나라 농업의 실태, 서리의 부정, 토호의 작폐,서민의 생활상 등을 낱낱이 파혜치고 있어 우리나라 사회, 경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서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흠흠신서(欽欽新書)>
형옥(刑獄)에 관한 법정서(法政書)로서 30권 10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822년에 간행된 사본만 전한다. 형옥은 사람의 생명에 관계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가볍게 다루는 경향에 대하여 이 임무를 맡은 관리들이 유의할 점을 각각 실례를 들어가며 적은 것이다.
유배 이전의 정조 재임 시에는 관리로서, 학자, 과학자로서 많은 업적을 이루었는데, 그 중에서도 정조 11년에 수원성을 축조할 때 거중기(擧重機)의도성(圖說)을 만들어 시고비를 대폭 절약함으로써, 정조의 칭찬을 들었던 일은 유명한 일화다.
동 13년에는 한강에 주교(舟橋)를 가설할 때 설계를 도맡았으며, 그 설계도가 지금도 남아 세인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실학 박물관 기획특집-연행(燕行), 세계로 향하는 길
‘고운 비단 천 위에 아름다운 꽃 한 송이(錦上添花)’란 표현이 이번 문학기행에 어울리는 이유는 바로 이 기획특집(2010. 9. 1 ~ 2011. 2. 28) 때문이다.
2009년 10월 다산유적지 앞 강변에 완공된 현대식 2층 건물의 실학박물관은 규모로 보아서나 전시 내용으로 보아서 그저 알차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낄 정도로 멋진 박물관이다. 거기에다가 작년 후반부터 시작된 기획특집 <연행(燕行), 세계로 향하는 길>은 경기문화재단의 저력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1층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전개된 연행 관련 고색창연한 사료들은 평소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귀중한 것들이기에 더욱, 자료를 찾고 정리하고 전시하기까지 수많은 시간을 썼을 학예사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난다.
혹한의 추위를 마다하고 찾아간 우리 사전 답사팀에게, 마중까지 나와 준 학예사의 친절하면서도 겸손함을 잃지 않는 모습을 대하고 보니 어느 틈에 추위가 잊혀지는 듯했다. 그 때문에 전시관이 더욱 환해 보이고 멋져 보인다면 사물의 객관 평가에 문제가 있을 것인가?
임형택 한국실학학회 회장은 실학박물관 발행 도록 속에 담긴 ‘전시를 열며’란 글의 서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연행(燕行)이란 말은 근대 이전에 중국 주변의 국가들이 중국의 수도(北京=燕京)를 외교사절로 다녀오는 것을 지칭하는 일종의 역사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
당초 조선 왕조에 대명외교(對明外交)를 조천(朝天)이라 일컬었던 데 대해서 대청외교(對淸外交)를 연행이라고 일컬었다. 관습적인 말이었으나 1960년에 발간된 <연행록선집> 발간 이후 조천록까지도 연행록에 포괄하게 되었다.(중략)
연행의 과정에서 지식이 소통하고 문화의 교류가 폭넓게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양국 지식인들 사이에 직접적 만남으로 대화가 열리게 된 것이다. 요컨대 연행은 정치적 경제적 측면까지 포괄하여 전체를 ‘문화 행사’로 간주할 수 있다. ‘연행의 문화사’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능내리를 떠나며-오늘에 살아 숨 쉬는 다산
다산 유적지를 떠나기 전에 실학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이라도 하고 싶지만, 워낙 자료가 방대하고 지면도 부족하여 섣불리 다루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우선은 1, 2층에 전시된 폭넓은 학술 자료, 서적, 도면, 지도, 갖가지 발명 기기 들을 통해 눈으로 몸으로 발품을 파며 열심히 체험하는 일부터 해야 할 듯하다. 문자 그대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으로 돌아가 무언가 발견하고 스스로 깨우치려는 노력이 없다면, 그 어떤 보배도 내 자산이 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산 외에도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隧錄),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 박지원의 연암집(燕巖集),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 등에 주의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실학의 실체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다산의 가르침 한 마디 한 마디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실학의 실체라고 생각한다면 크게 빗나가지 않을 듯싶다.
언제부턴가 다산콜센터가 등장하여 세상 사람들의 답답함을 속 시원히 풀어주고 있다. 남양주시는 연차 계획에 따라, 한강, 호수, 수목원, 사적지 등을 껴안은 다산길을 13개 코스로 가꾸어 개방하겠다고 했다. 2010년까지는 이미 1코스 한강나루길, 2코스 다산길 등 8코스를 이미 개방했다. 이렇게 다산은 오늘을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 언젠가는 이 길을 걸으며 그의 깊은 눈길과 다시 만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행과 불행의 양면을 충실히 살다간 다산. 그가 살았던 소용돌이 시대 속에서도 이미 위대한 존재였다. 하지만 시대가 지나면서 더욱 그의 존재가 간절히 그립고 흠모의 정이 더욱 깊어지는 까닭은 무엇인가? 능내리를 떠나면서 곰곰 생각할 일이다.
남양주종합촬영소에서
마재를 다시 지나 양수리-두물머리를 오른쪽으로 돌아보며 북한강변을 십여 분 달리면 남양주여화촬영소란 이정표가 보인다. 산 속 아늑한 곳에 동향으로 생각보다는 꽤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데, 시네극장, 촬영스투디오를 지나 우리 일행은 초입 중앙에 위치한 영상지원관에서 발길을 멈추고 드디어 영화의 모든 것에 도전하게 될 것이다.
2층짜리 넓은 건물은 영화문화관, 영화원리체험관, 영상체험관, 소품실, 의상실, 법정세트, 미니어쳐체험관, 영화인 명예의 전당 등 신기한 구경거리들이 실마다 가득하다.
어디선가 언젠가 보았음직한 장면을 담은 낡은 영화포스터, ‘공동경비구역(JSA)’, ‘형사’, ‘취화선’, ‘황진이’, ‘말아톤’, ‘왕의 남자’ 등 제목이 떠올리는 그 화면 속 얼굴들은 우리들의뇌리 속에 날아 내린 철새가 아니고 둥지를 틀고 살고 있는 텃새가 된 지 오래다. 더러는 잊혀져 지워지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감미로움은 더하기 마련이다.
영화인 명에의 전당에 들면 그 잊혀진 텃새들마저 날갯짓을 하고 다시 살아난다. 아주 유명을 달리한 얼굴들일수록 그 모습이 더욱 뚜렷해 보이는 건, 아무래도 세월 탓 나이 탓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것이 서운함을 달래는 데는 더 유리할 것이다.
보고 싶은 것은 많고 공간은 미로 같아서 허둥대게 만들고, 시간을 독촉하는 길라잡이가 미워지기도 할 것이지만, 오늘의 다음 일정을 위해선 아마도 대충대충 넘겨보고 지나가야 할 성싶다.
영상지원관을 나와서 이번엔 야외촬영세트 구경이다. 오른쪽으로 JSA의 판문점세트는 그 옛날의 장면을 떠올리며 그냥 지나치는 수밖에 없다. 곧장 100여 미터를 올라가면 ‘취화선’, ‘황진이‘, 스캔들’을 찍었다는 민속마을세트에 다다른다.
주막거리, 장터, 강부자집, 김생원집, 황선비네, 돌쇠네, 이쁜이네가 옹기종기 한데 모여 있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쇠락하고 낡아질수록 더욱더 정감이 깊어질 것이 분명한 우리들 추억의 영상들이다.
촬영소를 떠나면서 불현듯 이런 의문이 고개를 든다. ‘왜 영화인들에겐 유독 자살이 많고, 더러는 마약과 도박으로 어지럽혀지고 스캔들이 넘쳐 나는가?’ ‘바로 얼마 전 가난한 시나리오 작가의 외로운 죽음은 또 무엇인가?’ 따지고 보면 세상이 모두 영화 속 같으니, ‘내 인생의 영화 제목은 무엇으로 하면 좋을까?’
남이섬-상상나라의 예술 탐방
추억의 길 경춘가도
오전에는 다산 선생을 만나 그의 깊고도 넓은 학문과 문학의 세계에 흠뻑 젖었을 것이다. 다시 북한강변을 잠깐 달려 남양주종합촬영소에서 대중예술의 총아인 우리나라 영화의 과거와 현재를 한 눈에 목격하면서 크고 작은 탄성들이 절로 새어 나왔을 성싶다.
이제는 남이섬 차례다.
서울에서 한강을 따라 동쪽으로 63km 지점에 가랑잎 모양으로 청평호수 위에 떠 있는 남이섬은, 면적 46만 평방미터에 둘레는 약 5km에 이르는 내륙섬(하중도)이다. 우리 사색의 향기 문학기행팀은 호젓한 강변길 45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화도면 대성리 못 미쳐에서 46번 국도인 경춘가도를 갈아타게 된다.
모두의 귀에 익은 경춘가도는 2009년 가을에 경춘고속도로가 개통되고, 2010년 12월에 경춘선이 복선 전철로 개통되면서 다소 한적해진 추억의 길이다. 차창 오른쪽으로는 인가와 푸른 언덕 사이로 가끔씩 북한강 맑은 물줄기를 바라보며 달려서 강촌으로 엠티를 가거나, 등선폭포, 의암호, 춘천호반으로 계절 여행을 떠나 본 사람은 아마도 이 길이 왜 감미로운 추억의 길인지를 떠올리며 혼자 미소 짓게 될 것이다. 심신이 지치고 간혹 외롭다고 느껴질 때, 자신만의 비밀스럽고도 행복한 추억거리가 있다면 그는 이 지상에서 결코 고독하지 않은 존재임에 틀림이 없다고 단정지어도 좋지 않을까?
나미나라공화국이 열리기까지
<*남이섬 정문 사진> - 나미나라공화국의 관문 -
남이섬 들어가는 선착장에 도착하면 우선 전에 보지 못했던 우뚝한 철탑과 ‘남이섬’이란 투툼한 붓글씨체의 현판을 매달고서 한식 기와를 단정하게 삼단으로 얹은 일주문이 보인다. 출입국관리소. 여권도 있고 화폐, 국기, 국가도 따로 있단다. 선착장인 관문은 경기도 가평군 지역이고 강 위에 뜬 섬은 강원도 춘천시에 속해 있는 나미나라공화국이다.
- 멀리 보이는 남이섬과 육지를 잇는 짚와이어의 강선 -
작년에 완공된 약 80M 높이 철탑은 동쪽으로는 자라섬, 남쪽으로는 남이섬으로 단숨에 공중을 날아서 갈 수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짚와이어(Zip-Wire)의 출발대이다. 눈 깜짝할 사이라 좀 서운하긴 하겠지만 북한강 언 강물 위에 끝없이 덮인 눈부신 설원을 날아서 섬에 사뿐히 내려앉는다면, 상상나라 백성이 되는 ‘새의 꿈’을 잠시 꾸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겨울이기도 하거니와 우리는 여러 가지 형편상 고전적인 운치를 즐기며 7분여의 짧은 항해를 하게 될 것이다. 200여 명을 태우는 널찍한 배는 두께가 한 뼘이나 되는 유빙들을 헤치고 북한강 맑고 차가운 강물을 휘저어 인어공주상이 기다리는 섬의 강안에 닿는다.
남이섬은 원래 홍수 때만 섬으로 고립되었으나 1944년 청평땜을 건설하면서 북한강물이 차올라서 완전한 섬으로 다시 태어난 땅인데, 1965년 수재(守齋) 민병도(1916~2006) 선생이 매입하여 30여 년 동안 나무 심고 가꾸어 캠핑장, 수영장 등 위락시설 등을 갖춘 평범한 유원지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국’이란 거창한 이름이 붙었을까?
- 남이섬의 전설을 지켜 갈 인어공주상 -
유달리 자연에 애착을 가지고 자주 이 섬을 찾던 화가이며 동화작가이자 그래픽디자이너인 강우현에게, 주식회사 남이섬의 대표이사 자리를 맡아 달라는 제안이 들어왔을 때, 그는 많이 망설였다고 한다. 과연 디자인학과 교수자리를 뿌리치고 올 만한가? 수십 년 동안 유원지에 놀러 왔다 간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버리고 간 수많은 소주병, 깡통들, 울긋불긋 흉하게 들어 선 비닐 천막과 간판들 거기에다가 입장객 수가 나날이 줄어들어 적자 투성이의 운영 실태까지...... “남이섬은 ‘사랑과 문명의 합병증’을 앓고 있었다”고 그는 2006년에 펴낸 수상집 ‘남이잡상(南怡雜像)에서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강 대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했다고 한다.
“저는 월급을 단 돈 100원만 받겠습니다. 그 대신 제가 상상하는 대로 이 섬을 디자인할 테니 전권을 주십시오. 단 수익을 현재의 배로 늘리면 그 이상은 저의 몫으로 해서 섬을 위해 투자도 하고 문화 사업도 펼치겠습니다.”
2001년 9월, 이런 믿기 어려운 전설적인 계약 조건 속에서 남이섬은 지구상에 유일무이한 상상나라, 동화나라로 열리게 되었다. 개국, 그러나 첫걸음은 유원지에서 관광지로의 힘겨운 개혁에서부터 시작되었다.(강우현 본인은 혁명이라고 표현함)
남이(南怡)장군의 오백 년 한을 풀다
- 남이장군묘 앞의 ‘기개와 비운의 시 -
남이(1441~1468) 장군은 태종 이방원의 외손으로 조선시대의 무신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태종의 총애를 받던 중 이시애의 난을 정벌하고 여진을 토벌하는 등 공을 세워 28세의 나이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예종 1년 때마침 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묵은 것이 없어지고 새 것이 나타날 징조’라고 말하자 평소 질투를 느껴 오던 유자광이, 남이가 여진 토벌 때 지은 한시의 구절을 트집 잡아 역모를 꾀한다고 모함하여 주살됨으로써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이미 널리 알려진 시이기는 하나, 기개 넘치는 그의 시를 다시 감상해 보자.
白頭山石磨刀盡(백두산석마도진: 백두산의 돌은 칼 갈아 모두 쓰고
豆滿江水飮馬無(두만강수음마무: 두만강의 물은 말 먹여 모두 쓰겠네
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 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後世誰稱大丈夫(후세수칭대장부: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부르겠는가
전구의 未平國 :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을 未得國 :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왜곡하여,
반역의 뜻이 있다고 모함함으로써 영의정 강순 등과 함께 참살되었으나, 1818년(순조 18년)에 관작이 복구되었다.
강우현은 어느 글 속에서 ‘나는 남아 오십에 나라를 열어 남이 장군의 한을 풀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어느 시대에서나 ‘개국’ 또는 ‘반역’이란 행위가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단어이고, 未平國의 해석이 민감한 문제이기도 하겠으나, 대한민국이 러시아의 체첸이나 중국의 티베트가 아니길 망정이지 큰 변고 치를 만한 사건이 아니겠는가? 강우현은 아마 빅 개그맨인지도 모를 일이다.
나미나라공화국의 독립선언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는 나라를 세웁니다. / 노래의 섬 남이섬에 동화나라를 세웁니다.
동화(同化)되고 / 동화(同和)되어 / 동화(童話)를 쓰며 / 동화(童畵)를 그리며 / 동화(動畵)
처럼 살아가는 / 동화 세계를 남이섬에 세웁니다. / 행복한 상상이 꿈틀대는 북한강 대자 연 위에 / 이 세상에 하나뿐인 대한민국 속의 꼬마 나라......(이하 생략)......2006.3.1
상상나라, 전위(前衛)나라
- 백남준 작 <완전한 피아노>-
음악 칼럼니스트 진화숙이 쓴 글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여기 피아노가 한 대 있다. 이 피아노는 우리에게 투명하고, 영롱하고, 로맨틱한 들려 주는 그런 피아노가 아니다. 철사, 노끈, 페인트, 브래지어, 시계, 전화기, 스탠드 등 일상의 잡동사니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고물일 뿐이다. 만신창이가 되어 내장을 다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 흉물스럽기까지 하다. 그 누구도 여기에서 감미롭고 아름다운 소리가 울려 나오리라곤 기대하지 않는다.
바로 이 피아노가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현대미술관의 소장품으로 제목은 <완전한 피아노>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고귀한 피아노를 이토록 가혹하게 유린했단 말인가? 바로 백남준이다.(중략)
사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일종의 사기다. 백남준 자신도 ‘예술은 사기’라고 했다. 하지만 사기를 치는 데에도 철학이 있고 수준이 있는 법이다. 많은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그럴 듯한 의미를 내세워야 하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가 독창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전위적 예술 행위를 처음으로 시작한 사람에게는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하지만, 그것을 따라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이렇게 아방가르드-전위파 예술의 세계에서는 그 방면에서 최초의 사기꾼에게만 진정한 예술가로서의 자격을 부여한다. 이런 의미에서 백남준은 우리 시대의 진정한 전위였다.“
백남준만큼 터무니없이(?) 관객을 우롱하고, 혀를 내두르며 실소를 금치 못하도록 하지는 않을지라도, 강우현 또한 이에 못지않은 전위 디자이너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단지 그에게는 아직 세월의 여백이 많이 남아 있으니 그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갈지 궁금해진다.
2010년 7월, 이명박 대통령이 ‘성공한 CEO의 마인드를 배우러 가자’며 국가고용전략회의를 하기 위해 남이섬에 왔다 한다. 그 일행이 회의장에 내어 건 테마는, <강우현의 마인드를 배우자>였다 하니, 그의 경영 철학이 더 넓은 세상으로 퍼져 갈 날도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 남이섬의 풍경 사진> - 사진 해설 -
그의 경영 철학과 자칭 말장난에 이런 것들이 있다.
<남 하는 일을 반대로만 하니 ‘역발상 경영’>
<생각나는 대로 멋대로 꾸미다 보니 ‘상상 경영’>
<제대로 할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뒤집어서 하니 ‘청개구리 경영’>
<예술가의 흔적을 소중히 남기면 100년 자산이 된다. ‘예술 경영’>
<개가 돈 벌었다고 정승 못 된다. 처음부터 정승처럼 벌어라. ‘정승 경영’>
<생존해야 한다. 생존하지 않으면 문화기업으로 성장할 수 없다. 생존 경영>
<팔리면 상품, 안 팔리면 작품>
<내 버리면 청소, 써 버리면 창조>
<주인 같은 머슴으로, 머슴 같은 주인으로>
<유원지는 관광지로, 소음은 리듬으로, 경치는 운치로>
<잡초를 화초로, 쓰레기는 쓸 애기로, 남이섬은 남의 섬으로>
<남이섬은 달밤이 좋다. 별밤은 더 좋다. 하지만 새벽을 걷어 올리는 물안개를 마주하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꾸내치타(돈 없으면 꾸고, 일 못하면 내치고, 버릴 것은 치우고, 남 하는 것 따라하기)를
벌가다말(돈 없으면 벌어 쓰고, 일 못하면 가르치고, 버릴 것도 다시 쓰고, 남 하는 것 하 지 말고)로 바꾸어 보자>
<실천 요강 1. 벤치마킹 하지 마라 2. 교과서 무시하라 3. 맨손으로 해결하라>
그가 역발상으로 쏟아내는 쓸모 있는 장난말들은 너무 많아 더 싣기 어려울 정도다.
괴짜 CEO 강우현
<*캔 재활용 무대 작품 사진> - 무대 배경으로 환생한 캔 재활용 작품 -
“남이섬의 재활용, 지금이야 ‘문화적 재활용’이니 ‘예술적 재활용’이니 하면서 칭송하지만, 처음부터 좋아서 한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돈이 없어서 재활용을 시작했다. 몇 년이고 하다 보니 습관이 되었고, 그게 오히려 편리하다는 생각이 들자 몸에 밴 것 뿐이다.”<강우현 저 ‘상상망치’(2009, 여성신문 나미북스)>
이렇게 해서 강우현 섬디자이너의 기발한 상상력과 재활용품들이 함께 용해되어 태어난 새로운 생명체-전위(?) 예술품들이 섬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소주병들은 녹여져서 벽을 장식하는 고급스런 예술 타일로 둔갑했고, 맥주캔 깡통들은 압착되어 야외 공연장의 무대 배경으로 설치되었으며 방문객들의 사진촬영 명소가 되기 시작했다. 해마다 끊임없이 다양한 종의 나무들을 심고 꽃을 가꾸어 새들을 불러들임으로써 아름답고 순수한 자연을 가꾸는 한편, 매년 70여 개국이 참여하는 ‘세계책나라축제’를 열고, 2년에 한 번씩 30여 개국 청소년이 참가하는 ‘세계청소년공연축제’를 연다.
죽은 나무나 우산들을 거꾸로 세워 놓거나 매달아 놓고 카메라 앵글을 유혹하는가 하면, 닭, 염소, 사나운 타조 부부를 풀어 놓고 깡타(깡패타조)를 조심하라고 경고장을 곳곳에 붙여 놓는다. 어디 그뿐인가? 중국에 가서는 한글을 거꾸로 써서 극찬(?)을 받고 그 이후 줄곧 ‘강우현 거꿀체’를 애용하고 있다. 섬 어느 구석에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도 모를 여인의 나체 조각상을 강가 물 속에 반쯤 잠기게 해 놓고, 이 조각상을 덴마크의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인어공주상에 맞먹는 전설의 예술품으로 만들어낸다.
실제로 이 인어공주상은, 남이섬이 안데르센상 후원자가 됨으로써, IBBY(국제아동도서협의회)의 공인을 받고 코펜하겐의 인어공주와 동등한 위상을 확보하게 되었다. 인어공주에게 바치는 시의 일부를 소개한다.(강우현 작 <나는 남이섬에 산다>2006. 여성신문 나미북스)
나는 원래 물고기였답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살고 싶어
인간 세계에서 살고 싶어
차가운 물나라
그래도 정든 고향 떠나
따스한 체온을 서로 나누는
그런 삶을 꿈꾸던
인간이 되고 싶은
큰 바다 물고기였답니다
( 중 략 )
언제나 배는 그냥 떠나갑니다
나는 언제나 그냥 기다립니다
바람아 들었니?
강물아 보았니?
( 중 략 )
기다림이 멈추는 순간을
기다리는 나
호수 위에
자그마한 연못을 하나
그려 봅니다
또 한 사람의 인간
나의 왕자님과
영원히 살아갈
상상정원입니다
(지면 관계로 일부 행 구분은 임의로 함)
‘겨울 연가’의 옷을 벗어라
<*메타스퀘이어길 사진> - 남이섬의 상징이 된 메타스퀘어길 -
2001년 윤석호 감독의 ‘겨울연가’가 공전의 대성공을 거두고 그 촬영 현장이었던 남이섬이 관광 명소로 떠오르기 시작했으며, 한류 열풍의 원조가 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 현대 대중문화 예술사의 커다란 획이 그어지는 역사적 지점에 남이섬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겨울연가는 2002년 1월 14일부터 같은 해 3월 19일까지 총 20부 작으로 방영된 KBS미니시리즈 연속극이다. 첫사랑이라는 운명으로 묶인 세 남녀의 이야기를, 단순한 스토리 중심을 지양하고 겨울이 주는 차갑고도 맑은 영상이미지를 슬픈 멜로드라마 위에 채색하여, 완성도를 높인 ‘영상시와도 같은 작품’인 것이다.
2000년 당시 연 20여만 명이던 입장객이 10년 새에 300만 명을 넘어섰으며, 그 중 일본 등 외국 관광객이 30여만 명이 넘는다니 가히 국제관광명소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2004년 1월경, 모두들 남이섬이 ‘겨울연가’의 덕을 톡톡히 보면서 주가가 최고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할 때, 언론사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뜻밖의 선언을 한다.
“‘겨울연가’에 연연하지 않겠다. 이제부터 ‘겨울연가’로 생긴 이미지를 확 걷어내겠다.”
‘본디 초심을 잃지 않고 유원지에서 관광지로 가야 한다. 세계를 남이섬으로 끌어들이는 남이섬의 세계화에 전력투구해야 한다.’고 다짐한 것이다.
‘드라마 촬영지를 보러 왔는데 자연 환경과 문화 예술 환경이 더 좋더라’하는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 그는 여러 가지 국제적 문화 행사와 외국의 저명한 예술가 초청 행사를 기획하게 된다.
그렇지만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는 일에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 겨울연가와 관련된 갖가지 사연과 당시의 장면들은 메타스퀘이어길로 접어들기 전에 마련된 겨울연가 촬영기념 사진전시관에 가면 생생하게 살아나오게 된다.
위칭청(于慶成) 행복 초대전
- 위칭청 작 <농부 내외와 두 아이>-
강 대표는 유난히 도자기 예술에 관심이 많다. 그는 현재 한국도자재단(구 여주이천도자협회)의 이사장직을 맡아 “일 년 내내 오고 싶은 오고 싶은 도자기비엔날레를 만들겠다.”며 침체한 한국도자산업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도자뉴딜사업’을 통해 이천 여주 지역에 ‘도자관광테마파크(가치 세라피아)’ 조성, 도예가 등록제 시행, 수장고형 미술관 등을 목표로 내걸고, 한국 도자예술의 세계화 시동을 위해 ‘한중 도자문화우호교류협정’(2009. 12)을 체결했다.
이러한 의지에 따라 남이섬에 2010년에 개관한 것이 ‘토야지움(수장고형 미술관)’이며, 그 개관기념 기획으로 열린 전시회가 <위칭청 행복초대전>이다.
중국진흙공예대사 위칭청은 텐진(天津)의 산골마을에서 태어나 흙장난을 통해 예술관을 깨우치고, 39세에 텐진미술대학에 들어가 뒤늦게 정통 미술 공부를 하여 중국정부로부터 ‘민간예술 개척자’(44세), 유네스코로부터는 ‘민간공예대사’(52세) 작위를 받기도 했다.
그 후 중국정부로부터 ‘특급대사’ 칭호까지 받았으며, 원자바오 총리 등이 외국 국가 원수에게 특별히 주는 선물로 자주 선택되기도 한다. 그의 작품은 세계의 유수한 박물관에 소장돼 있으며, 베이징과 텐진 그리고 하얼빈에 개인 미술관이 지어져 있기도 하다.
위칭청의 작품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행복’이고 ‘웃음’이다. 시골 노인네들의 꾸밈없는 생활상과 표정. 바지를 내리고 함박웃음을 흘리고 있는 장난꾸러기들. 그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은 해학으로 때로는 거침없는 폭소로 표현된다.
‘해와 달’과 함께하는 라이브 음악회
- ‘해와 달’ 부부 듀엣의 연주 장면 -
뜻 깊은 문학기행의 하루해가 뉘엿뉘엿할 즈음, 우리 일행은 노래박물관 2층 라이브 갤러리’에서 이 부회장의 적극 섭외로 성사된, 부부 듀엣 ‘해와 달’이 펼치는 ‘사색의 향기 문학기행팀을 환영하는 라이브 음악회’에 참석한다.
듀엣의 멤버는 박성희와 홍기성인데 1999년에 결성되었으며, 장르는 가요와 포크송으로 ‘사랑은’, ‘축복’을 비롯해 ‘그대 사랑 내 곁에’, ‘내가 만일’,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을 위하여’ 등 감미롭고 신선한 노래를 선사할 예정이다.
이번 소음악회는 공용철 원장의 사회로 진행될 예정인데 문학기행의 대미를 장식하는 뜻에서 강우현 섬디자이너가 참석하여 서로 인사를 나누었으면 좋겠고, 프로그램 중에는 우리 회원들이 나서서 한 두 편의 시낭송을 하도록 계획되어 있으니 비단 자락에 꽃송이를 수놓는 일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게 한다.
이제 다시 배를 타고 북한강을 건넌다. 어디선가 봄기운이 은은히 풍겨 나오는 강바람을 맞으며, 겨울 하늘의 아쉬운 노을빛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나미나라공화국을 떠날 것이다.
다음에 다시 찾을 때는 또 얼마만큼의 변화가 우리를 반겨 줄 것인가? 아마도 괴짜 CEO의 상상 경영 그 불꽃이 저 위쪽 자라섬으로 옮겨 붙을 것은 확실해 보이고, 그 들불이 북한강을 넘어 어디까지 번질 것인지 예측하기 어렵다. 다음에 올 때는 저 높은 공중에서 강물 위를 눈 깜짝할 사이에 자라섬으로 남이섬으로 짚 와이어를 타고 날아가는 한 마리 자유의 새가 되어 보리라 마음먹기도 하면서......
‘변화’와 ‘불변’에 대한 두 개의 상반된 희망은, 인간이 가진 아름다운 꿈의 영원한 양 날개가 아닐까?
* 남이섬 기행 일정과 동선 계획
순서 |
장소 |
시간 |
활동 내용 |
특기 사항, 업무 분담 |
1 |
가평군 선착장 |
14;00 |
배표 끊기, 인원 점검 |
승선 수속; 총무,국장 진행; 회장, |
2 |
남이섬행 |
14;20 ~ 14;30 |
승선 및 하선 |
|
3 |
남이섬 도착 |
14;30 ~ 14;35 |
인원 점검, 관람 시작, 사진 촬영 |
인원점검;부회장,국장 |
4 |
남이장군묘 |
14;35 ~ 14;50 |
참배, 시 감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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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노래박물관 소개 |
15;00 |
소음악회 장소 안내 |
장소만 확인 |
6 |
*전나무길 *세계책나라 축제장 *유니세프 사진전 *중화민국독립 100주년기념사진전 |
15;00 ~ 15;10 |
걸어가면서 관람 |
*여기서부터는 1진(회장 안내팀)과 2진(자유 관람팀)으로 나뉘어 진행함.
*15;50까지 노래 박물관 1층 라이브갤러리에 집합해야 함. |
7 |
위칭청 행복미술관 |
15;10 ~ 15;20 |
중국도예가 위칭청의 예술세계 탐방 | |
8 |
겨울연가 포토갤러리 메타스퀘어길 |
15;20 ~ 15;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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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짧은 산책 |
15;30 ~ 15;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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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강 대표와의 만남 *노래박물관 (2층뮤직홀) |
15;50 ~ 17;00 |
‘해와 달’ 라이브음악회 |
진행; 공용철 원장 |
11 |
남이섬 선착장 |
17;20 |
인원점검, 승선, 출발 |
인원점검;부회장,국장 |
* 일정과 노정은 당일 사정에 따라 다소의 변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2011년 2월 12일 작성자 사색의 향기 문학기행회 회장 윤고방
* 사색의 향기 문학기행에 관해 궁금하신 분은 네이버나 다음의 검색란에 ‘사색의 향기를’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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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을 보고 갑니다~~늘 바쁘게 살면서 좋은글을 오려 주시어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