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대륙의 한민족 숨결을 찾아 |
중국은 어떤 나라인가 지난 8월 중순쯤에 나는 중국 속의 한국인 자취를 더듬기 위해 중국으로 날아갔다. 나의 여행 목적은 중국 역사를 더듬는 것에 있지 않았다. 물론, 중국대륙에 남아 있는 고적을 외면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속에 남아 있는 우리 민족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것은 매우 어려운 취재가 될 것이고, 극히 일부분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중국 속의 우리의 흔적이라고 했지만 그 대부분은 만주라고 일컫는 동북 삼성(三省)에 집약되어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고조선 부여 발해 고구려로 거슬러 올라가서 만주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산동성에는 백제와 통일신라의 흔적이 남아있고, 중원으로 들어가 중국의 고도인 개봉 낙양 서안으로 가면 백제의 흔적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랜 세월의 역사 발자취는 거의 지워지고 없었다. 구당서와 같은 중국 역사기록에 남아있는 것도 현지에 갔을 때 찾을 길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랜 과거가 아닌 금세기의 발자취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남아 있었다. 그 금세기의 발자취 가운데 앞에서 언급한 항일 투쟁의 흔적이 있는 것이다. 나는 대한항공기를 타고 김포공항을 출발해 북경공항에 내렸다. 그곳을 다시 중국민항기를 갈아타고 연변으로 갔다. 나에게 있어 중국은 5년만에 다시 밟아보는 곳이었다. 그래서 개혁과 개방의 물결을 타고 있는 중국이 얼마나 발전을 했는지 비교할 수 있었다. 그것을 경제적인 수치로 조사하여 비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발전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가 없다. 나의 관심을 둔 것은 자본주의 개방물결이 어떤 양상으로 어떻게 퍼져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연길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 개방의 물결이 흐르는 하천이 아니고 폭포와 같은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5년전과 비교해서 생각하는 관점이다. 시가지 곳곳에 호텔을 짓고 공사장이 눈에 띄었고, 차량은 거리가 비좁을 만큼 붐비었으며 개체상점이라고 불리는 상가의 수는 말할 수 없이 늘어났다. 무엇보다 자본시장의 척후병처럼 밀려오기 마련인 사정산업이 서울을 뺨치게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5년전에 십여군데에 불과하던 다방이 지금은 1백개가 넘는다고 하며, 전에 손에 꼽을 정도였던 술집이 수없이 늘어나 산재해 있고, 대형 가라오케도 수십군데 늘어나 있었다. 그날 연변대학 교수들고 함께 저년식사를 마치고 찾아간 가라오케도 여종업원만 2백명이 있다는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이 가라오케이지 실제 룸살롱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밀폐된 방에 들어가 술을 마치고 노래를 부르는데, 앞에서 말한 여종업원들이 들어와서 술을 따르고 노래도 부렀다. 손님이 성희롱을 해도 모두 받아주었다. 전 같으면(5년전 말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어느 술집에 들어가 여자종업원에게 앞자리에 앉아 술을 한잔 마시라고 권했더니 그 조선족 여자는 새침한 얼굴로 『일 없시오, 위법이 야요』라고 거절하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고 중국을 걱정하는 넌센스는 범하지 말자. 사정 산업이 발달한다고 중궁이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을 한달정도 돌아다니고 중국을 알았다는 착각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실제 중국은 알면 알수록 알 수 없다는 생각을 들게 하였다. 중국은 한국에 비교해서 경제적인 성장이 늦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 거대한 나라의 잠재력이다. 중국을 돌면서 그 거대한 대륙의 힘에 여러번 질린 기억이 난다. 먼저 중국의 12억이라는 인구를 생각할 수 있다. 땅도 넓지만 어디를 가도 사람이 와글거릴만큼 많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살아가고 있었다. 대도시이든 촌락이든 가릴것없이 BMW나 벤츠가 지나가는 바로 옆에 사람이 끄는 인력거가 다니고 있었다. 경운기를 개조해서 만든것처럼 엔진소리가 요란한 트랙터 바로 옆에 리무진을 타고 와서 음식점에 들어가는 부자가 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있을 수 없는 빈부의 격차가 오히려 더 크다는 것을 목격하면서 그 이중성을 가늠할 수 있다. 12억의 인구가 하루에 먹는 음식이 3조6천억원이며, 한국 1년 예산 44조원은 중국의 국민 12일 밥값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른 대도시를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연길에는 유난히 택시가 많이 눈에 띄였고, 자전거와 사람 그리고 차가 뒤얽힌 거리는 한마디로 난장판이었다. 그렇게 얽히면서 다니는 것에 비하며 교통사고가 많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이 얽힌 무질서속에서 몇가지 규칙을 발견하고 실수를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차가 우선이고, 다음이 자전거, 마지막이 사람이었다. 사람과 차가 마주쳤을 때 선진국이나 한국의 개념으로 사람이 먼저 길을 건너려고 했다가는 거의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두 번째 규칙은 차들이 어떤 부당한 추월을 해도 화를 내는일이 없었다. 차가 밀려도 짜증을 내는 일이 없이 기다렸다. 그것은 양보의식이나 침착 때문이 아니라 자포자기에서 나온 습관으로 보였다. 「성질」을 내보았자 아무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이상의 중국 국민성과 중국 대륙의 특성을 더듬어 본 것은 그 속에 살아남은 우리민족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조선족으로 통칭되고 있는 우리 민족은 다른 소수민족과 함께 중국에 존재한다. 조선족은 길림성에 연변자치주를 만들어 나름대로 민족적인 전통을 이어받고 있지만, 그들 역시 소수민족이 겪어야 하는 고난이 없을 수가 없다. 연길이나 바로 옆의 용정은 과거 항일투쟁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취재의 목적에 따라 당연히 방문하게 되 것이지만, 나에게 있어 연길을 방문하게 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소설「마루타」가 연변대학교 출판부에서 중국어로 번역이 되어 출판을 하게 되었다. 아마 올 겨울에 출간이 될 것이다. 이미 널리 알려졌다시피 연변대학교는 대표적인 조선족 대학이다. 조선족 학생 가운데 극히 드물게 북경대학교나 북경에 있는 민족대학에 진학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곳 연변대학에서 공부한다. 조선족 인재의 주류를 이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이번 기회에 연변대학 출신 조선족으로서 사화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이가 든 층보다 비교적 젊은 삼십대층에서, 자본주의에 눈이 떠서 사회에 손을 대어 나름대로 활동하는 것을 보았다. 진보된 개방의식을 가진 이들이 아마도 훗날의 조선족 지도자로 부상할 것이며, 경제를 일으켜 놓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그러자 다음해 일본군 제19사단의 일개 부대와 남양수비군 1개연대가 두만강을 건너 대한독립군부대가 있는 봉오동을 공격했다. 대한독립군 7백여명과 일본군 2개연대(3천여명)와 격돌했지만 지형지물을 이용한 기습작전으로 일본군 1백20명이 살상되었다. 나는 두만강변에 있는 국경도시 도문을 둘러보고 다시 용정으로 향하는 길에 왕청현 봉오동을 찾아갔다. 대한독립군과 일본군간의 전투가 있었던 골짜기는 댐을 막아 저수지로 바꾸어 놓았지만, 그 아래에 전적비를 세워둔 것을 볼수 있었다. 당시 동만주의 항일부대로 김좌진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가 있었고, 연길 명월구에 근거지를 둔 의군부가 있었다. 의군부는 화룡왕청 훈춘등지에서 활동했다. 나는 만주 항일투쟁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훈춘에 대해서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몇해 전에 내가 썼던 소설 「火山에 묻다」와 러시아 이민소설 「쇄빙선」에서 만주항일투쟁 부분에 훈춘이 자주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소설을 쓰기 이전에 단 한번도 훈춘에 가본 일은 없었다. 훈춘의 북쪽 번자구에 가면 높은 언덕이 있고, 훈춘 중심부에 일본 영사관 건물이 있으며, 그 건너편 거리에 판자로 만든 상점이 즐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기록 속의 훈춘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찾아간 훈춘에는 과거 기록에 나온 언덕이라든지 일본 영사관이 있는 건물이나 판잣집이 들어 서 있는 거리는 없었다. 그러나 훈춘이 한국인의 항일투쟁의 역사속에 의미깊은 곳이라는 관념은 변함이 없다. 당시 일본군은 중국 마적들을 매수하여 그들의 손으로 항일 독립군을 공격하기도 했는데, 1920년에 발생한 훈춘사건은 이들 마적단이 훈춘을 공격하는 과정에 일본 영사관을 습격해서 경부 삽곡(澁谷)일가와 부녀자 9명이 살해당한데서 빚어진 사건이었다. 일본군은 이를 핑계로 함북에 주둔하는 나남사단(羅南師團)〈제21사단〉의 1개연대를 출동해서 훈춘에 입성해 주변의 한인 인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토벌해야 될 마적대는 쫓지않고 미리 파악해 놓은 명단으로 훈춘 지역의 한인 독립단 간부 약 3백여명을 체포했다. 뿐만 아니라 부근의 각 부락으로 출동해서 한국 젊은이는 무조건 잡아서 죽이고, 부락은 불질렀으며 부녀자는 강간을 했다. 이 사건을 훈춘사건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훈춘사건이후 적대시 된 독립군 부대와 일본군의 대립은 더욱 심해졌고 청산리전투 백운평전투 천수평전투 어랑촌전투등 일련의 격돌이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1920년 가을로 접어들면서 항일 독립군부대들은 일본군 2개 사단〈19사단과 21사단〉에게 쫓겨서 아무르강을 건너 러시아로 도피한다. 러시아는 당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서 적군과 백군간에 싸움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이었는데, 조선인 독립군 부대는 부대장간 협의를 거쳐 적군을 협조하기로 하고 이르쿠츠크에 모인다. 그곳에서 무기를 공급받고 군사를 훈련시켜 일본군을 공격할 준비를 하려고 했지만 적군의 배신으로 허사가 된다. 한인 독립군 부대가 러시아로 피하자 일본군은 조선인이 사는 마을로 들어가 초토작전을 펼쳤다. 마을을 불지르고 젊은이를 잡아서 처형을 했던 것인데 이때 학살된 양민이 약 3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일본군은 조선인 마을로 들어가 사람들을 모두 모이게 해서 지켜보게 하고는 부모가 보는 앞에서 아들을 작두로 목을 잘랐다. 그리고는 부모의 손으로 그 아들의 시체를 땅에 묻게 했다. 그렇게 겁을 주어서 항일 의지를 꺾으려고 했지만 오히려 증오감을 더 불러 일으켜 모든 조선인이 독립투사가 되도록 했던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조선인 청장년은 여름철에 농사를 짓고 겨울철에는 독립군 부대로 들어가 훈련을 받았던 것이다. 192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중국에 공산주의 운동이 펼쳐지면서 항일 독립군 부대도 좌우로 갈라지게 되었다. 우익 항일군의 대표적인 인물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좌진 이청천 홍범도등이고 좌익으로는 오성륜 김약산 오하묵등이었다. 연길에서 하얼빈으로 가는 길에는 일행이 네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서울서부터 나와 동행을 했던 본사 사진부의 윤재호부장과 이번여행에 스폰서가 된 (주)태일정밀의 해외부장 김진형부장, 그리고 연길부터 합류한 최봉춘 교수였다. 최교수는 연변대학에서 역사학을 가르친다고 한다. 그와의 동행은 서안과 낙양을 중심으로 한 중국 중원 일대 역사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장춘에서 하얼빈으로 가는 국도는 비교적 넓었지만 고속도로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택시기사는 고속도로를 달리듯이 질주를 했는데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것은 무차별로 추월하는 일이었다. 마주 차가 질주해 오는 것을 보면서도 두 세 차량을 연거퍼 추월했는데 그렇게 되자 미처 들어가지 못한 상태여서 차 세대가 나란히 겹치면서 엇갈리는 것이었다. 중국에서 택시를 타고 장거리를 가면 먹은 것이 소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누군가의 충고가 실감되었다. 운전기사는 자신의 곡예운전을 은근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듯 했다. 늦어도 좋으니 천천히 가라고 충고했지만 처음에 잠깐 듣는 것 같았지만 곧 잊어버리고 위험한 곡예를 되풀이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두번 다시 장거리 택시를 타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하얼빈은 나에게 있어 매우 친근감을 주는 도시였다. 그것은 소설「마루타」의 배경이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소설을 구상할 무렵 하얼빈을 볼 수 없었다. 그때는 철의 장막이 완전히 걷혀지지 않았고, 한국과 국교가 맺어지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중국에서의 취재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기록과 지도를 놓고 하얼빈 시가지를 누빌 수 밖에 없었다. 작품 속에서의 하얼빈은 1938년에서 1945년 사이였고, 그때는 송화강 변에 버드나무가 무성하게 늘어져 있고, 강가에는 돛을 단 고기잡이 배 정크가 정박해 있었다. 도시는 구시가지와 신시가지에로 크게 구분이 되어 신시가지에는 러시아인과 일본인들이 주로 살았고, 구시가지는 중국인들이 살았다. 지금도 신시가지 구역에 가면 유럽풍의 건축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현재는 이분법으로 오히려 새롭게 개발되고 있는 신흥 시가지가 눈에 띄었다. 나는 소설을 발표한 2년후(1990년 가을)에 하얼빈을 방문했다. 그때 나의 기분은 소설 속의 고향을 찾은 기분으로 설레었다. 지금은 그때만큼의 설레임은 없지만 다시 찾은 하얼빈은 언제나 친숙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지금 하얼빈은 오십년전의 지명이 많이 바뀌었다. 대부분의 지명은 사회주의식 지명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서 옛날 지도를 가지고 찾기는 어려웠다. 특히 제731부대에 가려면 거치는 길림가의 백화료도 이제는 거리의 이름도 바뀌고, 백화료 건물도 화원 소학교라는 이름의 학교로 바뀌어 있었다. 백화료의 지하실은 마루타를 제731부대로 끌고 가기 전에 가두워두던 곳 이였는데, 그곳은 초대소(여관)가 되어 있었다. 지금 그곳에 와서 숙박을 하는 중국 사람들이 그곳이 오십년전에 가공할 전율을 자아내게 했던 감옥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지 의문이다. 백화료 건물은 제731부대의 중간 기착지가 되기 전에는 일본 영사관으로 사용하던 건물이었다. 이 지하실은 영사관 감옥의 역할을 했는데,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오 이루부미를 암살하고 체포되었을 때 바로 이 감옥으로 끌려왔다. 나는 안중근이 갇혔었던 지하 감옥으로 들어가 보았다. 지금 흔적이 남아 있을 리가 없지만 바로 그 자리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여관으로 바뀌어서 침대가 놓여 있었다. 하얼빈의 남쪽으로 가면 평방이라는 곳이 있는데, 바로 그곳이 제731부대가 있었던 자리였다. 오십년 전에는 하얼빈 시가지에서 20km로 떨어진 벌판에 자리잡고 있다고 했지만, 지금은 벌판이 모두 사라지고 시가지로 이어져 있었다. 부대가 있었던 그 광대한 벌판은 모두 주택이며 공장이 들어서 있다. 더구나 부대의 건물을 거의 모두 파괴하고 달아났기 때문에 흔적을 찾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폭파하다가 남은 발전소굴뚝과 잔해가 남아있고, 그 옆에 본부 건물로 사용하던 이층건물이 그대로 있었다. 그 건물은 생체실험실이나 곤충 사육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폭파하지 않았던 것인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 건물은 인체 표본 진열실과 회의실 총무부 부대장실등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제17고등중학교로 사용하고 있었다. 방학 때라서인지 학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본부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바로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맞은편에 영안실로 사용하던 제단 자리가 보였다. 제731부대에서는 각종 세균을 배양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구하는 의사나 부대원들이 감염되어 죽는 일도 많았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부대장 이름으로 장계를 치르고 유골은 건물 2층 계단에 있는 제단에 안치시켰다. 그리고 부대장이하 모든 부대원은 그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 앞을 지날때는 그 제단을 향해 묵념을 하도록 했다. 다른 민족의 마루타에게는 생체실험을 하며 죽이면서도 그들의 동족에게는 명복을 빌었던 것이다. 이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제731부대 죄증진열관이 세워져 있다. 이 진열관은 내가 5년전에 왔을 때 학교 건물 교실 한쪽을 막아 사용했지만 지금은 따로 건물을 지어 관광객들을 받고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 보니 대부분 사진 자료들이었고, 수술도구와 도기포탄일부, 그리고 모조품으로 만든 기구와 실험 장면을 재현한 마네킹이 있었다. 당시 사용한 부품들은 내가 5년전에 보았을 때보다 수가 훨씬 적었다. 아마도 한국에서 제731부대 이벤트를 열기위해 어느 기획사에서 빌려왔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래서 부족한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진열관에 실물이 그대로 있는 것 중에 눈길을 끄는 것은 도기 폭탄이었다. 다시 말해 도자기 폭탄인데, 일반적으로 폭탄이라고 하면 철기를 사용하는 것이 상식인데, 도자기로 폭탄을 만든 것은 제731부대장 이시이 중장의 아이디어였다. 세균전을 벌이게 되면 일본군은 폭탄속에 페스트균이나 콜레라균을 넣어 적진에 떨어트릴 예정이었다. 그런데 용기가 폭탄으로 폭발할 때 그 화력으로 많은 양의 세균이 공중에서 이미 죽어버린다. 그래서 그 용기의 폭발력을 현저히 감소시켜 공중에서 죽는 세균의 수를 줄이기 위해 도자기 폭탄을 만든 것이다. 이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이시이가 그것을 발표하자 부대원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하얼빈에서 내가 찾아본 또 다른 곳은 헌병 사령부로 사용했던 건물과 프자덴 거리였다. 프자덴 거리는 일명 중국인 거리라고도 하였고, 중국인 시장이라고 했다. 이곳이 봉쇄된 상태에서 세균전실험이 있었던 곳이었다. 이곳 거리에 장티프스 균이 들어있는 만두를 풀고 식수에 장티프스 균을 살포하였다. 그리고, 세균 전염을 막고 소독을 한다는 명목으로 헌병들에 의해 봉쇄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곳에 암약하는 러시아인 중국인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색출하여 잡아내는 쥐잡기 작전을 펼쳤던 것이다. 이 작전은 제731부대와 하얼빈 헌병 사령부가 짜고 했던 가공할 세균전 실험 작전이었는데, 그로 해서 하얼빈 시민 약 십만명이 감염이 되고, 수천명이 죽었다. 중국인뿐만이 아니라 일본인들 마저도 감염이되어 걷잡을 수 없을 지경이 되자 제731부대에서는 당황을 하였고 개발한 모든 왁친을 풀어 구제를 했으나 수천명이 죽었다. 하얼빈에 살고 있는 주민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은 아직도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무슨 병인지 알지는 못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감염이 되어 죽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제731부대가 도시나 촌락의 주민을 대상으로 세균전 실험을 할 때는 몇가지 공통된 패턴이 있었다. 첫째, 기후나 계절을 가리지 않고 갑자기 전염병이 돌고 둘째, 그때 마다 다른 의료팀이나 의사들은 접근을 못하게 하고 꼭 제731부대가 나서서 방역을 하며 셋째, 발생지역의 가옥들은 파괴되고 구획이 재정비되며 넷째, 환자와 주민의 강제 격리 수용과 그에 따른 헌병대와 특무기관의 개입이었다. 거리의 분위기는 마치 미국LA의 코리아타운 같은 느낌을 주었다. 심양의 서탑거리는 한인 촌이 틀림없었다. 심양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은 약 30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러나 유동인구까지 합하면 그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근세 조선은 쇄국주의를 국책으로 하여 두만강과 압록강국경을 넘는 자는 체포해서 극형에 처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함부로 도강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1864년 봄에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던 두 사람이 식구를 데리고 강을 넘었다. 기록에 나와있는 것을 보면 함경도 무산의 최운실과 경흥의 양응범이다. 이 두 사람은 두만강을 건너 훈춘에 도착했다. 이들은 다시 흑룡강성을 건너 러시아로 갔다지만, 이들의 도강을 계기로 그 뒤를 따라 사람들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체포되면 극형을 면하기 어려웠지만, 흉년으로 먹을 것이 없었던 사람들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살터를 마련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쓴 이민을 시작했던 것이다. 1869년 봄에 35호, 동년 6월에 60여호가 강을 넘어 중국으로 들어갔다. 그 이후 계속되는 이민이 이뤄져 중국과 러시아의 황무지를 개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초기 이민은 아무런 바탕이 없는 상태에서 모험과도 같은 것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기회를 노린 청국인들이 식량을 주어 한인동포의 처자를 사갔다. 더러는 노예로 부리기도 했고, 더러는 첩으로 만들어 데리고 살았다. 심지어는 한 청국인에게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함께 끌려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민족이 바로 중국속의 조선족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더 많은 수의 조선족 선조는 그 이후 일제시대에 넘어갔지만, 가난을 벗어나려고 떠난 것에는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이민이 시작된지 1세기가 지난 지금 중국속의 조선족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나는 언젠가 중국속의 조선족에 대한 소설을 쓸 계획이다. 그래서 이번 여행과정에서도 동포에 대해서 신경을 쓰며 살펴보았다. 가난과 핍박 속에서 고국을 떠나 중국에 동화되어 살고있는 이들은 지금 어떤 위치인가. 그것은 자치주를 만들어 민족적인 전통을 잇도록 한다든지, 한족(漢族)이 아이를 하나밖에 낳지 못하게 하는 정책인데 반하여 소수민족은 두명까지 낳을 수 있게 배려한 점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질에 가서 소수민족은 한족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살고 있을 뿐이다. 중요한 위치의 정치인이나 영향력 있는 인물이 배출되기는 아직도 민족적인 텃세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조선족으로 크게 출세한 인물을 알아보니 3성장군이 있고, 부성장(副省長)이 한명 있을 뿐이다. 내가 심양을 찾아간 것은 부근의 어느 한 촌락에 살고 있다는 박씨마을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한족에는 박씨성을 가진 사람이 없다고 한다. 동북 삼성(三省)에 조선족 마을은 많이 있다. 그런데 구태여 심양의 박씨마을을 찾은 것은 그들이 박혁거세의 후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이주가 다른 조선족보다 훨씬 앞선 4백여년 전이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중국에 살고있는 대부분의 조선족은 1864년 이래로 건너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박가촌(朴家村)은 4백년전에 조상이 넘어와서 그 마을에 터를 잡고 살아왔던 것이다. 고려호텔에서 아침 일찍 출발한 나는 (주)태일정밀 심양영업소에서 제공해준 승용차로 심양시가지를 벗어났다. 요녕성 일대는 수해가 나서 대부분의 외곽도로가 붕괴되고 끊겼다. 그래서 무순(撫順)과 집안(集安)을 돌아보고 광개토왕비도 보려고 했지만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우리가 가고 있는 박가촌이 있는 도로는 별로 수해의 흔적이 없었다.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를 번걸아 두어시간 달리자 목적지인 본계 현 산성자 향 박가촌이 나왔다. 박가성을 가진 주민들은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했고, 집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니 생활양식이 만주식이었다. 결국 이들은 오랜 전통인 조선 양식을 잊고 만주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촌장의 임기는 3년인데, 주민들이 투표를 해서 뽑는다고 한다. 그는 전에 농사를 잣기도 하였고, 군대에서 배운 전기 기술로 전공일을 했다. 촌장의 월급은 연봉으로 받으며, 1만원(한국 화폐로 1백만원)정도 받는다고 하였다. 주민들의 생활 수준을 묻자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보통 8천원 전후가 된다고 하였다. 연간수익 8천원이면 중국에서는 중산층에 해당한다. 물론, 중국에 중산층 개념이 있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민들은 농사를 짓기도 하고, 그곳에서 가까운 탄광에 가서 일을 하며, 부근의 도시로 나가 노동을 한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연간 8천원을 버는 것이 아니고, 노동력이 가능한 사람은 모두 일을 하니 두세사람이 함께 버는 것이다. 촌장의 소개를 받아 삼대가 함께 살고 있는 가정을 방문했다. 집마당으로 들어가자 줄에 매여있는 개가 짖다가 우리를 보고 꼬리를 흔들었다. 짖다가 왜 꼬리를 흔들며 반가워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주인의 조상과 같은 혈통임을 알고 봐주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마당에는 씨암탉이 땅을 파헤치며 먹이를 찾고 있었고, 개울 쪽으로는 오리가 지나갔다. 장독대에는 포도 넝쿨이 올라가있고, 그 사이로 빨랫줄이 쳐 져 있으며, 그 맞은편에 헛간이 보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내가 어렸을 때 시골집에서 모았던 것과 별로 다를바 없는 풍경이었다. 그 어느 구석엔가 조상의 숨결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집안으로 들어가자 저으기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 구조는 완전히 낯선 풍경이었다. 물론, 약간 북한의 생활 풍습과 뒤섞인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중국인들의 주거 형태로 되어 있었다. 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거실을 겸해서 쓰고 있으며, 온돌은 없었다. 산에 풀을 베러 간 노인이 와서 박씨 삼대와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다. 수염이 난 노인(朴文昌)은 79세로 내가 어렸을 때 기억에 남아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아들 박명동씨(朴明銅ㆍ50)는 시골의 투박한 농사꾼이었다. 손자 박희무씨(朴希武ㆍ18)는 봉개현의 어느 공장에 나가서 일한다고 한다. 중국은 최근에 주 5일 근무제가 실시되고 있어 토요일과 일요일은 쉰다. 그래서 손자는 집에 와서 일손을 돕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모두 한국말을 못하고 있으며 그 어떤 전통 의식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행동이나 생활 습관 어디엔가는 조선인만이 가질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적어도 그들의 조상은 조선인이 틀림없으니까.촌장의 말로는 얼마전까지도 빨래를 빨아 말리면서 돌에 놓고 때리면서 펴는 방망이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빨래를 방망이로 패서 펴는 일은 조선인의 전통습관이 아니겠는가. 많아진 차량과 늘어나 상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시가지를 돌아보고 호텔에서 여장을 푼 다음 장안로를 지나 천안문 광장으로 나갔다. 천안문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이곳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민주화 투쟁을 했던 일이 있는 <천안문 사태>이다. 중국 당국에서도 그 사건을 사태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중국이 완전한 힘주화를 찾으면 그 사태는 <민주 혁명대회>로 이름이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에 대한 사건 이름은 권력자와 상대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천안문 광장에는 자금성과 정면으로 마주한 곳에 모택동 기념당이 있었다. 그런데 그곳으로 사람들이 끝없이 줄을 지어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국내외 관광객들과 중국의 기관에서 단체로 온 사람들로 모였다. 너무나 무더운 날씨였고, 그 행렬이 광장 한쪽을 길게 늘어 서 있어 나는 모택동의 유해를 보는 것을 포기했다. 천안문 광장에서 볼거리로 꼽는다면 역시 자금성이다. 자금성은 많이 알려졌으니 내가 설명을 할필요는 없는 듯하다. 그러나 한마디 소감을 언급한다면 참 크게 지었구나, 하는 위압감이다. 누구 기죽일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한명의 황제를 모시기 위해 22만평의 땅위에 수백체의 크고 작은 집과 시설을 해놓았다. 명과 청나라를 거치는 5백년동안 26명의 황제들이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마지막 황제로는 영화로 알려진 <부의>였다. 자금성은 14년에 걸쳐 완성된것이라고 하는데 목수를 비롯한 기술자 10만명과 1백만명의 노동자가 동원되었다. 이 성이 완성된 것은 1420년 영락 17년이었다. 이성은 1644년 이자성의 반란 때 파괴된 일이 있고,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북경을 침공했을 때 다시 한번 파괴되었다. 자금성의 위용은 1911년 신해혁명 때 황궁으로서의 역할을 마감했다. 당시 어린 황제였던 부의는 그대로 자금성에 살았지만 1924년 11월에 국민당 정부는 자금성의 건물과 수장품들을 접수하고 부의를 내쫓았다. 그리고 권위의 상징이었던 자금성은 그때부터 고궁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북경에서의 볼거리라고 하면 자금성을 비롯하여 북해공원 모순기념관 송경련의 옛거주지 북경동물원 이화원 옹화궁 원명원 유적공원 공자의묘 향상공원 와불사 벽운사 등이다. 교외로 나가면 만리장성이 있고 거용관 노구교 중국 이민 항일전쟁 기념과 명13능 정릉 장릉 담지사 계대사 방산 등이 있다. 이들을 모두 보려면 여러 날이 소요될 것이다. 나는 지난번에 왔을 때 보았던 곳은 피하고 그 밖의 다른 몇 곳을 돌아보며 북경에서 이틀을 보낸 다음 정주(鄭州)로 날아갔다. 정주는 은나라때 성터가 남아있는 은의 도읍지였다. 은은 중국의 역사가 시작될 무렵이었으니 아주 오래된 고도라고 볼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돌아본 정주에서는 성터를 제외하고는 은나라 흔적이 눈에 띄지 않았다. 도시를 가로질러 있는 성터도 풀이 무성하게 자란 흙언덕이라서 그것이 성벽이라고 해서 바라보니 성터같이 보였을뿐 우리나라에 흔하게 있는 뚝 같았다. 은나라때 성벽을 흙과 돌로 쌓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돌은 파묻히고 현재는 흙언덕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정주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일찍 렌터카를 대절해서 낙양으로 향했다. 그런데 호텔로 나온 렌터카는 뜻밖에도 군부대 전용차량이고, 운전기사도 중사계급장을 단 군인이었다. 내가 어리둥절해 하자 렌터카를 소개해준 여행사 직원이 다른 렌터카보다 편할테니 사용하라고 했다. 뒤에 안일이지만 군부대에서 부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일이 공식적으로 가능한지, 아니면 몇몇 지휘관이 돈벌이를 위해 비공식적으로 하는 짓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군부대 승용차를 타고 다니니까 여행사 직원의 말처럼 편리했다. 도로의 중간중간에 있는 톨게이트에서 돈을 받는 일이 생략되었고 어느 유원지나 기관에 들어가도 그대로 통과되었기 때문이었다. 정주에서 낙양까지는 승용차로 네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그런데 낙양을 가는 길목에 소림사(少林寺)가 있어 그곳에 들렀다.
소림사가 있는 중악숭산 일대를 돌아보았다. 중악숭산(中岳嵩山)이라 함은 그곳에 있는 태실산(太室山)과 소실산(少室山)을 합쳐서 그렇게 부른다. 이 산을 중국 5대 명산중의 하나로 꼽고 있다. 중악숭산의 봉우리는 모두 72봉이며, 산 전체에 흩어진 절은 72곳이다. 봉우리 하나마다 절을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절의 수가 옛날만큼 많지는 않지만 남쪽 남악(南岳)에 있는 사찰까지 합하여 백여개의 사찰이 산재해 있다. 소림사를 낙양으로 향하는 길목의 어느 소도시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중국여행에서 제일 어려웠던 것이 음식이었지만, 대부분 호텔에서 양식을 먹거나 조선음식을 먹었다. 조선음식이라고 해야 중국음식과 뒤섞여있어 본래의 한국음식맛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음식이 있는 곳에서는 찾아가 먹었지만 그렇지 못한 곳에서는 중국음식을 먹아야 했다. 여행에서 먹는 음식도 일종의 관광에 들어가기 때문에 중국에서 중국음식을 맛보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우리가 낙양을 가는 소도시에서 먹는 중국음식은 그야말로 느끼한 기분을 주었다. 이때 먹은 음식으로 여러날 배탈을 앓게 되었다. 그날 오후 중국 인민군 중사가 모는 승용차편으로 우리는 낙양에 도착했다. 낙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백마사(白馬寺)라는 절이 있어 그곳에 들어가 보았다. 백마사는 중국에서 최초로 생긴 불교사원이라고 한다. 그때가 서기 68년인데, 백마사라는 절 이름도 유래가 있다. 위서(魏書)에 보면 명제(明帝「後帝」)때 인도로 파견한 승려가 경전을 가지고 백마를 타고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어쨌든 아무리 길이 험해도 대여섯시간 걸릴 것으로 추측했고 택시운전기사들도 그렇게 말했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지난번 장춘에서 하얼빈을 가듯이 과속으로 추월을 하여 소화장애를 일으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다. 다행이 서안으로 가는 택시 운전사는 차를 얌전히 몰았고 성격도 차분해서 짜증을 내는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 여정은 길고도 험악했다. 가는 도중 이유없이 길이 막혀 차가 멈추곤 했다. 아마도 협소한 길을 올라가다가 차가 고장이 나자 왕복 차선이 한 개의 차선으로 바뀌면서 정체 현상을 빚어냈기 때문으로 보였다. 그렇게 연착된 택시를 11시간 40분동안 타야 했다. 서울에서 명절이 되어 시골집을 찾아갈 때처럼 차안에서 거의 12시간을 지내야 했다. 그러나 그 힘든 여정에서도 고원지대의 시골 풍경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곳은 비가 비교적 내리지 않는 곳이어서 시골 사람들은 굴을 파 그 안에서 살았다. 원시인들이 굴에서 생활을 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21세기인 요즘에도 사람들이 굴에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었다.
밤이 되어 서안에 도착했다. 우리는 예약을 해놓은 호텔을 찾아갔다. 호텔에 도착해서 체크 인을 하고 있을 때 프런트 데서크로 나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이런 외딴 중원에서 나를 찾는 전화라니-하는 감탄을 하면서 수화기를 받자「정선생님이시요?」하는 함경도 사투리가 섞인 여자의 목소리렸다. 그렇다고 하니까 「와 기래 늦었시요?여행사 가이드 입네다. 기다리고 있었시오. 우리가 곧 갈테니 체크 인하며 기다리시라요」하는 것이었다. 서안 현지 여행사에 근무하는 조선족 안내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갑시다」「먹읍시다」「일어나라요」하는등 어투가 좀 무례하다고 느꼈지만 이들 조선족들은 아직 그 어감의 차이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을 탓할 수 없는 일이다. 기다리라고 했던 그녀의 말처럼 로비에서 기다리자 삼십대 중반의 남자와 이십대 초반의 여자가 왔다. 그들이 한눈에 조선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삼십대 중반의 남자는 여행사 한국부 부장이고, 여자는 앞으로 사흘동안 우리를 안내해줄 안내양이었다. 조금 전에 전화로 「기다리시라요」하고 지시를 했던 미스백이였다. 서안시는 섬서성 위하평원 중구에 위치해 있는데, 교통의 중추도시로 알려져 있다. 서주 진 서한 수 당등이 서안에 도읍을 정했다. 지금의 서안은 주나라때 호경이라 불렸고 진나라 때에는 함양, 한나라 때와 당나라 때는 장안이라 했다. 서안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호텔 식당에서 양식으로 아침을 먹고 조금 있자 현지 안내양 미스 백이 나타났다. 『갑시다』라고 해서 따라가니 나를 승용차에 태워 서안 동쪽으로 한동안 달렸다. 차는 두어시간 정도 달려 교외를 벗어나자 다시 좁은 길을 지나 관광버스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어느 곳에 멈추었다. 그곳이 그 유명한 진시황제의 병마용 무덤이었다. 진시황은 살아 있을 때처럼 죽어서도 황제로서 영광을 누리기 위해 땅밑에 어마어마한 궁궐을 만들었던 것이다. 흙으로 병사를 약 1만여명이나 만들어 칼과 창등 무기를 들고 무덤을 지키게 한 것이라든지, 아직 모두 발굴되지 않았지만 지상과 거의 비슷한 구조로 신하와 궁녀를 거느리는 위용을 만들어 놓았다. 이 병마용은 세계8대 기적중의 하나로 꼽고 있다. 보졸 궁노수 전차병 기병등 4개 병종으로 도열해 있는 병사들은 그 표정이 모두 다르다. 병사며 말 마차등 지하에 있는 모든 것은 실물과 같은 크기였다. 이것이 2천년동안 땅속에 묻혀 있다가 1974년에 주택을 공사하면서 땅을 파다가 발견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3호갱까지 발굴이 되었는데, 관광객들에게는 2개 갱만 공개하고 있다. 이 일대에 더 많은 갱이 있지만 아직 발굴을 하지 않고 있다. 발굴을 뒤로 미루고 있는 유적중의 하나가 진시황릉인데, 이 능은 37년동안 만든 것으로, 진시황제는 그가 황제가 되면서 무덤부터 만들었던 모양이다. 이 무덤의 규모는 높이 76m, 둘레길이 약 2천m로서, 내성과 외성으로 둘러싸였는데, 내성의 둘레는 2천5백m, 외성은 6천2백m가 넘는다고 한다. 그 안에는 지하 궁전이 있는데, 금은보화가 쌓여있고, 지하속에 수은으로 강과 호수를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이 무덤을 발굴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공기속에 노출하면 모든 것이 파괴되기 때문에 보전할 수 있는 기술이 강구될 때까지 뒤로 미루고 있다는 말이 있다. 들리는 말로는 일본의 기술진이 합작으로 발굴을 하자는 제의가 들어왔지만, 중국 당국에서는 사양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자존심 문제로 보였다. 진시황 병마용을 보고 그곳에서 화청지로 갔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화청지(華淸池)는 당 현종과 양귀비(본명 양옥환)가 노닐던 곳이었다. 두 사람의 욕조가 있고, 산책로가 있었으며, 차를 마시면서 궁녀들이 춤추는 것을 지켜본 후원이 있었다. 그 후원에는 매점이 있어 나는 그곳에 앉아 중국 녹차를 마시면서 1천2백여년전에 양귀비와 당황제가 술을 마시면서 무희들이 춤추는 것을 지켜보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 둘레로는 호수의 물이 흘렀고, 호수가에는 석류나무가 있었는데, 나무는 천년이 넘은 것 같지는 않았다. 화청지의 건물들은 안산의 난때 파괴되었고, 현재 보는 것들은 청나라 때에 손을 본 것을 해방후에 다시 중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곳은 황제의 놀이터로서 손색이 없어 보였다. 앞에 여산이 아름답게 펼쳐 있고, 그 아래는 지금도 온천물이 흘러내렸다. 온천탕에도 황제 전용의 어탕, 태자가 쓰는 태자탕, 황제의 비빈들이 사용한 비빈탕 장탕 상식탕18개가 있었고, 그 중에 양귀비가 전용으로 사용했다는 귀비탕이 제일 화려했다고 한다. 이 화청지는 현종과 양귀비의 휴식처로서 뿐만이 아니라 황제가 10월에 와서 다음해 봄이 올 때까지 머물렀으니, 당시 정치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화청지의 어느 벽면에 보면 명나라 때 그렸다는 벽화가 있다. 그 벽화에 당 현종과 양귀비가 처음 만나는 장면이 있다. 당 현종은 옥좌에 앉아 있고, 그 아래 여러 궁녀들 틈에 술잔을 들고 황제에게 바치려는 몸짓을 하고 있는 양귀비가 서 있다. 그런데 그림 속의 양귀비는 얼굴이 통통하고 몸매가 풍만한 것이 오늘날의 미인 개념과 거리가 많았다.그때는 그런 여자를 절세의 미인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연회때 수왕비는 황제의 눈에 들었고 황제는 환관 고역사를 시켜 그 여자를 가까이 오게 했다. 그러나 그녀가 며느리이고 보니 어쩌겠는가, 황제는 수왕과 이혼을 하게 하고 며느리의 연을 끊은 후 그녀를 도교의 사원에서 수행을 하게 했다. 그후부터 황제는 양옥환을 만났다. 이것이 정사(正史)이지만 다른 야사(野史)로는 더 재미있는 말이 많이 있다. 양귀비가 며느리라는 것을 알고도 반한 나머지 침실로 불러들였고 그것이 세간에 나쁘게 소문날 것을 염려해서 이혼시킨 다음 수도원같은 곳에 은폐시켜 놓고 재미를 보다가 나중에 궁안으로 불러 들였다고 한다.어쨌든 황제가 홀딱 빠질만큼 절세 미인인데다 가무에 뛰어나고 매우 총명했다고 한다. 그리고 좀 야한 말이지만 잠자리의 기교에 뛰어났다는 말도 있다. 홀딱 빠진 황제는 정치는 하지 않고 그 여자와 노닐기만 하였고 서열로 보면 황비 다음 가는 귀비에 봉하였으며 화청지라는 궁을 지어 주기까지 했다. 양귀비는 황제의 총애를 틈타 오라비 양소를 높은 벼슬에 발탁시켰을 뿐만 아니라 주위 친척 주변 인물을 모두 끌어들여 그 세도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런데 황제 다음 제1의 실력자가 된 양귀비의 오라비 양소는 정치는 모르고 뇌물 먹기에 바빴다. 이 반란은 당 왕조의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고 현종은 궁에서 쫓겨 촉의 땅으로 도망을 가야했다. 장안성을 떠난 현종 일행이 함양을 거쳐 마외라는 곳에서 머물 때 이번에는 수행하던 군사들이 양귀비와 그 오라버니 양소에 대한 적개심으로 반기를 들었다. 그래서 양소는 한밤중에 끌려나가 목이 잘렸다. 양소의 아들과 양귀비의 언니들도 처형되었다. 그러나 양귀비는 황제와 함께 있어 감히 어쩌지는 못했으나 군사들의 반감은 계속되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했다. 그러자 환관 고역사가 황제에게 가서 양귀비를 버리지 않으면 더 큰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고하였다. 황제는 양귀비를 죽이고 싶지 않았으나 그녀를 죽이지 않으면 분노한 군사들을 진정시킬 도리가 없어서 고역사를 시켜 죽이기로 했다. 두 사람은 눈물로 이별을 고한다. 양귀비는 자신의 죽음이 황실을 구하는 일이라면 열백번 죽어도 영광이라고 하면서 미련없이 떠난다. 고역사는 양귀비를 불당으로 데리고 가서 명주천으로 목을 매어 죽었다. 그후 시인 백거이가 현종가 양귀비의 사랑을 주제로 「장한가」라는 시를 남겼다. 장한가는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한시다. 중국의 대도시를 보면 땅이 넓어서 그런지 고층 빌딩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 편인데, 중경은 유난히 고층 빌딩이 많이 들어서 있었다. 이곳 인구가 1천4백만명으로 인구 많기로 하면 세계 첫째라고 한다. 안개인지 공해인지 알 수 없지만 하늘은 항상 뿌옇게 흐려 있고, 고층 빌딩에서 중경 시가지를 바라보면 스모그가 대단하다. 기록을 보면 중경이 중국 3대찜통 중의 하나라고 되어 있다. 어떻게나 덥고 짜증이 나는지 관광이고 뭐고 다 귀찮아지면서 에어컨이 있는 차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싶기만 하다. 이곳은 한국의 임시 정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우리에게 그렇게 친근한 곳은 아니었다. 그래서 한국 관광객들도 별로 오지 않는 곳이다. 그러나 이곳에 최근에 생겼다는 한국 음식점이 있어 찾아갔다. 한국인 관광객이 많지 않은데 한국 음식점이 되느냐고 물으니 일본 관광객이나 중국인도 한국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더구나 한국식 불고기는 이제 국제 음식이 되어 유럽 손님도 한국 음식점을 찾아와서 김치와 불고기를 찾는다고 하였다. 그렇게 말하는 김치와 불고기를 먹어보면 엄밀하게 한국식은 아니고, 국적불명으로 뒤섞인 맛이 나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우리의 맛을 살리려 하고 있다. 관광객이 중경을 찾을 때는 중경 자체의 매력보다 중경에서 출항하는 삼협(三峽)관광을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양자강을 따라 중경에서 무한으로 가는 수로에 구당협, 무협, 서능협이 있는데 이것을 가리켜 삼협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삼협은 아름다운 경치로 압권이다. 그러나 나는 삼협여행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중경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를 돌아본 이후 계림으로 날아가야 했다.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는 한때 헐릴 위기에 처한 일이 있었다. 그것을 한국의 몇몇 기업체의 협력과 중국 정부의 협조로 복원되어 개장된 것이 95년8월11일이라고 하니 나는 복원이 된지 약 20일만에 찾아가 본 셈이 되었다. 시중구 연화지(市中區 蓮花池)에 있는 그 임시정부 청사는 한국 식당에서 걸어 갈 정도의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바로 옆에는 대형 호텔 공사가 한참 진행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청사의 입구에 가서 초인종을 누르니 관리인이 문을 열어 주었다. 한국 관광객이 아니고는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문을 아예 잠그고 있었다. 윤부장과 나는 조선족 이선자(李鮮子)라는 여자 한사람의 안내를 받았다. 그녀는 길림에선 온 부인으로 전에는 중경시 박물관에 근무하다가 이번에 이곳으로 파견되었다고 한다. 이 임시정부 청사는 시급문물보호단위(市級文物保護單位)65-38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안내를 받아 처음 들어간 1호청사 아래층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시실이 꾸며져 있었다. 그 방은 전에 경호대 사무실과 선전부가 쓰던 방이었다고 한다. 계단을 올라가 이층으로 가니 문화부, 선전부, 선진 부장실이 있었고, 김구 주석의 판공실과 국무위원 회의실이 있는 방은 3호 청사 3층에 있었다.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해와 남경을 거쳐서 항주, 가흥, 진강, 장사, 광주, 유주, 등을 전전하다가 장개석 정부가 중경으로 옮겨온 이후 1940년 이곳으로 옮겨와서 해방이 될 때까지 사용했다. 이곳에서 김구 주석은 장개석의 도움을 받아 한국 광복군을 창설해 전쟁 수행능력을 키우려고 했다. 중경에서 한국 광복군을 정식 출범시켰지만,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정부의 협조로 1930년부터 중앙육군군관학교에 낙양분교 한일특별반을 설치했고, 그 이후 1937년에 군사특여단을 서안으로 파견하여 조선 군대의 양성을 준비했다. 그후 1940년 9월에 임시정부 직속의 한국광복군 부대를 세웠다. 이번 여행에서 상해의 임시정부청사와 중경의 임시정부 청사를 보는 그 자체로 끝날 일이 아니고 당시의 임시정부 역할과 가치를 역사적으로 재평가해야 되지 않을까하는 개인적인 생각을 가져보았다. 일제 때 여러 곳에서 여러 형태로 많은 독립지사들이 항일 투쟁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그 형식을 갖춘 정통성있는 항일 투쟁 단체였음에도 국가 기관으로 인정 받지 못했다. 그것은 아마도 참전 강대국의 이해관계와 같은 변수가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소련은 김일성을 내세워 북한에 공산정권을 세울 생각을 했으니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을 것은 당연했고, 미국은 이승만을 내세운 하나의 자본주의시장으로서 대한민국을 생각했을 뿐이다. 27년동안 임시정부를 이끌고 왔음에도 인정을 하지 않았다. 임시정부 때 도와주었던 유일한 우방이었던 중국 공산당에 밀려 대만으로 쫓겨갔으니 임시정부의 입장은 최악의 상태였다.임시정부의 직속 부대인 광복군은 무장 해체된 상태에서 귀국해야했고, 김구를 비롯한 임시 정부요인도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다. 환영자체를 못하게 했다. 이러한 주변 강대국의 이해에 얽혀서 역사적 가치는 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각도에서 역사적인 진실을 재평가해야될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해방50주년을 말로만 떠들 것이 아니라, 무엇이 역사의 진실인지 우리는 자각하면서 가치관을 세울 필요가 있다. 임시정부 청사를 보고 안내인 이선자씨가 내놓은 차를 마신 후에 우리는 그곳을 떠났다. 그날 중경시 박물관과 증가암 50호를 관광했다. 증가암(增家巖)50호란 중일전쟁 당시에 중국 공산당 중앙남방국과 팔로군 사무소 직원들이 머물었던 주거지인데, 주은래도 이곳에서 살았다고 해서 주공관(周公館)이라고도 부른다. 1945년에 모택동이 국민당과 교섭할 때 이곳에 와서 기자회견을 했다고 한다. 그 밖에 홍암혁명박물관(紅巖革命博物館)이 있는데, 중일전쟁 당시 중경이 국민당 정부의 임시 수도였을 때 중국공산당 대표부가 있었던 곳이다. 1945년에 모택동과 주은래가 이곳에서 국민당과 회담을 했던 곳이다. 중국 국내 여행객들은 중경에 오면 꼭 들리는 곳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 돌아보니 기대했던 것만큼 충족되지는 않았다. 아마도 촬영된 사진은 안개나 구름, 새벽과 저녁 등 분위기를 살려 담은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여간해서 볼 수 없는 기암절벽이 눈길을 끌었다. 특히 璃江여행은 그렇게 흔한 경험은 아니었다. 배를 타고 하천을 따라 몇시간 가는 동안 흐르는 맑은 물은 한폭의 산수화 그대로였다. 윤부장은 헬기를 타고 각도를 달리해서 사진을 찍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어쩔수 없는 한정된 배갑판에서도 열심히 촬영을 하는 듯했다. 계림은 계수나무가 많아서 생긴 이름이다. 공항에 내리자 연락이 된 조선족 안내원이 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렸다. 20여분 차를 타고 공항에서 계림으로 가는 동안 부근에 있는 산이 눈길을 끌었다. 그 산은 뾰족뾰족한 것이 가분수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런 지형을 카르스트지형이라고 하는데 약 3억년전 지각 변동때 생긴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계림에 도착했을 때가 점심 무렵이었다. 그래서 관광을 하기 전에 먼저 식당으로 가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그곳에도 서너군데 조선 음식점이 있다고 해서 그중에 한 곳을 찾아갔다. 그런데 별로 깨끗하지 못하고 후줄근한 분위기에 기름 냄새가 났다. 그러나 된장찌개를 할 수 있다고 해서 기다렸더니 국인지 찌개인지 알수 없는 국물을 가져왔다. 중국을 여행하면서 조선 요리라고 해서 만든 것이 대부분 완전한 한국 요리가 아니고 중국식과 뒤섞인 맛을 내고 있음을 알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음식 재료를 가져가고 한국인 요리사가 직접 만든 것은 별로 다를바 없는 한국 음식맛이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자신이 직접 그 찌개를 만들었다고 하면서 조선족 아가씨 한명이 식탁 앞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였다. 그녀는 길림성 목단강에서 왔다고 자기를 소개하면서 한국에서 온 우리(윤부장과 필자)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솜씨를 자랑하고 싶은지 찌개의 맛이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별로였기 때문에 아무 말을 안했는데 윤부장이 그녀의 입장을 생각해서인지 맛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만족스러워하면서 많이 먹으라고 했다. 못생기기는 했지만 말을 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녀의 마음은 순박한 것 같았다. 그녀는 우리가 식사를 끝낼 때까지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그러다가 윤부장의 목에 걸려 있는 볼펜을 보면서 그것을 자기 것하고 바꾸자고 했다. 윤부장은 사진을 촬영한 후 찍은 장소를 메모하려고 줄을 맨 볼펜을 걸고 다녔다. 그런데 그것이 탐이 나는지 자꾸 바꾸자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줄이 매어 있지 않은 볼펜은 불편했기 때문에 윤부장은 바꿔줄수 없었다. 여자는 계속 그 볼펜이 탐이 나는지 식사를 마치고 나올때도 바꾸자고 졸랐다. 윤부장은 씩 웃으면서 못들은 척했다. 그러나 그곳을 떠나 노적암으로 가는 길에 윤부장은 그 아가씨가 마음에 걸리는지 그 볼펜을 여러개 사올 것을 그랬다고 후회를 하였다. 마음이 약한 윤부장은 자신이 모질었는가 하는 생각에 그 말을 며칠이 지나 귀국하면서 또 하였다. 노적암은 우리나라의 고수동굴을 연상시켰다. 그러나 고수동굴보다 규모가 컸고, 넓은 공간이 많았다. 입구에서는 다른 어떤 관광지보다 더 유난하게 노점상과 호객하는 사람이 많았다. 바짝 따라오면서「이거 사세요 5불 5불」하고 소리쳤다. 그 장사꾼에게 잠깐 고개를 돌려 관심을 보이면 끝까지 따라붙으니까 아예 처음부터 못본체 하고 무시하라고 안내자가 귀띔했다. 그리고 물건을 사더라도 3분의1정도 깎으라고 말했다. 어느 것은 10분의1로도 살수 있으니 속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노적암에 들어가니 무척 시원하고 여러 가지 종유동이 눈길을 끌었다. 수정궁 전원풍경 호랑이 폭포 등의 이름이 붙여져 있었고, 조명을 받은 그 바위들은 환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바위의 환상적인 모습보다 시원한 맛에 그곳에서 나가고 싶지 않아 머뭇거렸다. 동굴 안에 있는 호수(동굴 안에 호수가 있다는 것은 그 크기는 작았으나 호수 분위기를 내는 물이 고여 있는 것을 말함이다)가는 돌 위에 앉아 자연의 오묘함을 즐겼다. 계림 관광의 극치는 璃江여행이다. 다음날 아침 유람선을 타고 약 20km 떨어져 있는 양석으로 향했다. 굽이쳐 흐르는 강물은 그렇게 맑을 수가 없었다. 깊지않아 강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강 양쪽에 있는 산 봉우리는 그림같이 수려했고, 고기를 잡는 나룻배와 원주민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강에는 물소가 다니는 것이 보였다. 더러는 대나무로 뗏목식의 배를 만들어 타고 지나가는 유람선으로 접근해 와서 뗏목과 연결한 갈고리를 유람선에 걸어놓고 배의 손님들에게 토산품을 파는 원주민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슨 약속이나 한 것 같이 선실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갑판이나 창밖에서 물건을 팔았다. 배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나자 곧 양석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그곳은 옛날부터 「양석의 산수는 계림에서 으뜸」이라는 말이 나올만큼 아름다운 곳이였다. 양석에서 배를 내려 계림으로 올라와 대기하고 있는 승용차를 타고 다시 계림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주변을 보면 여전히 카르스트 지형의 산봉우리가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계림을 중심으로 사방 1백km 주변의 모든 산이 기암 절 벽을 이루며 아름다운 형태라고 한다. 계림사와 리강 여행도 흥취를 주지만 조금 벗어나서 흥평이나 여러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는 용승 마을도 볼거리다. 계림은 장족(壯族)의 자치구라고 하는데 나는 장족이 어떤 족속인지는 알수 없었지만 특이한 의상을 하고 있으며 한족과는 약간 다른 생활 풍습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들의 조선족이 순수 전통을 지키면서도 중국화되었듯이 다른 소수민족들도 상당히 많은 부분이 중국화되어 있었다. 계림에서 머물며 신선이 되는 기대를 해보았지만 무척 더욱 날씨 때문에 만사가 귀찮아졌다. 밤이 되어 약간 기온이 내려갈 때 시가지를 지나는 리강 변의 야시장으로 나가보았다. 토산품과 기념품을 판다고 해서 둘러 보았지만 노점상마다 상품이 획일적으로 같았고 물건이 조잡했다. 상해에서 항주로 가는 길이 거의 도시로 이어져 있는 인상을 주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농촌 풍경은 잠깐이고 공장지대라든지 공업소도시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중원 내륙지방과는 달리 운하가 발달되어 있었다. 항주에서 유명한 곳이 서호(西湖)이다. 이 호수는 당나라 이전에는 금우호로 불렀다. 항주는 4천년전부터 고대 양저문화(良渚文化)가 번성했다. 항주의 도시 발전은 주조기(奏朝期) 기원전 2백년쯤에 6국을 통일한 후에 이 지역에 전당현을 설치한 후 발전되었고 그 후 항주는 남송(南宋)의 도읍지가 되면서 더욱 발전했다. 모터 달린 배를 한척 빌려타고 우리는 서호를 돌았다. 이 호수는 미녀 서시(西施)에 비유되며「아침에도 좋고 저녁에도 좋고 비오는 날에도 또한 좋다」고 한 것처럼 경치가 절경이었다. 서호 십경(十景)으로 민화 백사전(白蛇傳)의 무대가 된 단교잔설(團橋殘雪), 호수에 있는 전망대로 평호추월(平湖秋月), 연꽃의 향기가 감돈다는 곡원풍하(曲院風荷), 북송의 시인 소동파가 항주지사로 있을 때 20만명을 동원해서 쌓았다는 뚝 소제춘효(蘇堤春曉), 5백그루의 모란과 떼지어 헤엄치는 잉어가 있는 호수 속의 연못 화항관어(花港觀魚), 안개낀 호수에 종소리가 울린다고 해서 남병만경(南屛晩鏡), 석양에 지는 해가 아름답다고 해서 붙여진 설봉석조(雪峰夕照), 꾀꼬리 울음소리가 울려퍼지는 호수 속의 공원 유랑문앵(柳良聞鶯), 호수 속에 섬, 섬속에 호수가 있는 삼담인월(三潭印月), 신선이 두 마리의 호랑이를 이용해서 샘을 팠다는 호포천(天下第三泉)이 있다. 그날 항주를 보고 저녁에 상해로 돌아왔다. 다음날 상해 관광이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간 곳이 홍구공원이었다. 그 공원은 일명 노신공원이라고 불렀는데 그곳에 달려간 것은 항일 의거를 한 윤봉길의사의 현장을 보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다만 중국과 국교가 맺어진 이후 그 공원 한쪽에 한국 항일 의사들이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그 다음 우리가 찾아간 곳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였다. 이 유적지 역시 허물어질 위기에 처한 것을 한국 정부가 중국 정부의 협조를 구해서 보존시키게 되었다. 약간 보수는 했지만 집은 옛날 그대로 본존되어 있었다. 상해시 마당로(馬當路) 4호에 있는 이 건물은 1925년에 건축된 것으로 다음 해에 임시정부가 들어섰고 1932년 5월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폭탄 테러를 하여 문제가 발생할 때까지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이 건물에서 약 7년동안 일을 보았던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 살펴 보았다. 회의실 주방 사무실 그리고 김구가 사용하던 침실 등을 보았다. 회의실 주방 사무실 그리고 김구가 사용하던 침실 등을 보았다.건물은 달랐지만 그 구조는 중경에서 보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와 비슷했다. 상해에는 한국의 대기업 간판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북경에서도 보았지만 상해에는 상품을 선전하는지, 아니면 공장을 건설해서 생산을 하고 있는 듯 가장 많이 보엿다. 거리에서는 한국에서 생산된 승용차도 간간히 보였다. 일본의 자동차 물결에 비한다면 보잘것 없지만 중국의 거리에 한국에서 생산한 자동차가 굴러 다닌다는 것은 반가왔다. 상해에서 청도로 갔을 때 그곳에 있는 한국의 기업체가 3백여개가 넘는다는 말을 듣고 나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물론, 기업체의 수와 그 규모는 비례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한국 기업체는 그 수송 수단의 경제성으로 주로 산동성에 많이 들어와 있었다. 그 중에는 실패를 하고 돌아간 기업도 적지 않다고 한다. 실패를 한 원인은 여러 가지였겠지만 그곳에서 활동하는 기업가들을 만나 들은 말로는 주로 생산과 현지 판매가 연결된 업종은 대부분 실패를 했다한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물건을 생산하면 파는 것이 당연한데 생산과 판매가 이어진 업종이 실패를 했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각 도시마다 시에서 경영하는 맥주회사가 있다. 그 수는 자그마치 1천5백여개라고 한다. 1천5백가지의 맥주가 있다는 말이 되는데 그 맛이 저마다 다르다. 그런데 그 맥주를 그도시에서느 거의 강제다시피 공급을 하고 있어 모든 음식점에서는 그 시에서 생산한 맥주를 팔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특정한 지역의 술은 그 지역에서 팔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생산된 물품을 소비해야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제논리일 것이다. 그것은 맥주뿐만이 아니다. 시 정부에서 생산되는 것은 다른 일 상품도 많다. 시정부가 아니라고 해도 시에도 관할하는 그 지역의 생산품은 우선적으로 판로가 보장되어 있다. 때문에 중국의 시장은 새로운 상품이 그판로를 뚫고 들어가기 매우 어려운 판매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소비할 인구가 많다는 주먹구구식계산으로 덤볐다가는 큰코 다치기 마련이다. 나는 청도 공항에 내려서 마중나온 (주)태일정밀 청도 공장 생산부장을 만났다. 그 공장에서 제공해 주는 승용차를 타고 영성으로 갔다. 영성으로 가는 길에 연태가 있고 위해시를 옆으로 질러 갔다. 영성에 도착했을때는 저녁이었다. 우리는 호텔에 여장을 풀고 태일정밀 영성 공장을 방문하여 총경리(대표) 박동명씨를 만나려고 했다. 차가 좀 연착되는 바람에 박사장은 영성시 부시장과 만나 음식점에서 접대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들은 같은 호텔 식당에 있었다. 공장 직원이 우리를 그곳으로 안내해서 식당에서 영성시 부시장과 박사장을 만났다. 나는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영성시 경제 구조와 한국기업체 진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영성에 간 것은 장보고 유적지를 보기 위해서였다. 한국에 있는 태일정밀은 컴퓨터와 전자 관계 부품을 만드는 전자 업체인데, 중소기업으로 출발해서 이제 여러 방계회사를 거느리며 대기업으로 부상하고 있는 업체로 알고 있다. 중국 현지에서 생산하는 물품은 주로 한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으로 수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는 현지에서 생산한 부품이 현지 전자 업체로 판매되어야 될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시기는 언제일까. 아마도 값싼 노동력의 원가절감이 소멸되기 시작하는 시기가 되면 그와 같은 자생력을 지녀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중국이란 곳에 공장을 건설하여 물건을 생산해야 되는 경제적 논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 원칙은 태일정밀 뿐만이 아니라 중국에 진출한 모든 기업체가 짊어진 풀어야 될 숙제이다. 중국에 인건비가 비싸지면 다시 더 값싼 곳을 찾아 공장을 옮겨야 하는가. 베트남이나 아프리카로 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값싼 노동력에 의한 경제성 원리는 점차 사라지고 있으며 철새처럼 날아가기에는 일단 투자한 돈이 무겁다. 아마도 중국이 땅을 오십년 빌려주었다면 기업들은 적어도 오십년동안은 버티면서 생산에 박차를 가할 생각을 해야할 것이다. 이번 중국 여행은 영성과 위해시를 보는 것으로 끝냈다. 위해시에서 골든 브릿지 배를 타고 밤새 서해를 건너 인천항에 도착했다. 거의 한달에 가까운 긴 여행이 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