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프랭클린 자서전]
폐허로 변한 그나덴헛 마을에서의 요새 건설
모리스 지사는 브래드독 장군의 패전 이전부터도 주의회에 끊임없이 교서를 보내 영주의 소유지를 과세 대상에서 제외하는 조항이 포함된 방위비 징수 법안을 만들라고 의원들을 닦달하고 이 조항이 없는 법안은 무조건 기각해왔다. 그러다 이제 장군의 패배로 상황이 다급해지자 주의회도 자기 요구에 따를 거라고 기대하고는 더 강하게 다그쳤다. 하지만 주의회는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고 믿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지사가 예산안을 마음대로 고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의회의 기본 권리를 포기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의회가 5만 파운드를 보조한다는 내용의 법안을 최종 제출하자 지사는 단어 하나만 고치자고 제안했다. 법안에는 ”모든 동산과 부동산은 과세 대상이며 영주의 동산과 부동산도 제외되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었다. 지사는 ”제외되지 않는다“라는 부분을 ”제외된다“로 고치자고 했다. 한 단어를 고치는 것이라 해도 그 차이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주의회는 지사의 교서에 대한 주의회의 모든 답변을 영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그대로 전하고 있었다. 이번 일에 대해서도 전해들은 영국에서는 지사에게 그렇게 비열하고 부당한 훈령을 내린 영주들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영주들이 자국의 방위를 방해한다면 오히려 재산을 잃을 위험에 처할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상황이 이러헥 되자 영주들도 겁을 먹고는 방위 목적으로 주의회가 내놓은 금액이 얼마가 되었든 거기에 자신들의 돈 5천 파운드를 더하라고 세입 징수관에게 지시했다.
이 결정을 통고받은 주의회는 영주들이 내야 하는 일반 세금을 대신해 그 돈을 받기로하고 영주들이 요구했던 면세 조항을 포함한 새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에 따라 나는 6만 파운드의 방위비를 처리하는 위원의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나는 이 법안을 만들고 통과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와 동시에 시민병을 조직하고 훈련시키기 위한 법안도 기초했다. 퀘이커 교도들은 자신의 의사에 따라 거부할 수 이;ㅆ도록 배려하는 조항이 포함된 덕에 법안은 쉽게 통과되었다. 나는 시민병을 조직하는 데 필요한 협회를 만들기 위해 시민병 문제와 관련해 제기될 수 있는 모든 반대 의견과 그에 대한 답변 글을 작성했다. 예상했던 대로 이 글은 큰 효과를 거두었다.
그 뒤 몇 개의 중대가 편성되어 시내와 시골에서 훈련을 받았다. 지사는 적군이 자주 출몰하는 북서쪽 국경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요새를 구축해 주민을 보호하는 일을 내게 맡아달라고 했다. 나는 스스로 적임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 일을 맡았다. 지사는 나에게 전권 위임장과 적임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장교로 임명할 수 있는 백지 위임장을 주었다. 사람들을 모으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얼마 안 되어 내 지휘하의 시민병이 560명에 이르렀다. 캐나다와의 전쟁에서 장교로 활약했던 아들이 부관이 되어 내게 큰 도움을 주었다. 인디언들은 모라비아 교도들이 살던 그나덴허서 마을을 불사르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나는 그곳이 요새를 구축하기에 좋은 조건이라고 판단했다.
그 마을까지 행군하기 위해 나는 모라비아 교도들의 주요 근거지인 베들레헴에 중대를 집합시켰다. 뜻밖에도 베들레헴은 꽤 훌륭한 방위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나덴헛 마을의 파괴로 불안해졌기 때문인 듯했다. 주요 건물들에 방책을 둘렀고, 뉴욕으로부터 무기와 군수물자들을 대량으로 사들였으며, 높은 석조 건물의 창문과 창문 사이에 조약돌을 쌓아놓아서 인디언들이 공격해오면 여자들이 그들의 머리 위로 돌을 던질 수 있도록 했다. 베들레헴에서도 여느 수비대 주둔지나 다름없이 무장한 남자들이 질서정연하게 교대로 보초를 섰다. 스판겐버그 주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이런 점이 놀라웠다는 얘기를 했다. 영국 의회의 법률에 의해 모라비아 교도들은 병역이 면제되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이 무기를 드는 것을 양심에 반하는 일로 생각하는 줄 알았다. 주교는 전쟁에 반대하는 것은 그들의 확정된 교리가 아니라 그 법안을 정할 당시의 교리였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들 자신도 놀랄 정도로 그 교리를 따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들이 스스로를 속이거나 영국 의회를 속이거나 둘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어쨌든 당면한 위험 앞에서는 상식이 변덕스러운 신념을 이기는 법이다.
우리가 요새 건설에 착수한 것은 1월 초였다. 나는 미니싱크 마을의 북쪽으로 부대 하나를 보내 요새를 건설하게 했고 마을의 남쪽으로도 부대 하나를 보내면서 같은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나는 나머지 부대를 이끌고 요새 건설이 가장 시긎ㅂ한 그나덴헛으로 떠나기로 했다. 모라비아 교도들은 연장과 식량, 짐 등을 실을 수 있도록 마차 다섯 대를 빌려주었다.
베들레헴을 떠나기 직전, 인디언들에게 쫓겨 농장을 버리고 도망쳤던 농민 열한 명이 나를 찾아와서는 농장에 돌아가서 소들을 데려와야겠다며 총을 좀 달라고 했다. 나는 각자에게 총 한 자루씩과 적당한 양의 탄약을 주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행군을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하루 종일 그칠 줄을 몰랐다. 비를 피할 만한 집을 찾을 수가 없어 계속 걸어가다가 날이 어둑해져서야 독일인의 집 하나를 겨우 발견했다. 우리는 비에 흠뻑 젖은 채로 그 집 헛간에서 다닥다닥 모여 앉아 밤을 보냈다. 행군 중에 공격을 당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우리가 갖고 있던 무기는 지극히 평범한 데다 비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인디언들은 전술이 아주 뛰어났지만 우리에게는 변변한 전술 하나 없었다. 그날 인디언들은 앞서 말한 열한 명의 농부들을 만나 그중 열 명을 죽였다. 살아남은 농부 한 명이 나중에 말하기를 총이 비에 젖어서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고 했다.
다음 날은 비가 그쳤다. 우리는 행군을 다시 시작해 드디어 황량한 그나덴헛에 도착했다. 근처에 있는 제재소 주위로 널빤지가 여러 장 쌓여 있었다. 우리는 그 널빤지로 서둘러 임시 막사를 지었다. 그 추운 날씨에 텐트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막사를 짓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마을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묻어놓고 가버린 시체들을 제대로 묻어주는 것이었다.
그 다음 날 아침에는 요새를 설계하고 위치를 정했다. 둘레가 455피트 정도 되었기 때문에 직경 1피트짜리 말뚝 455개를 이어서 울타리를 만들어야 햇다. 우리는 가져온 도끼 70 자루로 즉시 나무를 찍기 시작했다. 군인들이 도끼 사용에 아주 능숙해서 일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나무들이 순식간에 휙휙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두 사람이 소나무 한 그루를 베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한번 재보고 싶어졌다. 나무는 6분 만에 땅 위에 쓰러졌다. 직경을 재어보니 14인치였다. 소나무 한 그루로 끝이 뾰족한 18피트 길이의 말뚝 세 개를 만들 수 있었다. 한쪽에서 말뚝을 만드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참호를 3피트 깊이로 파서 말뚝 박을 자리를 만들었다. 마차들의 몸체를 떼어내고 마부석의 두 부분을 연결하는 핀을 뽑아 앞뒤 바퀴를 분리해서 이륜마차로 열 대를 만든 다음 말 두 마리씩을 붙여서 숲에서 요새까지 말뚝을 나르게 했다. 말뚝 박는 일이 끝나자 이번에는 목수들이 6피트 높이의 나무 발판을 만들어 말뚝 안쪽에 둘렀다. 군인들이 이 발판 위에 서서 작은 구멍을 통해 총을 발사하는 것이었다. 작업이 모두 끝나고 나서 회전식 대포를 한 모퉁이에 고정해놓고 한번 쏴보았다. 혹시 근처에 있을지도 모를 인디언들에게 우리가 그런 무기를 갖고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요새(그렇게 초라한 울타리에 요새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도 된다면)는 일주일만에 완성되었다. 그 일주일 동안에도 이틀에 한 번씩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일을 하지 못했다.
이 일을 하면서 나는 사람은 일을 할 때 가장 만족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하는 동안에는 모두들 친절하고 유쾌했으며 하루 일을 잘 끝냈다는 뿌듯한 마음 때문에 저녁 시간도 즐겁게 보냈다. 하지만 일을 못하는 날에는 사나워져서 툭하면 싸움질을 하고 고기나 빵 등을 들먹이며 트집을 잡는가 하면 하루 종일 심술을 부렸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부하들에게 끊임없이 일을 시키는 것을 신조로 삼는다는 어느 선장이 떠올랐다. 어느 날 항해사가 와서 일이 다 끝나 더 이상 시킬 일이 없다고 하자 선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닻을 깨끗이 닦으라고 하게.“
비록 보잘것없는 요새였지만 대포가 없는 인디언들을 막기에는 충분했다. 부대도 안전하게 배치되었고 필요할 때 퇴각할 수 있는 곳도 생겼으므로 이제는 소대를 편성해서 주변 탐색을 시작했다. 인디언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숨어서 우리의 동태를 감시한 흔적을 근처 언덕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곳에 인디언들이 사용한 발명품이 있었는데, 설명할 가치가 있는 듯하다. 그때는 겨울이어서 불이 필요했다. 하지만 땅 위에 그냥 불을 피우면 불빛 때문에 멀리서도 위치가 발각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직경 3피트, 깊이는 그보다 좀 더 되는 구덩이를 팠다. 또 숲속에 버려진 불에 탄 통나무 양쪽에는 손도끼로 찍어서 숯을 떼어낸 흔적이 있었다. 이 숯으로 구덩이 바닥에 불을 피웠을 것이다. 주위의 잡초와 풀이 눌려 있는 걸로 봐서 그들이 드러누워 구덩이 속에 다리를 집어넣고 발을 덥혔던 것 같다. 그런 식으로 불을 피우면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고 불길이 일어나거나 불꽃이 튀거나 연기가 나지도 않아 들킬 염려가 없었으므로 그들에게는 다시없이 좋은 방법이었다. 거기에 있던 인디언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 쪽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공격해봐야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우리 부대의 군목이었던 비티 씨는 아주 열성적인 장로교 목사였다. 그는 군인들이 예배와 설교 시간에 잘 참석하지 않는다며 내게 불평했다. 군인들은 급료와 식량 외에 매일 럼주 약 0.14리터씩을 지급받기로 하고 입대했다. 술은 시간을 정확히 맞추어 아침에 반, 저녁에 반이 지급되었다. 군인들은 술을 받을 때만큼은 제시간에 어김없이 나타났다. 그걸 보고 내가 비티 씨에게 말했다. ”럼주를 관리하는 것이 목사님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예배가 끝난 다음에 술을 나누어 주시면 틀림없이 다들 예배에 참석할 겁니다.“
비티 씨는 좋은 생각이라면서 럼주 배급을 맡기로 했다. 그는 예배가 끝난 뒤 두세 사람의 도움을 받아 군인들에게 정량의 럼주를 나눠주었다. 그 뒤로 군인들은 전원이 시간에 딱 맞춰 예배에 참석했다.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해서 군법으로 처벌하기보다는 이 방법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새 건설을 완성하고 식량도 넉넉하게 비축해놓았을 즈음 지사에게서 편지 한 통이 왔다. 주의회를 소집했으니 국경에서의 일이 어느 정도 끝나 더 이상 남아 있을 필요가 없으면 참석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주의회 친구들도 가능하면 의회에 꼭 나오라고 재촉하는 편지를 보냈다. 처음 계획했던 요새 세 개를 다 건설했고 주민들도 이제 안전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으므로 나는 그만 돌아가기로 했다. 마침 인디언과의 전쟁 경험이 있는 뉴잉글랜드의 클래펌 대령이 우리 요새에 들렀다가 지휘를 맡아주기로 한 덕에 떠날 결심을 좀 더 쉽게 할 수 있었다. 나는 수비대를 사열시키고 그들 앞에서 대령에게 임명장을 준 다음, 그가 군사 업무의 전문가이므로 나보다 훨씬 유능한 지휘관이 될 거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몇마디 당부의 말을 남긴 뒤 길을 떠났다.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베들레햄까지 가서는 며칠 쉬면서 그간의 피로를 풀었다. 좋은 침대에서 자려니까 첫날 밤에는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나덴헛의 임시 막사 바닥에서 담요 한두 장만 덮고 자던 버릇 때문에 새로운 환경이 영 어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