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무라 마쓰오 교수의 구명활동
김우종
2022년도 연세대의 용재(庸齋)학술상 수상자로 오신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교수를 개인적으로 만났다. 1974년 유신 정권 때 나와 이호철 등 문인 5명에 대한 구명 활동의 고마움에 대해서 편지를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반세기 전의 일에 대해서 지금에야 한마디 말을 전하는 것은 그분의 인격을 존중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신이 일평생 걸어오며 남긴 큰 업적에 대해서 한 번도 스스로 자랑한 일이 없고, 한마디 칭찬의 말이라도 기대하는 사람이 아닌 듯했기 때문이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 모르게 하는 삶을 살아 왔다면 나는 그가 내게 한 일을 끝까지 모른척해야 옳다. 그런데 이제 그나 나나 인생의 마지막 해가 저물고 있으니 그때 그 일에 대해서 감사의 편지를 전하려다가 가족들 몇이라도 있는 자리에서 공개하고 싶어졌다. 문예지 창작산맥에 오무라 마스오 이야기를 연재한 시인도 동석했다.
나는 1974년 정월에 경희대에서 계절학기 강의를 하던 도중에 검은 지프차를 타고 교내에 들어 온 시커먼 그림자들에게 체포되어 이태원의 보안사 사령부에 연행되고 거의 한달 동안 고문 취조를 받고 검찰로 넘겨지며 서대문 창살 속에 갇혔다. 그리고 며칠 후 교도관이 식구통으로 신문 조각을 들이밀어서 죄명을 알았다.
‘문인간첩단 검거’라는 큰 기사였다. 북괴 공작원과 접선하며 공작금을 받고 대학생들을 선동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대학생 선동은 유신정권 타도를 외치던 대학생들의 배후에 나 같은 빨갱이 교수가 있다는 뜻이었다. 5명 중에서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많이 알려진 대학 정교수는 나 뿐이었다.
검찰로 넘겨지고 며칠 지난 후 나는 비로소 변호사도 만나고 일본에서 구명운동을 위한 연판장이 내 집으로 전달된 것을 알았다. 오무라 교수와 함께 오에 겐자부로 등 세계적으로 알려진 유명 작가와 교수들이 도장 찍은 연판장이다. 이것은 함께 투옥된 동료들은 못 봤을 것이다.
구명운동의 연판장 작성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유명인사 하나하나를 약속해서 만나고 설득하며 도장 받는 일은 대단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또 하나는 출옥 후에야 본 것이지만 런던에 본부를 둔 국제 인권단체인 앰네스티가 일본지부에 말하고 발행한 팜플렛 ‘가교(架橋)’다.
표지에는 ‘이호철 김우종 등 5인을 구하자’라고 되어 있었다. 런던 본부가 일본으로부터 김우종 구명운동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5명 구명에 나섰다는 것과 함께 5명 가족에 대한 인터뷰 기사가 있었고 내 에세이 한편이 실려 있었다. 또 국제 앰네스티가 만든 포스터도 있었다. 온 세계에서 투옥된 양심수들의 이름이 적힌 것이었다.
일본에서 이렇게 세계적인 여론을 환기시키며 구명운동에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나설 사람은 오무라 교수밖에 없다고 판단되었다. 이호철 등 다른 문인들도 있는데 런던본부가 먼저 김우종의 구명운동 요청을 받았다면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섰던 것이 분명하고 그런 사람은 오무라 교수였기 때문이다. 내 한국소설사를 번역 중이던 쵸쇼기치(長璋吉)대학강사도 있엇지만 우선 나설 사람은 오무라 교수였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한국 문인 5명은 오무라 교수로부터 매우 큰 은혜를 입은 셈이다. 우리가 투옥중일 때 우리처럼 같은 빨갱이로 날조되고 투옥된 2차 인혁당 사건에서는 8명이 대법원판결 즉시 그날로 처형되었다. 내가 철창문에 매달려서 사형장으로 들어가고 리어카에 실려서 시신이 되어 나오던 사람들을 본 일이 있는데 그렇게 8명이 처형되었다면 우리 5명도 그렇게 될 수 있었다. 좌익의 반정부 조직보다 북한의 공작금을 받고 있는 문인들의 간첩행위가 더 무거운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이라면 우리는 그들보다 먼저 처형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말 많은 문인들의 입을 꿰맴으로써 얻는 효과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검사의
말대로라면 나는 참여문학을 하다가 걸렸다는데 그만큼 문인의 입을 막아버리는 것이 필요했다면 우리 5명은 인혁당 보다 서둘러 죽이고 싶은 장애물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살고 그들은 그날로 처형되었다. 시신까지 탈취해서 화장해 버렸다. 국제 여론으로 유명해진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과의 차이로 생사가 그렇게 갈렸던 것이다.
이승만은 4.19민주화운동 때 186명의 어린 학생들을 죽이고, 전두환은 5.18 광주학살 때 218명을 죽이며 행방불명 자만도 363명이요 그보다 먼저 더 참혹한 제주도가 있었고, 대전 산내동에서는 민간인들을 학살해서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 만들어졌다. 그러니 간첩 5명을 죽인다는 것은 주저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오무라 교수가 나와 함께 5명의 문인들 구명을 온 세계에 알린 것은 참으로 큰 은공이다. 또 이것은 우리 몇 사람과의 개인적인 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무라 교수와 우리는 침략국과 식민지의 악연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악연으로 인한 앙금을 눈처럼 녹일 최선의 길이 된다.
그의 윤동주 연구도 그렇다. 논문과 저서에 나타난 그의 업적은 학술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일본에서 많은 사람이 윤동주를 사랑하게 만들었으며, 윤동주 사랑은 그들의 시비에 적힌 것처럼 양국간의 과거사에 대한 ‘기억과 화해’이기 때문에 우리 또는 아시아와 전 인류를 위한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가 된다.
나는 이런 말을 간추리고 편지글로써 은공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며 그 자리에서 읽었다. 그는 이 편지를 읽어주는 동안 손수건으로 자꾸 눈물을 닦더니 새로운 사실을 고백했다.
앰네스티의 구명운동에 자기 돈을 쓴 사실을 고백했다. 그는 그 사건이 있기 전에 내가 경희대 교수일 때 내 집에 와서 우리 문학사 강의를 매주 한 번씩 듣고 일본으로 돌아간 일이 있다. 그래서 내게 주려던 수업료를 일본 앰네스티에 내고 팜플릿 제작 등에 썼다는 것이다. 당연히 내게 줄 빚을 그렇게 갚았다는 것인데 그는 내게 줘야 할 아무 빚도 없었고 내가 오히려 빚을 지고 있었다.
그는 자꾸 흐르는 눈물 때문에 손수건을 떼지 못했다. 그의 따뜻한 가슴이 그렇게 눈물샘을 터뜨리고 있었나보다.
그는 인문학을 과학적인 객관적 사실의 탐구로 써나가며 개인적 감정 노출이 전연 없었는데 선택한 텍스트들을 보면 그는 아픈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모습이 떠오른다. 가혹한 역사적 시련 속에서 양심적인 활동 때문에 큰 상처를 입고 잊혀지거나 죽거나 아직도 어려움을 겪는 인물에 대한연구였다. 그가 찾아다니며 사진으로 남긴 문학 앨범이 『오무라 마스오 저작집』 제6권인데 윤동주 김용제 김학철 임종국 외에 남정현 임헌영도 있고 내 것들도 있다. 50여년 전에 부인과 함께 도봉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옛날이 몹시 그리워진다. 그의 학문은 과학적 분석의 냉철한 서술 형태지만 분명히 뜨거운 분노와 정의감과 사랑이 가슴 속에서 작동하고 있었던 사람이다.
나는 그에게 편지를 읽어주고 작은 선물을 전했다. 며느리는 꽃을 드리고 오무라 이야기를 연재한 시인은 책을 전해 드린 후 그의 여윈 손을 붙들고 몇 차례나 간곡히 건강을 빌고 헤어졌다.
2022년 11월 22일 상도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