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의 조건
장석원
시의 정치 ≪學之光≫ 14호에 실린 전영택의 글 「宗敎 改革의 根本 精神」을 읽는다. 조선의 가는 곳마다 죄악이 창궐한다. 민족을 지도하고 계몽할 교회의 청년들은 타락에 빠져 있다. 사회의 정신은 자꾸 썩어간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 먼저 자기 반성이 필요하다. 루터의 종교 개혁에서 자기 반성의 기반이 되는 정신 혁명을 공부해야 한다. 전영택은 외국의 현실과 조선의 현실을 비교한다. 자기 반성 → 정신의 개혁 → 배움. 그는 이러한 양식을 개화와 계몽의 모델로 삼는다. 반성해야 한다. 정신이 먼저 혁명되어야 한다. 혁명하기 위해서는 선진 외국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역사를, 역사 속의 문학을, 문학사를 어쩌면 죽은 텍스트로 여기는지 모른다. 우리가 그들과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옳다, 그르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지나간 대한민국의 20세기. 근대라는 정체와 근대 모국어의 성립 과정에서 모순들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해답없는 혼돈 속에서도 모든 문제를 정직하게 맞서서 해결하고자 했던 할아버지 세대, 그들이 지녔던 정신의 熱度에 막연한 그리움과 부러움마저 느끼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여기’의 우리는 우리를 투쟁하게 만들었던 적의 존재마저 상실했기 때문에, 현실이 우리를 압도하고 있기 때문에 이유조차 파악할 수 없는 무력감과 불편함과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사회, 민족, 국가가 잘 되려면 그 구성원인 개인이 먼저 잘 되어야 한다는 이상한 이데올로기. 시대가 개인을, 집단이 개인을 상처내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으로 여겨졌던 1980년대. 사명과 목표를 위해서 집단이 개인을 억압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개인의 행복과 욕망을 말한다는 것은 반동으로 매도되었고, 용기를 내서 ‘나’를 표현하면 정신병자라는 따돌림이 대가로 주어졌던 그때를, 집단의 파시즘과 동지의 폭력이 개인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흔을 남겼던 그때를 스무살의 빛나는 청색시대라고 여길 수 있을까? 1910년대가 오히려 순수하지 않은가? 1910년대의 조상들은 정치와 역사와 문학의 분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 개인과 집단의 차이를 인식했을까. 그 당시의 시는 현실과 역사를 어떻게 포섭했는가. 시인은 현실과 역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새로운 시는 1980년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1980년대를 지우지도 않는다. 혁명을 소리 높여 외치지 않는다. 시는 정치에 개입하고 역사를 건축한다. 21세기의 새로운 개인들의 시는 역사와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과연 역사와 현실이 실재하기는 할까. 긍정이든 부정이든, 개입하든 하지 않든, 또는 못하든 우리 모두는 정치의 다른 이름을 문학에 기재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역사, 현실, 정치가 아니다. 시의 역사, 시의 현실, 시의 정치가 중요하다. 새로운 시는 줄이나 빽을 모른다. 새로운 시는 지역이나 붕당을 배척한다. 시의 정치는 권력과의 투쟁을 의미한다. 새로운 시는 멈춤을 모른다.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 나를 부정하고 기존의 모든 정해진 것을 부정해야 한다. 헤겔이 말했다. “정신이란 어떠한 경우에도 否定의 정신이다.”
기계의 리듬 나는 지금 의미의 휘발을 지켜본다. 어떤 노래들, Kraftwerk, Prodigy, In Flames. 이 소리 덩어리 텍스트는 가사의 의미 파악을 지연시킨다. 김소월의 리듬은 여전히 유효하고, 백석의 시는 지금도 잘 읽힌다. 리듬은 항구성을 지닌다. 리듬은 감옥이다. 이 두 대립 사이에서, 김소월과 백석과 김수영의 차이를 바라본다. 그들은 모두 리듬을 신봉했고, 리듬을 시의 전면에 배치했다. 그들의 영토는 지금도 굳건하다. 리듬에 쩔어 있는 자아는 침묵과 관조를 모른다. 리듬은 결국 아무것도 없음에 다다를 때 새롭게 창조되지 않을까. 한국어의 리듬을 완성한 두 시인 김소월과 백석. 시에 산문을 도입하여 전대의 리듬을 폭파하고 새로운 리듬 기계를 완성한 김수영. 반복으로 조직되는 한국어 리듬의 복잡한 양상. 젊은이들의 시에 음악성이 없다는 말, 산문화가 진행되면서 음악이 사라지고 서정이 파괴되었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이기도 하고 완강한 사실이기도 하다. 당신은 ‘산문적’이라는 말과 ‘음악적’이라는 말을 개념화시킬 수 있는가. 문장을 적당히 끊어놓는다고 리듬이 생기는가. 리듬 때문에 파괴되는 의미. 의미 때문에 교란되는 리듬. 몸의 리듬이 있고, 사유의 리듬이 있다. 백석과 김소월을 읽을 때 움직이는 몸의 감각. 김수영이 주는 사유의 운동 리듬. 트롯과 테크노의 차이. 경공업과 중공업, 증기기관과 디젤 엔진, 수동 기계와 영구동력기관의 차이. 그리고 침묵의 리듬 전대의 리듬이 아니라 새로운 리듬이 필요하다. 그것의 실체는 오늘의 현대시가 제시할 것이다. 새로운 리듬은 결국 이전의 리듬을 파괴할 것이다.
이미지의 죽음 봄날은 흘러가는데… 그대의 볼우물에 고인 햇빛, 이별의 규칙이 작동되는 종점. 가로등도 졸고 있는 비 오는 골목길에 서서, 사랑의 기로에 서서 슬퍼할 때, 이 수 저 수 다 따져봐도 사랑뿐, 우리는 모든 연인처럼 전봇대 앞에서 헤어지며 녹아내리네. 다섯 걸음 뒤에서 뒤늦은 진달래 그대의 그림자를 따라가네. 이미지는 피어나는데… 버스는 횡단보도에서 급정차한다. 기사는 졸다가 꼬라박힌 승객에게 죄송하다고 한다. 그대와 나의 사랑은 브레이크 다운. 추억의 틈새마다 피어오르는 도봉의 순정, 도봉에서 만난 애정, 도봉에서 잃었기 때문에, 달래 달래 진달래 질 때, 쓸쓸함이 날 가볍게 할 때, 사랑을 잃고 다만 진달래에게 罪送할 뿐인 이 면목 없음. 미아리 고개에서… 그대는 주문을 외우고 둔갑한 여우가 되어 님이 넘던 이별 고개 총알이 빗발치던 전쟁터의 밤 혈혈단신 지나왔지만 별이 총총해서 도시락 속 고구마만 뭉개졌네. 만수산 드렁칡처럼 세월 얽히는데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할까. 니기미 먼 먼 바다 외로운 섬 하나 환상의 섬에서 맨발로 절며 절며 훌라춤을 추자구요. 그대의 반반한 얼굴 잊기 위해. 오늘도 미아리 고개에서… 허벅지 간지르던 그대의 손톱이 떠올라서 미아리 고개에서 넘어질 때, 바람에 훌렁, 그대는 마릴린. 나는 울렁대는 가슴 안고 아름다운 그대 품에 정박하고 싶었는데, 그만 고구마 으깨지고. 사랑의 악몽 한 폭에는 백발미녀, 그대는 hell night lady. 봄빛… 햇빛 속에서 타오르는 얼굴 숨결 노래 피내음 현기증. 정지, 모든 것의 정지. 얼굴이 햇빛을 빨아들이는 검은 구멍으로 갑자기 변해버렸다. 잘려나간 꽃송이, 머리 없는 희망. 목구멍 속으로 밀려든 정오의 햇빛이 서러워 고장난 경운기처럼 울다가 백색 햇빛 위에 내가 기록되는 오후. 서서히 스며들어 지워지는, 죽어가는, 봄, 봄. 시선과 시선이 엇갈린다. 나를 횡단하는 선분들, 햇빛. 백색 거리에 구멍 두 개가… 그대의 눈앞에서 x축 y축 교차된다. 수직 수평 교통한다. 영이 철이 크로스. 나는 꿰뚫린 후에 나타날 것이다. 어둠의 덩어리에 손을 넣어 날 꺼낼듯이, 팔딱거리는 심장을 빼낼듯이, 어둠 속에서 날 애무하는 그대의 시선. 다시 미아리 고개에서… 귀신도 주저앉아 간식 먹는다는 미아리 고개에서 그대를 잃었을 때, 엉덩이 같은 달덩이 고개 넘는다. 바이 바이 달링 다이 다이 그대여. 3초 후에 수류탄이 터진다… 자폭용 수류탄을 들었다. 시는 아무것도 아니다. 시 쓰라고 시킨 사람 없다. 시는 무력하다. 시를 쓰는 나 역시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nothingman’이고, 나의 시는 ‘nothingness’이다. 세열 수류탄에 나와 나의 시는 갈갈이 찢어진다. 3초 후에
Text Layer / 나뭇잎 텍스트 성기완이 작가를 디스크 쟈키라고 명명하면서 도입한 이 말. 롤랑 바르뜨가 ꡔ사랑의 단상ꡕ을 쓰면서 뒤섞어버린 텍스트. 2000년대의 젊은 시인들에게는 새로울 것도 없는 개념. 고려시대의 ‘新意’와 ‘用事’라는 두 개념. 무엇을 쓸 것인가. 어떻게 쓸 것인가. 펼쳐지는 환유의 그물들? 텍스트를 이어붙인 누더기? 시인은 수많은 텍스트를 독자들이 잘 흡수하게끔 정리하는 자, 좋은 텍스트 소개하는 자.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 쇼’의 초대손님. 새로운 의미? 창조? 무한 반복되는 시, 복사되는 시, 찍어내는 ‘서정’시. 그 텍스트들을 찢어 바닥에 깔아 놓는다. 한 시간 동안 나를 지나간 텍스트들.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 사랑의 이야기 담뿍 담은 편지 / Fear Factory, 「Cyberwaste」 / ꡔ노동자―강철과, 눈물의 빛ꡕ, 사회사진연구소 사진, 김정환 글, 동광출판사, 1989. 15,000원. 이 책에 실린 문구들. 강철과 합류한 인간, ‘노동자’ 새로운 인격의 씨앗, 니기미 씨팔 빼앗긴 것이 너무 많다! /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 계몽의 변증법 / Xports 박찬호 선발 중계 / 그리고 종훈이가 보낸 휴대폰 문자 메시지, “예 확인했습니다.” “강철과 합류한 인간”은 시적인가? 다른 텍스트를 산문에 갖다 놓은 나는 text layer?
잠들라 그대여 햇볕 장글장글한 툇마루에 걸터앉아서* 이렇게 바람이 부는 날, 그대와 내가 만든 無花果 익어가는 날 둘이서 무화과 그늘에 숨어 앉아** 얼키고 설켜 비릿해지던 날 그대 저작하던 입술의 주름에 햇볕 한 줄기 그대는 툇마루에서 졸고 있는데 단단하고 고요하게 몽유할 뿐인데 이런 환부에 박힌 확신이 나는 부끄럽다 꽃도 못 피웠는데… 그대와 나 탕기 속에 떠 있는 꽃잎 꽃잎 (*백석, 「咸州詩抄」 / **김지애, 「몰래 한 사랑」)
시는 많으나 좋은 시는 드물다. 다음 텍스트는 시인가? 시가 부끄럽다.
돈이 없는 환자의 치료를 거부하는 의사,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으려는 교사, 집 없이 떠도는 사람들을 거부하는 목사―이들은 모두 자본주의의 경비병들이다. 자본주의는 결핍과 실업과 원하지 않는 노동을 존속시키는 생산 양식이다. 그러나 아무리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더라도 자본주의는 자본의 창고에 저장할 수 없는 욕망의 낯선 흐름을 고갈시키지 못한다. 욕망은 결코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 욕망은 원하는 것을 원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철벽에 틈을 낸다. (김인환, ꡔ다른 미래를 위하여ꡕ)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치욕이 그대를 건강하게 할 것이다. 개종하라.
실제로 신세계에 들어가려면 새로운 사고 내용을 받아들여야 할 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사고 구조를 바꾸어야 할 경우도 있는 것이다. 실재와의 모든 대결에서 객관적인 측면과 주관적인 측면을 구별하는 것, 즉 이 두 측면 사이에 어떤 절단면을 설정해야 한다. (베르너 칼 하이젠베르크, ꡔ부분과 전체ꡕ)
나에게 반짝이는 나뭇잎, 셀 수 없는 텍스트 있네. 나는 뿌리. 나에게서 싹 터 成長한 줄기 끝에는 곧 떨어질 나뭇잎. 텍스트. 한 가지의 두 인연. 나였지만 내가 버린, 내가 만들었지만 내 것이 아닌, 뿌리가 빨아들이는 다른 텍스트. 한 몸이지만 전체가 아닌, 전체는 아니지만 결코 파편이 될 수 없는, 나뭇잎, 텍스트. 나는 텍스트 레이어? 나는 텍스트 트리……
언어 텍스트 레이어, 이미지, 리듬, 시의 정치 그리고 새로움. 가진 것은 언어뿐이다. 시인은 가수가 아니고, 화가도 아니다. 율리 김이 바르드를 연주할 때 나는 시종일관 부러워서 죽는 줄 알았다. 그는 즐거운 광대였다. 나는 우울한 텍스트 레이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서글프다. 내게는 기타가 없다. 푸생이 “회화는 정녕 물체를 제시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비물체적 사물의 영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언어로 이루어지는 시는? 시가 표현한 대상은 언어에 의해 무엇이 되는가. 사실을, 대상을, 사물을 결코 재현할 수 없는 언어로 제작하는 시. 시는 무엇을 재현할 수 있는가. 시는 무엇으로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가. 이 모든 불가능 앞에서 여전히 시를 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비물체적 사물의 영상’ 너머로 가기 위해 세잔느는 자연에서 영속하는 어떤 것을 발견하려고 애썼다. 시는 회화가 아니다. 언어는 영상이 아니고 사물이 아니다. 또한 소리의 파동도 아니다. 시의 언어는 영속할 수 없다. 무엇이 시에 항구성을 부여하는가. 내가 생각하는 것은 새로움이다. 새로운 이미지와 새로운 리듬이다. 새로움은 전통, 역사,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새로움은 관습과 죽은 언어와 모든 권력을 부정한다. 새로워질 수 있다면 텍스트 쟈키가 될 수도 있다. 새로 태어난 시와 시인은 새로운 시의 정치로 역사와 현실에 개입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말을 하는 나도, 듣는 당신도 벌써 낡아버렸다는 느낌의 이유는?
장석원 2002년 대한매일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ꡔ아나키스트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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