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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54> 화폐 이야기 (33) 한국의 돈 100원 주화 ㉖ /
패했으나 빛나는 전투, 황석산성전투와 일본의 한국역사 왜곡
이전 글 옹달샘 <53> ‘남원성전투’에 이어, ‘패했으나 빛나는 전투, 황석산성전투와 일본의 한국역사 왜곡’을 이야기한다.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1598) 초기인 1597년 8월 중순에 3개의 본격적인 육전(陸戰)이 벌어졌다. ① 고령전투(高靈戰鬪, 1597년 8월 15-16일 : 옹달샘 <52> 참조), ② 남원성전투(南原城戰鬪, 1597년 8월 13-15일 : 옹달샘 <53> 참조), ③ 황석산성전투(黃石山城戰鬪, 1597년 8월 14-16일)가 그것이다.
만일 어떤 가문의 조상 중 한 사람이 나라를 위한 전투에서 큰 전공(戰功)을 세우고 장렬하게 죽었다고 치자. 그런데 그 조상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치욕스럽게 죽은 것으로 그 후손들이 알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가 누군가의 악한 의도에 의해 왜곡된 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해답은 명백하다. 개인이든 국가든 간에 그 왜곡된 기록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렇게 잘못된 사실(史實), 즉 잘못 기록된 역사(歷史)의 사실(事實)을 ‘왜곡(歪曲)된 역사(歷史)’라고 한다. 외적(外敵)의 침략을 받거나 식민 지배를 받은 나라일수록 왜곡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타국 또는 적국에 의해 왜곡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의 국민은 불행하다. 왜냐하면 왜곡된, 그것도 남에 의하여 왜곡된 조상의 역사를 대 이어 달달 외우며 살고 있으니까….
임진왜란 시리즈를 쓰면서 왜곡된 역사 부분을 만났을 때 마음이 곤혹스럽고, 글쓰기가 힘든 것을 경험한다. ‘정기룡 장군 이야기’(옹달샘 <37>)가 그랬었다. ‘정기룡’에 대한 역사 왜곡은 우리나라에 의한 누락, 축소의 형태였다. 또 이번에 쓰고 있는 ‘황석산성전투(黃石山城戰鬪, 1597년 8월 14-16일)’에서도 왜곡된 역사를 볼 수 있다. ‘황석산성전투’에 대한 역사 왜곡은 일본에 의한 바꿔치기 형태이다. 왜곡된 역사 때문에 ‘정기룡 장군 이야기’를 힘들게 썼던 것처럼 ‘황석산성전투 이야기’도 힘들게 쓸 것 같다.
해발 1,190m의 ‘황석산(黃石山)’은 소백산맥의 남덕유산 남녘에 있는, 높이가 서로 비슷한 네 개의 산(기백산, 금원산, 거망산, 황석산) 중 가장 남쪽에 있는 산으로서 산림청이 지정한 ‘대한민국 100대 명산’ 중의 하나이다. 정상의 바위들이 누런빛을 띠고 있다고 해서 ‘황석산(黃石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황석산은 함양군(咸陽君) 안의면(安義面 : 동쪽)과 서하면(西下面 : 서쪽)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오늘날의 ‘안의면(安義面)’은 임진왜란 당시 ‘안음현(安陰縣)’이었다.
▲산림청 지정 대한민국 100대 명산 중 하나인 함양 황석산(黃石山)과 황석산성(黃石山城)
이전 글(옹달샘 <53>)에 언급했듯이, 우리나라는 산지(山地)가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평성(平城)보다 산성(山城)이 압도적으로 많다. 평성에 비해 산성은 험준한 산세의 이점을 안고 있는 덕분에 적은 병력으로도 외적을 막아내기가 용이하다. ‘철옹성(鐵甕城)’이라는 말이 있다. ‘쇠 철, 독 옹, 성 성’이다. ‘쇠로 만든 독 모양의 성’이라는 뜻이다.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천연요새(天然要塞)’라는 말도 있다. 철옹성은 평성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산성에서 많다.
오늘날 중국이 광활한 국토를 가지고 있는 것은 수많은 전쟁을 통하여 이웃나라를 복속(服屬)한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못한 나라들 가운데 베트남과 대한민국이 있다. 중국이 베트남과 대한민국을 복속하지 못한 원인 중의 하나가 기후(氣候)와 지형(地形)이다. 베트남은 울창한 수목, 잦은 비와 높은 습도의 무더운 날씨, 독충이 있는 밀림(密林) 때문이었고, 대한민국은 험준한 산세와 철옹성 또는 천연요새 때문이었다.
산성(山城)은 크게 ① 테뫼식 산성, ② 포곡식 산성, ③ 복합식 산성으로 나눈다.
① 테뫼식 산성 : 한자로는 ‘산정식(山頂式) 산성’이라고 하는데, ‘테뫼식 산성’이 산성의 형태를 더 잘 표현하고 있는 용어이다. ‘테뫼식 산성’은 ‘산봉우리, 즉 산 정상에 성루(城樓)를 세우고, 성루를 중심으로 해서 그 둘레에 성벽을 쌓은 산성’이다. ‘테뫼’라는 말은 순수우리말이다. ‘뫼’는 ‘산’을 뜻하고, ‘테’는 ‘그릇 따위의 몸을 둘러맨 줄’을 의미한다. ‘테뫼’, 참 멋진 말이다. 테뫼식 산성은 적은 숫자의 병력으로써 수성(守城)할 수 있고, 좀처럼 함락되지 않는 장점을 가지고 있어서 철옹성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주로 방어 전략에 적합한 산성으로서 장기전이 되면 포위, 고립된 양상이 되어 옥쇄(玉碎)할 위험이 있다. 우리나라는 초기에 테뫼식 산성을 쌓았으나, 후기로 갈수록 채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에는 테뫼식 산성이 많다. 유럽에서는 성벽을 쌓지 않고, 성루에 포함하는 형태의 산성이 많다.
② 포곡식 산성 : ‘포곡(包谷)’이란 ‘골짜기를 포함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란 ‘골짜기를 포함한 산성’을 말한다. 포곡식 산성은 테뫼식 산성보다 더 넓은 면적을 갖는다. 물은 물론이고 곡식 재배도 가능하다. 그러나 더 많은 병력을 필요로 한다. 우리나라에는 포곡식 산성이 많다. 황석산성(黃石山城)도 포곡식 산성이었다.
③ 복합식 산성 : 복합식(複合式) 산성은 테뫼식 산성과 포곡식 산성을 합한 형태의 산성이다. 더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 대체로 도읍(都邑, 수도)에서 볼 수 있다.
황석산성에서 서쪽으로 나아가면 ‘육십령’이 있다. 경남 함양군(咸陽君) 서상면(西上面)과 전북 장수군(長水郡) 장계면(長溪面)의 경계에 있는 해발 734m의 고개이다. 옛날부터 이 고개에는 산적(山賊)이 많이 출몰해서 행인의 숫자가 60명 이상이 되지 않으면 고개를 넘지 않았다고 해서 ‘육십령(六十嶺)’이라고 했다. 이 고개를 넘으면 전라도 땅(장수군)이다. 그래서 정유재란에서 남원성전투(南原城戰鬪, 1597년 8월 13-15일)와 황석산성전투(黃石山城戰鬪, 1597년 8월 14-16일)는 매우 중요했던 것이다.
황석산성전투 하면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원성전투와 함께 비참하게 패배한 전투, 즉 참패(慘敗)한 전투로 알고 있다. 이 글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쓰려고 한다. 먼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참패한 황석산성전투’를 기술하고, 그 다음, ‘패했으나 자랑스럽고 빛나는 황석산성전투’를 서술하고자 한다.
황석산성전투(黃石山城戰鬪, 1597년 8월 14-16일)를 이야기하기 위하여 이전 글(옹달샘 <52>와 <53>)에 게재했던 ‘정유재란 초기의 왜군 침공 상황도’를 다시 한 번 게재한다.
▲정유재란(1597-1598) 초기(1597년 8월 13일) 왜군 침공 상황도
A. 참패한 황석산성전투
이는 이미 우리에게 알려진 임진왜란사에서 말하는 황석산성전투로서, 관련 서적, 전투 유적지 안내판, 비문 등에서 볼 수 있는 내용이다.
(1) 일본 육군 우군(右軍) : 총 75,300명
① 총사령관 제8군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모리수원), 1579-1650} 30,000명
② 선봉장 제2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등청정), 1562-1611} 10,000명
③ 장수 제3군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흑전장정), 1568-1623} 10,000명
④ 장수 제4군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과도직무), 1536-1618}‧나베시마 가츠시게{鍋島勝茂(과도승무), 1538-1618 :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동생} 12,000명
⑤ 장수 제6군 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장종아부원친), 1539-1599} 13,300명
(2) 황석산성전투에 참전한 일본 육군 우군(右軍) 병력 : 총 27,000명
위 우군 총 병력 중에서 제2군 가토 기요마사의 10,000명, 제3군 구로다 나가마사의 5,000명, 제4군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12,000명, 합계 27,000명이라는 것이다.
▲황암사 중건기념비(2001년)
황암사(黃巖祠)는 1714년(숙종 40년) 황석산성전투에서 순국한 선열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지은 사당(祠堂)으로서, 황석산 아래, 즉 경남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에 있다. 2001년 황암사를 중건했다. 이 기념비에는 황석산성전투에 참전한 왜군 병력을 27,000명으로 명시하고 있고, 그때 순국한 조선군과 민간인의 수(위패의 수)를 3,50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서적, 전투 유적지 안내판, 비문 등 여러 곳에서 동일하다. 과연 그러한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대로라면 총사령관 제8군 모리 히데모토의 30,000명과 제6군 조소카베 모토치카의 13,300명은 황석산성전투에는 참전하지 않았다는 셈이다. 또 제4군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12,000명이 황석산성전투에 참전했다면, 이전 글(옹달샘 <52>)에서 쓴 ‘고령전투’에서 정기룡 장군에 의해 전멸된 제4군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12,000명은 사실이 아니거나 다른 부대라는 의문점이 생긴다. 하여튼 임진왜란사는 의문투성이이다.
(3) 황석산성전투에 참전한 조선군 병력 : 3,500명{군사 수백 명+민간인(남녀노소) 수천 명}
조선군 장수는 성주(城主) 안음현감(安陰縣監) 곽준(郭䞭, 1550-1597), 전 함양군수(咸陽郡守) 조종도(趙宗道, 1537-1597), 김해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 ?-?)이었다.
(4) 전투 기간
황석산성전투(黃石山城戰鬪)는 1597년 8월 14-16일에 벌어진 전투라고 하나, 본격적인 전투는 1597년 8월 16일 하루 만에 끝났다고 한다.
(5) 전투 내용
황석산성전투 추정도는 아래와 같다.
▲황석산성전투(1597년 8월 16일) 추정도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의 황석산성 사수(死守) 명령을 받은 48세의 안음현감{安陰縣監 : 안음은 오늘날의 안의(安義)} 곽준(郭䞭, 1550-1597 : 현풍 곽씨)은 황석산성 주변의 주민들을 성 안으로 불러들이고, 소수의 병력이지만, 전투를 준비했다. 그 소식을 들은 61세의 전 함양군수(咸陽郡守) 조종도(趙宗道, 1537-1597 : 함안 조씨)도 가족을 데리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조종도는 당시 함양군수를 은퇴했기 때문에 굳이 성 안에 들어가야 할 의무가 없었다. 조종도는 생육신(生六臣) 중의 한 명인 어계(漁溪) 조려(趙旅, 1420-1489)의 5세손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피란할 것을 권유하자, 조종도는 “나는 나라의 녹을 먹은 사람이니, 도망하는 무리와 초야에서 함께 죽을 수는 없다. 죽을 때는 분명하게 죽어야 한다”라며 성으로 들어갔다. 또 김해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 ?-? : 해미 백씨)도 달려왔다. 당시 현 함양군수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조선의 지방관제는 ‘도(道) - 부(府) - 목(牧) - 군(郡) - 현(縣) - 면(面) - 리(里)’로 내려갔다. 그 수장(首長)은 도(道)에는 관찰사(觀察使, 종2품), 부(府)에는 4-5개의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정3품), 그 외 도호부사(都護府使, 종3품), 목(牧)에는 목사(牧使, 정3품), 군(郡)에는 군수(郡守, 종4품), 현(縣)에는 현령(縣令, 종5품)과 현감(縣監, 종6품), 면(面)에는 면장(面長, 정6품), 리(里)에는 이정(里正, ?)이었다. 이 세 장수의 품계를 보면 김해부사(종3품) 백사림이 가장 높고, 전 함양군수(종4품) 조종도, 안음현감(종6품) 곽준의 순이었다. 나이로는 조종도, 백사림, 곽준의 순이었다. 그러나 성의 책임자는 성주(城主)인 안음현감 곽준이었다.
1597년 8월 16일 왜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정문인 남문(南門)은 성주 곽준이 지켰다. 가토 기요마사의 제2군이 남문을 공격했다. 삽시간에 남문이 뚫렸다. 안음현감 곽준(郭䞭, 1550-1597)과 곽준의 두 아들 곽이상(郭履常, ?-1597)과 곽이후(郭履厚, ?-1597)가 전사했고, 그의 사위 유문호(柳文虎, ?-1597)도 장인을 구하려다가 전사했다. 곽준의 두 며느리와 딸은 성 아래로 몸을 던져 자결했다. 그곳에 있는 붉은 바위를 ‘피바위’라고 부른다. 전 함양군수 조종도(趙宗道, 1537-1597)도 싸우다가 역부족으로 막내아들 조영혼(趙英混, ?-1597)과 함께 전사했다. 조종도의 부인도 자결했다. 그의 장남은 요절했고, 차남 조영호(趙英濩, ?-?)는 그 전투에서 포로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훗날 돌아왔다.
동북문을 지키던 김해부사 백사림(白士霖, ?-?)은 남문이 뚫리자, 성내의 여러 곳에 불을 지르고, 밧줄을 매달아 내려 가족을 먼저 도망시키고, 자신도 도망쳤다. 왜군의 무자비한 살육으로 조선군과 민간인들은 모두 살해되었다.
정유재란 때의 왜군은 임진왜란 때보다 더 포악했다고 한다. 일본 교토{京都(경도)} 히가시야마구{東山區(동산구)}에는 ‘귀무덤’, 즉 미미즈카{耳塚(이총)}가 있다. 정유재란 때 왜군은 戰果(전과)의 표시로 조선인의 머리 대신 코를 베어갔다. 더러는 귀를 베어가기도 했다. 그렇게 생긴 무덤을 ‘코무덤’이라고 했다가 너무 잔인하고 어감이 좋지 않다고 하여 ‘귀무덤’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야만적인 행동을 남원성전투(南原城戰鬪, 1597년 8월 13-15일), 황석산성전투(黃石山城戰鬪, 1597년 8월 14-16일)에서, 그리고 정유재란 여러 전투에서 자행했다.
▲일본 교토{京都(경도)}에 있는 ‘귀무덤’, 즉 미미즈카{耳塚(이총)}
또 왜군들은 정유재란에서 조선의 문화재를 마구 약탈해갔다. 그때 도둑맞은 수많은 우리니라 문화재들이 아직 반환되지 못하고 있다. 또 정유재란 기간 동안에 조선의 수많은 도공들이 잡혀갔다.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의 도자기 제작 기술은 세계적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에는 조선의 도자기 제작 기술은 쇠퇴하고, 일본의 도자기 제작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정유재란 때 포로 되어간 조선의 도공들이 일본의 도자기 산업을 일으켰던 것이다.
1597년 8월 16일 황석산성전투에서 조선군(민간인 포함)은 전멸했다. 참패 중의 참패였다. 죽은 조선군은 353명이고, 민간인 수천 명을 포함하여 3,500명이 전사했다.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백사림(김해부사)이 도망가려고, 일부러 불을 지르고 돌아다니니, 성내의 사람들이 크게 소동했다” 등으로 전과(全科)를 보고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군 353명과 계곡에서 수천 명(민간인)을 죽였으니 수고하였다”라고 치하했다.
그러면 왜군은? 그들의 기록에 의하면, 단 1명도 죽지 않았다.
이것이 ‘황석산성전투(黃石山城戰鬪, 1597년 8월 14-16일)’이다. 이것이 임진왜란사에 나오는 황석산성전투이고, 황석산성전투 추모비나 유적 안내판에 있는 전투 내용이다. 이것은 일본측 기록을 따른 내용이다.
“완전 범죄는 없다”라는 말이 있다. 역사왜곡(歷史歪曲)도 범죄이다. 완전한 역사왜곡은 없다. 어딘가에 서툰 수작을 한 허점(虛點)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35년 동안 우리나라를 식민지배하면서 저지른 계획적 범죄 중의 하나는 역사왜곡이다. 그 속에는 임진왜란에 대한 것도 많이 들어 있다.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왜곡된 역사를 달달 외우고만 있으면 비참한 일이다.
일제(日帝)의 마지막, 즉 제10대 조선총독은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아부신행), 1875-1953 :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 졸업, 1933-1937년 육군대장, 1939년 4개월 동안 제36대 일본 총리, 1944년 7월-1945년 8월 15일 제10대 조선총독, 태평양전쟁(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석방됐음}였다. 그가 우리나라에 저지른 악행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 역사를 왜곡한 것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일왕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아베 노부유키는 1945년 9월 9일 할복자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그는 부축을 받으며 주한미군사령관 존 하지(John Reed Hodge, 1893-1963, 재임 1945-1948) 중장 앞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하고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아베 노부유키는 돌아가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내 장담하건대 조선인이 제정신을 차려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도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인들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일본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을 했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 올 것이다.”
그 식민교육 속에 그들이 저지른 대한민국의 역사왜곡이 들어 있다. 그 역사왜곡 속에는 임진왜란 역사왜곡이 들어 있고, 임진왜란 역사왜곡 속에는 황석산성전투 역사왜곡이 들어 있다. 아베 노부유키의 말은 “너희 조선인들은 우리가 해놓은 왜곡역사를 달달 외우고 살 것이다. 100년이 지나도 그 짓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라는 뜻이다.
역사를 챙기지 못하는 국민은 천치 국민이다. 왜냐하면 자기 나라 역사를 잃으면 영토도 빼앗기기 때문이다. 역사를 챙기지 않는 국민은 집문서가 남의 손에 들어간 줄도 모르고 자기 집이라고 살고 있는 사람과 같다. 집문서를 잃어버린 사람은 언젠가 자기 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와 같이 자기 나라 역사를 잃으면 언젠가 영토를 잃고 국제 나그네가 된다. 해외여행이 유익하고 재미있다. 그러나 돌아올 조국이 있고, 다시 맞아주는 자기 집이 있으니까 재미있는 것이다. 돌아올 조국이 없고, 자기 집이 없으면 고통스러운 국제 나그네 신세이다. 쿠르드(Kurd)가 그렇다. 쿠르드 민족은 우리나라 남북한을 합한 수와 비슷하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역사가 없다. 그들이 “우리도 역사를 가지고 있다”라고 하면, 이라크, 시리아, 터키 같은 나라들이 “아니야, 그건 우리 역사다”라고 주장한다. 나라가 역사를 잃으면 영토를 잃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모든 국민은 자기 나라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역사 속에 이상한 점이 보이면 의심해보고 연구해야 한다. 그렇게 재야 역사학자, 아마추어 역사 연구자들도 많이 나와야 한다.
그들 중에는 얼토당토 않는 연구 결과를 내놓는 일도 있지만, 귀를 기울이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 박선호 황석역사연구소장이 그 중의 한 사람인 것 같다. 그는 함양 출신으로서, 황석산성전투의 기존 내용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연구를 거듭한 끝에 『황석산성전투와 임진대전쟁』(서경문화 간, 2009)을 발간했고, 공개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가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은 ‘참패한 황석산성전투’가 아니라, ‘패했으나 자랑스럽고 빛나는 황석산성전투’였다. 필자는 그의 주장에 공감하는 동시에 더 연구하여 황석산성전투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래의 글은 그의 글을 참고하여 필자가 재구성한 것이다. 일본은 일제 강점기 때 황석산전투를 철저하게, 거의 완벽하게 역사를 왜곡했다. 그러나 허점이 있는 것이다.
B. 패했으나 자랑스럽고 빛나는 황석산성전투
(1) 황석산성전투에 참가한 일본 육군 우군(友軍)은 총 27,000명이 아니라, 총 75,000명이었다.
① 총사령관 제8군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모리수원), 1579-1650} 30,000명
② 선봉장 제2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등청정), 1562-1611} 10,000명
③ 장수 제3군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흑전장정), 1568-1623} 10,000명
④ 장수 제4군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과도직무), 1536-1618}‧나베시마 가츠시게{鍋島勝茂(과도승무), 1538-1618 :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동생} 12,000명
⑤ 장수 제6군 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장종아부원친), 1539-1599} 13,300명
그렇다면 고령전투(高靈戰鬪, 1597년 8월 15-16일)에서 정기룡(鄭起龍, 1562-1622) 장군에 의해 전멸했다는 제4군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12,000명의 사실 여부에 대한 의문점이 생긴다. 박선호 씨가 이를 간과했다고 본다면 황석산성전투에 참가한 왜군은 63,000명인 셈이다.
황석산성전투에 참가한 왜군 총 병력이 27,000명이 아니라, 우군(右軍) 전체인가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후일 전주성(全州城)에 입성한 왜군 우군 총 병력은 27,000명이었기 때문이다.
남원성전투(南原城戰鬪, 1597년 8월 13-15일)에서 100명의 사망자만 내고 승리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 좌군(左軍) 65,700명(65,800-100)은 전투 후 3일 만인 1597년 8월 18일 전주성에 무혈입성(無血入城)했다. 그런데 황석산성전투(黃石山城戰鬪, 1597년 8월 14-16일)에서 승리한 가토 기요마사의 왜군 우군(右軍)은 전투 후 9일 만인 1597년 8월 25일에 전주성에 들어갔으나, 총 병력은 27,000명이었다. 나머지 병력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왜군 우군 총 병력 75,000명 중에서 48,000명(75,000-27,000)은 증발해버렸다는 것이다. 고령전투(高靈戰鬪, 1597년 8월 15-16일)에서 정기룡(鄭起龍, 1562-1622) 장군에 의해 전멸 당했다는 제4군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12,000명을 제외한다고 해도 36,000명(63,000-27,000)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10,000명이었던 제3군 구로다 나가마사의 총 병력은 전주에 입성했을 때 3,000명밖에 되지 않았다. 7,000명이 사라지고 없었다.
일본이 정유재란에서 세운 육군의 1차 목표는 전주성(全州城)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좌군(左軍)은 좌로(左路 : ‘웅천 → 진주 → 사천 → 하동 → 구례 → 남원’)를 돌파하고, 가토 기요마사의 우군(右軍)은 우로(右路 : 서생포 → 밀양 → 창녕 → 합천 → 거창 → 황석산성)를 돌파하여 전주성에서 합류하여 병력을 정돈한 후, 좌군은 전라도로 남진하여 호남 곡창을 확보하고, 우군은 북진하여 한성(漢城, 서울)을 점령하기로 돼 있었다.
전주에 도착해서 한 병력 점호에서 나타난 좌군(65,700명)과 우군(27,000명)은 너무 언밸런스였다. 하여튼 전주에서 병력 재편성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황석산정전투에서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우군은 좌군보다 더 불리한 병력으로 전주를 출발했음은 자명하다. 장차 명군(明軍)과 맞닥뜨려야 하는데도…. 그 후 왜군 우군의 전투는 전혀 위력적이지 못했다.
1910년 조선(대한제국)을 강점한 일제는 우리나라 역사왜곡에 착수했다. 황석산성전투도 그 중의 하나였다. 조선의 기록을 봤을 때, 일본이 이겼다고는 하나, 진 전투였으니 치욕스러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황석산성전투에 관한 조선의 기록을 샅샅이 조사하여 파괴하거나 불태우고, 엉터리 역사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그리하여 우군(右軍) 27,000명이 황석산성전투에 참가하여 한 명의 전사자도 없이 승리한 후, 전주성에 입성했다는 아주 서툰 역사왜곡을 했던 것이다. 나머지 병력은 예비대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우리 국민들이 지금까지 믿고 있다. 『함양군사(咸陽郡史)』마저도 황석산성전투에 참가한 왜군이 27,000명이라고 기록해놓고 있다.
박선호 씨의 주장에 의하면, 우군 총사령관 겸 제8군 대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측근 실세인 5명의 ‘다이로{大老(대로)}’ 중의 한 명인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모리휘원), 1553-1625}였다. 모리 데루모토가 조선에서 질병에 걸리는 바람에, 그의 양자(養子)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모리수원), 1579-1650}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고 한다. 황석산성전투 때 모리 히데모토의 나이가 겨우 18세였다. 아무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측근 실세라고는 하지만, 18세가 어찌 여러 사령관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을 할 수 있는가? 황석산성전투에서 우군 총사령관을 맡은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모리휘원), 1553-1625}는 병력을 대량 잃은 일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진노를 사서 일본으로 소환되었고, 그때 히로시마{廣島(광도)}에 있던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모리수원), 1579-1650}가 2,000명을 이끌고 와서 충원했다는 것이다.
(2) 황석산성전투에 참가한 조선군은 3,500명{군사 수백 명+민간인(남녀노소) 수천 명}이 아니라, 7,000-10,000명(군사 3,000명+민간인 4,000-7,000명)이었다.
일본이 황석산성전투에 참가한 조선인을 축소 조작한 의도는 패배감에 빠진 조선인들은 싸울 의지가 없었다는 것, 그래서 모병(募兵)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부각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왜군의 대량 전사를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전사한 조선군 전체 인원을 353명으로 기록했다. 이는 실제보다 10분의 1로 축소 왜곡한 것이다. 민간인도 안음(안의) 등 3개 현이 아니라, 7개 현 주민들이 성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다른 곳으로 피란을 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백성들은 싸울 의지를 가지고 성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단순한 피란이 아니라, 싸움을 위해 시간을 두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는 것이다. 황석산성전투에서 싸운 조선군은 3,000명만이 아니라, 그보다 두 배가 되는 백성들이 모두 훌륭한 전사(戰士)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정규군에 의해 왜군 정규군 수만 명이 죽어 자빠졌으니, 얼마나 치욕스러웠을까!
(3) 황석산성전투 기간은 하루(1597년 8월 16일)가 아니라, 5일간(1597년 8월 14-18일)이나 계속되었다.
남원성전투(南原城戰鬪, 1597년 8월 13-15일)에서 쉽게 승리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 좌군(左軍) 65,700명(65,800-100)은 전투 후 3일 만인 1597년 8월 18일 전주성에 무혈입성했다. 그런데 황석산성전투(黃石山城戰鬪, 1597년 8월 14-16일)에서 승리한 가토 기요마사의 왜군 우군(右軍)은 전투 후 9일 만인 1597년 8월 25일에 전주성에 들어갔다. 남원-전주, 함양-전주는 거리가 거의 비슷하다. 전주 입성하는 데 좌군은 3일 걸렸는데, 우군은 9일이나 걸렸다. 우군은 황석산성전투 후 어디 가서 놀다가 왔단 말인가? 그것은 황석산성전투가 치열해서 전투기간이 길었다는 것, 왜군의 피해가 아주 심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군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는 황석산성을 정찰 중에 조선군의 화살을 맞아 치명상을 입어 아예 참전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 초기 용산에서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잡혀갔다가, 정유재란(1597) 때 왜군으로서 황석산성전투에 참가했다가 탈출에 성공한 조선군 김응려(金應麗, ?-1630)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화살을 맞은 가토 기요마사가 죽었다는 소문이 왜군 전 부대 내에 퍼져 있었다는 것이다. 황석산성전투에서 가토 기요마사뿐만 아니라 많은 사망자들 외에 부상자들이 많아서 함양에서 전주로 가는 도중에 여러 날 동안 부상자들을 치료했다는 것이다. 훗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등청정), 1562-1611}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덕천가강), 1543-1616}의 신하로서 규슈{九州(구주)}의 히코노구니[肥後の国(히코노구니) : 지금의 구마모토{熊本(웅본)}현(縣)]의 우토[宇土(우토) : 지금의 구마모토{熊本(웅본)}시(市)]의 영주(領主)가 되어 1611년 자연사(自然死)했다. 그때 그의 나이가 50세(만 49세)였다. 그가 그리 오래 살지 못한 것은 황석산성전투에서 중상을 입어 골병이 든 때문이었을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황석산성(黃石山城)은 ‘포곡식(包谷式) 산성(山城)’으로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천연요새(天然要塞)’였다. 이러한 산성은 평소에 준비를 잘해놓으면 좀처럼 함락되지 않는다. 황석산성은 싸울 준비가 잘되어 있었던 산성이었다. 1597년 8월 17일까지는 왜군의 피해가 속출했을 것으로 본다. 1597년 8월 17일에는 조선군의 전쟁무기(화살, 돌 등)가 바닥을 드러냈다. 그날부터 전세가 역전이 되어 조선군과 조선의 민간인들이 살육되기 시작되어 약 7,000명 이상이 옥쇄(玉碎)를 하고, 1597년 8월 18일 전투는 끝이 났다.
남원성전투보다 긴 황석산성전투의 전투기간, 그리고 부상자 치료기간이 있었을 것을 감안해보면 우군이 좌군보다 왜 6일이나 더 늦게 전주에 입성했는지 그 원인을 금방 알 수 있다.
(4) 황석산성전투는 조선군의 비참한 패배가 아니라, 조선군의 빛나는 전투였다.
황석산성전투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성주(城主) 안음현감(安陰縣監) 곽준(郭䞭, 1550-1597)은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일본 대군과 싸우다가 역부족(力不足)으로 장렬히 전사한 장수였다. 쉽게 말하면 곽준은 별 볼일 없는 장수로 묘사되어 있다. 그가 지하에서 통분해할 일이다.
본관이 현풍(玄風)인 문관(文官) 출신 곽준(郭䞭, 1550-1597)은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 1552-1617)보다 2년 연상이지만, 곽재우의 재당숙(再堂叔 : 7촌 아저씨)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장 김면(金沔, 1541-1593 : 전투 수행 중 병사했음)[옹달샘 <39> 참조]을 도와 왜군과 싸웠다.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천거로 관직에 나갔고, 1594년 조정은 그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하여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임명했다. 그는 장차 있을 전투(그것이 황석산성전투가 되었음)를 위하여 3년을 준비했다. 병사 훈련은 물론이고 무기 확보와 전투 시설을 확충했다. 황석산성은 1592-1593년 임진왜란 때 전화(戰禍)를 입지 않은 곳이어서 만반의 준비가 가능했다.
제자(弟子)가 되는 두 길이 있다. 하나는 스승의 가르침을 직접 배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간접적으로 배우는 것이다. 전자를 ‘수학(受學)하다’라고 하고, 후자를 ‘사사(師事)하다’라고 한다. ‘수학(受學)하다’는 ‘받을 수, 배울 학’이다. ‘사사(師事)하다’는 ‘스승 사, 일 사’인데, ‘사(事)’는 ‘섬기다’ 또는 ‘받들다’라는 뜻도 있다. ‘사사(師事)’의 ‘사(事)’는 ‘섬기다’ 또는 ‘받들다’의 뜻이다. 그러므로 ‘사사받다’라는 말은 아예 없다. 흔히 개인교습을 받는 경우 ‘∼선생님께 사사받고 있다’라고 말하는데, ‘∼선생님으로부터 수학하고 있다’라고 해야 옳다. 간접적인 가르침을 받은 경우라 하더라도 ‘사사받다’가 아니라, ‘사사하다’가 옳다. 수학했든, 사사했든 간에 다 그 스승의 제자가 된다.
예를 들면, 증자(曾子, BC 506-BC 436)는 공자(孔子, BC 551-BC 479)로부터 가르침을 직접 받은, 즉 수학(受學)한 공자의 제자였고, 맹자(孟子, BC 372?-BC 289?)는 공자의 가르침을 간접적으로 배운, 즉 사사(師事)한 공자의 제자였다. 공자의 제자들은 많았지만, 공자(孔子)의 가르침은 증자(曾子)를 통해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 BC 483?-BC 402?)에게 전해졌고, 자사를 통해 맹자(孟子)에게 전해졌다.
곽준이 수학(受學)한 스승은 없었다. 그는 여러 스승으로부터 사사(師事)했다. 다시 말하면 독학(獨學)을 했던 문인(文人)이었고, 스스로 노력한 무인(武人)이었다. 그는 스스로 ‘존재(存齋)’라는 서재(書齋)를 짓고, 문과 무를 닦았다. ‘존재(存齋)’는 자연스럽게 그의 아호(雅號)가 되었다. 그는 양반 가문 출신이었지만, 전혀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시험을 본 일도 없었다. 곽준과 곽재우는 서로 닮은 점이 있다. 곽준은 은둔 선비였다. 곽준은 수학한 스승이 없었지만, 출중하고 용맹했다. 그가 출중하고 용맹했다는 것은 일본 기록에도 나온다.
곽준은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전사한 장수가 아니었다. 일본 우군 주력군인 가토 기요마사의 제2군이 남문을 공격해올 것을 예상하고, 곽준이 남문을 지켰다. 곽준은 화살 3개를 동시에 쏘아서 원하는 목표물을 명중할 수 있을 정도의 명궁(名弓)이었다. 곽준이 그렇게 한 번에 왜군 3명을 거꾸러뜨리자, 그들은 “성 안에 명궁이 있다”라고 경계하면서 쉽게 성을 기어오르지 못했다. 더구나 위 사진에서 보듯이 황석산성의 밖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었고 수목이 우거져 있었기 때문에 공성(攻城)이 쉽지 않았다. 사다리도 걸칠 수 없는 지형이었다. 그런 가운데 왜군의 전사자는 속출했다. 그들은 수적 우세를 믿고 밀어붙이다가 엄청난 희생자를 냈던 것이다.
하지만 병력의 열세, 무기의 고갈을 극복하지 못하고, 1597년 8월 17일부터 전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그 이튿날(1597년 8월 18일)까지 끌다가 전투가 끝났다고 하는 것은 그날의 황석산성전투가 얼마나 치열했으며, 조선군과 민간인들이 얼마나 결사항전(決死抗戰)을 했는가 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황석산성전투에서 빛나는 또 한 명의 인물은 전 함양군수 조종도(趙宗道, 1537-1597)였다. 세조(世祖)에게 항거했던 생육신(生六臣) 중의 한 명인 조려(趙旅, 1420-1489)의 5세손으로서, 곽재우(郭再祐, 1552-1617)와 함께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으로부터 동문수학(同門受學)했고,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수제자인 유성룡(柳成龍, 1542-1607)과 김성일(金誠一, 1538-1593)과 가깝게 교유(交遊)했다. 그는 아주 이른 나이인 22세(1558년)에 문과 생원과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뜻이 없었다. 그런 중인 1589년(선조 22년)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조선의 당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건인 ‘정여립 모반사건(1589)’을 좀 살펴본다.
전주(全州) 출신으로서, 24세에 문과에 급제할 정도로 비상한 재능을 소유했던, 서인(西人)에 속했던 정여립(鄭汝立, 1546-1489)은 당쟁 초기인 1584년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죽고, 동인 세력이 커지자, 서인에서 이탈하여 동인에 소속되어, 이이를 비판했다. 선조는 그러한 정여립을 미워하여 파직시켰다. 전주로 낙향한 정여립에게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라, 정치 사상가였다. 그의 사상은 당시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급진적인 것이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주자학의 ‘불사이군론(不事二君論)’을 비판하고, ‘천하는 공물(公物)로서 일정한 주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느냐’라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주장했다.
이러한 사상은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비슷하다. 이것은 선조(宣祖)에 대한 정면도전과도 같았다. 위험하지만, 신선하기도 한 정여립의 정치사상에 매료된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하여 정여립은 ‘대동계(大同契)’라는 일종의 정치 조직을 만들었다. 그러자 정여립을 배신자로 본 서인(西人)이, 정여립이 모반을 준비한다며 공격했다. 당시 서인의 영수(領袖)인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은 이를 계기로 당시 집권세력인 동인(東人)을 압박했다. 그로 인해 동인 정치인들이 투옥되고, 1,000여 명이 숙청되었다. 정여립의 사상과 남명 조식의 사상이 비슷하다고 해서 조식의 문하생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 이것이 ‘정여립 모반사건(1589)’, 또는 ‘기축옥사(己丑獄死)’이다.
이 사건은 임진왜란 발발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정치적 내분을 조선 침략의 호기(好機)로 삼았다는 것이다. 정철은 더 욕심을 내어 동인(東人)의 영수인 이산해(李山海, 1539-1609)와 유성룡(柳成龍, 1542-1607)도 제거하려고 했다. 그러자 선조(宣祖)는 서인이 너무 커지는 것을 경계했다. 그런 중에 1591년(선조 24년) 좌의정 정철은 영의정 이산해와 함께 광해군(光海君)의 세자책봉(世子冊封)을 건의하기로 했다. 그런데 정철 혼자서 세자책봉을 건의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산해의 계략이었다. 광해군을 싫어한 선조의 뜻을 잘못 짚었던 것이다. 왕의 진노를 사서 진주로 유배된 정철을 비롯한 서인 정치인들이 몰락했다. 1952년 임진왜란이 발발함으로써 서인 정치인들의 정치 복원이 이루어졌다.
이 사건을 두고 동인(東人)은 온건파(穩健派) 남인(南人 : 퇴계 이황 계열)과 강경파(强硬派) 북인(北人 : 남명 조식 계열)으로 분열했다. 남명 조식의 사상은 ‘주경과의(主敬果義)’, 즉 ‘배운 지식을 능력과 정신으로 승화하여 의로운 행동을 통해 실천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퇴락한 선비정신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것이 남명의 학문의 목표였다.
임진왜란의 의병장들과 의병 활동을 잘 알려고 하면 먼저 남명 사상을 이해해야 한다. 지행합일(知行合一), 즉 이론과 실천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종도는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한 인물이었다. 그는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1589)’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러나 그때 심한 고문을 받아서 병을 얻었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안음현감(安陰縣監)에 임명되었고, 1596년에는 함양군수(咸陽郡守)가 되었으나, 1년 만에 병으로 물러났다.
황석산성전투(黃石山城戰鬪, 1597년 8월 14-16일) 당시 61세였고 병까지 갖고 있던 조종도(趙宗道, 1537-1597)는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라는 사람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곽준 홀로 싸우게 할 수는 없다. 나는 나라의 녹을 먹은 사람이니, 도망하는 무리와 초야에서 함께 죽을 수는 없다. 죽을 때는 분명하게 죽어야 한다”라며 가족들을 데리고 성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런 시를 적어놓고 황석산성으로 들어갔다.
▲황석산성(黃石山城)에 들어가기 전 쓴 <충의공(忠毅公)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 시비(詩碑)>
崆峒山外生猶幸(공동산외생유행) 공동산 밖에 사는 것이 오히려 행복하다 하겠지만
巡遠城中死亦榮(순원성중사역영) 장순, 허원처럼 성을 지키다 죽는 것 또한 영광이다
공동산(崆峒山, 쿵퉁산)은 중국 간쑤성{甘肅省(감숙성)}에 있는 아름다운 산으로서, 진시황(秦始皇, BC 259-BC 210)이 신선(神仙)을 구했다는 도교(道敎) 제일의 명산이다. 장순(張巡, 709-757)과 허원(許遠, ?-?)은 중국 당(唐)나라의 장수로서, ‘안록산(安祿山)의 난(亂, 755-763)’ 때 반란군을 진압하던 중 수양성(睢陽城)에 들어가서 싸우다가 죽었다. 그러니까 조종도는 ‘그 아름답다는 공동산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행복한 일이지만, 장순과 허원처럼 나라를 위해 성을 지키다가 죽는 것 또한 영광된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읊었던 것이다. 죽음을 각오한 무장의 결연한 마음을 묘사하고 있어서 비장(悲壯)하다.
그렇게 성 안으로 들어간 전 함양군수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는 병든 노구(老軀)를 이끌고 군사를 지휘하여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그의 가족도 그 전투에서 다 죽었다. 차남 조영호(趙英濩, ?-?)만 그 전투에서 포로 되어서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왔는데, 그의 후손들 중에는 훌륭한 인물들이 많다.
사후(死後) 전 함양군수(咸陽郡守) 조종도(趙宗道, 1537-1597)는 이조판서(吏曹判書, 정2품)에 추증(追贈)되었고, 함안(咸安)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인 덕암서원(德巖書院)과 안의(安義)의 황암사(黃巖祠)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충의(忠毅)이다. 안음현감(安陰縣監) 곽준(郭䞭, 1550-1597)은 병조참의(兵曹參議, 정3품)에 추증되었고, 안의(安義)의 황암사(黃巖祠)와 현풍(玄風)의 예연서원(禮淵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그 두 사람과 그의 가족들 외에 순국한 인물 들 중에 정유문(鄭惟文, ?-1597), 정유영(鄭惟榮, ?-1597), 강흘(姜紇, ?-1597), 유명개(劉名蓋, ?-1597) 등이 있다.
(5) 김해부사 백사림은 황석산성전투에서 도망친 것이 아니라, 항왜의 도움으로 탈출했다.
기존 황석산성전투 내용을 보면 김해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 ?-?)은 비겁한 배신자였다.
그런데 백사림이 지킨 황석산성 동북문을 공격한 왜군 장수는 제3군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흑전장정), 1568-1623}였다. 황석산성전투가 끝났을 때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은 겨우 3,000명만 남았다고 한다. 그의 제3군이 전주에 입성하여 전주를 떠날 때 5,000명이었던 것은 총사령관 제8군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모리수원), 1579-1650}의 병력 2,000명을 떼 내어 충원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로다 나가마사의 병력 7,000명은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그 왜군 7,000명은 동북문을 지킨 김해부사 백사림의 조선군에 의해 죽은 것이다. 백사림이 일찌감치 밧줄을 내려 도망을 쳤다면 구로다 나가마사의 7,000명이 사라졌을 리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군 장수 중에는 이런 비겁한 자가 있어서 참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기록을 남겨서 조선인들이 자괴감(自愧感)에 빠지게 하려는 일제(日帝)의 역사왜곡 의도였다.
『선조실록』 제92권(1597년 9월 8일)에는 백사림(白士霖)과 관련된 글이 실려 있다. 그것은 ‘김해부사 백사림을 구한 항왜(降倭) 사백구(沙白丘+鳥)의 포상을 건의한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 1564-1624)의 장계(長計)’이다.
‘항왜(降倭)’는 ‘항복하여 귀순한 왜군’으로서 조선군에 소속돼 싸운 사람들이다. 임진왜란의 항왜는 10,000명에 달했다[옹달샘 <45> 참조].
김응서의 장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황석산성전투에서 조선군이 위기에 빠졌을 때 동북문 쪽에서 싸우던 뚱뚱한 백사림이 죽음에 처하게 되었다. 그때 항왜 사백구가 백사림을 인도하여 바위굴에 숨기고 황석(黃石)으로 가리고, 초목(草木)으로 덮어서 왜군이 백사림을 발견하지 못하게 했다. 그 항왜 사백구는 원래 김응서의 진중으로 투항해 온 왜군이었는데, 김해부사 백사림에게 보내주었던 것이다. 그 날은 조선군이 무기가 떨어져 공격을 받기 시작한 1597년 8월 17일이었던 것 같다. 이튿날(전투가 끝난 1597년 8월 18일) 날이 새자 왜군들이 대거 성 안으로 들어와 성문을 지켰으므로 성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러자 항왜 사백구가 또 꾀를 냈다. 사백구는 왜군의 복장을 하고, 백사림을 포로로 끌고 왜군들 앞에 나와, “너희들은 성문을 어떻게 지켰느냐? 조선 도적이 성 안에 들어와 있는데도, 수색하여 체포할 생각을 하지 않으니, 죽어 마땅하다”라고 하며 칼등으로 그들을 내려치려 하니, 그들이 살려달라고 애걸하며 “우리가 피곤하여 잠깐 졸아서 그러니, 제발 상관에게 보고하지 말아주십시오”라고 복걸했다. 그러자 사백구가 백사림을 잡아끌면서 “이 더러운 놈을 성 안에서 죽일 수 없다. 성 밖에 나가서 죽일 것이다”라고 하니, 그들이 성문을 열어주었다. 사백구는 백사림을 성 밖으로 끌고나와 숨겨주면서 “꼼짝하지 말고 여기에 있으십시오”라고 하고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갔다.
백사림이 생각하기를 ‘이놈이 나를 참살하여 포상을 받으려는 것이 아닐까?’라는 마음이 들어서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해 있는데, 사백구가 다시 거기로 나왔다. 백사림이 없어진 것을 본 사백구가 탄식하며 “부사님, 부사님”하고 부르짖었다. 사백구가 딴마음을 갖고 있지 않음을 안 백사림이 “내가 여기 있네”라며 나오니, 사백구가 음식을 내놓았다. 이렇게 의리 있는 항왜 사백구의 도움으로 백사림은 구사일생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김응서의 장계는 “그러니 항왜 사백구에게 큰 상을 내리심이 마땅한 줄 아옵니다”라고 끝을 맺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백사림은 비겁한 도망자가 아니라, 열심히 싸우고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지휘관이었다.
일제의 황석산성전투 역사왜곡이 사실이라면 황석산성전투는 참패한 전투가 아니라, 일본 우군을 반신불수로 만들어 정유재란을 조기에 끝내게 한, 자랑스럽고 빛나는 전투였다.
일본은 왜 계획적이고 끈질기게 대한민국의 역사를 왜곡하려고 하는 것일까? 첫째, ‘일본의 역사적 콤플렉스’ 때문이다. 일본의 양심적인 역사가들은 일본의 뿌리를 한반도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본의 민족과 문화가 한반도에서 왔다는 것, 즉 ‘기마민족도래설(騎馬民族渡來說)’이다. 그들은 그것을 숨기려하고, 부정한다. 그러니 끈질기게 역사왜곡에 매달린다. 둘째, ‘일본의 대륙에 대한 욕심’ 때문이다. 일본 열도(列島)는 예부터 불안하다. 지진, 해일, 태풍 등 자연재해가 극심하다. 그 때문에 그들은 심리적으로 늘 불안하다. 일본인들이 질서를 잘 지키는 것은 이러한 불안 심리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은 대륙을 영토로 삼으려는 욕심이 많다. 그것이 ‘정한론(征韓論)’이다.
왜곡된 역사, 특히 남에 의한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우는 나라, 자기 역사를 남이 감히 왜곡하지 못하게 하는 나라, 바른 자기 역사를 지키는 나라가 자주독립국이고 선진강대국이다. [다음 호에 계속 / 2014.8.5.(화). 조귀채]
[다음 호에 계속 / 2014.8.5.(화). 조귀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