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이름 찾아 떠나는 여행 74>
여수(麗水)
후진타오 전 중국 국가 주석의 아들 후하이펑(48) 저장성(浙江省) 자싱(嘉興)시 당 부서기 겸 시장이 같은 저장성 안의 리수이(麗水) 시 당 서기로 승진 임명됐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2018. 7. 4 조선일보) 홍콩 명보는 “후하이펑이 40대에 지방 시(市)의 당서기 간판을 달았다는 점에서 앞으로 중앙 정계에서 유력한 후계자 그룹이 될 수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리수이 시는 저장성 내 지급시(地級市 · 성과 현 중간의 행정단위) 가운데 면적은 가장 넓지만 가장 가난한 도시입니다.
여수시 이름의 유래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앞에서 말한 중국의 저장성 송양현(松陽縣)에 있는 리수이(麗水)시와 흡사하다 하여 차용하여 썼다는 주장이고 두 번째는 태조 왕건이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세운 후 전국을 여행하던 중 현재의 여수 지역을 둘러보고 “이 지역은 인심이 좋고 여인들이 아름다운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 묻자 신하들이 “물이 좋아서 인심이 좋고 여인들이 아름답습니다”고 답했다고 해서 신하들에게 지명을 ‘여수(麗水)’로 지으라고 지시했다는 것입니다.
538년(백제 성왕 16년) 백제는 수도를 사비성으로 옮기고 전국을 중앙과 동서남북으로 구분하여 5방(方)을 두었습니다. 방에는 방성(方城)을 설치하고 여러 크고 작은 성을 군 혹은 현으로 통제하여 지배하였습니다. 남방(南方)에 속하였던 순천, 여수, 광양지방에는 삽평군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삽평군에는 원촌, 마로, 돌산 등 3현을 속현으로 두고 있었는데, 원촌현(源村縣)은 여수반도 일원이며. 돌산현(突山縣)은 돌산도를 비롯한 인근의 섬을 그 영역으로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여수지방에 처음으로 원촌과 돌산이라는 이름의 군현이 설치됩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작은 마을에 불과하여 ‘고으리’라고 하였다가 태조 23년(940) 행정 구역 개편 때 해읍현(海邑縣)을 여수현으로 변경해 사용하게 되었는데, 3면이 아름다운 바다로 둘러싸인 데서 유래한 명칭이 '여수(麗水)'라는 것입니다. '여수'라는 지명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해읍현은 본래 백제 원촌현(猿村縣)이었으나,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여수현(麗水縣)이다."라는 기록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동람도’와 ‘동여비고’(전라도)에는 순천과 광양 남쪽 반도에 '수영(水營)'이라는 표기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이 지역에 1479년(성종 10)부터 전라도 좌수영이 설치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대부분의 고지도에는 '여수(呂水)'로 현재와 한자가 다르게 표기되어 있습니다. 특히 ‘해동지도’(순천)에 여수면(呂水面) 남쪽으로 좌수영이 나타납니다.
원촌현 때 여수의 중심지는 읍동(낙포)이었습니다. 일본에서 백제로 오려면 하동포구를 거쳐야 했는데, 하동에서 배를 타고 낙포로 오가는 항로가 번창하였습니다. 낙포는 순우리말 이름이 ‘납개’였는데 ‘원숭이 포구’란 뜻이었습니다. 일본에서 유입된 원숭이들이 진례(읍동)에 많이 살았다고 해서 부른 이름입니다. 원촌(猿村)이란 이름도 이에 유래한 것입니다. 원촌읍(낙포)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757년(경덕왕 16)에 해읍현(海邑縣)으로 개칭했다가 940년(고려 태조 23)에 지금의 이름인 여수현(麗水縣)으로 고쳤습니다. 1018년(현종 9)에 순천의 속현으로 병합되었다가 1350년(충정왕 2)에 다시 여수현으로 독립합니다.
1396년(태조 5년) 순천부에 소속되었고 다시 진례만호진(進禮萬戶鎭)이 읍동(邑洞)에 설치되었는데, 여수 사람들은 이곳 삼일면 진례를 여수의 본향(本鄕)이라 합니다. 즉 낙포가 여수반도의 중심지였던 것입니다. 삼일포의 유래는 고려의 정승 공은(孔隱)이 유배되어 낙포에 도착했을 때 학 3마리가 그의 처소에 와서 같이 살다가 공은 정승이 숨을 거두자 학 3마리가 공은의 죽음을 보고 3일 동안 슬피 울며 배회하다가 ‘너렁이’ 앞 바다에 떨어져 죽었다 하여 ‘삼일포 비학주’ 라 부른데서 삼일낙포 란 지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삼일포(낙포)의 진례는 마한 54국 중 원지국에 속했고 이어서 대가야국 땐 삽평군이었습니다. 백제 성왕 16년 (538년) 여수반도가 백제에 부속되면서 원촌현과 식산현(돌산)으로 분리되었고 통일신라 신문왕 5년(685년) 때 다시 승평군으로 통합하였다가 758년 해읍현(읍동)으로 독립해 나왔습니다. 원래 여수는 육로보다 해로가 발달된 고장이었습니다. 삼국시대부터 남해와 하동에서 여수 낙포로 연결된 해로가 최단의 통로였습니다. 그래서 치소가 진례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 순천으로 육로가 열리면서 석보촌(석창)으로 치소가 옮겨졌습니다.
1423년(세종 5년) 치소인 읍동의 진례만호진을 폐하고 국동(菊洞) 신월리에 내례만호진(內禮萬戶鎭)을 신설하였습니다. 1479년(성종 10년) 내례포만호진을 폐하고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영을 설치하였고 1522년(중종 17년) 화양면 용주리에 전라좌도 수군 근무지를 만들었고 1591년(선조 24년) 이순신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였고 나대용 장군이 선소에서 거북선을 건조하였습니다. 1896년 여수군과 돌산군이 신설되었고, 1914년 돌산군이 여수군에 편입되었으며 1949년 여수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나머지 지역은 여천군이 되었습니다. 1998년 여천시 · 여천군 · 여수시가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옛 삼일포(낙포)는 오늘날 여수 엑스포공원과 가까운 오동도 입구의 오동항 일대로 지금은 삼일항 낙포부두(여수시 수정동 332-42)가 옛 포구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