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의 소년병
청산리 대첩이 있은 지 꼭 65년 되는 해로, 오늘 그 기념식이 베풀어진다. 이를 즈음해서 당시 제2제대장으로 전투에 참여했던 고(故) 이범석 장군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되뇌어 적어 남길까 한다.
시베리아에 출병(出兵)했던 일본군 제14사단이 남하(南下)하고 나남(羅南)에 주둔하고 있던 제21사단이 북상(北上)하며 만주 철도 수비대가 동서(東西)로 협공, 독립군을 섬멸한다는 작전 정보를 입수한 김좌진 장군 영도의 독립군 2천5백 병력은 골짝이 80리나 되고 송백 수목이 울창한 자연성(自然城)이랄 청산리(靑山里)로 적을 유도했던 것이다. 그때 군량은 옥수수 가루와 콩가루를 짓이겨 야영하는 불에 부친 지짐이로 `황병(黃餠)'이라 불렀다 한다. 그 황병 하나씩 먹고 사흘 밤낮을 싸웠다 한다. 잠자리는 원시림을 잘라 틀목집을 짓고 마른 새를 깐 위에 광목을 펴고 잤다고 했다.
이 전투에서 잊혀지지 않는 세 소년병(少年兵) 이야기를 이범석 장군은 눈물을 닦아가며 이렇게 회상했다. 그 하나는 신혼 사흘 만에 독립군에 투신했다던 열일곱 살의 지용호(池龍浩) 병사-. 무척 미남임을 자부했던 이 병사는 `내가 죽어도 내 신부는 내가 미남이라는 생각만으로 개가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너무나 편안한 얼굴로 죽어갔다 한다. 행군 도중에 오발(誤發)로 전우를 죽게 한 전(田)이란 성(姓)의 역시 10대의 나이 어린 병사도 잊을 수 없다 했다. 그 죄책으로 머리에 용수를 쓰고 있었는데 전투에 임하자, 저 때문에 죽은 전우가 싸울 몫까지 몰아 싸우겠다면서 적진에 뛰어들어 눈을 감고 난사하여 60명을 사살하고 죽어갔던 것이다. 역시 소년병(少年兵)인 기관총 사수 최인걸(崔麟杰)은 후퇴하지 않겠다고 기관총에 자신의 몸을 묶고 싸우다가 포위해 드는 적에게 1백80도 회전을 해가며 난사, 수백의 적을 무찌르고 죽어갔다 했다. 나란히 뉘어놓은 이 세 소년병의 홍안...하며 이장군은 말을 잇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구한국군의 상등병(上等兵)이었다는 것을 무척 자랑하여 `한상등(韓上等)'으로 불렸다는 한 40대의 노병사(老兵士)는 이 소년병들의 시체를 두들기며 울고 나더니 혼자만이라도 남아 싸우겠다면서 보총(步銃)을 메고 적이 포진한 숲속으로 뛰어들어 소지했던 총알을 마구 난사하며 전선을 방황했다. 물론 이 노병은 영 돌아오지 않고 말았다. 이 노병의 총성을 마지막으로 3개 사단 병력을 2천5백 병력으로 맞아 싸워 3천3백 명을 죽인 청산리(靑山里) 싸움이 끝을 맺은 것이다. 이야말로 세 마리 작은 버마재비가 수레를 쳐부순 격이 아니겠는가-. 과보호와 응석받이 속에 나약해져 있는 요즈음 소년들에게 들려주고 싶어 여기 써 남기는 것이다.
85/10/24
비교 저축 심리
지도를 보노라면 중-북유럽은 북녘 한대인 만주 북부와 시베리아와 같은 고위도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일년 열두 달 가운데, 8개월 이상이 겨울이요, 여름은 짧디 짧다. 계절이 겨울과 여름으로 양분돼 있기에 영어로 봄(Spring)과 가을(Autumn)이란 말이 생겨난 것은 중세기 이후의 일이라 한다.
만물의 생명을 정지시키는 이 길고 긴 겨울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식량의 비축(備蓄)이 생존의 필수 조건이 된다. `이솝 우화(寓話)'에 나오는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는 우리 나라에서도 그 이치가 들어맞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중화구 지방에는 뼈저리게 실감나는 우의성(寓意性)이 있는 것이다.
게르만 민족에 악의를 품고 있었던 고대 사학자(古代 史學者) 타키튜스의 `게르마니아'에 보면, 게르만 사람들은 땅굴을 깊이 파고 그곳에 식량을 비축해 덮어둠으로써 남들의 약탈을 피한다고 했으나, 약탈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기나긴 겨울에 대비한 비축 없이 살 수 없었기에 생긴 생활 관습인 것이다. 서양 건축에 지하실이 생긴 것도 이 식량 비축을 위한 땅굴이 그 기원이라 한다. 그래선지 지금도 유럽이나 미국 가정의 지하실에는 예외없이 쇠고기나 야채 등 식품 저장 시설이 돼 있는 데 예외가 없다. 지하실 말고 부엌에도 수퍼마켓의 소형 진열장 같은 식품 저장고가 놓여 있고, 그와는 따로 디프 프리이저라 하여 높이 1m, 폭 2m 남짓한 거대한 아이스 박스가 놓여 있다. 냉장고까지 합치면 보통 가정에서 네 개의 식품 저장고를 지니고 사는 것이 된다. 이 유구한 비축(備蓄)의 전통이 비축의 심리를 유발하게 되고, 그 심리가 저축을 생활화하게 한 비중 높은 요인이 된 것이다.
우리 나라에도 겨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겨울에 대비하지 않으면, 죽음에 직면하는 유럽의 그것에 비기면 심각한 것이 못 되기에, 비축의 농도가 묽을 수밖에 없다. 거기에다 조상 대대로 한 마을에 정착(定着)해서 살아왔기에 서로 믿고 꾸어 먹을 수도 있어 양식이 떨어졌다 해서 각박해진다는 법도 없었다. 해동하면 꾸어 먹은 양식을 품으로 갚을 수도 있고, 또 어떤 형태로도 보상받을 수 있는 영주성(永住性)의 공존 사회 이기에 굳이 양식을 비축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독립적으로 양식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동성(移動性)의 구미 사회에서 저축 의식이 강하고 우리 나라에서 저축 의식이 약한 전통적 배경이 이에 있는 것이다.
근대화.도시화 과정에서 우리 한국인도 구미형(歐美型)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데 저축 의식만은 전통의 굴레를 못 벗어나고 있다는 데 오늘날의 함정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저축의 날을 맞아 왜 우리 한국인은 딴 나라 사람에 비겨 저축을 하지 않는가, 그래서 굳이 이런 날까지 만들어 놓지 않을 수 없었던가를 생각해본 것이다.
85/10/25
말하는 냉장고
미국에 말하는 묘석(墓石)이 있다고 들었다. 뉴저지의 한 묘석 회사가 개발, 발매하고 있는 이 묘석은 태양 전지와 컴퓨터를 내부에 장치, 고인의 업적을 녹음해 넣거나, 정치가면 생전의 명연설을, 목사면 명설교를, 교수면 명강의를, 가수면 히트곡을 육성으로 녹음해 넣고 죽어서도 영원히 연설과 설교와 강의와 노래를 되풀이하게 해 놓은 것이다. 죽어서도 편안하게 잠들지 못하고, 소리치고 읊어대야 하니 안타깝기만 하다. 서양 것이면 다 좋고, 편리하기만 하면 무턱대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 한국 사람들인지라 이 묘석 수입을 타진하고 있다고 들었다.
만일 모든 묘지에 이 말하는 묘석이 널려 있을 것을 상상해 보자. 한식(寒食), 추석(秋夕)에 성묘하러 가면, 정치가 무덤에서 갑자기 `친애하는 여러분!'하고 불러 세워 놓고, 가수 무덤에서 `당신은 바보야...'하고 조롱할 것이다. 또 기계 고장이라도 나면, `당신은 바보야'만 계속 거듭하고도 있을 것이다. 이 괴이한 소음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뒷걸음질칠 때마다 `엘리제를 위하여'를 읊어대는 노래하는 자동차도 소음 공해로 지탄받고 있다. 만약 엘리제가 이 사실을 안다면 차라리 뒷걸음질치는 차에 투신하고 싶었을 것이다. 왜들 기계에서 소리나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이제 `소리 나는 냉장고'까지 개발되어 내년 봄에 시판될 것이라 한다.
마치 말하는 묘석처럼 음성 마이크로 컴퓨터를 내부에 장치하여, 냉장고 문이 열려 있으면 `닫아주세요', 냉장실 온도가 상승되면 `열어주세요', 서리가 많이 끼이면 `닦아주세요'...하는 등의 말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컴컴한 부엌 방에서 불쑥 말소리가 난다는 것도 묘석이 말하는 것처럼 오싹하려니와, 깊은 밤중에 `열어 주세요'하면 잠결에 강도로 착각도 할 것이요, `닦아 주세요'하면 잠자던 놈이 오줌이라도 싼 줄 알고 벌떡 일어날 것이다. `말하는 냉장고'의 지능을 발달시키면 이제 김치 냄새가 난다고 투덜댈 수 있게 할 것이요, 냉장고에 넣어 놓은 생선이 죽어간다고 원한을 토로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약간의 조작 편의를 위해 그 불평 불만을 들어야 하고, 또 가뜩이나 늘어나는 가정 소음을 가중시키는 것이 현대화는 아니다. 이것은 기계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에 이용 당하는 것이며, 편리할수록 좋다고 여기는 신앙(信仰)은 정신이나 정서의 파괴로 인간을 퇴화시키는 가장 큰 요인임을 알아야 하겠다.
85/10/26
기 심
옛날 바닷가에 어떤 사람이 살았다. 그는 해오라기와 친하게 되어 그가 바닷가에 나가기만 하면 날아와서 어깨나 손위에 앉곤 했다. 그는 그 해오라기 얘기를 아내에게 했다. 아내는 그 해오라기 한 마리를 잡아오라고 하였다. 잡아올 마음을 먹고 이튿날 바닷가에 나갔더니 해오라기는 한 마리도 날아오지 않았다. 이것은 그에게 해오라기를 잡으려는 기심(機心)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심이란 이렇게 겉으로는 아닌 체하면서 속으로 품고있는 사심(邪心)이다.
예로부터 조류(鳥類)는 인간의 기심에 예민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강남(江南)의 아파트촌인 압구정동(狎鷗亭洞)은 세조(世祖) 쿠데타의 공신(功臣)이요 벼슬밭에서 영화를 누렸던 권신(權臣) 한명회(韓明澮)의 정자 이름에서 비롯된 동명이다. 그는 벼슬에 욕심없이 강촌(江村)에 은퇴해 산다는 허울을 위해 이 강변에다 갈매기와 친한다(狎鷗)는 뜻으로 압구정을 짓고 아호(雅乎)도 기심을 잃은 노인이라 하여 `망기노(忘機老)'라고 자칭하였다. 하지만 기심에 예민한 갈매기는 이 정자를 피해 날았던 것 같으며, 뜻있는 선비들은 친할 `압(狎)'이 아니라 짓눌러버릴 `압(押)'구정으로 불러 내렸던 것이다.
병자호란 때 인질로 잡혀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따라 우리 나라에 온 굴씨(屈氏)라는 궁녀(宮女)가 있었다. 한국 땅에서 살다 죽은 이 굴씨는 휘파람으로 온갖 새를 불러들이고, 불러들인 새를 손가락 끝으로 마음대로 다루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사람들이 별다른 비결이라도 있는가고 물으면, 기심없는 천진(天眞)한 경지에 들면 새는 사람을 피하지 않는다고 대견스럽지 않게 대꾸하곤 했다.
한말, 헌종(憲宗)-철종(哲宗)-고종(高宗) 3대를 거쳐 어전에서 판소리를 읊었던 이날치(李捺致)라는 명창(名唱)이 있었다. 이 명창의 새 타령을 들은 일이 있다는 시인(詩人) 임규(林圭)는 이렇게 적어 남기고 있다. `어릴 적 고향인 익산(益山) 근처 심곡사(深谷寺)에서 이날치의 새 타령을 들은 일이 있는데 그가 새 소리를 낼 때마다 뻐꾹새인지 뭔지는 알 수 없으나 많은 산새들이 날아 들어 그를 에워싼 것을 보고 무척 신기하게 생각했었다'고-.
신앙이나 예술이나 수양에서 기심을 잃은 신묘한 경지에 이르면 새와 사람 사이에 격의가 증발해 버리는 것일까-. 그렇다면 새가 사람을 보고 피하는 것은 권욕(權慾)이며 이욕(利慾), 명욕(名慾), 음욕(淫慾)..., 위선, 시기, 모략, 음모...등 온갖 잡심이 범벅이된 것을 꿰뚫어 본 때문일까-. 그렇다면 도시에서 새가 사라지는 현상은 비단 공해만도 아닌 범람하는 기심 때문이었을까-. 내장산(內藏山) 원적암(圓寂庵)에 장요(藏堯)라는 스님이 인근 산새들을 불러 손아귀에서 모이를 먹이며 대화를 한다는 뉴스를 접하고 보니 이 기심 생각이 난다.
85/10/27
한국인의 손재간
서양 아이들 노는 걸 보면 넓은 터에서 공을 차거나 치거나 던지거나 주로 달리면서 `발(足)'로 논다. 한데 한국 아이들은 주로 `손(手)'으로 논다. 계집 아이들은 공기 놀이, 땅뺏기, 실뜨기, 손 그림자 놀이, 손뼉 맞추기...이 모두가 손가락 마디마디의 잽싼 기교 없이는 못 노는 놀이다. 사내 아이들도 윳놀이, 고누, 돈치기, 잣치기, 손가락 누르기...등 손으로 노는 놀이가 압도적으로 많다.
스포츠도 우리 한국 사람의 장기(長技)는 손으로 하는 스포츠인 데 예외가 없다. 국제 무대에서 우승권에 든 종목은 농구-배구-탁구-핸드볼-배드민턴-유도-레슬링-궁도(弓道)... 그 모두가 손으로 하는 종목인 데 예외가 없다. 발로 하는 육상 경기나 빙상 경기, 그리고 축구 등은 그야말로 족탈불급(足脫不及)이다. 월드컵 축구의 본선도 아니요 예선에, 예선도 겨우 1차전에 이겼다 해서 온 나라안이 왁자지껄한 것만 보아도 발로하는 축구의 세계 제패는 인연이 먼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우리 한민족은 손으로 사물을 보고 느끼고 또 따진다. 옷 하나 살 때 우리 한국인은 꼭 손으로 만져보고 사고 또 쌀 한 말 팔 때도 손으로 만져 보고 사야만 직성이 풀린다. 관광을 할 때도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성이 차질 않아 반드시 손으로 만져본다. 사람의 손이 닿을 만한 곳에 있는 문화재 마다 손때가 반지르르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서양 사람들은 기도할 때 그저 두 손을 맞추거나 맞쥐고 허공을 응시하는-, 그래서 눈으로 신(神)을 보려 하는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두 손이 닳도록 비벼대는- 그래서 손으로 신을 잡으려 한다.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北回歸線)'에 보면 서양 사람의 섹스 장면은 예외없이 불을 환하게 켜 놓고 눈으로 사랑을 진행하는데 한국 사람은 불을 꺼 놓고 손더듬이로 사랑을 진행한다. 사랑을 감지하는 데, 손이 눈보다 예민해져 있기 때문일까. 그래서 한국 사람이 죽을 때면 다정한 사람의 손을 잡고 죽는데, 서양 사람들은 마치 괴테의 죽음처럼 빛을 찾으며 죽어간다.
이렇게 한민족은 손의 민족이요, 또 한문화는 손의 문화다. 그 손재간을 겨루는 세계 기능 올림픽에서 우리 청소년들이 6연패를 거둔 사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손재간이 좋다는 손의 문화의 연례적 증명이랄 수 있을 것이다. 서양 조종사들은 자극을 받아 작동할 때까지, 자극->지각->판단->조작->작동하는데 5.4초가 걸리는데, 우리 한국 조종사는 4.2초로 자율 신경(自律 神經)이 상대적으로 발달돼 있다 한다. 또한 손재간을 관장하는 장장근(長掌筋) 발달도 뛰어나고 물체의 `감(勘)'을 잡는 뇌량(腦梁)기능도 가장 발달돼 있다 한다. 이렇게 이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기능력(技能力)을 가졌는데 왜 메이드 인 코리아의 품질(品質)들은 그토록 형편없을까-.
그릇된 의식 구조가 농간하기 때문이다. 그 농간 요인에 관심을 집중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85/10/29
수성(守姓)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왕실(王室)에서 경영하는 호텔이 있다. 그 호텔 안에 일본 사람이 주인이요 주방장이기도 한 소문난 스끼야끼 집이 있었는데, 그 이름이 금옥(金屋:공야)이었다. 주인의 성(姓)이 금가이기에 옥호를 금옥이라 지었다 하길래 혹시 선조가 한국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얼싸안고 반기면서 자기 선조는 천여 년 전 기옥현(埼玉縣: 사이따마껭)에 귀화해 살기 시작한 한국의 김씨(金氏)로, 성(姓)을 절대로 바꾸지 말라는 엄한 가풍(家風)이 대대로 계승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했다. 같은 핏줄이라는 이유로 공짜 스끼야끼를 푸짐하게 대접 받았던 생각이 난다.
그 후 돌아와서 일본 문헌을 뒤져보았더니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성무(聖武)5년(733) 일본 무장국(武藏國) 기옥현의 신라 사람 남녀 53명이 성(姓)을 금(김)씨로 해줄 것을 청원하여 허락했다는 대목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아마 그 스끼야끼 금씨는 그 신라인의 후예가 아닐까 싶었다. 이렇게 일본에 귀화해 살면서 한국성을 지킨 사람은 적지 않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납치돼 가 구주(九州) 녹아도(鹿兒島: 카고시마)에 귀화해 살았던 도공(陶工) 22성받이도 지금까지 한국성을 지키고 있다. 우리 나라에 적지 않이 알려진 심수관(沈壽官)도 그때 귀화한 22성 중의 한 姓바지의 후예요, 일본의 희곡작가인 강위당(姜魏堂)이라는 이도 그 성바지의 후예이다.
심수관의 집에 대대로 전래된 한글 소설 `숙향전(淑香傳)'의 사본이 있는데, 그 책갈피에 안정(安政) 3년(1856)에 이 책을 빌어 읽었다는 박수승(朴壽勝)이라는 이의 사인이 적혀 있다. 이 분도 바로 그 도공의 후예로 2차 대전 중 일본 외무 대신을 지냈던 동향무덕(東鄕茂德)의 친아버지다. 그 아버지대까지 수성(守姓)을 하고, 한국을 전수시켜 읽을 수 있게 했으니 대단한 집념이 아닐 수 없다.
본성대로 수성을 하지 못할 양이면 나라 이름을 성으로 삼기도 했다. 고구려 유민은 `고려(高麗)'나 `오(吳:句麗)', 백제 유민은 `백제(百濟)', 신라 유민은 `신양귀(新良貴)'로 성을 삼았고, 백제 왕족의 유민은 왕성인 부여(夫餘)에서 `여'자만을 떼어 성을 삼기도 했다.
또한 남원양씨(南原梁氏)는 `남원(南原)'으로, 충주박씨(忠州朴氏)는 `중원(中原:忠州의 옛 지명)'을 본관으로 따서 성을 삼기도 했다. 일본의 대표적 고전인 `만엽집(萬葉集)'에 한국 사람 이름이 많이 나오는데 장씨복자(張氏福子), 고씨해인(高氏海人), 전씨진인(田氏眞人)등 본성에 `씨(氏)'를 보탠 성(姓), 또 이가정문(일본작가)처럼 본성에 `가(家)'를 가해 성을 삼음으로써 수성(守姓)하려는 끈질긴 집념을 엿볼 수가 있다. 일본 사람에 비해 혈통 관념이 별나게 강한 이유도 있겠지만 문화(文化)적으로 보다 우세했고 또 일본 사람에 대해 선민 의식이 있었기에 수성(守姓)하려는 추세가 수천년 지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일제(日帝) 때부터 수성 풍조가 시들해진 것은 그 선민 의식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한데, 아버지 때 일본에 귀화, 일본성을 가진 한 교포 청년이 한국성(韓國姓)을 다시 찾는 법정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는 뉴스를 들으니 젊은 세대간에 수성 풍조가 부활하고 있지 않나 싶어 뿌듯해진다.
85/10/30
맹인 차관
스웨덴 하면 백야(白夜), 바이킹, 노벨상, 다이너마이트, 스웨덴 자수(刺繡), 중립 외교(中立 外交), 성 해방, 사회 보장 등등이 연상되게 마련이다.
근년에는 복지 사회가 어떻게 뻗어나갈 것인가의 실험국(實驗國)으로 예상외의 일들이 자주 벌어지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수년 전 30대의 노동 장관(勞動 長官) 페르 알마르크가 갑자기 사표를 냈었다. 그는 국회 의원을 겸임한 집권당의 요직에 있는 분이기도 했다. 신문 기자들이 달려가 영문 모를 사표를 낸 이유를 묻자, `아내와 이혼한 후 국민학교에 다니는 두 자녀를 기르는데 장관직과 의원직을 지탱해낼 수 없어서 일체의 정치로부터 손을 뗀 것이다'고 말했던 것이다.
육아(育兒)를 위해 장관직을 그만둘 수 있는 나라가 복지(福祉)의 실험국 스웨덴인 것이다. 하기야 남학생에게까지 가사(家事)와 육아를 필수과목으로 가르치고 있는 나라이기에 대수로운 일이 아닐지 모르지만 우리가 듣기에는 예상 밖의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데 이번에도 예상밖의 일이 그 실험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40대의 맹인(盲人) 뱅트린트 크리스트를 사회부 차관(社會部 次官)으로 발탁 임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암시해 주기도 한 그런 비범사(非凡事)이기도 하다. 서양 사회에서 눈이 안 보인다, 말을 더듬는다, 다리 하나가 없다... 하는 장애 인간은 한국 사회에서처럼 소외받거나 동정받는 결격 인간이 아니라 음치다, 그림을 못 그린다, 술을 못 마신다는 것과 같은 개성이나 능력(能力)의 차원에서 생각하기에 소외받지도 또 동정 받지도 않는다.
곧 노래 못하는 사람이 차관(次官) 못 되라는 법이 없듯이 앞을 못 보는 사람이 차관(次官) 못 되라는 법이 없는 그런 사회인 것이다. 미국에서 목발 짚은 신체 장애아가 야구 놀이를 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너는 발이 있어 잘 달릴 수 있으니까 타자로, 나는 발이 없어 달릴 수 없으니까 캐처가 된 것뿐이다. 우리 나라처럼 그 때문에 소외되고 우울해질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또한 인체에는 어느 한 부위에 결함이 생기면 다른 부위가 발달하는 보상 작용이 있어 장애자가 범인(凡人)보다 출중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장님 시인(詩人) 호머는 장님인 것을 만족하고 죽어갔다. 논어(論語)-맹자(孟子)에 이은 고전(古典)인 `좌전(左傳)'도 맹인이었던 좌구명(左丘明)의 실명 보상의 소산이었다. 19세기의 명피아니스트 톰 비긴스는 앨라배마 노예의 아들로, 보상 작용으로 민감해진 청력(聽力)때문에 기적의 대성(大成)을 하고있다. 만년에 실명(失明)한 사르트르는 `나는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다. 하지만 이전에 생각 못했던 새 천지가 전개되고 있다. 보다 일찍 실명(失明)했더라면 하는 생각마저도 든다'했다. 맹인 차관도 앞을 못 보기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상받은 그런 분일 것이다.
85/10/31
못 기다리는 한국인
기다리는 데 유태인들 만큼 끈질긴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예멘에 이산돼 살았던 유태인들은 2천 년 가까이 외부의 문명 세계와 격리된 채 언젠가는 약속의 땅에 돌아갈 것을 기다리며 살아왔다. 한데 어느 날 그 약속의 땅에 자기네들의 조국이 세워 졌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들었다. 2천 년 동안 기다렸던 그 약속이 실현됐음을 안 5만여의 유태인들은 손에 들고 등에 질 수 있는 생활 도구만을 들고 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부동산이나 가산은 그 자리에 버려둔 채-. 그리하여 약속된 땅, 팔레스타인을 향해 남부 여대(男負 女戴)하고 바위 산을 넘어 사막을 가로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정부에서는 당황하여 군용 수송기를 총동원, 이들을 조국까지 운반, 사상 최초이자 최대의 민족 공수 대이동(空輸 大移動)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들은 이 하늘의 민족 대이동을 두고 `성서에 쓰여 있는 것 처럼 바람의 날개를 타고 약속의 땅에 돌아왔다'고 합리화했다 한다. 마치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버스가 당도하니까 타고 가는 그런 식으로 2천년을 기다렸던 것이다.
한데 이번에는 약속의 땅에 조국이 세워 졌는데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여 다시 50년을 더 기다렸던 소련의 유태인 40만 명이 `바람의 날개'를 탄 대이동이 시작될 것이라 한다. 이날을 기다려서 2천여 년.... 우리 나라로 치면 삼국 시대 초기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되니 기다림의 체질에 외포감마저도 든다.
유태인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도 대체로 잘 기다린다. 소설 `레 미제라블'로 유명해진 파리의 지하 수도(地下 水道)를 관광하려면 무려 3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미국의 소문난 구경 거리도 그 만큼은 기다리는 것이 상식이다. 그것을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는 장사진을 보면, 기다리지 못하는 우리 한국인의 눈에는 바보스럽기까지 하다. 스타인벡은 그의 `미국인론(美國人論)'에서 미국 사람들은 잠자지 않는 시간의 3분의 1을 기다리는 데 낭비한다고 지적해 놓고 있다. 인도에서 기차 여행을 하다 보면 기관사(機關士)가 친지를 우연히 만나 시장에 가서 늘어지게 점심을 먹고 올 때까지 승객들은 한마디 불평없이 기다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기껏해야 5분, 10분 기다리면 되는 줄을 못 서서 새치기 하고 5초 10초 못 기다려서 차선을 바꾸는 우리 한국인의 못 기다리는 체질이 비교가 된다. 요리하는 시간마저도 못 기다려 인스턴트 식품이 판을 치고, 노름을 해도 `뻥'이나 `섰다' 따위의 단판 승부로 끝낸다. 약도 즉효(卽效)약을, 돈벌이도 한 탕으로, 벼슬도 벼락 감투를 노림으로써 기다림을 배제한다. 옛 공장(工匠)들은 불상하나 만드는 데 10년 공들이고, 10년 조각을 했다던데 왜 이렇게들 성급해졌는지 모를 일이다. 유태인 만큼은 못 되더라도 좀 느긋해져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85/11/1
아직사(阿直史) 목간(木簡)
5-7세기 일본의 서울인 비조(飛鳥=明日香: 아스카)의 문화를 백제, 신라, 고구려의 귀화인들이 구축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나 그것을 입증하는 물증이 근래에 자주 발굴되어 이론(異論)의 여지를 말끔히 씻어주고 있다.
수년 전 바로 그 아스까村에서 고구려 고분 벽화와 똑같은 화법의 고송(高松) 벽화 고분이 발견된 이래 발굴되고 출토된 유적이나 유물이 동시대의 한국 문화와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최근만 하더라도 4세기 후반의 일본 고송(古松)이 발굴되었는데 이론을 붙이질 않고 고구려의 전형적인 장방형 적석총(長方形 積石塚)임을 일본학계가 솔직하게 공인하고 있다.
이번에는 역시 아스까村의 옛 왕궁터 `비조판개궁(飛鳥板蓋宮)'에서 일본에 학문을 도입한 백제 학자 아직기(阿直岐)의 후손 아직사(阿直史)의 이름이 새겨진 목간(木簡)이 출토되고 있어 아직기가 실재(實在)했는가 확인할 수 없다는 인색한 일본학계의 풍조에 된서리를 내리고 있다.
일본의 고대사(古代史) 문헌(文獻)인 `일본서기(日本書記)'에 보면 3세기 말께인 응신천황(應神天皇) 15년에 백제왕이 아직기로 하여금 암수 두 마리의 말을 선물로 보내왔는데 아직기가 경전(經典)에 통하여 태자의 스승으로 모셨다 했다. 또 일본 임금이 그에게 묻기를 학문에 능통한 분이 너희 나라에 누가 있느냐 물어 왕인(王仁)이라는 박사(博士)가 있다 하자 사람을 보내어 왕인을 모셔온 것으로 돼 있다. 바로 아직기가 온 이듬해의 일로 왕인이 `일본 학문의 시조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역시 일본 고대(古代)문헌인 `고사기(古事記)'에는 아직기가 올 때 말 두 마리와 `논어(論語)' 10권, `천자문(千字文)' 1권을 같이 갖고 왔다 했으니 학문 전래의 시조는 아직기랄 수가 있다.
그 후 후손들의 성(姓)을 보면 아직사, 아직련(阿直連), 아지사주(阿知使主)등으로 나오는데 성 끝에 붙은 `사(史)(후히도)'는 귀화인에게 붙이는 통성(通姓)이요, `연(連)(무라지)'은 높은 벼슬아치로 일정한 직무를 세습하는 상류층의 통성이며 `사주(使主:오미)'는 당시 귀족의 통성이다. 그렇다면 아직기의 후손은 귀화인 신분에서 벼슬아치 신분으로, 그리고 귀족 신분으로까지 발돋움하고 있음을 그 성(姓)바지로 알고도 남음이었다.
이번에 출토된 목간(木簡)에 새겨진 성(姓)은 아직사요, 이름은 우족(友足)으로 돼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기의 후손이 영달하기 이전의 인물인지, 또는 영달하지 못했던 지손(支孫)인지 알 길은 없다.
다만 이번 목간이 출토된 비조 왕궁 바로 이웃에 `아지신사(阿知神社)'라는 백제 귀화인 아지(阿知)(阿直)氏 시조를 모시는 신사(神社)가 있다는 사실로 묵과할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일본 학자들 가운데는 `일본서기(日本書記)'나 `고사기(古事記)'같은 고대사(古代史) 문헌은 신빙할 수 없다 하여 일본 고대 문화의 한국 색채를 인정하는 데 인색하기 이를 데 없는데 이번 아직기의 후손 이름이 새겨진 목간출토(木簡出土)는 더 이상 인색할 수 없게 하고 있다.
85/11/2
고래잡이 애사(哀史)
11월 1일을 기해 수백 년간 이어 내려온 우리 나라의 고래잡이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남획으로 멸종돼 가는 고래를 보호하기 위한 국제 포경(捕鯨) 위원회의 결정에 따른 것이라 한다.
따지고 보면 고래는 `고래(苦來)'라고 비꼬아 표기했을 만큼 우리 역사에서 고통을 몰아온 짐승이었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고래의 고기나 거죽이나 기름보다 고래 눈깔 때문에 `고래'였다. 중국 고대 문헌에 보면 고래 눈깔은 빛을 내어 밤을 밝혀 주기에 왕실-귀족의 보물로서 변방 해변국에 조공을 강요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래에 대한 우리 나라 기록도 고구려 알천왕(閼川王) 때(AD 47) 동해에 사는 고주리(高朱利)라는 사람이 밤에도 빛을 내는 고래 눈깔을 바쳤다는 것을 최초로, 그 후에도 조명(照明)용의 고래 눈깔을 바친 기록이 서천왕(西川王) 때(288)도 나온다.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이 고래 눈깔이 중국에 수탈당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고려에 들어서는 원(元)나라가 사신을 자주 보내어 동해안을 직접 돌아다니며 고래 기름을 수탈해 갔다는 기록이 있다. 누구라 수탈당할 것을 알면서 애써 고래를 잡을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관리의 수탈이 대단해서 역시 `고래'의 숙명을 못 벗어나고 있다.
조선조 후기의 실학 문헌(實學 文獻)인 `임원경제십육지(林園經濟十六志)'에 보면, 이따금 고래가 죽어서 바닷가에 표류해 오면 관에서 이를 알고 많은 사람을 징발, 도끼로 고래 수염과 거죽과 살을 잘라내어 지게와 말 등에 실어 날라가니, 그로서 얻은 천금(千金)을 관이 온통 수탈해가고 백성들은 노역에 시달리기만 하고 얻는 것이 없으니, 아무도 고래 잡는 법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 했다. 심지어 죽어 떠내려 온 고래가 생기면 그 `고래'를 면하기 위해 애써 고을 밖으로 끌어낸다고도 했다.
한말에는 러시아 남하(南下) 정책의 일환으로 고래가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1830년 경부터 러시아 포경선이 동해를 횡행하여 동해안 항구를 무단 출입하더니, 드디어는 러시아 포경 회사 사장인 헨리 케젤링 백작이 한국 조정에 압력을 넣어 마양도(馬養島) 장전(長箭) 장생포(長生浦) 세 군데에 포경(捕鯨) 기지를 구축하기까지 했다. 거기에 영국 포경선, 일본 포경선이 각축을 하여, 외세의 소용돌이를 몰고 온 고래이기도 했다.
이 장생포에서 허약하게 싹튼 한국 고래 잡이가 겨우 1백 년 만에 다시 종지부를 찍게된 것이다. 로비가 활발한 일본과 소련은 국제 포경 위원회의 금지령에 이의를 제기, 88년까지 고래잡이를 할 수 있게 됐다던데 우리만이 앞당겨 못 잡데 된 것을 현지 어민들이 원망하고 있다 하니, 종지부를 찍으면서까지 끈질기게 `고래'를 못 벗어나는 한국의 고래다.
85/11/3
스포츠 내셔널리즘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세력이 들어가기 이전의 남미(南美)에는 이웃하고 사는 종족(種族)끼리 1년에 한 번씩 날을 정해놓고 정해진 고지(高地)에서 전쟁(戰爭)을 벌이는 습속이 있었다 한다. 약속된 시한 전쟁(時限 戰爭)인 것이다. 물론 수십 명씩의 부상자가 나오고 더러는 죽기도 하는 격렬한 싸움이었다.
한데 언젠가부터 포르투갈 상인(商人)에게 총(銃)을 사들여 이 약속된 전쟁이 총격 전으로 변해 갔고, 사상자가 수십 명으로 늘어가자 약정을 맺고 이 악습을 폐지해 버렸다. 폐지해 버린 이후부터 각 종족 내부에 이전에 없던 일들이 잇달아 일어났던 것이다.
불평과 불만이 분열과 불화를 몰아오고, 반목과 갈등이 소용돌이 쳐 서로가 이리가 되어 종족(種族) 존립을 위태롭게 까지 했으며, 그 틈을 타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아무런 저항도 받질 않고 야금야금 먹어들었던 것이다.
약속된 전쟁은 악습(惡習)이 아니라 내부에 팽배된 불평-불만-불화-분열-반목-갈등을 일년에 한 번씩 외부로 분출시킴으로써 종족의 단합을 다지는 양습(良習)이었던 것이다.
우리 나라 대보름날 편쌈(石戰)도 그렇다. 적의(敵意)를 갖게 마련인 이웃 마을과 돌 팔매질을 하고 불덩이를 던지며 맞싸우는 이 편쌈은 격렬하기 이를 데 없었다.
특히 서울 만리현(萬里峴)에서 해마다 벌어지는 성안(城內)편과 성밖(城外) 편의 편쌈에는 의례히 사상자가 있게 마련이었다. 고구려 때에는 임금이 지켜 보는 가운데, 이웃 고을끼리 편싸움을 맞붙이기도 했다. 사람이 죽고 다치는 이 편싸움이 이렇게 수천 년간 지켜져 내려온 데는 이 같은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분출시켜 촌락 공동체의 단합과 결속을 노리는 저의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스포츠의 기원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오르테가 이 가세트에 의하면, 바로 부족(部族) 결속의 수단이었던 약속된 전쟁이 스포츠 경기(競技)로 발전한 것이며, 고대 올림픽도 희랍의 부시 국가(部市 國家)들이 폐르시아 대적(大敵)이 생기면서 부터 단합할 필요에서 생겨난 것이라 했다.
곧 스포츠 내셔널리즘은 바로 스포츠 발생 원인이었다. 어제 그제 월드컵 한(韓)-일(日)축구가 진행되는 동안, 전국의 모든 활동이 일시 중단됐다 할 만큼 이목(耳目)이 집중되었고, 시어머니와 며느리, 여(與)와 야(野), 그리고 콩쥐와 팥쥐, 흥부와 놀부, 고양이와 쥐까지도 이 시간만은 한마음이 되어 열광했던 것이다. 원초적인 스포츠 내셔널리즘을 실감케 해준 일전이었다.
85/11/5
은초록 카드
옛날 시골에서 돈을 추렴, 돼지 한 마리 잡으면 살코기는 추렴한 사람이 나누어 갖지만, 내장(內臟) 고기는 추렴한 사람이 못 갖게 끔 불문율이 돼 있었다. 왜냐하면 그 내장은 한 마을에 사는 환갑 지난 노인들에게 똑같이 배분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경로(敬老)습속을 `배장(配臟)'이라 했다. 비단 돼지뿐 아니라 노루다 멧돼지 같은 산짐승을 잡아도 내장만은 노인들의 몫이였다.
마음 훈훈하게 하는 경로 습속은 그 밖에도 비일비재하다. 이를테면 `복곡(福穀)'이란 것도 그것이다.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 몫으로 일정량의 곡식을 내어 이곡(利穀)을 놓는다. 이 이곡은 아이가 자라면서 복리(複利)로 커 나간다. 그러다가 마을에 살기 어려운 노인, 병든 노인, 자식이 죽은 노인이 있으면 이 곡식으로 구제를 한다. 이렇게 하면 그 아이가 복을 받는다 하여 `복곡(福穀)'이라 불렀던 것이다.
선조(宣祖) 때 학자 이준(李埈)의 `향소계목(鄕老契目)'을 보면, 계(契)를 모아 두었다가 일정 연령 이상의 마을 노인이 돋보기나 장죽, 갓, 신발 같은 노인 대용품을 살 때면, 그 값의 반액을 계돈으로 보태어 주기로 약정이 돼 있다. 새우 젓장수나 무시로 (日用品) 장수가 물건을 팔 때 그 집에 70세 이상 된 노인이 있는 것을 알면 `수누리'라 하여 제 값에서 1할 내지 2할의 에누리를 해 주는 것도 상인의 도리가 돼 있었다. 수(壽) 에누리의 준말인 지 수(壽)를 누리라는 축원의 뜻인지 알 수는 없다. 소금 장수도 70노인이 있는 집은 덤으로 두어 줌 더 얹어 주곤 했다. 그리해야 재수가 붙는 것으로 통념화 돼 있었던 것이다.
옛날 감옥에 갇힌 죄인들은 주로 짚신을 삼아 팔았는데, 60세 이상 된 노인이 이 옥혜(獄鞋)를 사러 오면 3할 감해 파는 것이 관례가 돼 있기도 했다. 죄수들도 노인을 위해서는 이(利)에 연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근대화가 이 미풍(美風)들을 태풍처럼 쓸어 버려 삭막한 오늘날이게 했다. 한데 보도된 바로 몇 뜻있는 분들이 이 미풍(美風)을 되살리고 있어 눈물겹다. `은초록(銀草綠)카드'로 불리는 노인 할인 카드를 발부하여 이 카드를 가진 노인에게는 돋보기 같은 노인 용품과 한약 같은 약값을 20-50%씩 감해 받게 끔 가맹점을 설득, 늘려가고 있다 한다. 지금은 가맹점도 적고 카드 이용 회원도 2백 명에 불과하다지만 이 씨앗이 땅에 떨어져 그 아름답던 전통에 접목되어 전국에 은초록 빛의 초원이 펼쳐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거대한 로마 제국(帝國)이 망한 이유가 젊은이들이 노인을 멸시한 때문이라는 막스 베버의 저적이나, 그 거대한 통일 천하 진(秦)나라가 망한 것도 역시 젊은이들이 노인(老人)을 저버린 데 있다는 목공(穆公)의 지적이 옛날의 진리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85/11/6
독 포도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스위스 알프스에는 조그마한 포도주 술통을 목에 건 개를 겨울 산속에 놓아 길렀다 한다. 산행하다가 지쳐 쓰러진 조난자가 생기면 이 개의 후각(嗅覺) 레이다에 걸리게 되고 개가 달려가면 목에 걸린 생명수(生命水)인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기운을 차리게 하는 원시적이면서 효과적인 조난 구제 방법이었던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감기나 웬만한 속병에는 포도주로써 약을 삼는 민간 요법이 있었고 포도주나 꼬냑을 주사액으로 쓰기도 했다 한다.
포도주를 `생명수'라 부른 이유가 이에 있으며, 영국에 빼앗긴 프랑스의 포도 주산지(主産地) 보르도를 탈환하기 위해 백년 전쟁(百年 戰爭)을 치러낸 이유도 알 만해진다. 포도주 없는 식탁(食卓)을 목 없는 여자로 비유할 만큼 애용했기에 독살(毒殺)의 수단으로 십상이어서 빈도 높게 악용된 술이기도 했다. 독 포도주로 살해 당한 임금님만 하더라도 빅토르 2세, 크리스토로프 왕, 크레멘스 7세, 앙리 4세, 하인리히 7세...등을 들 수 있다. 서양 사람들 한 병 술을 나누어 따라 건배(乾杯)하는 습속도 독주(毒酒)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상대방을 안심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설까지 있다.
물론 이런 것들은 고의(故意)적인 독 포도주이지만 전혀 고의성이 없는 독 포도주가 이웃 일본에 널리 유포되었다 하여 발칵 뒤집어져 메이커가 거둬들이는 소동을 벌이고 있다더니 이번에는 미(美) 연방 정부에서도 이 독성이 든 미국산 포도주 4종을 적발하고 있다. 이에 지난 3일자 성조지(星條紙)는 이 4종의 포도주(리유나이트 비앙코, 로사토, 랑브루스코 멜 아멜리아, 스퓨만테)가 주한 미군을 통해 한국내 상점이나 술집 또는 가정에 유포돼 있을 것이라고 보고있다. 유럽산 포도주는 무려 68종이, 일본산 포도주는 5종이 유독 물질이 들어 있음이 판명되고 있으니, 외산 포도주를 마실 때는 잘 가려 마셔야 할 것 같다.
이 독(毒)이란 포도주 원액(原額)에 들어있는 부동액(不凍液) 디에틸렌 그레콜로 몇 병 마셔서는 괜찮지만 계속해 마시면 만성 독성으로 간장과 신장에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이백(李白)이 `양양가(襄陽歌)'에서 읊었듯이 한수(漢水)를 곡자로 둑을 막고, 떼오리(群鴨) 머리 같은 포도로 술을 빚어 1일 3백 배씩 마신다면 당장에 죽을 독(毒)이긴 하다.
당장의 실험으로 무해하다 하여 식품에 가공하거나 첨가하는 화학 물질 중 쌓이고 쌓이면 해독을 줄 수 있는 것이 어찌 이 포도주의 부동액뿐 일까...하는 생각마저도 든다.
85/11/7
비만 재판
`평균 여자의 허리 둘레와 평균 남자의 팔 길이는 똑같다. 이것만으로도 사람을 만든 신(神)의 조화(調和)에 머리가 절로 숙여진다.' 희랍의 희극 작가(喜劇 作家) 아리스토파네스가 발견해 낸 포옹의 법칙(法則)인 것이다. 미터 법으로 측정해 보면, 여자의 허리나 남자의 팔 길이는 70cm가 된다. 그렇다면 고대(古代) 희랍의 여인들은 안으면 한아름이 되는 풍만한 육체의 소유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양에서 추앙받는 미로의 비너스상도 가슴 94cm 허리 66cm 히프 96cm의 풍만한 여체다. 비너스 상이 허리를 꼬고 있기에 66cm이지, 허리를 펴면 70cm가 될 것이므로 이상적인 여체(女體)의 허리에 부합이 된다. 요즈음 미스 월드의 평균허리 둘레인 60cm에 비하면 비만(肥滿)한 편이다.
매시앙 남작이 쓴 `클레오파트라'에 보면 `어떤 장사도 내 몸을 안아 들고 갈 수 없듯이, 로마도 이집트를 들고 갈 수 없을 것이다'라는 클레오파트라의 독백으로 비만한 미녀(美女)였을 것을 유추케 하고 있다.
미녀는 이만큼 풍만해야 했다는 것은 동서양이 다를 것이 없다. 나라를 기울게 한 양귀비를 보아 보자.
`매비전(梅妃傳)'에 보면, 같은 후궁이었던 梅妃가 양귀비를 두고 말버릇 처럼 `비비(肥婢:살찐 종년)'라고 매도했다 한다. `당서(唐書)'에도 양귀비의 체모를 `자질 풍염(姿質 豊艶)'이라 하여 비만 체질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현종(玄宗)이 시인(詩人) 이백(李白)을 불러 양귀비를 찬양하는 시를 짓게 했는데 그 가운데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었다는 한(漢)나라 때 가냘픈 미인 비연(飛燕)에게 비긴 대목이 있었다. 그것이 당치않다고 하여, 양귀비가 이백을 무척 미워했다는 것을 미루어 보면 양귀비는 풍만한 자신의 육체에 자부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 전통 사회에서도 바스트가 빈약하면 아이 기를 젖이 없다 하고, 웨이스트가 가늘면 아이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하고, 히프가 빈약하면 행실이 가볍다 하여, 비만하지 않으면 무자무덕상(無子無德相)으로 며느리감에서 소외 받았던 것이다. 적당히 비만해야 부잣집 맏며느리감이라 하지 않았던가-. 아름다울 `미(美)'자를 뜯어 보아도 크고 살찐 양(羊)이란 뜻이다.
지금 미국에서는 21세의 간호 대학 학생이 너무 비만하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한 것이 불씨가 되어 `비만 재판(肥滿 裁判)'이 벌어지고 있고, `패트 이즈 부티풀(비만은 아름답다)'를 내세운 비만인 원호 단체가 궐기, 사회 운동으로 번지고 있다 한다. 비만한 여우(女優) 마릴린 먼로와 제인 맨스필드도 회원이었고 의회를 비롯 선거에도 영향을 크게 끼친다는 이 원호 단체이기에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하기야 이 학생이 자그마치 1백 35킬로그램이라니, 뷰티풀과는 거리가 먼 것 같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요즈음 미의 기준에서 생긴 거리일 뿐이지, 절대적인 기준은 아닌 줄 안다.
85/11/8
손자의 용간법(用間法)
임진왜란 때의 일본 첩자(諜者)에 대해 유성룡(柳成龍)은 그의 `징비록(懲毖錄)'에다 이렇게 적고 있다. 평안도 안주(安州)에서 평안 수사(平安 水使)에게 보내는 밀서(密書)를 한 군관(軍官)에게 들려 보냈다. 한데 이 군관은 강서(江西)의 병졸인 김순량(金順良)에게 술 값을 주고 대신 밀서를 전달하도록 시켰다. 일본 첩자의 앞잡이였던 김순량은 수사(水使)에게 갈 밀서(密書)를 왜장(倭將) 소서 행장(小西 行長)에게 갖다 바치고, 그 보상으로 암소 한 마리를 얻고 있다. 이 간첩(間諜) 사건이 실마리가 되어 조사를 했더니 왜장 소서 행장은 1백여 명의 인자(諜者)를 대동하고 조선 땅에 왔으며, 이 인자(忍者)들에게 매수된 조선 백성과 병사가 무려 40명으로 그동안 조선 쪽의 전략(戰略)-병력(兵力)-군량(軍粮)이동 등을 샅샅이 밀보, 풍요한 보수를 받아 잘살고 있음을 적발 해냈던 것이다.
병법(兵法)으로 유명한 `손자(孫子)'의 용간편(用間篇)에 보면, 간자(間者:첩자)에는 향간(鄕間), 내간(內間), 생간(生間), 사간(死間). 반간(反間) 등 5간이 있는데, 향간이란 적의 영토내에 사는 적국(敵國)의 사람을 간첩으로 이용하는 것이요, 내간은 적국 병사(敵國 兵士)나 관직에 있는 사람을 간첩으로 이용하는 것이라 했다. 곧 임란 때 적발된 김순량 등 40여 명의 간첩들은 향간(鄕間)과 내간(內間)이었다 할 수가 있다. 반간(反間)은 적의 간첩을 역이용하는 이중 간첩(二重間諜)을 생간(生間)은 적국(敵國) 사람인 체 위장하고 침투해 있는 간첩을 뜻한다. `일목 서기(日木 書紀)'에 보면, 이미 6세기에 신라의 생간(生間)이 일본에 침투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통일이 무르익을 무렵 신라에 침투, 화랑(花郞)으로 위장하고 있다가 김유신(金庾信)을 유인, 월북하려 했던 고구려 간첩 백석(白石)도 생간(生間)이랄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신라의 충신(忠臣) 박제상(朴堤上)은 사간(死間)이다. 일본에 인질로 잡혀간 왕자(王子) 미사혼을 탈환할 임무를 띠고 일본에 숨어든 박제상(朴堤上)은 왕자에 접근할 필요에서 `신라 임금이 난폭하여 소신(小臣)의 부모 형제를 죄 없이 잡아 죽였다'고 위장으로 자수하여, 끝내 왕자를 신라로 돌려 보내고, 자신은 떳떳하게 잡혀 죽고 있다. 이 같은 위장 간첩을 사간이라 했다.
지금 미국을 발칵 뒤집어 놓고 있고 온 세계의 화제 거리로 소용돌이 치고 있는 소련 간첩 유르첸코는 반간(反間)인지 사간(死間)인지 마냥 아리송하기만 하다. 더우기 소련 대사관에 망명하기 전에 유르첸코와 밀회(密會)를 했다는 캐나다의 연인(戀人)이 망명과 동시에 죽고 있으니 표면에 나타난 것과는 전혀 다른 복잡한 복선(伏線)이 맥락돼 있다는 것만을 감지할 수 있을 따름이다. `손자(孫子)'에 보면 `間者'가 쥐고 있는 비밀이 통보 이전에 간자(間者)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는 자는 그 비밀을 누설한 간자(間者)와 더불어 살해 되지 않으면 안된다'했으니, 캐나다 연인의 죽음도 이 손자의 용간법(用間法)에 전혀 무관하지 않은 것만 같아 더욱 그렇다.
85/11/9
살아속(殺兒俗)
동부 아프리카에는 나이 세 살만 되면 저 먹을 것을 찾아 밀림을 헤매지 않으면 못 사는 원시적 채집(採集)종족이 있다 한다. 이 지구 최후의 부시맨인 튜소 족의 아이들은 항상 기아(棄兒) 상태이며 기근이 들거나 양식이 부족하거나, 부족 이동(移動)을 할 때면 이 아이들은 죽여버리는 것이 관습적으로 합법화 돼 있다고 영국의 인류학자 덤벌 박사가 충격적인 보고를 하고 있다. 이 같은 살아속(殺兒俗)은 종족 보존을 위해 인구 조절을 할 필요가 있는 고대 사회에서는 별반 비정(非情)적인 관습이 아니었던 것 같다.
옛 송 나라의 악악(岳鄂)에 사는 사람들은 2남 1녀 이외의 아이를 더 낳게 되면 그 아이를 물에 잠겨 질식시키게 끔 관습이 돼 있었다 한다.
비록 습관화돼 있진 않았지만, 우리 나라에서도 이 살아속(殺兒俗)이 효도와 맥락이 되어 자행된 시대가 있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보면 신라 경주의 무량리에 사는 손순(孫順)이라는 사람은 빌어온 밥을 두고 노모와 어린아이가 서로 다투는 것을 보고 `아이는 또 낳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얻을 수 없는 것인데 아이 때문에 어머니를 굶길 수 없으니 아이를 묻어 죽이자'고 아내를 설득, 아이를 업고 나간다. 이 같은 살아속은 한국 설화의 한 유형(類型)으로 적지 않이 채집되고도 있다.
조선왕조 때 함경도 변경 지방에 유배됐던 유계(兪棨)의 `시남집(市南集)'에도 이 살아속의 목격담이 눈물겹게 적히 있다. 아이를 낳으면 딸인가, 아들인가를 확인한다. 딸이면 인신상인(人身商人)에게 무명 몇 필을 받고 팔아 넘길 수 있지만 사내 아이는 액물이다. 먹여 살리기도 힘든데다가 변방이기에 낳자 마자 병적(兵籍)에 올랴야 한고, 종군할 나이가 될 때까지 일종의 병역유예세(兵役猶豫稅)랄 군보포(軍保布)를 바쳐야 하며, 각종 부역이 그 아이의 몫으로 가중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들기 전에 죽이는 것이 상습이 돼 있었다 한다.
`어머니가 둘러 업고 아버지가 구덩이를 파면 마냥 묻지 못해 울부짖는 광경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린다'했고, 들판에서 들려오는 곡성은 대개 살아(殺兒)하는 부모들의 울음이라 적고도 있다. 이 북관지방의 살아속은 역대 조정에 종종 거론되고 있으며 숙종 때에도 논의된 것으로 보아 근세까지 지속돼 내려왔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아들딸 가리지 말고 하나만 낳기를 강하게 규제하고 있는 중공에서 딸을 낳으면 은밀히 죽이는 살아속이 성행하고 있다고 외신이 보도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 못지 않게 남아(男兒)로 상속되는 혈통 관념이 강한 때문도 있겠지만 무상(無常)하다는 세상인데, 이 비인간적 습속만은 현대화된 채 이토록 유상(有常)한지 모르겠다.
85/11/10
의식 III
옛날 집안에 과거를 칠 자제가 있으면 까치집을 울안에 있는 나무에 옮겨 짓는 민속이 있었다. 까치는 서조(瑞鳥)요, 집안에 까치가 집을 지으면 과거에 급제한다는 속전(速戰)이 있었기에 인공적으로라도 까치집을 뜯어 옮겼던 것이다. 한데 뜯어 옮기고서 상록수인 전나무 잎 하나를 깃속에 꽂아 놓지 않으면 까치가 이 강제 이주 당한 집에 들어와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단 까치집뿐 아니라 나뭇잎 지고 없는 겨울 숲의 산새들 둥지속에는 파란 나무잎 하나씩이 들어 있게 마련이며, 독수리는 매일같이 이 푸른 잎을 갈아두는 습성이 있다고 관찰 보고되고 있다.
겨울 새둥지 속의 파란 나뭇잎 하나는 우리 인간 생활에서 녹색이 갖는 차원높은 의미를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과학적인 해석이 되고 있으나 그중 가장 설득력이 있는 해석은 푸른 나뭇잎에서 발산되는 `테르펜'이라는 물질이 갖가지 병원(病原)이 되는 미생물을 죽이고 견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떡갈잎에 떡을 쪄 먹고 소나뭇잎으로 송편을 빚어 먹는 것도 비단 그 향기를 즐기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이 나뭇잎에서 발산되는 물질이 창자속의 세균을 죽여 주기 때문이라 한다.
이 발산 물질은 비단 살균만 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이나 사고나 의식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물리적으로 흥분시켜 안절부절 못하게 한 새앙쥐를 삼나뭇 잎이 들어있는 상자 속에 넣었을 때와 삼나무 잎이 없는 상자속에 넣었을 때와는 그 흥분이 가라 앉는 속도가 판이하게 달랐다는 실험도 있다. 곧 나무의 발산 물질 가운데에는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고력을 돋구어주는 요인이 들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공자(孔子)가 제자들을 해(楷)나무 아래에서 가르친 것이며 석가(釋迦)가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成道)한 것이며 소크라테스가 플라타너스 나무숲길에서 사색한 것은 단지 그 나무가 볕을 가려주고 공기를 맑게 해 준다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진다.
찰즈 라이크의 `녹색 혁명(綠色 革命)'에 보면 환경에서 녹색이 감소되는 것과 인간의 미덕(美德)이 퇴화하는 것과는 분명히 정비례한다고 했다. 그는 이 미덕을 `의식III'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바로 규율, 근면, 질서, 정절, 사랑, 우애, 봉사, 시간엄수 같은 시민적인 미덕의 가치 의식(價値 意識)인 것이다.
세상이 살벌해지는 것은 `의식(意識)III'의 퇴화 때문이요, 곧 녹색 결핍이 그 중요한 유인(誘因)이라는 것이다.
열 갑절 스무 갑절이 있어도 부족한 우리 한국의 녹색 분량인데 그린벨트를 개발한다는 전근대적인 발상이 왜 나오는지 알 수가 없다.
85/11/12
감사 결핍증 II
유태인의 성전(聖典)인 `탈무드'는 감사(感謝)에 대해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이 세상 최초의 인간인 아담은 빵을 먹기까지 밭을 갈고 씨앗을 뿌려 가꾸고 거둬 들여서 이를 빻아 반죽하여 굽기까지 15단계를 거쳐야만 했다. 한데 지금은 빵집에 가서 빵을 사서 먹을 수가 있다. 빵을 먹기 위해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15단계의 일들을 많은 사람들이 대신해 주었기 때문에 빵을 먹을 때는 그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래선지 구약 성서를 믿는 기독교 회교 유태교 문화권에서는 밥 먹을 때마다 감사 기도를 잊질 않는다.
서양에서 빵 하나가 생겨나기까지 15단계를 거친다지만, 한국에서 밥 한 끼가 생겨나기까지는 88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 돼 있다. 몇 갑절 많은 사람들이 몇 갑절 많은 단계의 일을 대신해 주는데도, 우리 한국 사람은 밥 먹을 때 감사하는 법이 없다.
서양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가장 빈도 높게 쓰는 일상 용어 50개 가운데 감사하다는 말이 28%로 으뜸이라는 조사 보고가 있다. 옷 한 가지, 공책 한 권, 신문 한 장 살 때도 그들은 감사하다는 말을 한다. 우리 한국에서는 파는 사람이 고맙다는 말을 하는 데 비해 사는 사람이 고맙다고 말하는, 이 차이는 감사에 대한 깊은 철학이 있고 없고의 차이를 단적으로 노출시켜주는 것이 되기도 한다.
사실 파는 사람도 감사에 인색하다. 가게에 가서 물건하나 사 갖고 돌아설 때 감사하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또 오십시오'하고 이기적인 요구를 한다. 요즈음 아이들에게 노리개나 과자를 사주었을 때, `고맙습니다' 이전에 `신난다'는 말이 앞서게 마련이다.
택시 요금에서 거스름 돈을 받지 않고 내렸을 때 고맙다는 말을 하는 운전사보다는 아무 말 않는 운전사의 비율이 높고, 택시 정류장에서 바삐 구는 아가씨에게 차례를 양보했을 때도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경우가 듣지 못하는 경우보다 상대적으로 적다.
신이나 햇님에게 감사하건, 농부나 노동자에게 감사하건, 아버지-어머니에게 감사하건 감사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지금 감사하는 마음으로 테이프 레코더를 쓰는 아이와 감사하는 마음 없이 테이프 레코더를 쓰는 아이가 있다 할 때, 어느 쪽의 테이프 레코더가 오래가겠는가. 또한 나와 남과를 부드럽게 결속시키는데 감사는 가장 효과적인 윤활유요, 접착제인 것이다. 그것이 없는 풍토이기에 가정 파괴범 같은 조포 인간이 탄생되기도 한다.
서울 은평구(恩平區)에서는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고마움을 주고, 또 고마운 마음을 갖게 하는 고마움 주고 받기 운동이 실효를 거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 한국병(韓國病) 가운데 하나인 감사 결핍증(感謝 缺乏症)을 되뇌어본 것이다.
85/11/13
탄(嘆), 고추장 수입
사람의 혓바닥에는 쓴맛(苦) 단맛(甘) 신맛(酸) 짠맛(鹽) 매운 맛(辛)을 느끼는 미역(味域)이라는 게 따로 있다 한다. 한데 서양 사람들은 매운 맛을 느끼는 미역이 미개하여 한국 사람들이 느끼듯 하는 매운 맛의 진미와 묘미를 잘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희랍 시대 이래 근대까지 서양 사람들이 맛을 분류할 때 `4원미(原味)'라 하여 매운 맛이 소외돼 있었으며 맵다는 말이 따로 없이 화끈하다(hot)는 체감(體感) 용어를 차용(借用)하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우리 한국 사람에게 별나게 발달하고 서양 사람들에게 퇴화하되 없는 미역으로 `맛난 맛'이 있다.
맛난 맛이란 김치나 간장 된장 고추장 같이 푸욱 삭음으로써 우러나는 아미노산 맛이다. 발효음식 문화권(發酵飮食文化圈)에서만 맛볼 수 있는 맛으로 우리 나라는 가장 많은 맛난 맛의 음식이 발달한 왕국(王國)이다. 서양에서 동양의 간장을 제일 먼저 먹기 시작한 사람은 음식 사치로 소문난 루이 14세였다는데 간장에서 나는 특수한 향기를 즐겼을 뿐 그 발효 아미노산의 맛난 맛은 몰랐다고 한다. 지금 간장 먹는 서양 사람들이 늘고 있다지만 맛난 맛을 알아서가 아니다. 미국에서 간장 선전하는 TV 광고에 `이색향기(異色香氣)에의 모험(冒險)'이란 캐시 프레이즈가 나온 것으로 보아 여전히 향기(香氣)의 테두리를 못 벗어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발효음식 가운데 간장과 된장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먹어왔지만 김치와 고추장은 이 세상 딴 나라에 없는 우리 한국 고유의 아미노산 음식이었다. 내외 문헌을 대조해 볼 때 고추가 우리 나라에 도입된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0년대의 일로 이 외래 작물을 한국 발효문화에 소화시켜 `김치'라는 위대한 창조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 고추와 우리 된장 문화를 절충시켜 `고추장'이라는 역시 위대한 창조물을 만들어낸 것은 17세기 후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각 가문(家門)이나 고을마다 고추장 맛있게 담그는 비방(秘方)이 전해 내렸던 것이며 이미 19세기초의 문헌에 보면 순창(淳昌) 고추장과 천안(天安) 고추장이 특출나 팔도의 명물로 손꼽히고 있다.
이 발효 왕국(王國)의 위대한 발견품이 홍콩 태국 등 외국에서 수입되고 있다 하니 이 역조(逆調)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 건지 어리둥절해진다. 소금 탄 화학 간장으로 간장의 전통을 오염시키더니 이제 고추장 담그는 그 공력 하나 감당하지 못해 외국에서 한국의 고추장 시장까지 넘보게 했단 말인가.
이런 식으로 전통을 유린해 나간다면 이제 김치도 빈대떡도 수입해 먹고 바지 저고리도 외국 상표의 것을 수입해 입어야 하지 않겠는가.
고추장 수입 자체보다 수입을 가능케 한 우리 자신들의 몰골을 심각하게 되돌아 보아야 할 것 같다.
85/11/14
중 성 지
연전 보스톤에서 열렸던 국제(國際) 종이 심포지엄에서 조선 종이(韓紙)의 기능에 대해 외국 학자들이 높이 평가했던 사실이 생각난다. 한지(韓紙)는 자연과 인간을 유통시키는 이 세상에서 가장 친자연성(親自然性)의 인공물(人工物)이라는 지적이 그것이다. 전통적인 우리 한국집에서 조선 종이로 만든 장지문은 훌륭한 에어컨디셔너랄 수 있다. 유리 창문은 외기를 완벽하게 차단하지만, 장지문은 문을 닫고 있어도 공기 밀도의 작용으로 필요한 만큼 환기를 시켜 자동 조절을 해 준다. 방안에 습도가 높아지면 흡습력(吸濕力)이 강한 장지문의 한지가 과잉된 만큼만 습기를 머금었다가 건조해지면, 그 습기를 뿜어 쾌적 습도를 자동 조절 해 준다.
외계(外界)의 태양빛을 사람의 심신(心身)에 가장 쾌적하게 중화시켜 주는 것이 또한 조선 종이다. 유리처럼 그 모두를 받아들이거나 커튼을 쳐 그 모두를 차단하는 양극성이 아니라, 적절하게 중화시켜 심신이 포근히 가라앉는 으스름 공간을 드리워준다. 미국의 일부 병원에서 입원실 창문을 조선 종이로 바꾸고 있다는 것은 그 안정성(安靜性)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때문일 것이다. 조선 종이는 기능면에 뛰어난 것뿐 아니라 실용면에서도 양지(洋紙)를 웃돌고 있다.
옛 우리 선비들은 쓰다 버린 파지(破紙)나 편지나 파책(破冊)된 종이를 낱낱이 모아 두었다가 날이 추워지면 변방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보내는 것이 관습화 돼 있었다. 지의(紙衣)라 하여 종이를 풀어 병사들의 속옷을 만들어 입히기 위해서였다. 종이 원료인 닥(楮)의 섬유가 보온(保溫)에 뛰어난 것을 이렇게 옷으로까지 선용했던 것이다. 세조 때 학자 김수온(金守溫)은 파지(破紙)를 모아 지금(紙衾)이라는 이불까지 만들어 덮고 있다. 또한 닥의 섬유는 질기기 이를 데 없어 종이끈을 꼬아서 종이신(破鞋)을 삼아 신기도 했다.
조선 종이의 예술성(藝術性)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매끄럽지도 않고 또 고르지도 않고 하얗지도 못한 것이 먹(墨)을 먹는 묘미가 다양하여 한 점 먹에서 다섯 가지 빛깔이 달라지는 오채(五彩)를 가장 영롱하게 내는 종이가 바로 조선 종이라 한다. 그래서 예부터 계림지(鷄林紙) 백태지(白苔紙) 장지(壯紙) 등 중국과 일본에서 소문나 있었으며, 원당(阮堂) 김정희(金正喜)는 금박이 은박이 중국 종이가 많았으나 반드시 조선 종이에다 글을 쓰고 있다. 거기에 방향(芳香)과 방충(防蟲)을 겸해 침향(沈香)같은 백단(白檀)같은 향과(香科)를 스미게 해서 향지(香紙)까지 만들어 쓰기도 했으니, 종이를 둔 대단한 풍류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뛰어난 조선 종이가 이제 중성지(中性地)라 하여 새삼 각광을 받고 있다고 보도되고 있다. 양지(洋紙)는 모두가 산성지(酸性紙)라 인쇄물의 수명이 고작 1백 년을 못 넘는다. 그래서 세계 주요 도서관마다 중성지로 바꾸는 종이 혁명이 일고 있다던데 불국사(佛國寺) 석가탑에서 나온 다라니경이 입증해 주었듯이 중성지인 한지(韓紙)의 수명은 수천 년이 간다.
한낱 얄팍한 종이지만, 무궁무진하게 잠재돼 있는 정신 문화의 깊은 슬기에 마냥 숙연해지기만 한다.
85/11/15
가륜비국(可倫比國)의 분화(噴火)
우리 나라 최후의 화산(火山) 폭발은 9백83년 전인 고려 목종(穆宗) 5년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의 서산(瑞山)에서 있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태학박사(太學博士) 전공지(田拱之)를 보내어 조사 시키고 있는데, 바다 속에서 갑자기 네 구멍이 뚫린 산이 솟아나더니 그 구멍에서 붉은 불물이 흘러 나오길 닷새 만에야 멎었다고 했다. 이를 본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불산이 처음 솟아날 때 구름 안개가 자욱하고 우뢰 같은 지동소리가 나더니 무릇 7주야 후에야 안개가 걷혔다 한다. 솟아난 산 높이는 1백여 길, 둘레는 40여 리에 이르고 초목은 없고 흘러 나온 불물이 식어 모두 바윗돌이 되었으며 그 산꼭대기는 석유황(石硫黃) 같은 것이 엉켜 있어 감히 사람이 접근하지 못한다 했다.
전공지(全拱之)는 그 화산(火山)의 도형(圖形)까지 그려 바쳤으며, 이를 받아든 임금님은, `내 부덕(不德)의 소치다'고 화산 폭발을 하느님의 응징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우리 옛 선조들은 큰 천재지변(天災地變)이 일어나면 그것을 천심(天心)의 응징으로 수용하는 겸허함이 있었으며, 땅위의 일에 하늘이 반드시 응감(應感) 한다는 천인상관사상(天人相關思想)은 선정(善政)을 베풀게 하는 큰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콜롬비아에 금세기 최대의 화산이 폭발, 5만 도시를 덮어 버려 그 반수가 죽고 있다 하니 바로 그 나라에서 일단의 게릴라가 대법원(大法阮)을 점거, 대법원장을 비록, 판사들을 무차별 사살한데 대한 하느님의 노여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비단 천인상관사상에 체질화 된 우리들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콜롬비아는 콜롬부스의 나라란 뜻이다. 스페인 식민 전쟁(植民 戰爭) 으로부터 독립을 재위, 입식자(入植者)들의 정신적 구세주가 돼 있는 콜롬부스의 이름으로 나라 이름을 삼은 것이다. 우리 나라에는 한말(韓末) 식자간에 `가륜비(可倫比)'로 알려졌으며, 환상적인 동화(童話)속의 나라로 구전돼 있었다. 잎에 손만 닿아도 죽고 그 나무 그늘이 미쳐도 죽는다는 독(毒)나무가 있다던지, 또 밤에 날개를 펴면 발광(發光)하는 빛새가 있다던지, 그 샘물로 얼굴을 씻으면 노인의 얼굴이 소년처럼 젊어진다는 불노천(不老泉)이 있다던지...
또한 딸을 낳아 몇 살만 되면 오른쪽 젖을 잘라내어 활을 잘 쏘도록 하는 선사용맹(善射勇猛)한 아마존 여인국(女人國)이 바로 가륜비국(可倫比國) 안에 있다고도 알았다. 5대륙에 나는 모든 보화가 다 난다는 이 꿈나라가 화산의 불물에 깔려 버린 것이다. 얄팍한 지식으로 자연에 대해 오만해진 인류에게 퍼 붓는, 멕시코 지진에 이은 제2의 분노이기도 한 것이다.
85/11/16
어린이방 무용론
어릴 적에 곧잘 놀았던 씨름에 참씨름과 개씨름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땅에다 동그라미를 그려 씨름판을 정해놓고 하는 씨름을 참씨름, 씨름판을 그려 놓지 않고 하는 씨름을 개씨름이라 했다. 판이 없으면 재미도 없고 또 씨름이 늘지 않는다 하여 개씨름이라 불렀던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사람 사는 것도 밀고 밀리는 한계가 있고, 어느 한계에서 참고 버리며 어느 한계에서 늦추고 힘을 부리는 그런 참씨름에서 세상 사는 슬기고 생기고 또 세상도 재미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한데 요즈음 아이들은 천성대로 길러야 한다는 이상한 유아론(有兒論)이 지배하고 있어 판도 그리지 않는 개씨름을-, 개씨름도 종의 아들이 상전의 아들에게 져주는 그런 개씨름을 시키고 있다.
아이들은 도덕을 가르는 아버지와 심정을 가르는 어머니, 이해를 가르는 형제자매라는 규제와 억제 요소의 판 속에서 참씨름을 해가며 자라야 하는 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판으로부터 도피해 있을 수 있는 어린이 방을 없애야 한다는 무용론(無用論)이 구미(歐美)에서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 한다. 근간에 조사된 바로 국민학교 고학년의 어린이로서 자기 방을 갖고 있는 비율이 영국 54%, 미국 56%로 감소 추세이며, 일본만이 76%로 증가 추세에 있다 한다. 일본이 고율(高率)인 이유 가운데는 전쟁 세대들이 그토록 선망했던 자기 방 갖기를 자녀들에게 보상하려는 비원(悲願)도 작용하고 있다 한다. 조사된 것은 없지만 우리 나라도 어린이방에 대해서는 일본(日本)의 추세인 것만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입시(入試)나 입사(入社)시험에 실패하거나 직장에서 상사에게서 꾸지람을 듣거나 동료로부터 소외 당하는 것으로 절망, 인생을 좌절시키거나 자살을 기도하거나,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의 대부분이 유아(唯我)독존을 보장 해 준 개실(個室)이 있는 집에서 자란 아이라는 통계 보고가 있다. 반대로 세상일이 제멋대로 안 되면 자신에게 원인을 돌려 반성하기보다 모두 세상이 나쁘기 때문이라 하여 제멋대로 안 되게 하는 권위의 대상- 곧 부모(父母)나 선생이나 상사에게 곧잘 폭력을 휘두르는 친근(親近) 상대의 폭력 행위자도 개실이 유죄(有罪)한 것으로 진단되고 있다.
한 일본의 학자는 대학생들이 데모를 할 때, 소중히 해야 할 책걸상을 꺼내 던지고 태우고 짓부수는 행위도 이 개실에 갇혀 지긋지긋하게 강요된 공부에 대한 잠재 의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했다.
개실을 주면 개성(個性)이 자란다는 것은 환상이며 빨리 개실(個室)을 줄수록 무기력이 커지고, 사람과 사람과의 매듭에서 보다 빨리 소외시키는 것이 되며, 반사회(反社會)적인 미완성품(未完成品)을 보다 앞당겨 만드는 것이 된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개실 대신 모자(母子)-부자 공용(父子 共用)이나 가족 공용의 책을 읽는 방으로 개조하고 있다 하니 눈 여겨 둘 만한 일이라고 본다.
85/11/17
목적세(目的稅) 유감
명 나라가 망하자 명장(明將) 모문룡(毛文龍)은 패잔병을 이끌고 평안도 철산(鐵山) 앞바다 가도에 들어와서 조정에다 군량(軍糧)을 요구하였다. 임진왜란 때 입은 은혜도 있고 해서 광해군(光海君)은 이를 승낙, 평안도와 황해도에다가 토지 1결당(結當) 한 말 닷 되씩의 쌀을 거두어 군량을 대주었다. 이를 모량미(毛糧米)라 일컬었으며 일종의 목적세(目的稅)였던 것이다. 수년 후 이 망명병(亡命兵)은 떠나가고 없어졌으며 따라서 목적세의 목적이 소멸된 것이기에 모량미는 거두지 말아야 했다. 한데도 어디다 유용했는지 수백 년간 모량미를 거둬 내렸으며 이 때문에 서북(西北) 지방의 민원(民怨)이 대단했었다. 왕실(王室) 도서관이랄 규장각(奎章閣)에 책을 수집하기 위해 규장각지가미(奎章閣紙價米)라는 목적세를 거둔 일이 있는데, 그 목적을 다한 연후에도 이 지가미(紙價米)를 계속 징수하고 있다. 이 같이 목적 잃은 목적세가 비일비재하였다.
역사적으로 우리 나라의 목적세는 목적을 다한 후에도 영속되는 이상한 세금이 되고 있다. 그 지경인데 어떻게 백성이 조정을 믿겠는가. 얼마나 조정하는 일을 믿지 않았기로 한말(韓末)에는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희한한 수작을 다하고 있다.
북을 쳐 새문(新聞.西大門)안에 사람을 모아 놓고 문 안에 세워둔 나무 토막을 들어다가 동대문까지 옮겨다 놓으면 소정의 돈을 준다고 광고를 한 것이다. 필요에 의한 노역(勞役)의 대가가 아니라 조정에서 하는 일에 대한 불신을 회복하고자 실행의 결의를 백성에게 알리는 일종의 민심 공작(民心 工作)이었다. 오죽했으면 이 만화 같은 짓을...
진(秦) 나라 재상 상앙이 법의 실행 의지를 백성에게 주지시키고자 시도했던 똑같은 수법을 흉내낸 것이다.
백성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기를 자주 하면 예나 지금이나 이 지경에 이른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를테면 엄청난 프리미엄이 붙었던 전화難시대에 전화 시설을 위한 목적세로 전화세(電話稅)가 생겨났다. 한데 전화難이 해소, 그 목적을 다한 지금도 전화세는 여전히 거두고 있다.
86년까지만 거두기로 국민에게 약속한 목적세인 교육세(敎育稅)의 징수 연장이 불가피하다고 국회에서 공언했다. 불가피하다는 상황을 십분 이해 한다고 하더라도, 서문(西門)에서 동문(東門)까지 나무 토막을 옮기면 약속된 돈을 주어야지 다시 한 번 서문에 갔다오면 준다고 하면 누가 믿고 따르겠는가.
고속도로 휴일 할증제도 그렇다. 할증 목적인 에너지 절약은 되지 않고 이용자의 호주머니만 후리는 꼴이 됐으면 환원시키는 것이 신뢰를 얻는 길인 줄 안다. 일단 들어오기 시작한 돈은 명분이야 어떻건 놓치기 싫어하는 고질과 신뢰의 함수 관계에 보다 현명해져야 할 것 같다.
85/11/19
급제 기원
언젠가 등산길에서 30여 명의 청소년들이 진지하게 산제(山祭)를 올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흔히 볼 수 없는 일이라 물어보았더니 같은 고교 출신의 재수생들끼리 급제 기원(及第 祈願)을 하고 있다 했다. 그날이 바로 대입(代入) 예비 고사날의 백일 전 날이기에 백일제(百日祭)를 올린 것이며 49일제도 올릴 참이라 했다.
부모들의 치성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서울 근교의 산사(山寺)들은 급제기원(及第祈願)의 성수기를 만나, 연일 기도할 자리 차지를 위해 줄을 설 지경이라 한다.
제과점 쇼윈도에는 `귀자녀(貴子女)의 합격을 기원합니다-찹쌀떡'하는 선전 문구가 나붙은 것을 볼 수 있고, 골목을 누비는 엿장수의 핸드 스피커에서도 `예비 고사날이 다가왔습니다. 찹쌀엿!'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척척들어 붙는 떡과 엿의 주술 효과(呪術 效果) 역시 성수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과학화 돼 왔다 한들 초자연적인 힘에 구제를 받으려는 한국인의 심정만은 옛날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음을 알 수가 있다.
옛날 며느리들 아이를 배면 시아버지는 `오자등과(五子登科)'라 새겨진 동경(銅鏡)을 사다 주는 것이 관습이 돼 있었다. 그 거울을 들여다 보는 것이 태교(胎敎)의 첫걸음이요, 태아(胎兒)적부터 등과(登科)를 기원 받고 자란다. 태어나서 이렛날이나 백날, 돌날에 아랫 사람에게 내리는 축전(祝錢)(팁)도 `장원급제(壯元及第)'라 새겨진 엽전으로 했다. 시험날을 앞둔 급제 미신도 다양했다. `사랑방에 우리 낭군 글 읽느라 앞뒷질이요/요 내사 긴긴밤에 엿 켜느라 앞뒷질이라.'과거길 떠나는 남편에게는 엿을 먹였다. 엿은 켤수록 희어지고 보다 하얀 엿일수록 잘 붙는다 하여 밤세워 앞뒷질이나 하며 엿을 켰던 것이다. 비석(碑石)의 비문(碑文) 가운데서 문(文), 학(學), 등(登)과 (科), 장(壯), 원(元)...같은 급제와 연관된 글자를 파, 그 돌가루를 엿에 넣어 키기도 했다.
성종(成宗)이 민심을 살피고자 야밤에 미행을 했을 때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끔 벌거벗은 채 나무를 베어 뜰안에 옮겨 심는 부부를 보았다. 이유를 물으니 까치가 집을 지으면 급제한다 하여 까치집 있는 나무를 베어다 옮겨 심는 중이라 했다. 치성이 가상하다 하여 시관(試官)으로 하여금 `작소수(鵲巢樹)'란 시제(試題)를 내게 하여 이 사나이를 급제시키고 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어머니들의 심정 논리도 가상하고, 또 초조해지는 불안감을 해소시키는 심리 효과도 없지 않으나, 그 때문에 배가되는 자녀들의 심리 부담이 오히려 역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차원에서 고려돼야 할 세태이기도 하다.
85/11/20
수험고금(受驗古今)
요즈음 입시(入試)에서 부정(不正)이나 사정(私情)이 통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옛 선조들의 지혜나 제도를 본뜰 만한 것이 적지않다.
과거를 치는 과장(科場)의 감독관은 열 개의 각기 다른 도장을 들고 있으면서 예비 부정 행위가 적발되면 그 부정 시험지에 해당되는 도장을 찍음으로써 감점(減點)으로 계산되게 했다.
이를테면 허락없이 자리를 뜨면 `이석(移席)'이란 도장을, 시험지를 바꾸려다가 들키면 `환권(換卷)', 말을 주고 받다가 들키면 `설화(說話)', 눈동자를 돌려 앞 뒤 옆사람의 시험지를 훔쳐보면 `고반(顧盼)', 입속으로 중얼중얼 운을 짚으면 `음아', 시간이 됐는데도 답안을 못다 쓰면 글 끝부분에 `불완(不完)'이란 도장을 찍어 부정을 방지했던 것이다.
수험생의 이름을 채점자에게 모르게 하여 사정(私情)이 통하지 않게 끔 하는 제도 또한 완벽하였다. `호명(糊名)'이라 하여 수험자의 이름이나 신분을 쓴 위에 풀칠한 종이를 붙여 채점자가 보지 못하게 해 버린다. 이름을 가렸다고 해서 완전한 것은 못된다. 필적을 보고 누구의 것인지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답안을 모두 필사(筆寫) 시킨다. 원답안을 묵권(墨卷)이라 하고 필사된 등본을 붉은 글씨로 옮겨썼다 하여 주권(朱卷)이라 하며, 묵권과 주권을 대조한 교정본(校正本)을 노란 글씨로 바로 잡았다 하여 황권(黃卷)이라 했다. 이 황권이 채점자에게 돌려지기 때문에 필적으로 누구의 답안지라는 것을 알 수 없게 돼 있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북송(北宋)때 명시인 소동파(蘇東坡)가 대과(大科)를 쳤다. 시험 위원장(試驗委員長)은 당시 문단의 거두(巨頭)인 구양수(歐陽修)였고. 구양수는 소동파가 과거를 치렀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고 이미 고명해져 있는 이 수재(秀才)에게 장원 급제를 시키고 싶었다. 이름을 가린 답안지를 읽어 내리는 동안 견식과 문장이 탁월한 답안을 발견하고 동파(東坡)의 것이려니 하고 최고점을 주려 했다. 한데 문득 수험생 중의 다른 한 수재(秀才)로서 자신의 제자인 증공(曾鞏)의 답안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자기 제자가 장원을 하면 비난받을 여지가 있다 하여 그 답안지에 최고점을 못 주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것이 바로 소동파의 것이었고, 그 때문에 소동파는 장원 급제의 영예를 얻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시대에 따라 채점 방식은 달라지고 있으나 대체로 5등분하여 白 O 표가 만점 黑 O 표가 80점 삼각 표가 60점, - 표가 40점 엑스 표가 20점으로 5명 내지 8명의 채점을 합산, 평균점을 냈던 것이다.
지금은 컴퓨터 채점이기에 이렇게 번거로울 필요가 없어졌다지만 컴퓨터 채점이 불가능하고, 옛날 과시(科試)와 방법이 흡사한 논술 고사에서는 옛 슬기에서 본받을 만한 것이 비일비재함을 알 수가 있다.
85/11/21
오마이라양(孃)의 죽음
80년 전이 1906년 초봄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시가(市街)가 모조리 타고 5백여 명의 사상자가 났었다. 이때 대한 매일 신보(大韓 每日 申報)에서는 의연금을 모으는 긴급 광고를 내고, 사설(社說)로 이 의연 운동에 호응해 줄 것을 간곡하게 당부했다.
이 사설에서 `많은 나라들에서 구재(救災)를 하는데 우리만이 구재를 하지 않으면 도리가 아니요, 나라 꼴도 아니며 이 세상에서 한국이란 나라가 있는지도 모르게 하는 중요한 일이다'고 인간적 공감대(共感帶)에서 소외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또한 `애조가(哀弔歌)'란 시도 싣고 있다. `왼말인가 왼말인가 상항파재(桑港破災) 왼말인가/가이업다 가이업다 생명재산(生命財産) 가이업다/사해지내(四海之內) 개형제(皆兄弟)니 동서양을 구별할가/ 필묵(筆墨) 사야 하는 돈을 낙낙하게 자아내어/눈물로 환표(換票) 쓰고 한숨으로 취송(吹送)하니/사소(些少)타 마오시고 성화(星火)갓치 보내주소.'
이렇게 모은 돈 1천26원을 한성의 미국인 전기 회사를 통해 송금하고 있다.
액수가 많고 적고는 문제 아니다.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반신불수되어 나라안 꼴이 지진이 일어난 이상으로 경황이 없었던 바로 그때인데도, 해외의 재난에 이토록 민감했던 우리 한국인의 인간주의가 반짝 돋보이기만 하다. 그 10여 년 전에 국제 지식에 몽매해서 인도 사람은 파리처럼 천장에 붙어산다고 알았던 때에도, 인도에 대홍수(大洪水)가 나서 수천 명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대문에서 의연금을 거둬 보내주었던 우리 한국인이었다. 그렇게 정이 많았던 민족이었던 것이다.
19세기는 신을 죽인 세기요, 20세기는 인간을 죽인 세기다. 그래서 이제 인간성은 거대한 피라밋 속에 말라 비틀어진 한낱 미이라에 불과하다고 현대인의 인간성 증발을 개탄한 것은 엘릭프럼이다. 그 미이라를 꿈틀거리게 한 한 한 장의 보도 사진을 보았다.
콜롬비아 아르메로, 화산재와 유황이 범벅이 된 수렁 속에서 사흘을 버티다가 눈도 못 감고 죽어간 열세 살의 소녀 오마이라 사체스 양의 사진이 그것이다. 목 근처까지 메워진 유황의 흙수렁 속에서도 이날 학교에서 있을 수학 시험을 걱정하고, 또 구조하는 아저씨들에게 좀 쉬어가며 하세요 했다는 그 소녀의 죽음으로 대변되는 그 엄청난 비극에 둔감해 있는 우리 한국인이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어떤 외교적 유대나 경제적 유대보다 인간적 유대 이상으로 질긴 것이 없으며, 또한 인간 공감대에 참여하고 안 하고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눈의 시각이 크게 달라지기에 더욱 그렇다. 정부나 적십자사의 공식적인 출연(出演)보다 다소를 불문한 민간 차원의 정표가 있었으면 한다. 그렇게 해온 훌륭했던 우리 전통도 있었으니 말이다.
85/11/22
인간성 발전소
2차 대전 후 패전(敗戰) 이탈리아 시칠리 섬에서 있었던 일이다. 산을 하나 두고 두 고아원이 이웃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연합군과 결연이 되어 시설도 좋고 영양도 담뿍 취할 수 있었지만 다른 고아원은 풍우(風雨)도 제대로 가리지 못 할뿐 아니라 분유도 제대로 먹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한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왜냐면 시설과 영양이 좋은 쪽의 어린이 사망률이 그렇지 않은 쪽보다 60%나 높았기 때문이다.
상식에 위배된 이 결과가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고, 연구 결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전쟁중에 세 아이를 잃고 실성한 40대의 어머니가 어느 날 시설이 나쁜 쪽의 고아원을 찾아들었다. 그리고 이 어머니가 그곳에 수용된 고아들을 모두 자기 자식으로 착각하고 번갈아 안아주고 얼러주길 수년간 계속하고 있는 사실에서 이 의문이 풀렸던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아이들은 환경이나 영양 이외에 어머니의 품에서 배어나오는 훈김, 곧 인간성이 아이들 성장이나 건강이나 생명의 불가결의 요인이라는 학설이 체계화되고, 지금도 구미(歐美)의 고아원에는 훈김을 급여하는 대모(代母)가 필수불가결의 조건이 돼 있다.
작가 스타인백의 단편소설 가운데 한 가난한 어머니가 헤어진 양말을 깁고 있는데, 그 어머니 등에 등을 맞댄 아들놈이 주워 온 쇠붙이를 늘어 놓고 놀고 있는 그런 정경을 묘사한 대목이 있었다. 물론 아무런 대화도 없고 숨만 색색 쉬고 있지만 그 등을 통해 오가는 훈김, 곧 인간성은 이 세상 어떤 권력이나 금력이나 명예로도 살 수 없는 고귀한 것이라 했다.
그것은 비단 모자(母子) 사이에만 발전(發電)되는 훈김이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발전되는 훈김인 것이다. 그것만 있으면 세상이 가시 방석처럼 각박해도 살 수 있지만, 그것이 없으면 아무리 비단 방석이라도 살 수 없는 것이다.
70된 한 거지 노인이 밥을 빌어다가 밥도 빌지 못하는 불우한 사람들을 먹여 살린 것이 시초가 되어 버림 받고 불우한 사람끼리 상부상조하며 사는 충청도 음성(陰城)의 `꽃동네'야말로 우리 한국에서 가장 큰 인간성 발전소가 아닌가 싶다. 도시에서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사는 어느 한 사람도 20세기 최대 인간 비극이 벌어지고 있는 콜롬비아에 한 조각 정을 나누려 하지 않고 있는데, 이 꽃동네에서 맨 먼저 의연금이 나왔다는 것은 포도처럼 말라 비틀어진 현대인의 심장을 예리하게 지탄하는 것이 된다.
이 꽃동네에서 낸 돈은 돈이 아니라 그것 아니면 사람과 사람 사이가 이리떼가 되는 그런 훈김이다. 꽃동네는 그 훈김의 발전소다.
85/11/23
무우 애가
서양 무우는 우리 무우처럼 통통하고 미끈하지 못했던 것 같다. 서양 고전(古典)에 보면 말라 비틀어졌거나 여윈 것을 무우로 곧잘 비유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헨리 4세'의 주인공으로 하여금 `내가 50명을 상대로 싸운 것이 거짓말이라면 나는 말라 비틀어진 한낱 무우 뿌리란 말인가'고 외치게 하고 있다. 지긋지긋하게 가난했던 시인(詩人) 브라우닝마저도 `4월이면 식탁에 오르는 지긋지긋한 무우 요리...'하고 읊은 것을 보거나, 또 형편없는 안주를 영어로 `무우와 소금'이라고 한 것을 미루어 보아도 서양에서는 가난을 상징하는 별볼일 없는 식물(食物)이었던 것 같다. 그래선지 유럽에는 무우의 원산지에 접근해 있으면서도 무우를 먹는 문화가 전혀 발달되어 있지 않다.
이에 비해 이 세상에서 무우를 가장 왕성하게 먹는 한국, 중국, 일본에서의 무우 이미지는 우성(優性)이다. 지금은 밉게 생긴 아가씨 다리를 무우 다리라고 얕보지만, 옛 한시(漢詩)에서는 미끈한 여자의 팔을 무우팔이라 미화했고 우리 고전 소설 속에서도 속살이 희고 매끄러운 것을 무우살 같다고 미화했다. 두 갈래진 포동포동한 무우를 먹으면 속살이 예뻐진다 하여 처자들이 야밤에 무우 서리를 하는 습속까지도 있다.
무우는 원래 지중해 동해안의 보리밭에 기생(寄生)하는 잡초였다. 지금도 아프가티스탄이나 이란의 황무지를 여행하다 보면 몇백 리 길에 걸쳐 노란 잡초(雜草)의 장다리 꽃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맥(大麥)농사에 묻어 중국에 무우가 들어온 것은 고대(古代) 하(夏)나라 때이며 제갈량(諸葛亮)이 원정을 할 때면 이 무우를 심어 병사들의 구량(軍糧)을 댔기로 무우를 제갈채(諸葛菜)라고도 부른다 했다.
보리에는 맥독(麥毒)이 있고 이를 해독해 주는 것이 무우이기에 보리를 주식으로하는 민족 일수록 무우를 많이 먹는다는 학설도 있다. 우리 나라에도 보리 농사와 더불어 무우가 들어왔을 것이나 문헌상으론 13세기인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나온 의서(醫書) `향약구급방(鄕約救急方)'에 무우가 처음 나오고 그 1백여 년 후, 백문보(白文寶)의 시에 시에 담백한 무우맛을 찬양한 대목이 나오고 있다. 지금은 우리 식탁에 가장 많이, 또 가장 자주 오르는 식품이 되고 있으며 이 세상에서 가장 무우 요리 문화(料理 文化)가 발달한 우리 나라가 되고 있다.
무우는 중국말 `무청(蕪菁)'과 `수(須)'가 줄고 보태져 `무수'에서 전환된 것으로 보인다. 무우만 먹고 속편하게 살면 무우(無憂)-무수(無愁)하다 하여 무우-무수가 됐다고 미화(美化)하는 이도 있다. 며칠 전 연합 통신(聯合 通信)의 보도에 의하면 그 무우의 종주국(宗主國)에서 무우의 성수기인 김장철인데도 무우값이 폭락, 충청도 청원 일대에서는 이를 뽑아다가 산더미 처럼 버리고 있다 한다. 농산(農産)및 유통 정책에 유우유수지탄(有憂有愁之嘆)이 아닐 수 없다.
85/11/24
보라빛 차색 유감
기독교 문화권에서 가장 숭상 받은 여성이 성모 마리아다. 그 마리아가 즐겨 입는 옷빛깔은 무슨 색일까. 물론 후세에 약속된 옷빛깔이긴 하지만 라파엘로의 수많은 성모상이나 말티니의 `수태고지(受胎告知) 프란체스카의 `자비(慈悲)의 마리아' 등 대부분의 마리아상을 보면 붉은 속옷에 푸른 겉옷을 걸치고 있는데 예외가 없다. 하늘을 뜻하는 푸른 빛 (神)과 인간의 피를 뜻하는 붉은 빛 (人間)을 그 한몸에 상징적으로 보라색 옷을 입은 마리아상도 볼 수 있는데 보라색이 푸른 색과 붉은 색의 중간색이기에 그 상징적 의미는 변함이 없다.
이처럼 보라색은 신인(神人)결합의 대행자만이 취할 수 있는 신성하고 고귀한 색이었다. 그래서 헤브루의 대사교(大司敎)들은 보라빛 성복(聖服)을 입었고 희랍의 신들도 보라빛 장삼을 입었으며, 초기 기독교의 성직자들도 보라빛 법복(法服)을 입었었다. 보라빛은 신의 뜻을 대행하는 성스러운 사람만이 입을 수 있는 선택받은 복색이었다. 복색뿐만 아니라 솔로몬 왕의 마차색(馬車)색도 보라빛이요, 클레오파트라의 어선(漁船)도 보라빛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통치자의 전용색깔이 되어 여느 백성들은 보라 빛깔을 쓰지 못하게 하는 금령이 수천 년간 이어 내렸던 것이다. 한국을 포함한 동양 문화권에서도 보라빛 이미지는 하늘의 뜻을 대행하는 자만이 취할 수 있는 복색이었다.
동양에서는 해가 뜨는 동쪽과 해가 지는 남쪽을 숭상했는데 동쪽 색이 푸른 빛이요, 남쪽색이 붉은 빛이라 그 중간색인 보라빛이 천의(天意)를 뜻했다고 해석하는 이도 있다. 그래서 천제(天帝)가 계신 곳은 자미(紫微)라 부르고 천자(天子)가 거처하는 대궐을 자금(紫禁), 자궁(紫宮) 이라 했으며, 천자의 조서를 보라빛 종이에 쓴다 하여 자고(紫誥), 천자가 입는 옷이 보라빛이라 하여 자포(紫袍)라고 불렀던 것이다. 사대(事大)했던 우리 나라에서도 보라빛은 아무도 쓰지 못하는 금색(禁色)이었고, 보라빛을 내는 염료인 자초(紫草)마저 심는 것을 금령(今令)으로 다스렸던 것이다. 다만 우리 나라에서는 하늘 높이 띄우는 종이연(鳶)에만 보라빛을 쓰는 것이 허락됐을 따름이었다.
이 같은 오랜 전통 때문인지 우리 한국인에게 보라빛은 정들지도 못하고, 또 친근한 색깔이 되지 못했다. 한국인의 정서에서 이 보라빛 이미지는 모가 나며, 따라서 생활 환경이나 생활 용품 가운데서 보라빛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한데 요즈음 서울 시내 버스의 차체(車體) 빛깔을 보라빛으로 바꾸고 있던데, 고귀하대서 선택된 빛깔인지 알 수 없으나 한국인의 색채감에 거슬릴 뿐 아니라 도시색(都市色) 전체에 위화감을 주고, 친근감이 나질 않는다.
서양 사람들에게는 보라빛이 고귀하고 신성한 이미지 뿐만 아니라 죽음도 상징하고 있어 장례식이나 복상(服喪) 동안에 입는 옷빛깔이란 점을 감안할 때 대중 교통 수단의 차체색(車體色)으로는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잘 선택된 빛깔이 아니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85/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