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부산길 건행 후기)
홀로 나를 사랑하며 걷는 해파랑길
손목 상처 아픈 김에 비우기로 내려놓기로 마음을 정하고 쉰지 두 달이 넘었다. 손은 조금씩 되살아나지만, 갑갑하고 답답한 가슴은 뚫리지가 않는다. 나의 활력을 채워줄 기타며 자전거, 등산, 운전은 아직 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쌍둥언니 부부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기 직전에 다녀왔다는 해파랑길을 이것저것 따지면 떠날 수 없을 것 같아 혼자 무작정 출발하였다.
4월 25일 월요일 아침 7.5Kg의 빨간 배낭을 메고 서울역에서 KTX 7시 열차편으로 10시 조금 못되어 부산역에 도착했다. 정보대로 4번 출구로 나가 오륙도 가는 버스를 탔다. 관광버스 등으로 여러 번 왔던 '오륙도 해맞이공원' 에서부터 해파랑길은 시작된다. 관광안내소에서 안내지도를 받아보니, 총 770Km의 해파랑길은 부산에서부터 강원도 고성까지 10구간으로 나누고, 각 구간마다 몇 개씩 코스를 정하여 총 50코스로 바다와 파도를 벗삼아 자신을 돌아보며 걷도록 구성해 놓았다. 분홍 파랑빛 두 줄로 묶인 해파랑길 신호 리본이 팔랑대며 담벼락에 부착된 주홍빛 표지와 함께 잘 왔다고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크고 작은 어려움들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홀로 나를 사랑하며 걷는 해파랑길 출발에 약간은 두려우면서도 은근 설렘과 함께 뜻밖에 있을 기대감도 자리했다.
스카이워크에 신발을 벗고 올라서니, 3개 밖에 보이지 않는 오륙도 섬이 햇살에 반짝인다. 손을 꼭 쥐고 이기대 해안 산책로 안내표지를 따라 올라갔다. 이름 모를 들꽃과 노란 유채꽃, 분홍 철쭉꽃들에 벌써 웃음꽃이 핀다. 탁 트인 너른 바다, 시원한 바람, 가슴 씻기는 하얀 거품 파도가 파란 하늘 아래 한 눈에 들어온다. 이기대 해안 절경 첫 순간부터 차오르는 벅찬 자신감을 끝까지 놓치지 말자 다짐하고 가슴에 십자가를 그었다. 오르락 내리락 경사가 급한 길고 긴 높은 해안 전망대 산책길을 이어갔다. 이 전망대는 임진왜란 때 일본 수장을 안고 떨어져 죽어가며 나라를 사랑했다는 두 기녀를 위해 '이기대'라 명명하였다 한다. 해파랑길은 갈맷길과도 중첩되어 갈맷길 표지를 보면서 가도 좋았다. 절벽을 따라 이어진 해안산책길은 농바위를 지나고 밭골새, 치마바위, 어울마당, 동생말을 지나서야 내려서게 되었다. 광안대교와 마린시티가 가까이 보이는 곳까지 오니 용호만 부두이다.
배낭을 내려놓고, 무릎과 발목보호대, 등산화, 양말을 모두 벗고 누웠다. 종종거리던 청솔모와 이기대 두 기녀에게 바친 시비의 글이 떠오른다. 집에 있는 귀염손자의 웃는 얼굴, 이쁜 안나 며느리, 듬직장남, 그리고 힘든 남편도 생각이 난다. 4월 하순 부산 하늘에 흘러가는 흰구름이 여행에 필요한 많은 것을 줄 것처럼 나를 바라본다. 초콜릿, 양갱, 약과를 넣어 오길 잘했지, 이토록 달콤하고 힘이 날수가 없다. 단숨에 갈맷길 도보인증대가 있는 민락교를 넘어 광안대교 광안리 해수욕장에 닿았다. 아이파크 빌딩 숲 마린시티는 싱가폴의 어느 영화 도시 같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지는 해운대에는 영화의 거리가 추억을 선물한다. 쌍둥언니와 걸었던 해운대 모래사장을 혼자 걸으며 지나온 모습들을 되돌아본다. 같이 태어나 같이 자라서 같은 사회 활동을 하지만 가정적으로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행복하고 또 아픈 고뇌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간다. 38년 전 신혼여행으로 모래사장 뛰어다니던 오랜 흔적의 바다, 병든 남편으로 쌍둥언니처럼 부부가 함께 다닐 수 없는 아픔에 주루룩 눈물이 흐른다. 바다에 서서히 어둠이 깔리고, 해파랑길 첫 코스 종착지 미포에 도착하니 저녁 6시 반이다. 게스트하우스 '레움'에 숙소를 정하고 생대구탕으로 저녁식사를 하며, 맥주 한잔으로 장하고 대단한 나에게 건배를 했다. 첫날 7시간 반 17km를 걸었나보다. 해운대 꼬리 미포에 타오르다 식은 붉은 석양이 많은 그리움으로 바다 깊숙이 스며든다.
둘째날은 집 떠나와 잠못 이룬 채 새벽 5시 반에 채비를 하고 숙소를 나섰다. 지난 밤 배부른 달님이 밤새 비추고 있었는지 다소 지친 표정으로 검푸른 바다 위에 하얗게 늘어져 있었다. 새벽 달님의 보호를 받으며 어스름 미포를 출발하여 2코스 출발점인 폐철로 예전 기찻길을 걸었다. 삼포라고 하는 미포, 구덕포, 청산포를 지나 송정역으로 빠져나왔다. 새하얀 모래밭 송정해수욕장의 은물결 금물결이 어서어서 힘내 걸으라고 출렁출렁 반겨 추었다. 전에 가보았던 바다를 배경으로 선 해동용궁사에 들어갔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느라 꽃등 달기로 분주한 용궁사에선 황금 미륵불님이 세상 가장 환한 웃음으로 나를 맞아주셨다. 덩달아 웃으면서 춘원 이광수님의 시비를 읽고, 칼국수로 아침 겸 점심식사를 했다. 멸치 축제, 다시마 미역 축제로 유명한 대변마을 2코스의 종착지 대변항을 지나는 내내 대변초등학교의 이정표가 눈에 밟혔다. 대변초등학교의 아이들은 소변 대변하면서 그 놀림 괜찮을까?
3코스를 향해 연화리 해변마을, 두호항을 지나자 기장 죽성만으로 들어선다. 드림세트장이란 표지가 보이고 언덕 위 빨간 지붕의 유럽풍 성당이 보인다. 성당 문은 잠겨 있어 들어가지 못했다. 온화한 미소로 나를 보고 계신 성모님께 잘 보호해주시기를 기도 드렸다. 기장군청, 보건소, 경찰서, 체육관 등 도로를 한참 걸어 일광해수욕장을 만났다. 동백리, 갯마을, 신평소공원, 칠암항을 지나 저녁 6시 반 임랑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오늘은 부산 2코스, 3코스를 한번에 13시간 동안 34km를 걸어냈다. 평일 임랑해변엔 작은 민박들은 영업을 하지 않고, 조명불빛 속 비싼 팬션 등은 최하 8만원을 달라고 한다.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먹고 편의점 주인의 민박에 들어갔다. 숙박비가 싼 탓인지 난방을 조금 하고는 꺼버렸다. 긴 시간 걸어 몹시 피곤한데도 도저히 추워서 잘 수가 없다. 더운물로 씻기는커녕 화장실도 밖으로 나가야 하고, 수건도 휴지도 아무 것도 없다. 방만 빌려주면서 4만원을 받는 해변 숙소의 실정이 여자 혼자로서는 좀 씁쓸했다. 잠바와 바지를 껴입고 잠을 청했다.
셋째날 새벽 설잠을 깨고 나가보니 주룩주룩 비가 내린다. 잔뜩 찌푸린 날씨에 코 앞의 바다는 성이 났나보다. 몰아치는 비바람에 파도가 아픈 소리를 낸다. 무서워 걸을 용기가 나지 않는다. 어제 무척 힘들었던 다리와 무릎까지 시큰거린다. 다시 들어와 누웠다. 씻지도 못하고 덜덜 떨면서 간신히 조금 잠을 잔 탓인지 온몸이 뻐근하고 근질거린다. 그렇다고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무엇 때문에 혼자 떠나왔는가? 스스로 이겨내야 하지 않는가? 편의점에서 산 초코파이랑 우유를 먹고 기운을 차렸다. 단단히 따뜻한 옷에 우비를 입고 우산을 들고 나섰다. 해변 끝으로 커다란 둥근 탱크 같은 건물이 궁금했다. 젖혀지고 날아가는 우산을 꼭 붙잡고 앞만 보고 걸어 가보니 고리 원자력 발전소이다. 잘못 들어선 길을 되돌아 나오니, 4코스 간절곶 진하해변 가는 길은 완전히 대형 트럭이 쌩쌩 다니는 찻길이다. 가장자리에 바짝 붙어서 조심조심 가는 길에 사정없이 빗물이 튀긴다. 차에 치이지 않을까 공포심은 자꾸만 후회를 자극한다. 우산을 꼭 쥐느라 묵주알을 굴리지도 못한 채로 로사리오 기도 드리기를 쉬지 않았다. 다시 해변 가는 길로 접어드니 비바람은 더욱 거세졌다. 신망항, 평동항 방파제를 지날 때에는 우산이 뒤집히더니 아예 찢어져버렸다. 얼굴을 때리는 성난 바닷바람을 맞으며 나사항 나사해변을 지나 커다란 소망 우체통이 서 있는 곳, 해가 가장 먼저 뜬다는 간절곶에 간신히 도착했다. 부산 구간을 끝내고 울산으로 들어선 셈이다.
이런 날이면 팔부터 손이 너무도 저리고 찌릿찌릿 아파온다. 하지만 몇 미터씩 높이 치솟아 신전 기둥을 방불케하는 저 동해 파도 장관을 놓칠 수가 없다. 흔들리는 카메라를 목에 건 채로 울부짖고 때려대는 폭풍우의 파도를 연사로 마구 찍어댔다. 잦아들기는커녕 더욱 강력해진 비바람은 나를 울부짓는 파도의 바다 속으로 밀어버릴 것만 같았다. 무거운 배낭에도 불구하고 정신없이 뛰었다. 반짝 불빛 보이는 레스또랑에 들어갔다. 우비를 벗고 몸을 추스리고 앉아 배도 고픈 차에 스파게티와 와인 한 잔으로 나를 달랬다. 목표지까지 5km 남은 지점이다. 저 광풍 노도의 해변을 도저히 걸어서는 못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보여행이지만 하는 수 없이 콜택시로 진하해변엘 왔다. 호텔들의 현란한 불빛 속에서 작은 모텔을 골라 여장을 풀었다. 어제 씻지 못한 깝깝함과 해풍 추위를 따뜻한 물로 씻었다. 포근한 침대 속으로 들어가니 꿈만 같다. 남쪽 해안 비 소식에 놀란 듯 아들 며느리 문자 톡이 쇄도한다. 홀로 걷는 여행에는 더우기 질풍노도의 해변을 걷는 길에는 굴곡의 역경을 뛰어넘는 용기와 도전, 지치지 않는 끈기로 끊임없이 나를 사랑하는 열정이 더해야함을 실감하였다. 지금까지의 내 삶이 그렇듯, 이 모든 것을 견뎌낼 수 있도록 큰 힘을 주신 분께 감사했다.
*해파랑길 시작점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
*오륙도 스카이워크, 해파랑길 안내 리본, 이기대 해안 이정표, 절경 모습들
*이기대 해안 절벽에서 바라본 광안대교, 마린시티의 아련한 모습
*이기대 해안 두 기녀에게 바친 박상호 시인의 시비
*해녀들의 막사, 해삼 멍게 파는 모습
*이기대 해안 산책로 끝지점 나무 데크에서 선명하게 보이는 광안 대교
*햇살 가득 내린 용호만 부두에서 광안대교 마린시티를 배경으로
*이해인 수녀님의 수녀원이 있는 광안대교를 배경으로
*광안리 해수욕장에 세워진 해녀상에 기대어
*내 필수품을 다 담은 7.5kg의 빨간 배낭,모자,물병,보호대, 차단 마스크,벗은 양말...
*해운대 영화의 거리 모습
*해운대 저녁 바다의 풍경과 '해운대에 올라' 시비, 모래밭 꼬마들의 소꿉장난
*첫날 해운대 미포 나의 숙소 게스트 하우스 '레움'
*해운대 미포에 첫날 석양이 곱게 물들고
*둘째날 아침 해운대 미포 새벽 달님의 보호를 받으며
*미포의 새벽 하늘에 희미한 여명이 시작되고
*폐철로 기찻길에 태극기 바람개비 조형물, 기찻길 풍경,송정역,
*평일 너무도 조용하고 한적한 송정해수욕장 모래밭
*해동용궁사의 미륵부처님, 부처님 오신 날 맞는 풍경
*춘원 이광수님의 '바다도 좋다하고 청산도 좋다거늘' 시비
*대변항 타일벽에 새겨 놓은 시비
*대변항 기장 멸치 축제를 준비하는 모습들
*기장 죽성만에 갈매기떼들이 날고
*기장 죽성만의 드림세트장 유럽풍의 언덕위 빨간 성당
*두호항 해녀상, 갈매기들과 친구하고
*커다란 배 조형물이 있는 일광 해수욕장
*빨강 등대 초록 등대 하양 등개가 아름다운 임랑 해수욕장
*둘째날 부산 2코스 3코스를 함께 걸은 34km, 6만 걸음이 넘는 활동 기록표
*셋째날 아침 임랑해변 반사경에 비친 비가 내려 우산 뒤집혀진 내 모습
*비바람에 갈매기들은 날지 않고 방파제에 저마다 앉아 있다.
*내가 묵은 편의점 세븐 일레븐 뒤 민박집, 임랑해변 풍경, 5일장에서 오렌지 과일들을 사먹고
*울산으로 넘어와 소망우체통이 있는 간절곶의 풍경
*폭풍우 광풍 속의 동해 파도가 뿜어낸 장관
*간절곶 '카리브' 레스또랑에서 쉬며 스파게티와 와인을
*폰의 손자사진을 보며 뜨겁고 향긋한 카페라떼 한잔으로 마음을 달래고
첫댓글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나만큼 사랑할까?
지금까지 대견스러운 나에게
축배 건배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