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작법...宋 河 春 <소설가/ 대학 교수> </h>
제 목 : 3장/ 출발 - 소설의 길 떠나기.
(2) 작가와 서술자와 작중인물
여기까지 말이 나왔으니, 서술자에 대해서도 좀 더 설명을 하고 넘어가야겠다.
소설은 누가 말하는가. 사실 말이지, 맨 처음 소설쓰기를 시작하다보면, 작가 또는 서술자의 위치를 설정하는 일만큼 어려운 문제도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작가가, 자기 할말을 직접 전달하지 않고, 작중인물을 대신 설정하여 그를 시켜서 말하는 데서부터 생긴 현상일 것이다.
그렇다면,이제 쓰게 될 소설은 작가 자신이 말할 것인가, 따로 화자를 설정하여 말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작중인물한테 시킬 것인가. 이때 작가는 어느 정도, 어떤 식으로 소설 속에 개입하며, 화자와 작중인물과는 각각 어떤 관계를 우지할 것인가.마찬가지로, 화자의 역할은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 작중인물은 또 어떤가. 쓰기 전에 미리 확인해야 할 사항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1. 서술자가 분리된 경우
작가와 서술자와 작중인물은 원래 남남이다. 작가가 서술자를 설정하고, 서술자가 곧 작중인물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작가는 오히려 그들을 각각 독립시켜주어야 한다.
『그가 다방으로 들어가자 모두들 요란스레 일어나서 그를 포옹했다. 그리고 안락의자와 걸상들을 끌어다가 난로 주변에 큰 반원 모양으로 둘러앉았다. 강석영씨가 곧 김혜자 여사에 대한그의 의견을 물었다.』
대개의 소설들은 이런 서술형태를 갖고 있다. 흔히 3인칭 서술이라고 하는 것들이다. 3인칭 서술이라면 윗 글에서 <그>나 <강석영>씨가 서술한다는 말일 텐데,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다시 이 글을 주의 깊게 관찰해보면, 우리는 그 안에 각각 기능이 다른 두 부류의 인물이 들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방으로 들어가는 그와,그를 포옹하는 사람들이 그 하나요, 또 하나는 <그가 다방으로 들어가자 모두들 요란스레 일어나서 그를 포옹했다>고 말한, 그 사람이다. 맡은 바 임무에 따라, 앞의 사람들을 행위자 또는 작중인물이라고 한다면, 뒤의 사람은 서술자 또는 화자가 된다. 작중인물들은 또한 <안락의자와 걸상들을 끌어다가 난로 주변에 큰 반원 모양으로> 둘러앉기도 한다.
그러면 또 서술자는 그들이 그렇게 했다고 독자들한테 말해준다. 서술자와 행위자, 소설은 크게 보면, 그 두 부류의 인물들이 꾸려 나가는 이야기다.
윗 글은 작중인물과 서술자가 비교적 냉정하게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서술방법이다.
서술자가 행위자를 간섭하지도 않고, 행위자가 서술자로부터 행동의 제약을 받지도 않는다.
이런 소설일수록, 서술자의 존재가 희미하고, 그 대신 작중인물들의 행동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소설에서, 행동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그러나 그만큼 인물의 심리상태나 감정표현이 약화될 우려가 있으니까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서술자가 작중인물을 갑섭 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김혜자 여사가 빠른 시일 안에 이혼하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자,
강석영씨는 가슴이 덜덜 떨리고 숨이 막혀 와서 견딜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김혜자 여사가 자기 남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안다면, 절대로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일 때문에 혹시 강석영씨와 그가 사이가 나빠진다면 야단이다.』
서술자가 행위자를 간섭하면 이렇게 된다. 서술자의 몫이 끼어 든 만큼, 여기서는 행동이 줄어들었다. 이때 서술자의 몫이란, 글의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해주는 일이다. 그는 작중 인물들의 사상 감정을 표현해주기도 하거니와,서술자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까지도 표현해준다, 소설을 생각이나 감정의 표현 없이, 행동으로만 일관하기란 매우 어렵다. 행동과 묘사가 알맞게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너무 객관적 태도만을 고집하여 행동으로만 일관시킬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너무 서술자 일방적이어서 행동을 약화시키면, 소설이 무기력해져서 안 된다. 그 두 가지를 조화시키는 일이 바로 서술자가 할 일이다.
『김혜자 여사를 이해할 수 가 없다, 그 여자만 보면 언제나 먼 바다를 보듯 막막하기만 하다.
이혼은 안 된다.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이혼은 사랑의 종말일 뿐만 아니라, 인생의 종말이기도 하다. 화약을 짊어지고 불 속으로 뛰어들듯, 김혜자 여사가 지금 그 길을 가고 있다.
답답하다. 남의 일이건만, 그것이 내일인 것처럼 가슴 답답하다.』
행동이 약화되어서 생긴 소설의 무기력증세란 이런 것이다. 이른바 서사적 골격이 약하다는 말인데, 이는 서술자의 간섭이 너무 행위자를 압도한 데서 생긴 불균형 현상이다. 행위자의 역할이 줄어들고, 그 대신 서술자의 입김이 강해지면, 자칫 작가와 서술자 사이에서도 혼돈이 일어나기 쉽다. 서술자의 말이 곧 작가의 말인 것처럼, 그래서 그것이 소설 아닌 수필이나 논설문처럼 우리에게 전해져 오는 것이다. 소설의 서술자가 곧 작가는 아니다.
그는 매편 소설을 다시 쓸 때마다 작가의 머릿속에서 새로 태어나는 무형의 카메라와도 같다.
서술자는 작가와 작중인물과의 중간지점에 서 있어야 한다. 그 관계는 등거리관계다.
2. 서술자가 일치된 경우
그 등거리관계를 유지하되, 이번에는 거리를 아주 좁혀서,작가와 서술자와 작중인물을 아주 하나로 일치시켜버리는 방법도 있다.
『스물 세 살이오 - 3월이오 - 각혈이다.여섯 달 잘 기른 수염을 하루 면도칼로 다듬어 코밑에 다만 나비만큼 남겨 가지고 약 한 재 지어 들고 B라는 신개지 한적한 온천으로 갔다.
게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 그러나 이내 아직 기를 펴지 못한 청춘이 약탕관을 붙들고 늘어져 서는 날 살리라고 보태는 것은 어찌하는 수가 없다. 여관 한 등 아래 밤이면 나는 늘 억울해 했다. 사흘을 못 참고 기어 나는 여관 주인 영감을 앞장세워 밤에 장고소리 나는 집으로 찾아갔다.』(이상, 봉별기)
이 경우 <나>는 행위자이면서,서술자다.내가 수염을 깎고 온천으로 갔으면서도, <나>가 그것을 그렇게 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때 독자들은 행위자인 나와 서술자인 나를 전혀 분리해서 생각하지 못한다. 완전한 한 사람으로 착각한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그<나>가 마치 이 소설을 쓴 작가라고까지 믿어 버릴 지경이다. 많은 독자들이 이상을 병들고 괴팍한 사람으로 믿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실제 인물 이상은 아주 생활적이고 이성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 서야 이만한 소설을 쓸 수도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다만, 그가 병적으로도 퇴폐적인 인물을 그 안에 설정했다는 점이다.그리고는 그것이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서술자를 내세워 말하게 한 것이다.
1인칭 서술방법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이렇게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이 성공한 것은 작가의 냉철한 이성으로, 각각 다른 작중인물과 서술자와 작가가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일치시킬 수 있었던 점에 있다. 1인칭 서술이 완전하게 <나>하나로만 이루어진 인물이어야지, 그 안에 작가의 육성이 들린다거나,작가가 따로 분리된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저는 문학가 문사라는 칭호를 원치 않아요. 다만 참사람이 되기 위하여 글을 봅니다.
그리고 느끼는 바를 견딜 수 없었습니다.그리고 나와 같은 느낌과 깨달음이 위 인생을 위하여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하였습니다. 그러나 더 일 개인의 성공은 얻기가 어려울 터이지요. 제가 느끼고 깨닫는 것은 길고 긴 우주의 생명과 함께 많고 많은 사람들이 깨달은 것에 다만 몇 천만 억 분의 일이 될락말락할 터이지요.』(나도향, 별을 안거든 우지나 말 걸) 이 글은 1인칭 서술이면서 작가의 육성이 직접 들리는 경우다. 그러자 서술자도 없어졌거니와, 작중 인물도 따로 있는 것 같지 않다. 작가가 바로 서술자이고, 그 작가가 또한 작중 인물인 셈이다. 그래도 이 경우는 세 사람이 하나로 일치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마치 작가가 직접 소설 속에 들어와 앉은 것처럼,서술자의 존재만 커졌을 뿐, 등거리관계가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도향은 글이 초기작에서 이 점을 극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감상적인 작가,아직 어린 작가라는 지적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물레방아> <뽕> <벙어리 삼룡이>에 와서 달라졌다. 마침내 작가 자신의 육성을 배제하고, 그 대신 작중인물한테다 자신의 사상이고 감정이고를 떠맡길 수 있었던 것이다.
흔히 말하는 1인칭 관찰자 서술이란 이와는 아주 다른 방법이다. 인칭만 <나>로 되었을 뿐이지, 이 방법은 서술자와 행위자가 완전히 분리되었기 대문에, 따지고 보면 작가 관찰자 서술이나 같은 설명이 되고 마는 것이다. 앞서 예문을 제시한 <소문의 벽>은 1인칭 관찰자 서술의 좋은 예다. 거기서 <나>는 행위자가 아니라 관찰자요,서술자다. 행위자는 <박준>이다.
서술자의 역할이 커진 만큼, 여기서도 <나>가 작가와 동일시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그 또한 서술자가 곧 작가는 아니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기와 서술자와 작중인물은 어쨌든 확실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3. 상황과 인물의 조화
소설의 처음을 어떻게 시작하는가, 하는 물음은 바꾸어 말하면 인물을 어떻게 등장시키는가, 배경을 어떻게 설정하는가, 그리고 그 인물들은 설정된 배경 안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어떤 심경을 유발하는가,하는 물음과도 통한다. 결국 도입부에 배경을 먼저 설정하고 그 배경 위에 인물을 등장시키느냐, 아니면 인물을 먼저 등장시키고 그 다음에 그의 환경을 제시 하느냐의 물음이 되겠는데, 그 어느 것을 먼저 제시하고 나중에 제시하느냐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다만 그 두 가지가 서로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장차 소설의 진행을 예시하도록 할 것인가에 우리는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여름 방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여 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마을사람들은 거지반 돌아간 뒤요,
팔리지 못한 나무꾼 패가 길거리에 궁싯거리고들 있으나 석유병이나 받고 고깃마리나 사면 족할 이축들을 바라고 언제까지든지 버티고 있을 법은 없다. 춥춥스럽게 날아드는 파리떼도 장난군 각다귀들도 귀치 않다. 얽둑배기요 왼손잡이인 드팀전의 허생원은 기어코 동업의 조선달에게 낚아보았다. "그만 거둘까?"』(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영달은 어디로 갈 것인가 궁리해보면서 잠깐 서 있었다. 새벽의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밝아오는 아침 햇볕 아래 헐벗은 들판이 드러났고, 곳곳에 얼어붙은 시냇물이나 웅덩이가 반사되어 빛을 냈다. 바람소리가 먼데서부터 몰아쳐서 그가 섰는 창공을 베면서 지나갔다.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수십여 그루씩 들판가에서 바람에 흔들렸다.』
(황석영, 삼포 가는 길)
`메밀꽃 필 무렵'은 먼저 배경을 설정하고, 나중에 인물을 등장시킨 예다.그런가 하면 `삼포 가는 길'은 인물을 먼저 등장시키고, 그 다음에 배경을 제시한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윗 글에서 그 어느 쪽을 막론하고 인물과 배경을 바꾸어 제시한다 하더라도 그 의미가 달라지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다. 그 만큼 인물이 먼저냐, 배경이 먼저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데,문제는 다만, 그것들이 어떻게 어울려서 독자의 관심을 유발하고, 장차 벌어질 이야기를 예시하는지를 우리는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천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메밀꽃 필 무렵'과 `삼포 가는 길', 이 두 소설의 시작이 그 점을 도와줄 것이라고 믿는다.
원래 이 두 작품을 전혀 성격이 다른 소설이었다. `메밀꽃 필 무렵'이 자연을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하면, `삼포 가는 길'은 각박한 삶을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애환이라고나할까, 어쨌든 그만큼 대조적이다. 그 대조적인 성격을 형성하기까지, 처음에 소설의 시작은 각각 어떠했던가. 그 형성과정을 보면, 애당초 소설의 첫머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두 소설의 첫 장면은 다같이 파장이다. 하나는 장돌뱅이들의 오일장이 파하는 장면이고, 또 하나는 공사판 노동자들의 한철 공사가 끝나는 장면이다. 그들은 일정하게 정착된 생활을 누리지 못하고 항상 일거리가 있는 곳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뜨내기란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나 그 첫 장면을 좀더 주의 깊게 관찰하면 우리는 두 파장에서 아주 반대적인 개념으로 달라진 몇 가지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메밀 꽃 필 무렵'의 <여름>과 `삼포 가는 길'의 <겨울>, 이런 식으로 <오후>와 <아침>, <무더위>와 <강추위>,<늙은이>와 <젊은이>, <시장>과 <공사판>등, 시간과 공간이 의도적이다 싶을 만큼 정반대로 다른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사항이 바로 작중인물의 심경이다. <파장>의 <뜨내기>란 점에서는 입장이 같지만, 그 시간적 배경에 따른 환경의 차이에 따라 각각 어떤 심경의 변화가 야기될 수 있는가를 우리는 보게 되는 것이다.
`메밀꽃 필 무렵'의 허생원 장돌뱅이다. 장돌뱅이들한테 오일장이란 닷새만에 한 번씩만 장사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실지로는 매일 장이 서는 셈이나 마찬가지다. 날짜만 다를 뿐이지, 오일장은 도처에서 날마다 세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오늘 파장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내일 다음 장이 서는 곳을 찾아가면 그만이다.
따라서 장돌뱅이들의 파장이란 생계의 파업이 아니라, 이장에서 다음 장으로 옮겨 가기 위한 일상적 행위에 불과하며, 그러므로 어느 면에서는 생계의 위협이 아니라 일종의 휴식시간이 될 수도 있다. `메밀꽃 필 무렵'의 시간은 바로 그런 일상적 변화에 따른 휴식의 의미를 띤 <밤>동안이라는 점에 특징이 있다. 따라서 휴식의 <밤> 으로 진입하는 허생원의 심경이 결코 어두울 필요만은 없는 것도 당연하다. <봉평장에서 한번이나 흐뭇하게 사본 일 있을까. 내일 대화방에서나 한몫 벌어야겠네> 라고 말하던 허생원의 심경이 곤궁하기는 할지언정 타산에 얽매여 짜증스런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오늘 일이 끝나서 홀가분하고, 다음 장이 있어서 막막하지 않다는 정도의 일상적 기분이 잘 나타나 있다.
`메밀꽃 필 무렵'의 파장은 생계의 파업이 아니라, 휴식의 시간으로 진입하는 유쾌한 출발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삼포 가는 길'으 영달은 공사판 노동자다. 공사판 일이란 그 성격상 겨울 한철을 쉴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그것은 영달의 경우뿐만이 아니라, 공사판 노동자들 대부분이 겪는 현상이다. 그리고 그 기간은 장기적이다. 따라서, 공사판 노동자들의 파장이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생계의 문제와도 직결된다. `삼포 가는 길'의 시간은 이와 같이 노동을 지속할 수 없는 <겨울> 한철 동안이라는 점에 특징이 있다.
이러한 위협의 시간 속으로 진입하는 영달의 심경이 결코 밝을 수만은 없다는 점 또한 허생원과 대조를 이룬다. <영달은 어디로 갈 것인가 궁리해보면서 잠깐 서 있었다>와 같은 첫 줄은 매우 망연한 심경이다. <홀가분함>과 <망연함>, 이와 같은 두 심경은, 같은 <파장>의 <뜨내기>들이지만 그 직종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대조적인 차이다.
여기다가 <여름>날 <오후>의 <무더위>와 <겨울>날 <아침>의 <강추위>가 또한 흥미로운 대조를이룬다. 여름은 노동자들한테,특히 뜨내기들한테는 성수다. 일거리가 많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일상생활을 해 나가는 데도 훨씬 구속을 덜 받는다. 그러나 겨울은 반대다.
일거리도 적을 뿐더러 일상생활에서도 훨씬 불편하다. 이 점에서만도 영달이 허생원보다 우울한 것은 당연하다. 거기다가 또 한 일거리가 있는 사람의 <오후>와, 없는 사람의 <아침>은 아이러니컬한 대조를 이루기조차 한다.
말하자면, 일거리가 있는 사람은 휴식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은 사람한테 더 좋은 일이 생긴 격이요, 일거리가 없는 사람한테는 무의미한 시간만 많아져서,나쁜 사람한테 더 나쁜일이 주어진 격이다. 여기에 <오후>의 <무더위>가 식어 갈 <저녁> 시간이 허생원한테는 기약이 되어 있고, <강추위>가 계속될 <겨울>이 영달 앞에는 다가서 있다.
<여름>날 <오후>의 <무더위>와, <겨울>날 <아침>의 <강추위>는 같은 <파장>의 <뜨내기>들 한테지만 그만큼 다른 심경의 변화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홀가분한> 심경과 <망연한> 심경, 이것은 확실히 두 소설이 설정한 첫 장면의 대립적인 요소들로부터 생긴 현상으로서, 상황과 인물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도입부의 좋은 본보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