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권
제 3장 대소림사(大少林寺)
-1
후원(後園).
폭설이 분분이 흩날리는 후원 한 가운데서 하후성은 잿빛 하늘을
우러러 보며 서 있었다. 너무나 큰 타격이 그의 정신을 산산조각
으로 만들었는지 그의 얼굴은 무표정해 보였다.
문득 하후성은 허리를 굽히더니 눈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손가락
이 시퍼렇게 되었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하얗게 얼어버렸다.
잠시 후 맨땅이 나왔다. 돌처럼 단단히 얼어붙은 땅이었다. 그러
나 하후성은 그 언 땅을 맨 손으로 파헤쳤다.
피(血). 새빨간 피가 손톱 사이로 흐르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에는
양 손이 온통 벌겋게 피로 젖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아픔
을 느끼지 못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땅에 커다란 구덩이가 생겼고 그제서야
하후성은 손을 멈추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된 부친 하후연을 곱게 헝겊으로 싼 뒤 정성스레 안아들고 후원으
로 다시 내려왔다.
시신을 구덩이에 넣은 그는 한참 동안 멍하니 굳어졌다.
그러나 그는 이내 다시 손으로 구덩이를 묻어 조그만 봉분을 만들
었다. 그 위에 눈이 쌓이기 시작했고 눈 위에는 또한 점점이 선홍
빛 핏방울이 묻어나고 있었다.
바로 하후성의 손에서 떨어지는 피였다. 하후성은 넋이 나간듯 봉
분을 내려다보았다.
"아버님......."
그는 나직히 뇌이며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크흑!"
다시금 진한 통곡(痛哭)이 그의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뜨겁게 솟아
올랐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참으며 아홉 번 절을 한 다음
비틀비틀 일어났다.
"어머님을 찾겠어요. 그러나 아버님....... 외증조부만은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결코......."
하후성은 입술을 짓씹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버님은 용서하실지 몰라도... 저는 절대로 외증조부를 용서하
지 못할 것입니다."
하늘(天).
잿빛의 하늘은 어느덧 기울어가고 있었다.
아침인가?
동녘의 하늘이 밝아 오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실은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텅 빈 하후성은 지금이 아침인지 저녁인지
조차 분별할 능력을 잃고 말았다.
벌써 오일(五日)째 계속되는 눈발은 조금도 그칠 줄을 모르고 있
었다.
하후성은 계속 잿빛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한 사람이 더욱 미치도록 그리워졌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모
든 것을 이야기하고 통곡하고 싶었다.
'황(皇).......'
눈물이, 메말라 나오지 않았던 눈물이 비로소 흘렀다. 그러나 하
후성은 소맷자락으로 즉시 눈물을 닦았다.
'울지 말자! 울지 말자....... 나는... 대장부(大丈夫)다. 오늘
이후로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울지 않을 것이다!'
하후성은 내심 이렇게 외치며 다시 하늘을 보았다.
그의 눈(眼)속에 눈(雪)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녹아 물이 되
어 흘렀다.
봉산진(鳳山鎭).
독고황이 사는 장원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곳은 풍설(風雪)만 사
납게 몰아치고 있을 뿐 인기척 하나 없이 텅텅 비어 있었다.
독고황도 괴이한 두 백발괴노인도 그 누구도 없었다. 장원은 온통
눈에 덮인 채 죽음같은 적막에 싸여 있었다.
텅 빈 독고황의 방(房).
"......!"
그곳에 하후성이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눈은 독고황이 사용하던 탁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탁자 위에
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그로 미루어 오래 전에 사람이 떠났음을
알 수가 있었다.
휘-- 이-- 잉!
열린 창문으로 을씬년스런 바람과 함께 눈보라가 밀려들어 왔다.
하후성은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황....... 너는 또 어디로 갔는가?'
뼈저린 외로움은 두려움으로 변하여 그를 엄습했다. 탁자 위에 벼
루로 눌려진 한 장의 종이가 눈에 띈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것은 한 통의 서찰로 하후성은 웬지 그 서찰을 펼쳐 보기가 두
려운 느낌이 들어 한참 동안 집어들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창밖으로 눈길을 던졌다.
휘-- 이-- 잉--!
바람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눈(雪). 눈은 끝도 없이 내리고 있었다.
하후성은 으스스한 한기를 느끼며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춥... 다.......'
내심 이렇게 중얼거린 그는 드디어 서찰을 집어 들었다. 서찰을
든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서찰의 봉서가 들려지자 곧 웅혼무비한 서체(書體)가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소성(小星), 말없이 떠나는 나를 용서해다오. 지난 오년간 너와
같이 지낸 세월은 진정 즐거웠다. 창문 밖에서는 눈발이 약간 내
리고 있다. 하늘이 잿빛인 것을 보니 폭설(暴雪)이 내릴 것 같다.
소성, 너도 지금 이 눈을 보고 있겠지? 지금 나의 마음은 지극히
슬프다. 소성, 너도 이해하겠지? 너를 만나보고 떠나고 싶었지만
왠지 서로의 마음만 더 아플 것 같아 그대로 떠난다.......>
"황......."
하후성은 여기까지 읽고는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결국... 너도... 떠났구나......."
하후성은 불어오는 한풍에 다시 몸을 으스스 떨었다. 그는 잠시
망연히 있다가 서찰을 마저 읽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고 싶으냐? 묻지마라, 나도 모른다. 목
적지는 없다. 단 한가지 일을 완수하기 위해 천하를 주유해야만
한다. 그 일이 무엇이냐고 또 묻고 싶겠지? 소성(小星), 그것은
말할 수 없다. 봉산진(鳳山鎭)에서 오년 동안 산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하후성은 또다시 멍해졌다.
'그 일 때문에 이곳에 살았었다고? 그 일이 대체 무엇이길래? 황,
너는 온통 비밀 투성이구나.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모
두.......'
서찰은 다시 이어졌다.
<......소성(小星), 날씨가 춥다. 너는 몸이 약해서 병이라도 걸
릴까 근심이 되는구나. 소성, 진정 보고 싶다. 앞으로 더욱 그렇
겠지. 그러나 볼 수가 없구나. 언제 너와 내가 만나게 될지는 나
역시 기약할 수가 없다. 너무나도 험난한 나의 운명(運命) 때문이
다. 그러나 소성, 걱정하지 말아라. 나는 강하다. 어떤 일에도 굴
복하지 않을 것이다. 소성, 눈발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 옆에서
두 노인이 갈 길을 재촉한다. 소성, 이제 필(筆)을 놓아야겠다.
눈시울이 젖는다. 소성, 그럼.......
성(星)을 가장 좋아한 벗 황(皇).>
하후성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툭!
서찰이 힘빠진 그의 손에서 떨어졌다.
'황.......'
갑자기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하후성의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치밀
고 올라왔다. 그리고 정신이 빙글빙글 돌며 아득해졌다.
쿵!
하후성은 머리를 탁자에 박았다. 폭설이 퍼붓는 이 사흘 동안 벌
어진 일은 어린 그에게 감당할 수 없는 타격을 주고 말았다. .
첫째 날은 할아범의 사(死).
둘째 날은 부친 하후연의 사(死).
그리고 마지막 날은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벗 독고황과의 이별!
하후성은 머리를 탁자에 박고 내심 피맺히게 중얼거렸다.
'단 사흘동안... 모든 것이 단절되고 말았구나.'
하후성의 가슴이 터질 듯이 압박되었다.
'모든 것이 나의 곁을 떠났다, 모두! 이제 나의 주위에는 아무도,
아무도 없다!'
휘-- 이-- 잉!
풍설이 방안을 다시금 을씬년스러운 한기로 가득 채웠다.
하후성은 문득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그
의 안색이 기이하게 변했다.
'그렇다. 모든 것이 다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
은.......'
하후성의 시선이 창을 통해 설풍에 가려진 웅대한 하란산으로 향
했다.
'하란산(賀蘭山)! 하란산만은 여전히 변치 않는다. 그리고, 그리
고 그 천년(千年)의 고목(古木)도!'
갑자기 하후성은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
났다. 그는 방을 뛰쳐 나가더니 눈속에 푹푹 빠지며 뛰기 시작했
다.
천년고목(千年古木).
위-- 이-- 잉--! 위-- 이-- 잉--!
거센 풍설(風雪)이 언덕을 할퀴듯 후려치고 폭설이 천지를 뒤집었
다. 그러나 하란산 기슭에 우뚝 서 있는 천년고목은 설화(雪花)를
가득 피워낸 채 의연히 서 있었다.
눈에 반쯤 묻히다시피하며 나타난 한 소년, 하후성이었다.
그는 고목나무 아래까지 비틀거리며 다가와 멍하니 고목을 응시했
다.
풍설에 옷자락이 찢어질 듯 휘날렸으나 하후성은 조금도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그저 우두커니 선 채 고목만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어려서부터 나는 이곳에서 아버님이 돌아오시기를 기다려 왔다.'
하후성의 얼굴에 감회가 어렸다.
'그리고 오년 전 바로 이 자리에서 황(皇)을 만났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다시금 솟구쳤으나 하후성은 소맷자락을 끌
어 당겼다.
'또... 눈물이 흐르려 하는구나. 울지 않겠다고 맹세해 놓고.'
하후성은 입술을 악물었다. 어찌나 세게 물었던지 입술이 터져 핏
기가 비치고 있었다.
그는 고목 곁으로 다가가더니 고목에 두텁게 붙어있는 눈을 손으
로 털어내기 시작했다. 얼어붙어 단단했지만 그는 참을성 있게 눈
을 모두 떼어냈다.
나무결이 보이는가 싶더니 곧 그곳에 칼로 새긴 두 개의 이름이
나란히 드러났다.
<독고황(獨孤皇)>
<하후성(夏候星)>
하후성은 떨리는 손으로 글씨를 어루만졌다.
그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어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시
선은 글씨 밑으로 내려가다 흠칫했다. 그곳에 새롭게 새겨진 글씨
가 얼핏 보였던 것이다.
하후성은 다급히 다시 눈을 털어냈고 비로소 선명하게 새겨진 글
씨가 드러났다.
<다시 만날 그 날까지 변치 않는 우정(友情)을 위하여.......>
하후성의 가슴이 격렬한 진동을 일으켰다.
"황(皇)!"
그는 가슴이 터져라 허공을 향해 외쳐댔다. 그의 만면에는 기쁨의
미소가 가득 떠올라 있었다.
"황(皇)!"
그의 외침은 눈보라를 뚫고 멀리멀리 대륙 끝으로 퍼져나가는 듯
했다. 반면 외침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육신은 기진하여 허물어지
고 있었다.
스르르.......
하후성은 힘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끼자 고목나무에 몸을 기댔다.
그러나 그대로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었고 눈은 도무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
다.
하후성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무척이나 많이 내리는군.'
졸음이 밀려 들었다.
'졸린다. 조금만... 잘까?'
하후성의 눈이 서서히 내리감기고 있었다. 어디선가 꿈결처럼 아
득히 독고황의 음성이 들렸다.
- 소성(小星)! 잠들지 마라. 잠들면 죽는다!
하후성은 씨익 웃었다.
'황, 조금만 잘께. 무척이나 몸이 피곤해. 그러고 보니 난 사흘
동안 밥 한 끼, 물 한 모금 안 먹었단 말야. 부탁이야, 조금
만.......'
- 안돼! 소성(小星), 일어나라!
하후성은 서서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 너의 말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아. 자고 나면...
자고 나야만 모든 것이... 새로워질 것 같거든.......'
하후성의 두 눈은 완전히 감기고 말았다.
휘-- 이-- 이-- 잉--!
풍설(風雪)이 몰아쳐 그의 몸을 눈으로 덮었다.
차츰 그는 설인(雪人)이 되어가고 있었다. 평화롭게 잠든 그의 얼
굴에는 천진하고 행복한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무슨 좋은 꿈이라
도 꾸고 있는 것일까? 꿈속에서 누구라도 만난 것일까?
독고황? 아니면 부친을.......
그것도 아니면 얼굴은 모르지만 사무치게 그리운 어머니라도 만나
는 것일지....... 혹은 할아범, 다정한 충복 할아범을 만나 바둑
이라도 두는 것일까?
하후성의 얼굴에 떠도는 미소는 점점 짙어졌다. 그러나 몰아치는
눈발이 곧 그의 머리와 얼굴마저 덮어씌워 잠시 후에는 그 미소조
차 볼 수가 없게 되었다.
하후성은 완전히 눈덩이로 화하고 있었다.
이대로 그는 외로운 세상을 떠나 다정한 사람들을 만나러 가려는
것인가. 그렇게도 빨리.......
휘-- 휘-- 이-- 잉!
풍설은 더욱 천지간에 혼돈을 일으킬 듯 휘몰아쳤다.
눈(雪).
눈이 대지(大地)를 삼키고 있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듯 거센 움직임이 그곳에서 일었다. 눈보
라를 뚫고 언덕 위 고목나무를 향해 치솟아 오르는 한 인영(人影)
이 있었던 것이다.
과연 초자연의 증명이련가? 인영은 이십 장(二十丈)을 단숨에 날
아와 고목 아래에 당도했다.
그는 전신에 회색승포를 입은 노승(老僧)으로 일견하기에도 백 세
(百歲)가 넘어보이는 창노한 모습이었다.
홍안의 노승.
그의 양미간에는 기이하게도 붉은 홍점(紅點)이 나 있었다. 그리
고 흰 눈썹에 눈송이가 얹혀 그의 눈썹은 더욱 길어 보였다.
회의노승은 고목 아래에 내려서자마자 고목에 기대앉은 채 설인이
되어 있는 하후성을 발견했다.
"아미타불......."
그는 침음성으로 불호를 외우더니 급히 눈을 헤쳤다.
잠시 후 앉은 채 굳어있는 하후성을 발견한 노승은 경악성을 터뜨
렸다.
"오! 진정 큰일날 뻔 했구나! 조금만 늦었다면 천고의 기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뻔 했다. 아미타불... 관세음......."
노승은 곧 조심스럽게 하후성의 맥(脈)과 호흡을 살핀 다음 그를
안아 들었다. 그는 동정의 눈빛으로 하후성을 내려다 보며 인자하
게 중얼거렸다.
"아미타불... 소사제(少師弟)....... 슬픔이란 순간적인 것, 어찌
한 순간의 비애로 인해 인생을 버릴 수가 있겠는가? 더우기 자네
에게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태산(泰山)같이 많고.. 운명(運命)의
책임이 있거늘......."
휘-- 익!
노승은 하후성을 안고 신형을 솟구쳤다. 눈보라 속에서 그의 중얼
거림이 들렸다.
"백 년(百年) 동안 기다려온 염원일세, 소사제. 기나긴 백 년 동
안 세 분의 선사(禪師)들이 자네를 기다렸네. 이 운명의 만남
을... 아미타불... 과연 대사부(大師父)님의 혜지는 천기(天機)를
맞추셨네. 이곳에 자네가 있는 것까지 맞추실 줄이야......."
휘-- 이-- 이-- 이--잉!
광풍폭설(狂風暴雪).
북방의 대지는 온통 눈보라에 휘감겨 천지색(天地色)을 잃고 말았
다.
오로지 건곤일색(乾坤一色), 눈(雪)... 뿐이었다.
소림사(少林寺).
당(唐) 초엽, 혹은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세워졌다고 하는 소림
사.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천축(天竺)에서 선종(禪宗)의 불경을 가지
고 소림에 들어옴으로써 소림사는 수천 년 무림사(武林史)의 태산
북두(泰山北斗) 격인 존재가 되었다.
면벽구년(面壁九年).
달마대사는 토굴에서 구 년의 면벽을 통해 마침내 무학의 시작이
되는 두 권의 기서(奇書)를 남겼다.
이른바 역근경(易筋經)과 세수경(洗髓經).
이 두 권의 기서로 인해 대소림사의 역사(歷史)는 시작되었다.
그 이후 천 년(千年).
도합 사십이 대(四十二代)를 내려오는 동안 수많은 고승(高僧)이
명멸했다. 그리고 그동안 소림의 무학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특히 소림칠십이비전절예(少林七十二秘傳絶藝)는 달마대사 이래로
소림 최고의 무공(武功)이었다. 그 밖에도 세인들은 수많은 절공
비기들이 소림사에 비장되었다고 알고 있었다.
실제로 작게 나누면 근 천팔백육십 종(千八百六十種)의 비학(秘
學)이 소림에 있었으니 그야말로 중원무학의 보고(寶庫)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림의 역사는 곧 무림의 역사이기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칠백 년 전(七百年前).
희대의 대마두였던 혈세천존(血世天尊)이란 자가 있었다. 그는 전
무림을 피바다로 만들며 혈세교(血世敎)를 일으켰다. 무림은 그의
장하(掌下)에 신음했다.
그러나 결국 혈세천존도 마지막 소림의 관문(關門)에서 야망이 꺾
이고 무너졌다.
오백 년 전(五百年前)의 역사도 마찬가지였다.
강남북무림(江南北武林)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며 무림사상 최고의
고수라고 자부하던 천극수라대제(天極修羅大帝), 그도 역시 최후
에 가서는 소림의 한 무명고승(無名高僧)에 의해 영원히 진토 속
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는 이백 년 전(二百年前).
섭혼마안공(攝魂魔眼功)과 차녀미심대법(叉女迷心大法)으로 전 중
원의 기라성같은 고수들을 치마폭 아래 굴복시키고 마음껏 희롱했
던 절세의 대마녀 천마교주(天魔敎主) 벽안마희(碧眼魔姬), 그녀
조차도 끝내는 소림 고승의 불심(佛心) 아래 눈물을 뿌리며 이 세
상에서 사라졌다.
소림사는 정도무림의 영원한 기둥이었다.
또한 꺼지지 않는 협골(俠骨)이었으며 그 어떤 폭풍 속에서도 의
연히 줄기를 뻗어가는 정의의 가람이었다.
숭산(嵩山) 소실봉(少室峯).
천 년의 역사를 가진 대소림사는 숭산 소실봉 자체를 불문(佛門)
과 무학(武學)의 성지(聖地)로 만들고 있었다.
수많은 법당(法堂)과 불전(佛殿), 석탑(石塔), 그리고 줄지어 건
립되어 있는 법사....... 소림사의 규모는 방대하기 이를 데 없었
다.
그 중 소림오각(少林五閣)을 이르자면 불심각(佛心閣), 장경각(藏
經閣), 세심각(洗心閣), 법화각(法華閣), 천수각(千手閣)이었고
소림오원(少林五院)으로 불리우는 곳은 달마원(達磨院), 수계원
(授戒院), 계도원(戒導院), 선좌원(禪坐院), 지객원(知客院)이었
다.
소림사의 가장 중요한 요지는 바로 이 오각오원(五閣五院)으로 소
림오각은 전선대(前先代)의 장로 이상의 고승들이 관리하며 소림
오원은 현 장문인(掌門人)과 동배의 대사들이 관장했다.
그 밖에도 삼전(三殿)과 팔당(八堂) 삼십육방(三十六房)이 있었는
데 모두가 뛰어난 소림의 고수들이 관장하고 있었다.
특히 삼전 중에서 나한전(羅漢殿)은 소림사의 중들이 무학을 익히
는 곳으로, 저 유명한 소림백팔나한대진(少林百八羅漢大陳)이 이
곳의 주력이었다.
장엄무비한 소림사. 과연 그 누가 대소림을 넘볼 수 있겠는가?
소림의 역사는 끝없이 되풀이 되는 불경(佛經) 읽는 소리와 법괘
소리로 시작되고 있었다.
불심각(佛心閣).
이곳은 소림 깊숙한 위치에 자리잡은 고색 창연한 건물로 당금 소
림에서 가장 배분이 높은 소림삼성승(少林三聖僧)의 첫째인 천심
선사가 관장하고 있었다.
나이가 모두 백오십 세를 넘겼으며 천심(天心), 천뢰(天雷), 천기
(天機)로 이어지는 소림파 최고 배분의 세 고승은 이미 소림의 일
에 관여하지 않은 지 오래였다.
단지 천심선사는 불심각을, 셋째인 천기선사는 장경각을 담당하고
있는 한편, 둘째인 천뢰선사는 괴이하게 소림 내에서조차 아무 것
도 맡지 않고 소림의 금역(禁域)이라 일컬어지는 자죽림(紫竹林)
속에 은거하고 있었다.
이들 천(天)자 항렬의 삼성승은 현 장문인 현공대사(玄空大師)의
사승(師僧)들이었다. 천심선사는 바로 전대(前代) 장문인이었던
것이다.
불심각의 한 정실(淨室).
삼인의 고승들이 침상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침상 위에는 한
명의 백의소년이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하후성(夏候星), 바로 그였다.
그의 안색은 백랍같이 창백해져 있어 핏기라곤 하나도 없었다. 마
치 죽음(死)의 문턱을 이미 넘어서 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세 명의 고승들이 줄곧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중 중앙에 앉아 있는 노승, 그는 이미 불(佛) 그 자체로 보일
만큼 인자하고 장엄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희고 둥그런 얼굴에는 혜광이 감돌고 있었으며 은염이 가슴까지
자라 있었고 백미(白眉)는 귀 밑까지 뻗어 있었다. 더우기 두 눈
은 물처럼 고요했다.
우측의 노승은 주사(朱砂)빛 얼굴에 각이 진 네모 꼴의 위맹한 모
습이었다. 두 눈은 화등잔처럼 활활 타고 있었고 괴팍해 보이는
인상으로 특히 두 팔이 길고 머리가 컸다.
그리고 좌측의 노승은 약간 마른 듯 하나 매우 청수한 용모를 지
니고 있었다. 안색이 다소 창백한 게 흠이라면 흠일까? 그의 두
눈은 끝없는 지혜를 포괄하고 있는 듯 현기가 넘치고 있었다.
이 세 노승은 어찌 보면 오륙십 세로, 또 어떻게 보면 백 세가 훨
씬 넘어 보이기도 하는 신비한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야말
로 일컫기를 소림삼성승(少林三聖僧)이었으니.......
가운데가 천심선사(天心禪師)요, 우측과 좌측의 두 노승은 각기
천뢰선사(天雷禪師)와 천기선사(天機禪師)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강호는 물론 소림의 일까지도 전혀 상관을 하지
않는 삼성승이 한 자리에, 그것도 무명의 소년을 놓고 머리를 맞
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는 실로 믿지 못할 기변(奇變)이 아닐 수 없었다.
왜? 어떻게 하여 하후성이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방안은 침묵에 싸여 있었다. 단지 방안 탁자 위에 피워 둔 조그만
청옥향로에서 푸르른 향연이 피어 올라 청아한 향(香)을 품고 있
을 뿐이었다.
삼성승의 둘째인 천뢰신사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대사형, 이 아이의 몸은 지금 한 구의 시체나 다름
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아직도 손을 쓰길 망설이는 것입니
까?"
그 말에 가운데 앉은 천심선사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천뢰사제, 아직은 때가 아니네. 좀 더 기다려야 되네."
그러나 천뢰선사는 성격이 몹시 화급한 듯 주사빛 안색을 변화시
키며 말했다.
"대사형! 이미 사흘이나 기다렸소이다. 현오(玄悟)가 이 아이를
데려온 때와 전혀 차도가 없는데 만약 그러다가 이 아이가 숨이라
도 끊어진다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게 아닙니까?"
천심선사는 대답 대신 빙그레 불존(佛尊)의 미소를 지으며 좌측에
앉은 천기선사를 바라보았다.
천기선사는 곧 담담하고 의미 깊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천뢰사형, 지금 이 아이는 마음 속에서 수많은 심마(心魔)와 싸
우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손을 써봤자 그대로 살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천뢰선사는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의아한 듯 물었다.
"천기사제(天機師弟), 그럼 이 아이를 살리는 것 외에 또다른 목
적이 있단 말인가?"
천심선사는 합장을 한 후 자비롭게 말했다.
"천뢰사제, 조금 후면 이 아이는 곧 가사(假死)상태에 들게 되네.
그것은 곧 무심(無心), 무아(無我), 무념(無念), 무상(無常)의 상
태네. 즉 이 상태는 천(天), 지(地), 인(人)이 일치되는 것이나
다름없네."
천뢰선사는 마침내 침묵을 지켰다. 천심선사가 기이한 음성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달마선사께서 열반에 드신 지 천 년이 지나는 동안 수많은 기재
들이 나왔지만 아직 그 누구도 최고무학인 달마역근세수경(達摩易
筋洗髓經) 내의 반야밀다대승신공(般若密多大乘神功)을 십이성(十
二成) 성취한 사람은 없었네."
천뢰선사의 안색이 약간 변하는 것을 보며 천심선사는 합장을 했
다.
"그것은 자질이 없어서가 아니라 인연이 없기 때문이었네."
"아미타불......."
천뢰선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불호를 외웠다. 천심선사는 침상 위
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하후성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저 아이의 몸은 지금 가사상태에 이르러 있으므로 무념무아무상
무심의 경지와 천지인에 도달해 있는 상태네. 거기에 소림의 무상
영약인 대환단(大還丹)을 복용하고 또다시 본문의 개정대법(開頂
大法)을 쓴다면 커다란 영효를 얻을 수 있네."
"흐음."
"그렇게 되면 전신의 삼백육십오혈맥 내의 온갖 더러움이 씻기고
십이경맥의 유통이 조금도 막힘 없이 흐르게 되어 천하에서 가장
깨끗한 순수지체가 이루어지게 되네."
"아!"
천뢰선사는 탄성을 발했다. 그는 한동안 멍하니 있더니 이윽고 탄
식하며 말했다.
"정말 대사형의 뜻은 이 우둔한 사제, 영원히 쫓지 못할 것 같습
니다."
천심선사는 빙그레 웃었다.
"천뢰사제,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야. 자네는 무공 방면에서 나보
다 훨씬 높지 않은가? 소림사상 본문 칠십이종절예(七十二種絶藝)
를 모두 통달하고 반야밀다대승신공까지 십성(十成) 익힌 자가 자
네 말고 또 누가 있었던가?"
천심선사는 부드럽게 말하며 천뢰선사의 어깨를 잡았다.
"앞으로 이 아이의 무공성취와 운명은 모두 자네에게 달렸네, 사
제."
천뢰선사는 두 눈을 감았다.
"아미타불......."
그의 주사빛 얼굴에 불현듯 고뇌가 어리자 천심대사는 진중하게
물었다.
"사제, 자네는 아직도 그 때 일을 원망하는가?"
천뢰선사는 씁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미 백 년이 지났습니다. 사형, 그 당시 나의 성격이 너무나 거
칠고 살심이 깊었으니... 당시 장문인이시던 대사형께서 녹옥불령
(綠玉佛令)으로 소제를 금제(禁制)하신 것을 어찌 원망할 수 있겠
습니까?"
"아미타불......."
"어쨌든 간에 백 년 동안 불망헌에 있으면서 모든 것을 잊어버렸
습니다."
천뢰선사의 눈이 더욱 깊숙하게 감겨지자 천심선사는 낮게 불호를
외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조용히 있던 천기선사가 갑자기 입
을 열었다.
"아!
사형, 보십시오!"
천심과 천뢰, 두 고승의 시선은 일제히 그가 가리키는 하후성에게
로 향해졌다. 창백했던 하후성의 안색이 평정되었는가 하면 가슴
의 기복이 눈에 띄게 줄고 호흡이 미약해져 있었다.
아니, 거의 숨을 쉬지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無)의 상태다!"
천심선사는 이렇게 외치고 나서 급히 말했다.
"천기! 대환단을!"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천기선사는 즉시 품속에서 조그마한 붉은
옥갑(玉匣)을 꺼냈다. 그는 재빨리 옥갑을 열고 그 속에서 밀랍된
단약을 하나 꺼냈다.
단약. 그것은 크기가 용안(龍眼)만 했다.
천기선사는 조심스럽게 밀랍을 벗겨냈다. 그러자 붉은 단약이 나
타나며 방안은 금세 그윽한 향기로 가득 차게 되었다.
천기선사는 멍하니 대환단을 내려다보며 탄식했다.
"열 알 밖에 없던 대환단(大還丹)! 천 년이 흐르는 동안 모두 사
용하고 마지막 남은 하나인데......."
그 말에 천심선사는 다시 자비롭게 웃었다.
"허허허허... 천의(天意)를 이룸일세, 사제."
천기, 천뢰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천기선사는 가사상태에 빠져있는 하후성에게 대환단을 복
용시켰다. 대환단은 하후성의 입에 들어가는 즉시 용해되어 그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 들어갔다.
천심선사는 담담히 말했다.
"천뢰, 이제는 자네 차례일세, 자네의 반야밀다대승신공으로 이
아이의 몸에 개정대법을 시행하여 대환단의 약력(藥力)을 도움과
동시에 임독양맥, 천지인맥을 타통하고 벌모세수(伐毛洗髓), 탈태
환골(脫胎換骨) 시켜 주게."
천뢰선사는 무심한 표정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침상 곁
으로 다가가 정좌했다.
그의 전신 승포자락이 갑자기 팽팽하게 부풀어 오름과 동시에 주
사빛 얼굴에는 장엄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소림최고의 비학인 반야밀다대승신공을 시전한 것이
었다. 그의 몸 일장(一丈) 둘레에 은은한 현광이 장엄하게 둘러졌
다.
천심선사와 천기선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 보았다.
천뢰선사는 다음으로 두 손바닥을 움직이더니 하후성의 양쪽 가슴
에 장심(掌心)을 밀착시켰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하늘에는 별이 초롱초롱했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천뢰선사는 계속 개정대법을 시
행하고 있었다. 그와 하후성의 주위에는 담담한 현광이 계속 감돌
고 있었다.
차츰 천뢰선사의 안색이 탈색되어 가고 있었다. 아울러 그의 이마
에는 땀이 배기 시작했다.
천심선사는 그 사이 몸을 일으켜 창가로 걸어갔다.
그는 별빛이 초롱초롱한 야천(夜天)을 응시했다. 한동안 그 상태
로 침묵을 지키더니 문득 담담한 음성을 흘려내었다.
"천기사제, 자네 몇 살인가?"
천기선사는 흠칫하더니 곧 대답했다.
"올해로 백육십이 세 입니다."
"백육십이 세라... 허허허... 그러고 보니 자네가 소림에 입문한
지도 벌써 백오십년이나 되었군."
천기선사는 의문을 품으며 몸을 일으켜 천심선사 곁으로 가 섰다.
그는 감회 깊은 음성으로 말했다.
"소림은 이 사제에게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곳입니다. 음
양절맥(陰陽絶脈)으로 인해 이십 세를 못넘길 저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준 곳입니다."
"그렇군. 아미타불......."
"비록 아직까지도 음양절맥 때문에 무공을 조금도 익히지 못했으
나......."
그가 말을 흐리자 천심선사는 낮은 웃음을 발했다.
"허허허... 천기사제, 나는 사제가 소림의 그 누구보다도 유능함
을 알고 있네. 비록 자네가 무공을 시전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장
경각(藏經閣)에 있는 천팔백육십 종의 소림 무학을 모두 암기(暗
記)하고 있으며 또한 각종 기관, 역리(易理), 천문(天文), 진법
(陳法) 등 천하무불통지(天下無佛通知)이니 어찌 타인(他人)이 따
를 수 있겠는가? 실상 오늘날의 소림이 이토록 강건해진 것도 자
네의 지혜 덕분이 아닌가?"
그들의 등 뒤에서 가라앉은 음성이 들렸다.
"만약 사제가 무공을 익혔다면 지금쯤 저를 훨씬 능가했을 것입니
다."
천심, 천기선사는 동시에 몸을 돌렸다. 천뢰선사가 땀을 닦고 있
는 것이 보이자 천심선사는 급히 물었다.
"사제, 그 아이는?"
천뢰선사는 창백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성공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이 아이 스스로에게 달렸습니다.
이 아이의 능력이 대사형의 짐작과 같다면 장차 소림 제일의 고수
가 될 것입니다."
"소림제일!"
"소림사상 최고 고수로 말입니다."
세 성승의 눈길은 일제히 하후성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눈에는 기
대와 갈망, 그리고 염원 등이 짙게 어려 있었다.
천심선사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천뢰, 천기사제, 저 하늘을 보게."
"무슨 기운이라도?"
"별이 아름답지 않은가? 그런데 저 암천(暗天)의 한 곳에서 천혈
성(天血星)을 중심으로 오대마성이 떨어졌네."
"오오!"
"엄청난 위난이 무림에 닥칠 것이네. 무림사상 전무후무한.......
이제 그 모든 것은 저 아이에게 달렸네. 저 아이에게......."
천뢰, 천기선사의 안색이 일제히 굳어졌다. 그들의 눈은 아득한
천공(天空) 중에 명멸하는 수많은 성좌로 향해졌다.
하후성.
그는 여전히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그의 전신에
서는 은은한 신광이 감돌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