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냉혈(冷血)의 청춘(靑春)
낙양은 동주(東周) 때 세워진 곳이다.
낙양은 춘추전국(春秋戰國) 시절부터 중원의 꽃으로 불리운 도시이다.
낙양쾌화림(洛陽快花林)은 온통 화려한 작약(芍藥)에 뒤덮이고 있었다. 작
약은 꽃이 아름답되 향기(香氣)가 나지 않는 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꽃이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꽃의 자태가 너무나도 아름답
기 때문이었다.
낙양쾌화림의 특실(特室) 창을 열면, 작약꽃이 덮인 정원을 한눈에 바라
볼 수 있다.
특실은 이틀 전부터 폐쇄되어 있었다.
이틀 전 한 명의 문객(文客)이 특실 안으로 들어섰으며, 그 후 시녀들이
특실로 접어들고 나면 다시는 나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야릇한 곡조를 지닌 피리 소리가 흘러 나왔고, 그 소리를 듣는 사람
은 정신이 혼미해져 심신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특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호기심을 느끼고 기웃거리던 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흐느끼는 듯한 피리 소리에 의식을 잃어 쓰러져 버리
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특실에 머문 문객이 누구인가 정탐하기 위해 잠입해 들
었던 묘수환궁의 제자들마저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되돌아 나오지 못하
는 신세가 되고 마는 것이다.
기환십팔선(奇幻十八仙)이 그러했으며, 운우칠정(雲雨七晶)이 그러한 경우
를 당했다.
묘묘십오랑(妙妙十五娘)은 신병이기(神兵利器)를 지닌 채 특실로 접어들
었다가는 똑같은 경우에 처해졌다.
대체 누가 특실에 머물러 있기에 그러한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향연이 자욱한 정실(靜室).
바로 묘수환랑 소아후(蘇阿后)의 거처이다.
소아후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제자 사마백봉의 일로 인해 골치가 아프던 차에 괴사
(怪事)가 벌어지다니?
'대체 어떤 강호이인(江湖異人)이기에…….'
그녀는 하루 내내 고뇌를 하고 있었다.
특실에 들어가 있는 자는 정면으로 묘수환궁에 도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묘수환궁의 일급제자들이 특실로 다가서는 걸 유도하고 있는
것이며, 거기 간 제자는 되돌아나오지 못하는 처지가 되는 것이다.
'백도의 관산검맹(關山劍盟)이나 마도의 연환마교(連環魔敎)는 낙양쾌화
림의 비밀을 알지 못한다. 낙양쾌화림의 비밀을 아는 세력은……!'
그녀는 초췌한 낯색이 되었다. 그녀는 특실을 점검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
지 대충 짐작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 바로 그 녀석 때문이다.'
묘수환랑은 자신이 나설 때라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특실에 틀어박혀 있는 자는 자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을 죽여 버리려 할지도.
만약 특실에 있는 자가 묘수환랑이 생각하는 그 인물이라면, 묘수환랑은
그 자에게 죽을지도 모른다.
'그는 혈의육존(血衣六尊)을 모은 장본인… 그리고 백무영을 기르는데에
가장 열심히 움직인 인물이다. 그는 무영이 내게 죽었음을 알고…….'
묘수환랑은 특실에 있는 자의 이름을 추측할 수 있었다.
"천금신수(千金神手) 음천걸(陰天傑)… 바로 만박(萬博)이다. 그는 날 죽
이러 온 것이다."
묘수환랑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만박은 이 세상에서 가장 괴팍한 인물.
그는 절대로 타인에게 마음을 열어 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지극히 소
수의 인물에게만 자신의 모든 것을 준다.
그는 과거 한 여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자 한 바 있다.
하나, 그 여인은 만박 대신 다른 남자를 선택했다.
바로 백무영의 아버지.
만박은 그에게 엄청난 열등감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하기에 혈
의육존의 다른 사람들은 만박이 백무영을 몹시 증오하리라 생각하고 있
었다.
한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만박은 백무영을 친아들처럼 생각하
고 있었던 것이다.
만박은 백무영이 묘수환랑의 암계(暗計)에 빠져 사망했다 여기고, 직접
묘수환랑을 찾아온 것이다.
"그가 나를 적으로 여기기 시작한 이상, 내가 죽기 전까지는 떠나지 않는
다. 과거에도 그랬다. 그는 원한이 있는 경우, 원한이 풀릴 때까지 그 일
에 집착하지 않았던가."
묘수환랑은 천천히 시선을 쳐들었다. 그녀는 벽에 걸린 인물도 한 장을
바라봤다.
그림에는 도합 여덟 명이 그려져 있었다.
장소는 까마득히 높은 산정(山頂)이며, 눈보라가 산상을 휘어 감고 있었
다.
산꼭대기에는 고독해 보이는 흑포검사 하나가 서 있으며, 그의 가슴에는
갓난아이가 안기어 있었다. 그는 아이를 꼬옥 안고 있는데, 그의 시선은
아이에게 돌려져 있었다.
그리고 여섯 명의 무사가 그를 포위하고 있는 바, 하나같이 살기 짙은 표
정을 짓고 있었다.
여섯 명의 무사는 아이를 안은 흑포청년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그 때 우리 여섯은 개인적인 은원으로 인해 그를 찢어 죽일 작정을 했
다. 그러하기에,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는 그의 집을 포위하고 그의 가정
을 파탄낸 것이다. 후일 우리들로 인해 전 무림이 마도에 유린되고, 백도
의 위선자들에 의해 백도의 대권(大權)이 넘어가게 되었다. 아아, 우리는
그 처절한 죄를 씻기 위해 뭉쳤던 것이다. 한데, 나는 이단자가 되고 말
았다."
묘수환랑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녀는 면사로 얼굴을 가린 다음에 문 밖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비다.
쾌화림 하늘이 얕게 가라앉은 먹장구름에 의해 휘어 감기더니, 장대비가
뿌려 대기 시작했다.
하늘을 너덜너덜 지워 버릴 듯한 뇌전(雷電), 그리고 살 속으로 파고들
듯 무섭게 퍼부어지는 장대비.
낙양쾌화림은 일순 음습한 우무(雨舞)에 휘어 감기기 시작했다.
쾌화림 깊은 곳, 가산(假山) 하나가 서 있다.
말이 가산이지, 작은 동산과 마찬가지의 크기.
가산 둘레에는 커다란 호수가 패여 있었으며, 꽃배 한 척이 호수 위를 떠
돌고 있었다.
"좋아. 비가 오면 술맛이 더 나지."
화방(花舫) 위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청포를 걸친 미청년이 기녀 두 명을 끌어안고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그는 낙양거부의 막내 아들로 거의 매일 집의 돈을 쾌화림에 갖다 주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는 세상에 황금으로 되지 않는 일이 없다고 믿고 있
으며, 시녀들을 다룰 때에도 황금을 무기로 삼았다.
기녀들은 속으로 그를 비웃을지언정 겉으로는 상냥하고 유혹적인 웃음을
지어 주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술은 여아홍(女兒紅), 안주는 산해진미(山海眞味)이다.
낙양옥룡(洛陽玉龍)이라 스스로 부르고 있는 자는 도자기잔 가득히 술을
따라 부었다.
"푸핫핫… 우중일배주(雨中一杯酒), 너무나도 운치가 있도다."
"호호호… 쭈욱 들이키십시오."
"비가 오니 낭만이 더합니다요. 호호호……!"
"푸핫핫… 그래, 호쾌하게 마셔 보자꾸나. 푸핫핫! 술이 떨어지면 빗물을
술 삼아 마시자. 푸핫핫……!"
낙양옥룡은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술잔을 입술에 갖다 대었다.
그가 술을 한 모금 마셨을 때, 돌연 그의 얼굴이 야릇하게 일그러졌다.
"저, 저기… 귀신이……."
그의 대춧빛 좋던 얼굴이 일순 창백하게 변화했다.
"귀신이라니요?"
"세상에 귀신이 있다는 말은 들었으나, 귀신을 본 적은 없습니다."
"저, 저기. 으으, 물 속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너덜너덜한 흑포를 걸친
자다. 그는 물 위를 뚜벅뚜벅 걸어 빗속으로……."
낙양옥룡은 혼절하기 직전의 상태였다.
그는 방금 전 기가 막힌 광경을 본 것이다.
술을 즐겁게 마시며 호수 한쪽을 보고 있던 그의 망막에 갑자기 한 사람
의 모습이 불쑥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물 속에서부터 삐죽 모습을 드러냈으며, 물 위를 저벅저벅 걸어 쾌
화림 안쪽으로 사라져 갔던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그는 낙양옥룡과 시선이 마주치자, 지극히 차가운 웃음을
슬쩍 흘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내, 내가 헛것을 본 걸까?"
낙양옥룡의 옷자락이 땀에 흠뻑 젖었다.
잠시 잠깐 사이의 일이 었으나, 그는 엄청난 전율감에 사로잡혔음에 틀림
없는 일이었다.
퍼부어지는 빗속 뜨락 가에는 꽃잎이 풀풀 흩날리고 있었다.
그는 비에 젖은 머리결을 빗어 넘기며 쾌화림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갔
다. 군데군데 은잠매복(隱潛埋伏)이 워낙 신묘한지라, 아무도 그를 발견하
지 못했다.
'화허잠영술(化虛潛影術)… 훗훗, 공공진경(空空眞經) 안의 수법이지.'
그는 소리를 전혀 내지 않고 몸을 이동시켰다.
폭우로 인해 시야가 흐려지고 있는 데다가 그의 운신(運身)이 워낙 신묘
한지라,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술 마시던 그 친구는 나 때문에 몹시 놀랐을 것이다.'
입가에 번지는 차가운 웃음, 그 웃음은 찰나적으로 사라져 버렸고 그의
얼굴은 석고 조각처럼 싸늘하게 경직되었다.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두 권의 비급에 적힌 무공을 모조리 익히고 나왔
을 텐데…….'
그는 유성이 흐르듯 움직였다.
'시간이 급해 모두 익히지는 못했다. 하지만 깡그리 암기를 해 두었으니,
언제고 시간이 있을 때 모두 익힐 수 있겠지.'
그의 눈빛은 안개에 잠긴 호수처럼 불투명했다.
그의 눈빛을 아무리 오랫동안 들여다본들, 그가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아차릴 수 없으리라.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눈빛에는 그 사람의 정서가 담기어 있기 마
련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빛에는 아무런 느낌도 담기어 있지 않았다.
설마, 그는 아무런 마음도 갖고 있지 않은 무심인(無心人) 내지 실혼인
(失魂人)이란 말인지?
비에 젖는 뜨락 어디에선가 흐느끼는 듯한 피리 소리가 흘러들었다. 그
소리는 빗소리와 더불어 나직이 깔렸는데, 빠른 속도로 움직이던 흑포청
년은 피리 소리를 듣자 갑자기 눈썹을 꿈틀거렸다.
"생사마적(生死魔笛)… 강호에서 이 피리 소리를 낼 사람은 회혼의림 출
신밖에 없는데……."
그는 원래 가던 방향에서 벗어나 피리 소리가 들려 오는 곳을 향해 움직
이기 시작했다.
그가 가는 방향은 특실이 있는 쪽이었다.
과부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이러할까?
지아비를 잃고 목놓아 흐느끼는 소리가 이처럼 처절한 것일까?
칼춤을 추는 지옥야차(地獄夜叉)의 울부짖음이 이토록 모골송연한 것이
지?
특실에서 흘러 나오는 피리 소리는 인간의 오욕칠정(五欲七情)을 끓어 넘
치게 하고 있었다.
내공이 어지간히 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피리 소리를 듣고는 의식이
몽롱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특실 외곽지역은 인해(人海)에 뒤덮여 있었다.
이백여 명의 여고수들이 착검한 채 특실로 접어드는 모든 길을 봉쇄하고
있었다.
여무사들은 감히 특실에서 백 장 안쪽으로는 다가서지 못하고 있는데, 이
유는 특실에서 흘러 나오는 기이한 피리 소리가 내공을 무산시켜 버리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들어서지 못하게 하라!"
"궁주님의 하명이 있을 때까지는 기문포진을 풀어서는 아니 된다."
진세를 이끌고 있는 여인은 야화(夜花)와 초혼(招魂)이었다.
두 여인은 모두 초췌한 표정이었다.
노송의 가지 위.
그는 일각 이전에 이 곳에 당도하여 특실 쪽을 살펴보고 있었다.
비에 축축이 젖은 옷자락이 몸에 좌악 달라붙는다. 머리카락에도 빗물이
흥건히 맺히고 있었다.
그는 호흡 소리를 거의 내지 않았으며, 눈빛에서 정광을 뿜어 내지도 않
았다.
'역시 그분이다. 한데, 어이해 여기까지……?'
그는 바로 백무영이었다.
백무영은 사경에서 기연을 얻고 신비한 무공을 몸에 지닌 채 출관한 것
이다.
그는 공공진경과 사영환마록을 깡그리 암기한 이후, 두 권 비급을 유언에
따라 불살라 버리고 나서 외부로 나선 것이다.
그의 왼손 중지(中指)에는 칙칙한 빛깔을 흘리는 철환(鐵環)이 끼워져 있
었다.
철환 표면에는 꽃무늬가 양각(陽刻)되어 있는 바, 꽃무늬의 숫자는 도합
열아홉 개였다.
만약 내공을 발휘해 철환을 허공에 던진다면, 꽃그림자가 어지럽게 뿌려
지면서 살인음파(殺人音波)가 퍼져 나가리라.
그것이 바로 천화군림환(千花君臨環)의 숨은 비밀이었다.
다만 천환군림환을 병기로 쓰기 위해서는 오 갑자(五甲子) 이상의 내공이
필요하되, 백무영의 내공은 그에 오분지일(五分之一)도 미치지 못하는 형
편이었다.
흐느끼는 피리 소리가 점점 더 살기 짙어졌고, 가끔 휘파람 소리도 흘러
나왔다.
흐느끼는 피리 소리는 생사마적(生死魔笛)이라는 음공절학이었으며, 휘파
람 소리는 야차초혼소(夜叉招魂嘯)라는 음공절학.
두 가지 절기 모두 내공의 수준 여하에 따라 상대의 오장육부를 가루로
만들 수 있는 음공이었다.
'내공의 대결은 금기로 여기는 것인데, 내공의 대결로 접어들었다.'
백무영의 입술 끝이 바짝 타 들어갔다.
그는 방 안에 어떠한 인물이 머물러 있는지 알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나 때문일지도… 그렇다면 내가 이대로 수수방관할 일이 아니다.
그분은 나로 인해 내공이 약해지셨다. 이대로 가면 그분이 패한다!'
백무영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는 공공무상반야마하심공(空空無相般若魔河心功)을 끌어올렸으며, 내공
을 십 성 모은 이후 탄신(彈身)해 떠올랐다.
팟-!
순간적으로 파공성이 터져 나옴과 더불어, 그의 몸뚱이는 우막(雨幕)을
찢으며 특실을 향해 움직여 갔다.
묘수환궁의 여나찰들이 득실거리고 있으되, 그가 이동하는 걸 알아본 여
나찰은 하나도 없었다.
특실 안, 기상천외한 대결이 벌어지고 있었다.
앉은뱅이 중년문사가 의자에 앉은 채 옥적(玉笛)을 불고 있고, 그 앞에는
자의미부인이 춤을 추며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두 사람의 몸뚱이가 허공으로 다섯 자 정도 떠오른 상황이
라는 것.
두 사람의 전신 모공에서는 흰 기류가 뿜어져 나왔으며, 흰 기류는 무수
한 동심원으로 뭉쳐져 두 사람의 신체를 휘어 감고 있었다.
파팟팟-!
방 안의 즙기가 하나하나 깨어져 간다.
도자기 병이 깨어지고, 나무 의자가 산산이 바수어진다.
두 사람의 내공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즙기가 파괴되는 것이다.
옥적과 휘파람은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음공대결은 내공대결 중에서도 가장 치열한 대결이다.
두 사람 가운데 하나가 죽기 전까지는 대결이 중지되지 않으리라.
어느 한순간,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방 안에 제삼자가 나타났다는 걸 알
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그에게 신경을 쓸 수가 없다.
마음이 약간이라도 흐트러진다면, 상대의 내공에 휘말려들어 오장육부가
파해(破解)되어 버릴 테니까.
백무영,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이 격돌하는 걸 바라보고 있
었다.
한 사람은 사사부 만박, 또 한 사람은 삼사부 묘수환랑이다.
두 사람은 자신을 기르는 동업자인데, 죽기 살기로 내공대결에 돌입한 것
이다.
내공대결은 여섯 시진째 계속되고 있었다.
본시 만박은 내공에서 묘수환랑을 월등히 능가한다.
다만 이혈대법으로 진원진기의 반을 백무영에게 전해 주었기에, 묘수환랑
과 평수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놔 두면 두 사람 모두 죽는다.'
백무영은 상황 판단을 쉽게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완벽히 평수를 유지하고 있다.
내공대결이 오래 간다면, 두 사람 모두 기력이 탈진해 죽으리라.
두 사람이 죽는다면, 백무영은 자유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은 죽었다고 알려질 것이며, 이제까지 만나 보지 못한 이사부
와 일사부도 자신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자유, 그건 내가 목메어 그리워하던 것이었다!'
백무영은 손에 땀을 쥐었다.
그가 슬며시 빠져 나간다면, 모든 게 비밀에 파묻힐 것이다.
백무영은 은밀십구관 안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질 것이며, 아무도 그의 인
생에 방해를 하지 못하리라.
어느 한적한 곳에 은잠하여 이삼 년 보낸 후 전혀 다른 신분으로 활동을
한다면, 그 자신이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하면서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
이다.
'하지만 남아 대장부로 신의(信義)를 어길 수 없다.'
백무영은 열 살 때를 기억했다.
당시에 그는 육사부인 철객(鐵客) 밑에서 무공의 기초를 배운 바 있다.
철객은 그에게 십팔반병기(十八班兵器) 다루는 걸 가르쳐 주었으며, 그
가운데 이러한 말을 한 바 있다.
- 너는 남아, 남아 대장부는 자신의 말에 충직해야 한다. 넌 맹세할 수
있느냐? 은원이 다 풀릴 때까지 모든 걸 인내하겠다고?
당시 백무영은 천진스러운 눈빛을 깜박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린 바 있다.
그의 인생은 그 때 결정지어졌다고 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누군지, 어머니가 누군지 난 모른다. 어떤 때에는 내가 왜 알
지 못하는 부모로 인해 원한스러운 삶을 살아나가야 하는가 증오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굴레를 벗어날 순 없다. 그게 내 숙명이니까!'
백무영은 두 줄기 흰 기류가 뭉쳐져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지점을 바라보
았다.
기(氣)와 기(氣)가 뭉치고 있는 모습이 마치 눈보라가 일어나는 것과 같
다.
'나로 인해 벌어진 일, 나로 인해 풀어야 한다!'
백무영은 모진 각오를 하고 기류가 뭉쳐진 곳을 향하여 몸을 이동시켰다.
두 명의 절정고수가 내공대결을 하는 가운데로 끼여든다는 건, 화약을 지
니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두 사람 가운데로 끼여드는 찰나, 두 사람의 내공을 한꺼번에 몸에 맞게
되기에.
백무영은 뿌옇게 피어 오르는 기류의 소용돌이를 향해 몸을 집어 던졌다.
누가 말릴 짬도 없이, 그의 몸뚱이는 강기의 소용돌이 속으로 접어들었
다.
쾅-!
벼락치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오는 찰나, 백무영은 몸이 사분오열되는 통
증에 휘어 감겼다. 그리고 오장육부의 자리를 어긋나는 아픔에 사로잡혔
다.
"무영, 멍청한 놈!"
만박의 호통 소리.
"오오, 네가 어이해……?"
묘수환랑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려 왔다.
백무영은 그 소리를 듣는 가운데 스르르 의식을 잃었다.
그가 의식을 잃어 가며 생각한 것은, 이렇게 함으로써 부채를 약간이나마
갚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백무영은 누군가 자신의 머리맡에 손을 대고 있음을 느끼며 의식을 찾았
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누군가의 얼굴이었다. 풍만한 아름다움과 온화
함을 함께 갖고 있는 중년미부의 얼굴이 보였다.
"이제 정신이 드느냐?"
"삼사부!"
"일어날 것 없다. 만년삼왕탕(萬年蔘王湯)을 먹은 이상, 당분간 몸에 열기
가 일어날 것이다. 그 기운이 골수 속으로 스며들 때까지 참고 기다려
라."
여인은 바로 묘수환랑이었다.
그녀는 면사로 얼굴을 가리지 않은 본 얼굴로 백무영 앞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만박 사부는?"
백무영이 묻자.
"만박은 너를 끔찍이 생각하는데, 너 또한 만박을 끔찍히 생각하는구나.
두 고집쟁이가 서로 죽이 잘 맞는구나."
묘수환랑은 두 사람 사이의 정이 깊음에 은근한 질투를 느끼는 듯했다.
백무영은 삼 주야 내내 혼수상태에 처해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것이
다. 그 사이 만박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가는 필설로 부연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봐라!"
묘수환랑은 쪽지 한 장을 건네 주었다.
백무영은 상반신을 일으킨 다음에 쪽지의 글을 읽어 보았다.
<어리석은 녀석, 죽음을 그리 소홀히 여기다니. 내가 널 잘못 가르친 듯
하구나. 하지만 억세게도 운이 좋아 살아났다.
네 손가락에 끼워진 천화군림환을 보니, 은밀십구관에서 기연이 있었음에
틀림없으리라.
하지만 그 따위 성취로 네 자신에 대해 과대평가해서는 아니 된다. 세상
은 광대하다. 어떠한 성취에 이르렀건, 자신의 무공에 자만해서는 아니
된다.>
만박은 백무영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보고는 백무영이 기연을
만났다는 걸 안 것이다.
그는 강호에서 가장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답게 천화군림환의 호
칭마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환랑을 원망하지 마라. 그녀가 널 죽이려 했던 이유는, 내가 그녀에게
무리한 요구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그녀가 말해 줄 것이다. 어찌 되었던 네 몸뚱이를 너
무 함부로 굴리지 마라. 나는 네게 운명과 일생을 걸었다. 네놈이 죽으면
모든 게 끝장나는 것이다.
이 곳에서의 일을 마친 다음, 즉시 이사부를 찾아가라. 난세(亂世)가 시작
되고 있다. 너의 성취를 앞당겨야 한다.>
만박은 정감이 전혀 없는 투로 글을 적었다.
하지만 구구절절 스민 깊은 뜻은 그가 백무영을 친아들 이상으로 아끼고
있다는 감정이 아니겠는가?
백무영은 쪽지를 다 보고 난 다음에 묘수환랑을 올려다봤다.
그녀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그녀의 눈빛은 몹시 따사로웠다. 이전에 보아 왔던 살기 짙은 눈빛과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
'백봉이 빠진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 저 담대한 눈빛은 과거 나를 유혹
케 했던 그의 눈빛 그대로다.'
묘수환랑은 한숨이 터져 나오려 하는 것을 애써 참았다.
그녀는 만박과 죽마고우라 할 수 있다. 한데, 만박은 백무영 일로 인해
그녀와 사생결단을 내고자 한 것이다.
장강(長江)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 낸다는 말이 있다.
세월은 젊은이들을 위해 열려 있는 것이다.
"어쩌자고 그리도 무리한 짓을 저질렀느냐?"
"아픔을 참는 데에는 이골이 났습니다."
"어리석은 녀석, 날 원망하겠지?"
"원망하지 않습니다."
"왜?"
"시련은 저를 더욱 강하게 해 줄 것이고, 한시빨리 강해져야만 제 소원을
달성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한성(寒星)이 가라앉은 듯한 눈빛. 가히 독심장부(毒心丈夫)의 눈빛이라
할 수 있었다.
"내가 널 죽이려 했던 걸 인정하겠다. 그건 내가 여자이기에 편협한 마음
에서 저지른 실수라고 할 수 있다. 너의 집념과 의지에 대해 조금 더 잘
알았더라면, 네게 그러한 고통을 주지 않았을 텐데……."
묘수환랑은 깊은 자책감에 사로잡힌 듯했다.
하나 백무영은 그녀를 용서하지 않을 작정인지, 표정이며 눈빛에 전혀 변
화가 없었다.
가히 무색(無色)의 느낌이다. 그는 속마음을 읽히지 않는 경지에 도달했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만박과 난 내기를 한 바 있다."
"내기요?"
백무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묘한 내기였다."
"어떠한 것이기에?"
"만박은 널 맹신(盲信)하고 있는 눈치였고, 난 당시만 하더라도 만박의
심정을 비웃었다. 만박은 내가 한 달 안에 널 유혹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
고, 난 널 타락시킬 수 있으리라 했다. 두 사람의 고집이 대등하였기에,
내기가 성립되었다. 만박은 자신의 전 재산을 걸었으며, 난 내게 가장 소
중한 걸 걸었다."
묘수환랑은 차마 백무영을 쳐다볼 수 없는 듯 시선을 창 너머로 던졌다.
창 너머에서는 새벽이 타오르고 있었다.
묘수환랑은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백무영을 간호하며 밤을 꼬박 지샌
것이다.
"내가 건 것은 백봉이었다."
"백봉!"
백무영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백봉은 나의 애제자, 나의 후신과도 같다. 만박에게 네가 중요하다면, 내
게는 백봉이 귀중하다. 난 내기에서 이길 작정을 하고 백봉을 건 것이다.
네가 나의 계략에 걸려들지 않는다면, 백봉을 네게 첩으로 주어야 한다
고."
"첩?"
백무영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두 명의 괴팍한 강호이인들이 자신을 두고 그러한 내기를 할 줄이야?
"백봉은 믿음직한 아이이지. 그래서 난 그 아이를 쾌화림 조직의 총사(總
師)로 기른 것이다. 한데, 그 아이가 널 사랑하게 된 것이다."
묘수환랑은 급기야 가는 한숨 소리를 토해 냈다.
묘수환궁의 제자들은 사랑에 빠져서는 아니 된다. 한 남자를 섬겨서도 아
니 되며 성(性)을 높이 취급해서도 아니 된다.
환궁의 여제자들은 성을 무기로 삼아 강호를 정복해 나가야만 하는 것이
다.
그것은 조사 시절부터의 율법이라 할 수 있었다.
"백봉은 율법을 어긴 것이다. 나는 백봉을 지키기 위해 널 죽이고자 한
것이다. 한데 네가 창시조의 보물을 갖고 나왔으니, 율법이야 상관이 없
게 되었다. 이제 백봉은 너의 여자이다. 가서 백봉을 만나라. 그 아이는
네가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묘수환랑의 긴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녀는 백무영에게 사마백봉을 찾아가라는 말을 하기 위해 이제까지 때
를 보아 왔던 것이다.
사마백봉은 초췌한 표정이 되어 백무영이 자신을 찾아 주기만을 기다리
고 있는 처지였다.
그녀는 사랑이라는 덫에 걸려들고 만 것이며, 백무영이 그녀를 버릴 경우
엄청난 고통에 휘어 감길 것에 틀림이 없었다.
"가라, 백봉 곁으로!"
묘수환랑은 백무영을 빤히 바라다봤다.
백무영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묘수환랑을 힐끗 쳐다보며 이렇게 대꾸했다.
"그 말씀은 명령이십니까?"
"명령은 아니다. 솔직히 네가 조사의 보물을 가진 이상, 네게 명령할 수
없다."
"명령이 아니라면, 가지 않겠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말이다.
사마백봉과 짝을 맺으라는 말을 어렵게 해 왔는데, 한 마디로 거절이라
니?
"어이해, 가지 않는단 말이냐?"
"갈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유가 없다고?"
묘수환랑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백무영은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제게 사마백봉을 위로해 줄 의무가 없다면, 그녀를 찾아가지 않겠습니다
"
"냉정한 말이군."
"제게 그렇게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하, 하긴."
묘수환랑은 상체를 가볍게 휘청거렸다.
사마백봉은 백무영으로 인해 사문을 배반할 지경인데, 백무영은 사마백봉
을 평범한 한 여인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의 마음은 너무나도 차갑게 다져졌다.
그의 마음에 여인의 영상이 담기어지려면 꽤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어쩌면 백무영은 영원히 여인을 사랑하지 않을 냉혈아(冷血兒)로 굳어졌
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를 그렇게 기른 장본인은 바로 혈의육존이라 할 수 있었다.
백무영의 내상(內傷)은 빠른 속도로 아물었다.
그의 무공은 묘수환랑의 상상을 훨씬 웃도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백무영은 내상을 치료하는 사이 십여 권의 하오문비급을 암기하였는 바,
그것은 대부분 역용환신(易容化身)에 대한 비급이었다.
그는 무치(武痴)가 된 양 무공 연마에 열중하는 것이다.
비가 퍼부어지는 날, 백무영은 낙양쾌화림을 벗어나게 되었다.
그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두 마리 노마(老馬)가 끄는 마차의 어자석(馭者
席)에 앉았으며, 머리 위에는 죽립 하나가 덩그러니 씌워지게 되었다.
그가 채찍을 쳐들어 말잔등을 치려 할 때, 누군가 그를 향해 다가섰다.
은빛 옷자락으로 전신을 휘어 감고, 얼굴을 검은빛 몽면으로 감춘 여인이
백무영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그녀는 사마백봉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백무영에 의해 거절되었다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어쩌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을지도.
"전해 드릴 것이 있어 나왔습니다."
애써 밝게 말하는 목소리이나, 어두움이 역력히 드러났다. 사마백봉이 전
하는 것은 연잎에 싼 주먹밥이었다. 사마백봉은 백무영이 모종의 장소로
떠나간다는 걸 알고 남몰래 주먹밥을 만든 것이다.
"드시기 거북하시면, 그냥 버리십시오."
사마백봉은 주먹밥을 슬그머니 건네 주었다.
백무영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주먹밥을 건네 쥐었다.
두 사람의 손끝이 조용히 스친다.
백무영은 사마백봉의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킨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잘 먹겠소이다. 그럼……."
백무영은 가볍게 목례를 해 보인 다음, 말잔등에 채찍질을 가했다.
마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가 점점 굵은 방울로 화하는 가운데 산천초목이 비의 장막에 감추어졌
으며, 백무영의 모습도 조용히 묻혀 버렸다.
사마백봉의 뺨을 타고 맑은 액체가 흘러내린다.
그건 빗물과는 종류가 다른 액체였다.
반년 후.
장안(長安)의 겨울은 장관이다.
사실 눈(雪)이란 양면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
도시의 눈은 도시를 지저분하게 만들며, 똑같은 눈이라 하더라도 한적한
산에 쌓이는 눈은 산천을 은세계로 만들며 이 세상의 모든 사물에 신비
감을 더하게 하는 것이다.
장안성의 도로는 눈을 밟고 지나가는 여러 대의 마차로 인해 어지러워지
고 있었다.
사통팔달(四通八達)한 거리를 따라 달리는 마차들.
그 중 가장 빨리 달리는 마차는 분명 표행에 소속된 마차일 것이다.
장안성은 현무궁(玄武宮) 곁에 자리잡고 있는 거대한 건물이다.
건물의 문은 늘 열려 있는 바, 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면 그 곳이 이 세
상에서 가장 번잡스러운 지역임을 즉시 알게 될 것이다.
수십 대의 마차가 서 있고, 수백 대의 수레에서 짐이 내려지거나 짐이 수
레에 실리고 있다.
표사들이 인부들을 지휘하는 호령 소리가 근처를 시끄럽게 하고, 표물을
맡기는 사람들과 표두들이 가격을 흥정하는 소리가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다.
사해팔황(四海八荒)의 온갖 방언(方言)이 다 들리고 있으며, 이국어(異國
語)로 말하는 소리도 도처에서 들려 오고 있다.
장안성은 당조(唐朝) 이후, 서역(西域) 변황(邊荒)으로 오고 가는 물자의
거점이 되어 왔다. 봄이든, 여름이든, 가을이든, 겨울이든, 상인들은 쉬지
않으며 그로 인해 표행 또한 하루라도 문을 닫는 날이 없는 것이다.
묵씨(墨氏) 성을 가진 젊은 서기(書記).
그가 하는 일은 장부에 글을 적고, 장사꾼들과 표두들이 흥정하는 내용을
총표두에게 전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가 받는 급료는 일급표사의 급료에 비해 세 배에 달한다.
묵서생이라 불리는 자는 지극히 해박한 지식에다가 뛰어난 계산 실력을
가졌는지라, 세 사람의 서기가 할 일을 도맡아 처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 덕에 그는 표국에 들어온 지 육 개월이 채 안 되어 제일서기의 지위
에 올라가게 된 것이다.
이 날, 묵서생은 산동인(山東人)과 광동(廣東)에 사는 사람을 통역해 주느
라 아침부터 부산을 떨어야 했으며… 사십 대의 수레에서 내려지는 표물
이 무사한가를 일일이 검토하느라 점심식사마저 걸러야 했다.
표행의 일은 늘 바쁘다. 일각이라도 쉴 짬이 없는 것이 표국의 업무인 것
이다.
대륙(大陸)에서 가장 크다고 불리어지는 철기표행(鐵騎標行)이 아니던가?
열다섯 개의 은장(銀莊)에서 철기표행을 공동설립한 후, 북무림계의 상권
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로 성장한 지 이십 년째이다. 하지만 표행을 쥐고
흔드는 인물이 누구인지는 외부에 소문나지 않았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인물은 총표두인 철장진건곤(鐵掌振乾坤) 감무외(甘無畏).
그는 정사도(正邪道)에 두루 친구를 두고 있는 사람이기에, 표행업을 성
공리에 이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표행을 제대로 꾸려 나가고자 한다면,
적을 갖고 있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만 표물을 강탈당하는 일이 적은 것이고, 표행업에서 이익을 남길
수 있는 것이다.
철장진건곤 감무외는 무림의 양대산맥이라 할 수 있는 연환마교(連環魔
敎)와 관산검맹(關山劍盟)의 외단(外壇)고수들과 친분을 쌓아 두고 있기
에, 무림의 박쥐 소리를 듣기는 하나 그의 발넓음은 표행의 성공에 상당
한 기여를 한 것이다.
묵서생은 그가 시험을 봐서 뽑은 인물이며, 출신은 금릉이라고 했다.
묵서생은 안색이 누렇고 말수가 적은지라, 사람들은 그가 폐병을 앓고 있
다고 지레짐작하고 있는 처지이기도 했다.
노을은 하늘을 핏빛으로 타오르게 했다.
눈이 그친 지 한 시진 정도.
어디를 봐도 눈이 수북히 쌓여 있는 게 보이는 이유는, 닷새 내내 폭설이
뿌려졌기 때문이었다.
묵서생은 뒷짐을 진 채 표행문을 나섰다.
가끔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인사를 하는 표사들이 있는 바, 그는 그 때마
다 빙그레 웃으며 답례를 했다.
묵서생의 모습은 그야말로 무개성하다 할 수 있었다.
눈빛은 흐리고 얼굴은 누리끼리하다. 이목구비의 용모 또한 지극히 평범
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한 용모를 가진 사람이라면, 군중 속에 끼여들 경우 쉽게 묻혀 버리
게 될 것이다.
"노을이 짙붉다."
그는 여유 있게 말하면서 다루(茶樓)로 올라갔다.
그는 매일같이 다루에 가서 차 한 잔을 마시며, 하루 일과를 생각하는 습
관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점소이가 쪼르르 다가선다.
점소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이렇게 말했다.
"차는?"
"전과 같은 걸로."
"천지차(天地茶)군요?"
"그래."
"헤헤… 묵서생님! 한데,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린 걸 생각해 보셨습니
까?"
"네 사촌 여동생을 부인으로 맞이하라는 말 말이냐?"
"착하고 아름다운 아이입니다. 수다스러운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오래
두고 보면 나름대로 애교가 있지요. 헤헤, 묵서생과는 천생연분이 될 겁
니다."
"글쎄, 아직 혼례를 치룰 생각이 없구나. 하여간 두고 생각해 보자."
점소이는 그가 자신의 사촌 여동생과 결혼하기를 누누이 말해 왔다. 하
나, 묵서생은 여자에게는 별 관심이 없는 듯 그 때마다 거절을 하는 것이
다.
점소이가 간 후, 묵서생은 팔짱을 낀 채 창 밖으로 보이는 장안성의 정경
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보다 암울하게 가라앉았다.
'이사부는 언제나 나를 부를 건가? 으음, 이사부가 내린 명은 철기표행에
들어가 서기 노릇을 하라는 것.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묵서생은 백무영이었다.
그는 낙양에서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표행에서 무공에 대해 배울 것이 없다. 하지만 나는 세상에 대해 너무나
도 많은 걸 알게 되었다.'
백무영은 하늘이 점점 어두워진다 여겼다.
'무림은 양분되어 있으며, 변황의 양대세력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변황세
력의 배후에는 서하국(西夏國)과 몽고족(蒙古族)이 버티고 있다. 그들은
언제든지 중원무림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당금무림은 난마(亂麻)처럼 얽혀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백도의 관산검맹을 이끄는 인물은 곤륜(崑崙) 장문인(掌門人)이었다.
마도는 절대자로 불리우는 함백(涵伯)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바, 함백이
이룩한 연환마교(連環魔敎)는 관산검맹에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강맹한
세력이었다.
만에 하나 함백의 세력이 더욱 커진다면, 마도는 백도에 대해 정면으로
공격을 개시하게 될 것이다.
함백이 대륙제일인(大陸第一人)으로 군림한 지 이십 년째였다.
이십 년 전, 그는 강호제일인(江湖第一人)으로 불린 한 명의 절세신협(絶
世神俠)을 격파한 바 있다.
그의 별호는 무적대협(無敵大俠).
그는 사문이 밝혀지지 않은 인물로, 백도에서는 이단자로 여겨지던 인물
이었다.
그는 백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제멋대로 처신하였는지라, 백도의 명
숙(名宿)들은 그를 살성(煞星)이며 이단자로 낙인찍어 버린 것이다.
무적대협은 마도를 철저히 응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천하를 주유하며
마도고수를 척살하던 가운데 함백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두 사람은 곤륜(崑崙) 극천단(極天壇)에서 겨루었고, 함백은 무적대협을
만 장(丈) 단애(斷崖) 아래로 추락시킨 것이다.
함백은 그 날부터 정사양도를 통해 가장 강한 무사로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백도의 청년무사들은 백도의 노기인들이 무적대협의 일에 수수방관
했기에 그가 쓰러졌다며, 백도의 노장들을 불신하게 되었다. 그럴 즈음하
여 관산검맹을 이룩한 인물이 바로 오늘의 관산대협인 잠풍(潛風)이었다.
그는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이기도 한데… 어떤 이는 그를 타협의
명수라고 했고, 어떤 이는 기회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어쨌든 관산대협은 대곤륜(大崑崙)에 맹을 이룩하였으며, 백도영재(白道
英才)들을 대거 모아 백도를 지키는 선봉에 서게 했다.
그가 머물러 있는 지위는 무적대협이 차지해야 할 지위.
그러하기에 그는 무적대협을 함백에게 제거시키고 백도를 약탈한 자로
평가받기도 하는 것이며, 백도의 과격파들은 암중에 그를 제거하고자 비
밀결사대를 꾸몄다는 풍문이 떠돌고 있는 실정이었다.
어찌 되었던 백도는 마도에 비해 실력에서 열세이되, 표면적으로 세력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백무영이 표행에 근무하며 알게 된 강호정세는 대략 그러한 것이었다.
'마도는 힘을 모으고 있고, 백도는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다. 내가 생각
하기에, 관산대협 잠풍은 기회주의자임에 틀림이 없다. 어쩌면 그는 마도
세력과 야합(野合)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백무영은 병법을 배운 입장이기에, 강호판도에 대한 것을 나름대로의 견
지에서 파악하고 있었다.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밤이 되었기에, 눈은 도처에서 밝혀진 등불과 멋진 조화를 이루었다. 낮
이었다면 희게 보일 눈이되, 지금은 회색으로 보일 뿐이었다.
백무영이 한 잔의 차를 비웠을 때였다. 문득 하늘로 하나의 연(鳶)이 치
솟아 오르는 게 창 밖으로 보였다.
몹시 기이한 연이다.
두 개의 연이 하나로 이어진 쌍연(雙鳶)인 바, 하나의 연에는 검(劍)이 그
려져 있고 다른 연에는 도(刀)가 그려져 있었다.
연은 눈보라에 휘말려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저 연은……?"
백무영의 눈빛이 오랜만에 강렬하게 타올랐다.
쌍연은 미친 눈보라와 더불어 춤을 추다가 줄이 끊어져 버렸다.
연이 이름 모를 전각의 지붕 위로 떨어져 내릴 때, 백무영은 은자 하나를
남겨 둔 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