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시집 제2권 1-71 영사詠史 7 독광무기讀光武紀 광무의 기록을 읽고
운대렬장회풍운雲臺列將會風雲 운대雲臺의 여러 장수 풍운風雲에 참여했는데
동뢰구옹경은륜桐瀨癯翁竟隱淪 동강桐江 여울엔 파리한 노인 끝내 숨어버렸다네.
사부청고난가굴士負清高難可屈 선비가 맑고 높은 이름 지니면 굴하기 어려웁고
인유지용이위신人惟智勇易爲伸 사람이 오직 지智·용勇하면 펴기 쉽다네.
청고온덕종무패清高蘊德終無敗 맑고 높아 德 쌓으면 종내 패함이 없고
지용수재세필신智勇售才勢必臣 지용으로 재주 보이면 반드시 신하되리.
뢰우원도광무제賴遇遠圖光武帝 먼 일을 도모하는 광무 황제 힘입었지만
한팽전세염섬빈韓彭前世染銛鑌 앞 세상에서 한韓ㆍ팽彭은 사형 틀에 물들었네.
►한韓·팽彭 한漢 고조高祖 때의 장군인 한신韓信과 팽월彭越.
●광무제光武帝(BC6-AD57)
후한의 초대 황제(재위25-57).
1. 동한의 개국황제
남양군南陽郡 채양현蔡陽縣 사람으로 진류군陳留郡 제양현濟陽縣에서 출생했고
이름은 유수, 묘호는 세조世祖, 자는 문숙文叔이다.
신망新莽(외척인 왕망王莽이 황위를 찬탈해서 세운 나라) 말년에 내란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병사를 일으켜 서기 25년 왕망 정권을 붕괴시키고
河北 鄗南 千秋亭에서 황제로 등극했다.
유劉씨를 중흥시켰다는 뜻에서 한漢을 국호로 삼았고 역사에선 동한이라고 일컫는다.
2. 정권의 안정과 중흥
유수는 한 고조高祖 유방의 9세손으로 그 아버지는 일찍이 남돈령南頓令을 지냈다.
황제로 등극한 후 유수는 11년만인 36년에 전국을 평정한 다음 인재를 우대하고
세금을 줄이는 등 다양한 정책으로 정권을 안정시키고 중앙집권화를 꾀했다.
학문을 장려하고 유교를 국교로 존중하여
예교주의의 기초를 다짐으로써 동한 200여 년의 기틀을 놓았다.
재위하는 동안 여러 차례 노비를 석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농민들의 세금과 부역을 줄이고
지방의 병역제를 폐지하는 등 민심과 생업을 안정시키는 정책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다.
아울러 수리사업을 일으키고 생산을 발전시켰다.
관원을 줄이되 사직한 공신을 문관으로 임명하고 정부 부처 중
상서尙書(장관)의 권력을 강화시켰으며 三公(삼정승)의 권력을 줄여나갔다.
외척이 정치에 간여하는 것을 제한하고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강화시키는 등의 조치로
새로 일어난 동한정권의 안정을 꾀했고 동한은 신속하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역사에서는 이 시기를 ‘광무중흥光武中興’이란 말로 칭하며 유수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다.
3. 동한 건국 과정
1) 평범했던 유수와 포부가 컸던 형 유연
광무제 유수는 어려서부터 근신하고 관대하며
늘 부지런히 집안의 농사일을 도울 뿐 큰 포부를 품지 않았다.
그러나 유수의 형인 유연劉縯은 성격이 의지가 강하고 스스로 협객처럼 행동했으며
무사를 양성하길 좋아하는 등 평소부터 큰 뜻을 가지고 있었다.
왕망 천봉天鳳 연간(14-19년)에 유수가 장안에 가서 中大夫 허자위許子威를 스승으로 삼고
허자위로부터 <상서>를 배웠는데 이 무렵 그는
“벼슬을 하려면 北軍八校尉의 중위인 금오金吾(한나라 때 무관의 이름. 의금부의 별칭)가 되고
아내를 맞이하려면 南陽 신야新野(지금의 허난성 난양시 신예현) 출신의
자태가 출중한 미인과 해야 한다.”는 말로 평범한 자신의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2) 곤양전투와 왕망 정권의 몰락
한편 왕망은 찬탈을 통해 신 왕조를 세우고
상고시대의 정치를 되살린다는 복고정치에 빠져 현실을 도외시한 정책으로 민심을 잃었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대외적으로는
흉노·서강西羌(강족)·고구려 등 주변 국가와 민족들의 반감을 샀다.
당시 전국 각지의 반란 상황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연도 | 호칭 | 이름 | 근거지 | 비고 |
17 | | 여모呂母 | 해곡(海曲, 산둥성 일조) | 해상유격전 |
녹림병綠林兵 | 왕광王匡 | 녹림산(후베이성 수주 서남) | 하강병(下江兵)과 신시병(新市兵)으로 다시 나뉨 |
18 | 적미赤眉 | 번숭樊崇 | 거현莒縣(산둥성 거현) | 태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임 |
| 역자도力子都 | 동해(산둥성 담성) | 서주·연주 사이에서 유격전을 벌임 |
19 | | 마적구馬適求 | 거록巨鹿(허베이성 평향) | |
21 | 초려왕楚黎王 | 진풍秦豊 | 여구(후베이성 양번 동남) | 24년에 초려楚黎라 함 |
| 지소평遲昭平 | 평원(산둥성 평원) | |
22 | 평림병平林兵 | 진목陳牧 | 평림(후베이성 수주 동북 평림관) | 녹림병과 호응함 |
주천도부柱天都部 | 유연劉縯 | 용릉舂陵(후베이성 조양 남쪽) | |
23 | 한제漢帝 | 유현劉玄 | 완현宛縣(허난성 남양) | |
서주대장군·삭녕왕 | 외효隈囂 | 평양平襄(간쑤성 통위) | |
보한장군·촉군태수·익주목·촉왕·성가제 | 공손술公孫述 | 성도成都(쓰촨성 성도) | |
한제 | 유망劉望 | 여남汝南(하남성 평거 서북 사교향) | 신 왕조 멸망 전 |
회남왕·황제 | 이헌李憲 | 여강廬江(안후이성 서현) | 신 왕조 멸망 후 27년에 황제로 칭함 |
양왕·한제 | 유영劉永 | 저양雎陽(허난성 상구) | |
한제 | 왕랑王郞 | 한단邯鄲(허베이성 한단) | 서한 황제 성제 유오의 아들로 사칭함 |
24 | 무안왕武安王 | 연잠延岑 | 한중漢中(산시陝西성 한중) | 한수 유역에서 활동 |
익한대장군·해서왕 | 동헌董憲 | 담현郯縣(산둥성 담현) | 27년 해서왕으로 칭함 |
보한대장군·제왕 | 장보張步 | 극현劇縣(산둥성 수광 남쪽) | |
소지대장군·주성왕 | 전융田戎 | 이릉夷陵(후베이성 의창) | |
성두자로城頭子路 | 애증愛曾 | 동평東平(산둥성 동평) | 20만이 황하 유역에서 유격전을 벌임 |
25 | 한제 | 유영劉嬰 | 임경臨涇(간쑤성 평령) | |
한제 | 유수劉秀 | 호현鄗縣(허베이성 백향 북쪽) | |
한제·적미 | 유분자劉盆子 | 장안(산시陝西성 시안) | |
염신장군 | 유무劉茂 | 경현京縣(허난성 정저우 동), 밀현密縣(허난성 밀현 동) | |
하서오군·대장군 | 두융竇融 | 장액 속국(간쑤성 금탑 동) | |
상장군·서평왕·한제 | 노방盧芳, 유문백劉文伯 | 구원九原(내몽골 포두) | |
연왕 | 팽방彭龐 | 어양漁陽(베이징 밀운) | 27년에 왕이라 칭함 |
회양왕 | 소무蘇武 | 광락廣樂(허난성 우성 서북) | |
| 동흔董欣 | 도향堵鄕(허난성 방성) | |
| 등봉鄧奉 | 육양淯陽(허난성 남양 남) | |
한제 | 손등孫登 | 上郡 陝西성 유림남쪽 어하보漁河堡 | 손등은 얼마 되지 않아 피살당함 |
왕망의 지황地皇 3년(22) 겨울, 유수의 형 유연이 군대를 일으켰다.
당시 28세였던 유수도 이에 합세하여 용릉군舂陵軍으로 불렀다.
이후 당시 가장 큰 반란 세력인 녹림군과 합류하고 다시 다른 세력들과 연합하여
유수 집안의 본가 핏줄인 유현遊絃을 경시제로 옹립하여
본격적으로 왕망의 신 정권에 맞서기 시작했다.
경시 원년(23), 왕망은 곤양성昆陽城에서 유수의 군대를 포위하여 맹공을 퍼부었으나
유수와 유연 형제의 활약으로 왕망의 군대를 대파했다.
이로써 두 형제의 명성이 점점 천하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곤양성 전투 당시 유수는 탁월한 책략과 능력을 발휘했다.
당시 왕망이 대군을 모아 곤양을 포위했고 유수는 녹림군의 장수였다.
유수의 군대는 왕망 군대의 위세를 보고 모두 처자식을 걱정하며 도망갈 궁리뿐이었다.
그러나 유수는
“눈앞에 큰 적이 있는데 우리는 병사도 적고 군량도 부족하다.
만약에 우리가 협력하여 일심동체로 막아내면 혹 성공할 희망이 있지만
만약 분산하여 가버리면 전세는 반드시 와해되어 패망할 것이다.
하물며 완성宛城(현 허난성 난양시)은 아직까지 공격하여 이기지 못해 원군을 보낼 처지가 못 된다.
곤양성마저 적에게 공격당해 무너지면 각 부대는 모두 보전하기 어렵다.
이와 같이 다급한 때에 우리의 살길은 오직 힘을 합해 같이 공명을 도모하는 길밖에 없다.”
라며 장병들을 격려했다.
일부 장수들이 유수의 능력에 의심을 품었지만 유수는 성을 굳건히 지키도록 하는 한편
정예 장수와 병사들을 뽑아 엄호하면서 밤을 틈타 왕망군을 포위하여 죽이기 시작했다.
정릉定陵 언현郾縣 등지에서 원군이 곤양으로 이동해왔는데 그는 직접 보병 1천여 명을 거느리고
가장 가까운 적의 진영을 진격했고 성내의 군사들도 죽음을 무릅쓰고 나와서 협공을 하니
사방에서 함성소리가 하늘을 진동시켰고 왕망군은 이리저리 흩어지면서
각종 무기와 수레에 실은 것들을 모두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이것이 역사상 저명한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병력을 이긴 ‘곤양지전昆陽之戰’이다.
이 전투로 왕망 정권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다.
3) 유수의 세력 확장과 통일
한편 경시제는 유수의 명성과 능력을 시기 질투하여 견제에 나섰고
그때까지 관망하던 호족들이 곤양 전투를 계기로 합류함으로써 유수의 명망이 더욱 높아졌다.
상대적으로 경시제의 통치력이 바닥을 드러내고
또 문란한 생활을 일삼자 유수는 점점 자립할 기회를 엿보지 않을 수 없었다.
유수는 북방 지역을 평정하고 그 지역의 호족들과 무장 및
문인들을 포섭하여 자신의 세력 기반을 더욱 다졌다.
이에 경시제는 유수의 군대를 해산시키고 그를 長安(현 陜西성 시안)으로 불러들였지만
유수는 河北(현 허베이성)이 평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핑계로 합류하지 않았다.
건무3) 원년(25), 하북 지역의 실력자가 된 유수는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마침내 황제로 즉위하고 연호를 건무로 정했다.
그해 경시제는 적미군에게 항복한 뒤 피살되었다.
이제 천하의 대권은 유수와 적미군의 대결로 결정될 형국이었다.
이듬해 유수는 적미군의 항복을 받았고 건무 6년(30)에 산동(현 산둥성)을 평정했다.
3년 뒤인 건무 9년(33)에는 서쪽 농서隴西(현 간쑤성 서쪽)를 공략했다.
그 지역의 실권자 외효隗囂는 병을 앓다 굶어 죽고
뒤를 이은 아들 외순隗純은 건무 10년(34)에 항복하였다.
이어 건무 12년(36)에 촉 땅의 실력자 공손술을 물리침으로써 중국 통일을 달성했다.
광무제는 洛陽(현 허난성 뤄양시)을 첫 도읍으로 정했다.
그 뒤 장안을 함락시킨 뒤에도 황폐한 장안으로 천도하는 대신 낙양을 그대로 도성으로 유지했다.
五行에 따라 한 왕조를 火德이라 여겼던 광무제는
낙양의 ‘낙洛’에 들어간 물 水 변을 싫어해서 낙양의 이름을 낙양雒陽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는 중국 통일을 전후해 노비를 해방하고 죄인들을 석방시키고 조세를 가볍게 줄였으며
군사를 귀농시키고 수리사업을 일으키는 등의 정책을 통해 왕조의 기초가 되는
백성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통치 기구를 정비하고 지배 체제를 확립했다.
56년에 연호를 建武中元으로 바꾸고 하늘과 땅에 제사를 드리는 封禪을 행했으며
그 이듬해 2월에 낙양의 남궁에서 63세로 사망하였다.
4. 광무제 유수의 통치 스타일
유수는 ‘고조의 업적을 부흥[復高祖之業]’하여 실천한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역사상 ‘光武中興’이라는 시대를 창출해냈다.
그것은 사람을 잘 쓰고 상과 벌에 분명하였으며 간언을 잘 받아들인 결과이다.
유수는 사람의 됨됨이를 꿰뚫어 보는 안목을 지녔으며 사람을 쓰는 능력이 탁월했다.
탁무라는 이는 사람됨이 너그럽고 어질며 정중하면서 자애로웠기 때문에 長者라고 일컬어졌으며
서한 말기에 밀현령密縣令을 지냈고 뒤에 경도승京都丞이 되었다.
왕망이 황제가 되자 그는 병을 핑계 삼아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유수는 즉위 직후 가장 먼저 사람을 보내서 탁무를 방문토록 하였다.
그는 이미 고희가 넘었지만 유수는 이에 개의치 않고 조서를 내렸다.
“탁무의 명성은 천하의 으뜸이니 당연히 천하의 중상을 받아야 한다.
지금 탁무를 태부太傅로 삼고 포덕후褒德侯로 봉하노라.”
유수가 탁무를 군신의 수장으로 삼은 것은
그가 현명한 인재로 천하를 다스리겠다는 절박한 심정을 반영한 것이다.
그는 사람을 쓰는 문제에서
“다스림에 있어 평소의 덕행을 숭상하고 일에 있어서 능력에 따라 상을 내린다”는
정치적인 식견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동한의 통치기반을 확대시키기 위하여
특별히 명망 있는 사람을 회유하여 관리로 삼는 데 힘을 쏟았다.
회계會稽 여요余姚(현 저장성 위야오시) 사람인 엄광은 유수와 동문수학한 친구 같은 사이였는데
유수가 황제를 칭한 후에 성과 이름을 감추고 의도적으로 피하여 만나지 않았다.
유수는 그의 초상화를 그려 각지에 사람을 보내 찾게 했는데 마침내 그를 京城에서 찾아냈다.
유수는 엄광에게 자신을 보좌하여 천하를 다스리자고 제의했지만 엄광은 강경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요 임금이 자신의 덕을 천하에 드러내려 하자 소보가 귀를 씻었다고 합니다.
사람마다 각기 뜻이 있으니 무엇 때문에 나를 이렇게 핍박하십니까?
나로 하여금 관리가 되라고 강요하지 마십시오!”
뒤에 유수는 엄광을 궁 안으로 청하여 편하게 일을 의논하고 상대하는 날이 많았다.
유수가 엄광에게 물었다.
“당신이 느끼기에 지금의 짐은 이전과 뭐가 달라진 것 같소?”
엄광이 말했다.
“폐하는 이전에 비하여 크게 진보하신 것 같습니다.”
당연한 말을 천연덕스럽게 하자 곁에서 듣고 있는 자들이 모두 웃었다.
밤이 되자 광무제는 아주 친숙하게 엄광과 함께 한 침상에서 잠을 잤다.
엄광은 고의로 그의 다리를 유수의 배에 올려놓고 짐짓 드르렁드르렁 코까지 골았다.
유수는 그를 마음대로 자게하고 꼼짝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태사가 급하게 와서 이렇게 아뢰었다.
“어젯밤에 별을 관찰해보니 客星(손님별)이
御座星(임금 별자리)을 침범했는데 상당히 심각했습니다.”
유수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것은 짐의 친구와 짐이 한 침상에 잠을 잤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수는 어진 사람을 생각하는 것을 마치 목이 마른 듯 갈구했고
어진 이를 예의와 겸손으로 대했다.
인재에 대한 유수의 우대책은 초기 동한 왕조를 안정시키는 데 적지 않은 작용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