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명문가 ( 한산 이씨)
경북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 일대에는 韓山 李氏 일족이 집성세거하고 있다.
한산 이씨의 관향지 한산은 소곡주와 모시로 유명한 충남 서천군 한산면이다.
충청도 일대에 세거했어야할 한산 이씨가 이 마을에 입향한 것은 서애 柳成龍과 관련이 있다. 서애의 사위인 李文英이 찰방 벼슬을 하다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인 睡隱 李弘祚가 외숙인 修巖 柳袗(서애의 3자)에게 글을 배웠다. 睡隱은 안동 일직 거주 영양 남씨 南煌의 사위가 되었는데 광해군 때 大北 정권의 전횡에 염증을 느껴 회인현감 직을 그만두고 처향따라 이곳으로 옮겨 살면서 정착하였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것은 수암 류진과 수은 이홍조는 외숙과 생질관계이나, 처가쪽으로 보면 서로 동서관계에 있었다는 점이다. 즉 둘 다 남황의 사위가 되었으니 수암은 처제를 생질부로 삼은 것이다.
한산 이씨는 가전체소설 ‘죽부인전’ 으로 유명한 稼亭 李穀(1298-1351)과 그의 아들로 고려말 최고의 지식인 牧隱 李穡(1328-1396) 부자가 다져놓은 바탕위에 조선조 500년을 통해 상신 4명, 대제학 3명, 청백리 6명, 공신 12명 등을 포함하여 문과급제자만도 195명에 이르렀고, 500여명이 넘는 진사와 생원을 배출한 명문이다.
한산의 호장인 시조 李允卿 이래 5세까지 한산지방에 세거하였는데 6세 가정 李穀이 1310년 아버지를 여의고 고향을 떠나 동해 바닷가 경북 영해의 토호인 咸昌金氏 金澤의 사위가 되는데 이곡은 장인의 도움으로 도평의사사의 서리로 진출하여 1317년 藝文館檢閱이 되고, 1320년 文科에 급제하게 된다.
가정 이곡은 1332년(충숙왕 복위 1; 원나라 순제 원통원년) 35세때 征東行省 鄕試에 수석합격을 시작으로 이듬해 制科 殿試에 차석으로 급제하였다. 신라때 孤雲 崔致遠이 唐나라 과거 전시에 상등으로 급제한 이래 고려인으로서 상등에 급제하기는 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아들 牧隱 이색도 나중에 원나라 전시에 상등으로 급제하여 부자 2대가 고려와 원 양국에서 문명을 날렸다. 순흥 안씨 安軸과 安輔 역시 원나라 制科에 급제함으로써 한산이씨 집안과 대비되기도 한다.
牧隱 이색은 1328년 외가인 경북 영덕군 영해 (현 영양 남씨 집성촌 괴시리 마을)에서 가정 李穀의 외아들로 태어나 두 살 때 선조들의 고향인 한산으로 돌아간다. 타고난 능력과 부친의 음덕으로 어렸을 때부터 이미 그 탁월한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으며 수월하게 벼슬길에 나아가게 된다. 19세의 나이에 장가를 들려하자 당시 최고 명문 집안에서 서로 사위를 삼고자하여 혼례 당일까지도 서로 다투었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결국 당대 제일 명문 집안 중의 하나인 안동 권씨 복야공파 右政承 一齋 權漢功의 손녀에게 장가를 드는데 그 장인 花原君 權仲達은 영의정 權仲和의 형이 된다.
목은 이색은 공민왕 2년(1353)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다음해 원나라에 들어가 정동행성 향시에 장원 급제, 황제가 친림하는 전시에 2등으로 합격하여 한문의 본고장인 중국천하를 또 한 번 놀라게 하는데 과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라는 찬사를 듣게 된다. 전시에서 차석은 원나라 사람이 아니면 장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으로 쉽게 말하자면 외국인으로서 하버드대학 박사학위를 수석으로 취득한 수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신유학인 송나라의 주자학을 고려에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은 안향이다. 그후 백이정과 우탁 이제현을 거쳐 이색에 이르러서 본격적으로 꽃피게 되고 이어 정도전 정몽주 이숭인 길재 권근 등 여말 선초의 신지식인 그룹으로 이어짐에 있어 이색은 학문적 저수지와 같은 중심 역할을 하게 된다.
이색은 원과 고려에서 문한을 담당하는 청요직을 두루 거치다가 공민왕 20년 재상의 반열에 오르고 우왕 8년(1382) 판삼사사(종1품)가 되고 우왕 11년(1385) 58세에 검교 문하시중이 된다. 1388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때 우왕을 폐하고 조민수 등과 함께 창왕을 옹립하였다. 그 후 이성계 일파의 뜻에 따르지 않고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며 절의를 꺾지 않았다. 이성계는 쿠데타를 일으켜 새 왕조를 세워 태조가 되었지만 그는 계속 자신의 친구였으며 윗자리에 있던 목은을 새 왕조에 입조할 것을 계속 회유하며 간청했었다. 이성계 일파가 목은을 함부로 제거할 수 없었던 까닭중에 하나는 고려에서뿐 아니라 중국에서까지 널리 알려지며 추앙받던 명성과 정치적 위치 때문이었다.
이방원과 정도전 일파는 1396년(태조 5년) 이색이 여주 신륵사에서 피서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사자를 시켜 여주 여강의 연자탄에 술과 안주를 내려 보내어 어주라 속이고 독이 든 술병을 보냈고 이를 수상히 여긴 신륵사 승려들이 마시지 말라고 말렸으나, 목은은 “명이 하늘에 있는데 죽고 사는 것을 어찌 두려워하랴?” 하며 독주를 마시고 일생을 마감하였다. 이때 술병을 막았었던 대나무 잎이 강가로 떠밀려가서 대숲을 이루어 그 대쪽 같은 절개를 상징하였다는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려 있다.
목은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그 손자가 무려 15명이나 된다. 손자 맹유, 맹균, 맹준, 맹진은 종덕의 아들이고, 숙야, 숙휴, 숙당, 숙묘, 숙복, 숙치는 종학의 아들이며 계주, 계린, 계전, 계완, 계정 은 종선의 아들이다. 목은의 3자 종선은 양촌 권근의 사위가 되었는데 한산 이씨 중 이름 있는 인물은 대부분 종선의 후예들이다. 사육신의 한사람 백옥헌 이개, 토정비결을 쓴 기인 토정 이지함, 북인의 영수 영의정 이산해, 조선말 수당 이남규가 그들이다.
서애의 사위 이문영은 목은의 맏아들 이종덕의 8대손으로 찰방벼슬을 지내다 요절하였는데, 둘째 아들 수은 이홍조가 안동 일직의 영양 남씨 남황(1595-1666)의 사위가 됨으로써 처향따라 입향하여 이때부터 영남 사람이 되었다.
韓山 李氏 系圖
시조 李允卿-仁幹-孝進-昌世-自成-穀-穡-種德.......文英
種學
種善....之蕃-山海
之菡
文英-昌祚-孝源
弘祚-孝濟-碩觀-泰和-後靖 (소호리 세거)
象靖-琬-秉運-秀應-敦禹
秉進
秉遠
光靖(출)
碩輔-再和-顯靖
碩望-志和-光靖-瑀
수은의 아들 李孝濟는 의성 김씨 雲川 金涌의 손서(金熙의 사위)가 되고, 수은의 증손자인 觀稼堂 李泰和는 재령 이씨 密巖 李栽(갈암 이현일의 3자)의 사위가 되는 등 풍산 류씨, 영양 남씨, 의성 김씨, 재령 이씨 등 안동 일대의 유력 사족들과의 통혼 및 사우관계를 통하여 그 위치를 공고히 하였다.
觀稼堂 李泰和의 아들인 대산 이상정(1710-1781)과 소산 이광정(1714-1789) 형제는 당시 영남 남인 학계의 거두 밀암 이재의 외손자로서 문명(文名)이 높았다. 특히 대산 이상정은 퇴계이황을 시작으로 학봉 김성일, 경당 장흥효, 갈암 이현일, 밀암 이재로 이어지는 도학(道學)의 적전(嫡傳)을 계승한 대학자로 이름났다. 대산을 지칭할 때 ‘소퇴계(小退溪)’라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대산은 70세(정조4)에 이르러 정3품 당상관인 예조참의가 되었고 세상을 떠난 해인 3월에는 형조참의가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그해 6월 ‘9조소’를 올린 뒤 12월 9일 세상을 하직했다.
퇴계가 ‘무진6조소’를 올린 것과 내용 면에서 닮았고, 퇴계에 비해 대산이 1년 더 수를 했다. 두 분의 遺墨을 보면 필법 면에서도 흡사하다고 느낄 것이다. 세상을 떠나면서 올린 9조소을 읽으면 대산의 평생 학문이 이 한 편의 글에 응축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는다. 간절한 글을 올려 읽히고자 했던 왕은 정조였다. 입지(立志), 이치를 밝히는 일(明理), 거경(居敬), 하늘을 본받기(體天), 간언을 받아들이기(納諫), 학교를 일으키기(興學), 사람 부리기(用人), 백성 사랑하기(愛民), 검소하기(尙儉) 9조소의 항목이다. 대산은 이 9개 항목이 모두 덕을 연마하고 본심을 기르는 요점이고 정치를 잘하는 근본이라고 보았다.
대산을 알기 위해 먼저 보아야 할 것은 방대한 저술이다 선생의 일차 저작물이라 할 수 있는 문집이 27책 분량. 거개가 두세 책 정도 남긴 것을 고려한다면 이는 놀라운 성취다. 52권 27책에 모두 2,157판에 달하는 양이다.
대산 선생이 남긴 편저는 <理氣彙編>, <制養錄>, <退溪書節要>, <約中編>, <屛銘發揮>, <心經講錄刊補>가 그 대표적인데, 모두 수준 높은 성리학의 연구물들이다. 대산의 지도 하에 이들 문도들은 성리학 및 예학과 관련된 연구물을 다수 발표했다. 철저하게 성리학과 禮說에 중심을 두고 있다. 서책 230여 종과 100여 명의 제가(諸家)의 인명이 인용되고 있는 대표적 저작물이 영남 예법의 백과사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常變通攷>이다. <상변통고>는 30권 16책이나 되는 방대한 저작물로 동암 류장원이 주자가례의 체제에 준해서 常禮와 變禮에 관한 諸說을 참조해 편찬했다.
대산 선생은 소호리와 지금의 고산서원 일대를 무대로 거대한 학단을 꾸렸다. 일종의 ‘禮學 연구단지’인 셈이다.
대산 선생의 지도와 중간 교수 요원들이라 할 수 있는 後山 李宗洙(진성 이씨), 川沙 金宗德(상락 김씨), 立齋 鄭宗魯(진주 정씨) 등 ‘호문삼종(湖門三宗, 대산 문하의 마루 宗자가 들어가는 세 사람의 대표적 학자)’ 학자들이 학단을 일사불란하게 이끌었다.
대산의 아우 소산 이광정은 1728년(영조 4) 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15세의 나이로 부형을 따라 진압군에 참여하였고 1740년에는 동당향시에 합격했으나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했다. 형의 지도를 받아 퇴계의 학풍을 계승하여 1784년(정조 8)에는 다른 영남의 학자들과 함께 『抄啓文臣講義』를 검토․교정하는 데 참여하였다
대산의 재종제 약와 李顯靖(1721-1789)도 1763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承政院假注書,承文院副正字, 承政院注書, 承文院典籍, 禮曹正郞, 黃海都事, 兵曹正郞 등을 역임했으며, 대산의 고손자 肯庵 李敦禹 (1807-1884)는 1850년 문과에 급제, 承文院正字, 典籍, 校理, 刑曹參議를 거쳐 吏曹參判에 올랐다.
이렇듯 소호리 한산 이씨는 처향 외향따라 낙남하여 짧은 기간에 대산과 같은 대학자를 배출하였다. 程朱學의 계통을 이어받아 퇴계선생과 흡사한 경지에 도달한 이 즉 ‘小 退溪’ 라고 안동의 유림 사회가 인정한 것이다. 이는 영남 남인 세계에서는 가장 영예로운 지칭이다.
이색(李穡) 1328(충숙왕 15, 무진) ~ 1396(태조 5, 병자)
고려 말의 문신․학자. 본관 한산(韓山). 영해(寧海) 출생.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 한산군(韓山君) 곡(穀)의 자.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으로, 여말 삼은(麗末三隱)의 한 사람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진사(進士)가 되고, 1348년 원(元)나라에 가서 국자감(國子監)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했다. 1352년(공민왕 1) 전제(田制) 개혁․국방 강화․교육 진흥․불교 억제 등 당면 정책을 왕에게 건의했다. 1353년(공민왕 2) 괴과(魁科)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135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원 나라에 가서 회시(會試)에 장원을 하고, 원(元)의 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한림원(翰林院)에 등용되었다. 1356년 귀국하여 이부시랑(吏部侍郞) 등 인사행정을 주관, 정방(政房)을 폐지하였고, 이듬해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때는 3년상(三年喪)을 제도화했다. 1361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왕의 남행(南幸)을 호종, l등공신이 된 후 좌승선(左承宣)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1367년 대사성(大司成)이 되자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과 강론, 성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책봉되고, 1375년(우왕 l)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했다. 1377년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철령위(鐵嶺衛) 사건에는 화평을 주장하였고, 이듬해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이 강화로 유배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昌)을 즉위시켜 이성계(李成桂)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으나 이성계가 득세하자 장단(長湍)․함창(咸昌) 등지에 유배되었다. 1391년(공양왕 3)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책봉되었으나 다시 여흥(驪興)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태조가 한산백(韓山伯)에 책봉했으나 사양,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중 죽었다. 문하에 권근(權近)․김종직(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 학문과 정치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일직(一直)에 서산서원(西山書院)을 비롯한 전국의 많은 서원(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에『목은시고(牧隱詩藁)』『목은문고(牧隱文藁)』가 있다. 그 후손이 안동에 정착하여 그 영당(影堂)을 받들고, 서원을 세워 제향하고 있다. ■참고문헌 : 太祖實錄․高麗史
이상정(李象靖) 1711(숙종 37, 신묘) ~1781(정종 5, 신축)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 한산(韓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 시호는 문경(文敬). 목은(牧隱) 색(穡)의 후손. 태화(泰和)의 자로 일직(一直) 망호리(望湖里)에서 출생했다. 외조부 이재(李栽)의 문인으로 문장(文章)과 율려(律呂)․산수(算數)에 능통했다. 1735년(영조 11) 진사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에 증광문과에 급제합격하여,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지평(持平)․연일현감(延을日縣監)울 거쳐 예조(禮曹)․형조참의(刑曹參議)에 이르렀다. 경상도 안동(安東)에서 학술을 강론하여 많은 제자를 길러 문인록(文人錄)에 오른 제자만도 273인이나 되며, 그의 학문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영남 유림종사(儒林宗師)로 일컬음을 받았다. 남후(南後) 고산서원(高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에 『대산집(大山集)』『약중편제(約中編制)』『사칠설(四七說)』이 있고, 후세들이 편집․간행한 『대산실기(大山實記)』 등이 있다. ■참고문헌 : 英祖․正祖實錄․安東鄕土誌(宋志香)
이광정(李光靖) 1714(숙종 40, 갑오) ~ 1789(정조 13, 기유)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 한산(韓山). 자는 휴문(休文). 호는 소산(小山). 일직(一直) 출생. 목은(牧隱) 색(穡)의 후손. 태화(泰和)의 자. 영남학파(嶺南學派)의 대학자 상정(象靖)의 동생이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15세의 나이로 부형을 따라 진압군에 참여하였다. 1735년(영조11) 증광향시, 1740년에는 동당향시에 합격했으나 전시(殿試)에 불리하여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했다. 형 상정(象靖)의 지도를 받아 이황(李滉)의 학풍을 계승하여 사단칠정(四端七情)과 『근사록(近思錄)』『심경(心經)』을 익혔으며, 조명천(趙命天)․이평중(李平仲)․조성여(趙聖與) 등과 교유하였다. 1783년(정조 7) 학행으로 천거되어 온릉참봉(溫陵參奉)․동몽교관(童蒙敎官)․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784년(정조 8)에는 다른 영남의 학자들과 함께 『초계문신강의(抄啓文臣講義)』를 검토․교정하는 데 참여하였는데, 정조의 인정을 받아 특별히 6품직에 임명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저서에 『소산집(小山集)』이 있고, 남후(南後) 고산서원(高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 嶺南人物考․安東鄕土誌(宋志香)
이현정(李顯靖) 1721(경종 1, 신축) ~ 1789(정조 13, 기유)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한산(韓山). 자는 맹휴(孟休). 호는 약와(約窩). 목은(牧隱) 색(穡)의 후손. 명화(命和)의 자로 백부 재화(再和)에게 출계. 종형 상정(象靖)에게 수학하였으며, 1747년(영조 23) 생원시에 합격하고, 1763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관직에 나아갔다. 1770년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승문원전적(承文院典籍)․예조정랑(禮曹正郞)․황해도사(黃海都事)․강동현감(江東縣監)․병조정랑(兵曹正郞) 등을 역임했다. 1784년(정조 8)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가 되어 시무책(時務策)을 올려 자신의 주장을 펴는데 진력하였다. 이후 종부시정(宗簿寺正)를 지낸 후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교리(校理)․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는 학문에도 게으르지 않았으며, 대인 관계에서도 항상 온후하고, 정치 일선에서는 왕에게 직언을 잘 하였다. ■참고문헌 : 正祖實錄․國朝榜目․淸選考
이돈우(李敦禹) 1807(순조 7, 정묘) ~ 1884(고종 21, 갑신)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한산(韓山). 자는 시능(始能). 호는 긍암(肯庵). 대산(大山) 상정(象靖)의 현손. 수응(秀應)의 자. 유치명(柳致明)의 문인. 1850년(철종 1) 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은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전적(典籍)․교리(校理)를 거쳐 형조참의(刑曹參議)․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으며, 저서로 『긍암집(肯庵集)』이 있다. ■참고문헌 : 安東市史․安東鄕校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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