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갑진년(甲辰年) 새 해 인사
이배사 가족 여러분! 2024년 청룡의 해, 갑진년(甲辰年)의 새 아침이 밝았습니다. 특별히 올해는 천간(天干)의 시작인 갑(甲)의 해이니 10년마다 시작되는 새로운 하늘이 열리는 날이네요. 청룡은 새로운 시작, 희망, 용기, 진취적 기상의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코로나19 때문에 이배사 창립 10주년 기념행사가 연기되어 작년에 13주년 기념행사로 마무리되었으니 어찌 보면 우리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도 올해가 새로운 10년을 시작하는 뜻깊은 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여 먼저 이배사님들의 가정에 행복과 평화가 충만하기를 기원드립니다.
갑진년(甲辰年)의 역사를 돌이켜 보니, 1484년(성종 15년) 갑진년에는 조선의 최초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완성되고, 창경궁이 준공되었네요. 1544년(중종 39년) 갑진년에는 인종(仁宗)이, 1724년(경종 4년) 갑진년에는 영조(英祖)가 즉위하였으며, 1784년(정조 8년) 갑진년에는 이승훈이 북경에서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았구요. 또한 1904년(고종 41년) 갑진년에는 세브란스 병원이 개원되고, 1964년(박정희 3년) 갑진년에는 제3공화국이 시작되었으니 청룡의 해가 지녔다는 하늘과 땅의 기운이 나름대로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임진왜란, 정유재란이 끝난 지 6년째가 되는 1604년(선조 37년) 갑진년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선조실록>을 보니, 1604년(갑진년) 1월 1일부터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불길한 징조>가 있었다고 기록하였네요. 사실 1603년(계묘년) 1월 초에도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현상이 있었거든요. 이런 괴이한 현상에 대해 사신(史臣)은 자신의 의견을 실록에 첨부합니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위에서는 반성하여 전일의 잘못을 고치는 일이 없고, 아래에서는 국가를 위하여 몸 바쳐 흥망의 책임을 스스로 지는 자가 없으니, 하늘이 어찌 노여워하여 진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또한 참혹하다.”(<선조실록> 선조 37년, 1월 1일)
이를 보면 사신(史臣)의 제도가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는 왕조실록(王朝實錄)에 임금의 잘못을 숨김없이 첨부할 수 있는 장치를 제도적으로 만들어 두었으니 말입니다. 그 이튿날인 1월 2일, <흰 무지개가 해를 꿰는 현상>에 대해 일관(日官)이 다음과 같이 임금 선조에게 보고합니다.
“...남이(南夷)는 틈을 엿보고 북로(北虜)는 자주 움직이며, 기근은 잇따라 이르고 부역은 번거롭고 가혹하여 온 나라 수 천리 안에 원통함을 호소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대관(大官)은 한가하고 소관(小官)은 게을러서 곧은 말이 이르지 않고 방비는 더욱 허술해지는데 한 가지 폐단이 고쳐지거나 한 가지 일이 변통되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겠으니, 장차 무엇을 믿고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마치 해가 지는 것과 같이 국가의 앞날이 암담할 뿐이니, 천심이 진노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전기(傳記)에 이따금 나오는 천재(天災)와 물괴(物怪)의 놀라운 이변이 다 근일에 모였으니, 재변에 대응하는 도리에 있어서 아마도 극진히 거행하지 못한 점이 있는 듯합니다. 경계를 보이는 것이 더욱 급한 것은 인애가 더욱 지극한 것이니, 성명(聖明)께서는 각별히 더 경동(警動)하고 대신에게 물어서 빨리 그치게 할 방도를 강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더없이 다행하겠습니다. 신들은 성명을 우러러 받들고 있는데 참변을 당하게 되니, 구구한 마음이 못 견디게 근심되고 민망하므로 황공하여 감히 아룁니다."(<선조실록> 선조 37년, 1월 2일)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재이(災異) 현상 하나로 전쟁이 끝난 지 6년쯤 되는 당시 조선의 상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기근이 잇따라 발생하고, 부역(賦役)이 가혹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한데도 대소신료(大小臣僚)들이 게을러 제대로 된 대책 하나를 내어놓지 못하니 국가의 앞날이 암담하다는 것이 앞에서 살펴본 사신(史臣)과 이 글을 올린 일관(日官)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전쟁의 후유증에다 연이은 기근과 고된 부역 등 백성들의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이 지속되는 참으로 답답한 상황임이 느껴집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이런 불길한 징조와 이에 대한 일관(日官)의 해석에 대하여 임금 선조가 자기 탓으로 돌리면서 수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이에 대한 임금 선조의 반응을 기록한 것입니다.
"근래 이변이 거듭 나타나고 원일(元日)에 백홍(白虹)이 해를 꿰니, 매우 놀랍고 참담하다. 참으로 내가 인군(人君)답지 못한 소치이니, 몹시 두려울 뿐이다. 더욱더 덕을 닦고 행실을 살피겠다."(<선조실록> 선조 37년, 1월 2일)
(* 그러나 임금 선조의 위의 대답도 사실은 신뢰가 가지 않는다. 말만 이렇게 해놓고 실행에는 옮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1603년 1월 26일 실록을 보면 사신(史臣)은..임금 선조를...<허물을 알기만 하고 허물을 고치지는 못한 군주, 선(善)을 말하기만 하고 선을 실행하지 못한 군주, 널리 구제의 방책을 구하는 전지는 내렸지만 종이 한 장의 헛된 글이 되는 것을 면치 못한 군주>로 폄하하며 비판하였다)
전통사회에서 천체의 현상에 대해 이렇듯 관심이 많았던 것은 자연의 재이(災異) 현상과 인간 사회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연결시키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이 유교 사회인 조선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특히 자연의 재이(災異) 현상은 임금의 치세(治世)에 대한 하늘의 경고로 인식되었는데 아마도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진 임금을 제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 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초법적 위치에 있는 최고통치자인 임금을 자연의 재이(災異) 현상을 통해 견제하고자 했던 현자(賢者)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내용은 1604년 갑진년 6월 25일, 대대적으로 공신(功臣)이 책봉되었다는 것입니다. <선조실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공신(功臣)들의 명칭을 정하여 대대적으로 봉(封)했는데, 서울에서 의주까지 시종(始終) 거가(車駕)를 따른 사람들을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하여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이 있게 명칭을 내렸고, 왜적을 친 제장(諸將)과 군사와 양곡을 주청(奏請)한 사신(使臣)들은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하여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이 있게 명칭을 내렸고, 이몽학(李夢鶴)을 토벌하여 평정한 사람은 청난공신(淸難功臣)으로 하고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 있게 명칭을 내렸다.”(<선조실록> 선조 37년, 6월 25일)
이 가운데 특히 이순신 장군과 관련 있는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책봉된 사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은 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원균(元均)세 대장인데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 공신(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이라 하고, 2등은 신점(申點)·권응수(權應銖)·김시민(金時敏)·이정암(李廷馣)·이억기(李億祺)인데 효충장의협력선무 공신(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이라 하고, 3등은 정기원(鄭期遠)·권협(權悏)·유사원(柳思瑗)·고언백(高彦伯)·이광악(李光岳)·조경(趙儆)·권준(權俊)·이순신(李純信)·기효근(奇孝謹)·이운룡(李雲龍)인데 효충장의선무 공신(效忠仗義宣武功臣)이라 하였다. 각각 관작을 내리고 군(君)으로 봉했는데 모두 18인이다.”(<선조실록> 선조 37년, 6월 25일)
그런데 여기서 늘 보는 사람들마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대목이 이순신과 원균을 함께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책봉하였다는 것입니다. 공신 책록의 논의가 시작되고 책봉될 때까지 약 2〜3년의 기간이 소요되는데요. 그래서 선무공신(宣武功臣)의 경우 처음에는 정왜공신(征倭功臣)으로 불렸다가 논의를 통해 최종적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선무공신의 경우 공신도감(功臣都監)의 대신들과 임금 선조가 여러 차례의 의견 교환을 통해 1등, 2등, 3등이 확정되었는데 특히, 선무공신 1등에 책봉된 원균과 관련된 내용이 <선조실록>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비망기로 이르기를,
<원균을 2등에 녹공해 놓았다마는, 적변이 발생했던 초기에 원균이 이순신(李舜臣)에게 구원해 주기를 청했던 것이지 이순신이 자진해서 간 것이 아니었다. 왜적을 토벌할 적에 원균이 죽기로 결심하고서 매양 선봉이 되어 먼저 올라가 용맹을 떨쳤다. 승전하고 노획한 공이 이순신과 같았는데, 그 노획한 적괴(賊魁)와 누선(樓船)을 도리어 이순신에게 빼앗긴 것이다. 이순신을 대신하여 통제사가 되어서는 원균이 재삼 장계를 올려 부산(釜山) 앞바다에 들어가 토벌할 수 없는 상황을 극력 진달했으나, 비변사가 독촉하고 원수가 윽박지르자 원균은 반드시 패전할 것을 환히 알면서도 진(鎭)을 떠나 왜적을 공격하다가 드디어 전군이 패배하게 되자 그는 순국하고 말았다. 원균은 용기만 삼군에서 으뜸이었던 것이 아니라 지혜도 또한 지극했던 것이다.
당(唐)나라 때 가서한(哥舒翰)이 가슴을 치면서 동관(潼關)을 나섰다가 마침내 적에게 패전하게 되었고, 송(宋)나라 때 양무적(楊無敵)이 반미(潘美)의 위협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싸우러 나갔다가 적에게 섬멸된 것이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고금(古今)의 인물들을 성공과 실패만 가지고는 논평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원균이 지혜와 용기를 구비한 사람이라고 여겨 왔는데, 애석하게도 그의 운명이 시기와 어긋나서 공도 이루지 못하고 일도 실패하여 그의 역량이 밝혀지지 못하고 말았다. 전번에 영상이 남쪽에 내려갈 때 잠시 원균을 민망하게 여기는 뜻을 가졌었는데, 영상이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늘날 공로를 논하는 마당에 도리어 2등에 두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원균은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선조실록> 선조 36년, 6월 26일)
위의 내용을 보면 공신도감(功臣都監)에서 보고한 최초의 내용에는 원균이 선무공신 2등으로 분류되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위의 내용처럼 임금 선조가 원균이 선무공신 2등으로 분류된 것에 대해 질타하면서 스스로의 생각을 강력하게 표출하자 결국은 등급을 올려 이순신과 더불어 선무공신 1등에 책봉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왕조사회에서 그 누가 감히 임금의 의지를 꺾을 수 있었겠습니까?
임금 선조가 원균을 옹호한 논리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임진왜란 초기 이순신이 경상도를 구원하러 간 것은 스스로 간 것이 아니라 원균이 구원 요청을 해서 간 것이다. 둘째, 원균은 임진년의 해전에서 매양 선봉에 서서 싸웠다. 셋째, 전공이 이순신과 같았는데 노획한 적괴(賊魁)와 누선(樓船)을 이순신에게 빼앗겼다. 넷째, 원균이 부산 앞바다를 공격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극력 진달(進達)했으나 비변사가 독촉하고 도원수가 윽박질러 패전할 것을 환히 알고도 출전하여 싸우다 결국 순국하였다. 다섯째, 원균은 용기만 으뜸이 아니라 지혜도 지극했다.
당시 임금인 선조보다도 훨씬 종합적으로 자료를 취해 볼 수 있는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어폐가 많은 이야기입니다. 이순신은 당연히 원균의 요청과 조정의 허락을 얻어서 경상도를 구원하러 출전하였지요. 임금의 승낙 없이 군대를 움직이는 것은 역적에 준하는 중죄였으니 말입니다. 매양 선봉에 서서 싸웠다는 것은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으나 전공이 비슷하고 노획한 적괴(敵魁)와 누선(樓船)을 이순신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지나친 말인 것 같습니다. 임진년(1592년) 제1차 출전에서 4척의 판옥선, 제2차 출전에서 3척의 판옥선, 제3차 출전에서 7척의 판옥선을 가지고 출전한 원균이 24척, 23척 정도를 가지고 참전한 이순신과 어떻게 전공이 비슷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는 부분은 넷째 내용인, <원균도 부산 앞바다로 진격하는 것이 어렵다고 조정에 보고하였으나 비변사와 도원수 권율의 강압적 명령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출전하여 싸우다 순국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명령은 임금 선조의 명령이었을 테지요.
패할 것을 환히 알았지만 임금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기 위해 출전하여 싸우다 순국한 원균! 부산포 앞 바다로 진격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 신중하게 해상 작전을 펼치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의 부산포 인근 상륙을 허용해서 임금 선조의 노여움을 사고 파직되었던 이순신! 적어도 임금 선조에게는 원균이 이순신보다도 훨씬 더 충신(忠臣)으로 느껴졌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임금 선조가 원균을 결국 이순신과 나란히 선무공신 1등으로 책봉한 이유인 것으로 보입니다.
2024년 갑진년 새해 첫날부터 원균 관련 내용을 소재로 장황하게 언급한 것은 어떤 인물 또는 어떤 사태에 대해 역사적 평가를 내리는 문제의 고민을 공유해 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은 위험할 정도로 이분법적 흑백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원균에 대한 평가도 그렇습니다. 우리 국민이 모두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순신을 중심으로 보면 그를 음해하고, 모함하며 괴롭힌 원균은 정말로 악인(惡人)입니다. 또한 원균은 칠천량해전에서 이순신이 5년여 동안 건설해 온 사상 최대의 조선 함대를 궤멸시켰으니 패장(敗將)임이 분명합니다. 반면에 원균의 후손들과 일부 어떤 사람들은 선무공신 1등에 책봉된 역사적 사실과 객관적인 공적을 토대로 <원균도 명장(名將)이다>라는 주장을 하고 있지요. 카페지기 격군님도 어느 학술대회에서 원균의 공적, 전과(戰果)를 객관적으로 정리해서 발표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시된 자료에 참전한 함선 세력에 비해 원균의 전과(戰果)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고 내심 놀랐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원균은 어떻게 평가를 해야 할까요? 먼저 긍정적인 관점에서 평가를 해보자면 적어도 임진왜란 발발 이후부터 마지막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이전까지의 객관적 전공(戰功)과 전과(戰果)는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원균이 이룩한 전공과 전과는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나 이미지와는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관점에서의 원균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조선 수군을 전멸에 가깝게 궤멸시킨 칠천량해전의 패전(敗戰) 책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원균은 결과적으로 패장(敗將)임이 분명합니다. 패장(敗將)을 명장(名將)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명실상부한 명장(名將) 이순신과의 관계에서의 부정적 역할입니다.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보았을 때 이순신은 실력과 인품을 겸비한 한국적 리더의 표상으로서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위인일 뿐만 아니라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적인 인물임이 분명합니다. 그런 이순신을 음해하고, 괴롭히는 악역을 자처하였으니 세세한 논란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적 이미지를 온전히 벗어나기는 참으로 어렵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론적으로 원균! 부정적인 이미지가 차고도 넘치지만 객관적인 전공(戰功)과 전과(戰果)만큼은 쿨하게 인정하자는 것이 저의 소견입니다.
2024년 갑진년(甲辰年)의 세계는, 대한민국은 어떻게 전개될까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이스라엘과 하마스, 미국과 중국, 미국과 러시아, 바이든과 트럼프, 대한민국과 북한, 국민의 힘과 더불어민주당, 극우와 극좌 등과 관련된 결코 풀기가 쉽지 않은 문제를 두고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흑백 논리가 팽배하고 지배하는 사회가 될 것 같아 심히 우려가 됩니다. <누가(이것이) 절대 옳고, 누가(저것이) 절대 그르다>고 확정하기 어려운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제각각 자신만이 절대선이라고 주장하는 철 지난 이념적, 종교적 세계관으로 역사가 퇴행하고 있는 것 같아 또한 걱정이 됩니다. 이런 작금의 지구촌 상황에서, 우리가 이순신을 배운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카페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은 이런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도 곰곰이 생각해 보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와 같은 격동의 시기에 지난 4년 동안 <이배사호>를 이끌어 오신 전임 남명손서 회장님과 천성진성 총무님을 비롯한 제7기 이배사 운영진 여러분의 노고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특히 지난 작년 3월에 있었던 이배사 창립 제13주년 기념 학술대회의 성공적 개최는 전임 남명손서 회장님을 비롯한 운영진 그리고 영원한 카페지기 격군님의 역사적 업적으로 길이길이 기억될 것입니다. 감사하고 또한 고맙습니다. 또 한편 오늘부터 힘차게 출범하는 성윤문 회장님을 비롯한 제8기 이배사 운영진 여러분들께 뜨거운 축하와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이배사님들! 2024년 새 해, 복 많이 받으세요. 꾸벅!<끝>
첫댓글 통찰력 있고 균형잡힌 시각을 갖는데 도움을 주는 일심님의 글을 읽으며 이분법적인 사고의 문제점을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새해에는 좀 더 여유롭고, 조금씩 더 현명하고 지혜로워지기를 소망합니다..ㅎ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강건하세요~?^^
일반적으로 정치인들을 싫어하지만...아이러니하게 우리의 삶을 직접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치인들입니다. 그러니 정치인들에게 무관심할 수도 없지요. 그런데..미국도..일본도..한국도 정치인들의 목표는 정권/권력을 잡는 것이지요. 정권/권력을 잡는 방법은 유권자들의 표(다수결의 원리)이구요. 그러다 보니..자기 편을 만들고..결속력을 공고히 다지고..상대진영에 대해서는 극도로 배타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는 현상이 2024년 지구촌의 공통된 문제 상황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흑백으로 몰고가는 정치인들에게 휘둘리지 말고..거꾸로 나라 공동체를 진정 사랑하는 민초들이 정치인들을 계도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ㅎ
좋은 새해 되시옵소서!
읍!
2024년에는 하성군 마마님의 활력 넘치는 기운이...세상을..이배사를 휘몰아쳤으면 좋겠습니다. 내내 평안한 새 해가 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ㅎ
작은 마을에서도 중심 잡기가 쉽지만은 않지요. 저도 좀 더 지혜롭게 살도록 정신을 잘 차려야겠습니다.
깨어있는 시민의식은 언제나..자기 중심이 아니라..공동체 중심의 사고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순신 장군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은....임금은 임금대로..신하는 신하대로 자신의 이해 관계, 붕당의 이해 관계를 중심으로 행동하는 와중에서도 홀로 백성을 위해..나라를 위해..자신을 헌신, 희생했기 때문이지요. 이런 점을 본받기 위해..우리가 이순신 장군을 공부하는 것이 아닐까...이런 생각을 해봅니다....ㅎ..
일심님의 신년사는 역사 공부도 되지만 많은 분량의 글을 쓰는데 힘드셨겠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요..ㅎㅎ
하루쯤은 허락해야 될 거 같은 필력!
읽는 사람들은 쉽게 읽어내려갈지라도 쓰는 사람은 무한한 생각과 서적을 탐구해야되는 노력이 필요한 점..
아무튼 열성 쏟은 필력을 넘 쉽게 읽어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ㅎㅎ
새해에는 더더욱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마다 행운만 가득하시길 기원드립니다.💜💜
어느 해부터인지...일정한 패턴의 신년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공교롭게 ..임진왜란이 벌어지는 1592년 임진년과 2012년 임진년이 오버랩되면서.... < 선조실록>을 살펴보게 되었지요.. 올 해는 갑진년(2024년)이니...천간, 지지에서 지지가 한 바퀴(12년) 돌아서..임진년(2012년)으로부터 갑진년(2024년)까지 오게 된 것이지요. 임진왜란이 벌어지는 1592년(임진년)부터 1604년(갑진년)까지의 천간, 지지의 변화와 동일하니..해당 년의 <선조실록>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있는 일입니다...저도 많이 배운답니다...ㅎ
새해 하시는일마다 성과 이루시길 바랍니다
에고..원임 회장님...저...별로 하는 일도 없어서..성과 같은 것도 없어요. 강의오라고하면 가고...없으면...책 쓰고...돌이켜보니...인생의 황금기인 것 같아요. 울 면장님도...인생의 황금기...잘 활용하시기 바랍니다....ㅎ
감사합니다
새해에 는 평화와 희망이 가득한 일이많이 많이 생기도록 기원합니다
경상우수사님이....시조창 <한산도가> 공연하실 때 힘이 나시듯이...저도 요즈음 가장 행복한 일은...그동안 연구해 온...이순신 장군 관련..강의하고..책 쓰고...논문쓰고 ..하는 것입니다. 2...3년 내로..마무리하고...그 다음은...강의하고..교육하고..답사하고..그러고 살고 싶답니다....ㅎ
한마디 말 보다, 한 줄의 글 보다, 한가지 행동보다 보고 듣고 느끼며 공부하는 한 해를 보내기로 마음을 다지는 새해 첫날에 일심님의 신년사는 큰 에너지로 다가옵니다.
새해에도 좋은 글, 좋은 말씀 기대합니다.
열심히 공부하고...공부한 내용을 유유상종하는 사람들과 공유하고...함께 실천하려고 노력하고...그러다 보면..세상이 조금씩 조금씩 좋아지지 않을까..이런 기대감이...삶의 에너지...존재의 이유라는 생각이 드는 2024년 새 해 벽두입니다. 어디가 종착점인지는 모르겠으나....울 단장님의 엄청난 에너지에 편승하여...함께 가면 ..덜 외롭지 않을까....단장님과의 인연이...소중하게 느껴지는 1월 2일..아침입니다..ㅎ.
새해 더욱 건강하심과 역동적 활동을 기대합니다.
그동안..이리 저리 벌려 놓은..연구의 조각들을..모아서...마무리를 해야하는데...게으름 탓인지 허송세월만 하는 것 같네요. 방진님을 본받아...힘을 내어 보겠습니다. 2024년..내내 건강하시고..평안하시길 기원드립니다...ㅎ
새해 첫날입니다.
신년인사 글을 읽으면서도 혈압이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
정치와 결별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라의 운명이 그들에 의해 결정되니 그럴 수 없다는 게 답답할 따름입니다.
선조와 원균도 나름 열심히 했겠지만, 공보다는 과가 많기에 비난받는 것은 당연하지 싶습니다.
풍전등화였던 조선과 백성이 얼마나 처참했고 어떤 궁지로 내몰렸었는지를 잘 알기에...
지도자의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순신을 배우면서 다시 깨닫습니다.
갑진년 한 해도 건강하시고 종종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도 열정적이시던..정유년님과 사모님의 모습이 ..홀연히 사라지신지 오래여서...궁금했는데..아산에서 뵐 수 있어서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혈압..오르내리지 마시라고...쓴 글인데...ㅎ
선조도 좋은 임금은 아니고..마지막에는 이순신 장군을 위기로 몰고 갔지만...제1차 백의종군..제2차 백의종군 모두..처형의 위기에서..어찌되었든..임금 선조의 최종결단으로 이루어진 일이니...필요한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들구요.....
원균도 좋은 리더가 아니라는 흔적이 곳곳에 있지만...좋은 리더 이순신의 대척점에서...이순신 장군이 빛나도록 ..어두움의 역할 ..반면교사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으니..이 또한 꼭 필요한 역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제가 적어 놓고도..궤변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정유년님...2024년은...하시는 모든 일이..풍년처럼..풍성하기길 기원드립니다.....아자! 아자! 아자!
이런 균형 잡힌 옥고를 1,600 여 명의 회원들이 숙지해야 하는데
참 안타깝습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후학들을 지도해 주시는 그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새해에도 월악산 무병장수 기운 듬뿍 받으셔서 두루
평안하시길 소망합니다.
지난 4년 동안..남명손서 회장님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몰라서 안하는 것보다는, 알고도 못하는 일이 훨씬 더 많은 것 같아요. 저도 그렇구요....그래서..반복 학습이 중요하다고 하나봐요. 근데....자꾸 말이 많아지고..글이 길어지는 것을 보니..저도 어느덧 ..나이 먹은 꼰대가 되어가나봐요..에고...ㅎ
원균장군의 공.과를 중립적으로 치우침 없이 서술해 주시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 집니다
어렸을때부터 교과서에서 배웠던 "모함" 이라는 선입견도~~
공부를 더 함에 있어, 사실적 이해를 기초하여 재조명하고 바로 세워~~
후대에 바르게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난중일기를 필사중에 있으나 현재(1594,1월 쓰는중~~)까지
통제사와 소비포 군관(이영남)께서 원수사를 칭찬하는 기록을 보지 못한터라 ㅎㅎㅎ
기회 생기면 원수사의 공.과를 공부했으면 합니다!!
갑오년(1594년) 뒤로도 이순신 장군의 일기에 원균에 대해 좋게 쓴 기록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더 악화되고...급기야 원흉(元凶)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하지요. 이순신과 원균(존칭 생략)은 여러가지 이유(경쟁관계, 역전된 무과 선후배 관계 등)로.. 좋은 관계가 되기 어려운 사이인 것 같아요. '모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원균이..임금 선조에게 ...<이순신은 싸우러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 가장 큰 내용인 듯 해요. 결국 ..정유년(1597년) 1월 가등청정의 도해가 빌미가 되어 통제사에서 파직된 것도 이런 원균의 주장이..임금 선조가 이순신을 파직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군 장수/지휘관/리더로서의 원균의 역량은..여러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실력이나 인품에서 이순신과 비교의 대상이 아닌 것 같구요.
선무공신 1등에 선정된 것은..임금 선조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다..전사하였으니..임금이 중심이 되는 왕조사회의 특성상..호성공신에 80여 명이 책봉된 것처럼(선무공신 18명)..임금에 대한 충성 유도 차원에서의 조치였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일심 다만..조선의 무장으로서 후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또는 객관적인 연구성과에서 확인되는 것처럼...원균의 전공과 전과에 대해서는 사실대로 인정해주는 태도가... 양극단으로 치닫는 것보다는 바람직하지 않을까...이런 관점에서 제기한 것이지..공도 있고, 전과도 있으니..나름대로 훌륭한 장수로 받아들이자..이런 이야기가 아님을 말씀드리고 싶네요....혹시 보시는 분들이 오해하실까봐.........ㅎ
@일심 물론입니다~~
동감입니다~~
적극 따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