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는 형이상학일까? 형이하학일까?
오래 전부터 품고 있던 의문에 대하여 잠시 집중해본다.
여러 사전적 해석을 간추려 보면
형이상학은 사유의 세계를 논한다면
형이하학은 현실의 세계를 직시한다는 점에서 서로 판이한 입장이다.
형이하학은 종국적으로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지향하며
세계는 변화발전한다는 실천적이고 사실적인 것에 토대를 두고 있다.
반면에 형이상학은
“형이상자(形而上者)를 도(道)라 하고
형이하자(形而下者)를 기(器)라 한다.”는 주역(周易)에 있는 말을
그리스 말의 metaphysika를 옮기기 위해서 따온 것.
이는 meta(뒤의)와 physika(자연학)가 합쳐서 된 것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천문·기상·동식물·심리 등)에 관한 연구인 자연학을 먼저 배운 다음에
모든 존재 전반에 걸친 근본원리를 배우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 바 있다.
본디 '뒤에' 또는 '다음에'를 뜻하던 그리스어 'meta'가
중세에 라틴어 '위에'(supra) 또는 '넘어서'(trans)의 의미를 얻음에 따라,
형이상학은 학문 소재의 성격상
자연학을 상당 수준 한 뒤에 연구하는 것이 합당한 순서라는 뜻과 함께,
형이상학은 자연학을 넘어서,
그러니까 '자연적인 것', '감각적인 것'을 넘어서
그것의 토대, 근거, 원리,
이를테면 도(道)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뜻을 얻었다.
즉 형이상학은
경험의 세계에서 변동하는 것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에 관한
궁극적인 원인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뜻이다.
형이상학의 범위는 존재 전체를 망라한
존재론ㆍ우주론ㆍ신학ㆍ심리학ㆍ논리학,
존재를 인식하는 방법과 존재의 의미를 다루는 인식론ㆍ윤리학ㆍ미학,
그리고 나타난 존재의 근원이면서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초경험적 초월적인 것을 연구하는 분야 등을 포함한다.
하지만 형이상학 연구의 성격에 대한 규명은
칸트(I. Kant) 이래 다양한 성격을 띠어왔다.
근대사상 가운데는 형이상학을 부정하면서
자기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또 하나의 형이상학으로 삼은
엥겔스(F. Engels) 같은 견해도 있고,
형이상학이 아닌 것으로서 베이컨(F. Bacon)의 경험론과
미국의 실용주의(pragmatism) 등은
진리의 초월성을 인정치 않으므로 형이상학의 실패를 인정하였으나,
그들도 과학적인 지식을 전제로 해서
존재의 근원을 밝혀보려 했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적인 면을 완전히 벗어났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형이상학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경향으로
분석철학(分析哲學)과 같은 것도 있다.
(상기 내용은 인터넷 검색자료를 종합 재편집 한 것입니다.)
자 이쯤 되면 우리가 공부하는 풍수지리는 형이상학일까?
아니면 하학일까?
형이상.하는 관념과 현상, 정신과 물질, 사유와 경험,
본질과 존재, 인(因)과 과(果)...로 나눌 수 있다.
풍수지리는 ‘풍수’와 ‘지리’라는 두 단어가 합쳐져 있다.
그러면 풍수와 지리는 병렬구조로
다른 두 명사가 결합되어 한 단어를 만든 것일까?
풍수와 지리는 같은 뜻으로 중복된 것일까?
아니면 주종 관계일까?
개인적으로 ‘풍수지리’보다는 ‘풍수’라고 부르기를 즐겨한다.
나의 담론을 펴기 전에
각종 사전을 통하여 풍수와 지리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자.
먼저 풍수(風水)에 대한 사전의 해석이다.
*표준국어대사전
. 바람과 물을 아울러 이르는 말.
. [민속] 집ㆍ무덤 따위의 방위와 지형이 좋고 나쁨과 사람의 화복(禍福)이
절대적 관계를 가진다는 학설. 또는 그 방위와 지형. 중국 후한 말에 일어난 음양오행설에 바탕을 둔다.
. [민속] 지관(地官)
(풍수설에 따라 집터나 묏자리 따위의 좋고 나쁨을 가려내는 사람).
* 중국어사전
风水 fēngshuǐ,堪舆 kānyú。
사람의 행복과 불행이 달려 있다고 하는 집터, 묏자리 따위를 판단하여 정하는 기술
다음은 지리(地理)에 대한 사전적 해석이다.
* 표준국어대사전
. 어떤 곳의 지형이나 길 따위의 형편.
. 지구상의 기후, 생물, 자연, 도시, 교통, 주민, 산업 따위의 상태.
. [민속] =풍수지리(지형이나 방위를 인간의 길흉화복과 연결시켜,
죽은 사람을 묻거나 집을 짓는 데 알맞은 장소를 구하는 이론).
. 지리 =지리학(지표상에서 일어나는 자연 및 인문 현상을 지역적 관점에서 연구하는 학문).
* 중국어사전
.땅의 생긴 모양(模樣)이나 형편(形便)
.지구(地球) 상(上)의 지형(地形) 및 그밖의 상태(狀態)
풍수지리에 대한 사적적 해석이다.
* 표준국어대사전
[민속] 지형이나 방위를 인간의 길흉화복과 연결시켜, 죽은 사람을 묻거나 집을 짓는 데
알맞은 장소를 구하는 이론. ≒감여ㆍ감여설ㆍ지리3ㆍ풍수설ㆍ풍수지리설.
* 영어사전
(민속) the theory of divination based on topography
(지형지세를 통한 점술이론: 필자 번역)
위 사전적 해석을 통하여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풍수와 지리 그리고 풍수지리를 혼용하여 사용되고 있으나,
중국은 ‘풍수’ 혹은 ‘감여’라는 용어로 주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양에서는 ‘지형지세를 통한 점술이론’으로 해석을 하고 있다.
‘점술이론’이라면 사주명리(四柱命理)처럼 운명을 점치는
그야말로 하나의 설로 형이상학이다.
사주명리가 시간을 통한 점술이라면
풍수(지리)는 공간(땅)을 통한 점술이라는 것이다.
과연 풍수(지리)가 점술일까? 아니면 과학일까?
점술의 의미를 사전을 통하여 보면
* 표준국어대사전
특수한 자연 현상이나 인간 현상을 관찰하여
미래의 일이나 운명을 판단하고 예언하며,
감추어진 초자연적인 세력의 의사를 알려는 방술(方術).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점이 주술과 다르다.
점술은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지식’이라는 과학과는
본래부터 거리가 먼 것일까?
풍수가 형이상학인 점술에 머물러,
보편타당한 지식체계를 가질 수 없는 것일까?
우리가 거리낌 없이 인식하는 풍수지리를
두 단어 풍수와 지리로 나누어 비교를 해보자.
왜 ‘풍수’라 했을까?
‘지리’는 쉽게 이해가 되는데
풍수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지리(地理)는 ‘땅의 이치’다.
땅이 갖고 있는 본질을 연구하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물질(현상)적인 특성뿐만 아니라
쉽게 감각할 수 없는 그 무엇까지 파고드는 것이다.
풍수지리의 지리에서 리(理)는 기(氣)를 움직이는 이치, 원리라 할 수 있다.
이 점이 현상이나 물질중심으로
보통사람이 이해하고 연구하는 여타 지리와 다른 점으로 보인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리는 다분히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지리’라는 한 단어 속에도
지(地)와 리(理)는 땅과 이치(이론)로 물질(현상)과 이론(본질)으로
형이하학과 형이상학으로 구분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땅(地)너머 그 무엇이 리(理)이다.
반면에 풍수는 바람(風)과 물(水)로
둘 다 보통 사람이라면 감각을 통하여 느낄 수 있다.
글자 구성만으로 보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바람과 물, 풍수다.
이는 단순한 형이하학적인 이해다.
그러나 우리가 공부하는 풍수는 형이하학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부분까지 포함하고 있다.
형이하학적 풍수 너머에 숨어 있는
형이상학적인 이치(이론)까지 포함을 한다.
분명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아우른다.
소위 이기론(理氣論)은 기(氣)에 대한 이론이다.
이기론은 좌향론, 통맥론, 발복론으로 형이상학을 형이하학에 적용해간다.
반면에 형기론(形氣論)은 기로 만들어진 형상을 통하여
거꾸로 氣(상태)를 읽어가는 방법론이다.
단순히 기(氣)라고 하면
어느 누구도 쉽게 정의하거나 인식할 수 없어
형이상학도 형이하학도 아니다.
따라서 순수 직감하는 기풍수(氣風水)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마음이 기(氣)다.(마음=기)
기풍수는 하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형이상학이 되기도 하고 형이하학이 되기도 한다.
형이상학 이론으로 기풍수를 하면 형이상학 기풍수가 될 것이며,
형이하학적으로 기풍수를 하면 형이하학 기풍수가 될 것이다.
기풍수가 마음에 따르듯이
기(氣) 앞에 형용하는 글자를 덧붙이면
그 글자에 따라 형이상학이 되기도 하고, 형이하학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기(氣) 앞에 리(理)를 덧붙여 이기(理氣)라 하면
‘이론적인 기’ 혹은 ‘기에 관한 이론’으로 형이상학이 된다.
반면에 사람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냉. 온을 덧붙여
냉기(冷氣)나 온기(溫氣)라 하면 형이하학이 된다.
따라서 이기풍수가 주로 형이상학을 형이하학에 대입하는 것이라면,
형기풍수는 형이하학으로 경험에 의해 축적된 노하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형이하학에서 경험에 의해 축적된 노하우는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으로 가치를 가질 수 있는 체계적인 지식화로
충분히 학문의 한 범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형이상학적인 이론과 원리는
형이하학에서 통계나 과학적인 증명으로 보편타당하게 인식되어 질 때
더 이상 점술로 오해 받지 않을 것이다.
과학도 그 진위가 변하고 있다.
지금 스스로 빠져 있는 풍수세계가 형이상학에 머물러 있다면
그 자체로 이미 과학이며 현실로 여겨질 수 있다.
지동설(地動說)처럼
먼 훗날 당신이 믿고 있는 형이상학적 설이 점술이 아니라
참(眞)이 될 수 있을까?
참(眞)을 향한 자문(自問)의 시간이다.
우리는 지금 풍수 그 본질을 추구하며
공부하고 실천 행(行)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제 마음대로 풍수를 재단하고
제 마음 빛깔로 풍수를 물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엇을 위하여
어떤 풍수를 하고 있으며,
마음은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머리 목탁을 두드린다.
어느 날
사유의 진원지,
머리 목탁이 터져 기도마저 사라지고
여여 둥둥
느낌(직감)이 바로 풍수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