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운동의 죽음과 생성
1. 예술운동 죽음의 징후-몇 가지 사건들
지난 1월 11일 ‘민족문학작가회의’는 아현동 사무실에서 스스로 자신의 명패를 교체하는 현판식을 가졌다.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서 시작해 1987년 ‘민족문화작가회의’로 명칭을 변경한 뒤 20년간 줄곧
같은 이름으로 활동했던 작가회의가 저항의 상징이었던 ‘민족’이란 접두어를 떼고 ‘한국작가회의’라는 새
옷을 갈아입은 것이다.
‘한국작가회의’ 회원들은 1월 8일 총회에서 새로운 문화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모든 작가들을
아우를 수 있는 이름으로 변경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고, 설사 명칭이 바뀌더라도 민족문학의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말했지만, 이들의 선언으로 1980년대 이래 줄곧 문학예술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민족
문학론’은 이제 시대적 효력을 다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느낌이다.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이미지 변신을 놓고 보수언론들이 대서특필
민족문학론의 주창자인 백낙청 교수의 언급대로 ‘민족문학’(national literature)이란 명칭이 세계화 시
대에 들어와서는 우파 국민주의의 담론으로 왜곡될 소지도 있고, “민족문학론이 더 이상 생산적 구호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민족, 혹은 민족문학이란 명칭의 폐기는 어쩌면 시대적 흐름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창립선언문에서 명시했듯이 한국작가회의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정신과
역사를 온전히 계승”하고, “민족화해와, 문학을 통한 민족통일의 길에 더 크게 기여”하겠다는 본래의
목표를 그대로 견지하고 있다.
단체의 본래 목적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면서 왜 명칭은 굳이 바꾸려고 했을까?
생각해보면 ‘민족’. ‘민족문학’이라는 단어가 삭제된 대신, ‘한국’, 혹은 ‘한국작가’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물론 ‘한국작가회의’가 문화예술 단체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무난한 이름으로 볼 수 있지만,
오랜 내부의 논쟁 끝에 바꾼 명칭도 결과적으로는 ‘한국의 작가’, 혹은 ‘한국적 작가’라는 국민주의 문학의
대표성을 표상하고 있다.
‘한국작가회의’라는 명칭은 내부의 심도 깊은 논쟁의 결과라고 보기에는 너무 진부하고 무기력하다.
이 명칭에서 과연 민족문학의 낡은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문학운동의 인식론적 전환을 느낄 수 있을까?
‘한국작가회의’는 단지 기표의 환유과정에 불과할 뿐이거나, 아니면 새로운 시대에 문학권력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일정한 지배의 장을 형성하기 위한 자기 변신과정으로 볼 수 있다.
다음의 출범 선언문 내용은 그러한 욕망을 투사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작가로서 인간을 억압하는 제도와 폭력에 맞서 싸워왔고 인간해방을 위한
문학적 실천의 길에서 비겁하지 않았다.
시대정신을 잃지 않고 그것을 문학적으로 지켜나가기 위해 고뇌하였고, 문학작품으로 창조
하여 한국의 문학사를 알차게 채워오고 이끌어왔다.
그러한 한국문학의 역사 속에서 이제 우리는 저항하는 소수가 아니며 당당한 주체이며 주인이 된지 오래다.
우리가 한국작가회의로 이름을 바꾸는 것은 우리가 명실상부하게 한국의 문학을 대표하는
문인들이 모여 있는 단체이기 때문이다.
“민족문학의 정신을 포기하지 않고”, “문학정신과 정체성을 지키면서 창조적으로 쇄신하고자” 만든 한국
작가회의의 또 다른 정체성은 바로 한국작가회의가 비판적 소수집단이 아닌 당당한 주인이며 한국의 문학을 대표하는 문인들의 단체라는 데 있다.
저항적 소수에서 당당한 주인으로 전환하고, 한국문학의 이단자, 주변자에서 당당히 한국문학의 대변자로
자처하려는 선언은 문학예술운동의 존재론적 위기를 스스로 문학권력의 중심임을 결단하는 방식으로 해소
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한국작가회의는 문학의 장의 위기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존재론적 내파를 선택하는 대신, ‘한국’
이라는 중성적 기표의 대체와 ‘한국작가’라는 중심적 기의로의 진입을 선택한 것이다.
달라진 문화 사회적 환경에 대응하는 예술운동 그룹들의 자기중심주의는 비단 한국작가회의만의 문제는
아니다.
2004년 4월에 결성된 ‘기초예술살리기범문화예술인연대’(이하 기초예술연대)는 진보와 보수의 이념을
떠나 기아 상태에 빠진 기초 예술을 살리겠다는 취지로 60여개 단체가 참여했다.
이들은 출범 선언문에서 “시대를 이끌어가는 선도자 역할을 해야 할 문학, 공연, 전통예술 등 기초예술이
현재 이루 말할 수 없는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며 “"예술이 위축되면 문화생태계는 파괴되고 문화적
자원도 고갈"되고 "예술의 성장 없이는 인문학의 발전도, 문화산업의 성장도, 지식정보산업은 물론 일반
제품업계의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기초예술의 가치와 사회적 의미에 대한 공론의 장을 마련하는 일련의 노력들이 문화자본의 독점화 시대에
의당 예술인, 혹은 예술인 그룹들이 해야 할 몫은 분명하다.
그러나 기초예술연대가 기초 예술을 살려야 한다는 당위성을 외치기 이전에 예술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
변화에 적극 대응하고, 자신들이 새롭게 발견해야 할 사회적 실천의 영역들에 대해 스스로 얼마나 성찰적
이면서 자생적이었나를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 황석영의 성토
기초 예술의 위기를 돌파하는 경로는 상반된 입장을 갖는다.
하나는 예술의 위기의 원인을 외부의 환경에서 찾아 예술의 ‘생존’에 필요한 제도적 개선을 요구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위기의 원인을 내부로 보고 자신의 현실적 존재의 물질성과 의미를 내파해서 완전히 새로운
예술의 지위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기초예술연대의 대응은 아마도 전자에서 희망을 찾고자 한다.
이는 민주화 이후 예술운동의 현재적 상황과 수준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기초 예술의 위기를 돌파하는 예술가 혹은 예술가 그룹들의 수많은 제안들은 모두 이 문제를 국가가 해결
하라는 데 집중하고 있다.
예컨대 방현석은 기초예술을 살리는 당면 과제로서 기초예술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문화생태계 조사사업,
기초예술 살리기 범국민 캠페인의 확대와 다양화, 국가기초예술 센터의 건설, 창작지원 종합네트워크센터의 운영 등을 제안하고 있다.
더불어 기초예술의 경제적 가치를 입증하기 위한 기초예술의 문화산업화 경로에 대한 조사, 기초예술의
사회적 가치규모에 맞는 국가정책의 수립, 재정투자의 당위성을 입증하기 위한 경제 및 사회화된 가치의
크기와 기초예술에 지불되고 있는 비용의 크기에 대한 비교조사 및 연구를 제안한 것
기초예술의 위기만 아니더라도 기초인문학, 기초과학의 위기론은 일상적인 담론이 되었다.
상황은 조금 다르겠지만, 이 분야에 속한 원로학자들의 심각한 발언, 관련 지식인들의 연대서명과 선언문
채택, 국가기관에의 호소와, 관련 VIP 방문들 등과 같은 위기 수습 방안의 로드맵은 이제 하나의 정식
매뉴얼처럼 되었다.
기초예술을 살리기 위해 국가의 지원 자체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국가의 공공지원이라는 요청의 전후 맥락이다.
기초예술의 위기를 왜 근본적으로 성찰하지 않을까?
기초예술의 위기가 모두 외부의 환경에서 오는 것일까? 오
직 예술의 생존을 위해서는 서로 다른 입장과 아비투스를 가진 내부의 장들이 동일한 권력효과를 생산해
야하는 데 공모해야하는 것인가?
스스로 예술의 죽음을 선언하지는 못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들은 예술운동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고, 지배적 예술운동이 말하고자 하는 것의 현실논리를
직관하게 만든다.
민주화 시대 이후 예술운동은 그동안 줄곧 예술의 존재와 물질성에 대한 급진적 전화보다는 예술가 생존
의 위기를 극복하는 대안을 찾는 데 집중했고, 그 결과 민주주의 정부로부터의 지속적 공공지원을 이끌어
내는 일련의 정책협상에 몰두했다.
방어적 형태이자 이기적 형태로서의 정책협상의 최종지점은 예술가들의 생계를 국가가 책임지라는 것이고, 예술운동의 오랜 실천적 자원과 네트워크는 오로지 예술가들의 생계와 예술가 단체의 생존을 위해 소비된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과 민족문학작가회의가 국민의 정부 이후 역사적 예술운동의 생존
단체로서 해왔던 주요 사업들이 바로 생계와 생존을 위한 협상이다.
정책협상은 과정은 반드시 예술운동의 국가 내 흡수와 저항이라는 싸움이 예상되는데, 역사적 예술운동의
주력 그룹들은 체제 내 흡수를 통한 안락한 동거를 선호했다.
예컨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역사적 예술운동의 중심에 있던 예술가들이나 예술가 단체들이 공공
문화기관의 권력을 획득하는 그간의 과정들은 보수언론의 이념 공세의 진위 여부와는 상관없이 정책협상
에서의 흡수(co-optation)의 수준을 가늠케 한다.
예술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예술운동 그룹들의 일련의 활동들은 역설적으로 예술운동의 죽음의 징후를
보여주는 것들이라 할만하다.
예술과 예술가, 예술운동과 예술운동가 그룹은 동일하지 않다.
한국작가회의로의 전환과 기초예술연대의 선언과 실천과제들, 그리고 진보적 예술가 조직으로는 가장 큰
범위를 아우르고 있는 민예총의 활동들은 예술과 예술운동의 위기에 대한 메타적 지도그리기와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자기정책의 전제 없이 예술가와 예술가들의 생존 극복을 먼저 선언했다.
동시대 지배적 예술가들의 생존 위기는 어떻게 보면 예술운동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고, 예술운동의 위기
는 예술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예술가들의 생존 위기를 외부로부터 찾기 전에 예술의 존재 자체의 패러다임의 위기, 그리고
그러한 패러다임의 위기를 끝임 없이 질문하고 전화하려는 예술운동의 위기로 찾을 수 있다면 중요한
것은 예술운동이 예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걸맞게 어떻게 스스로 자신의 비판적 영역과 자생적 내러
티브를 발견할 것인가에 있다.
아래의 인용문은 이러한 문제의식에 적절한 참고자료가 될 만하다.
내가 보기에 우리 시대 문학 및 예술의 모순에 찬 전개와 그 결과로 일어난 격렬한 논쟁에서 본질적인 것은 두 가지의 문제인데, 그것은 바로 비판이라는 문제와 미래에 대한 전망이라는 문제이다.
그 자체가 세계질서의 반영상이기를 요구했던 사회적 질서들이 파괴된 뒤에 문학과 예술에는 더 이상 비판적인 태도, 즉 생산적인 동요로서의 비판정신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게오르크 루카치가 지적한 예술의 탈물신화 경향, 다시 말해 깃발에 의해 은폐되고 상투적인 관용어를 통해 왜곡된, 그리고 수많은 제도들 속에 갇혀 버린 현실을 폭로하려는 예술의 희망과 또 그럴 수 있는 능력은 어떤 조건 아래서도 옹호되어야 한다.
예술의 그러한 비판을 비방하려는 저의에서 ‘자기 둥지를 더럽힘’이라는 표현이 고안되었는데, 오히려 사람들은 자기 둥지를 깨끗이 하려는 노력을 대부분 그것을 더럽히는 것으로 의심한다.
하지만 비판은 현대예술과 문학에서 진정한 삶의 원리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예술의 종말이라는 말로써 의미하는 바이다.
나는 이 말로서 수세기에 걸쳐 미술사 속에서 전개되어 오던 하나의 내러티브의 종말을 의미하고
있는 바, 이 내러티브는 선언문의 시대에서는 불가피했던 종류의 갈등들로부터 해방되면서 종말에 도찰하였다. 물론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의 방식은 자신의 선언문에 들어맞지 않은 것이라면 모조리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 다른 방식은 투치족이건 후투족이건 아니면 보스니아인이든 세르비아인이든 간에 당신을
만들어주는 그 무슨 차이이든 청소할 필요가 없는 상태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예술의 위기에 대응하는 지난 몇 년간 예술운동 그룹들의 활동은 예술운동의 비판적 위치를 재설정하고
스스로 낡은 내러티브의 종언을 선언하면서 차이와 연대, 소수문화적 감성들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는 데 실패했다.
내가 말하는 예술운동의 죽음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예술운동은 이제 낡은 내러티브의 종언을 고하고 새로운 대상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자기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예술운동의 새로운 대상은 새로운 미학적 감성과 실천을 통해 사회운동과의 적극적인 연대를 모색하고,
스스로 문화 권력의 장에서 ‘소수자되기’ 전략을 통한 자기 생성의 에너지를 발휘하는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사실 1987년 민주화체제이후 지배적 예술운동 그룹을 형성한 민예총이나 민족문학작가회의와는 다르게
소수집단의 예술운동 그룹들이 등장해서 새로운 문화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고, 신자유주의 공세가 전면
화 현실에서 기존의 예술운동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회운동의 진보적 의제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사건들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신자유주의 자본의 세계화에 맞서 예술운동이 ‘예술의 공공성’이라는 진부한 논리를 내세워 그것을 예술의 장을 보존하기 위한 제도적 협상의 원칙으로 간주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지배적 권력의 장을 내파하고
다양한 사회운동과의 연대를 통해 새로운 사회적 미학을 생성할지, 중요한 귀로에 놓여있다.
이 글은 지배적 예술운동 그룹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미적 정념과 사회운동의 접속을 모색한 새로운 예술
운동의 사건들을 언급하면서 예술운동의 대상과 내러티브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2. 문화권력의 장과 예술운동의 딜레마-‘민예총’과 ‘문단권력’의 비판적 검토
2007년 대선에서 승리한 이명박 당선자와 인수위원회의 신자유주의 공세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거세지고
있다.
당선자와 코드가 일치해서였을까, 흥미롭게도 이 분위기를 틈타 보수언론들이 문화예술계 코드 인사론을
다시 거론하고 나섰다.
주지하듯이 코드 인사론은 참여정부 집권 초기 노무현 정권을 길들이기 위한 보수언론들의 이데올로기
공세의 ‘전위 담론’이었다.
진보적인 문화예술계로 분류된 인사들은 내용의 진위와 상관없이 보수언론으로부터 지난 5년간 집요하게
시달려야 했는데, 돌이켜보면 언론에서 이렇게 심하게 문화예술의 장을 진보와 보수로 구별해서 맹공을
가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보수언론의 이데올로기 공세로 인해 ‘보수-진보’의 이분법은 실제 사실보다 훨씬 강고한 블록을 형성하여
개인들의 정치적 미학적 스펙트럼을 조직과 단체로 환원해 버리는 현상을 낳았다.
진보적 문화예술계 인사로 분류되는 특정한 개인들에게 각자 다양한 정치적 입장과, 미학적 태도가 존재
함에도 불구하고 코드 인사론은 조직과 단체의 분류 원칙에 따라 그 장안에 속한 개인들을 일괄적으로
보수와 진보로 구별짓는다.
이른바 ‘조중동’으로부터 좌파 문화집단으로 지목된 특정한 문화예술 단체들은 사실 서로 다른 문화예술
운동의 방향을 갖고 있고, 좌파의 이념과 성격을 규정하기에 따라 더 이상 진보적 문화예술운동 그룹으로
분류되기 어려운 단체들도 발생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를 거세한 채 보수 언론이 분류한 좌파문화 단체에 속한 개인들은 도매 급으로 모두
노무현 코드인사로 일별된다.
사실 노무현 코드 인사론은 새 정부의 문화권력자로 부상한 개인들에게 대한 이념공세라는 형식을 띠지만, 실제 목표는 노무현 정부에게 정치적 타격을 주기 위한 전략이었다.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코드 인사론은 한나라당이 집권하면서 방어적 문화전쟁에서 공세적 문화전쟁으로 전환한다.
지난달 8일 한국미술협회와 한국미술평론가협회는 성명을 내고 좌파들이 국민의 혈세로 만든 문화예술위를 통해 문화계를 장악했다고 성토했으며 한국영화감독협회는 60주년 기념식에서 성명을 내고 영화진흥위원회가 국고를 자의적으로 전횡했다고 영화진흥위원장의 사퇴와 위원회의 해체를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보수언론의 정치적 구별짓기가 그동안 진보적인 문화운동계 내부의 차이와 균열을 더
분명하게 보게 만든 역설적인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외부의 선명한 이데올로기적 구별짓기는 스스로 그 장에 공모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내부의 분명한 차이를 보게 만든 것이다.
우리가 정말 동일한 좌파 문화집단, 혹은 권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구별짓기의 구별짓기’라는 문제의식을 갖게 한다.
정치적 의도에 의해 자의적으로 구별된 장들 내의 실질적인 구별짓기는 이른바 코드 인사론의 문제틀을
전혀 다른 관점으로 보게 만든다.
보수언론이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갖고 공세를 펼쳤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쨌든 노무현 정부 시절 진보적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문화부의 주요 공공기관의 장으로 참여한 것은 사실이고 이 과정에서 민예총은 새로운 문화권력 장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민예총은 참여정부 들어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부터 예술지원 단체로 선정되어 안정적인 예산을 지원받았고, 과거 장르위원회 대표였던 인사들이 문화관광부 산하 공공기반시설의 단체장으로 대거 참여했다.
지배적 정치권력, 문화권력에 저항했던 진부적인 예술운동 그룹들이 민주화 시대 이후 스스로 권력의 장으로 진입하면서 문화권력에 대한 가치논쟁이 일기도 했다.
말하자면 좋은 문화권력과 나쁜 문화권력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문화권력은 국가와 시민에게 봉사할 뿐, 권력을 개인의 용도로 남용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문화권력으로 명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문화권력은 좋은 예술행정을 펼치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권력은 이념적, 정치적 성향과는 무관하게 일정한 권력을 획득한 개인 혹은 그룹들이 행사하는 제도적 힘을 의미한다.
문화권력은 프랑스 사회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의 언급대로 ‘전복’과 ‘배제’의 규칙이 작용하는 장의 논리를 갖는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장이란 공시적으로 파악할 때, “입장들의 구조화된 공간”으로 드러난다.
장에는 장의 일반적인 법칙이 존재한다.
부르디외는 그 법칙을 장의 전유와 배제의 법칙으로 간주한다.
모든 장에는 입회권의 빗장을 부수려고 애쓰는 신참자와 독점을 옹호하고 경쟁을 배제시키는 지배자
사이의 투쟁이 있다.
하나의 장은 다른 장들의 고유한 이해관계와 목표로 환원될 수 없다.
하나의 장이 가동되기 위해서는 게임의 목표와 그 게임을 행할 사람들, 다시 말해 게임의 내재적인 법칙과
목표 등에 대한 인식과 인정을 함축하는 아비투스를 지닌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장의 구조는 투쟁에 참여한 주체 혹은 제도들 사이의 역학관계, 이전의 투쟁을 통해 축적되어 이후 그 전략
의 방향을 결정짓는 특정 자본의 분배관계의 상태이다.
장에서 발생하는 투쟁들은 해당 장의 특징을 나타내는 합법적인 폭력의 독점을 다시 말해 특정 자본의
분배구조의 전복, 혹은 보존을 목표로 삼고 있다.
문화권력의 장은 서로 같은 입장을 가진 자들이 만든 구조적 공간으로서 장을 유지하기 위한 배제의
논리와 그것을 깨기 위한 전복의 논리가 치열하게 경합을 벌일 뿐, 애초부터 정치적, 윤리적 동일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념적으로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자신들이 장을 지키려는 문화권력의 속성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참여정부의 코드인사 논란은 문화권력의 발생 원리로 볼 때 지극한 당연한 것이다.
권력의 남용과 사용 방식에 차이가 있겠지만, 문화권력의 발생 원리는 마치 독재정권 시절 정부의 시녀
역할에 충실했던 보수적인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권력을 독식하여 예술 사교계의 장을 배타적으로 형성
하려는 것과 같은 맥락을 가진다.
이 원리에 따르면 참여정부에 요직을 맡고 있는 진보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순수한 봉사와 헌신의 정신만
있을 뿐 문화권력을 행사한 바가 없다는 발언은 허구이다.
문화예술 권력의 발생 원리를 특정한 개인이 아닌 민예총과 같은 대표적인 예술운동 조직에 바로 적용
하는 것이 무리일 수는 있지만, 국민의 정부 이후 민예총의 주요 활동방식을 따져보면 오히려 문화예술
권력의 장에서 일정한 헤게모니 전복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민예총이 문화예술 권력의 장에서 스스로 중심에 편입되기를 시도했던 시점이 역설적으로 예술운동의
실천적, 방법적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던 시기이다.
주지하듯이 민예총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열기에 부응하여 1998년 민족예술의 발전과 문화
예술운동의 대중화를 목적으로 출범했다.
민예총은 1990년대 초 예술 장르별 분과위원회를 종합하는 연합적인 예술운동 단체의 성격을 갖고 1993년에 사단법인화를 추진하였고, 1990년대 초반 노동자 문예운동 조직들이 해체되면서 진보적인 예술운동을
주도한 가장 크고 대표적인 조직으로 성장했다.
1990년대 초반 시작한 ‘문예아카데미’는 대학의 교육과정에 들어 갈 수 없었던 진보적인 학술 담론들을
시민사회 영역에서 제공한 최초의 대안 교육프로그램이었고, 이후 월간 『민족예술』과 웹진 『컬쳐뉴스』와 같은 고정매체를 통해 진보적인 예술운동계의 담론들을 생산하고자 했다.
민예총은 현재까지 전국을 포괄하는 지역 단위조직과 문학, 미술, 춤, 건축, 사진, 영화 등 장르별 분과조직을 아우르는 거대한 예술운동 조직으로 성장했으나, 조직의 생존과 재생산을 위해 예술운동의 주요 활동을 국가 문화정책에의 협상에 집중했다.
1990년대 말부터 민예총의 주요 활동은 조직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정부의 직간접적인 지원을 이끌어내는 것이었고, 많은 협상 노력의 결과로 예총 수준에 준하는 단체지원금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민예총이 독자적으로 추진하는 사업들은 대부분 전통적인 예술 장르 분과에서 제작한 예술작품을 정기적으로 전시․공연하는 것과 문예아카데미의 운영 및 웹진 『컬쳐뉴스』의 발간, 그리고 정부의 문화정책을 새롭게 제안하는 토론회 조직이 대부분이다.
말하자면 민예총은 전통적인 예술운동의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조직의 운영을 위한 안정적 재원확보를 위해 예술의 공공성 지원을 을 전제로 하는 ‘문화정책’의 선택적 개입을 선호했고, 이 과정에서 참여정부에
들어와서는 스스로 국가 문화정책의 대리자로 자처하려는 개인적, 조직적 이행을 시도했다.
2002년 대선과정에서 민예총의 많은 인사들이 노무현을 지지하거나 정책파트너로 자처했고, 이후 민예총의 장르 분과위원회를 책임지던 인사들이 대안적인 성찰 없이 대거 문화관광부의 산하 단체의 장으로 들어가
새로운 권력의 장을 형성했다.
물론 이러한 비판적인 문제제기는 보수언론이 감행했던 문화좌파 길들이기 공세와는 다른, 예술운동의
진보적이고 자생적인 대안에 관한 것이다.
민예총이 그동안 추진했던 사업들은 대부분 국가와 지역의 문화정책에 대한 협상과 조정에 관한 것이었고, 본래의 예술운동을 문화정책 사업으로 환원함으로써, 문화운동의 지형에 일정한 한계상황을 경험하고
있어 보인다.
물론 민예총이 한국 사회의 진보적 운동의제들에 전혀 무감했던 것은 아니다.
민예총은 ‘이라크파병반대운동’, ‘한-미 FTA 반대 범국민운동’, 새만금과 평택투쟁, 비정규직 투쟁 등 한국 사회운동의 연대모임에 줄곧 이름을 올리긴 했지만, 문제는 이름을 올리는 것을 넘어서 이러한 사회운동의 실천들의 지형 속에서 예술운동, 예술적 실천이 어떤 대안을 마련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을 기획
하지 못했다.
민예총이 생각하는 진보적 예술운동은 기존의 상식과 관행에 기초한 사업의 재생산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민예총이 한 때 주력 사업으로 추진했던 남북문화예술교류 사업도 예술가 교류, 창작교류의 일반적인 문화
교류 사업의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어떤 점에서는 통일부의 문화선교사적 사명과 크게 다르지 않은
한계를 드러냈다.
민예총의 운동들은 그런 점에서 두 가지 현실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예술운동의 인식이 여전히 낡은 패러다임 안에 갇혀서 예술운동의 새로운 실천 토픽들과 내적
진보성에 대한 자기 정책이 부재하다는 점과
둘째, 민주화 시기 이후 스스로 문화권력의 중심 장으로 이동하려는 욕망을 투사함으로써 예술운동의
이념과 예술가 집단들과의 연대, 문화적 감수성의 변이와 차이 등에 대한 소수자적 관점이 실종되었다는
점이다.
민예총은 예술의 사회미학적 성격, 즉 예술의 미적 특이성이 대안적 사회구성의 중요한 자원으로 확산될
수 있는 문화행동을 고민하지 않고 기초 예술장르의 반영과 제도마련이라는 문제에 천착했으며, 새로운
젊은 세대들의 예술적 감수성과 차이의 정치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
가령 예술의 장르 외부에 있는 새만금, 평택, 동대문운동장 철거, 포스코 및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 연대
운동과 같은 사건에서 개인 소속회원의 차원이 아닌 민예총 자체의 집단적 행동 차원에서 어떤 실천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술의 자기물질의 진보성, 새로운 디지털 문화 환경에서의 예술적 실천의 대상 발견, 예술의 다양한 힘을
예술의 외부로 투사하는 사회미학적 실천 등에 대해서 민예총은 적어도 자신의 실천과제로 인지하지 않은
듯하다.
또한 2000년 초반에 논쟁이었던 이른바 ‘표현의 자유’ 논란에 있어서도 민예총의 일부 인사들은 작품성을
담보하지 않은 표현의 자유는 옹호할 수 없다는 입장을 드러내기도 하였는데, 이는 정치적 진보와 문화적
진보 사이의 이러한 균열현상은 소수자의 문화적 감수성과 소수집단들의 문화권리를 옹호하는 데 있어
민예총의 선택을 보수적으로 만들었다.
또한 예총의 목동예술인회관 이전 관련 파행․비리 사건에 대해 적극적인 비판을 자제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이, 민예총은 진보적 원칙과 투명성보다는 조직의 이해관계에 따른 이른바 예술계의 ‘동업주의’를 선택한
듯하다.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민예총은 한동안 한국의 예술운동을 주도하였지만, 20년이 넘도록 동일한
패러다임과 방법론을 고수하면서 스스로 새로운 예술 환경에 대처하여 장기정책과 정치학을 구성하지
못했다.
민예총의 예술운동은 장르-분과적이고 재현-중심적이며, 정책-환원적이다.
민예총은 신자유주의의 전면 도래를 예고하는 이명박 정부 들어서도 대안적인 예술운동의 자율성을 강화
하기 보다는 기존의 조직사업을 재생산하기 위한 ‘정책협상’의 전략을 강화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이는 대선 국면에서 지금까지 민예총이 주로 대선에서 문화정책을 어떻게 제안할 것인가, 이명박 정부 하에서 문화정책이 어떻게 구성되어야하는가, 예술인들의 복지를 어떻게 확대할 것인가 등의 정책협상의 의제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바이다.
국가의 문화정책과 일정한 협상과 타협의 ‘기술’을 연마하는 것 외에 자생적인 예술운동의 공간과 시간을
연계하는 프로그램과 주체형성에 있어 민예총은 심각한 공백을 안고 있고, 이는 바로 예술운동의 현재적
한계를 반영한다.
민예총이 예술운동의 진보적인 자기 정책을 기획할 수 있는 내적 주체형성이 실현되기 어렵고, 사회적 문화행동과 접속하려는 독립적인 젊은 예술가로부터 지지를 받지도 못하면서, 문화권력의 장에서 일정한 헤게
모니를 행사하기 위해 정치적 협상을 시도한다면 바로 이로부터 예술운동의 죽음을 목도할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예술운동 조직인 민예총의 한계는 사실 예술장르와 지역주의를 모두 포괄하려고 했던
1990년대 초반에 이미 예견된 것이다.
민예총은 사단법인을 통해 제도적 힘을 강화했지만, 운동조직으로서의 자율성을 스스로 포기하면서 예술
운동이 사회운동의 수단과 도구가 아니라 가장 강력한 매개적 힘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을 운동의 현장에서 설파하지 못했다.
사실 2000년 이후 한국 사회운동의 경로에서 예술운동이 운동의 자원과 에너지를 확대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새만금간척사업, 청계천복원, 동대문운동장철거 같은 신개발주의 국면에서 문화와 생태의 중요성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급진적 예술행동의 기회와 요청이 많았다.
또한 신자유주의 시대 한-미 FTA에 반대하는 문화행동과 창작활동에 대한 현장 실천을 활성화하고, 자본의 세계화, 문화의 독점화에 저항하는 자율적인 예술행동을 조직하는 것도 예술운동이 사회운동과 접속할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대활동은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독립적인 창작자 이외에는 민예총이 조직적인 차원에서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예술의 사회적 지위의 변화와 그에 따른 예술운동의 새로운 도전이라는 전망과는 다르게 주류 예술운동
조직들은 대부분 새로운 환경에 대응하지 못하고 낡은 수목적 위계구조와 낡은 창작자의 지위에 안주하
면서 예술, 혹은 예술운동의 위기를 외부의 환경으로 돌렸다.
예술운동 조직은 당대의 권력에 맞서기보다는 스스로 권력의 대상이 되고자 했고, 자기 권력의 재생산을
위한 사회적 권력의 장으로의 개입과 협상이라는 시나리오를 정당화했다.
권력의 장에서 끝임 없이 자기 권력의 정당화하려고 했던 것이 이른바 ‘민족문학작가회의’와 ‘창비’가
주도한 진보적 문단-권력이라 할 수 있다.
1980년대만 해도 문단, 혹은 문학 권력은 순수 대 참여, 진보 대 보수라는 간단한 대립구도 하에서 형성되
었다.
전통적으로 문단권력은 문인, 혹은 본격 예술가들에 의해 행사되었다.
한국에서 문인의 힘은 다른 어떤 예술 장르에 비해 윤리적, 도덕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상징적 권위를 누렸다. 또한 굳이 문인이 아니더라도 본격 예술가들은 미디어를 통해 혼탁한 세상을 구원해 줄 ‘감성의 메시아’로서의 지위를 얻었다.
시국사건 때마다 문인들과 본격 예술가들은 항상 시대의 전위에 있었고, 시인의 언어는 민중을 구원할 상징적 권위를 부여받곤 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진보적 문단 권력은 학벌, 담론, 장르, 저널리즘의 분파들 속에서 복잡하게 분화되었다.
가령 ‘창비’와 ‘문지’라는 전통적인 문단 권력은 ‘문학동네’가 등장하면서 이른바 주류·비주류로 구분하는
상업적 경계로 분할되고, 이후 문학의 제도적 실천은 문학시장의 주도권을 누가 잡는가에 집중한다.
문단권력이 문학예술운동에 가장 보수적인 지위를 행사하고 있다는 것은 진보와 보수의 이념을 떠나 문학
의 카르텔주의를 가장 원시적으로 행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1990년대 후반 젊은 문학평론가 이명원이 제기한 김윤식 비평의 표절 논란은 비평의 윤리와 인용의 도덕성에 대한 논쟁이 아닌 출신학교의 카르텔주의의 논쟁으로 이행하기도 했다.
민주화 이후 예술운동의 위기는 결국 진보 이념의 해체 때문이라기보다는 제도화된 진보적 문학예술의 장이 지속적인 자기성찰 없이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너무 자명하게 정의했기 때문이다.
이는 진보와 권력, 이념과 재현, 물질과 표현이 서로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스스로 자신의 존재가 문학예술의 장에서 지배적 중심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망각한 데서 비롯한다.
부르디외가 장의 역동성을 설명하면서 말했던 정통성(doxa)과 이단(heterodox)의 끝임 없는 투쟁의 법칙들은 기존의 진보적 예술운동 조직들과 문화양식들이 스스로 지배적 '위치'(position)에 있음을 일깨워줌으로써 새로운 '위치지우기'(position-taking)의 가능성
3. 예술운동의 ‘사회미학적’ 생성
물론 2000년 이후 모든 예술운동이 예술일반의 위기에만 적극적으로 매달렸거나 자기 권력화에 매몰된
것은 아니었다.
수목적이고 위계적이며 재현 중심적인 기성 예술운동 조직과는 다르게 소수의 집단들의 예술가 그룹들은
기존과는 다른 감수성을 갖고 새로운 예술운동의 지평을 열어나가는 시도들을 감행했다.
이러한 소수집단들의 예술운동, 혹은 문화운동은 크게 보아 두 가지 흐름을 생성하는 듯하다.
첫째, 예술 스쾃운동을 통해서 예술가들의 창작 권리의 사회적 의미들을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산하는 것과
둘째, 청계천, 평택, 새만금의 신개발주의 논리에 맞서는 예술행동의 생태적 전망들이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예술운동의 새로운 흐름들은 전통적인 재현 중심의 예술의 미적 실천과는 다르게 예술적
감수성의 요소들과 미적효과가 어떻게 사회운동의 의제들 안으로 녹아들어갈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에서 미학의 사회화를 실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한미-FTA, 평택미군기지 이전반대, 경부대운하반대 등 사회운동 안에서 예술가들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모색한다는 점에서 예술운동의 새로운 흐름은 사회의 미학화를 위한 실천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이른바 사회미학적 실천은 미학적 요소들이 상품미학과 개별성에 근거한 부르주아 미학을 거부하되, 사회
운동의 주체형성에 있어 미적 자율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현장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먼저 한국에서 스쾃운동은 예술가들에 의한 공간의 불법점거라는 다소 비현실적인 행동처럼 소개될 수
있었지만, ‘목동예술인회관사태’를 통해 비교적 이해하기 쉽고 설득력 있는 문화행동으로 인지되었다.
원래 스쾃은 오스트리아 목동들이 자신의 초지가 아닌 다른 곳으로 양떼를 몰고 가는 행위에서 비롯되었는데, 이후 “어떠한 허가도 권리도 없는 점유”라는 사회적 의미를 부여받게 되었다.
초창기 스쾃운동은 집이 없는 노동자들의 연대조직에 의한 주거권 투쟁이 주를 이루었지만, 1980년 이후
에는 예술가들의 사회적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스쾃운동이 주를 이루었다.
예술가 스쾃은 20세기 초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로 대변되는 아방가르드 운동의 반지성주의에서 영향을
받았고, 정치적으로 1968년 프랑스 학생운동에서 촉발된 자율주의 운동에서 영향을 받아 예술적 삶에 대한 부르주아적 가설들을 해체하려는 실천들에 몰두했다.
예술가 스쾃운동은 예술 그 자체의 무의미함을 전도시키기 위해 예술적 삶의 어떤 위계질서도 해체하고자 했으며, 주변부적 삶의 소통과 공유를 위해 예술을 삶 속에 헌신케 하는 상황주의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스쾃예술가들은 ‘공간’에 대한 소유의 개념이 아닌 ‘사용’에 대한 개념을 추장하며, ‘사적 소유권에 맞서고 있다.
이러한 사적 소유권의 부정은 사회변혁을 과제로 삼았던 과거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의 개념과도 맞닿아
있다”
스쾃의 문화행동은 그런 점에서 제도 권력과 미학적 권위로 무장한 지배적 예술의 장에 대한 전복의 게임
이다.
이는 목동예술인회관의 스쾃행동을 둘러싼 ‘오아시스 프로젝트’팀과 민예총 사이의 상반된 입장을 통해서
도 확인할 수 있었던 바이다.
오아시스 프로젝트는 한국의 예술운동의 장에서 주변화하고 새롭게 생성하는 예술가 그룹이었던 반면,
민예총은 기성 조직으로서 목동예술인회관을 통해 투기자본을 축적하여 했던 예총의 이해관계의 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대당관계를 유지했다.
오아시스 프로젝트의 목동예술인회관에 대한 스쾃행동은 예총만 아니라 민예총 조직에게 있어서 불쾌하고 불편한 사건이었으며 이는 예총과의 이해관계를 떠나 민예총의 감수성으로는 수용할 수 없는 미학적 태도
였다.
예술가 스쾃이 단지 예술가들의 작업공간을 보장하라는 불법적이면서도 이기적인 시위로 비난하지 않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들이 갖고 있는 소수자적인 감수성과 공유할 수 있는 인식적 기반이 전제되어야하는데, 민예총의 조직적 성격으로는 오아시스 집단의 감수성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아시스 프로젝트에 의한 한국 최초의 공개적 스쾃운동은 오랜 시간을 끌지 못했지만, 목동예술인회관
사태를 수면위로 끌어올린 사건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목동예술인회관을 둘러싼 기성 예술가 조직들의
권력의 장의 현실을 드러낸 정치적 효과를 일으키기도 했다.
물론 한국에서 예술가 스쾃운동이 하나의 쇼케이스를 넘어서 일상적인 예술운동의 하나로 이행하기에는
현실적 동의와 자극이 부족해보이고, 역설적으로 예술가들이 스쾃에 올인 할 만큼 공간 사용에 있어 절실
함을 느끼지 못한다.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작업공간은 삶의 공간이다.
더욱이 그 공간을 스쾃의 행동을 통해 쟁취하다는 것은 우리사회에 공간의 분대와 정의가 얼마나 불평등
한가를 보여주는 그 자체로 사회운동의 한 형태이다.
한국의 사회운동에서 시위용 스쾃은 역사적으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고, 그 힘도 강력하다.
그러나 예술스쾃의 행동과 사용방식에 대한 미학적 도전들은 사회운동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시위 스쾃이
경험할 수 없는 감성의 자율성을 체감할 수 있다.
예술 스쾃은 시위 스쾃에서 사회운동의 생존권을 배우고, 시위 스쾃은 예술 스쾃을 통해서 삶의 자율성과
미적 감각을 배우는 상호 교접이 필요한 시점이다.
스쾃운동이 공간과 주거에 대한 미학적 의미를 설파했다면 신개발주의에 반대하는 예술가들의 문화행동은 자본의 공간지배에 맞서는 생태적 의미를 설파했다고 볼 수 있다.
예술가 행동주의는 서양에서는 20세기 혁명적 모더니즘에서 촉발되었고,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
면서 상황주의자들의 급진적인 예술행동으로 발전하였다.
예술가 행동주의는 인쇄 텍스트나 캔버스에 존재하는 예술은 더 이상 살아있는 예술이 아님을 선언하고
사회적 모순들이 직접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현장에서 행동으로 보여주길 원한다.
특히 1970년대 미술운동에서 노숙자, 에이즈, 성폭력, 환경, 이주노동자, 인종차별과 같은 사회 차별적인
이슈들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들 그룹은 “미술관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나옴으로써 은유적인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의식과 행동을 세상 한가운데에서 실제로 표현하는 사고의 전환”
한국에서 예술가 행동주의는 공간을 문화적으로 리모델링하여 상업적인 프리미엄을 극대화하려는 이른바
신개발주의에 대한 생태적 저항의 과정에서 구체화되었다.
예컨대 이명박 당선자가 서울시장 재임 시설 추진했던 청계천 복원사업이나 서울시청 광장 조성사업,
그리고 새만금 간척사업과 부안 핵 폐기장사업, 경부고속철도사업, 경부대운하사업 등과 같은 대규모 개발 사업들이 진행되는 현장에 예술가들이 직접 찾아가 그곳에서 직접 작품을 설치하고 퍼포먼스를 벌이는
문화행동을 전개했다.
신개발주의에 반대하는 생태적 예술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들은 청계천 복원사업 기간 현장에 남아서 철거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인근 주민들과 함께 시각예술작품들을 시도했던 ‘플라잉 시티’ 그룹과 새만금
간척사업의 현장에서 장기간 반대운동을 펼친 작가 최병수씨, 새만금 간척사업의 이데올로기적 홍보를
맡았던 ‘새만금 록페스티벌’에 반대하여 부안 해창 갯벌에서 살살 페스티벌을 열었던 ‘농발게’와 ‘에코토피아’ 그룹, 그리고 최근 경부대운하 사업을 반대하고 생태적 소중함을 알리기 위해 현장 르뽀 기행을 선언한
‘리얼리스트100’ 그룹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플라잉 시티 그룹’은 문화적 개발주의를 폭로하는 방법으로 공공미술의 의미를 도입한 사례라 할 수 있
는데, 통상 한국에서 공공미술이 비문화적 공간에 예술적, 미학적 감성을 가미시켜 안정된 시각성을 구축
하는 데 주력했다면 ‘플라잉 시티’ 그룹과 같은 공공미술 운동은 사건의 현장에서 공간의 공공성과 기억을
기록하고 체험하는 생태적 ‘에스노그라피’를 선택했다.
플라잉시티 그룹의 활동이 정작 청계천이 복원된 이후에는 자신들의 경험을 안정된 시각적 공간 리모델링
방법론으로 활용한 한계를 갖고 있지만, 이들의 예술행동에는 기존의 주류 예술운동이 시도하지 않았던
‘현장에서의 사건과 의미의 배치’라는 특이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으로 새만금과 부안, 그리고 일본과 베트남에서 벌인 최병수의 설치 작업들은 예술과 생태 환경을
현장에서 접합하려는 문화행동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죽어가는 새만금 간척지에 장승을 깍고 솟대를 세우고, 부안 해창 갯벌에서는 이미 쓸모없어져 버린
어느 어부의 낡은 고기잡이배를 제단에 바친다.
1997년 일본에서 열린 ‘쿄토3차세계환경대회’에서는 지구온난화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얼음 펭귄을
깎아 전시하기도 했다. 최병수의 설치작업은 자연과 생태, 인간과 삶의 현장을 찾아 그것이 왜 중요한가를
은유가 아닌 실제 물질로 표현하고자 한다.
나의 작품이 그저 전시장에만 내걸렸다면 내 작업이 작업실에서만 이뤄졌다면 어땠을까?
그건 죽어있는 것을 그린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내가 현장에 달려가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그 현장에서 내 작품이 생명을 얻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그림으로 민중과 만나고 소통한다.
독재정권에 항의하는 학생, 자본의 불합리와 싸우는 노동자, 농토를 빼앗기고 삶의 보금자리를 잃은 농민과 어민, 나는 나의 그림을 그들과 함께 나눈다.
부안 해창 갯벌에서 열렸던 안티-새만금 록페스티벌인 살살 페스티벌과 에코토피아 생태 학교도 예술
행동과 생태문화가 결합된 사례라 할 수 있다.
생태적 예술행동으로서 살살 페스티벌이 갖는 특이성은 개인들의 자발적인 연합에 있다.
실제로 살살 페스티벌을 조직하고 운영한 주체들은 전문 예술가들이 아니라 블로그에에서 생태문화
활동을 하고 있는 생태주의자들이다.
살살 페스티벌과 에코토피아 캠프를 초기에 제안한 ‘대항지구화 행동’과 ‘농발게’라는 조직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인식하는 위계적 조직, 개인들의 전위에 서있는 조직이 아니라 개인들의 행동을 연결해주는
터미널과 같다.
에코토피아 캠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특정한 조직이 운동의 의제를 대변해서 전체 행사를 끌고 나가는
방식에서 벗어나 개인들의 자발적 의지와 동기에 의존하는 새로운 문화행동을 실험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갯벌에서 하나씩 만들어지는 장식물들, 생태적 화장실, 특별한 무대장치가 없이 열정적인 참여자들을
기다리는 살살 페스티벌의 스테이지, 이 모든 것들은 새만금록페스티벌의 인공적인 설치물들에 비해
화려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문화행동의 취지와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일관된 가치를 보여주
었다.
지금까지 언급한 새로운 예술운동의 흐름들은 모두 예술이 텍스트의 재현의 방식에서 벗어나서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으로 달려가는 것을 강조한다.
물론 예술운동에서 행동주의는 앞서 설명한 생태적 활동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성차별에 대항해 여성들의 문화적 자유를 외쳤던 페미니스트 여성미술가 그룹인 ‘입김’의 아방궁 프로젝트, 팽택미군기지 이전에 반대하고 제주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했던 문화행동들, 한-미 FTA 반대운동의 전선에서 수많은 그룹들이 시도했던 문화적 퍼포먼스들, 그리고 이랜드와 포스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의 현장에서 시도되었던 미디어행동들, 이 모든 것들이 기존의 기성 예술가 조직들과는 판이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던 사회미학적 실천들이다.
예술운동의 사회미학적 실천은 삶의로서의 예술, 사회적 생태계와 함께 가는 예술, 스스로 끝임 없이
소수자가 되고자하는 예술의 의미들을 사회운동의 실천 속에 투사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에서 예술운동은 그런 점에서 기존과는 다른 이념과 방법으로 새로운 지도그리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4. 예술운동의 새로운 지도그리기
그렇다면 예술운동의 새로운 지도그리기는 어떻게 가능할까?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를 하는 것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
먼저 문화자본이 갈수록 독점화되고, 신개발주의가 문화와 예술의 요소들을 포장해서 자신들의 산업자본의 폭력을 지우기 위한 알리바이로 사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예술운동은 이제 문화적 공공성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통해서 국가의 문화정책으로 흡수되는 경로와의 인식론적 단절이 필요하다.
사실 예술가들의 일상 생계와 생존에 대한 공공적인 요청, 문화자원의 민주화를 위한 문화정책 개입, 예술
시자의 확산을 위한 제도 개선 등이 예술운동의 동시대적 실천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러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 것인가 인데, 적어도 국민의 정부 이래 주류 예술
운동 단체들이 해왔던 방식들은 국가의 문화정책 안에 일정한 권력과 헤게모니를 행사하면서 적절한 협상
안을 찾고, 이 이해관계들에 ‘올인’하는 것이었다.
예술가들의 생계와 생존은 사회운동에서 비정규직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예술가들의 창작의 권리와 표현의 자유들은 모두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지는 않는다.
소수집단성과 진보적 급진성을 운동의 가장 중요한 원리로 생각하는 국내외 많은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업
환경과 생존에 대한 국가의 요구를 말하기 이전에 스스로 자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적극적으로 찾는다.
바로 예술가들의 진보적인 환경을 적극적으로 찾으려는 행동 자체가 예술운동의 중요한 과정이다.
예술의 공공성은 개인이나 집단으로 환원되는 예술가 조합주의가 아닌 예술과 예술적 감성들이 사회적
의미를 획득하고 그것이 최소한의 물적 토대의 확보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구현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예술운동의 생태문화적 실천은 예술운동 내부의 생태적 코뮌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시작되
어야 한다.
이른바 예술가들의 생태문화적 ‘어소시에이션’ 운동이 모든 문화적 공공성 운동의 기초에 있어야 한다.
예술운동가 집단들의 자발적 코뮌 형성과 이를 기점으로 스스로 자급자족하며 사회 공공성 운동에 적극
적으로 결합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동시대 예술운동이 새로운 인식론적 전환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많은 회원을 보유하고, 분과장르들을
수목적으로 아우르는 거대 조직으로부터의 단절과 탈주가 필요하다.
세를 불리고 거대조직을 지향하는 예술운동의 시대는 이제 종말을 고했다.
조직을 위한 조직의 예술운동은 생존을 위해 다른 조건과 상황을 고려할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조직
운동과 예술운동이 분리되는 결과를 낳는다.
예술운동은 끊임없이 권력의 장에서 스스로를 주변화하고 소수자로 남을 수 있도록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소수자되기’로서의 예술운동의 자기 정책은 예술적 취향의 개인화, 개별화와는 다른 맥락을 갖는다.
그것은 예술운동 집단들이 자율성을 갖고 위계적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활동하되, 문화운동의 현장에서는
리좀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공공미술가 그룹, 행동주의작가그룹, 급진적인 퍼퍼먼스 그룹, 대안적인 예술교육 그룹들이 사회적 모순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다중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 있는 많은 실험과 연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예술운동은 기존에 의심하지 않았던 예술의 물질성과 재현의 방법에 대한 새로운 인식적 전환이 또한 요구
된다.
이는 예술운동의 자명성에 대한 질문이다.
특히 과학과 예술, 테크놀로지가 통섭하는 새로운 디지털 환경에서 예술운동은 기존에 갖고 있는 기술혐오
주의로부터 벗어나 디지털 예술 환경에서 새로운 실천을 찾을 시점에 와 있다.
한국에서 예술운동은 대부분 과학과 기술을 예술의 적으로 간주해왔다.
예술의 진보는 재현된 의미의 진보로만 생각되었지, 예술의 물질성의 진보, 즉 과학과 기술의 진보와 연동
되는 패러다임의 진보로 생각하지 않았다.
예술과 과학의 역사적 연관성과 패러다임의 상호 인지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