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나 식힐 겸 중앙박물관을 택했는데..
무더위에 접근이 쉽고 에어컨도 빵빵하게 나오는 국립중앙박물관을 탐방처로 택한 건, 그 동안 오랜 경험에서 얻은 고육책입니다. 용산구 이촌동에 위치한 중앙박물관은 중늙은이들에겐 혹서기와 혹한기를 위한 '꽃놀이패'로, 우리 모임에서는 이미 '선사시대관'을 비롯 5~6회 탐방한 바 있습니다. 그 소장한 문화재가 방대하기에 한번에 개별관만 보기에도 벅찰 정도인데, 이번엔 아직 보지 못한 '아시아관'을 탐방키로 했습니다. 입구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해설자는 같은 연배의 여성으로 해설과 미모에서 모두 별 감동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교육계에 몸담았던 권옹의 말대로 그저 평범한 정규 수업을 듣는 격이라 할까요. 그러나 기대하지 않았던 데서 뜻밖의 대어(?)를 낚을 때 그 기쁨은 더욱 크게 마련, 시간을 때우기 위해 들어간 특별전시실에서 뜻밖의 대박을 터트립니다.
신안 해저에 가라 앉았던 엄청난 보물선
1시간 가량 '인도 동남아시아실'을 돌아 보고 나니 오후 4시. 저녁을 먹으러 가기에도 이른 시간이고 전시해설도 미진하던 참에 특별전시관으로 '신안해저 보물'을 보러 가는 게 어떻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천원이상 비싼(?) 입장료를 기꺼히 감내하며 탐방하는 데 익숙치 않은 우리 모임인지라 설왕설래가 없지 않았으나 결국 결행키로 하였습니다. 성질 급하신 유종*翁이 먼저 달려가서 입장권(경로입장료 두당 3천원)를 구입하여 입장하니, 마침 묘령의 여인이 막 해설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어찌 젊은 미인의 해설은 다 멋지고 감동까지 주는지.. (국후담이지만 문화재의 충실함 못지않게 중요한 게 해설자의 미모라는데 의견을 같이했지요.^^)
신안해저 유물에 대한 필자의 지식이 워낙 저렴(?)한지라 인터넷 상에서 엄선한 소개글과 사진들로 가름하오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안 해저에서 엄청나게 쏟아져 나온 보물들
신안해저 유물선 : 1976년 세상을 깜작 놀라게 하면서 시작되었던 신안해저발굴은 그 후 국내외의 주목을 받으며 1984년까지 진행된바 있고, 이 발굴에서 14세기 무역선과 수 만점의 무역품을 인양하였다. 이들 유물들은 국립해양유물전시관과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광주박물관에 분산 관리되고 있으며, 특히 선박은 20여 년간의 보존처리 및 복원과정을 거쳐 해양유물전시관에 전시되고 있다. ‘신안군(新安郡)’이라는 발굴 지역의 명칭을 그대로 부여받아 명명케 된 ‘신안선’은 1323년 중국의 경원(慶元: 현재의 닝보寧波)에서 무역품을 가득 싣고 출발하여 일본 하카다(博多), 교토(京都) 쪽으로 향하던 국제무역선이었다. 당시 사회적 배경을 보면, 14세기는 어느 때보다도 동서간의 문물교류와 사람들의 왕래가 활발했던 시기이다. 동서를 잇는 주요 교역로는 육지의 비단길과 해상의 ‘남해로(해상실크로드)’가 있었으며, 이 시기에는 항해술의 발달과 함께 대량수송의 장점이 있는 해상 운송이 주류를 이루었고 해상실크로드가 주로 이용되었다. 이 길은 주로 동방의 도자기·향료·차 등이 서방으로 수출되어 ‘도자기길’ 또는 ‘향료길’이라고도 부른다. 항로는 중국 남부의 광주(廣州), 항주(杭州), 천주(泉州), 경원(慶元) 등의 국제무역항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동남아, 스리랑카, 인도, 중동을 거쳐 유럽까지 이어졌고, 동쪽으로는 고려와 일본으로까지 연장되어, 해상실크로드는 유럽에서 아시아의 동쪽 끝 일본까지 형성된 광범위한 교역로였다. 신안해저유물은 당시 이러한 해상실크로드의 교역상을 실증하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세계적 수중문화유산으로서 의미가 있다.
이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신안 보물선 발굴 출토 40주년을 맞이하여 국립해양유물전시관과 광주박물관에 분산 전시된 보물들을 한데 모아 특별전을 열어 2만점이 넘는 고대 유물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질과 양에서 상상을 초월한다. 송.원대(宋元代)의 청자, 백자, 청백자 명품 도자기들이 20.661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당시 우리나라(고려). 중국(元). 일본(鎌倉)에서는 불교문화가 귀족문화로 유행할 때이다. 다도를 즐기기 위한 차도구. 그리고 불전과 다실을 꾸밀 화병이 도자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신안선의 선창에는 불상을 조각하거나 최고급 향료로 사용하는 자단목(紫丹木)이 1017본이 실려있었다. 자단목이 700년 가까이 갯펄에 묻혀 있었으니 그 경제 적가치로 따지면 송, 원대의 2만점 명품 도자기 못지 않을 것이다.
당시 일본 가마쿠라(鎌倉) 시대의 관료였던 미치에가는 교토(京都)에 대형 사찰건립을 추진하였다. 나라의 동대사(東大寺)와 흥복사(興福寺)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은 절이 교토에서 단풍으로 유명한 동복사(東福寺)이다. 동복사는 신안 보물선이 난파되기 4년전 거대한 본전이 불타고 재건축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마쿠라 막부에서는 거대한 사찰을 짓는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 사무역을 허용했다. 침몰선 내부의 토사를 흡입 호스로 빨아내니 동전이 쏟아져 나왔는데 동전의 무게만 28톤 갯수는 800만개가 넘었다. 이 시기가 원나라에서는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고 동전이 폐기될 때였다고 한다. 일본의 승려들과 상인들은 중국에서 폐기된 동전을 있는대로 수집하여 일본으로 가져갔다는데, 동전을 녹여 동복사에 대불을 세울려 했던 걸로 추측된다.
모래벌에 뭍힌 도자기 재현 상자속에 포장된 모양 재현
동전과 자단목편 꼬리표(물표)
28톤이라는 엄청난 동전은 일본에서 큰 불상 주조용으로 수입한 거지만 또한 배의 중심을 잡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함. 작은 자단목편은 도자기 등을 포장하는데 깨지지 않도록 사이에 끼워넣었던 것으로 판명됨. 물표(우측)에는 한자로 수취인의 이름이 써있었는데 지금도 읽을 있을 정도로 선명함(글씨체는 신통치 않지만..) 배안에 있었던 물품에는 한자로 된 숫자 뿐만 아니라 아라비아 숫자 등도 보여 다국적 교역임을 방증.
전시된 국보급 보물들
우리나라에서는 자국에서 만든 것이 아니면 국보로 지정될 수가 없다네요. 옆 해뜨는 나라(日本)에서는 자기들이 만든 게 아니라도 값어치가 충분하면 국보로 삼고 있다는데... 암튼 신안 앞바다에서 꺼낸 도자기 중에는 그 예술적 가치나 보관 상태가 국보급인데도 불구하고 아직 그 반열에는 들지 못하는 게 아쉽습니다. 여기에는 이 중 보기에 좋고 보관상태도 흠잡을 데 없는 유물 몇 점을 올리니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름무늬항아리 / 남송(南宋) 향로 / 원(元)
국화구름봉황무늬접시 / 元 매화무늬접시
/ 元
詩가 새겨진 접시 / 元
위의 접시에 새겨진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流水何太急(유수하태급) 흐르는 물은 어찌 그리도 급한고,
深宮盡日閑(심궁진일한) 깊은 궁궐은 종일토록 한가로운데..
이 시를 강물에 띄워 보냈는데, 이를 건져 본 젊은이가 이렇게 대구를 지었다고 하는데,
殷動謝紅葉(은근사홍엽) 은근한 마음 붉은 잎에 실어보내니,
好去到人間(호거도인간) 인간 세상으로 나오면 좋으련만..
이야기 잘 지어내는 이들은 이 궁녀가 궁궐을 나와 이 청년과 극적으로 만나 해로했다고 하는데, 그대로 믿기는 어렵습니다. 암튼 접시에 5언절구 한시가 올라 있다는 건 재미있네요.
긴목병 / 元 두귀달린병
/ 元
사발 / 元 솥모양향로
/ 元
청자 입상 3점 / 元 (위 청자 입상은 미공개 예정이라 함)
고려 청자사자상
국립중앙박물관 상설관 2층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