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길, 윌리엄 스틸, 복 있는 사람, 2011.
서문
윌리엄 스틸 William Still은 1945년부터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인 1997년까지 50여 년을 스코틀랜드 애버딘에 있는 길컴스턴 남부교회 Gilcomston South Church의 목사로 섬겼다. 그의 생애의 중심사역은 그가 말한 대로 "중단 없는 목회사역을 통해 자기에게 맡겨진 회중을 목양하는 일이었고, 이 일에 자신의 은 힘과 애정을 쏟았다.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향한 애정 어린 관심은 그의 설교와 목회기도, 개인적인 심방, 도움을 얻고자 찾아온 사람들을 대하는 헌신적인 태도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길컴스턴 월보Gilcornston Monthly Record' 에 수년간 게재된 교회 지체들의 죽음을 알리는 은혜로운 부고기사를 보면 회중을 향한 그의 마음이 어땠는지를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또 회중을 위한 성경 공부 노트Bible Study Notes를 수년 동안 충실히 연재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자기 양들을 알고 그들을 먹이신 선한 목자the Good Shepherd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학생 그룹을 대상으로 많은 강연들을 하고, 목회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큰 도전과 위로를 주고, 스스로 본을 보여 사람들을 잠잠히 훈련하고 세계 도처에서 목사의 일을 위해 기도하도록 독려한 윌리엄 스틸은 과연 목사들의 목사 a pastor pastorum였다. 그는 국내는 물론 전 세계에서 그에게 조언을 구하고 도전을 받으려 하거나 단순히 마음을 털어놓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과 놀라운 정도로 빈번한 서신 교류를 했다. 이 모든 일을 하느라 그는 실제로 하루를 이틀처럼 보냈다. 그에게는 오전 6시부터 오후 1시까지가 하루 중 첫날이었다. 곧이어 점심을 먹었는데, 주로 그의 누이와 함께했다. 사람은 '휴식과 일의 리듬'으로 살도록 지어졌다는 생각에 따라 그는 비교적 긴 휴식시간을 가졌다. 보통 오후에 두 시간에서 네 시간 사이의 휴식을 취했고, 하루 중 둘째 날에 해당하는 이때부터 자정까지 이르는 시간을 다시 역동적으로 살았다. 이렇게 그는 그 많은 일들을 소화했고 수십 년 동안 생명력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스틸의 삶과 사역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그에게는 말씀 사역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깊은 확신이 있었다. 그는 이 확신이 교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목회와 관련하여 몇 가지 지울 수 없는 마음의 부담이 있었다. 그는 먼저 자신이 섬기는 양들이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갖도록 하기 위해 애썼다. 이 일이야말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의 은혜가 세상에서 확연히 드러나기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른 교회의 삶이란 '온화하고 상대적으로 혼란스러움이 덜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를 위해 그는 사도적 원리에 철저히 헌신했고, 매일매일을 그 원리대로 살아 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행 6:4).
이 책에는 목회 현장에서 요긴하게 쓸 수 있는 많은 지혜가 담겨 있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바른 목사가 되기 위한 요점을 세세하게 다 담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 목적으로 쓰여진 다른 좋은 책들이 많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목사의 일에 대해 기능적인 가르침을 주기보다는 목사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기 위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중심적인 일들을 중심에 자리 잡게하려는 열망으로 고동친다. 목사의 손발로 하는 행위보다 손발이 움직일 수 있도록 힘써 뛰는 심장의 맥박에 주목하게 한다. 한마디로 이 책은 목사의 일에 열정과 동기를 불러일으키고 바른 변화를 이끌어 내는 데 집중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십대에 그를 처음 대면한 이래, 1997년에 그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빚을 졌다. 이 책의 서문을 쓰는 지금 그와 주고받았던 아주 특별한 대화가 생각난다. 목사의 일에 관한 한, 그가 조용히 내게 들려주었던 이 말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없었다. "강단에 설 때마다 나는 영원까지 지속될 어떤 일이 회중 가운데 시작될 거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다네. 그의 목회가 내 삶에 미친 영향을 떠올릴 때마다 그것이 바로 나에게 필요한 믿음의 분량이라는 생각을 한다. 40여 년 동안 그의 이 말을 마음에 새길 때마다 하나님은 많은 말이 아닌 믿음으로 한 말에 복을 주신다는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Robert Murray MCheyne의 말이 함께 떠오른다.
이 책 목사의 길 The Work of the Pastor」을 통해 수 세대에 걸친 많은 젊은 목회자들이 광범위하게 영향을 받고 격려를 얻었다. 다가오는 세대의 목회자들에게도 이 책이 동일한 역할을 해서 그들로 힘써 주를 섬기도록 도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또한 많은 사역들로 기진한 사역자들 역시 이 책을 통해 마음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은사가 그들 안에서 다시 불 일듯 일어나게 되기를 바란다.
싱클레어 퍼거슨
1장 내 양을 먹이라
목사
목사의 일이 무엇인지 살펴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 할점은 ‘목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목사는 말 그대로 목자다.
목자장을 모신 하나님의 양무리를 돌보는 목자다. 양무리를 푸른 초장으로 이끌어 그들을 먹이는 것이 목자의 본업이다. 아프거나 다친 양들을 돌보고 길을 잃은 양을 찾아오는 것 또한 목자가 하는 일이다. 목자가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그가 맡은 양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양을 치는 비유가 나온 김에 좀 더 이야기를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양을 기르고 먹이고 돌보고 구해 오고 치료하고 회복시킨 것은 궁극적으로 그 양을 하나님의 제단에 제물로 드리기 위함이다. 우리 역시 이 목적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목양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이 예배와 섬김의 온전한 헌신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이끄는 것이다.
목사로 불리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목적을 망각하거나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채, 잡상인처럼 사람들을 기만해 그들로 오만 물건을 사게 하고 있다. 이 교회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지 못하면 미련 없이 짐을 싸서 다른 교회로 떠난다. 애초에 이들에게 하나님의 양은 자신의 입지를 넓히고 야욕을 채우고 세상 권력을 추구하는 방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요 10:13). 그러나 선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마침내 흠 없는 양으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그들을 돌본다.
무리 안에는 양은 물론 염소도 있다. 여러분 가운데는 무늬만 교인인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는 회중을 맡게 된 목사들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염소들이 양무리가 될 수 있을까? 다른 양들을 위해서라도 그들 역시 양이 되어야 한다. J. I. 패커의 말을 들어 보자.
칼뱅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 암묵적으로 빈번하게 드러내고 적용하는 전제가 있다. 바로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직 그리스도인만을 위한 것이다. 너무나 자명한 말인 것 같지만, 우리는 이 말을 좀 더 찬찬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이 말이 포함하고 있는 모든 중요한 사실 때문만이 아니다. 20세기 그리스도인을 (예배만 참석하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칼뱅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기 때문이다. 칼뱅에게 그리스도인이란 다른 사람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이들이었다.
사족을 달면,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점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장래를 믿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양을 치도록 부름 받은 목사는 자신의 가장 우선적인 부르심이 염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안다!
전도자인 목사
전도자는 교회에 주어진 은사로 한편으로는 사도와 예언자, 다른 한편으로는 목사와 교사 사이에 자리하며 목사와 교사(엡 4:11에 나오는 직분)와도 구별된다. 전도자라고 하는 은사는 고린도전서 12:1-18에 나오는 사역 목록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목사는 항상 전도자여야 한다-그리스도를 나타낸다는 본래적인 의미에서 모든 목사는 전도자인 셈이다(마 5:16). 몇 명이라도 회심한 교인이 생기면, 목사는 그런 사람이 단 한 명이라 해도 즉시 그들을 목양하기 시작해야 한다. 말씀으로 그들을 먹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것만으로는 양을 먹일 수 없다. 바울은 어린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은 직무를 맡긴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2-5).
바울의 이 권면에는 목사와 교사와 전도자의 일들이 결합되어 있다. 바울의 사역에 나타난 전도와 가르침이라는 주제로 구성된 성경공부에서 존 던컨 John Duncan은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사도행전은 흔히 말하는 바울의 "전도사역"과 "가르치는 사역"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있다. 바울은 가르치는 때든 전도를 하는 때든 성경을 상세히 설명한다(새롭게 성경을 쓰기도 한다!). 바울의 청중이 주로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면(루스드라, 아덴, 고넬료의 집에서의 사역) 그것을 전도사역 혹은 선포적kerugmatic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청중이 주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가르치는 사역 혹은 교훈적didactic 사역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바울의 전도 가운데 어떤 것은 구약성경에 대한 주석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찰스 다드Charles Dodd는 케리그마Kerygma(선포)와 디다케didache(가르침)가 사도행전에서 명확히 구분된다고 주장한다. F. F. 부르스Bruce는 이렇게 말한다. “몇 가지 의미에서 이런 구분은 아주 편리하다. 하지만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이 두 가지는 서로 중첩되어 나타난다.”
에딘버러에 있는 애비 교회Abbey Church의 제임스 필립 James Philip도 케리그마와 디다케의 관계를 다루었다. 그는 국제비평주석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에서 로크Locke가 디모데후서 4:5을 “전할 복음을 가진 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라”고 번역한 것을 가리키면서, 여기서 강조점은 전도자euangelistes가 아닌 복음 euangelion에 있다고 주장한다. 계속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해석이 옳든 그르든 간에, "복음을 선포하는 것"과 "전도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이 여기서 잘 드러나고 있다. 신약성경의 모든 증거는 사도들이 행한 전도는 가르치는 전도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도행전의 모든 주목할 만한 설교들은 하나같이 그 중심에 선포kerygma가 자리한다. 하지만 그것은 항상 성경에 기반을 두고 그것을 주석하고 해석하는 교리 설교였다.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행 17:23). 사도들은 전도할 때 먼저 그리스도를 통해 화해하고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의 행위를 선포한 후에 비로소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라고 사람들을 촉구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하는 전도 역시 하나님의 모든 경륜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강단의 가르침을 통해 역사하고, 사람들을 회심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고, 그들의 삶을 변혁시키고, 그들 안에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빚어 결실하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교사와 설교자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말씀의 모든 경륜을 선포한다는 것은 곧 가르침과 설교가 병행되어야 함을 말한다. 그러나 온전하고 근본적인 목회가 희박해진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 심지어 복음주의 교회조차 이런 사역의 결과와 열매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온전한 사역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귀히 아는 성도들의 기도로 뒷받침되기만 한다면, 바울이 묘사하는 바와 같은 일들이 회심하지 않은 사람에게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고전 14:24-25).
물론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예리한 말씀에 찔려서, 오히려 분을 내며 문을 박차고 나가서 여러분을 고소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다시 돌아온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곳은 어디서라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보다 많은 이들을 전도하기 바라는 사람들은 전체 성경 문맥과 상관없이 복음서가 말하는 몇 가지 사실들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면서 거기에만 목을 매고 있다.
한 번은 이런 주제를 생각하며 우리 교회 성도들과 함께 BBC 제3라디오의 ‘인스턴트 구원’이라는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캐나다와 미국에서 일 년을 보낸 장로인 프랜시스 리올은, 매 주일마다 복음서가 말하는 사실들이 24시간 방송으로 대서양을 건너 전파되기 때문에, 대서양 이쪽저쪽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복음을 들어 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복음에 대한 사실을 많이 알게 된 것과 교회에 생명력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늘어나는 것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인다”라고 했다.
전에 우리 교회에서 희한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여러 교단 출신의 몇몇 복음주의자들이 우리 교회를 찾아와 자신들의 믿지 않는 친구들이 복음을 듣고 회심하도록 우리 교회로 데려오고 싶어도 강단에서 성경 본문을 조직적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는다고 불평 아닌 불평을 털어놓은 것이다. 왜 꼭 그렇게만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제대로 신앙을 갖게 된 어떤 사람들은 우리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을 통해 회심했다. [중략]
내 양을 먹이라!
물론 우리는 마지막 한 사람이 회심할 때까지 이른바 단순한 복음이라고 하는 것을 문맥과 상관없이 뚝 떼어서 강단에서 주야장천 설교하는 끔찍한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그 내용이 극적이고 놀랍다고 해도 말이다. 그동안에 배를 탈탈 곯을 다른 양들은 어쩌란 말인가? 이런 경우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예수님이 잘 가르쳐 주고 계신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말이다. 갈릴리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도래한 나라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일은 싫어하면서 그 나라가 도래한 결과인 병 고침에만 몰두하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시기 위해(먹이시기 위해) 무리를 떠나 제자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셨다! 우리 주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 세 가지를 중요한 역순으로 말하면, 병고침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권능을 나타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그분의 승천 이후 교회의 기둥이 될 아주 적은 무리를 준비시키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다라고 할 수 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것(나머지 두 가지 일을 가능하게 하고 능력을 부여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적은 무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법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산상수훈을 주신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가르침은 그의 양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양식이다. 사람들이 교회와 회중 가운데 목사로 부르심을 받는 이유는 바로 양들에게 이런 진리를 먹이기 위함이다. 그들 자신이 부름받은 이유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은 상관없다.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것에 조금 미치지 못하더라도 자극적이고 인위적인 수단을 통해 교회라는 이름으로 국제적으로 거대한 조직을 세우고 유지하는 것이 자신의 부르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차라리 목회로 나서기보다 거리를 깨끗이 청소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라고 말해 주고 싶다.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한다는 미명하에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온갖 세상적인 수단을 동원해 교회를 어지럽히는 것보다 거리를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이 훨씬 유익하고 경건한 일이기 때문이다. 양들이 먹으려고 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먹이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 목사다. 그러므로 목사는 염소들의 구미를 맞추고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염소들을 즐겁게 하는 것은 염소들에게 맡겨라. 그것도 염소들의 땅에서 그렇게 하도록 말이다. 그들의 구미를 맞춰 준다고 해서 염소가 양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분의 성령을 통해서 사람들을 화나게 할 뿐 아니라 그들을 변화시키기도 한다는 것을 믿는가? 그렇다면 복음전도자와 목사와 양을 먹이는 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법, ‘성경이 말하는 최고의 법, 자유롭게 하는 완전한 법’이란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하는 일종의 거푸집이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을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문자적으로 표현한 말들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으로 나타났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히 1:3). 성육신하신 말씀으로 요약된, 이 기록된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되도록 하는 자양분이 된다.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먹이는 목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이 말씀으로 배불러야 한다.
오늘날 하나님의 양들을 먹이기 위해 성경이 말하는 바를 단순히 '전달'하기만 한다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말씀에 대한 바르트의 이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음식은 우리 몸에 흡수되고 소화가 되어야 한다. 무신론자도 성경을 가르칠 수 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네 학교들에서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육신한 말씀이 말씀을 가르치는 여러분 안에서 다시 성육신해야 한다.
진정한 목사의 근간은 경건한 성품이다. 여러분은 말하는 사람의 됨됨이와 행동 때문에 그가 전하는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는 말을 들어 본 적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허용하신 한계 내에서 모든 목사가 원만하고 온전한 성품을 갖추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바로 이해하고 그것을 치우침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형제들아, 지혜에는[말씀을 이해하는 데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악이 악인 것을 알고 악에 참여하지 않되] 비둘기같이 순전한 것을 말한다. 지혜에는 장성한 teleioi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사람이 되라" (고전 14:20). 진정한 목사가 되려면, 여러분의 전체 삶이 진리를 아는 데 드려지되, 말로나 공리로나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신앙적으로, 다시 말해, 경건하고 도덕적인 방식으로 진리를 알아야 한다. 또 그 진리의 말씀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계명에 포함된 모든 은혜의 약속과 저주의 위협을 잘 알아서 이 계명의 주인께 인격적이고 개인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지식적으로 말씀을 먹을 뿐 아니라, 지혜와 은혜와 겸손과 용기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나는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말씀을 먹어라. 모두 먹어라. 먹을 거라면 전부 먹어라. 하나님을 위한 사람이 되거나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사람은,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 치우는 사람이다.
너무 극단적인가? 그렇다. 하지만 메시지 전체를 먹어 보지 않고서는 많은 길들 가운데 그것이 참 길인지 알 수 없다. 이것은 실험해 보는 문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헌신하는 문제다. 진리에 순종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순종이 없는 지식은 쓸모가 없다.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들은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여러분의 삶에서 나타나고, 진리를 가르치기 전에 그 진리가 여러분의 인격에서 예증되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은 가르치는 사람과 그의 가르침 모두를 받아들일 것이다.
성령의 감동
물론 성령만이 말씀을 가르치는 유일한 선생이다(요 14:16: 17: 26,16:7-15). 우리 마음과 삶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모든 행위 가운데 성령이 계시지 않다면(우리 성품이 말씀의 본을 따라 도덕적·영적으로 형성되지 않고 있다면, 성령은 거하지 않으실 것이다), 차라리 입을 열지 않는 것이 낫다. 성령이 없이 거룩한 일들에 대해 늘어놓는 것만큼 지루하고 진부하고 밋밋하고 무익한 일도 없다.
마귀는 자신이 하는 일 가운데 설교를 가장 번거롭게 여기고 또 그런 태도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생기 없고 게으르고 굼뜬 인간들을 통해 말씀이 전해지도록 한다. 이것은 바로 마귀의 가장 간교한 계략 가운데 하나다. 나는 너무나 맥없고 따분하게 기도하고 설교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회중의 열의를 누그러뜨리는 그들의 행동에 화가 나. 차라리 그런 모습을 거부할 수 있게 그들이 말하는 내용이 성경의 진리가 아니었으면 하고 바랄 뻔 한 적도 있다. 인간의 전 영혼whole soul이, 심지어 불경건한 사람조차 하나님의 말씀은 죽었다고 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나님의 성령이 계신 곳이라고 해서 항상 기쁜 모습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드러날 수도 있다. 하지만 성령이 계신 곳에 따분함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성령이 계시면 똑같은 일을 두고 찬반이 나뉘는 분리가 나타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곳에는 항상 생명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차디찬 얼음과 같은 마음을 깎아 내고 녹인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더 완고해져 도무지 녹지 않을 것 같은 마음일지라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 얼음이 아닌 강철로 비유를 바꾸면 이해가 더 빠를 것이다.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주인에게 쓰임 받기를 기뻐하며 자기를 완전히 드린 살아 있는 그릇을 통해 설교된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듣는 사람들의 삶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드러날 뿐 아니라 그들의 결정적인 행위와 그들의 영혼을 위한 양식이 된다. 사람들을 목사로 세울 때(많은 사람들이 내 손을 거쳐 갔지만, 나를 통해 목사가 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나의 모든 관심은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는 데 있다. 그렇게만 되면 목회는 저절로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후로도 목회의 일은 계속된다. 하지만 바로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의 사람이 세워지는 것이다.
요지는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 외에 내가 정말 신경 쓰는 일은 없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가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아직 다 이루지 못했다!
그렇다면 일대일로 혹은 성도들과의 사귐을 통해 말씀을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성령을 알고 있는가? 우리는 사귐을 통해 배운다.
이런 배움은 강의를 통해 배우는 것과 무관하다. 물론 강의자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전혀 다른 문제이지만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삶에 역사하지 않고, 말씀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완벽한 해결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본인은 안다)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삶에서 말씀이 역사하도록 한단 말인가? 나를 통해 목회에 들어선 사람들이 말씀에 불순종하거나 혹은 목회로 부르심을 받은 적이 전혀 없으면서 그 길로 들어섰기 때문에 자신의 문제조차 아직 해결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슬픈 일들 가운데 하나다. 말씀이 아직 그들의 삶에서 역사할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한단 말인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자신의 부르심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자녀로, 목사인 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로 부르신 것을 확신했다가, 나중에 이 일로 부르심 받은 것이 아님을 발견하고 목회의 길을 그만두고 기관의 대표간사나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물론 이것은 기관의 대표간사를 폄하하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이 모두 목회를 하다가 간사가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일을 자신의 부르심으로 알고 그 일에 매진하는 겸손하고 용기 있는 사람들도 많다)-자신이 목사와 교사로 부르심 받았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그 부르심을 위해 준비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말씀을 먹음으로 믿음이 견고해지고, 자신이 먹은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양들에게 하나님의 전체 말씀을 먹이고 가르치는 일, 자기에게 주어진 일생의 일을 감당할 수 있다. 전체 말씀을 가르치고 먹이는 것, 이것이 바로 목사의 일이다. 에베소의 바울이 좋은 예다(행 20:24-32). 우리는 세상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라고 부름 받은 것이 아니다. 심지어 복음주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많은 고난과 좌절과 오해를 당해도 그들 속에 들어가 그들을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힘쓰는 것이 바로 우리의 부르심이다. 전체 회중 가운데 그 수가 얼마가 되든지 그것은 상관이 없다. 많은 반대자들이 있을 것이고, 개중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거스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목회가 힘들어지고 위기를 맞곤 하지만, 사실 가장 견디기 힘든 어려움은 다른 데서 온다. (자신들에게 잘 와 닿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생각인 경우가 많다) 복음서의 특정한 부분만을 계속 설교해 주기를 바라고, 전체 문맥에 따라 말씀이 제대로 전해지면 오히려 흥분하고 화를 내는, 이른바 복음전도에 열심인 사람들로부터 오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우쭐한 자기 열심으로 준비했던 전도집회가 별 성과 없이 끝나고, 자신에 대한 확신이 알맹이 없는 신기루였다는 사실이 여지없이 드러나면 무슨 일이든 서슴지 않고 할 사람들이다. 전체 말씀을 전함으로 누가 마음이 상하게 되든 상관없이-그것이 설교자 자신이든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든 그의 친구든 혹은 그의 원두려움이나 치우침 없이 하나님의 전체 말씀을 전할 수 있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전체 말씀을 설교하라
하나님의 전체 말씀을 전하기 위해 바로 그 전체 말씀을 따라 살도록 부름 받은 것이 목사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전체 말씀을 다룰 수 있는가? 내가 아는 한, 일반적으로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매년 교회력을 따라 하나님의 전체 말씀이 말하는 요지를 전반적으로 다룰 수 있다. 책별로 신구약성경을 번갈아 가면서 각각 다른 부분들을 적절히 선택해 설교함으로써 균형 있게 회중을 먹일 수 있다. 이렇게 설교하기 위해서는 설교자가 끊임없이 성령의 특별한 인도하심 아래 있어야 한다. 설교를 하는 상황이 각각 다른데다 오직 하나님만이 언제 어떤 책을 어떤 순서로 다뤄야 할지 아시기 때문이다. 자신이 진정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 있다고 생각하는가?
둘째, 주제별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룰 수 있다. 복음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많지 않은 회중이라면 전도설교를 하듯이 할 수 있고, 말씀의 기초가 잘 다져진 회중에게는 더 큰 '경건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주제들을 설교할 수 있다.
셋째, 신앙고백이나 신조 한 가지를 정해서 순서대로 설교할 수 있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나 39개 신조를 장별로 다룰 수도 있다.
신조의 내용이나 교리에 맞추어 하나님의 말씀을 조합하고 나열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과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읽고, 그 읽은 말씀을 주해하고 설명해서, 한 부분 한 부분이 듣는 사람의 마음에서 설득력 있게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고 역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 같은 경우 지난 50여 년간 한 자리에서 신구약성경을 각 책과 장과 절별로 설교했다. 그렇게 하니 성경 말씀 전체를 수차례나 설교할 수 있었다. 1947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매일 성경 읽기 노트Daily Bible Reading Notes를 기록해 왔고, 그렇게 함으로 수차례에 걸쳐 전체 성경에 대한 주석을 달 수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얻은 가장 큰 소득은, 모으면 최소한 두 질의 주석이 될 만한 많은 소책자와 설교노트들이 아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다양한 교단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회로 섬기게 된 것은 물론, 세계 각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나의 설교 노트들을 보고 탄복하거나 성경 읽기 노트를 문학적·학문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그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 어떤 식으로든 그것들을 읽어 영혼의 양식과 위로를 발견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사람들의 오해를 살 만한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정말 내키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목사들조차도 그들의 일에 대한 기준을 잘못 이해하고 있을 수 있다. 지금 여러분이 읽고 있는 이 글의 내용을 판단하는 기준 역시 심각하게 잘못되었을 수 있다. 그만 하면 알았으니 이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서 현장에서 써먹을 수 있는 실제적인 지침을 가르쳐 줄 때가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아해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고 그들의 필요를 돌아보는 것이다. 양들을 먹이는 것은 물론 그들을 치료하고 돌아보는 모든 것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행하는 하나님의 말씀사역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글을 통해 여러분이 이 사실을 믿게 되면 좋겠다!
부수적인 결과
아직까지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지난 수년간 내가 개인적으로 교인들을 목양하는 일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말씀사역을 통해 사람들의 믿음이 자라감에 따라 그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저절로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말씀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받은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이해하고 그것들을 알아서 해결해 주고 있다. 내가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사람들을 돌아보는 일을 찾아서 하고 있다. 근본적이고 총체적인 말씀 사역이 가져온 가장 눈에 띄는 일 가운데 하나는, 내가 도무지 하나의 회중으로 모을 수 없는 세계 곳곳에 흩어진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돌아보는 신령한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오늘날 스코틀랜드에서는 평신도가 복음을 전하는 일들이 굉장히 강조되고 있다.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 평신도로 하여금 자신의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길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성품으로 자라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되면 상대적으로 아무리 작은 규모의 공동체라 할지라도 거기서 놀랍도록 다양하고 풍성한 성령의 은사가 역사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때로 나는 우리 회중 가운데 의료와 간병과 정신 치료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갓난아기와 어린아이와 비행청소년을 돌아보는 사회복지에 힘쓰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법조인으로, 공무원으로, 교사와 강연자로, 노인을 돌보거나 보건방문을 하는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이들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수가 엄청나게 많아 포기하고 말았다. 앞으로도 알아볼 마음이 없다. 이 땅에서는 그 수를 정확히 알 수 없을 뿐더러 이미 천국에서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정확히 계수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수가 계속해서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효과적인 목회의 토대
그렇다면 사람들의 성품을 변화시키는 목회의 근본 원리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먼저, 목사가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목사는 참으로 그분을 알고, 그분의 거룩함으로 항상 밝히 드러난 삶을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것만이 즐겁고 만족스러운 삶은 물론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둘째(물론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말씀사역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은 아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하나님이 거룩한 열망으로 자신을 전도자와 목사와 말씀을 가르치는 자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셋째, 자신이 무엇을 원하든, 가족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심지어 원수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이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그분이 부르시는 자리가 어디인지 알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에 순종하는 것으로 자신의 유일한 안전과 만족을 삼아야 한다. 물론 하나님께 그분의 자리를 내어드릴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하나님은 온 땅에서 가장 자애롭고 합리적이신 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분은 불순종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넷째, 개 교회의 목사로 부름을 받고 임명을 받았다면 모든 것을 성령께 맡기고, 회중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가치있고 위대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바로 섬기는 일이라는 것을 믿고 즉시 그렇게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삶이다. 이는 우리의 삶의 일부가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다. 물론 다른 요소들도 있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여러분의 삶이다.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일단의 사람들이 모든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이 땅에서 가장 스릴 넘치는 삶이다. 이런 삶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가 한 말을 기억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기도
말씀사역을 위해서는 말씀사역자 본인은 물론, 이 말씀 사역에 함께 참여하는 모든 사람의 기도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회중이 처음부터 알도록 해야 한다. 기도 시간을 정하라. 하지만 그 시간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도하겠다고 하지 말고, 정해진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항상 말씀 사역을 위해 기도할 것이니 누구라도 함께 기도하고 싶은 사람은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하라. 회중은 여러분이 소중히 여기는 일을 하나님도 소중히 여긴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시면 기도 모임은 계속될 뿐 아니라 점점 커져 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의 목회를 움직일 일종의 발전소를 얻게 되는 것이다. 흘러넘치는 기도가 여러분이 가르치는 내용을 선택하고 지속하는 일을 돕고 여러분을 자극하고 채근함은 물론 목회의 힘과 동력을 제공할 것이다. 또한 회중으로 하여금 여러분이 수종드는 말씀 사역에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권위와 엄중함은 물론, 이 일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부드러움과 자애로움 또한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