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건은 심판의 기준입니다!
4. 우리가 경건하게 살아가려면 경건한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경건하게 살아가려면 우리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은혜의 수단인 말씀과 기도를 통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를 힘입어 몸의 소욕을 제어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환경을 경건한 환경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옛 죄로 돌아갈 수 있는 환경이나 옛 죄를 함께 했던 친구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 중 예수님을 믿기 전에 어떤 습관적인 죄에 빠져 살았던 분이 계신다면 그 습관적인 죄를 함께 지었던 친구들을 멀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고린도전서 15:33-34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세상에는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로 친구 따라 마약도 하고 친구 따라 가지 말아야 할 곳도 갑니다. 그래서 친구 따라 지옥에 가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사람은 다 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러분의 경건에 도움이 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여러분의 경건에 걸림돌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경건한 사람은 스스로 경건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경건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반면에 불경건한 친구들은 마귀의 도구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만 불경건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타락시킵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지금 즉시 친구들을 점검해보십시오. 그리하여 경건한 삶을 방해하는 모든 친구들을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려는 죄인을 긍휼히 여기셨고 가까이하셨지만, 회개하지 않으려는 자들, 죄를 탐닉하며 죄를 회개치 않으려는 고집스런 자들은 가까이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단호하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죄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마음도 없고, 죄를 회개하려는 마음도 없으며 악을 즐겨 행하는 친구를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근묵자흑(近墨者黑) 근주자적(近住自適)이란 말을 잘 아시지요? 직역하면 먹을 가까이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검어지고 붉은 빛에 가까이하면 자신도 모르게 붉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해석하면 나쁜 사람을 가까이하면 그 나쁜 버릇에 물들기 쉽고, 사람은 주변 사람에게 영향을 쉽게 받는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22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이 말씀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들과 함께 교제하며,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경건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물론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또는 전도하기 위해서는 믿지 않는 자들과 교제할 필요도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사회적인 관계를 맺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자주 만나서 마음속을 나누는 친한 친구나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가까운 사람들은 믿음이 좋은 사람, 경건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과 믿음의 교제를 나누며 친밀해지면 서로가 서로에게 선한 영향을 주고 믿음의 도전과 격려를 서로 주고 받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교회 안에서 셀모임이나 소모임이 중요합니다. 우리 사랑하는교회 안에는 믿음이 좋으신 성도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과 믿음의 교제를 나누시고 사랑으로 연합되어 있다면 마귀는 쉽게 여러분을 넘어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부담임목사님의 간증을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예수님을 믿고 20대 때 친구가 된 것이 또래 아이들이 아니라, 기도를 열심히 하시는 권사님들이었다고 하셨습니다. 20대 때 한창 세상에 관심이 많을 나이인데 매일 중보기도하시는 권사님들과 함께 기도하러 다니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담임목사님을 젊어서부터 이러한 기도의 사람들과 함께하게 하심으로 영적으로 보호하시고, 돌파하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나 자신을 과신하지 말고 내가 약한 죄의 유혹이 되는 장소나 상황을 피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보고 듣는 것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보고 듣는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특별히 눈을 조심해야 합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말이 있듯이 눈을 통해 욕심이 생깁니다.
특히 요즘은 인터넷이나 SNS가 발달하면서 우리 영혼에 유혹이 되고 미혹이 될 수 있는 세속적인 콘텐츠를 볼 수 있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경건하고 유익한 것만 분별해서 시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20~30대 때 권투 경기를 시청하는데, 한 선수가 가드를 올리지 않으면서 상대 선수가 뻗는 잽을 피하지도 않고 맞았습니다. 그리고 상대 선수의 잽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마도 맷집이 좋아서 가벼운 잽을 계속 허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때 중계하시는 해설자는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저렇게 잽을 자꾸 허용하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반드시 데미지가 쌓입니다. 데미지가 쌓이면 결국 쓰러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가드를 올리고 잽을 허용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몇 라운드 지나자 그 중계하시던 분의 말씀대로 맷집이 좋아 보이던 선수가 잽을 너무 많이 허용한 나머지 다리가 풀리고 휘청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KO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와의 싸움에서는 절대로 자신을 과신하면 안 됩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그럼에도 유혹을 받는 환경과 상황을 피했습니다. 자신을 눈짓으로 동침하자고 계속 유혹하는 보디발의 아내와 같은 곳에 함께 있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셉처럼 항상 조심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몸을 쳐 복종시켜야 합니다. 나 정도 영성이면 유혹에 넘어지지 않겠지?라는 자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조심하지 않으면 유혹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러므로, 여러분의 경건한 환경을 여러분이 구축해나가야 합니다. 영적인 철옹성을 구축해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자주 오랫동안 머무는 장소부터 영적인 환경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유혹받을 수 있는 환경요소를 제거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방에서 주님이 임재하시도록 기도와 찬양을 올려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주님이 임하시면 그 주님을 계속 의식하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을 영위해나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경건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하시면 여러분이 계신 곳의 영적 기류가 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하고 주님과 친밀한 동행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빠져나올 때 천사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창세기 19: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그렇다면, 롯의 아내는 왜 뒤를 돌아보았을까요? 바로, 이전에 즐기던 향락과 쾌락의 도시인 소돔과 고모라 도시에 대한 미련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소돔과 고모라에서 몸은 위치적으로는 빠져나왔으나 마음은 빠져나오지 못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큽니다. 우리가 몸은 교회를 오더라도 마음은 세상과 벗된 삶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교회 생활을 하면서도 아직도 우리가 세상과 벗이 되어,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예수님의 신부가 아니라 간음한 여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야고보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야고보서 4: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니라."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즉, 하나님과 돈을 둘 다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쾌락을 둘 다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벗이 되려면 먼저 두 마음을 회개하고 성결케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로 마음을 정하고 일편단심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경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야고보서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여기서 야고보서 기자는 참된 경건의 조건을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으로 국한하지 않고 두 번째 조건을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채영삼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기서 '세속'은 원래 '세상'이지만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주권과 의지, 그분의 구원과 심판의 섭리조차 아랑곳하지 않는, 영적으로 하나님께 반역적인 세상의 총체를 가리킨다.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킨다는 표현은 종종 오해를 불러 일으켜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을 교회와 세상이라는 영역으로 양분시켜놓고, 세상을 위치적으로만 생각하여 잘못된 금욕주의에 떨어지는 경우가 생긴다. 그렇지 않다. 세상 한복판에서도, 회사나 학교, 정치나 경제적 활동을 하는 그 한복판에서도 참된 경건을 따라 살 수 있다.
반대로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헛된 경건을 따라 살 수 있다. 차라리 세상보다는 세속이라는 표현이 나은 이유이다. 교회도 얼마든지 세속적이 될 수 있고, 세상 한복판에서도 얼마든지 경건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경건의 문제는 위치적으로 내가 세상에 있지 않고 교회에 있음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 생활을 성실히 하면서도 세상의 더러운 것과 악한 것에서 자기 마음을 지키지 못했다면 그것은 참된 경건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의 삶으로 나아가려면 우리의 마음이 진짜 회개하고 예수님을 임금과 구주로 영접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복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경건하게 살아갈 수 있고 그런 사람만이 궁극적인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세상 끝 날에, 즉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가 임하는 날에 경건치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큰 화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갈며 슬피 우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날이 이르기 전에 반드시 참된 회개와 믿음을 통해 참된 경건한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시는 날 그날에 영원한 영광과 존귀와 칭찬을 주님께 받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