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에 관한 시모음 3)
장맛비가 내리던 저녁* /이상국
비가 오면
짐승들은 집에서
우두커니 세상을 바라보고
공사판 인부들도 집으로 간다
그것은 지구가 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비가 오면
마당의 빨래를 걷고
어머니를 기다리던 시절이 있었고
강을 건너던 날 낯선 마을의 불빛과
모르는 사람들의 수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비는 안 가본 데가 없다
빗소리에 더러 소식을 전하던 그대는
어디서 세상을 건너는지
비가 온다
비가 오면 낡은 집 어디에선가
물 새는 소리를 들으며
나의 시도 그만 쉬어야 한다
* 스져춘의 소설 제목.
장맛비의 광란 /古松 정종명
샘통 난 시엄니 얼굴같이 뽀로통
찌푸린 얼굴엔 긴장감이 돌고
무겁게 내려앉은 까만 밤처럼
어둠이 휩쓴 하늘이 토하는 울분
참고 참아온 설움 쏟아 내는
넋두리 끝없는 통곡이 부서진다
달랠 수 없는 광란의 분노일까
진종일이 짧다고 밤 이슥도록
강을 이룬 개울이 춤춘다
속이 더부룩하도록 먹은 대지
더 이상 삼키지 못해 게워 내고
여기저기 급조된 폭포수 낙수의
아름다움 뒤 감춘 손톱에 찢긴 상처.
장맛비 /임재화
어젯밤도 장맛비가 내렸는데
이른 아침부터 먼 산 능선 위에서
먹장구름이 또다시 몰려오더니
울타리 담장에 곱게 피어있는
별처럼 노란 호박꽃에도
쉴 틈 없이 장대비가 내립니다.
아직도 눈물이 마르지 못하였는지
온종일 내리고 있는 장맛비는
한없이 서럽게 울고 있습니다.
장맛비 /靑心 장광규
날마다 비가 내려도
짜증 부리지 마라
아침마다 우산을 챙겨야 한다고
귀찮아하지 마라
뜨거운 나라 베트남에는
일 년 중 반년은 우기로 비가 내린다
오랫동안 전쟁을 할 때에도
논밭에는 온갖 곡식이 자라고
들판에는 과일이 풍성하게 열렸다
아프리카에는 비가 내리지 않아
물이며 먹을 것이 부족해
굶주림과 질병에 허덕이고 있다
비는 번영과 축복의 근원
새벽에 찾아오더라도
바짓가랑이가 젖더라도
오는 비를 반갑게 맞으며
물을 소중하게 여길 일이다
장맛비 /이고은
어김없이 찾아온 너를 사뿐히 반긴다
이른 새벽에 서둘러 왔나 보다
가뿐하게 내리는 네 모습에 고요히 머문다
숱한 사연들을 내게 들려주고 싶었던 걸까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너를 등지고
달걀부침 작은 숟가락으로 동강동강 떠서 싹 비우고
녹차 한 모금을 아주 잠깐
입안에 오물오물 머무르게 하다가
상념과 함께 훌쩍 목젖으로 넘긴다
너는 오랫동안 내 안에 머물러
눅눅한 내 마음 푹 적시고 가려나 보다
뽀송뽀송한 해가 기웃기웃할 때까지.
장마비 줄기에 /오보영
줄줄
쏟
아
지
는
장마
비 줄기에
머릿 속 모두를
씻어내고 싶다
가슴 속 모두를
퍼 내리고 싶다
장맛비 /김기원
장마라서
같은 하늘 아래서도
저쪽 하늘은 비가 온다지만
이쪽 나 사는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낀 그런 비가 장마 비인가
곳곳에 간간히 뿌려 지는 비
이런 날에
막걸리와 파전 향기에
가야금 소릭 비 소리인가
그토록 먼 옛날부터
농민 가슴을 애태웠나
나 오늘 여기까지 왔네
너를 만나려고 산을 돌고
여러 마을 지나
그토록 먼 길을 목마른 대지에
너를 만나 쉬어 가리라
장맛비 /정약용(1762-1836)
장맛비 하염없이 내려
해도 뜨지 않고 구름도 걷히질 않네
보리는 싹이 트고 밀은 쓰러지는데
돌배와 산앵두는 살이 오르네
시골 아이들 따 먹으면 뼛속까지 시큼한데
쓰러져 누운 보리는 누가 알아주나
장맛비 오는 날 대형 수족관 /정민기
먹구름이 분주히 움직이며
지상(地上)에
대형 수족관을 놓는다
송사리 떼가 헤엄치는
답사(答辭) 없는 송사(送辭)
뼈에 붙은 살점 하나 건질 수 있다면
비늘로 뒤덮인 회색빛의 물고기가 되리
먹구름 수십 척
한데 정박하여 작살이라도 던지면
송사리가 헤엄치는 속도는 여울보다도
울음의 흐름이 더 슬프다
수많은 작살 촉이 압박하는 온종일,
나는 조금씩 살점을 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빗속을 뚫는
어두운색의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재빠른 송사리를 노려본다
불어난 계곡에서 송사리 떼가
탈출한 것은 그날이다
무거운 짐짝 같은 저 먹구름을
등에 멘 하늘
지금쯤 대형 수족관에
송사리 떼를 넣을 때도 됐는데
장맛비가 내리면 /홍수희
한 사나흘
나도 물이 되어볼란다
내리는 비만 탓하지 않고
나도 물이 되어볼란다
독방 속에 갇힌 수인(囚人)처럼
단단한 내 마음의 벽안에 갇혀
벽지만 후벼파던 결별의 세월
아, 이제사 나도 물이 되어볼란다
제 모양만 고집하지 않고
담기는 대로 네가 되어주는
자유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 이제사 나도 바다로 가볼란다
장맛비 /법 륜
이제나 저제니
비가 오려는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화당산 정상에서 내리던 비
이내 뇌성벽력과 함께
포도(鋪道)를 적시고
이내 절 도량에 내려 앉았다
마치 하늘이 조화를 부리듯
더 낮게 앉은 사물을 보자
비는 골을 지나
더 힘차게 물결지어 지나간다
굵은 빗줄기 속에서
조사각의 민보살님
다정다감한 목소리
어느새 목탁되어 영혼을 부른다
장맛비 /태안 임석순
맑았던 하늘에 먹구름
북쪽의 고 씨가 내려와
남쪽의 저 씨를 만나니
우르르 쾅쾅 쾅 싸움질.
하늘의 뜻이 있으려니
이 땅에 사랑을 나누어
주려니 믿고 믿었건만
믿은 내가 바보였구나.
장맛비 /김덕성
하염없이 쏟어진다
언제는 그렇게 인색하더니
이젠 나를 닮았는가
지나치게 성심을 쓰는고
누구의 눈물이 그리 많은 건가
세상은 다 그런 건데
참으며 살아가야지
안 그런가
이제 나도 자유롭게 해 주렴
갇혀있는 몸을
외로움이 스며드는 밤
깊어 가는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야속하게
장맛비는 마냥 내린다
장맛비의 광란 /古松 정종명
샘통 난 시엄니 얼굴같이 뽀로통
찌푸린 얼굴엔 긴장감이 돌고
무겁게 내려앉은 까만 밤처럼
어둠이 휩쓴 하늘이 토하는 울분
참고 참아온 설움 쏟아 내는
넋두리 끝없는 통곡이 부서진다
달랠 수 없는 광란의 분노일까
진종일이 짧다고 밤 이슥도록
강을 이룬 개울이 춤춘다
속이 더부룩하도록 먹은 대지
더 이상 삼키지 못해 게워 내고
여기저기 급조된 폭포수 낙수의
아름다움 뒤 감춘 손톱에 찢긴 상처.
장맛비 사랑 /오보영
소문대로
행여
앞길 가로막는 못된 기운 때문에
사랑하는 당신 못 오시면 어쩌나
거친 방해 헤쳐 나오느라 지쳐
너무 늦게 당도하시면 어쩌나
애타하면서
그리움에
바싹 타들어가는 입술 제대로 침도 못 축이고
메말라 휘청거리는 몸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발 동동 구르며
그저
맘만 졸이고 있었는데..
때에 맞춰 당신
변함없는 모습으로 돌아왔네요
나를 위해서
손꼽아 기다리는 모두를 위해서
촉촉한 사랑
가득
가슴에 품어 안고 오시었네요
장마비 내리는 날이면 /남경식
입영통지 받고 군에 입대하던 날
한여름의 장마비는 그리도 속절없이 쏟아져
오직 자식 걱정에 노심초사하시던 어머니를
하염없이 실신시켰다
어렵고 고단하던 일제시대를 거쳐
광복 후 혼란한 세상에
오로지 남편만 의지한 채 살아온 어머니는
한국전쟁에 남편을 떠나보내고
들려오는 마을의 전사자 소식에 가슴 철렁하며
결국엔 시동생의 전사소식까지도 접한다
떠오르는 두려운 생각은 남편의 안위였다
인민군의 남하는 아버지의 고향에까지 미치어
어머니는 시댁 식구들과 함께 피난을 떠나야 했고
다시 돌아온 시댁엔 어린 누나들의 죽음이 기다리고
전쟁은 끝났으나 아버지는 부상을 입은 채 돌아오셨다
살기 어려운 시절인지라
할머니의 생각을 따라
아버지가 완쾌되신 후 숟가락 하나만 챙겨 고향을 떠나
아버지 외가가 있는 오산에 정착했다
이 곳에서 내가 태어나고 동생들이 태어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렇게 이곳에 정착했다
그리고 자식들의 고향이 되었다
이제 그녀의 아들이 장성하여 군에가는 것이다
남편을 보냈던 것처럼
이제는 자식을 보내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평화시대에도 어머니는
한국전쟁의 두려움이 다시 생각나
소중한 아들이 걱정인 것이다
비는 하루종일 내리고
어머니의 슬픔을 뒤로하고
나는 기차에 올라 입대했다
시간은 흐르고
다시 어머니를 뵙게 되었을 땐
뇌경색으로 투병하시는 어머니의 가련한 모습이었다
그 후로도 아버지를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시고
십여년 더 고생하시다가 아버지를 따라
당신들의 유택에서 해후하셨다
장마비 오는 날이면 가슴저미게
어머니가 생각나는 이유이다.
장맛비 눈물 /未松 오보영
실컷 울으렴
맘껏 소리 내어
쏟아 부으렴
맺힌 응어리
다
풀릴 때까지
답답한 가슴
뻥
뚫릴 때까지
막힘없이
줄줄
흘러내리렴
칠월 장마비 /보하 이문희
하룻밤을 지새고 나면 어제가
한달을 지나고 나면 지나간 달이
한 해가 가고 나면 지난 한 해가
후회 스럽지 않는때가 없어라.
깡마른 인성의 부덕함으로
불안한 열망의 걸음 걸음이
단비를 만날 수 없는 까닭은
그립고 텅 빈 가슴 한 복판
거센 회오리바람. 휘파람 소리.
천둥번개가 칼바람 휘둘러
장대비가 동이비로 퍼부어댄들
채워지지 않는 마음 한 구석
스무살 꽃다운 외동아들아.
죽음을 넘나드는 마지막이냐
핏 멍이 들어서 울지도 못해
혼절에서 깨어나 몸부림으로
가련한 어머니. 슬픈 엄니를 ㅡ
차디 찬 땅 바닥에 뉘이시고
이제와. 온 밤이 하얗게 새도록
목을 놓아 통곡하는 불효자
애절한 목소리 듣기라도 하시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