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주(州)와 군(郡)
○ 전라도 : 동북쪽은 충청ㆍ경상 두 도와 경계를 이루며, 동쪽은 경상도와 경계를 이루고, 동남쪽은 경상도와 큰 바다로 경계를 이루며, 남쪽과 서남쪽 및 서쪽은 모두 큰 바다이며, 서북쪽은 큰 바다 및 충청도와 경계를 이루고, 북쪽은 충청도와 경계를 이룬다. 56고을 좌도 23고을, 우도 33고을 이니, 본래 변한(卞韓) 땅으로서 백제의 소유였으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쳐서 멸하고 나누어서 5도독부를 두었다. 당 나라 군사가 본국으로 돌아가자, 신라가 그 땅을 모두 병합해서 뒤에 전주ㆍ무주(武州) 두 주를 두었다. 그 말기에는 견훤과 궁예가 나누어 차지했는데, 고려 태조가 신검(神劍)을 멸하였다. 성종이 강남도(江南道)ㆍ해양도(海陽道)를 두었으나, 현종이 합쳐서 전라도를 만들었는데 본조에서도 이를 그대로 두었다.
○ 좌도 능천(綾川) : 백제 때의 이릉부리군(?陵夫里郡)이니, 또는 죽수부리(竹樹夫里) 인부리(仁夫里)라고도 한다. 라고도 한다. 신라 때 능성(陵城)으로 고쳤고, 고려 때 나주에 예속시켰다. 태종 병신년(1416, 태종 16)에 화순현과 합쳐서 순성(順城)이라고 일컬었으나 조금 있다가 도로 회복했다. 인조 임신년(1632, 인조 10)에 능주목(綾州牧)으로 승격시켰다. 왕비의 고향이다. ○ 연주(連珠)라고도 한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58리이다.
○ 남원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고룡군(古龍郡)이니, 뒤에 한 나라 대방군(帶方郡)이 되었고, 조위(曹魏) 때 남대방(南帶方)이 되었으며, 신라 때 소경(小京)을 두고 남원으로 고쳤다. ○ 용성(龍城)ㆍ일신(一新)이라고도 한다. ○ 4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5리이다. ○ 유곡(楡曲)은 속현이다. 백제 때의 구차례현(仇次禮縣)이니 지금의 구례(求禮)이다. 거령(居寧)은 폐현이다. 거령이라고도 하니, 백제 때의 거사물현(居斯勿縣)이요, 신라 때의 청웅(靑雄)인데, 별호는 영성(寧城)이다. 유인궤성(劉仁軌城) 소정방이 백제를 멸하니 당(唐)에서 유인궤에게 조서를 내려 검교대방자사(檢校帶方刺使) 겸 도독(都督)으로 임명하여 읍내 이전(里廛)에 정전(井田)을 본받아 9구(區)를 만들었으니 그 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 장흥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오차현(烏次縣)이니 신라 때 오아(烏兒)로 고쳤고, 고려 때 정안(定安)으로 고쳤다가 다시 장흥부(長興府)로 고치고,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시켰으나 조금 후에 이전대로 하였다. 태종 계사년에 관아를 수령(遂寧)으로 옮겼다. ○ 정주(定州)ㆍ관산(冠山)이라고도 한다. ○ 15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6리이다. ○ 회령(會寧)은 폐현이며, 백제 때의 마사량현(馬斯良縣)이니 신라 때 벌로(伐勞)로 고쳤다. 수령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이니, 신라 때 마읍(馬邑)으로 고쳤다. ○ 장택(長澤)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계천현(季川縣)이니, 신라 때 계수(季水)로 고쳤다. ○ 옛날 장흥은 천관산(天冠山) 남쪽에 있었다.
○ 순천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염평군(?平郡)이니, 사평(沙平)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승평(昇平)이라 고쳤고, 고려 때는 승주(昇州), 연해군(?海軍)으로 고쳤는데, 승화(昇化)라고도 한다. 뒤에 순천부로 고쳤다. ○ 평양(平陽)이라고도 한다. ○ 2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96리이다. ○ 여수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원촌현(猿村縣)이니 신라 때 해읍(海邑)으로 고쳤다. 돌산(突山)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돌산(突山)이니, 신라 때 여산(盧山)으로 고쳤다. 부유(富有)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둔지현(遁支縣)이다.
○ 담양 : 백제 때의 추자혜군(秋子兮郡)이니, 신라 때 추성(秋成)으로 고쳤고, 고려 때 담주(潭州)로 고쳤다가 뒤에 담양으로 고쳤으며, 정종이 부(府)로 승격시켰다. 중궁 김씨의 외향(外鄕)이다. ○ 12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76리이다.
○ 무주(茂朱) : 무풍현(茂?縣)인데 신라 때의 무산현(茂山縣)이니, 무풍으로 고쳤고, 고려 때 진례현(進禮縣)에 예속시켰다. 주계(朱溪)는 백제 때의 적천현(赤川縣)이니, 신라 때 단천(丹川)으로 고쳐서 진례현에 예속시켰는데, 고려 때 주계(朱溪)로 고쳤고, 공양왕이 무풍과 병합시켰다. 태종 갑오년에 무주현으로 고쳤고, 현종 갑인년(1674, 현종 15)에 부(府)로 승격시켰다. ○ 12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5백 26리이다.
○ 보성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복홀군(伏忽郡)이니, 신라 때 보성으로 고쳤고, 고려 때 패주(貝州)로 고쳤으나 조금 후에 이전대로 하였다. ○ 산양(山陽)이라고도 한다. ○ 1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51리이다. ○ 조양(兆陽)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동로현(冬老縣)이다. 복성(福城)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파부리군(波夫里郡)이니, 신라 때 부리(夫里)로 고쳤다.
○ 낙안(樂安)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분차군(分嵯郡)이니, 분사(分沙)라고도 한다. 신라 때 분령(分嶺)으로 고쳤고, 고려 때 낙안으로 고쳤는데, 이는 양악(陽岳)이라고도 한다. ○ 부차(浮?)ㆍ낙천(洛川)이라고도 한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86리이다.
○ 순창(淳昌) : 백제 때의 도실군(道實郡)이니, 신라 때 순화(淳化)라 고쳤고, 고려 때 순창으로 고쳤다. ○ 오산(烏山)ㆍ옥천(玉川)이라고도 한다. ○ 1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6리이다. ○ 복흥(福興)은 폐현이며, 적성(赤城)도 폐현이다. 백제 때 역평현(礫坪縣)이다.
○ 창평(昌平) : 백제 때의 굴지현(屈支縣)이니, 신라 때 석양(析陽)으로 고쳤고, 고려 때 창평으로 고쳤는데, 명평(鳴平)이라고도 한다. 성종 5년 이 이를 없애고, 광주에 예속시켰다가 10년에 이전대로 하였다. ○ 명양(鳴陽)이라고도 한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6리이다.
○ 용담(龍潭) : 백제 때의 물거현(勿居縣)이니, 신라 때 청거(淸渠)로 고쳤고, 고려 때 용담으로 고쳤다. ○ 옥천(玉川)이라고도 한다. ○ 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5백 36리이다.
○ 광양(光陽)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마로현(馬老縣)이니, 신라 때 희양(晞陽)으로 고쳤고, 고려 때 광양으로 고쳤다. ○ 12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20리이다.
○ 강진 : 성이 있다. 도강현(道康縣)은 백제 때의 도무군(道武郡)이니 신라 때 양무(陽武)로, 고려 때 도강현으로 고쳤다. 탐진현(耽津縣)은 백제 때의 동음현(冬音縣)이니, 신라 때 탐진으로 고쳤다. 태종 정유년(1417, 태종 17)에 병영을 도강 옛 관아로 옮기고, 두 현을 합쳐서 강진을 만들었다. ○ 금릉(金陵)ㆍ오산(鰲山)이라고 한다. ○ 2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76리이다.
○ 옥과(玉果) : 백제 때의 과지현(果支縣)이니, 과혜(果兮)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옥과로 고쳤다. ○ 설산(雪山)이라고도 한다. ○ 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66리이다.
○ 구례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구차례현(仇次禮縣)이니, 신라 때 이름을 구례라 고쳤고, 고려 초기에 남원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현을 두었다. 중종 경오년에 현을 폐지하고 유곡부곡(楡谷部曲)을 만들어 다시 남원에 예속시켰다. 고을에 사는 백성 배목인(裵目仁)ㆍ문빈(文彬) 등이 참언으로 여러 사람을 꾀어 모아서 반역할 것을 모의하다가 죽음을 당했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66리이다. ○ 《여지승람》에는 남원의 속현에 들어 있다.
○ 곡성(谷城) : 백제 때의 욕내군(欲乃郡)이니, 신라 때 곡성으로 고쳤고, 고려 때 현을 두었다. ○ 욕천(浴川)은 선조 정유년에 없앴다가 광해군 기유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76리이다.
○ 운봉(雲峯) : 신라 때의 모산현(母山縣)이니, 경덕(景德) 또는 아영성(阿英城) 아막(阿莫)이라고도 한다. 이라고도 하는데, 뒤에 운봉으로 고쳤다. 고려 때 남원에 예속시키고 태조 임신년에 현을 두었는데, 선조 경자년에 없앴다가 광해군 신해년에 다시 두었다. ○ 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86리이다.
○ 임실 : 백제 때의 임실군(任實郡)이니, 신라 때 이를 그대로 두었고, 고려 때 현을 두었다. ○ 운수(雲水)라고도 한다. ○ 1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5백 82리이다.
○ 구고(九皐)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돌평현(?坪縣)이니 누평(淚坪)이라고도 한다.
○ 장수(長水) : 백제 때의 우평현(雨坪縣)이니, 통일 신라 때 고택(高澤)으로 고쳤고, 고려 때 장수로 고쳐서 장계(長溪)까지 겸해서 맡겼다. 태조 임신년에 다시 나누어 장수라고 하였다. ○ 장천(長川)이라고도 한다. ○ 7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68리이다. ○ 장계는 속현이다. 백제 때의 백해군(百海郡)이니, 신라 때 벽계(璧溪)로 고쳤는데, 따로 장세(長世)라고도 한다.
○ 진안(鎭安) : 백제 때의 난진아현(難珍阿峴)이다. 또는 월량(月良)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진안으로 고쳤다. ○ 월랑(越浪) 월량(月良)이 이렇게 전해졌다. ○ 13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5백 86리이다. ○ 마령(馬靈)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마돌현(馬突縣)이니, 마진(馬珍)이라고도 하고, 마등량(馬等良)이라고도 하는데 별명은 영천군(?川郡)이다.
○ 동복(同福) : 백제 때의 두부지현(豆夫只縣)이니, 신라 때 동복으로 고쳤다. 태조 갑술년에 화순(和順)까지 겸하여 정무를 감독하게 했으며, 태종 을유년(1405, 태종 5)에 화순과 합쳐서 복순(福順)이라 하였고, 병신년에 다시 이전대로 하였다. ○ 구성(龜城)ㆍ옹성(甕城)ㆍ복천(福川)ㆍ나복(蘿?)이라고도 한다. ○ 1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26리이다. ○ 수촌(水村)은 폐현(廢縣)이고, 압곡(鴨谷)도 폐현이다.
○ 화순(和順) : 백제 때의 잉리아현(仍利阿縣)이니, 신라 때 여미(汝湄)로 고쳤는데, 여빈(汝濱)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 화순으로 고쳤고, 뒤에 남평(南平)을 겸해서 맡겼다. 태조 갑술년에 나누어서 두 현을 만들었고, 태종 때 동복(同福)과 합쳤다가 다시 동복은 분리하고 능성(綾城)과 합하여 순성(順城)이라 일컬었는데, 얼마 후에 이전대로 하였다. 선조 갑오년에 폐하였다가 광해군 신해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해빈(海濱)ㆍ오성(烏城)ㆍ산양(山陽)이라고도 한다. ○ 3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53리이다.
○ 흥양(興陽) : 본래 장흥부(長興府) 고이부곡(高伊部曲) 방언(方言)으로는 묘(猫)라 한다. 이니, 고려 때 고흥현(高興縣)으로 승격시켰고, 태조 을해년에 왜구의 침입으로 인하여 진을 설치하였다. 세종 때에 첨사(僉使)로 고쳤으나 곧 흥양현으로 고쳤다. ○ 고양(高陽)이라고도 한다. 13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96리이다. ○ 남양(南陽)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조조례현(助助禮縣)이니, 신라 때 충렬(忠烈)로 고쳤다. 태강(泰江)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비사현(比史縣)이니, 신라 때 백주(柏舟)로 고쳤다. ○ 풍안(?安)도 폐현이다. 보성군 식촌부곡(食村部曲)이니, 고려 충선왕 때에 현으로 승격시켰다. 도화(道化)도 폐현이다. 보성군 타주부곡(他州部曲)이다. 두원(荳原)도 폐현이다. 백제 때 두혜현(豆?縣)이니, 신라 때 강원(薑原)으로 고쳤다. 도양(道陽)도 폐현이다. 장흥부 도량도부곡(道良道部曲)이니, 세종조 때 병합하여 목장을 만들었다. 고흥(高興)도 폐현이다. 묘부곡(猫部曲)이니 고려 때 묘부곡 사람이 조정에 벼슬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참언이 있었다.
○ 우도 전주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완산(完山)이니, 비사성(比斯城) 혹은 비자화(比自火)라고도 한다. 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 완산주를 두었고, 뒤에 전주로 고쳤다. 견훤이 도읍을 세우고 후백제라고 일컬었다. 고려 태조가 신검(神劍)을 쳐서 평정한 후에 안남(安南)으로 고쳤다. 뒤에 또 승화(承化)라 부르고 순의군(順義軍)이라고도 하였다. 태조 임신년에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시켰고, 태종 계미년(1403, 태종 3)에 전주 부윤으로 고쳤다. ○ 진성(甄城)이라고도 한다. ○ 36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6리이다. ○ 우주(紆州)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우소저현(于召渚縣)이다. 이성(伊城)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두이현(豆伊縣)이니, 왕무(往武)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에 두성(杜城)으로 고쳤다. 이성(利城)은 폐현이다. 백제 때 내리아현(乃利阿縣)이다.
○ 나주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발라군(發羅郡)이니, 통의(通義)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금산군(錦山郡)으로 고쳤다. 금성이라고도 한다. 고려 태조가 수군을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여 점령하고, 나주로 고쳤으며, 뒤에 진해군(鎭海軍)이라 일컬었고, 목(牧)으로 승격시켰다. ○ 3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가 7백 42리이다. ○ 영산(榮山)은 폐현이다. 흑산도 사람이 육지로 나와 남포(南浦)에 살아서 영산현(榮山縣)이라 일컬었는데, 공민왕이 승격시켜 군을 만들었다. 압해(壓海)는 폐현이다. 압해(狎海)라고도 하는데 바다 가운데의 섬이다. 백제 때의 아차산군(阿次山郡)이다. 여황(艅?)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수천현(水川縣)이니, 수입이(水入伊)라고도 한다. 회진(會津)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두혜현(豆?縣)이다. 안로(安老)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아로곡현(阿老谷縣)이니, 신라 때 야로(野老)로 고쳤다. 복룡(伏龍)은 폐현이다. 배룡(杯龍)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용산(龍山)으로 고쳤다. 반남(潘南)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반내부리현(半奈夫里縣)이다. 장산(長山)은 폐현이다. 안릉(安陵)이라고도 하는데 바다 가운데의 섬이다. 백제 때의 거지산현(居知山縣)인데, 신라 때 안파(安波)로 고쳤다.
○ 제주 : 성이 있다. 본래 탐라국이니, 혹은 탁라(?羅)라고도 한다. 신라 때의 이름은 성주(星州)라고 하는데, 고려 때 고쳐서 군을 만들었다가 현으로 낮추었다. 충렬왕 때에 원(元) 나라에서 말을 기르는 목장을 만들었으나 조금 후에 도로 고쳐서 제주목(濟州牧)으로 하였다. 태종 임오년에 좌우도지관(左右都知管)을 두었고, 세종 을축년에 상부진무(上副鎭撫)로 고쳤으며, 세조 병술년에 절제사를 두었고, 예종 기축년에 목사(牧使)로 고쳤다. ○ 탐탁라(眈?羅)ㆍ동영주(東瀛州)라고도 한다. ○ 1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육로(陸路)로 9백 36리이고, 수로(水路)로 9백 70리이다. ○ 고내현(高內縣)ㆍ애월현(涯月縣)ㆍ곽지현(郭支縣)ㆍ귀덕현(歸德縣)ㆍ명월현(明月縣)ㆍ신촌현(新村縣)ㆍ함덕현(咸德縣)ㆍ금령현(金寧縣) 이상의 각현(各縣)은 모두 직촌(直村)이다.
○ 광주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무진주(武珍州)이니, 노지(奴只)라고도 한다. 신라 때 무주(武州)로 고쳤고, 고려 태조가 광주로 고쳤으며, 뒤에 해양현(海陽縣)으로 낮추었다가 다시 익주(翼州)로 승격시켰다. 또 화평부(化平府)로 낮추었다가 무진부(茂珍府) 혜종(惠宗)의 휘(諱)는 무(武)이다. 로 고쳤고, 뒤에 광주라 일컬었다. 세종 경술년에 무진군으로 낮추었고, 문종 신미년에 이전대로 하였으며, 성종 기유년에 낮추어 광산현(光山縣)을 만들었다가 연산군 신유년에 이전대로 하였다. ○ 익양(翼陽)ㆍ서석(瑞石)이라고도 한다. ○ 40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25리이다.
○ 여산(礪山) : 여량현(礪良縣) 또는 양(陽)이라 한다. 은 백제 때의 지량초현(只良肖縣)이니, 신라 때 여량(礪良)으로 고쳤고, 고려 때 전주에 예속시키고 낭산(朗山)까지 겸하여 맡았다. 낭산현은 백제 때의 알야산현(閼也山縣)이니, 신라 때 야산(野山)으로 고쳤다. 정종 경진년에 2현의 이름을 떼어다가 여산이라고 일컬었다. 세종 병진년(1436, 세종 18)에 군으로 승격시켰고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외향(外鄕)이다. 충청도로 이속되었다가 조금 후에 도로 전라도에 속했으며, 숙종 기묘년에 부사로 승격시켰다. ○ 호산(壺山)이라고도 한다. ○ 11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6리이다. ○ 낭산(朗山)은 폐현이다. 군(郡) 서쪽 토성(土城)의 옛터이다.
○ 장성 : 백제 때의 고시이현(古尸伊縣)이니, 신라 때 압성군(押城郡)으로 고쳤고, 고려 때 장성으로 고쳤으며, 본조에서 현으로 고쳤다. 선조 정유년에 진원(珍原)과 합쳤고, 효종 을미년(1655, 효종 6)에 부로 승격시켰다. ○ 오산(鰲山)ㆍ이성(伊城)이라고도 한다. ○ 15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66리이다. ○ 진원(珍原)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구사진혜현(丘斯珍兮縣)이니, 신라 때 진원(珍原)으로 고쳤는데, 구진(丘珍)이라고도 한다.
○ 익산 : 본래 마한국(馬韓國)이니, 온조왕(溫祚王)이 땅을 병합해서 이름을 금마저(金馬渚)라 하였고, 신라 때 금마군(金馬郡)으로 고쳤다. 고려 때 익주(益州)로 승격시켰으며, 태종 계사년에 익산군으로 고쳤다. ○ 10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56리이다.
○ 고부(古阜)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고사부리현(古沙夫里縣)이니, 신라 때 고부로 고쳤고, 고려 태조 때 영주(瀛州)라 일컬었다. 뒤에 안남(安南)으로 고쳐서 영광과 합쳤다가 조금 후에 다시 이전대로 하였다. ○ 1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가 6백 6리이다.
○ 영암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월내군(月奈郡)이니, 신라 때 영암으로 고쳤고, 고려 때 낭주(郞州)ㆍ안남(安南)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낮추었다. ○ 낭산(郞山)이라고도 한다. ○ 9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22리이다. ○ 곤미(昆湄)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고미현(古彌縣)이다.
○ 영광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무시이부(武尸伊部)이니, 신라 때 무령(武靈)으로 고쳤고, 고려 때 영광으로 고쳤다. ○ 오성(筽城)ㆍ정주(靜州)라고도 한다. ○ 28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99리이다. ○ 삼계(森溪)는 폐현이며, 백제 때의 소비혜현(所非兮縣)이니, 소을부(所乙夫)라고도 한다. 임치(臨淄)도 폐현이다. 백제 때의 고록지현(古祿只縣)이니, 신라 때 염해(鹽海)로 고쳤다. 육창향(陸昌鄕) 백제 때의 아로현(阿老縣)이니, 갈초(葛草)ㆍ가위(加位)라고도 하는데, 신라 때 갈도현(碣島縣)으로 고쳤다.
○ 진도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인진도군(因珍島郡)이니, 신라 때 진도로 고쳤다. 태종 기축년에 해남현과 합하여 해진군(海珍郡)으로 하였다가 세종조에 이전대로 하였다. ○ 옥주(沃州)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1천 20리이다. ○ 가흥현(嘉興縣) 백제 때의 도산현(徒山縣)이니 원산(猿山)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뇌산(牢山)이라고 고쳤다. 이 있다. 임회(臨淮)는 폐현이다. 백제 때 여기에 구리현(九里縣)을 두었고 신라 때 첨탐(瞻眈)으로 고쳤다.
○ 금산(錦山) :백제 때의 진내군(進乃郡) 진잉을(進仍乙)이라고도 한다. 이니 신라 때 진례(進禮)로 고쳤고, 고려 때 금주(錦州)로 올렸다. 태종 계사년에 금산군으로 고쳤다. ○ 경양(景陽)ㆍ금계(錦溪)라고도 부른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86리이다. ○ 부리(富利)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두시이현(豆尸伊縣)ㆍ부시이(富尸伊)라고도 한다. 신라 때 이성(伊城)으로 고쳤다.
○ 진산(珍山) : 백제 때의 진동현(珍同縣)이니 신라 때에도 그대로다. 태조 때 진주로 승격시켰고 왕실의 탯줄을 안치하였다. 태종 때에 진산군으로 고쳤다. ○ 옥계(玉溪)라고도 부른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56리이다.
○ 김제(金堤) : 백제 때의 벽골군(碧骨郡)이니 신라 때 김제라고 고쳤다. 고려 때 현으로 하였으나 태종 계미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 ○ 23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41리이다. ○ 회원고현(會原古縣)이라고도 부른다. ○ 평고(平皐)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수동산현(首冬山縣)이다.
○ 임피(臨陂)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시산군(屎山郡)이니 피산(陂山)ㆍ흔문(?文)ㆍ소도(所島)ㆍ실조출(失鳥出)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임피라고 고쳤다. 고려 때 군을 현으로 낮추었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96리이다.
○ 만경(萬頃)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두내산현(豆乃山縣)을 만경으로 고쳤다. 광해군 경신년에 고을을 없앴다가 인조 정축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두산(杜山)이라고도 부른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6리이다. ○ 부윤(富潤)은 폐현이다. 백제 때의 무근촌현(武斤村縣)이니, 신라 때 무읍(武邑)으로 고쳤다.
○ 금구(金溝) : 백제 때의 구지지산현(仇知只山縣)이니, 신라 때 금구라고 고쳤다. ○ 봉산(鳳山)ㆍ금계(金鷄)라고도 부른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26리이다. ○ 거야(巨野)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야서이현(也西伊縣)이니, 신라 때 야서(野西)로 고쳤다. 역양(?陽)도 폐현이다.
○ 용안(龍安) : 고려 때 함열현(咸悅縣)의 도내산은소(道乃山銀所) 창산소(蒼山所)라고도 한다. 이니 충숙왕(忠肅王)이 용안현으로 승격시켰다. 태종 기축년(1409, 태종 9)에 함열과 합하여 안열(安悅)이라고 부르다가 병신년에 이전대로 회복시켰다. ○ 칠성(七城)이라고도 부른다. ○ 3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8리이다. ○ 풍제(?堤)는 폐현이다. 풍성(?城)이라고도 한다. 공양왕 때에 속현이 되었다.
○ 함열(咸悅) : 백제 때의 감물아현(甘勿阿縣)이니, 신라 때 함열로 고쳤다. 태종 기축년에 용안(龍安)과 합하였다가 곧 다시 이전대로 고쳤다. ○ 함라(咸羅)라고도 부른다. 9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66리이다.
○ 부안(扶安) : 성이 있다. 부령현(扶寧縣)은 백제 때의 개화현(皆火縣)이니 신라 때 부령(扶寧)으로 고쳤다. 혹은 계발(戒發)이라고도 일컬었다. 보안현(保安縣)은 백제 때의 흠량매현(欽良買縣)이니, 신라 때 희안(喜安)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이 두 고을을 나누기도 하고 합하기도 하였다. 태종 병신년(1416, 태종 16)에 합하여 부안현으로 하였으며, 다음해에 부안현을 폐지하고 흥덕진(興德鎭)으로 옮겼으며, 부안진(扶安鎭)을 설치하였다가 뒤에 현감으로 고쳤다. ○ 낭주(浪州)라고도 부른다. ○ 20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77리이다. ○ 보안(保安)은 폐현이다. 현의 남쪽 30리의 거리에 있다.
○ 함평(咸平) : 함풍현(咸?縣)은 백제 때의 굴내현(屈乃縣)이니 신라 때 함풍으로 고쳤다. 모평현(牟平縣)은 백제 때의 다지현(多只縣)이니 신라 때 다기(多岐)로 고쳤다. 태종 기축년에 두 현을 합하여 함평현으로 하였다. ○ 모양(牟陽)ㆍ기성(箕城)이라고도 부른다. ○ 4면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62리이다. ○ 해제(海際)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도제현(道際縣)이니 음해(陰海)ㆍ운화(云火)라고도 한다.
○ 고산(高山) : 백제 때의 고산현(高山縣)이니 또는 난등량(難等良)이라고도 한다. ○ 봉산(鳳山)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76리이다. ○ 운제(雲梯)는 폐현이다. 또는 운산(雲山)이라고도 한다. 백제 때의 지벌지현(只伐只縣)이다.
○ 태인(泰仁) : 태산군(太山郡)은 백제 때의 대시산군(大尸山郡)이니, 신라 때 태산(太山)으로 고쳤다. 인의현(仁義縣)은 백제 때 빈굴현(賓屈縣)이니 부성(賦城)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무성(武城)으로 고쳤다. 태종 기축년에 두 고을을 합하여 태인현으로 하였다. ○ 19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63리이다. ○ 인의(仁義)는 폐현이다.
○ 옥구(沃溝)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마서량현(馬西良縣)이니 신라 때 옥구로 고쳤다. 태조 때 진을 두었고 세종 계묘년에 현으로 고쳤다. ○ 옥산(玉山)이라고도 부른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23리이다. ○ 회미(澮尾)는 폐현이다. 일명 연강(連江)이라고도 한다. 백제 때의 시부리현(矢夫里縣)이다.
○ 남평(南平) : 백제 때의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이니, 신라 때 현웅(玄雄)으로 고쳤고, 고려 때 남평(南平)으로 고쳤다. ○ 오산(烏山)ㆍ영평(永平)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46리이다. ○ 철야(鐵冶)는 폐현이다. 백제 때의 실어산현(實於山縣)이다.
○ 흥덕(興德) : 백제 때의 상칠현(上漆縣)이니, 신라 때 상질(尙質)로 고쳤고, 고려 때는 장덕(章德) 창덕(昌德)이라고도 한다. 으로 하였다가, 흥덕으로 고쳤다. ○ 흥성(興城)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6리이다.
○ 정읍 : 백제 때의 정촌현(井村縣)이니, 신라 때 정읍으로 고쳤다. ○ 정촌(井村)ㆍ초산(楚山)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91리이다.
○ 고창(高敞)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이니 신라 때 고창으로 고쳤다. ○ 모양(牟陽)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28리이다.
○ 무장(茂長) : 무송현(茂松縣)이니 백제 때의 송미지현(松彌知縣)이며, 신라 때 무송으로 고쳤다. 장사현(長沙縣)은 백제 때의 상로현(上老縣)이니 신라 때 장사로 고쳤다. 태종 정유년(1417, 태종 17)에 두 고을을 합하여 무장진을 두었다가 뒤에 고쳐서 현으로 하였다. ○ 송산(松山)ㆍ사도(沙島)라고도 한다. ○ 16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76리이다.
○ 무안 : 백제 때의 물아혜군(勿阿兮郡)이니, 신라 때 무안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 물량(勿良)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무안이라 고치고 현으로 하였다. ○ 면주(?州)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96리이다.
○ 해남 : 백제 때의 새금현(塞琴縣)이니, 신라 때 침명(浸溟)으로 고쳤는데 투빈(投濱)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 해남으로 고쳤다. 태종 기축년에 진도(珍島)와 합하여 해진(海珍)이라고 하였다가 세종 정미년에 다시 이전대로 하였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96리이다.
○ 정의(旌義) : 본래는 제주의 동도(東道)인데, 태종 병신년에 제주 안무사(濟州按撫使) 오식(吳湜)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라산 남쪽의 넓이 90여 리의 땅을 나누어 동쪽을 정의, 서쪽을 대정(大靜)이라고 하여 현을 두었다. ○ 3면, 제주와의 거리는 1백 30리이다. ○ 토산현(兎山縣)ㆍ호아현(狐兒縣)ㆍ홍로현(洪爐縣)이라고도 한다.
○ 대정(大靜) : 본래 제주의 서도(西道)이다. ○ 4면, 제주와의 거리는 백 40리이다. ○ 예래현(猊來縣)이라고도 한다.
[譯: 민족문화추진회. 원문의 내용이 길어 편의상 글을 나누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