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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때 나의 ‘야생화 사부’인 김인호 시인이 순천만 칠면초의 안부를 물어왔다. 그는 1년간 먼 나라 베트남으로 파견 나가 있다. 향수병이 지독한 듯했다. 어느새 순천만의 칠면초가 붉은 옷으로 갈아입고 흑두루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불타는 태양이 아니라 달빛 환하고도 교교한 밤이 더 좋아야 하는 나이가 아닌가.
그리하여 지리산 여가수 고명숙과 함께 하는 ‘달빛 콘서트’ 장소로 달려갔다. 산동 온천랜드 앞에서 콘서트를 막 시작하려는데 붉은 달이 떠올랐다. 나는 시낭송을 해야 하는데 마음이 급해졌다. 마음을 관객들에게 줘야 하는데 콩밭이 아니라 붉은 달에게 가 있었다. 급하게 삼각대를 세우고 사진을 찍다말고 무대로 뛰어가 졸시 ‘달빛을 깨물다’ 시낭송을 하는 둥 마는 둥 뒤풀이 술도 마다했다.
개기월식 때문이었다. 사실 그날 밤 처음으로 찍었다. 시간대별로 찍어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인증 샷 수준이었다. 지구에 가려진 보름달빛이 붉게 타오르니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했다. 달보다 큰 지구가 제 아무리 가린들 달빛은 어둠 속에서 더욱 붉게 빛나는 것이었다. 무조건 크다고 다 가릴 수야 있겠는가. 작은 달이 태양을 가릴 때 개기일식은 오히려 더 캄캄하다. 거리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긴 하겠지만 인생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낮고 작은 산이 더 큰 산을 가리기도 하고, 손톱의 티눈이 더 큰 병보다 아플 수도 있고, 아주 작은 슬픔과 절망과 아픔이 그 어떤 것들보다 더 크게 다가올 수도 있다. 붉은 달의 기운이 만만찮았다. 언제 다시 또 볼 수 있으려나, 적어도 4년은 기다려야 하니 내장 깊숙이 입력하고 저장할 일만 남았다.
이제 가을도 얼마 남지 않았다. 토지문학제가 열린 하동군 평사리 들녘, 며칠 전부터 무딤이들이 완벽한 황금빛 옷으로 갈아입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아뿔싸, 어느새 콤바인이 나타나 벼를 베기 시작한 것이다. 무딤이들은 듬성듬성 이빨이 빠진 듯했다. 너무 때를 맞추려다 오히려 때를 조금 놓친 셈이다. 이 또한 살다보면 흔히 있는 일이 아닌가. 그래도 부부소나무와 동정호를 환하게 살려주는 저 가을빛이 너무나 고맙고 고마웠다.
둥근잎꿩의비름이 야생화 탐사 졸업사진
그날 밤 베스트셀러 <지리산행복학교>의 저자인 소설가 공지영과 더불어 밤새 통음을 했다. <수도원기행 2>를 탈고한 뒤 홀가분하게 지리산에 온 그녀와 <지리산행복학교>의 주인공들인 최도사, 고알피엠여사 등과 더불어 모처럼 회포를 푼 것이다. 칠불사 아래 친구 권행연씨의 펜션 ‘시인의 정원’에서 가을밤을 지새우고, 단야식당(백운장)의 구월순 누님 집에서 오전부터 해장술로 동동주를 마셨다. 유쾌, 통쾌, 운우지정에 가까운 1박2일의 술판이었다.
머잖아 저 황금빛 들판에는 청보리가 자라고 까마귀떼들이 날아오를 것이다. 바쁜 일정을 끝내고 몸을 추스르다보니 왼쪽 갈비뼈가 너무나 아팠다. 갈비뼈에 금이 간 것이다. 일전에 청송 주왕산 절골에서만 사는 둥근잎꿩의비름을 찍으러 갔다가 벼랑에서 주르르 미끄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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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한 추락도 아닌데 뾰족한 바위에 왼쪽 심장이 찍혀 한동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잠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가 나의 재산목록 2호인 카메라부터 걱정이 되어 살펴보니 다행히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미끄러지면서도 두 손으로 카메라를 받쳐 드는 바람에 튀어나온 바위에 찍힌 것이다. 갈비뼈 근처가 많이 아팠지만 이 정도 통증이야, 하면서 모터사이클을 타고 지리산까지 잘 돌아왔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 슬슬 통증이 심해졌다. 가을 일정이 날마다 이어지다보니 밤을 지새우며 술을 마시고 또 마셨다. 어느 순간 스스로 몸을 뒤척이지도 못하고 숨을 쉬거나 기침을 하거나 신명나게 웃을 수도 없었다. 닷새 정도 지나 어쩔 수 없이 동네병원에 갔더니 젊은 의사가 “엑스레이 찍어볼 것도 없어요”라며 갈비뼈에 금이 갔다고 한다.
갈비뼈는 깁스를 할 수도 없고, 부러진 것은 아니니 세월이 약이라고 했다. 주사 한 대 맞은 뒤 며칠간 진통제, 소염제 알약 세 개씩을 먹는 방법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고도 며칠 더 약과 술을 같이 마시다가 한 이틀 술을 멀리 하니 통증이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조금씩 약화되는 통증이라면 그 자체가 이미 행복한 병이 아닌가.
지난해에는 사흘 정도 늦는 바람에 둥근잎꿩의비름을 인증샷 정도로만 기록했다. 그리하여 올해도 조금 빨리 갔다 싶은데도 또 때를 놓쳐 이틀 정도 늦은 셈이 됐다. 이 야생화는 나와 시절인연이 살짝 어긋나는 듯하다. 아직 수료 혹은 졸업하지 말라는 충고인가. 나는 그저 일단 조금 쉬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뿐이다. 그러나 다시 먼 길 가야 하는데 아직은 갈비뼈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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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시
단풍의 이유
이원규
이 가을에 한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하다
내내 가슴이 시퍼런 이는 불쌍하다
단풍잎들 일제히
입을 앙다문 채
사색이 되지만
불행하거나 불쌍하지 않다
단 한번이라도 타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너는 붉나무로
나는 단풍으로
온 몸이 달아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사랑도 그와 같아서
무작정 불을 지르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