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정시인
1963년 서울출생
91년<사상문예운동>을 통해 작품활동 시작
2004년 7월 첫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출간
해남 달마산 미황사 아래 한 농가에서 혼자 살다
2010년 말 암 선고를 받고 투병하다 지난 2011년 사망.
호마이카상
김태정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네가 낡아서가 아니야
싫증 나서는 더더욱 아니야
이십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해온
네가 이젠 무서워졌다
무서워졌다 나의 무표정까지도 거뜬히
읽어낼 줄 아는 네가,
반질반질 닳아버린 귀퉁이만큼 노련해진 네가,
너를 펼쳐놓는 순간부터
시를 쓸지 책을 읽을지
아니면 밥을 차려 먹을지
내 행동을 점칠 줄 아는 네가 무서워졌다
이십년 전이나 이십년 후나
변함없이 궁핍한 끼니를 네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
불편해졌다
책상도 되고 밥상도 되는 네 앞에서
시도 되지 못하고 밥도 되지 못하는
나의 현재가 초라해졌다
시가 밥을 속이는지
밥이 시를 속이는
죽도 밥도 아닌 세월이 문득 쓸쓸해졌다
이 초라함이,
이 쓸쓸함이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발바닥이 되어버린 자존심
아무래도 이 시시한 자존심 때문에
너를 버려야 할까보다
그래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나의 아니키스트
1980년대를 거쳐온 1963년생 소위 386세대라고 불리던 그러나 386컴퓨터와는 지극히 거리가 먼 나같이 비과학적 비문명적인 사람도 286이나마 컴퓨터가 있으니 참 살기 좋은 세상이다
자판을 누르기만 하면 척척 글자가 나오고 오자가 나오면 고쳐주고 맘에 들지 않는 문장은 지워주고
펜으로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내, 생각의 속도보다 앞질러 미리 시가 되어주고
원고지 백매 천매라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해주는, 또한 원고지 백매 천매라도 단 한순간 눈 깜빡할 사이에 지워주는
이 286컴퓨터는 1996년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색인 교정 아르바이트 일당 4만원으로 장만한 내 재산 목록 1호
부티나는 장정의 부리테니크 백과사전은 멀리 바다 건너오느라 후진국 가난한 시인의 생계를 알 리 없겠지만
아무튼 일당 4만원의 노동으로 장만한 286은 그후 내 밥줄이 되어주었는데 386은 물론 486도 가고 586도 가고 따라올 테면 따라와보라는 속도의 최강자만이 살아남는 인터넷 시대에
내가 아직도 286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일당 4만원의 땀 밴 추억 때문도 아니고 재활용에 대한 알뜰한 집착 때문도 아니다
원고로 먹고사는 사람들에겐 뭐니뭐니 해도 컴퓨터의 장점은 속도와 정보와 통신이라지만
정보와 통신이 두절되고 속도를 아예 잊어버린 그의 자폐적 태평세월이 흔적을 남기지 않는 그의 신중함이 열받을 땐 백매든 천매든 미련없이 날려버리는 그 화끈함이 내겐 무엇보다 믿음직스러워서
어떤 사상이든 어떤 정견이든 어떤 욕설이든 내밷어도 발설하지 않는 나의 286은 외계와의 교신을 버린 아나키스트라서
흔적을 사냥하는 광견의 시대 팔공년대를 통과하면서 천기누설공포증이라 해도 좋을 풍토병을 다만 아웃사이더였을 뿐인 나까지 덩달아 앓았으니
볼펜을 쥐는 것조차 두렵던 시절 시도 편지도 머릿속으로만 쓰는 습관이 들었으므로 전화번호를 씹어삼키는 버릇이 생겼으므로
이제 나의 286은 천하무적이다
내가 무슨 소리를 지껄여도 어떤 사상을 꿈꾸어도 어떤 정치꾼을 욕한대도 어떤 정견을 갖고 있대도
아무도 모르는 오직 나와 286과의 암묵적인 약속, 수상한 문자는 깨끗이 지워준다는 불온한 유전자는 절대 유출하지 않는다는 외계와의 교신은 완벽하게 끊어준다는 알리바이를 확실히 담보해준다는 약속을 나는 철저하게 맹신한다
이것이 팔공년대에 대한 나의 증오이고 애정이라 해도 좋다 머지않아 다시 컴퓨터 대란이 올지라도
미황사(美黃寺)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사랑도 나를 가득하게 하지 못하여
고통과 결핍으로 충만하던 때
나는 쫓기듯 땅끝 작은 절에 짐을 부렸습니다
세심당 마루 끝 방문을 열면
그 안에 가득하던 나무기둥 냄새
창호지 냄새, 다 타버린 향 냄새
흙벽에 기댄 몸은 살붙이처럼
아랫배 깊숙이 그 냄새들을 보듬었습니다
열이레 달이 힘겹게 산기슭을 오르고 있었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그리며 나는
아물지 못한 상실감으로 한 시절을
오래, 휘청였습니다
······색즉시고옹공즉시새액수사앙행식역부우여시이사리자아아이시이제법공상불생불며얼·
·····불생불멸······불생불멸······불생불멸······
꽃살문 너머
반야심경이 물결처럼 출렁이면
나는 언제나 이 대목에서 목이 메곤 하였는데
그리운 이의 한 생애가
잠시 내 손등에 앉았다가 포르르,
새처럼 날아간 거라고
땅끝 바다 시린 파도가 잠시
가슴을 철썩이다 가버린 거라고······
스님의 목소리는 어쩐지
발밑에 바스라지는 낙엽처럼 자꾸만
자꾸만 서걱이는 것이었는데
차마 다 터뜨리지 못한 울음처럼
늙은 달이 온몸을 밀어올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필생의 호흡이 빛이 되어
대웅전 주춧돌이 환해지는 밤
오리, 다람쥐가 돌 속에서 합장하고
게와 물고기가 땅끝 파도를 부르는
생의 한때가 잠시 슬픈 듯 즐거웠습니다
열반을 기다리는 달이여
그의 필생의 울음이 빛이 되어
미황사는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홀로 충만했습니다
물푸레나무
물에 담근 가지가
그물, 파라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라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라스름 물올리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라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라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물푸레나무빛이 스며든 물
그 파라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인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게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라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라스름 물올리며 잔잔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가을 드들강
울어매 생전의 소원처럼 새가 되었을까
새라도 깨끗한 물가에 사는 물새가
물새가 울음을 떨어뜨리며 날아가자
바람 불고 강물에 잔주름 진다
슬픔은 한 빛으로 날아오르는 거
그래, 가끔은 강물도 흔들리는 어깨를
보일 떄가 있지
오늘 같이 춥고 떨리는 저녁이면
딸꾹질을 하듯 꾹꾹 슬픔을 씹어 삼키는,
울음은 속울음이어야 하지 울어매처럼
저 홀로 듣는 저의 울음소린
바흐의 무반주첼로곡만큼 낮고 고독한 거
아니아니 뒤란에서 저 홀로 익어가는
간장맨치로 된장맨치로 톱톱하니
은근하니 맛깔스러운 거
강 건너 들판에서 매포한 연기 건너온다
이맘때쯤 눈물은
뜨락에 널어놓은 태양초처럼
매움하니 알큰하니 빠알가니
한세상 슬픔의 속내, 도란도란 익어가는데
강은 얼마나 많은 울음소릴 감추고 있는지
저 춥고 떨리는 물무늬 다 헤아릴 길 없는데
출렁이는 어깨 다독여주듯
두터워지는 산그늘이나 한자락
기일게 끌어당겨 덮어주고는
나도 그만 강 건너 불빛 속으로 돌아가야 할까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