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총지리(摠地理) ○ 경상도 동북은 강원도 경계와 바다이고, 동남과 남은 모두 바다이며, 서남은 바다와 전라도 경계이고, 서쪽은 전라도 경계, 서북쪽은 충청도 경계, 북쪽이 강원도 경계다. 71고을 좌도 40고을, 우도 31고을 본래 진국(辰國)의 땅으로 북쪽은 진한(辰韓)이 되고 남쪽은 변한(卞韓)이 되었었다. 신라가 그 땅을 모두 차지하고, 통합한 뒤에 상주ㆍ양주(良州)ㆍ강주(康州)의 3주(州)를 두었다. 말기에는 궁예와 견훤이 상주와 양주 두 고을을 나누어 점거하였다. 고려 태조는 여기에 동남도(東南道)를 두고 관사를 경주에 두었다. 성종 때는 영남도ㆍ영동도(嶺東道)ㆍ산남도(山南道)의 3도로 나누었으며, 예종 때는 경상진주도(慶尙晉州道)라고 하였고, 명종 때는 경상주도(慶尙州道)와 진합주도(晉陜州道)로 나누었으며, 신종(神宗) 때는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라고 고쳤다가 또 경상진안도(慶尙晉安道)로 고쳤다. 고종 때 명주도(溟州道)의 화주(和州)ㆍ등주(登州)ㆍ정주(定州)ㆍ장주(長州)의 네 주를 몽고에게 빼앗겼으므로 본도의 평해(平海)ㆍ영덕(盈德)ㆍ덕원(德原)ㆍ송생(松生)을 떼내어 명주도에 예속시켰고, 충렬왕은 또 덕원ㆍ영덕ㆍ송생을 옮겨 동계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본도로 돌려주었다. 충숙왕(忠肅王)이 경상도라고 정하였고, 본조에서 이를 그대로 수용하였다. 태종 계사년에 옥천(沃川)ㆍ영동(永同)ㆍ황간(黃澗)ㆍ보은ㆍ청산(靑山)을 충청도에 이속시켰다. ○ 좌도 경주 : 성(城)이 있다. 신라의 옛 수도이다. 국호를 서야벌(徐耶伐) 혹은 사라(斯羅)라고 부르고, 또 사로(斯盧)라고도 일컬었다. 뒤에 신라라고 일컬었고, 탈해왕(脫解王) 때에는 다시 계림(鷄林)이라고 이름하였다. 고려 태조 때, 신라가 없어지면서 경주로 되었다. 뒤에 동경유수라고 고쳤으며, 또 계림부라고 고쳤다. 태종 때에 다시 경주라고 불렀다. ○ 진한(辰韓)ㆍ낙랑(樂浪)ㆍ월성(月城)ㆍ금오(金鰲)ㆍ문천(蚊川)이라고도 한다. ○ 18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80리이다. ○ 안강현(安康縣)은 속현이다. 신라 때의 비화현(比火縣)이다. 기계현(杞溪縣)이 있고, 신라 때의 모혜현(芼兮縣)이니 화계(化鷄)라고도 한다. 자인(慈仁)은 폐현이다. 현재 다시 현을 두었다. 다음에 나온다. 신광현(神光縣) 신라 때의 동잉음현(東仍音縣)이니, 신을(神乙)이라고도 한다. 뒤에 이어진(?於鎭)ㆍ신광진(神光鎭)이라고 일컬었다. ㆍ진량현(珍良縣) 신라 때의 진량현이니 여량(餘粮)이라고 고쳤다가 뒤에 구사부곡(仇史部曲)으로 강등시켰다.ㆍ장진현(長鎭縣)이 있다. 신라 때의 장진현이니 고려 때 죽장부곡(竹長部曲)으로 낮추었다. ○ 안동 : 성이 있다. 신라 때는 고타야군(古?耶郡)이라 하다가 고창(古昌)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가 안동부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영가군(永嘉郡)으로 고치고, 길주(吉州)ㆍ복주(福州)로 고쳤으며, 다시 안동부로 승격시켰다. ○ 능라(綾羅)ㆍ지평(地平)ㆍ석릉(石陵)ㆍ일계(一界)ㆍ화산(花山)ㆍ고장(古藏)ㆍ창녕(昌寧) 옛 창녕국ㆍ고령(古寧)이라고도 한다. ○ 24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4리이다. ○ 임하현(臨河縣)은 속현이다. 고구려 때의 굴화군(屈火郡)이니 신라 때 곡성(曲城)이라 고쳤다. 풍산현(?山縣) 신라 때의 하지현(下枝縣)이니, 영안(永安)으로 고쳤으며, 순주(順州)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현으로 낮추었다. 신라 때에는 예천에 예속되었다.ㆍ일직현(一直縣) 신라 때의 일직현인데 뒤에 직녕(直寧)으로 고쳤다. 도 속현이고, 감천현(甘泉縣)ㆍ길안현(吉安縣) 원래는 부곡이다. ㆍ내성현(奈城縣) 퇴곶부곡(退串部曲)인데 고려 때 현으로 승격시켰다.ㆍ춘양현(春陽縣) 가야향(加也鄕)인데 고려 때 현으로 올렸다.ㆍ재산현(才山縣) 덕산부곡(德山部曲)인데 고려 때 현으로 올렸다.ㆍ일계현(日谿縣)이 있다. 본래는 열혜현(熱兮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 영해(寧海) : 고구려 때의 우시군(于尸郡)이니 신라 때에 유린(有隣)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예주(禮州)로 고쳤으며 덕원부(德原府)로 올렸다가 영해부로 고쳤다. ○ 덕원(德原)이라고도 한다. ○ 4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45리이다. ○ 청기(靑杞)는 속현이다. 대청부곡(大淸部曲)이니, 예전에는 청도현(靑島縣)에 예속되었다. 고려 때 청기현(靑杞縣)을 두었다. 다른 이름으로 청계(靑溪)라고도 한다. ○ 밀양 : 성이 있다. 신라 때의 추화군(推火郡)인데 밀성(密城)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밀주(密州)로 고쳤다가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낮추어 계림에 예속시켰으며, 뒤에 밀성현이라고 하다가 밀양부로 고쳤다. 태조 때에 도로 밀성군으로 하였다가 뒤에 밀양부로 올렸다. 태종 때에 군(郡)으로 낮추었다가 곧 다시 올렸다. ○ 응천(凝川)ㆍ밀산(密山)이라고도 한다. ○ 16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12리이다. ○ 수산현(守山縣)은 속현이다. 천산부곡(穿山部曲)인데 고려 때 현으로 올렸다. 풍각현(?角縣)이 있다. 상화촌현(上火村縣)이니, 다른 이름은 유산(幽山)이다. 중종 무인년에 현으로 낮추고 부(府)의 땅을 나누어 청도(淸道)ㆍ경산(慶山)ㆍ영산(靈山)ㆍ현풍(玄風)에 예속시켰다. 밀양부의 사람이 그의 아비를 죽인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오년에 도로 이전대로 하였다. ○ 밀진현(密津縣) 죽산(竹山)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이 있다. ○ 신라에서는 불[火] 자를 넣은 고을 이름이 많다. 불[火]자는 곧 불(佛)의 전음(轉音)이요, 불(佛)은 곧 벌(伐)의 전음이다. 방언에 들판을 벌이라고 한다. ○ 청송(靑松) : 고구려 때의 청기현(靑己縣)이니, 신라 때에 적선(積善)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는 부이(鳧伊)라고 하였고, 또 운봉(雲鳳)으로 고쳤다가 청부(靑鳧)로 고쳤다. 태조 갑술년에 진보현(眞寶縣)과 합하였고, 세종 기해년(1419, 세종1)에는 청보군(靑寶郡)으로 올렸다. 소헌왕후(昭憲王后)의 고향이다. 뒤에 진보(眞寶)를 떼내고 송생현(松生縣)과 합하여 청송이라 고쳤으며, 세조 때에 부(府)로 올렸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0리이다. ○ 안덕(安德)은 속현이고 고구려 때의 이화혜현(伊火兮縣)이니, 신라에서 연무(緣武)라고 고쳤다. 송생(松生)은 폐현이다. ○ 대구 : 성이 있다. 신라 때의 달구화현(達句火縣)이니 달불성(達弗城)이라고도 하다가 대구로 고쳤다. 세종 때에 군으로 올렸고, 세조 때에 부로 올렸다. ○ 달성(達城)이라고도 한다. ○ 33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70리이다. ○ 수성현(壽城縣)은 속현이다. 계화군(界火郡)인데 상촌창군(上村昌郡)이라고도 한다. 수창군(壽昌郡)으로 고쳤다. 가창(嘉昌)이라고도 한다. 해안현(解顔縣) 치성화현(雉省火縣)인데 미리(美里)라고도 한다.ㆍ하빈현(河濱縣) 다사지현(多斯知縣)인데 답지(沓只)라고도 한다. 이 있다. ○ 울산 : 신라 때의 굴아화촌(屈阿火村)이니, 뒤에 현을 두고 이름을 하곡(河曲) 하서(河西)라고도 한다. 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가 흥려부(興麗府)로 올렸다가, 뒤에 공화현(恭化縣)으로 낮추고, 울주(蔚州)로 고쳤다. 태조 때에 진을 두었고, 태종 계사년에 울산군으로 고쳤다. 세종 정사년에 부(府)로 올렸다가 도로 낮추었으며, 선조 무술년에 다시 부로 올렸다. ○ 학성(鶴城)ㆍ개지변(皆知邊)ㆍ화성(火城)이라고도 한다. ○ 11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50리이다. ○ 우풍(虞風)은 고현(古縣)이다. 우화(?火)는 우불(于佛)이 바뀐 말이다. 경덕왕(景德王)이 현으로 고쳐서 안동에 예속시켰다. 동진(東津) 율포현(栗浦縣) 도 고현이다. ○ 동래(東萊) : 성이 있다. 옛날의 장산국(?山國) 내산(萊山)이라고도 한다. 인데, 신라가 차지하여 거칠산군(居漆山郡)을 두었다가 동래로 고쳤다. 태조 때에 진을 두었고, 세종 때에 첨사(僉使)를 두었다가 뒤에 현령으로 고쳤다. 명종 정미년에 부로 올렸다. 선조 때 현으로 낮추었다가 곧 다시 올렸으며, 임진년에 또 낮추었다가 기해년에 다시 올렸다. ○ 봉래(蓬萊)ㆍ봉산(蓬山)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9백 62리이다. ○ 동평(東平)은 속현이다. 신라 때의 대증현(大甑縣)이다. ○ 인동(仁同) : 신라 때의 사동화현(斯同火縣)인데, 인동으로 고쳤다. 선조 갑진년에 부로 올렸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리이다. ○ 수동(壽同)ㆍ옥산(玉山)이라고도 한다. 약목현(若木縣)은 속현이고, 신라 때의 대목현(大木縣)이니, 칠촌(七村) 또는 곤산(昆山)이라고도 한다. 계자현(谿子縣)이라고 고쳤다. 소목현(小木縣)이 있다. 견훤이 벽진(碧珍)을 침공할 때, 대목ㆍ소목 두 고을의 곡식을 베어 버렸다고 하였는데 지금 어디인지 상세하지 않다. ○ 순흥(順興)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급벌산군(及伐山郡)이니, 신라 때에 급산(?山)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흥주(興州)로 고쳤다가 순정(順政)으로 고쳤다. 뒤에 순안(順安)에 이속되었다. 흥녕현(興寧縣)으로 고치고 흥주(興州)라고 올렸으며 또 순흥부로 고쳤다. 세조 정축년에 고을을 폐지하여 마아령(馬兒嶺)의 물 동쪽 땅은 영주(榮州)에 예속시키고, 문수산(文殊山)의 물 동쪽 땅은 봉화(奉化)에 예속시켰다. 풍기(?基)에 예속시켰다가 숙종 계해년에 이전대로 하였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7리이다. ○《여지승람》에는 풍기군의 폐촌에 들어 있다. ○ 칠곡(漆谷) : 성이 있다. 신라 때의 팔거현(八居縣)이니, 인리(仁里)라고도 하다가 팔리(八里)로 고쳤다. 고려 때에 다시 팔거(八居)라고 일컬었는데 바뀌어 팔거(八?)가 되었다. 칠곡(七谷)이라고도 한다. 뒤에 성주(星州)에 예속되었다. 인조 경진년에 비로소 부를 두었다. ○ 가산(架山)이라고도 한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70리이다. ○ 《동국여지승람》에는 팔거는 성주(星州)의 속현이라 하였다. ○ 청도(淸道) : 성이 있다. 이서소국(伊西小國)인데 신라가 벌취(伐取)하고 구도성(仇刀城)의 경내에 있는 솔이산(率伊山)ㆍ경산(驚山) 가산(?山)이라고도 한다.ㆍ오도산(烏刀山) 등의 3성(城) 3성은 신라 때 밀성(密城)에 속해 있었다. 을 합하여 대성군(大城郡)을 두었다. 경덕왕 때, 구도는 오악현(烏岳縣)이라 고쳤고, 경산은 형산현(荊山縣)으로, 솔이산은 소산현(蘇山縣)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3성을 합하여 청도군을 만들었다. ○ 도주(道州)ㆍ오산(鰲山)ㆍ마악(馬岳)이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42리이다. ○ 영천(永川) : 신라 때에 절야화군(切也火郡)이라고 하다가 임고(臨皐)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도동(道同)과 임천(臨川)의 두 현을 합하여 영주(永州)로 고쳤는데 고울부(高鬱府)라고도 일컬었다.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영천군으로 고쳤다. ○ 익양(益陽)ㆍ영양(永陽)이라고도 한다. ○ 20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87리이다. ○ 도동(道同)은 폐현이며, 신라 때의 도동대현(刀冬大縣)이다. 임천도 폐현이다. 골화소국(骨火小國)이니 신라 때에 현을 두었다. ○ 영천(榮川) : 고구려 때의 내기군(奈己郡) 혹은 내기( 己)로 쓴다. 이니, 신라 때에 내령(奈靈)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강주(剛州)로 고쳤다가 순안현(順安縣)이라 고쳤으며, 영주(榮州)로 올렸다. 태종 계사년(1413, 태종13)에 영천군으로 고쳤다. ○ 구성(龜城)이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70리이다. ○ 선곡현(善谷縣)이 있다. 고구려 때의 고곡현(賈谷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 예천(醴泉) : 신라 때에 수주현(水酒縣)이라 하다가 예천군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보주 (甫州)로 고쳤다가 기양현(基陽縣)으로 고쳤다. 태종 계사년에 보주군으로 고쳤다가 곧 다시 예천이라고 하였다. ○ 청하(淸河)ㆍ양양(襄陽)이라고도 한다. ○ 23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98리이다. ○ 다인(多仁)은 속현이며, 신라 때의 달기현(達己縣)이니 혹은 다기(多己)라고도 한다. 용궁(龍宮)의 동촌(東村) 너머[越]에 있다. 인양(仁陽)이라고도 한다.신라 때는 상주에 속하였다. 안인(安仁)은 폐현이다. 난산현(蘭山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 흥해(興海) : 성이 있다. 신라 때에 퇴화군(退火郡)이라고 하다가 의창(義昌)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흥해로 고쳤다. ○ 미질부성(彌秩夫城)ㆍ곡강(曲江)ㆍ오산(鰲山)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26리이다. ○ 양산(梁山) : 성이 있다. 신라 때에 상주(上州)와 하주(下州)의 땅을 나누어서 삽량주(?良州)를 두었다가 뒤에 양주(良州)로 고쳤다. 고려 태조가 양주(梁州)라고 고쳤으며 뒤에 밀성(密城)과 합하였다가 곧 다시 이전대로 하였다. 태종 때에 위산군(爲山郡)으로 고쳤고, 선조 임진년에 동래와 합쳤다가 갑진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90리이다. ○ 풍기(?基) : 신라 때의 기목진(基木鎭)이다. 고려 초기에는 기주(基州)라고 일컬었으며, 뒤에 은풍(殷?)을 예속시키고 기천현(基川縣)으로 고쳤다. 문종 때에 풍기군으로 올렸다. 은풍에 태실(胎室)을 봉안하였기 때문이다. ○ 영정(永定)ㆍ안정(安定)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0리이다. ○ 은풍현은 속현이며, 신라 때에 적아현(赤牙縣)이라 하다가 은정(殷正)이라고 고쳤다. 다른 이름은 은산(殷山)이다. 인풍현(??縣)이 있다. 고구려 때의 이벌지현(伊伐支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 경산(慶山) : 성이 있다. 압량소국(押梁小國)이니, 압독(押督)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 군을 두었는데, 뒤에 장산(獐山)으로 고쳤다. 고구려 초기에 장산(章山)으로 고쳤다가 경산으로 고쳤다. 태조 때에 현으로 낮추었고, 선조 신축년에 폐읍하였다가 정미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옥산(玉山)이라고도 한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10리이다. ○ 신라 때에 고포성(古浦城)ㆍ금성(金城)ㆍ우곡성(?谷城)의 3성을 합하여 압량군(押梁郡)으로 하였다. ○ 의성(義城) : 소문국(召文國)이었는데, 신라가 차지하여 문소군(聞韶郡)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기에 의성부로 고쳤다가 뒤에 곧 다시 현으로 낮추었다. 또 대구와 합하였다가 곧 다시 이전대로 회복시켰다. 19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90리이다. ○ 고구(高丘)는 고현(古縣)이다. 신라 때에 구화현(仇火縣)을 고쳐서 고구로 하였다. 혹은 고근(高近)이라고도 한다. ○ 영덕(盈德)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야시홀군(也尸忽郡)이니, 신라 때에 야성(野城)으로 고쳤고, 고려 초기에 영덕현으로 고쳤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4리이다. ○ 하양(河陽) : 고려 때에 하주(河州)라 하다가 뒤에 하양현으로 고쳤다. ○ 화성(花城)이라고도 한다. 선조 신축년에 고을을 폐지하였다가 정미년에 다시 두었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42리이다. ○ 용궁(龍宮) : 신라 때의 축산(竺山)이니, 원산(園山)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 용주(龍州)로 승격시켰다가 또 용궁현으로 고쳤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4리이다. ○ 봉화 : 고구려 때의 고사마현(古斯馬縣)이니, 신라 때에 옥마(玉馬)로 고쳤고, 고려 때는 봉화로 고쳤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20리이다. ○ 봉성(鳳城)이라고도 한다. ○ 청하(淸河)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아혜현(阿兮縣)이니, 신라 때에 해아(海阿)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청하로 고쳤다가 뒤에 경주에 예속시켰다.태조 때에 비로소 현을 두었다. ○ 덕성(德城)이라고도 한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41리이다. ○ 언양(彦陽) : 성이 있다. 신라 때에 거지화현(居知火縣)이라 하다가 헌양(?陽)으로 고쳤고, 고려 때에 언양으로 고쳤다. 헌산(?山)이라고도 한다. 선조 기해년에 고을을 폐지하였다가 광해군 임자년(1612, 광해군 4)에 이전대로 하였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47리이다. ○ 진보(眞寶) : 칠파화현(漆巴火縣)을 신라 때에 진보로 고쳤고, 조람현(助攬縣)은 진안(眞安)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두 고을을 합하여 남성부(南城府)를 두었는데, 재암성(載巖城)이라고도 한다. 태조 때에 보성현(甫城縣)을 두었고, 세종 때에 청부(靑鳧)에 합하여 청보(靑寶)라고 이름했다가 곧 폐지하고 진보현으로 고쳤다. 성종 때에 폐읍하였다가 지방 사람들의 진정에 의하여 다시 현을 두었다. ○ 재암(載巖)ㆍ진해(眞海)라고도 한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16리이다. ○ 현풍(玄風) : 신라 때에 추량화현(推良火縣)이라고 하다가 현효(玄驍)로 고쳤으며 고려 때 현풍으로 고쳤다. ○ 포산(苞山)ㆍ현풍(玄?)이라고도 한다. ○ 17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80리이다. ○ 신라 때에는 지금의 창녕(昌寧)인 화왕군(火王郡)에 속하였다. ○ 군위(軍威) : 신라 때에 노동멱현(奴同?縣)이라 하다가 군위로 고쳤다. ○ 적라(赤羅)라고도 한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75리이다. ○ 효령(孝靈)은 속현이다. 효령(孝令)이라고 쓰기도 한다. 신라 때의 모혜현(芼兮縣)이다. ○ 비안(比安) : 신라 때의 아화옥현(阿火屋縣)이니, 또는 병옥(幷屋)이라고도 한다. 비옥(比屋)으로 고쳤으며, 뒤에 안정현(安貞縣)과 합하였다. 세종 신축년(1421, 세종 3)에 비안이라고 개칭하였다. ○ 병산(屛山)이라고도 한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38리이다. ○ 안정(安貞)은 속현이다. 신라 때 아시혜현(阿尸兮縣)이니 안현(安賢)이라 고쳤다. 세종 때에 안비(安比)라고 고쳤으며, 뒤에 고을의 관아를 비옥(比屋)으로 옮기고 비안이라고 개칭하였다. ○ 의흥(義興) : 고려 때의 의흥군이니, 뒤에 안동에 예속시켰다가 다시 현을 두었다. ○ 구산(龜山)ㆍ구성(龜城)이라고도 한다. ○ 11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26리이다. ○ 부계(缶溪)는 속현이다. 삼국 시대의 부림현(缶林縣)이다. ○ 신녕(新寧) : 신라 때에 사정화현(史丁火縣)이라 하다가 신녕으로 고쳤다. 연산군 정사년에 폐읍하였다. 현의 아전이 현감 길수(吉脩)의 엄격하고 사나운 것을 싫어하여, 고을을 비우고 도망한 일이 있었으므로, 폐읍하여 영천(永川)에 예속시키고, 땅을 분할하여 의성ㆍ하양(河陽)ㆍ의흥(義興)에 나누어 예속시켰다. 계해년에 다시 고을을 설치하였다. ○ 화산(花山)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0리이다. ○ 민백현(?白縣)이 있다. 신라 때의 매열차현(買熱次縣)이니, 민백으로 고쳤다. 신녕과 합하였다. 이지(梨旨)는 폐현이다. 영주(永州)의 이지은소(梨旨銀所)이니, 고려 때에 현으로 하였고 태조 때 신녕(新寧)의 속현이 되었다. ○ 예안(禮安) : 고구려 때의 매곡현(買谷縣)이니, 신라 때 선곡(善谷)으로 고쳤으며, 고려 태조 때 예안군으로 고쳤다. 우왕(禑王) 때 주(州)로 승격시켰다가 왕실의 태(胎)를 간직해 두는 곳이기 때문이다. 곧 현으로 고쳤다. ○ 선성(宣城)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45리이다. ○ 의인(宜仁)은 폐현이다. 안덕현(安德縣)의 지도보부곡(知道保部曲)이다. ○ 장기(長?) : 성이 있다. 신라 때 지답현(只沓縣)이라고 하다가 기립(?立)으로 고쳤고, 고려 때 장기로 고쳤다. ○ 봉산(峯山)이라고도 한다. ○ 3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20리이다. ○ 영일(迎日) : 성이 있다. 신라 때의 근오지현(斤烏支縣)이니 오량우(烏良友)라고도 한다. 임정(臨汀)으로 고쳤으며 고려 때 영일로 고쳤다. 태종 때 진을 두었다가 세종 때 첨사로 고쳤고 뒤에 현감으로 고쳤다. ○ 오천(烏川)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80리이다. ○ 창녕(昌寧) : 신라 때의 비자화군(比自火郡)이니 비사벌(比斯伐)이라고도 한다. 뒤에 하주(下州)를 두었다가 곧 폐지하고 화왕군(火王郡)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가 창녕으로 고쳤고 뒤에 진(鎭)으로 삼았다. ○ 창산(昌山)ㆍ창성(昌城)ㆍ하성(夏城)ㆍ하산(夏山)이라고도 한다. ○ 13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20리이다. ○ 영산(靈山) : 신라 때 서화현(西火縣)이라고 하다가 상약(尙藥)으로 고쳤으며, 고려 때 영산으로 고쳤다. ○ 취산(鷲山)ㆍ취성(鷲城)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50리이다. ○ 계성(桂城)은 폐현이다. ○ 기장(機張) : 신라 때 갑화양곡현(甲火良谷縣)이라고 하다가 기장으로 고쳤다. ○ 거성(車城)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9백 40리이다. ○ 신라 때에는 동래에 속하였다. ○ 자인(慈仁) : 신라 때의 노사화현(奴斯火縣)이니 기화(其火)라고도 한다. 자인으로 고쳤고 경주에 예속시켰다. 인조 정축년에 비로소 현을 두었다. ○ 자주(慈州)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30리이다. ○ 《동국여지승람》에는 경주 조에 들어 있다. ○ 영양(英陽) : 고은현(古隱縣)이라고 하다가 뒤에 영양군으로 고쳤다. 연양(延陽)이라고도 쓴다. 고려 때는 예주(禮州)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현을 두었으며 다시 영해(寧海)에 예속시켰다. 숙종 병진년에 비로소 현을 설치하였다가 정사년에 도로 폐지하였고, 계해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0리이다. ○ 《동국여지승람》에는 영해 조에 들어 있다. ○ 우도 창원 : 성이 있다. 의창현(義昌縣)은 신라 때 굴자군(屈自郡)이라고 하다가 의안(義安)으로 고쳤으며, 회원현(會原縣)은 신라 때 골포현(骨浦縣)이라고 하다가 합포(合浦)로 고치었다. 고려 때에 의창(義昌)ㆍ회원의 두 고을로 하다가 태종 때 합하여 창원부라 하였다. ○ 회산(檜山)ㆍ환주(還珠)라고도 한다. ○ 16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44리이다. ○ 상주(尙州) : 성이 있다. 사벌국(沙伐國)이니 또는 사불(沙佛)이라고도 한다. 신라가 차지하여 주(州)로 하였다가 상주(上州)로 고치고 군주(軍主)를 두었는데, 상락군(上洛郡)으로 고쳤고 또 상주(尙州)ㆍ사벌주(沙伐州)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상주로 고쳤고, 절도사를 두어 귀덕군(歸德軍)이라고 부르다가 또 상주로 고쳤다. 세종 때 관찰사로서 목사를 겸임하게 하다가 곧 폐지하였다. 세조 때 진(鎭)을 두고 목사로서 우도병마부사(右道兵馬副使)를 겸임하게 하였다가 곧 폐지하였다. ○ 사량벌(沙梁伐)ㆍ상산(商山)ㆍ타아(?阿)라고도 한다. ○ 34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77리이다. ○ 화령현(化寧縣)은 속현이다. 신라 때의 □ 달비군(達匕郡)이니 화령으로 고쳤다. 중모현(中牟縣) 신라 때의 도량현(刀良縣)이니 도안(道安)이라 고쳤다.ㆍ단밀현(丹密縣) 신라 때의 무동미지현(武冬彌知縣)이니 갈동미지(曷冬彌知)라고도 한다. ㆍ산양현(山陽縣) 신라 때의 근품현(近品縣)이니 근암(近巖)이라고도 쓴다. 가유(嘉猷)로 고쳤다.ㆍ화창현(化昌縣) 지내미지현(知乃彌知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이 있다. 공성(功成)은 폐현이고, 신라 때의 대병부곡(大幷部曲)이다. 영순(永順)도 폐현이며 북면 임하촌(林下村)인데 고려 때에 태(太)씨라는 이 마을 사람이 도적을 잡아 공로가 있었으므로 현으로 승격시켰다. 청리(靑里)도 폐현이다. 신라 때의 석리대현(昔里大縣)이니, 청려(靑驢)ㆍ고려(高驢)ㆍ청리라 고쳤다. ○ 성주(星州) : 성이 있다. 신라 때 본피현(本彼縣)이라고 하다가 신안(新安)으로 고쳐 성산군(星山郡)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벽진(碧珍)으로 고치고, 고려 태조 때 경산부(京山府)로 고쳤다. 광평군(廣平郡)으로 낮추었다가 대주(垈州)로 고쳤고, 흥안부(興安府)로 올렸다. 뒤에 성산목으로 고쳤다가 부(府)로 강등시켰으며, 태종 때 목으로 올렸다. 조곡산(祖谷山)에 왕실의 탯줄을 봉안하였다. ○ 가야(伽倻)라고도 한다. 성산가야(星山伽倻)는 6가야 중의 하나이다. ○ 40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27리이다. ○ 가리현(加利縣) 신라 때의 일리현(一利縣)이니 이름을 성산군(星山郡)이라 고쳤다. 기성(岐城)이라고도 한다.ㆍ팔거현(八?縣) 지금의 칠곡부이다.ㆍ화원현(花園縣) 신라 때의 설화현(舌火縣)이니 금성(錦城)이라고도 한다.ㆍ도산현(都山縣) 적산현(狄山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이 있다. ○ 진주 : 성이 있다. 백제 때의 거열성(居列城)인데 거타(居?)라고도 한다. 신라가 차지하여 진주(晉州)라고 하였다가 강주(康州)ㆍ청구(菁州)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절도사를 두고 정해군(定海軍)이라고 불렀다. 태조 때 진양부(晉陽府)로 올렸다가 현비(顯?)의 고향이다. 태종 때 다시 진주목으로 하였다. ○ 청주(菁州)ㆍ진산(晉山)ㆍ진강(晉康)이라고도 한다. ○ 70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66리이다. ○ 반성현(班城縣)은 속현이다. 편월(片月)이라고도 한다. 수선현(水善縣) 신라 때의 일선현(一善縣)이니 상선(尙善)이라 고쳤다.ㆍ악양현(岳陽縣) 신라 때의 소다사현(小多沙縣)이다. ㆍ화개현(花開縣)이 있다. ○흥선(興善)은 폐현이다. 흥선도(興善島)이니 고려 때의 유질부곡(有疾部曲)이다. 창선현(彰善縣)으로 고쳤는데 지금의 직촌(直村)이다. 굴촌(屈村)도 폐현이다. 《삼국사》에서도 상세하지 않다고 하였다. ○ 김해 : 성이 있다. 가락국(駕洛國)이니 혹은 가야(伽倻)라고도 일컬었다. 뒤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신라 때에 금관군을 두었으며 뒤에 소경을 두었고, 다시 김해라 고쳤다. 고려 태조 때 낮추어 부로 하였다가 뒤에 낮추어 임해현(臨海縣)으로 하였다. 군으로 올렸다가 금주(金州)로 고쳤고 금녕부(金寧府)ㆍ금주목(金州牧)으로 올렸는데 다시 김해부로 하였다. ○ 분성(盆城)이라고도 한다. ○ 18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4리이다. ○ 태산(太山)은 속현이다. 엄산(嚴山)이라고도 한다. ○ 선산(善山) : 성이 있다. 신라 때 일선군(一善郡)이니 주(州)로 올렸다가 숭선군(嵩善郡)으로 고쳤고, 고려 때 선주(善州)로 고쳤다. 태종 때 선산군으로 고쳤으며 뒤에 부(府)로 올렸다. ○ 화의(和義)라고도 한다. ○ 18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36리이다. ○ 해평(海平)은 속현이다. 파징(波澄)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의 병평현(竝平縣)인데 고려 초기에 평군(平郡)이라 고쳤다. ○ 거제(巨濟) : 성이 있다. 바다 가운데의 섬이다. 신라 때 상군(裳郡)이라고 하다가 거제로 고쳤다. 뒤에 관성(管城)과 합하였다가 곧 폐지하였다. 태종 갑오년에 폐읍하고 거창에 합하여 제창현(濟昌縣)이라고 부르다가 또 곧 폐지하였다. 세종 임자년에 다시 현을 두었고 숙종 신묘년에 부로 올렸다. ○ 기성(岐城)이라고도 한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1천 44리이다. ○ 아주(?州)는 폐현이며 신라 때의 거로현(居老縣)이다. 송변(松邊)도 폐현이며 신라 때 남수(南垂)라 고쳤다. 명진(溟珍)도 폐현이다. 신라 때의 매진이현(買珍伊縣)이다. 정종 때 강성현(江城縣)과 합하여 진성(珍城)이라고 일컬었다. ○ 하동(河東) : 신라 때 한다사군(韓多沙郡)이라고 하다가 하동으로 고쳤다. 고려 때 현을 두었다. 태종 때 남해현(南海縣)과 합하여 하남현(河南縣)이라고 불렀으나 뒤에 다시 분할하였다. 숙종 갑신년에 부로 올렸다. ○ 청하(淸河)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36리이다. ○ 함양(咸陽) : 성이 있다. 신라 때의 속함군(速含郡)이니 함성(含城)이라고도 하다가 천령(天嶺)으로 고쳤다. 고려 때 허주(許州)로 올렸다가 함양군(含陽郡)으로 낮추었으며, 뒤에 함양으로 고치고 현으로 낮추었다. 태조 을해년에 군으로 올리고 영종 기유년에 부로 올렸다. ○ 18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46리이다. ○ 거창(居昌) : 신라 때의 거열군(居烈郡)이니 거타(居?)라고도 하다가 거창으로 고쳤다. 고려 때 현을 두었다. 태종 때 거제와 합하여 제창(濟昌)이라고 부르다가 곧 이전대로 회복시켰다. 연산군 초기에 군으로 올렸다. 왕비의 고향이다. 중종 병인년에 다시 현으로 낮추었다가 영종 기유년에 부로 올렸다. 거창 신씨(愼氏)인 단경왕후(端敬王后)가 복위한 때문이다. ○ 아림(娥林)이라고도 한다. ○ 22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35리이다. ○ 가조(加祚)는 속현이다. 신라 때의 가소현(加召縣)이니 함음(咸陰)이라고 고쳤다. ○ 초계(草溪) : 신라 때 초팔혜현(草八兮縣)이라고 하다가 팔계(八溪)로 고치었다. 고려 때 초계로 고치고 군으로 올렸다. ○ 청계(淸溪)라고도 한다. ○ 11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45리이다. ○ 함안(咸安) : 성이 있다. 아시량현(阿尸良縣)이다. ○ 18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10리이다. ○ 현무현(玄武縣)이 있다. 신라 때의 소다현(召多縣)인데 뒤에 낮추어 부곡으로 하였다. ○ 금산(金山) : 신라 때의 금산현(金山縣)이다. 정종 때 군으로 올렸다. 왕실의 태(胎)를 봉안(奉安)하였다. ○ 금릉(金陵)이라고도 한다. ○ 16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3리이다. ○ 어모(禦侮)는 폐현이다. 신라 때의 금물현(今勿縣)이니 음달(陰達)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는 개령(開寧)에 속하였다. ○ 곤양(昆陽) : 성이 있다. 고려 때의 곤명현(昆明縣)인데 신라 때의 이름은 상세히 알 수 없다. 세종 때 남해현(南海縣)과 합하여 곤남군(昆南郡)으로 올렸다. 왕실의 태(胎)를 고을의 북쪽 소곡산(所谷山)에 봉안하였다. 정사년에 다시 나누어 남해군을 두고, 진주의 금양부곡(金陽部曲)과 합하여 곤양으로 고쳤다. ○ 철성(鐵城)ㆍ곤산(昆山)이라고도 한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9백 6리이다. 하읍(河邑)은 폐현이다. 포촌현(浦村縣)이다. ○ 합천 : 신라 때 대량주군(大良州郡)이라고 하다가 대야주군(大耶州郡)이라고도 쓴다. 강양(江陽)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 합주(陜州)로 올렸으며, 태종 때 합천군으로 고쳤다. ○ 20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35리이다. ○ 야로(冶爐)는 속현이다. 신라 때의 적화현(赤火縣)이다. ○ 고성(固城) : 성이 있다. 본래 가야국(伽倻國)이니, 신라가 차지하여 고자군(古自郡)을 만들었다가 고성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 고주(固州)로 고쳤다가 뒤에 현으로 낮추었다. 또 남해와 합하였다가 곧 이전대로 하였다. ○ 철성이라고도 한다. ○ 14면, 서울과의 거리는 9백 10리이다. ○ 교화량(蛟火良)은 폐현이다.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 남해(南海) : 성이 있다. 바다 가운데의 섬이다. 신라 때 전야산군(轉也山郡)이라고 하다가 남해로 고쳤다. 고려 때에 현을 두었다. 태종 때 하동(河東)과 합하여 하남현(河南縣)이라고 하다가 뒤에 분할하여 해양현(海陽縣)이라고 일컬었다. 진주의 금양부곡(金陽部曲)을 예속시켰다가 얼마 안 가서 도로 진주에 환속시켰다. 세종 때 곤명현(昆明縣)과 합쳤다가 다시 분할하였다. ○ 전산(轉山)ㆍ화전(花田)ㆍ윤산(輪山)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1천 45리이다. ○ 난포(蘭浦)는 폐현이며 신라 때의 내포현(內浦縣)이다. 평산(平山)도 폐현이다. 신라 때의 평서산현(平西山縣)인데 서평(西平)이라고도 한다. ○ 삼가(三嘉) : 성이 있다. 삼기현(三岐縣)은 신라 때 삼지현(三支縣)이라고도 하고 마장(麻杖)이라고도 하다가 삼기로 고쳤다. 태조 때 군으로 올렸다가 태종 때 현으로 낮추었다. 가수현(嘉壽縣)은 신라 때 가주화현(加主火縣)이라고 하다가 가수라고 고쳤으며, 가수(嘉樹)라고도 한다. 태종 때 두 고을을 합하여 삼가현으로 하였다. ○ 기산(岐山)ㆍ봉성(鳳城)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83리이다. ○ 의령(宜寧) : 성이 있다. 신라 때 장함현(獐含縣)이라고 하다가 의령으로 고쳤다. ○ 의춘(宜春)ㆍ의산(宜山)이라고도 한다. ○ 19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95리이다. ○ 신번(新繁)은 속현이다. 신라 때 신니현(辛?縣)이니 주오촌(朱烏村)이라고도 하고, 천천현(泉川縣)이라고도 하다가 의상(宜桑)으로 고쳤다. ○ 칠원 : 성이 있다. 신라 때 칠토현(漆吐縣)이라고 하다가 칠제(漆堤)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칠원(漆原)으로 고쳤다. 칠원(漆園)이라고 쓰기도 한다. ○ 구성(龜城)ㆍ무릉(武陵)이라고도 한다. ○ 4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80리이다. 구산(龜山)은 속현이다. 본래 성법부곡(省法部曲)이니 고려 때 올려서 현을 만들었다. 은산(銀山)이라고도 한다. 창원부의 서촌(西村)에 넘어서 들어 있다. ○ 진해(鎭海) : 성이 있다. 고려 때의 진해현이다. 선조 신축년에 폐읍하였다가 광해군 때 다시 두었고, 인조 정묘년에 폐읍하였다가 기묘년에 다시 두었다. ○ 팔진(八鎭)ㆍ우산(牛山)이라고도 한다. ○ 3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7리이다. ○ 문경(聞慶) : 신라 때의 관문현(冠文縣)이니 고사갈이성(高思曷伊城)이라고도 하다가 관현(冠縣)으로 고치고 또 관산(冠山)으로 고쳤다. 고려 때 문희군(聞喜郡)으로 고쳤다가 뒤에 문경으로 고쳤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77리이다. ○ 가은(加恩)은 속현이다. 신라 때 가해현(加害縣)이라고 하다가 가선(嘉善)이라고 고쳤다. 호계(虎溪)는 폐현이다. 신라 때의 호측현(虎側縣)인데 신라 때에는 고령에 예속되었었다. 배산성(拜山城)이라고도 한다. ○ 함창(咸昌) : 본래 고령가야국(古寧伽倻國)이니 신라가 차지하여 고동람군(古冬攬郡)으로 만들었다. 고릉(古陵)이라고도 하다가 고령(古寧)으로 고쳤다. 고려 때 함령(咸寧)으로 고쳤고 또 함창으로 고쳤다. 6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7리이다. ○ 지례(知禮) :신라 때 지품천현(知品川縣)이라고 하다가 지례로 고쳤다. ○ 구성이라고도 한다. ○ 4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24리이다. ○ 두의곡부곡(頭衣谷部曲)은 속현이다. ○ 고령(高靈) : 본래 대가야국(大伽倻國)이니 신라가 차지하여 대가야군을 만들었다가 고령으로 고쳤다. ○ 고양(高陽)ㆍ영천(靈川)이라고도 한다. ○ 14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84리이다. ○ 단성(丹城) : 강성현(江城縣)은 신라 때 궐지군(闕支郡)이라고 하다가 궐성(闕城)으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강성현(江城縣)으로 고쳤다. 태종 때 영선(永善)에 임시 예속되어 있던 명진현(溟珍縣)과 합하여 진성현(珍城縣)이라고 불렀다. 단계현(丹溪縣)은 신라 때 적촌현(赤村縣)이라고 하다가 단읍(丹邑)으로 고쳤고, 고려 때 단계(丹溪)로 고쳤으며, 공양왕 때에는 강성(江城)에 예속시켰었다. 세종 때 두 고을의 이름을 따서 단성으로 고쳤다. 선조 기해년에 폐읍하였다가 광해군 계축년에 다시 두었다. ○ 구성(龜城)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46리이다. ○ 단계는 폐현이다. ○ 개령(開寧) : 감문소국(甘文小國)이니 신라가 차지하여 청주(淸州)를 설치하고 군주(軍主)를 두었다가 감문군(甘文郡)으로 고쳤고 개령으로 또 고쳤다. 고려 때 현으로 고쳤다. ○ 감주(甘州)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58리이다. ○ 사천(泗川) : 성이 있다. 신라 때 사물현(史勿縣)이라고 하다가 사수(泗水)로 고쳤는데, 고려 때에 사주(泗州)로 고쳤다. 태종 때 사천현으로 고쳤다가 뒤에 진을 설치하였다. 첨사로 삼았다. 뒤에 다시 현으로 고쳤다. ○ 동성(東城)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6리이다. ○ 웅천(熊川) : 성이 있다. 신라 때 웅지현(熊只縣)이라고 하다가 웅신(熊神)으로 고쳤다. 고려 때는 금주(金州)에 예속되었다. 세종 때는 이 고을에 요새지를 설치하고 첨사를 두었다. 문종 때 웅천현으로 고쳤으며, 중종(中宗) 5년에 부로 올렸다가 왜구를 평정한 곳이기 때문이다. 곧 이전대로 하였다. ○ 웅구(熊口)ㆍ병산(屛山)ㆍ웅산(熊山)이라고도 한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70리이다. ○ 안의(安義) : 이안현(利安縣)은 신라 때 마리현(馬利縣)이라고 하다가 이안으로 고쳤다. 고려 말기에는 감음(感陰)에 이속시켰다. 감음현은 신라 때 남내현(南內縣)이라고 하다가 여선(餘善)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감음이라고 고쳤으며, 뒤에는 부곡으로 낮추었다가 다시 현으로 하였다. 태종 때 관아를 이안에 옮기고 안음(安陰)이라고 하였다. 영종 기유년에 폐읍하였다가 종단(終丹)이라는 계집아이가 7세에 아들을 낳았다 병진년에 다시 현을 두고 이름을 안의로 고쳤다. ○ 화림(花林)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7백 52리이다. ○ 감음은 폐현이다. ○ 산청(山淸) : 신라 때 지품천현(知品川縣)이라고 하다가 산음(山陰)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합천에 예속되었다가 공양왕 때에 현을 설치하였다. 영종 때 산청으로 고쳤다. 산양(山陽)이라고도 한다. ○ 14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6리이다. [譯: 민족문화추진회. 원문의 내용이 길어 편의상 글을 나누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