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의 성자 존 플레쳐
(John Fletcher, 1729~1785)
아이작 테일러는 말했다.
「적어도 플레쳐는 당대에 찾아보기 힘든 성자였다.」
또 당대의 훌륭한 감리교 목사였던 딕슨 박사는 말했다.
「사도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플레쳐는 아마 지상에서 가장 거룩한 성자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 감리교의 창시자인 웨슬리는, 자기는 80년에 걸쳐서 모든 면에서 영미(英美)에서 가장 성결한 사람은 플레쳐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감리교파의 지도급 계승자로서 그를 택했다.
문필 및 복음전도로 크게 명성을 떨친 그는 본래 스위스 태생으로 그의 집은 제네바나, 알프스 산이나, 유명한 칠론 및 로우산 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곳 중의 하나인 레만 호숫가에 있었다. 그의 부모는 고귀한 신분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는 본래는 쟝(Jean)이라고 했는데 1729년에 태어났다.
플레쳐는 어려서 하나님을 몹시 무서워하였고, 마음이 퍽 양순하였다. 그가 일곱 살쯤 되던 어느 날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 때 보모가 이런 말을 했었다.
「이 장난꾸러기 놈아, 귀신이 장난꾸러기들을 모두 잡아가는 줄을 모르고 있냐?」
이 말은 그를 몹시 떨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해 주셨다고 믿게 되기까지 기도를 그치지 않고 계속했다고 한다. 이후로 그는 퍽 모범적인 아이가 되었다.
크리스마스 에반스나 그밖에 많은 사람들처럼 그도 어려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겪었다. 그는 세 번이나 물에 빠져 죽을 뻔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큰일에 쓰시려고 택한 이의 목숨을 보살펴 주셨다.
플레쳐는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제네바 대학교에서 우등을 차지했었다. 그 뒤 그는 렌쯔부르크에 가서 독일어, 히브리어, 고등수학 등을 배웠다. 그는 아주 어려서부터 전도자가 될 생각
을 가지고 있었으나 나중에는 성직을 맡을 생각을 포기했었다.
그는 말했다. 「내가 처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일곱 살 때였다고 생각되는데, 그때 나는 나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고 내게 맞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교회를 봉사하는 일에 몸을 바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너무나 패역해진 세태는 나의 마음을 약화시켜, 내 마음 속에 새겨졌던 하나님의 은총의 말씀이 아니었던들 나는 아주 시들고 말았을 것이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목사가 될 생각으로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으나, 나중에 심사숙고 해 본 결과 그처럼 무거운 직책을 감당키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어, 또 예정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친구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군대에 들어가기로 정했다.」
그는 칼빈주의의 본거지에서 났으나 칼빈주의 사상에 대하여는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이다. 그는 비록 유순한 인물로서 유혈과 전쟁사상에는 반기를 들 만한 사람이었으나, 뜻에 맞지 않는 교리를 전하기보다는 차라리 군인이 될 것을 택한 것이다. 그는 대위의 계급으로 포르투갈을 위하여 브라질에 맞서 싸울 참이었으나, 하나님의 섭리의 사고로 말미암아 실전에 참전하지는 못했다. 배가 떠나기 전에 하녀가 차탕관을 그의 발에 엎질러 다리를 몹시 데는 바람에 떠나질 못했는데, 이처럼 주께서는 그의 계획을 꺽으시고 만 것이다. 그 뒤 그의 숙부는 그에게 대령 자리를 구해주며 네덜란드군에 입대하라고 권했으나, 그 숙부가 죽고, 전쟁도 끝나는 바람에 또다시 군입대는 좌절되었다. 주에서는 다시금 그의 계획을 꺾으신 것이다.
1752년에 플레쳐는 영어를 배우려고 영국으로 갔다. 그는 쉬럽시어 주의 토마스 힐의 두 아들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그 동안에 그의 신앙은 돈독해졌다. 그가 꾼 무시무시한 최후의 심판의 꿈은 그를 타락한 자리에서 일깨워 주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며칠 동안은 크게 낙심이 되고 마음이 피로와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러던 즈음에 그는 '밤낮 기도밖에 모르는 집단'이라는 소문이 도는 감리교파의 소식을 듣게 되어 그들을 만나기로 했다. 그들의 소식을 듣고나니까 자기에게는 어떤 영적인 변화가 생기지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는 그린의 설교를 듣고, 비록 자기는 대학에서 신학논문으로 상까지 한 바 있지만 신앙의 본질에 대하여는 이해가 모자랐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죄인된 실상을 밝히 직관하게 하여 그는 1755년 1월 12일자 일기에 이런 글을 썼다.
「내가 자랑삼은 모든 의라는 것은 결국 한갖 더러운 누더기 같은 것들이었다. 비록 나는 애송이이기는 하지마는 아주 못된 놈이므로, 내가 거듭나 새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내 분깃은 지옥이 되고 말 것이다.」
그는 자기가 죄를 짓던 일, 회개하던 일, 또 죄를 짓던 일 그러나 결국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던 일을 썼다.
「정월 21일, 나는 나의 죄, 비참, 무가망 등에 대한 고백을 썼으나, 또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를 추구할 결의도 했으나, 나의 사업이 나를 불러내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정월 23일 목요일, 금식하던 날, 그는 하도 심각한 시련에 빠져 낙담한 나머지 거의 아주 절망 상태에 떨어지고 말았다.
「나는 거의 새벽 한 시가 되도록 기도를 계속하다가 문득 성경을 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치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나는 비로소 기쁨이 충만해 다시금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항상 나의 짐을 주님께 맡길 수 있게 되기를 간구하였다. 다시 내가 성경을 폈더니 이런 말씀이 나왔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사 41:19) 이에 나의 희망은 크게 부풀어, 죄와, 지옥과, 모든 고통의 근원을 정복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아름다운 약속의 말씀을 발견하고 성경을 덮으려다, 다시 이런 말씀이 눈에 띄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요 14:13). 이리하여 나는 죽도록 하나님께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하고 기쁜 마음으로 잠자리로 들어갔다.」
이는 그가 그리스도께 완전히 헌신하게 된 경위를 그의 일기나 서신 속에서 추려온 것들이다. 그의 미망인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이런 글을 써 놓았다.
「나는 그에게서 들은 말을 이렇게 보태어 적습니다. 그는 더욱 더 주님이 마음을 채워 주시며, 주님의 사랑을 채워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던 터에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모습을 믿음의 눈으로 처다보았던바, 이런 말씀이 힘있게 들려왔다고 했습니다.
죄인들의 갈망을 주님 안으사,
붙잡혀 상처받고 죽임당했네.
아, 이루셨도다. 주님의 희생!
우리 죄값에 그 몸 바쳤네.
오! 하늘의 맹렬한 불
그 제물 살랐어라.
그는 하나님과 사람 양측의 고난을 지셔,
온 세상 죄짐 모두 지셨네!
우리 파멸 엎으시려 그는 고난 받나니,
오! 주님 그분은 내 생명떡 되시네.
그의 모든 속박의 끈은 이제 끊기고, 해방된 그의 심령은 더 맑은 공기를 숨쉬게 되었읍니다. 그는 죄를 밟고 정복했으며, 주님 안에서 그는 승전가를 부를 수 있었읍니다. 그때로부터 그는 주님의 길을 걸었으며, 한 주에 이틀 밤은 꼬박 독서와 기도와 명상으로 지새우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지냈읍니다.」
그는 겸허한 사람이었으며 자신에 대한 일은 별로 말하지도 쓰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의 깊은 신앙체험의 내용을 낱낱이 알아내기는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는 온전한 사랑이라든가 온전한 성결에 대한 글을 남겼다. 그도 웨슬리 모양으로 사람이 여러 면에 있어서 불완전하더라도, 그들에게 주어진 재능과 힘을 다하면 사랑에 있어서나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완전할 수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성령의 세례의 약속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오순절 때와 마찬가지로 믿는 이들에게는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비록 그가 자신에 대하여 쓴 글들은 별로 없으나, 우리는 그의 미망인의 글을 통하여 다소나마 그의 깊은 신앙체험을 알아볼 수 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뒤 그는 더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것 같은데, 그 작용이 무척 강했기 때문에, 그는 영과 육이 마치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읍니다. 그의 모든 욕망은 오직 귀하신 주님을 섬기는 일에 헌신한다는 한 가지 초점에 집중되어 그 일을 가장 잘 해내려면 성직을 맡음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읍니다.」
1781년에 있었던 어떤 모임에 관해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방으로 들어가니까 하나님의 종(플레쳐)은 모여앉은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시구를 보기드문 영감으로 읽고 있었습니다.
우리 도우시는 주님, 가까이 오셔서
하늘문을 여시사 뵈옵게 하소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당신을 뵈옵고,
우리의 깨어진 심령 바치게 하소서.
아버지, 나의 아버지 들으시사,
하늘의 불수레 내려보내 주시고
이스라엘 준마를 보내 주시사,
빛나는 당신의 세계 우리 가게 하소서.
우리도 주님 위해 죽으리이다
고난, 불, 피바다 뭐든 감수코,
우리 모두 승리로이 분골쇄신하여,
하나님의 심오한 품에 안기리이다.
그리고 그는 온 심령을 기울여 가르치고 기도하고 찬미했는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하늘로부터의 신비스러운 힘에 의하여 발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저녁이 끝난 뒤에 그는 사도행전 2장을 읽고 설명하기를, 예언을 한다고 하는 것은 오순절 때 모양으로 성령에 충만한 이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새 마음과 찬양의 새 말로써 하나님을 찬양함인 것이라고 하였읍니다. 그는 신자들은 그 성령의 불을 입증하기 위하여 부름받은 사람이라고 하며, 하나님의 크신 약속인 오순절은 바로 그 성령의 부어주심을 시작한 날이라고 역설하였으며, 영광의 마지막 날이 가까왔으니, 처음 성령부어주실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성령의 부어주심을 바라야 할 것이라고 말했읍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이들이 우리 주님의 은총의 증인들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들도 주님의 사랑의 불길을 널리 펴야 한다고 하였읍니다.」
「다음에 그는 말했읍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하나님께서는 여기 지금 임재해 계십니다. 나는 그것을 이 자리에서 느끼고 있읍니다. 그러나 나는 주께서 나 위해 하신 일을 간증하기를 부끄러워한 몸이므로 나는 티끌에 얼굴을 가려야겠읍니다. 나는 오랫동안 영혼을 슬프게 하였으며 심히 천한 자리에 떨어져 있었으나 주께서는 나의 심령을 소생시켜 주셨읍니다.’
마지막 수요일 밤에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읍니다. ‘당신은 진정 죄에서는 죽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안에서 살아났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음성에 복종했읍니다. 지금도 복종하고 있읍니다. 나는 죄에서 해방되었읍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기쁨으로 이를 선포합니다. 주님의 은총에 영광이 돌아가도록 이를 증언합니다. 나는 죄에서는 죽었읍니다. 그러나 우리 주요, 임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안에서 살아났읍니다!’
「이로부터 며칠 뒤에 나는 그이가 완전한 속죄를 갈구하는 이들을 모아놓고 이 놀라운 구원을 믿으라면서 설교하는 것을 들었읍니다. ‘여러분은 채권자나, 주인과 더불어 모든 빚을 정산하고 나면, 거뜬히 자유의 몸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빚청산이 끝났다고 생각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갚아주셨읍니다. 여러분의 빚도 갚아주셨읍니다. 주께서는 여러분의 사죄와 성결을 맡아 주셨읍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부터 여러분은 진실로 죄에서는 죽고, 하나님 안에서는 살아났음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자, 그러면 두려워 말고, 믿고, 또 믿고, 믿으시오, 순간 순간마다 믿기를 중단하지 마십시오! 이 진정한 자유는 믿음에서만 얻어지고,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철두철미 믿는 이에게 있어서는, 그 믿음은 그의 속에서 불과같이 되어, 우리 주, 우리 임금, 그 주님의 거룩한 사랑의 불길을 입으로 공포하지 않을 수 없게 하여, 여러분을 최고로 구원받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플레쳐의 겸손 때문에 그의 신비로운 하나님과의 교제의 내용을 알아볼 수는 없지마는, 이상과 같은 로져 부인의 말로나마 그의 깊은 신앙체험이 어떠한 것이었으리라는 것을 다소나마 엿볼 수 있다. 그는 극히 보기 드문 성자들처럼 주님과 같이 걸었고, 주님과 같이 말했고, 살았다. 그는 선전이나, 인기나, 논쟁과는 인연을 멀리한 사람이었으며,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수줍어 한 사람이었다.
그는 예언서 연구의 학자였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확신하여 마지 않았다. 그는 철저한 절식가요, 소식가로 채소와 버터와 우유만을 먹었다. 그의 모든 시간은 보람 있는 일에만 쓰여 졌고, 크리스챤에 관한 문제 이외는 별로 말한 일이 없었다.
1756년경 그는 감리교파에 들었는데 그뒤 목사직을 맡을 일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다가, 1757년에 영국교회 목사로 안수를 받고 그뒤로는 웨슬리의 최대의 조력자요 동역자가 되었다. 3년 동안 그는 굉장한 영력으로 복음을 전했는데, 하나님은 도처에서 그에게 문을 열어 주셨다. 그의 설교는 죄악에 대하여 대담하게 공격하는 것이었으므로 모두 밥짝 놀라곤 하였다. 설교자로서의 그의 명성은 이미 대단하였으며, 웨슬리나. 화이트립드나, 헌팅돈의 백작부인과는 친근한 사이였다. 1760년 그는 아델리에 있는 영국교회의 교구목사가 되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기서 봉직하있다.
그는 마밀리에서 첫 10년 동안을 설교와 교인심방과 신학연구와 여러가지 종교사업에 종사하였다. 이 동안에 그는 감리교회의 강력한 수호자가 될 준비를 쌓은 것이다. 1765년 이후에 마델리 근방에 감리교파가 형성되었는데 그는 종종 그들에게 가서 설교하였다. 그럴 때마다 많은 무리들이 몰려나와 그의 설교를 들었다. 1765년 그는 바아터 및 브리스톨을 방문하고 헌팅톤 백작 부인의 큰 집회실에서 설교를 하였다. 그녀는 그의 설교에 대하여 「모두 그의 설교에 깊은 감동을 느꼈다. 그의 설교는 진정 사도적인 것이었다고 적었다. 그가 마흔 살쯤 되었을 때 그의 고국인 스위스를 찾은 일이 있었는데, 거기에서도 놀라운 영력으로 설교를 하여, 어디를 가나 그들 거의 초인처럼 여겼다. 어떤 늙은이는 그를 오래 붙잡을 수 없음을 한탄하여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아, 이는 우리 나라에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내 평생에 천사다운 분을 꼭 한 분 만났는데 이제 이분을 우리는 놓쳐야 할 운명이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대머리가 된 그는 1770년에는 이탈리아를 찾아갔는데 로마에서는 사도 바울이 죄수가 되어 걸어갔던 아피안 웨이를 성스러운 모습으로 몸소 걸어갔다. 1776년에 그는 웨슬리와 더불어 영국 각 곳으로 전도 여행을 떠났다.
한동안 그는 헌팅톤 백작부인이 목사 양성을 위해 설립한 트레바카 대학의 학장일을 보았는데, 그는 거기서 천사처럼 존경을 받았다. 그 대학의 수석 교수였던 벤슨 씨는 말했다.
「그는 하나님의 천사처럼 존경을 받았읍니다. 우리 모두가 그를 얼마나 존경하였는지 나의 둔한 입으로써는 형언할 수가 없읍니다.」
벤슨은 또 그가 그 대학에 와서 학생들을 모아놓고, 목사에게 있어서 고전을 공부하는 일보다도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일이 얼마나 더 소중한 질적 요소인지 모른다고 말씀할 때 학생들은 딴 공부를 할 생각들을 잊고 그의 이야기를 듣기에만 열중했었다고 하였다. 그는 그때 학생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지게 해 달라고 많은 시간을 기도에 바쳤다. 그는 성령의 강력한 힘에 압도되어 이렇게 소리친 일도 있었다. 「오, 나의 하나님, 임해 주십시오, 이 그릇은 터질 것만 같사옵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는 그릇을 더 크게 하여 달라고 간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1771년에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인간의 자유의지 주창자)주의와의 큰 논쟁이 벌어졌는데 그는 감리교파에서 지지한 알미니우스 주의를 옹호하고 나섰다. 웨슬리는 그 논쟁에 굉장한 열을 띠고 나섰으나 그는 온건하게 나아가 양측 사람들에게 좋은 느낌을 주었다. 플레쳐는 그의 대작인 《신앙지상주의 (도덕률폐기론)를 견제한다》라는 책 속에서 성경 구절들을 잘 조화시켜 운명 예정설이나 선택설, 인간의 자유행위와 도덕적 책임 등은 결코 서로 모순 배치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진술하였다. 이 저서는 감리교 신학의 최대 보루의 하나로 아직도 남아 있다.
1784년 감리교파 목사들 회의 때 플레쳐가 자기이름도 그 감리교파 목사 명부에 적어넣어 달라는 말을 하자 웨슬리도 크게 감격하였지만 모두들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다음 해에 그는 자는 듯이 24시간 동안을 누워 있다가 이 세상을 떠났다.
플레쳐가 거룩한 사람이었다고 하여 시험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는 웨슬리더러 사탄은 몇 번이나 자기 목숨을 끊도록 시험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는 열정적이어서 밤을 새어가며 자신의 성질을 극복하게 해달라고, 또는 마루바닥에 엎디어 슬픔과 번뇌를 이기고 승리를 거두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한편으로 그는 유순한 이로 이름나 있다.
<플레쳐의 생애>라고 하는 책에서 웨슬리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돌아가기전 20년 동안에는 아무도 그를 성전 밖에서 본 일이 없으며,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그의 입에서 성난 말을 입 밖에 내는 것을 들은 이가 없었다.」
[출처]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 제임스 콜슨, 홍성사, 1988, 77-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