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앙생활의 푯대! 궁극적인 구원!
히브리서 2:1-4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영국의 에딘버러 대학에는 유명한 교수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마취제와 방부제"를 발견한 심프슨이란 유명한 교수가 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 기자가 그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교수님, 교수님이 발견한 것들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심프슨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을 했습니다.
"제가 발견한 것들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한 가지는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것을 깨달은 것과, 또 한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얻게 된 구원입니다."
이 고백이 여러분에게도 공감이 되시지요? 이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위대한 것은 바로 구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히브리서 기자도 구원을 '큰 구원'이라고 칭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이 왜 큰 구원일까요? 이에 대해 부담임목사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해주셨습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우리가 멸망을 받지 않고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책에 보면 첫 번째 설교인 끔찍한 지옥에서 나오는 끔찍한 불 못, 영원한 고문과 고통, 견딜 수 없는 어둠과 고통에서 건진 바 된 것을 통해 큰 구원의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지옥이 어떠한 곳인지 알게 된다면 내가 그 지옥의 불 못으로부터 건진 바 된 것이 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더 실감하게 되실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지옥이 얼마나 끔찍한 곳인지 제대로 인식하게 될 때 구원이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 것인지 실감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천국보다도 지옥에 대해 더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천국에 갈 사람보다 지옥에 갈 사람이 더 많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지옥에 대해 제일 많이 언급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왜 예수님은 무섭고 부담스런 지옥에 대한 이토록 많은 언급을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끔찍한 지옥이 실제로 있고, 또한 우리가 절대로 그 지옥만은 가지 않기를 간절히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조나단 에드워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설교자들이 지옥의 불구덩이에 대해 자꾸 설교함으로써 결국 사람들에게 겁만 주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영원한 고통받는 장소인 지옥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더욱이 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빠질 위험천만한 상태에 놓여 있다면 그 사실에 대해 경고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백번 옳습니다. 지옥이 실제로 있다면 또한 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가게 될 위험에 처해 있다면, 무엇보다 제일 먼저 지옥의 실존에 대해 경고하며 설교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토마스 아 켐피스는 지옥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지옥에서 한 시간 받는 고통이 이 세상에서 100년 동안 받는 가장 심한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들다."
이 세상에서 사람에게 가장 큰 고통은 바로 불입니다. 또한 상처 중에 제일 두려운 것은 화상입니다. 화상은 치료의 과정이 가장 고통스러운 상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옥은 불구덩이입니다.
마가복음 9:48-49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제가 청주에 있었을 때 화상을 입어서 화상 병원에 입원하신 성도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래서 심방하기 위해 병원에 들어갔는데, 정말 소름 끼칠 만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바로 화상 상처를 소독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저희 성도님께서 말씀해주시길 붕대를 떼고 소독하고 새 붕대로 다시 감을 때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어른인데도 비명을 지르고 오열하게 된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절대 지옥은 가지 말아야 함을 화상 병원에서 절실하게 느끼셨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1978년 실제로 죽어서 지옥에 다녀온 아이반 터툴 목사님은 그의 책 『1시간의 죽음, 지옥과 천국에 다녀오다』에서 지옥의 고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지옥에서 느끼게 될 고통은 당신이 이 땅에서 육체적으로 느끼는 고통과는 같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전인을 삼켜버리는 고통입니다. 당신이 느낄 수 있었던 가장 지독한 치통이나 두통보다 1,000배나 더 고통스러운 것이며, 그 고통은 당신의 전인을 관통합니다."
이토록 끔찍한 고통이 있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한번 지옥에 들어가면 다시는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희망이 있어야 힘들어도 견딜 수 있는 것인데 지옥에는 어떠한 희망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지옥에 있는 사람들을 가장 힘들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끔찍한 지옥에서 건져지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얼마나 큰 구원입니까? 이런 의미에서 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은 구원의 위대한 가치와 신앙생활의 푯대에 대해서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1. 바른 복음 진리에 유념함으로써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사랑하는교회는 구원론에 대한 설교를 정말 많이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바른 구원론을 제대로 아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루터와 칼빈의 교리에 속아서 지금도 오직 믿음을 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구원의 조건으로 오직 믿음이 아니라 회개와 믿음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15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사도행전 20: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이에 대한 토마스 왓슨도 그의 저서 『회개』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생에서 성도에게 절대 필요한 두 가지 은혜가 있다면 그것은 회개와 믿음이다. 이 둘은 성도가 하늘나라로 날아가는 데 필요한 두 날개이다."
이처럼 구원의 조건은 오직 믿음이 아닙니다. 회개와 믿음입니다. 또한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견인의 교리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진짜 거듭난 사람일지라도 진짜 버림받을 수 있음을 성경은 여러 곳에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자신도 버림받을 가능성이 있기에 실제로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몸을 쳐 복종시킨다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말은 비성경적인 교리입니다.
실제로 지옥에 가보신 아이반 터툴 목사님은 지옥 체험을 통해 사탄이 그리스도인들을 속이는 가장 큰 거짓말 중에 하나가 바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었다는 것을 아셨다고 합니다. 지옥에는 자신이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고 책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이 거짓말은 무신론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고 있다고 탄식했습니다. 또한 지옥 체험을 한 로리 디토 여사도 지옥에서 알게 된 가장 큰 거짓말은 바로 한 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라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본문 말씀도 구원을 받았어도 구원을 잃을 수 있기에 바른 진리 위에 반드시 서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2:1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여기서 '들은 것'이라 함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흘러 떠내려가다'라는 말은 풍향이나 조류 등에 주의하지 않아서 배가 항구로부터 떠내려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궁극적인 구원의 항구에서 점점 멀어지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기에, 바른 진리에 확고히 서 있지 못한 자들은 결국 구원을 상실하게 될 위험이 있음을 경고해주는 말씀입니다. 이에 대해 윌리엄 레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배가 항구에 고정되지 못하고 흘러 떠내려가는 배의 이미지는 부주의와 관심의 부족으로 진리를 확고히 붙들지 못한 데 대한 생생한 비유를 제공해준다. 즉, 히브리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실제를 상실할 위험에 있다는 것을 경고한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와 같은 말을 하게 된 구체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교회 내에는 많은 이방인들이 개종하여 교회 성도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유대인 성도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가지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기독교를 버리고 다시금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배교의 위험성이 늘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동족인 유대인들의 비난과 로마의 권력자들로부터 오는 핍박과 박해로 인해 실제로 배교하고 유대교로 되돌아가는 자들이 그 당시 적지 않았습니다.
이렇기에 히브리서 저자는 유대인 성도들로 하여금 이미 들었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더욱 착념함으로 자신이 받은 구원을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도록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귀가 주는 시험과 유혹의 광풍이나 핍박과 박해의 광풍이 불 때 쉽게 휩쓸려서 방향을 잃고 망망대해로 흘러떠내려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바른 진리를 아는 것이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래야 항상 깨어 있을 수 있고 어떤 광풍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견고히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생활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궁극적인 구원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푯대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궁극적인 구원을 목표로 달려갔습니다.
만일 저와 여러분의 목표가 바울과 같지 않다면 방향을 잃은 것입니다. 즉, 우리는 거듭남으로 만족하거나 안주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중도에 배교하거나 중도에 타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궁극적인 구원을 얻을 때까지 우리는 생명의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즉, 제자로서의 대가를 지불하며 예수님을 주로 삼고 죽기까지 복종하면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마음밭 비유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에게 하는 도전과 경고의 메시지였습니다.
다시 말해, 복음에 바르게 반응하여 거듭났더라도 고난과 핍박에 넘어져 실족할 수도 있고, 또한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으로 넘어져 실족할 수도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중도에 낙오하지 말고 궁극적인 구원을 얻도록 도전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양용의 교수님은 그의 저서 『마태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는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에게 경고의 요소를 포함한 도전의 메시지를 제공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 진정한 제자의 요건은 처음에 긍정적인 반응을 하였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네 종류의 밭 중 두 경우는 처음에 긍정적인 반응을 하였지만 외부의 압력과 내부의 유혹 때문에 열매를 맺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제자는 열매를 맺기 위해 끝까지 철저하고 나누이지 않은 온전한 충성심을 보여야 하며, 그렇지 못한 제자는 결국 그 제자도의 진정성을 입증할 수 있는 열매를 맺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반응한 자라고 할지라도 언제나 자신의 상태를 점검해보도록 요청하고 있다."
이처럼 복음을 듣고 처음에는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 거듭났다하더라도 외부로부터 오는 핍박과 내부로부터 오는 유혹 때문에 궁극적인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제자는 바로 그리스도인들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항구에서 떠내려가지 않도록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참된 제자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참된 제자는 첫째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자기를 부인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자신과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 피 흘리기까지 육체의 욕심과 싸우고, 죄와 싸우고, 세상과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반드시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기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죄와 싸우는 자이고, 또한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이기는 자입니다.
반대로, 죄와 싸우지 않는 자, 즉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과 싸우지 않는 자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가 목회자든지 그가 중직자든지, 죄와 싸움이 없는 자는 세상과 타협된 자요, 세상과 벗이 된 자입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지 말라고 빌립보 성도들에게 눈물로 간곡하게 호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침은 결국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18-19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사도 바울의 말에 의하며 빌립보 교회 안에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궁극적인 목적과 이반되는 삶을 사는 것이며, 십자가의 목적과 반대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죄의 종노릇하지 말며 의 가운데 순종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라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 죄사함을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따라 살도록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십자가의 은혜를 받고도 그 은혜를 헛되이 하며,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라고 사도 바울은 눈물로 호소하며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옥스포드 주석』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십자가의 원수를 반도덕주의적 성향이 강한 영지주의자로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들이 왜 십자가의 원수인가? 십자가의 정신은 자기 부인이며, 자아가 죽음으로써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신의 정욕대로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자유를 남용하여 육체의 욕심을 충족시키는 방종을 일삼는 소위 도덕 폐기론자들이다."
마치 지금의 구원파처럼 교회 안에 있는 영지주의자들을 말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지도 않고 죄 가운데 살아가면서도 자신은 믿음이 있으니 천국에 갈 것이라고 착각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제가 학창시절에 보았던 감동스런 다큐멘터리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오랜 기간 담배를 피워서 결국 폐암에 걸리셔서 죽음이 임박해 있었는데 대학생 딸이 그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자기 폐를 떼어내어 아버지에게 이식시켜 주려고 한 것입니다.
수술하기 전, 아버지와 딸이 수술실에서 누워 말없이 손을 잡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게 장시간 폐 이식 수술을 잘 마치고 아버지는 죽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앵커는 앞으로 아버지한테 어떤 바람이 있느냐고 딸에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제, 저희 아버지에게 저의 폐 한쪽을 드렸으니 다시는 아버지가 담배를 피시지 않고 오래도록 건강하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저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이 장면을 보는데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여대생이 자신의 몸에 칼자국을 내는 것도 감내하고 아버지를 위해 희생하면서 수술을 통해 자신의 폐 한쪽을 아버지에게 드린 것이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얼마나 큰 희생입니까?
그런데, 만약 그 아버지가 다시 담배에 중독이 되어 살아간다면 그것은 딸의 희생을 헛되이 되게 하는 것이요, 또한 딸의 희생과 헌신에 대해 원수로 행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폐를 기꺼이 내어준 딸이 다시 담배에 중독이 되어 살아가는 아버지를 볼 때 어떠한 마음이 들겠습니까? 아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과 비통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게에 폐 한쪽만 내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 영혼을 구원하시려 자신의 물과 피를 다 쏟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손과 발에 대못이 박히셨고,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셨고, 등은 채찍으로 찢기셨으며, 옆구리는 창으로 찔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이토록 자신을 희생하신 이유는 죄사함뿐 아니라, 바로 우리가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말고 거룩한 삶을 살라고 예수님께서 희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삶 속에서 자기부인을 하지 않고 다시 죄 가운데 행하며 육체의 정욕대로 살아간다면 이것이야말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며, 이런 목회자와 신자로 인해 주님은 지금도 근심하시며 고통받고 계십니다.
코로나 기간 기도하면서 태화강변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의 자녀 중에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자들이 많단다. 이 때문에 내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너는 아느냐?"
이 음성을 듣는데 예수님의 너무도 깊은 슬픔과 비통함이 느껴졌습니다.
예수님이 죽기까지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 크신 은혜를 받고도 그 은혜에 합당하지 못하게 사는 것 때문에 주님은 깊이 슬퍼하시고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아마, 사도 바울도 이러한 주님의 마음이 임하여 눈물로써 간곡하게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지 말라고 호소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국, 십자가의 원수로 계속 살게 되면 바울의 말처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성령을 의지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둘째로, 참된 그리스도인은 핍박과 박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며 십자가의 고통을 이겨내신 예수님을 본받아 핍박을 견뎌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겸하여 받으리라고 말했습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은 다 박해를 받았습니다. 선지자 중 박해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7: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신약에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 동일한 고난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해 존 라일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제자들은 평탄한 노정과 평안한 여정을 기대해서는 안 되었다. 제자들은 투쟁과 충돌, 상처, 반대, 박해 그리고 아마 죽음까지도 각오해야만 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앞으로 박해를 받게 될 것임을 미리 경고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당부를 하십니다.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제자들이 핍박을 두려워하여 배도함으로써 멸망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 뒤에 다시 한번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마태복음 10:31-33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이 거듭 이렇게 경고하시는 것은 실제로 배교하는 자들의 결말은 결국 지옥에서 멸망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양용의 교수님은 『마태복음 어떻께 읽을 것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제자들이 공개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려면, 그들은 자신들의 육체를 죽일 수도 있는 사람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멸망시키실 수 있는 하나님 한 분뿐이다. 예수님은 여기서 두 종류의 죽음, 곧 육체만의 죽음과 육체와 영혼의 죽음을 대조하신다. 세상을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배교에 빠진 자들의 결말은 육체와 영혼이 함께 지옥에서 멸망당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용기 있게 목숨을 걸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세가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어집니다.
『초대교회순교록』을 보면 초대교회 때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귀족에서부터 노예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순교에 처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다가 총독 앞에 끌려와 재판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시인하고 고문과 죽임을 당하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배교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려고, 죽는 순간까지 서로 기도하고 서로 권면을 했다고 합니다.
초대교인들은 협박과 고문, 심문 앞에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했고, 죽임을 당함으로써 결국 그들의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고난 중에서도 끝까지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참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단지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따라오는 것으로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 중에는 여러 가지 기적을 보고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고, 자기 필요 때문에 따르는 사람도 있었고,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해서 권력을 얻고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차피 핍박이 임하면 다 떠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을 끝까지 따른 사람들은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사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라고 고백하는, 주님을 진정 사랑하며 진리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따르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바른 진리에 착념함으로써 광풍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참된 제자가 되어 궁극적인 구원을 다 얻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