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헨리 드러몬드, IVP, 2018
11-40쪽 발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에게 묻는 최대의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최고의 선(summum bonum)은 무엇인가?
우리 앞에는 단 한 번뿐인 삶이 놓여 있습니다. 그 삶 속에서 가장 고귀한 욕망의 대상, 탐내고도 남을 최고의 선물은 무엇입니까?
종교계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믿음이라고 우리는 익히 들어 왔습니다. 그 위대한 단어가 수 세기 동안 대중 종교에서 으뜸 자리를 차지해 왔으니, 믿음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줄로 여길 만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오류입니다. 이런 말을 듣다 보면 핵심을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방금 읽은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 기독교의 밑뿌리로 들어가 보면,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씀이 보입니다. 이는 무심결에 내뱉은 실언이 아닙니다. 이 말을 하기 직전에 바울은 믿음에 대해 말했습니다.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간과하기는커녕, 일부러 단어 셋을 대조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라고 말한 다음 한순간도 주저하지 않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이는 편견이 아닙니다. 사람은 흔히 자신의 강점을 타인에게 내세우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애초에 사랑은 바울의 강점이 아니었습니다. 관찰력이 예리한 사람이라면, 나이 들수록 성품 전반에 걸쳐 아름답게 성숙하고 무르익어 가는 바울의 온유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쓴 바울의 손을 처음 만났을 때, 그 손은 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이 편지에서 사랑을 최고의 선으로 꼽았다 해도 특별할 것은 없습니다. 기독교의 걸작들이 하나같이 이에 동의하니까요. 베드로가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말입니다. 요한은 한술 더 떠 “하나님은 사랑”(요한일서 4:8)이라고 합니다. 다른 곳에서 바울이 한 말은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로마서 13:10). 바울이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했을까요? 당시 사람들은 십계명은 물론 십계명을 토대로 만든 수백 수십 개의 계명을 지켜 천국에 가고자 애썼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한결 단순한 길을 보여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를 행하면, 그 수많은 계명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도 모두 행할 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랑한다면, 부지중에 모든 율법을 완성할 거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계명 가운데 어느 것이든 골라 보십시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애굽기 20:3).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에게 그런 말을 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까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출애굽기 20:7). 여호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분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컬을 꿈이라도 꾸겠습니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애굽기 20:8). 기쁨이 넘치는 사람이라면 일곱 날 가운데 하루를 떼어 사랑하는 상대에게만 오롯이 바치지 않겠습니까? 사랑은 하나님에 관한 이런 모든 율법을 완성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라면, 자기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을 꺼낼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사랑 말고 할 수 있는 건 없을 테니까요. 그런 사람에게 살인하지 말라는 말은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은 모욕으로 들릴 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소유를 어찌 훔칠 수 있겠습니까? 이웃에 대해 거짓 증언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도 쓸데 없는 짓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거짓 증언일랑 아예 안중에도 없을 것입니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당부도 꿈조차 꾸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보다는 오히려 이웃이 그것을 갖길 바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랑은 율법을 완성합니다. 사랑은 모든 법을 완성하는 법이며 옛 계명 모두를 지키는 새 계명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내재된 그리스도의 비밀입니다.
이제 바울은 이 점을 깨닫고, 이 고귀한 찬사를 통해 최고의 선에 대해 현존하는 가장 놀랍고 독창적인 해설을 제시합니다. 이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짧은 본문 첫머리에서는 사랑을 대조하고, 몸통부에서는 사랑을 분석한 후, 꼬리부에서는 최고의 선물인 사랑을 옹호합니다.
사랑의 대조
바울은 먼저 당대의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던 것들과 사랑을 대조합니다. 그것들에 대해 상세히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그것들이 열등함은 이미 명백합니다.
바울은 사랑을 말재주와 대조합니다. 인간의 영혼과 의지에 작용하여 고결한 목적과 거룩한 행동을 유발하는 능력인 말재주는 참으로 고귀한 선물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우리는 모두 그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사랑 없는 말재주란 아무 감정 없이 말로만 때우는 것이고, 공허한 것이며, 설득력 없는 속빈 강정임을 우리는 다 느낍니다.
바울은 사랑을 예언, 신비, 믿음, 자선과 일일이 대조합니다. 어째서 사랑이 믿음보다 클까요? 목적이 수단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사랑이 자선보다 클까요? 전체가 부분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믿음보다 큰 것은 목적이 수단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냐고요? 믿음은 영혼을 하나님과 연결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하나님과 연결하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수단은 사랑이란 목적을 위해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은 분명 믿음보다 큽니다.
또한 사랑이 자선보다 큰 것은 전체가 부분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자선은 사랑의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무수한 사랑의 길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심지어 사랑 없는 자선도 많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거리에 있는 걸인에게 동전 한 닢을 던져 주기는 아주 쉽습니다. 일반적으로 동전 한 닢 적선하는 편이 그러지 않는 편보다 더 쉬우니까요. 심지어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이 사랑인 경우도 흔합니다. 우리는 달랑 동전 한 닢을 치르고는 비참한 광경을 보면서 드는 동정심을 털어 내며 안도하기도 합니다. 너무도 헐값이요. 우리에게는 헐값이지만, 걸인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경우가 흔하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를 사랑한다면, 그를 위해 뭐라도 더 베풀 것입니다.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덜해 줄 수도 있겠지요.
다음으로 바울은 사랑을 희생 및 순교와 대조합니다. 선교사가 되려는 이들에게 간청합니다. 자신의 몸을 불태워 준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음을 명심하십시오. 정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방 세계로 가지고 갈 것들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자신의 인격에 새기고 반영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사랑은 우주적 언어입니다. 중국어나 인도의 여러 방언으로 말하기까지 여러 해가 걸립니다. 선교지에 도착하는 바로 그날부터,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의 언어가 무의식의 말재주를 발휘할 것입니다.
선교사의 정체성은 말이 아닌 사람에 달려 있습니다. 인격이 곧 메시지입니다.
아프리카 내지 깊숙한 곳 거대한 호수 지대에서 흑인 남녀를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그들 기억에 남아 있는 백인이라곤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유일했습니다. 그 어두운 대륙에서 리빙스턴의 발자취를 따르다 보면, 오래 전에 그곳을 거쳐 간 친절한 의사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이 보일 것입니다. 그들은 리빙스턴의 말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가슴속에서 고동치는 사랑은 느꼈던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거나 다름없는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가 일할 때, 그런 단순한 매력을 품고 가십시오. 인생을 건 그 일은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그보다 큰 것은 가져갈 수도 없고, 그보다 작은 것은 가져가서도 안 됩니다. 더 작은 것을 가져가느니 차라리 가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모든 재능을 갖출 수도 있고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를 할 수도 있지만, 자신의 몸을 불태워준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자신은 물론 그리스도의 대의에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의 분석
바울은 세 절에서 아주 짧게 사랑을 여러 덕목과 대조한 후, 이 최고의 선이 무엇인지 놀라운 분석을 제시합니다.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최고의 선이 복합적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빛과 같습니다. 과학자가 한 줄기 광선을 크리스털 프리즘에 투과하면 프리즘 반대 쪽에서 여러 성분의 색-빨강, 파랑, 노랑, 보라, 오렌지, 온갖 무지개 색으로 나뉘어 보이듯이, 바울이 최고의 선인 사랑을 자신의 영화된 지성이라는 참으로 아름다운 프리즘에 투과하면 반대쪽에서는 여러 성분으로 나뉘어 보입니다. 이른바 사랑의 스펙트럼 혹은 사랑의 분석치를 몇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 구성 요소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그것들이 평범한 개념들임을 발견할 것입니다. 하나같이 일상 가운데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미덕들이고, 삶의 모든 자리에서 모두가 실천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고귀한 것, 곧 최고의 선은 수많은 작은 것들과 평범한 덕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랑의 스펙트럼은 아홉 개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인내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
사랑은 온유하며
관용
시기하지 아니하며
겸손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예의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비이기심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온화한 성품
성내지 아니하며
정직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신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인내, 친절, 관용, 겸손, 예의, 비이기심, 온화한 성품, 정직, 신실-이러한 덕목들은 최고의 선물이며, 완전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 모두는 미지의 영원이 아니라, 인간과 삶 그리고 이미 알고 있는 오늘 및 가까운 내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사랑에 대해 많이 듣지만, 그리스도는 인간 사랑에 대해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늘과의 평화를 많이 이루려고 하지만, 그리스도는 땅 위에서의 평화를 많이 이루셨습니다. 종교는 이질적이거나 부가된 것이 아니라, 세속의 삶에 깃든 영감, 곧 이 속세를 관통하는 영원한 영의 호흡입니다. 요컨대, 최고의 선은 단 하나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평범한 날들 전체를 구성하는 무수한 말과 행동을 끝마무리 짓는 것입니다.
이들 구성 요소 각각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사랑은 인내입니다. 인내는 사랑의 자연스러운 태도로서, 수동적 사랑이자 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사랑입니다. 서두르지 않고 잠잠하며, 부름받을 때 일할 준비가 되어 있되 온순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단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견디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랍니다. 사랑은 이해하는 것, 그래서 기다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친절. 능동적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가 친절을 베푸시느라 자신의 생애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사용하셨는지 생각해 본 일이 있는지요? 순전히 친절을 베푸시는 데 말입니다. 이런 시각으로 그리스도의 생애를 훑어보십시오. 단순히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거나 그들에게 호의를 베푸시는 데 그리스도는 자신의 시간을 상당 부분 사용하셨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세상에 행복보다 더 위대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거룩입니다. 거룩은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능력을 우리에게 부여하셨습니다. 이는 대개 우리가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 때 가능합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그분의 다른 자녀들 몇몇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지금보다 더 친절하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이 친절을 얼마나 갈구하고 있는지요. 친절이란 베풀기도 아주 쉽고, 당장 실천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기억에서 좀처럼 지워지지도 않고요. 친절에는 엄청난 보상마저 따릅니다. 세상에서 사랑만큼 영예로운 채무자는 없으니까요. 영예롭기 그지없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사랑은 성공이고, 행복이며, 생명입니다. 브라우닝의 말마따나 "사랑은 생명의 원동력입니다.“
삶이 온통 기쁨과 비통
그리고 희망과 두려움을 자아내지만,
오, 그 상급은 우리가 사랑을 배울 수 있는
기회일 뿐-
사랑이 어떤 것일지, 어떤 것이었는지,
지금은 어떤 것인지를 배우는
사랑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십시오. 차별도 계산도 미룸도 없이 사랑하십시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아끼지 마십시오. 그들을 사랑하기란 아주 쉽습니다. 특별히 부유한 자들을 사랑하십시오. 흔히 부자들은 사랑이 아주 많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와 동등한 수준의 사람들을 사랑하십시오. 이는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우리가 가장 적게 사랑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비위를 맞추는 것과 기쁨을 주는 것은 다릅니다. 기쁨을 주십시오. 기쁨을 줄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참된 사랑의 정신으로 거둘 수 있는, 끊임없고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승리입니다.
저는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인생이란 단 한번 지나가고 마는 것. 그러니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는 선행이나 친절이 있다면, 지금 당장 실천해야지. 그 일을 미루거나 소홀히 하지 말아야지. 이 길은 한 번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이므로.”
관용.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관용은 타인과 경쟁하는 가운데 이루는 사랑입니다. 선행을 하려고 할 때마다 다른 사람도 같은 일을 하는 것이 눈에 띌 것입니다. 그들이 더 훌륭하게 해낼지도 모릅니다. 그들을 시기하지 마십시오. 시기는 우리 자신과 같은 선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품는 앙심으로 탐욕스럽고 비방하는 마음입니다. 기독교 관련 일이라 해서 비기독교적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운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러한 관대함의 은혜로 무장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의 영혼에 그늘을 드리우는 모든 무가치한 감정 가운데서도 가장 천박한 감정이 모든 일의 문턱에서 우리를 기다릴 것이 뻔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진실로 시기할 것이 있다면 단 하나, 넉넉하고 풍성하며 관대한 ‘시기하지 않는’ 영혼뿐입니다.
이 모두를 배우고 나서 배워야 할게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의 입술을 봉인하고 우리가 한 모든 것을 잊는 겸손입니다. 친절을 행함으로 사랑이 세상 속에 스며들어 그 아름다운 일을 마치고 나면, 음지로 돌아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침묵하십시오. 사랑은 자신이 한 일을 자신에게마저 숨깁니다. 사랑은 자기만족마저 포기합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이 최고의 선 가운데 다섯 번째 요소는 약간 색다른 느낌의 예의입니다. 예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사랑으로 예절과 관련된 사랑입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공손은 사소한 일 가운데 드러나는 사랑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예의란 작은 일들 속에서 이루는 사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손의 비결 하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다면 무례하게 행동할 수 없습니다. 배움이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 최상류 모임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그 마음에 사랑이 넉넉하다면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무례하게 행동할 수 없습니다.
칼라일은 로버트 번스에 대해 말하기를, 유럽에서 이 농부 시인만큼 진정한 신사는 없다고 했습니다. 번스가 모든 것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쥐와 데이지 꽃과 하나님이 만드신 크고 작은 모든 것을 사랑했습니다. 이 단순한 통행증으로 어떤 무리와도 어울릴 수 있었고, 에어 강기슭에 있는 그의 작은 오두막에서 궁정과 궁궐을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신사’라는 낱말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신사란 매사를 부드럽게 사랑으로 대하는 온유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사도의 온전한 기술이자 신비입니다. 신사라면 도리상 온유하지 못한 비신사적 행동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온유하지 못한 영혼, 사려 없는 무정한 본성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비이기심.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보십시오. [사랑은] 자기의 것마저 구하지 않습니다. 영국인들은 자기 권리에 아등바등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더 고차원적인 권리를 행사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우리에게 자기 권리를 포기하라고 요청하지는 않습니다. 사랑은 훨씬 더 깊은 울림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을 때, 우리는 자기 권리를 추구하거나 대수롭게 여기지 않으며, 개인의 이해타산을 일절 따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대개 외적 권리라면 말입니다.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 진짜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아예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일은 더 어렵습니다. 일단 자기 유익을 추구하고 사들이고 차지하고 누리게 되면, 이미 자기를 위하여 단물은 쏙 빼먹은 셈입니다. 그러면 포기라 해봤자 아주 작은 희생일 뿐입니다. 그러나 유익 자체를 추구하지 말고,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타인의 유익이라는 관점에서 보십시오.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예레미야 45:5)고 예언자는 말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물 자체에는 위대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물은 위대할 수 없습니다. 위대한 것은 오직 비이기적 사랑뿐입니다. 심지어 자기 부인마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쩌다 실수로 자기를 부인할 수는 있겠지요. 자기 부인이 정당화되는 것은 위대한 목적이나 보다 굳건한 사랑이 있을 때뿐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 자신의 유익을 구한 다음 그것을 포기하기보다 아예 구하지 않는 편이 더 어렵습니다. 이제 그 말을 거두어 들여야겠습니다. 어느 정도 이기심을 품은 사람에게만 맞는 말이니까요.
사랑에는 어떤 것도 난관이 되지 않습니다. 그 무엇도 어려울 것 없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멍에’가 쉽다고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멍에'는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인생길입니다. 따라서 다른 어떤 길보다 쉽고 행복한 길이라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있습니다. 행복은 소유와 얻음이 아닌 내어 줌에만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겠습니다. 행복은 소유와 얻음이 아닌 내어 줌에만 있습니다. 세계의 절반은 행복을 엉뚱한 곳에서 찾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이 소유와 얻음에 있다고, 다른 사람들의 섬김을 받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은 내어 줌에,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데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라]"고 그리스도는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20:26). 행복하려는 사람은 오직 하나의 길밖에 없음을 명심하십시오. 받기보다는 내어 주는 것이 더 복되고 행복합니다.
다음 요소는 아주 주목할 만한 것으로, 온화한 성품입니다. "[사랑은 쉽게] 성내지 아니하며." 사랑을 분석할 때 이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없을 겁니다. 우리는 못된 성품을 별로 해롭지 않은 약점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단순한 천성적 약점이나 가족적 결함 혹은 기질상의 문제로 말하지, 한 사람의 인격을 평가할 때 아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품의 문제는 사랑을 분석할 때 아주 중요합니다. 성경은 못된 성품을 인간 본성에서 가장 파괴적인 요소 중 하나로 거듭 책망합니다.
거친 성품이 특이한 것은 도덕적인 사람이 저지르는 악덕이라는 점입니다. 거친 성품은 흔히 그것만 없었다면 고결했을 인격에 떨어진 한 방울 얼룩입니다. 곧잘 화를 내거나 성미가 급하거나 '과민한 성격만 아니라면 완벽했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거친 성품과 고결한 도덕적 인격이 공존한다는 사실은 가장 이상하고도 서글픈 윤리 문제 중 하나입니다.
죄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뉠 수 있는데, 몸으로 짓는 죄와 성격으로 짓는 죄입니다. 탕자는 첫 번째 유형으로, 탕자의 형은 두 번째 유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아무 의심이나 이의 없이 탕자를 둘 가운데 더 악한 편으로 낙인찍을 것입니다. 과연 이게 옳을까요?
우리에게는 서로의 죄를 측량할 저울이 없습니다. 누가 더 거칠고 부드러운지는 인간이 하는 말일 뿐입니다. 성품이 더 고결하다는 사람이 저지르는 잘못은 열등한 사람이 저지르는 잘못보다 용서받기 힘들지 모릅니다. 사랑이신 분의 눈에는 사랑을 거스르는 죄가 백배 더 죄질이 나빠 보일 것입니다. 어떤 형태의 악도, 세속성도, 황금을 탐하는 욕심도, 술주정도 악한 성품보다 사회를 더 비기독교적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인생을 비통에 빠트리고, 공동체를 가르고, 가장 신성한 관계를 파괴하고, 가정을 황폐하게 하고, 남녀 관계를 시들게 하고, 어린이의 생기를 앗아 버리는 등, 한마디로 비참함을 자아내는 순전히 무가치한 힘을 쓰는 데는 악한 성품의 영향력이 독보적입니다.
탕자의 형을 보십시오. 도덕적이고 근면하고 참을성있고 공손한 덕을 갖춘 그는 만점을 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사람을 보십시오. 아버지 집 문밖에서 부루퉁해 있는 어린아이를 말입니다.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누가복음 15:28). 이 일이 아버지와 종들과 손님들의 행복에 미칠 영향을 생각해 보십시오. 탕자에게 미친 영향으로 판단하건대,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무정한 성품 때문에 얼마나 많은 탕자들이 천국 밖에 머물러 있습니까?
형의 눈썹에 몰려 있는 천둥 구름을 성품 연구의 일환으로 분석해 봅시다. 그것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을까요? 질투, 화, 자존심, 무자비, 잔인함, 자기 의, 까다로움, 완고함, 시무룩함이 이 어둡고 사랑 없는 영혼을 구성하는 요소들입니다. 또한 이것들은 그 비중은 다르지만 모든 거친 성품을 구성하는 요소들입니다. 성격으로 짓는 그러한 죄가 몸으로 짓는 죄보다 자신은 물론 타인의 삶에도 더 악하지 않은지 판단해 보십시오.
이 물음에 대해 그리스도가 친히 답하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태복음 21:31). 진실로 천국에는 이런 성품을 위한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 성격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천국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천국마저 비참한 곳으로 만드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이 거듭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결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온화한 성품을 갖추어야 함이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제 단호한 말을 오해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이제 성품이 왜 그리 중요한지 알아보겠습니다. 성품 자체가 아니라 성품이 드러내는 내용 때문입니다. 무례해 보이더라도 지금 제가 성품에 대해 각별히 단언하는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성품은 사랑을 드러내는 시금석이자 지표입니다. 사랑 없는 밑바닥의 본성이 성품을 통해 드러납니다. 성품은 고질적인 속병을 드러내는 간헐적인 열병이자, 이따금씩 표면까지 빠져나와 밑바닥의 부패를 드러내는 거품이며, 경계심이 풀어질 때면 저절로 흘러나오는 영혼에 숨어 있는 가장 은밀한 산물의 견본입니다. 한마디로, 끔찍하고 비기독교적인 백 가지 죄가 성품의 형태로 섬광처럼 드러납니다. 인내심과 친절과 관용과 예의와 비이기심의 결핍이 모두가 성품이 한 번 번쩍임과 동시에 상징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성품을 다루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원천으로 들어가 가장 깊숙한 내면의 본성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난 마음이 저절로 서서히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부드러워지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독기를 제거할 때가 아니라 무언가를 주입할 때, 곧 위대한 사랑, 새로운 영, 그리스도의 영을 주입할 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 곧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의 영을 뚫고 들어와 모든 것을 부드럽게 하고 깨끗하게 하며 변화하게 합니다. 그래야만 악한 것들을 뿌리 뽑고,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며, 개조하고 거듭나게 하며 속사람을 회생시킬 수 있습니다. 의지력만으로는 사람을 바꿀 수 없습니다. 시간이 흐른다고 사람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바꾸십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립보서 2:5).
우리 가운데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분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삶과 죽음이 걸린 문제임을 다시 한번 명심하십시오. 저 자신과 여러분을 위해 절박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태복음 18:6). 사랑하지 않느니 차라리 살지 않는 편이 더 낫다는 주 예수님의 명백한 판결입니다. 사랑하지 않느니 살지 않는 편이 더 낫습니다.
정직과 신실은 거의 같은 말입니다. 정직은 의심하는 사람을 위한 은혜입니다. 정직을 갖추는 것은 개인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큰 비결입니다. 잠시만 생각해 보아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우리를 믿어 주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의심하는 분위기에서 사람들은 위축되지만, 믿어 주는 분위기에서는 기를 펴며 격려와 배움이 있는 유대감을 발견합니다. 이 팍팍하고 무자비한 세상 도처에 아직도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영혼이 몇이라도 남아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위대한 비세속성이라 하겠습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사술을 부리려는 마음이 없고, 밝은 면을 보며, 모든 행위를 최선으로 해석합니다. 이런 즐거운 마음 상태라면 살만 하지 않을까요! 단 하루라도 그런 마음을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고무적이고 복된 일일까요! 신뢰받는 것은 구원받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들을 세워 주려고 노력한다면, 그 성공 여부는 우리가 그들을 신뢰한다는 사실을 그들이 얼마나 믿느냐에 달려 있음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잃어버린 자존감을 회복하는 첫 단계는 타인으로부터 받는 존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이상이 그 사람에게는 자신이 나아갈 희망과 귀감입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를] 기뻐하고." 이를 신실이라 명명했는데, 진리를 기뻐하라는 흠정역(Authorized Version, 1611년)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번역이라면, 이보다 더 정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사람 못지않게 진리를 사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진리를 기뻐할 것입니다. 믿으라고 배워 온 것, 이런저런 교회의 교리나 이런저런 사상이 아니라, "진리를" 기뻐할 것입니다. 진실만 받아들이고, 사실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겸손하고 편견 없는 마음으로 진리를 탐구하며, 무엇이든 발견한 것이 있다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고이 간직할 것입니다. 더 문자적인 번역에 충실한 개역판(Revised Version, 1885년)에서는 진리를 위한 그와 같은 희생을 촉구하기도 합니다. 앞서 읽은 바와 같이, 바울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는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영어 단어 하나로는 적절히 규정할 수 없는 특성입니다. 분명 신실이라는 단어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엄밀히 말하면, 다른 사람의 잘못을 이용하기를 거부하는 자제력, 다른 사람의 약점 들추어내기를 즐기지 않고 '모든 것'을 덮어 주는' 자비심, 매사를 그 자체로 보려고 애쓰며 의심하거나 비방하기보다 더 나은 점을 보기를 즐기는 순수한 의도를 말합니다.
사랑을 분석하면 이외에도 훨씬 더 많습니다. 이제 우리가 당면한 삶의 과제는 지금까지 다룬 것들을 우리 인격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며 전념해야 할 최고의 과업, 즉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삶은 사랑을 배울 기회로 넘쳐나지 않습니까? 우리 모든 사람에게는 매일 수많은 기회가 있습니다. 세상은 놀이터가 아니라 교실입니다. 삶은 휴일이 아니라 수업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영원한 학습 과제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더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크리켓 선수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훈련이 필요합니다. 훌륭한 화가, 훌륭한 조각가, 훌륭한 음악가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훈련이 필요합니다. 훌륭한 언어학자, 훌륭한 속기사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훈련이 필요합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 말고는 없습니다. 종교에 관한 한 변칙이란 없습니다.
영혼의 단련은 심신의 단련과 동떨어진 방식이나 법칙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팔 운동을 하지 않으면 이두박근이 발달하지 않습니다. 영혼을 단련하지 않으면 영혼의 근육도, 인격의 힘도, 도덕 섬유질의 활력도, 영적 성장의 아름다움도 생기지 않습니다. 사랑은 열정적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인격이 전방위에 걸쳐 풍부하고 강력하고 떳떳하고 활기차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본성이 충만하게 성숙된 것입니다. 이 위대한 인격의 구성 요소들은 끊임없는 훈련으로 자라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