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 폭염, 열대야 등에 관한 시모음 20)
폭염 /정한아
도서관 뒤뜰엔 잊혀진 사상처럼
이끼가 드문드문 자라고 있다
사람들은 소태를
얼마나 오래 머금을 수 있는지
붓꽃과 익어가는 여주와 박꽃과 봉숭아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눈으로만 먹을 수 있는
빛깔들
맛을 보면 도망할 육식동물들을 위해
고통 없는 선을 위해
아름다운 착한 것이 있어야 할 텐데
어쩌나, 가물어 단
과일을 크게 베어 물면
소리 없이 가능한 한 멀리 내어 뱉는
씨앗 같은 문장부호들
왜, 죽음의 징후—꽃들은
절박할 때만 피나, 왜,
아름다운 채 삼키면 치명적인가, 왜,
도서관 뒤뜰엔 아직도 잊혀진 사상이,
웬 조그만 노인이, 우산이끼처럼 까라져
아직 파란 여주를 씹고 있나
열대야 /황정현
주관식으로 말할까요 언니가 만났던 아저씨의 이름을요 아저씨가 건네준 바나나 껍질에 썼거든요
약국과 문방구 사이로 비구름이 몰려다녀요
드문드문 발소리도 나고요 튀김집에서 흘러나오는 기름 냄새는 코끝을 맴도는데 언니가 뒤집어쓴 홑이불이 소릿바람에 들썩여요
나는 대야에 밤을 담그고 노래를 불러요 제목도 가사도 떠오르지 않는 노래를요 밤하늘을 첨벙이며 노래를 휘저어요
내려앉은 밤이 물 위에 속눈썹을 띄웁니다
언니가 미울 때는 슬퍼하는 언니를 떠올려요
가로등 밑에 흘리고 온 바나나 껍질은 아직 까매지지 않았을 거예요
그 아저씨 이름도요 지붕 위로 젖은 밤이 흘러요 별은 마음 곁에 감춰두고요
그날 밤 일기장엔 언니와 그 아저씨 이름 사이에 무수히 온점을 찍어놓았죠
아무리 고개를 까딱여도 반점이 되지는 않으니까요 대답할 수 없으니까요
무더위 /강준철
전나무가 시퍼런 장검(長劍)을 들고
여름을 썩썩 잘라 던진다
쓰르라미가 참나무 위에서
한창 오르가즘에 오른다.
그 울음소리에
나의 우주는 뒤집어 지고
나비와 벌들은 땀에 젖어
꽃들을 질식시키고 있다.
교회의 종기는
햇볕을 부수고
절간의 풍경 소리는
숲 속을 떠돈다.
갑자기 한기에 몸이 떨린다.
열대야일기 /이애정
줄을 잡고 내려온 밤
절벽처럼 주변은 조용하다.
아름다움도 슬픔도
모두가 평등해져있는
극히 정제된 어둠만이
단단한 침묵을 모은다
동
서
남
북
인연과 악연 사이를 오가며
견디는 것보다
노는 것이 좋은
불면의 밤
여전히 홀로 남겨진 나는
오늘 또 하나의 무덤을 쌓고 있다.
폭염의 하루 /박기숙
오늘 하루도 우중충한
폭염의 하루다.
비지땀을 흘리며 풀섶에
주저 앉아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씽끗 웃는다
온 산야가 태양의 이글 거림 속에서
광란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 드는듯 하다.
멀리 보이는 하얀 개망초,
꽃들이 미리내
하얀 물결 속에서 춤추는듯 바람에
살랑살랑 나비 춤을 춘다.
아! 인생이란 누군가 말했다
꽃병과 약병사이에서
오락가락 방황 하고 있다고,
무덥고 힘들지만,
농원 이랑에서 다시금
기쁨의 수확을 맛보며
오늘 하루도 꽃병을 가슴에
안고 즐거운 여정으로 한발한발
나아가고 있다.
폭염 /최규리
스커트가 펄럭인다 끓고 있는 그녀의 세면대는 그에게서 온 편지들로 고여있다
하수구로 빠져나가지 못한 울음은 기억을 녹인다
어깨로 흘러드는 촛농은 하얗게 부서지고 커피포트에 말려든 낮은 웃었다
백열등이 깨지며 발등에 꽂힌 이빨들, 소금사막으로 뒤덮인 방들이 눈썹을 붙잡고 플러그를 꽂았다
혈관을 태우는 눈동자, 별이 지지 않는 주소를 적고 텅 빈 심장으로 봉인한다
푸른 쓸개즙이 흐르는 밤을 걸어 춤추는 스커트
삼복더위의 노래 /류동열
아이고 더 부라
아이고 더 부라
하늘의 구름은 어디에 가셨나
방패도 없는데
불화살은 세상을 행해 쉼 없이 쏟아붓는다
길가는 바람도 땡볕에 장단을 내고
아스팔트는 빤짝빤짝 빛이 난다
이 동네 저 동네
에어컨 바람
선풍기 바람 놀이터가 되어 신이 나고
길가는 이웃들 비명을 질러 된다
더 부라
아이고 더 부라.
열대야 /최백규
사랑이 사랑도 아닐 때까지 사랑을 한다
네가 물들인 내 밤이 너무 많다
전국적으로 별일 없이 해거름이 옮아가고 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야경을 바라본다
내일 전쟁이 일어난다면 행복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울겠지
지난 주말에는 시외버스를 타고 외지의 동물원으로 소풍을 갔다
가만히 쓰러진 기린을 구경했다
폭염 /유지소
초록색은 초록색으로 지워야 들키지 않는다
한 개의 떡갈잎을 지우기 위해 두 개의 떡갈잎을 그린다
두 개의 떡 갈잎을 지우기 위해 네 개의 떡갈잎을 그려야 하듯이
떡갈잎의 생명은 톱니바퀴에 있다
톱니바퀴는 너를 자전거에 태우고 떡갈나무 숲으로 데려오는 역할을 한다
너의 입술과 내 입술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갈 때 떡갈나무 숲에서는 총알이
퓡― 퓡― 퓡― 날아다니고 우리가 없는 어떤 나라에서는 진짜로 사람이 죽기도 한다
재촉하지 말자 아무것도
불타는 대지를 깊은 한숨처럼 느리게 느리게 걸어가는 얼굴일지라도 심장은 아무리 빨리 뛰어도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한 다 악몽처럼 너는 나의 심장에서 뛰고 있다
한 개의 너를 지우기 위해 두 개의 너를 그린다 두 개의 너를 지우기 위해 네 개의
너를 그려야 하듯이
초록색은 바닷물이 다 마를 때까지 마르지 않을 것이다
조금 있으면 곧 휴가가 시작되고
아무도 없는 등대까지 우르르 몰려갔다가 우르르 돌아 오는 밀물처럼
나도 그렇다!
나도 그렇다!는 속삭임이 우리 사이에 흘러넘칠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미칠 듯이 한 사람만 생각하면 모두 그렇다
눈을 감을 수가 없다
폭염1 /풍류시인 민만규
강렬한 햇살이
심술을 부리니
산천초목이
바람 속에 숨어든다
개망초가 빳빳이 고개 들고
폭염과 맞짱 뜨니
풀 죽은 풀꽃이
슬금슬금 눈치 보며
냅다 도망친다
폭염2 /풍류시인 민만규
햇살이
짓궂게 심술을 부린다
우주에서
별들끼리 싸움질 하나 보다
불똥이
지구로 떨어졌으니!
폭염3 /풍류시인 민만규
햇살의 히스테리에
산천초목 쓰러지고
못 살겠다 울부짖는
풀벌레는
피난 길에 나선다
탄다
꽃심도 타고
농심도 타고
민심도 타들어 간다
폭염4 /풍류시인 민만규
얄미운 당신
밤새 열대야를 데리고 와서
잠 못 자게 하더니
이른 아침부터
또 투정을 부리시나요
당신 등살에
오늘 하루도 어찌 견뎌야 할지
긴 한숨이 천 리를 가오
도시의 삼복더위 /박인걸
중천에는 용암이 이글거리고
아스팔트는 엿을 굽는다.
빌딩 벽이 손풀무질을 하니
도시 전체가 찜질방이다.
울던 매미도 숨을 죽이고
넉 점 잠자리도 비행을 멈췄다.
가로수는 비틀거리고
길 잃은 고양이가 헐떡거린다.
햇살은 총알처럼 퍼부어
간간히 불던 바람도 도망을 치고
치열한 전쟁터만큼
오가는 사람들이 위험하다.
등골에는 냇물이 흐르고
이마에는 구슬이 맺힌다.
물에 잠긴 초벌 빨래처럼
속옷마다 땀범벅이다.
자동차들도 발이 뜨거워
징징 울며 뛰어 다니고
건물 안에 갇힌 인파들만
물끄러미 창밖을 살피고 있다.
팔목의 시계는 오후 세 시인데
도시는 여전히 달아오르고 있다.
폭염주의보 /홍수희
여름은 지금 가을을 굽고 있는 중
고소하고 부드러운 빵을 굽고 있는 중
태양은 지금 열매를 익히고 있는 중
다디단 과육을 차분히 익히고 있는 중
지금 마음이 지친 그대여,
당신의 눈물은 지금 비밀히 아주 비밀히
환한 웃음을 조각하고 있는 중
눈물 없이 기쁨은 오지 않기에!
열대의 밤 /김 참
검은 항아리 머리에 이고 검은 얼굴 여인들 걸어가는 열대의 밤
노란 새들 나무에 앉아 커다랗게 지저귀고 어두운 하늘에 뚱뚱한 구름 흘러가는 밤
하얀 도마뱀들 벽 타고 내려와 바구니의 망고를 갉아먹는 밤
검은 얼굴 여인들 강가 모래밭에 항아리 내려놓고 어두운 강에 들어가 파란 물고기 건져 올리는 밤
검은 얼굴 여인들 바오바브나무 아래 항아리 내려놓고 어두운 숲에서 초록 뱀을 잡는 밤
검은 얼굴 여인들 검은 항아리에 파란 물고기와 초록 뱀을 담아 어두운 오솔길 따라 돌아오는 밤
노란 달 공중에 떠올라 뜨겁게 타오르고 검은 바람이 뚱뚱한 구름을 밀고 언덕을 넘어가는 밤
잠 못 드는 내가 도마뱀처럼 벽을 타고 지붕에 올라 뜨거운 달빛 받으며 무화과 열매처럼 검은빛으로 익어 가는 밤
폭염 /김택희
입에 넣어 주던 것이 버찌였나
붉은 얼룩이 주루룩
열정마저 물러버린
막막함이
다시 왁자하게 울음을 놓는다
밟힌 목련처럼
대책 없는 소란의 계절
새벽 세 시는 넘치는 부재 은밀한 압박
웅크린 등 뒤로 마구 달려들어
쪼그려 앉아
빽빽한 삼나무 숲 그리면
돌아가고 싶어 붉어진 등 뒤와 머물지 않을 시푸른 자존이
엎어놓은 몽환의 그림자
강물로 흐르지
귓전을 타고 흐르는 스메타나의 몰다우
간극을 좁히는 물 따라
몸이 촘촘해져
무른 시간 달래다 희부연 모퉁이
내게로 돌아오는 길 잃어
오래도록 붉어
열대야의 밤 /정테중
더운 하루쯤은 망태 산으로 보내고
발그레 오른 열대가 찾아온 휑한 밤에는
옛날, 먼 옛날 어느 산골에 내린
겨울 손님을 생각할 테다
흰 두루마리 끝의 으슥한 한기와
화롯불 점령한 병사들이 죽은 섬찟한 냄새와
창호지 틈 처녀 귀신 문턱 넘는 소리와
저것들이 등골에 자갈밭을 갈아 놓고
오독 오도독 짓누르며 오늘 밤으로 오면
서빙고를 열어 깊숙이 숨겨 놓았던
붉은 전설을 부적처럼 꺼내 볼 테다
겁에 질린 이빨 사이로 달그락달그락
붉은 핏물이 돌고
허리 아래로는 저녁이 깊게 젖어 들고
달빛 스친 창틈으로는 늑대의 숨소리 가쁘고
지직거리는 바보상자의 민낯으로도
창백한 새벽은 열리고 있다
늦더위 /손병흥
말복 지나 처서 며칠 앞두고서도
아직껏 요란하게 울어대는 매미처럼
날씨조차 아열대지구로 바뀌어 가는지
여전히 찜통 늦더위가 마구 기승부리는
연일 높은 수은주 후덥지근한 낮 기온
밤에는 뒤늦은 열대야로 밤잠 설치다
구름 한 점 없는 고기압 영향권 든 날
못내 다가올 풍성한 결실의 계절 그리며
너그럽고 여유로운 마음 가득 가슴 담아보던
그냥 조금만 움직여도 땀방울이 맺혀 흐르는
점차 지구 온난화로 사라져가는 계절의 감각
열대야 /안영준
대지는
쩍쩍 갈라져
거북 등 닮았다
내뿜는 열기가
숨통을 막아
호흡은 버겁고
찜통 속
화초는
피기도 전
모가지 틀고 있다
천방지축 한
그 등짝을 밀치며
얼씬 못하게 막거늘
강한 자존은
한낮을 지나
야밤에도
버젓이 버티고 있구나
열대야의 밤 /정테중
더운 하루쯤은 망태 산으로 보내고
발그레 오른 열대가 찾아온 휑한 밤에는
옛날, 먼 옛날 어느 산골에 내린
겨울 손님을 생각할 테다
흰 두루마리 끝의 으슥한 한기와
화롯불 점령한 병사들이 죽은 섬찟한 냄새와
창호지 틈 처녀 귀신 문턱 넘는 소리와
저것들이 등골에 자갈밭을 갈아 놓고
오독 오도독 짓누르며 오늘 밤으로 오면
서빙고를 열어 깊숙이 숨겨 놓았던
붉은 전설을 부적처럼 꺼내 볼 테다
겁에 질린 이빨 사이로 달그락달그락
붉은 핏물이 돌고
허리 아래로는 저녁이 깊게 젖어 들고
달빛 스친 창틈으로는 늑대의 숨소리 가쁘고
지직거리는 바보상자의 민낯으로도
창백한 새벽은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