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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0. 묵상글 ( 성토요일. - “오늘 밤은 왜 다른 밤들과 다른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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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0. 성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밤은 왜 다른 밤들과 다른가?”
이는 유대인들의 “세다 예식” 중에 있는 질문입니다. “세다 예식”이란 파스카 축제 첫날 밤,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하는 가족 식사를 말합니다. 이 식사에서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출애굽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이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밤은 왜 다른 밤들과 다른가?”
오늘 우리도 이 질문을 던져 봅니다. “오늘 밤은 왜 다른 밤들과 다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죄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남을 체험한 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살아났다는 이 사실, 곧 부활했다는 이 사실은 단지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살아나 생명을 연장해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변화된 생명, 곧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단지 우리를 새로운 삶에로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바꾸어 놓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생명으로 바꾸셨습니다.
이를 두고 사도 바오로는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콜로 3,1-3)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던 우리의 생명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숨겨져 있어 볼 수 없다고 해서, 결코 없는 것이 아닙니다. 곧 ‘빈 무덤’으로 비어 있다고 해서, 결코 없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비어 있고,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체험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던 사람, 사도 바오로는 고백합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
이토록,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던 우리의 생명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알렐루야!
오늘, 진정 우리는 그렇게 새로이 탄생되었고, 변화 되었습니다. 그렇게 변화와 탄생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의미의 “생일”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변화된 생명은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곧 부활을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 그대로, 우리도 기꺼이 “모든 이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죽지 않고 다 변화할 것입니다.”(1코린 15,51)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봅니다. ‘빈 무덤’, 그것은 적어도 예수님의 죽음을 둘러싸고, 그 어떤 일인가가 벌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무언가 새로운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무덤’이 죽은 이를 묻는 곳이라면, ‘빈 무덤’, 그것은 죽음 그 자체를 묻어버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빈 무덤’은 부활의 근거는 될지언정, 부활이 사건으로 체험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빈 무덤’은 제자들이 눈으로 직접 본 역사적 사실이긴 하지만, 그것은 부활의 참 뜻을 ‘눈으로는 볼 수 없다’는 상징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자유’일 것입니다. 예수님마저 죽어버린 예수님의 빈자리인 자유입니다. 곧 예수님을 예수님 되게 하는 ‘빈자리’ 입니다. 주님을 주님 되게 하는 ‘빈자리’ 입니다. 곧 우리의 제한된 시선에 갇혀지지 않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의 삶은 또한 예수님의 자유를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것일 것입니다. 주님의 자유로움에 신뢰와 의탁을 두고 내맡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일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자유로워지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르 1,7)
주님!
곁에 계시는 당신을 두고도
모르는 척 무시하고 비껴가도 당신께서는 저를
형제라 아우라 부르시며 다정히 손을 잡으십니다.
당신께 붙들려 있게 하소서. 꼭 붙들려 있게 하소서.
꼭 붙들고 늘 함께 동행 하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을 보게 하소서.
저희들 안에 들어와 꽃을 피우는 당신의 사랑을 보게 하소서.
당신 사랑에 늘 붙들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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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0. 성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3. 28. 성목요일 강론글 말미에 --
내일과 모레 강론은 올리지 않겠습니다.
남은 성주간 잘 보내시고
부활 대축일에 기쁘게 만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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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0. 성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한지도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처음에는 휴대전화를 가지고 무슨 인터넷이냐고 또 그냥 전화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스마트폰을 가지고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재미있는 것도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 은행 업무까지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제는 사람들이 컴퓨터보다 스마트폰을 더 많이 봅니다. 그런데 어느 강사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스마트폰을 하루에 1시간 보는 대신 다른 걸 했다면 삶이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하루 1시간, 일 년이면 거의 360시간, 10년이면 3,600시간입니다. 이 정도 시간으로 못할 것이 무엇일까요? 잠도 안 자고 먹지도 않고 오로지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150일 동안 집중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루 1시간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길게 바라보면 너무나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나의 삶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때 우리의 자유를 도둑맞게 되는 것입니다. 알게 모르게 생각을 조정하고 가치관을 주입 당하며, 자기가 원하는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집중해야 할 것, 그러나 방해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한 요즘이 아닐까요?
우리는 지금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거룩한 성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 모든 고통을 당신 몸으로 받아 안으셨음을 알고 있지만, 온전하게 주님과 함께하고는 있지 못합니다. 주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스마트폰을 비롯해서 얼마나 많은 것이 우리의 집중을 방해하는지 모릅니다. 문제는 주님께 집중하려는 노력도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 사실에 우리의 나약함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주님을 닮겠다고 말하면서도 그렇게 하기가 얼마나 힘든지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런 나약함까지도 당신의 사랑으로 받아주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 집중하지 못하는 우리, 특히 주님께서 당신 몸으로 직접 보여 주셨던 사랑에도 각종 조건을 붙여서 퇴색시키는 우리였음을 반성하면서 오늘 하루만이라도 주님께 집중할 수 있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의 명언: 변화에서 가장 힘든 것은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가지고 있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존 메이너드 케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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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0. 성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 (마르16,1-7)
부활은 사랑의 승리입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서로 축하의 인사를 나누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가정에, 온 세상에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큰 기쁨을 줍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를 위한 사랑의 승리요, 우리에게도 부활의 희망을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15,14).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을 통해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감수한 수난과 십자가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이 명백하게 밝혀졌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선포하고 행동하신 모든 것이 옳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믿음을 지탱하는 기둥이며, 모든 희망을 받치고 있는 머릿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스승을 잃고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의 슬픔을 거두어 주었습니다. 온갖 조롱과 모욕을 받으면서도 한마디 변명도 없이 침묵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의로운 행위였다는 것을 드러내 줍니다. 또한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 고하신 말씀의 참된 의미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부활로 동안에 보여주었던 여러 표징들이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당신을 몸소 생명의 빵으로 소개하며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6,51)하고 영적인 양식으로 내어주셨는데 그것이 살아있는 믿음이 되게 하셨습니다. 죽음에 직면하여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신 간절함이 아버지 마음에 들었다는 것을 확인해 줍니다. 그리고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고 의탁한 기도가 열매 맺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를 위한 십자가의 죽음이 파멸이 아니라 사랑의 승리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또한 우리의 부활을 보증합니다. 당신 친히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9-40). 하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에게 부활의 새 삶이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은 더없이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여자들이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유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는데 무덤의 돌이 이미 굴러져 있었습니다. 무덤에 들어가 보니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 어쩔 줄을 모르는데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마르16,6). 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시체를 만지는 것을 부정한 것으로 여겨 금하였는데도 여인들은 상관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존경이 없이는 불가능한 행위입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끝까지 충성스럽게 지켜봤던 사람, 그 죽음에 대해 가장 큰 슬픔과 미련을 품고 있던 사람, 계산 없이 아낌없이 값비싼 향료를 마련하여 동트기만을 기다렸던 사람,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달려간 여인에게 부활의 첫 소식이 전해진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무덤이 비었기 때문에 부활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셨기 때문에, 무덤이 비었습니다. 죄와 죽음의 힘도 무덤을 막았던 육중한 돌도,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도 주님의 부활을 막진 못하였습니다. 우리도 무덤의 삶에서 나와야 합니다. 어둡고 침침한 부정적인 생각에서, 맑고 밝은 긍정적인 생각과 삶으로 나와야 합니다.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서 나와서 예수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천상 행복의 미래를 보고 오늘을 헌신적인 희생과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수난은 현세 생활의 수고와 고통과 죽음의 운명을 가리킵니다만, 예수님의 부활과 그 영광은 우리가 받을 영원한 생명” (성 아우구스티노)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여기서부터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기쁨을 누리려면 먼저 ‘해묵은 내가 죽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야 합니다. 인간적인 욕심과 교만, 시기, 질투, 이기심에 죽고 절제와 겸손, 온유와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실천한 ‘나쁜 습관 빼기, 은총을 쌓기’의 삶이 부활의 삶입니다. 지금 여기서 부활을 살지 못하는데 어찌 훗날의 부활을 희망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님의 닮은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서 뵙게될 것입니다”(마르16,7). 하신 말씀입니다. 왜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셨을까요?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공적활동을 시작하신 곳이고, 제자들을 부르고 양성하신 곳입니다. 바로 여기서 복음 선포의 사명을 부여하시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하신 말씀과 행적을 기억하고 이어가는 가운데 그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온몸과 마음을 바쳐 활동하시던 예수님의 그 모습 그대로 삶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손희송). 예수님처럼 하느님 아버지를 오롯한 마음으로 섬기면서 세상에 전하고, 그분처럼 사랑으로 이웃을 아끼고 돌보면서 살아간다면 우리도 살아계신 그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갈릴래아는 지금 삶의 자리입니다. 삶의 터를 더 큰 사랑으로 빛내야 하겠습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거듭 태어나는 부활의 기쁨이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다시 한번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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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0. 성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학생 때입니다. 음악 선생님은 ‘가곡’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오 솔레미오(O Sole Mio)와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오 솔레미오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오 맑은 햇빛 너 참 아름답다./ 폭풍우 지난 후 너 더욱 찬란해/ 시원한 바람 솔솔 불어올 때/ 하늘의 밝은 해는 비치인다./ 나의 몸에는 사랑스러운 나의 해님뿐/ 비치인다 오 나의 나의 해님/ 찬란하게 비치인다” 기다리는 마음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뜨거든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임 오지 않고/ 빨래소리 물레소리에 눈물 흘렸네./ 봉덕사에 종 울리면 날 불러주오/ 저 바다에 바람 불면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임 오지 않고/ 파도소리 물새소리에 눈물 흘렸네. 오 솔로미오에는 ‘폭풍우 지난 후에 너 더욱 찬란해’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파스카 성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고, 묵상하고 있습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기다리는 마음에는 ‘기다려도 기다려도 임 오지 않고 빨래소리 물레소리에 눈물 흘렸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것처럼 주님께서 나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음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열어보지 않은 선물’이라는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가 맞이하는 하루하루는
열어보지 않은 선물입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랑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하나
그것을 열어 봅니다.
무엇이 담겨 있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내 마음이,
내 눈과 귀와 손끝이,
발걸음이 그것을 좋아하면
기쁨이라는 이름의 선물이 될 것이고
사랑이라 느끼면
사랑이라는 이름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불평과 불만의 마음으로 열면
그것은 불평과 불만의 상자가 될 것이고
걱정과 후회의 마음으로 열면
그것은 당신에게
힘들고 괴로운 날을 안기게 될 것입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미래가 좋은 것은
그것이 하루하루씩 다가오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루하루 그것은
당신에게 스스로 내용물을 결정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귀한 선물입니다.
당신의 하루하루가
귀한 선물이 되면 좋겠습니다.”
어둠이 걷히면 새벽이 옵니다.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다가오는 부활의 새벽을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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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0. 성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은 치워지고 우리 주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막혀있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는 복음의 말씀을 통해 부활을 묵상해 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가진 신앙을 부활 신앙이라 부르는데 이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는 부활을 선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부활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부활은 주님께서 보여 주신 부활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전에 매일매일 부활해야 합니다. 매일매일 태양이 뜰 때마다 우리 자신의 부활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선물이 바로 주님께서 보여 주신 모든 것의 부활일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부활 신앙이라 부르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주님을 통해,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 쉬워 보일지 모르지만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 주님 따라서 하느님 말씀 안에서 굳은 믿음으로 살아낸다면 우리는 부활할 것입니다. 죽지 않고 영원한 하늘나라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말들이 어렵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 사는 사람들, 주님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부활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부활했습니다. 아침의 태양과 함께 말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기대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따라 부활을 향해 걸어갑시다.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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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
저는 아침 식사로 달걀을 선택할 때가 많습니다.
달걀을 사용한 아침 메뉴는 주로 이렇습니다.
1. 스크램블과 빵 한 조각, 그리고 우유
2. 양배추 잘게 썰어 달걀 두 개 풀고 소금 조금 후추 조금
프라이팬에 부어 넣고 앞뒤로 잘 익혀줍니다.
3. 따끈한 밥과 달걀 프라이, 남은 반찬들, 고추장 조금과 그 유명한
챔기름~ 한 스푼
4. 장조림 변신한 부활 달걀장조림 비빔밥.
이 밖에도 많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두 같은 달걀을 주재료로 사용했다는 것이지요.
오늘 아침도 든든히 드시고
행복한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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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0. 성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우리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십자나무를 통하여 온 세상에 기쁨이 왔나이다.”
어제 수난예식시 감격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예수님 부활로 우리의 고백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어제 성금요일 십자가의 길과 수난예식에는 영광스럽게도 민주화운동의 대부인 함세웅 신부님도 함께 해주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주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의 꽃이, 기쁨의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다시 한번 외쳐보는 만세육창입니다.
“하느님 만세!”
“부활하신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성 요셉 수도원 만세!”
동시에 만개(滿開)하기 시작한 파스카의 청초한 봄꽃들이 파스카의 신비를, 파스카의 기쁨을, 파스카의 축제를 한껏 경축하고 있습니다. 4월10일 나라의 명운이 달린 총선을 앞둔 길조(吉兆)입니다. 참 좋으신 하느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한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무덤문 박차고, 죽음의 쇠사슬 끊어버리고 장엄하게 부활시키셨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마침내 하느님은 우리를 죄살이에서 자유인으로 해방시키셨습니다. 아, 이제 예수님 부활하셨으니 살맛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빛의 예식시 “그리스도 우리의 빛!” 외침은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요!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는 참빛은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이어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활찬송 엑술뗏(Exsultet)은 또 얼마나 웅장한지요! 앞부분 일부만 인용합니다.
“용약하라 하늘나라 천사들의 무리
환호하라 하늘나라 신비
구원의 우렁찬 나팔소리
찬미하라 임금의 승리
땅도 기뻐하라
찬란한 광채 너를 비춘다
비춰진 땅아 깨달으러 세상 어둠 사라졌다
기뻐하라 자모신 성교회
위대한 광명으로 꾸며진 성교회
백성의 우렁찬 찬미소리 여기 들려온다.”
찬미와 기쁨의 빛으로 충만한 이 거룩한 밤입니다. 이 밤은 주님께서 세상을 창조한 밤이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땅에서 불러내신 밤이고, 광야에서 불기둥이 이스라엘을 비추던 밤이고, 이삭이 살아난 밤이고, 죽으셨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밤이며, 세례를 통해 많은 이가 거룩하게 되는 밤이며, 이밤의 말씀전례중에 읽혀지는 구약의 일곱 말씀의 빛이 밤의 어둠을 환히 밝히는 밤입니다. 이처럼 믿는 이들의 밤은 얼마나 은혜로운지요! 저절로 터져 나오는 하느님 찬미, 하느님 감사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말씀의 빛이 우리에게는 참된 구원이 됩니다. 새삼 인간의 본질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말씀은 생명이요 빛이요 영입니다. 부활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될수록 충만한 삶에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사람의 실현입니다. 말씀전례중 일곱 개 독서때 마다 이를 요약하는 후렴은 또 얼마나 은혜로운지요! 말씀의 빛만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주님 보내시는 얼에 누리의 모습이 새롭게 되나이다!”
“주님, 저를 지켜 주소서. 주께 피신하는 이 몸이오이다!”
“주께 내 노래 하리니, 주는 영광스러이 승리하셨나이다!”
“주님, 저를 구하셨으니, 내 주님을 높이 기리려 하나이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주님, 생명의 말씀이 주님께 있나이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이 하느님을 그리워하나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복음의 환호송입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주님의 말씀의 우리 발의 등불, 우리 길을 비추는 빛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빛이, 말씀의 빛이 온누리의 어둠을, 우리 무지의 내면을 환히 밝힙니다. 세례받아 주님의 자녀로, 빛의 자녀로 탄생된 우리는 계속되는 파스카 미사은총으로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영원한 삶을 살게 된, 이미 지상에서 천국을 살게 된 우리의 복된 운명입니다.
떠오르는 태양과 동시에 우리 영혼의 태양으로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의 열린 무덤이 상징하는 바,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 세 여인과 더불어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 천사의 전갈입니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 나셨다. 그래서 여기 계시지 않는다.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너희는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이다.”
왜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리석게도 무덤에서 찾는지요!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우리 삶의 현장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모신 곳은 어디나 빛으로 충만한 하늘나라이지만, 부활하신 주님 계시지 않는 곳은 어디나 무덤같은 어둔 세상입니다. 파스카의 예수님 계시기에 비로소 살맛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처방도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이 거룩한 부활성야미사를 통한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히 내리시기를 빕니다.
“주님, 저희가 파스카 성사로 힘을 얻고 비오니, 사랑의 성령을 부어 주시어, 우리 모두 그 사랑으로 한마음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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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0. 성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한 12,8)
나 있는
지금 사랑
언제든 사랑
나 머문
여기 사랑
어디든 사랑
내 앞에
당신 사랑
누구든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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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0. 성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고는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것은 매우 큰 돌이었다.(마르 16,4)
그분을 가둘 수 없는 돌
무덤의 돌도 빗장도
그리스도를 사로잡아 둘 수 없었네.
죽음은 그분에게 정복당하고
그분은 지옥의 불 계곡을 짓밟으셨지.
성인들의 무리 그분과 함께
하늘나라에 오르고
그분은 많은 이에게 당신을 보여 주시며,
당신을 보고 만지게 해 주셨네
-프루덴티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누구든지 이 세 겹 사랑을 완성하고자 하는 사람은 의당 다음의 네 가지를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는 모든 피조물을 버릴 줄 아는 능력입니다. 둘째는 참된 래아의 삶, 곧 성령의 작용으로 영혼의 깊은 곳에서 싹트는 적극적인 삶입니다.
셋째는 참된 라헬의 삶, 곧 내적인 묵상의 기질입니다. 넷째는 위를 향해 날아오르는 영입니다. 언젠가 한 학생이 자신의 스승에게 천사의 지위에 대하여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스승은 그 학생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쳤습니다. “가서, 너 자신 속으로 깊이 가라앉아라. 그러면 너는 천사를 알게 될 것이고, 온 힘을 다해 천사에 골몰할 것이고, 너야말로 천사 안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너야말로 천사들과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온 힘을 다해 이 깨달음을 얻고자 노력하여라. 그러면 너야말로 온통 천사이며, 온통 천사들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깨닫께 될 것이다" 그 학생은 곧바로 가서 자신 속으로 깊이 침잠했고, 마침내 이 모든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런 다음 다시 스승을 찾아가서 사의를 표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모든 일이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천사의 본질에 골몰하고, 천사의 존재 속으로 뛰어들어 보니, 저야말로 온통 천사이며, 온통 천사들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깨닫께 되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이제, 네가 존재의 원초적인 근원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만 한다면, 기적 중의 기적이 네 영혼 안에서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스승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영혼이 날아오르되 피조물을 통해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한, 그 영혼은 아직도 멈추어 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로 날아오르는 영혼은, 하느님이 주시고자 하는 모든 것을 아들 안에서 그리고 아들과 함께 아버지로부터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가 한 사랑에서 다른 사랑으로 그리고 마침내 그분과 하나되는 데까지 솟아오르고, 영원히 그렇게 머무르기를. 아멘.(145)
✝️ 토요일 이웃 종교(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요한 크리소스토모
세례는 새로운 창조
여러분은 오늘 교회의 지도자인 바오로 성인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 들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사람이 됩니다”(2코린 5,17).
이 말씀에 대해 우리가 눈에 보이는 창조물을 언급히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믿으면”이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이 말씀으로 그분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발견하면, 그는 그리스도 앞에 새로운 창조물로 서 있는 것이 됩니다. 나쁜 길에서 벗어나 좋은 길로 걸어가게 되고, 착각에서 벗어나 진리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은 하나의 새로운 하늘을 보게 되고 새로운 창조의 영역을 얻는 것과 같은 큰 이익을 얻습니다. 이것이 바오로 성인이 의미하는 새로운 창조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말을 덧붙입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이 말씀으로 그는 바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죄의 무거운 짐을 마치 겉옷을 벗듯이 벗어 버린 사람은 오류로부터 해방된 사람이고, 정의의빛으로 빛나는 사람이며, 새롭고 빛이 나는 임금의 옷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탐닉과 무절제 속에서 살던 어떤 사람이 갑자기 절제되고, 단순하며,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에 기쁨을 가진다면 이것은 참으로 새롭고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이전에 절제를 모르고 완전히 이 세상의 쾌락에만 몰두하던 사람이 예기치 않게 갑자기 자신의 욕망의 주인이 되어 더 이상 육체 속에 살지 않는 사람처럼 절제하고 순결한 삶을 살아간다면 이것은 참으로 새롭고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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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30. 성토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2024.03.30 16:52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
마르코 복음사가는 오늘 복음에서
세 여인을 언급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는 것을
지켜본 여인들로도 언급됩니다.
막달레나와 마리아는 한번 더 언급되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무덤에 모시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마르코복음은 전합니다.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목격 증인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것을
직접 보았고
무덤에 모시는 것도 직접 보았습니다.
그런 그들은 이제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묻히신 것을
전해 들은 사람보다
그것을 직접 본 사람들은
비어 있는 무덤을 보고
더 황당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을 직접 본 사람이
부활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믿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말을
지어낸 이야기라고 쉽게 단정하기도 어렵습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부활을 믿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기 어렵다는 것과
믿기를 거부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부활은 인간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부활을 이해하고 믿는 것도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하느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부활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도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믿기 어렵다고
믿는 것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믿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시는
은총도 거부하는 것이며
그렇게 우리는 더 믿지 못하게 되고
결국 하느님과의 관계도 멀어질 것입니다.
믿기 어려운 부활,
그렇지만 목격 증인들의 말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울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이해되지 않지만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다면
부활도 조금씩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소소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50일간 우리는 부활을 기념합니다.
부활 시기를 지내면서
주님의 부활을 새롭게 만나고
그 기쁨을 살아갈 수 있는 시간 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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