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에서 인물(성격)에 대한 고찰(1)
김종완
인물은 작가의 또 다른 분신
나의 첫 번째 평론은 수필집에 나온 등장인물들을 분석함으로써 수필작가의 세계를 규명하는 글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괜찮은 글이었던 것 같다. 그게 인연이 되어 바로 모 잡지에서 월평을 쓰게 되었으니까. 그건 저에게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인물이란 작가가 만드는 것(작가의 시선으로 보는 것)인데 작가의 눈에 보이는 인물들의 색깔이 거의 같은 색, 작가의 색이더라. 그것은 작가의 또 다른 분신이다. 수필작가의 엄마가, 아버지가, 친구가 이웃이 바로 작가다. 삶이란 비슷한 색깔들이 끼리끼리 인연지어 사는 거라는 것, 정말 초록은 동색(同色)이다. 그것은 수필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경험을 쓰기 때문일 것이고, 어떤 의미에선 작가들의 세계마저 그렇게까지 다양하지 않더라는, 아니 의외로 단순하더라는 놀라운 발견이다. 아니 픽션인 소설마저도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이란 결국 작가내면의 어느 부분을 확대해서 펼쳐놓은 것일 거다. 상상이라는 것도 우리가 경험한 것까지만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니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우린 아는 것만큼, 아는 것까지만 상상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수필은 상상물이 아니어서 문학이 아니라는데…
수필계의 주요인사 중 한 분이 나에게 수필계에 아주 시급한 문제가 있다고, 문단의 일각에서 수필을 문학으로 취급하지 않는단다. 그들이 들이대는 근거가, 외국 누구의 문학론에 의하면 문학이란 상상을 발휘해서 허구화시킨 것이라 했는데, 수필은 경험한 사실의 기록이니 상상물이 아니어서 문학이 아니라고 구박한다는 것이다.
이건 아직까지 수필시학이 자리 잡지 못해서인데, 이건 수필이 형편없는 장르여서 학자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수필이라는 장르가 이제 문학적으로 막 형성되고 있는 젊은 장르라는 것, 미래문학의 보고라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가장 기초적인 첫 번째 질문. 수필은 서정(敍情)물인가, 서사(敍事)물인가?
서정과 서사의 구별
서정과 서사의 가장 탁월한 구별은 S. 리몬 케넌의 서사물에 대한 설명이다. 그는 두 개의 짧은 예문을 들었다.
⑴
니제르의 한 젊은 귀부인,
미소를 띠며 호랑이를 타고 나갔다.
한 바퀴 돌고 돌아왔을 때,
귀부인은 뱃속에 들어가 있었고
호랑이 얼굴엔 미소가 떠 있었다.
⑵
장미는 붉고
오랑캐꽃은 푸르고
설탕은 달콤하다.
당신도 마찬가지.
⑴은 서사물이다. 왜냐하면 서사물에는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다. 스토리는 사건에 의하여 구성된다. 사건은 시간적 연속과 인과관계에 의하여 결합된다.
⑵는 서사물이 아니다. 네 개의 명제는 동시적으로 참true이다. 이들 진술로써 표현된 ‘세계’에는 시간적 연속이란 없다. 따라서 스토리가 없다.
서정수필도 있고, 서사수필도 있다
서사물과 비서사물은 스토리의 존재 여부로 구분된다. 그렇다면 수필은 서사물인가? 스토리를 가진 수필은 서사물이고, 스토리가 없는 수필은 서사물이 아니다. 흔히 서사수필은 소설에 가깝고 비서사적인 수필은 시에 가깝다는 통설은 부분적으로만 맞다. 서사양식의 대표적인 장르가 소설이므로 서사수필이 소설에 가깝다는 말은 맞다. 그렇다고 비서사수필이 모두 시적 곧 서정수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서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논리적이거나, 설명적인 수필도 있기 때문이다
수필은 주제적 양식
노스럽 프라이가 『비평의 해부』에서 말한다.
소설이나 극과 같은 장르에서는 일반적으로 작품 내부의 이야기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에세이와 서정시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독자가 작가로부터 얻게 되는 디아노이아, 관념 또는 시적 사상이다. 디아노이아의 번역어로서 가장 적합한 말은 아마도 ‘주제’라는 말일 것이며, 이와 같은 관념적 또는 개념적인 관심을 가진 문학을 ‘주제적’이라고 일컬어도 무방할 것이다.
소설독자가 ‘이 이야기의 결말은 어떻게 될까요?’ 라고 물을 때 그 물음은 플롯에 대한, 특히 아리스토텔레스가 발견한, 즉 아니그노리시스라고 부르는 플롯의 중추적 부문에 대한 것이다. 독자는 이와 똑같이 ‘이 이야기의 요점은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 있다. 이와 연관된 의문이다. 즉 주제에 대한 물음이다.
프라이는 어떤 작품은 이야기에 중점이 있고, 어떤 작품은 주제에 중점이 있다고 말한다. 전자를 서사문학작품이라 하고 후자를 주제문학작품이라 부른다. 소설과 극은 서사적 양식(플롯 중심)이고, 에세이와 서정시는 주제적 양식이다(물론 서사문학과 주제문학이라는 게 길항적으로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문학작품에는 서사적인 면과 주제적인 면이 있다).
중편수필의 길이 문제
여기에서 우리는 수필서사와 소설서사의 차이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소설서사는 완전한 플롯을 가져야 하지만, 수필서사에서 플롯은 완전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당연히 길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소설에선 단편의 길이가 70매 이상이고 중편은 300매 정도이지만, 수필에선 30~40매만 되어도 중편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학적 진실이란 무엇인가?
수필이 플롯중심(서사중심) 장르가 아니고 주제중심의 장르라고 해서 수필의 서사가 생생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서사가 생생하면 소설적이라고 겁을 먹는 수필가들이 의외로 많다.
하나의 문제를 제기하려 한다. 이것은 수필의 허구문제를 포함한 질문이다. 수필은 지어서 쓰면 안 되는 거라 했다. 그 옛날 짝사랑 하는 여인이 있었다. 어느 날, 그날도 난 그녀의 대문 앞에서 마음을 애태우며 서성이고 있었다. 그녀를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하지? 그날 약간 비가 왔던가. 다만 흐릴 뿐이었던가? 그런데 그녀가 저 골목에서 나타났다. 그런데 그 옆에 어떤 남학생이 … …. 사실 너무 오래된 기억이고 너무 깊은 충격을 받아서 그 이후 일들은 생각나지 않는다. 아니 그 여학생의 이름마저도 얼굴도 확연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럴 때 어떻게 쓰는 것이 문학적 진실인가? 과거의 구체적 사항들이 생각나지 않으니 아무런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고 모두 공란으로 처리해야 하나? 그러면 글이라는 게 몇 줄이나 될까? 그때 그 장소에 최소 3명이 등장인물이 어떤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옛날의 것들이 어떻게 생생히 선명하게 내 눈에 보일 수 있겠어? 생각이 안 나, 그래서 생각 안 나요, 라고 정직하게 쓰고 펜 놓았어. 그러면 그건 문학의 포기이다. 개연성을 찾아서 재정립하는 것, 이게 문학적 진실이다. 우리의 기억이라는 것도 돌이켜보면 내가 보고 싶은 대로,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 아닌가? 문학은 현장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책상 앞에서 내가 쓰는 원고지 위에서 만들어지고 텍스트 속에서 만들어 진다.
최운의 <바람 부는 날의 산조>의 예
<바람 부는…>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내에 있는 가게에서 퇴근하여 집으로 향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시내버스에서 내려 꼬레아길로 접어들었고 고샅길을 더듬듯 골라골라 환한 백구에 닿았다. 동포가 경영하는 식품점 앞을 지나는데 젊은 동포 여인이 급히 다가와 감을 고른다.
순식간에 여인을 훔치는 치한으로 변한다. 그 눈으로 감을 고르는 여인의 손끝에 엷은 피로가 묻어 있음을 본다. 소매에 붙어 있는 분홍색 실밥에 고단한 이민의 하루가 물들어 있음도 본다. 스웨터를 입었어도 너무 좁은 여인의 어깨는 안쓰럽다. 감에 어리는 향수의 눈빛은 애처롭다. 밑화장도 없는 여인의 얼굴이 감빛으로 다가온다.
바람은 항상 밤에 더 짓궂은 것인가. 미장원을 출입한 지 오래된 여인의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훑으면서 귀밑에 숨어 있던 연민의 색깔을 보여 준다. 희어서, 고와서 너무 슬픈 부위다.
―<바람 부는 날의 산조> 중에서
빼어난 관찰력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그 해석은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효과에 충실하게 따른다. 수필은 이렇게 쓰는 것이다. 실제로 일어난 사실을 쓴다고 해서 자질구레하게 눈에 보이는 걸 다 쓰는 것도 아니고, 무미건조하게 사실을 나열하는 것도 아니다. 영화에서 감독의 의도대로 카메라를 멀리 또는 가까이, 어떤 특정한 각도에서 촬영을 하듯, 작가의 눈에 의하여 사물은 크게 다루어지거나 무시되거나 그런 식으로 제자리를 갖는다. 그러면서 사물은 재해석되고, 그 재해석하는 힘이 상상력이다. 그러면 그냥 그대로 의미 없이 있었던 사물들이 새롭게 의미를 갖고 생명을 얻는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경험하게 될 것이다. 수필에 픽션보다 더 큰 창조의 세계가 존재함을.
작가의 상상력이 발휘된 대목에 밑줄을 그어 본다.
눈빛은 여인을 훔쳐보는 치한의 눈빛이 되고, 여인의 손끝엔 피로가 묻어 있고, 분홍색 실밥에 고단한 이민의 하루가 물들어 있고, 여인의 좁은 어깨가 안쓰럽고, 감을 고르는 여인의 눈빛에서 향수를 읽고, 그러면 여인의 얼굴이 감빛으로 작가의 눈에 읽힌다. 작가의 눈이 치한의 눈빛이었기에 맨살의 여인의 얼굴이 육감적으로 다가온 것이며, 귀밑의 하얀 살결을 훔쳐보는 것이며, 여기서 그곳이 성감대라는 걸 모르면 글을 헛 읽은 것이며, 그곳이 희어서 고와서 슬픈 부위로 변할 때, 바래 버린 작가의 성욕을 읽어야 하고, 연민의 정이 폭발해야 하는 것이다. 부둥켜안고 삶이 서러워 울어야 하는 것이다.
독자는 웬 성욕이냐고 의문을 가질 것이다.
까라보보(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한인촌의 중심 거리)를 걸어가는 여인의 뒷모습은 점점 멀어진다. 작아진다. 그리고 사라진다. 외등은 허공에서 졸고, 가로수는 맨몸으로 떤다. 그 밑에 초로의 겨울 남자가 혼자 서 있다.
바람이 다시 분다.
―<바람 부는 날의 산조>의 마지막 부문
마치 영화의 마지막을 페이드아웃으로 처리하듯 글을 마치고 있다. 관음(觀淫)의 대상이었던 그 여인은 무대에서 서서히 사라진다. 여인의 사라짐과 함께 가슴에 일었던 그 안쓰러움과 안타까움과 정욕마저 꺼져 버렸다. 대신 식어버린 육체를 지닌 초로의 남자가 쓸쓸히 서 있다.
문학화 되는 단계는 화자가 그 여인을 만나는 시점에서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만난 사실에 있는 게 아니다. 수필에서 문학성이 사실에서가 아니라 글을 쓰는 작업화의 단계에서 생성되는 것이라는데 수긍하지 못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얼핏 보고 지난 교포 여인의 모습이 시간이 한참 지나 책상머리에 앉아 회상할 때 얼마나 구체성을 가지고 눈 앞으로 걸어 오겠는가. 작가는 상상으로 막연하고 희뿌연한 윤곽뿐인 형태에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이목구비를 갖춰 그렸다. 그리다보니 인물은 생동감을 갖고, 그러자 작가의 가슴에 감정이 살아난 것이다. 바로 그 과정에서 문학성이 생성된 것이다.
김서령의 <약산은 없다>의 예
내가 쓴 평 중, 언젠가 완성 지어야 할, 아직 미완의 평으로 남아 있는 게 김서령의 <약산은 없다>이다. 다음은 그 부분의 재인용이다.
「약산은 없다」는 60년대 중반 쯤, 작가가 일곱 살 때 그에게 담배를 가르친 그의 어른 친구 황 씨에 대한 회상으로부터 시작한다. 황 씨는 집안의 일꾼이었다. 그는 전쟁 때 일행을 잃어버려 마을에 머물렀던 평안도 사람이었다.
여섯 일곱 살의 아이는 황 씨가 늦여름 담배 건조실에 불을 땔 때부터 그의 곁에 앉기 시작했다. 그는 막 쪄낸 노란 햇담배를 자그만 장칼로 잘라 신문지에 말아 피웠다. 그러면 아이는 그에게 바짝 다가앉으며 간절히 말했다. “황 씨요…… 나도…… 한 번만…… 한 번만 피워 보면 안 되니껴? 한 번만. 딱 한 번만…….”
그는 담배는 마흔이 넘은 사람이 먹는 음식이라 했다. 아이는 말했다. “휴우∼ 마흔이요? 마흔까지 언제 기둘리니껴? 어느 천 년에 내가 마흔이 될니껴?”
그는 말했다. 금방이라고. 마흔이 되면 꼭 그때는 꼭 담배를 피우라고 했다. 그것도 높은 산에 올라가서 담배를 피라했다. 묘향산 같은 높은 산에. 아이에게 묘향산은 깊게 각인되었다.
묘향산이 어디이껴? 약산보다 머니껴? 약산보다 높으이껴?”
“내 어릴 적 우리 마을에서 가까웠소. 산에서 묘한 향기가 난다고 이름이 묘향산이오.” “무슨 향이 나니껴?” (중략) “황 씨요. 묘향산에서 나는 냄새가 바로 이 냄새잉껴?” “무슨 냄새?” “보소. 이 냄새, 약산에서 오는 냄새. 궁궁이 냄새. 쑥 냄새, 수박풀 냄새”
아이의 뇌리 속에 묘향산과 약산은 이렇게 하나가 되었다.
아이는 너무나 허약했다. 누군가 말했다. “저 애가 인간 되면 세상이 인간 천지될 거다.” 어린 가슴에도 막연히 죽음에의 공포가 느껴졌다. 그러나 아이는 죽지 않고 인간이 되었고, 약속대로 담배를 피웠고 그러나 묘향산에선 피우지 못했다.
작가가 꼭 가보아야 할 곳은 묘향산이다. 담배를 피우고 싶다고 조르던 아이에게 황 씨가 말했었다.
“웅후 애기요. 담배는 마흔이 되거든 피우소. 마흔은 불혹이오. 불혹이 되어서 먹는 음식이 담배요. 그라고 쉰이 되거든 높은 산에 올라가소. 쉰이 되면 천명을 안다고 옛 어른이 말했소. 천명을 알거든 애기씨요, 묘향산에 올라 가보소.” “묘향산은 멀잖니껴?” “멀어도 꼭 가오. 꼭 가보소. 애기씨요.”
그는 고향이 절절히 그리웠기에, 그러나 갈 수 없는 곳이기에, 아이에게 그의 고향 묘향산에 꼭 가보라고, 멀어도 꼭 가보라고 했을 것이다.
<약산은 없다>가 수필계에 던진 충격은 대단했다. 심사위원 한 분을 뺀 전원이 10점 만점을 주었다. 그 한 분은 9점을 주었다. 그분이 9점을 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지금 내가 말하려는 것이다.
수필이 이래도 되는가? 근 50년 전, 서너 살의 아이와 일꾼 황 씨가 나눈 이야길 이렇게 선명하게 써도 되는 것인가? 이건 작가가 다 지어 쓴 게 아닌가? 지어 썼지요. 그러나 작가에게 물어 보라. 분명히 그는 말할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 옛날 일인데 엊그제 일처럼 선명히 떠올라요.” 이렇게 말할 줄 알아야 수필작가다. 상상이 절절한 현실감으로 인식되는 사람만이 작가가 되는 것이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는 진실은 검찰이 수사할 때 캐묻는 법률적 진실이 아니라 문학적 진실이다.
수필의 등장인물은 작가가 시선에 의해서 이미 해석된 인물
<바람 부는 날의 산조>에 등장하는 인물은 교포여인과 화자인 나다. 그리고 <약산은 없다>는 황 씨와 어린 날의 화자 자신인 ‘웅후 애기’다. 소설이라면 주인공과 부인물은 갈등 관계가 되어야 한다. 그러다가 대단원에서 화해한다. 그런데 수필에서 주인공과 부인물은 갈등하지 않는다. 아니 두 사람의 색깔이 같다. 두 인물의 성격과 분위기는 작가에 의해서 이미 해석되어 작가가 보고자 하는 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주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살릴 수 있는 색조로. 수필의 인물은 작가가 투영된 또 다른 화자인 ‘나’다.
손광성의 <달팽이>
이를 가장 여실히 드러낸 작품이 손광성의 <달팽이>이다. <달팽이>에서 작가는 글의 마지막에 달팽이가 바로 작가 자신임을 고백하고 있다. 새처럼 비상하려는 달팽이, 가늘고 긴 목에서 벌레소리 같은 어떤 슬픈 소리가 나올 것 같지만 끝내 아무 소리도 내지르지 못하는 달팽이. <달팽이>에서 그 달팽이는 바로 작가였던 것이다.
여름도 다 끝나려는 어느 늦은 저녁 무렵이었다. 그때 나는 달팽이의 이상한 몸짓을 보았다. 억새풀의 제일 높은 끝에 한 방울의 이슬처럼 위태롭게 맺혀 있었다. 목은 길게 솟아올랐고, 조그만 입은 약간 벌어졌으며, 꽃의 수술 같은 두 개의 눈은 긴장되어 있었다. 마치 노래를 부르려는 순간의 어떤 가수처럼, 나뭇가지를 떠나려는 순간의 새의 자세처럼 보였다. 아무 소리도 내지르지 못했다. 투명한 달빛이 조금 몸을 비추고 있었다.
밀폐된 유리벽의 저편에서 키가 작은 한 남자가 울고 있는 것을 나는 보고 있었다.
<달팽이> 중에서
수필에서 등장인물은 서로 갈등하는 인물이 아니다. 갈등은 인물들 사이에서 일어나기보다는 작가의 내면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이미 갈등이 끝나고 화해의 단계에 접어들었을 때 인물은 등장해서 작품의 주제를 보다 선명하게 한다.
피천득의 <5월>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갗같이 보드랍다.
스물한 살이 나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
失了愛情痛苦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 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피천득의 <5월> 전문
이 글에서 오월은 제재(題材)이며 주제인가? 주제라면 이 글의 주인공은 오월이다. 이 글은 오월에 관해서 쓴 대상수필(구상 수필)이 아니다. 오월을 맞은 화자가 주인공이다. 두 명의 인물이 등장했다. 21살의 과거의 나와, 이 글의 화자인 나다. 두 인물은 서로 만나고 있지 않다. 그러니 두 인물 사이에 갈등이란 애당초 있을 수도 없다. 그러나 그들은 갈등하고 있는 인물이다. 성격끼리의 갈등이 아니라 내면의 갈등, 곧 자기와의 싸움이다. 21살의 나는 실연의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다. 실연으로 젊어서 자살한 중국의 어떤 시인처럼 칵 죽어버려! “得了愛情痛苦 失了愛情痛苦”는 한시(漢詩)는 한자로 씌어 뜻이 거창한 것 같아도 해석해 보면 ‘사랑은 얻어도 괴롭고, 잃어도 괴롭다’는 유행가 가사 같은 신파다. 젊은 날의 사랑의 고뇌가 싱그럽지 않나? 젊음이란 바로 미숙함의 아픔 때문에 아름답다.
“내 나이 세어서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한국수필문학이 남긴 명구이다. 그렇다면 화자의 나이는 몇이나 될까? 그가 90 넘게 장수하셨으니 6·70대 쯤? 아니다. 기껏해야 50대 초반이다. 내 살아보아서 아는데 그 나이란 초연해지는 나이가 아직 아니다. 그러기에 약동하는 오월에 느끼는 갈등은 더 크다. 이 글의 진짜 묘미는 바로 이 대목에 있다. 만물이 약동하는 오월에 사랑은 얻어도 괴롭고 잃어도 괴롭다는 유행가 가사 같은 이 말이 새록새록 실감나는 초로의 작가에게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 20대의 작가와 50대의 작가 사이에 읽혀지는 것은 성숙된(성장한) 성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