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잊혀진 영웅!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1918년 2월 1일 경주 녹동 한 양반가의 상가에서 기이한 풍경이 벌어졌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통곡하는 상주. 그런데 그 주변을 수백명의 일본 경찰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흉악범이길래 상주를 체포하는 것일까? 일경이 그를 포박하려하자 그는 오히려 그들을 꾸짖었다.
내 이미 어머니를 여읜 죄인이거늘 어찌하여 또 포박하려 하는 것이냐? 내 몸에 손대지 마라. 내 스스로 가겠다.
흰 두루마기로 갈아입고 자신의 백마를 타고 가며 시를 읊는다.
어머니 장례를 마치지 못했고 나랏님 원수도 갚지 못했네
빼앗긴 국토마저 되찾지 못했으니 죽은들 무슨 면목이 있으리
그는 바로 항일무장투쟁의 영웅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이었다.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우리에게는 참 낯선 이름이다. 우리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지 얼마되지 않았던 1910년대 일본은 무단통치라고 하는 폭압적인 정치를 해오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려는 의병들은 철저히 섬멸당하고 뜻있는 지사들은 머나먼 만주땅으로 떠나야만 했다. 우리민족에게는 끝없는 고통과 절망의 나날이었다. 헌데 이무렵 강력한 일제통치에 조국 해방의 기치를 내건 사람들이 등장한다. 바로 광복회원들이다.
경주에서 대구로 가는 길목에 있는 효현교. 1915년 12월 경주에서 거둔 세금을 운반하던 마차가 괴한들에게 털리는 사고가 발생한다. 일본경찰의 통제를 뚫고 8천 7백원의 거금을 강탈한 범인들. 하지만 범인들은 끝내 잡히지 않았고 사건은 단순 강도사건으로 종결되었다.
부산시 남구 대연동.
이 사건의 실체가 알려진건 광복 이후였다. 그날 세금마차를 습격했던 범인들이 스스로 나타난 것이다. 고헌실기 약초는 광복회 총사령 고헌 박상진의 일대기로 백산 우재룡 선생이 구술한 책이다. 이 책에 세금마차 습격사건 전모가 실려있다.
- 박중훈 ㅣ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 종손 -
해방 후에 우재룡 의사님이나 권영만 의사께서 송정으로 자주 놀러오셨습니다. 몇번 놀러오셨는데 그때 제 조부와 증조부님의 재종동생 되시는 분들하고 여러 얘기를 나누셨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우편마차 사건도 이야기하셨고 그런 것을 듣고 증조부님의 재종동생 중에 이름이 '맹'자 '진'자 쓰시는 할아버지께서 기록으로 남기셨죠.
사건이 발생하던 전날 경주 인근에 토지세를 싣고 가기로 되어있던 마부의 집에 한 남자가 찾아온다. 이 남자는 다음 날 대구에서 의사를 만나기로 했다며 마차에 태워주기를 간청했다. 그 시각 또 다른 한 남자는 마차가 지나가는 효현교의 나무 다리를 부숴 마차가 지나가지 못하게 한다. 다음 날 새벽, 세금마차는 외부 사람은 동승할 수 없다는 규정을 어기고 전날 밤에 찾아온 환자를 태우고 대구로 향한다.
소태고개에 도달한 마차는 부서진 다리를 건널 수 없어 얕은 개울물로 건너기로 한다. 마차의 속도가 느려지자 짐칸에 타고있던 환자는 품 속의 칼을 꺼내 세금행랑을 파괴하고 돈을 꺼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차에서 내려 훔친 돈다발을 들고 유유히 사라진다. 일본 경찰은 이 사건을 백방으로 조사했지만 단서조차 찾지 못했다. 세금을 턴 두 사람은 지휘장인 우재룡, 권영만 의사였고 훔친 세금은 독립군 군자금으로 보내진다.
중국 라오녕성 단동시에는 항일민족영웅 이진룡 선생의 공원묘지가 있다. 황해도 출신의 의병장인 그는 1908년경 예성강 일대에서 일본군을 물리쳐 해서명장이라 불리던 인물이다. 국내에서 의병활동이 어려워지자 만주로 망명해 항일운동을 펼쳤다. 1917년 그에 대한 체포기사가 실렸는데 죄목이 특이하다.
이진룡 부대가 동양의 금광의 현금수송마차를 습격, 무장 총격전을 벌여 일본인 순경 외에 7명을 살상한다. 운산 금광은 외국에 헐값에 팔린 금광으로 노다지라는 말이 붙은 세계적인 금광이다. 이진룡은 광산의 이익금을 환수하는 것은 빼앗긴 재산을 되찾는 정당한 행동이라 여겼다. 부하들과 함께 대담하게 압록강을 넘어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인 그는 광복회의 만주 사령관이었다.
경북 구미에는 장승원이라는 인물의 고택이 남아있다. 구한말 경상북도 관찰사를 비롯 요직을 두루 거친 장승원. 그는 연간 7만 5천석을 수확할 정도로 일제치하 제일가는 부호 중 하나였지만 그 행적이 악명 높았다. 허위 선생의 추천으로 관찰사가 되었다. 그런데 1907년 허위 선생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제공하기로 한 군자금 조달을 거부하고 그 사실을 일경에 밀고하는 등 친일 행각을 서슴치 않았다.
1917년 11월 10일 밤. 일단의 괴한들이 장승원의 집을 급습한다. 이들은 장승원을 처단하기 위한 시도만도 5차례에 이를 정도로 적개심이 높았다. 다섯 번의 시도 끝에 성공한 이들은 격문을 붙이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라를 광복하려 함은 하늘과 사람의 같은 뜻이니 이 큰 죄를 꾸짖어 우리 동포를 경계하노라
- 광복회원 -
이들 역시 광복회 회원들이었다.
민족의 이름으로 악질 친일부호들을 사살하고 금광을 습격하고 세금을 탈취하는 광복회원들. 대단히 과감하고 전투적인 조직이다. 조국광복을 염원하는 광복회원임을 당당히 선포하고 일제와 그 앞잡이 민족 반역자들의 간담을 서늘케한 광복회. 그 중심에 총사령 박상진이 있었다.
광복회 총사령관 박상진은 우리에게 낯설지만 울산에서는 대표할만한 역사적 인물이다. 매년 박상진의 삶을 창작 오페라로 매년 공연한다. 오페라로 되살아나는 박상진, 과연 그는 누구일까? 1884년 박상진은 아버지 박식유와 어머니 여강 이씨의 장남으로 태어나 큰아버지 박시륭에게 양자로 입적된다.
승정원 승지를 지낸 아버지와 홍문관 교리를 역임한 백무 박시륭등 박상진 일가는 울산의 손꼽히는 명문가요 대부호였다. 넉넉한 살림과 집안 어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입신을 꿈꾸던 소년 박상진. 열세살 때에 왕산 허위의 제자가 되면서 그는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었다. 허위는 국난을 당하자 의병을 일으켜 줄기찬 대일무력투쟁을 전개한 유학자였다.
신학문을 배울 것을 권유하는 스승 허위의 말에 따라 박상진은 서울의 양정의숙에 입학한다.양정의숙은 1905년 설립된 사립학교였다. 박상진은 1906년에 양정의숙 법률학부에 입학해 근대 법률을 배웠다. 스승 허위에게 배운 혁신 유림의 대의명분과 신학문을 통해 익힌 새로운 세상은 박상진의 내면을 크게 성장시킨다.
- 이성우 교수 ㅣ 충남대 사학과 -
왕산 허위 선생이 가지고 있는 혁신 유림적은 성향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사실 박상진 의사가 광복회를 활동할 수 있었던 큰 배경이었죠. 왕산 허위 선생이 의병운동을 하면서도 근대적인 성향과 사고를 하시게 되고 제자인 박상진에게도 전달했고 신학문을 수용하게 되고 그러면서 박상진 의사가 계몽운동계열분들과 교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셨습니다.
당시 시국은 급변하고 있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잃은 고종은 1907년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외교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일제는 고종에게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퇴위할 것을 강요했다. 고종은 저항했지만 이미 대신들은 일제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서울시민들의 격렬한 퇴위 반대 시위에도 불구하고 이완용 내각은 고종의 퇴위를 결의했고 순종이 마지막 황제로 즉위한다.
그리고 일제는 군대 해산 명령을 내리고 한국군을 강제 해산시켰다. 대한제국의 대대장을 맡고 있었던 참령 박승환은 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권총으로 자결한다. 박승환의 자결은 곧바로 한국군의 무장봉기로 이어졌다. 서울 한국군의 격렬한 항쟁과 원주와 강화에 주둔하던 국군 또한 강렬한 무력항쟁을 벌였다. 마침내 전국적으로 전계층이 참여하는 대일무장항쟁이 벌어졌고 이것을 1907년 정미구국의병전쟁이라 부른다.
- 박민영 ㅣ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
각 부서의 대신들 밑에 일본인 차관이 임명이 됩니다. 허수아비 장관 밑에 실질적인 일본 차관이 내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는 그러한 양상으로 거의 국권상실의 마지막 단계까지 치닫게 되는 상황입니다.
서울 동대문에서 청량리 사이의 왕복 6차선 사이의 대로에는 뼈저린 우리 역사가 담겨있다. 1908년 1월, 마침내 전국에 만유의병이 연합해 서울 탈환 작전을 벌인다. 이때 왕산 허위는 13도 창의군의 선봉장으로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출한다. 이 일을 기려 이 길을 왕산로라 했다. 서울 죽랑구 망우동, 서울진공작전을 펼쳤던 13도 창의군을 기념하며 건립된 탑이다. 왕산 허위는 여기서 일본군과 결전을 벌이지만 후속군이 늦어 결국 패한다.
허위는 이후에도 경기 북부에서 의병을 조직, 끈질긴 대일항쟁을 벌인다. 일제의 모든 회유를 거절하고 끝까지 항전하다 1908년 6월 체포된다. 그리고 그해 10월 허위는 서대문 형무소 제1호 사형수로 순국했다. 박상진은 아무도 돌볼 수 없었던 스승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룬다.
- 김희곤 교슈 ㅣ 안동대 사학과 -
학교를 그만둘 수도 없고 의병에 참가하기도 어려운 상태이고 스승이 바라는 게 무엇일까? 스승은 의병을 일으키고 있고 나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결국 스승이 나한테 준 것은 그렇게 인재로 자라서 나라를 구하라는 것인데 그래서 뛰어들지 못하고 고민하는 거죠. 이것이 하나의 과정이었던 거죠.
스승의 순국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던 박상진은 각종 사회단체에 가입해 김좌진, 안희제, 도산 안창호 등을 만나 영향을 받는다. 박상진은 이미 자신만을 위한 공부에는 뜻이 없었다. 1910년 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판사 임용시험에 합격한다.
그러나 그는 판사부임을 거부한다. 박상진이 개인적 출세의 길을 버린데에는 스승 허위의 죽음과 함께 안중근의 최후가 영향을 끼쳤다.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사살한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안중근은 박상진이 판사판결을 받던 그 해 처형되었다.
그리고 그해 8월 나라가 망했다. 1910년 8월 20일 한일강제병합. 망국은 박상진에게 기존의 인생 목표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는 곧바로 만주와 중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새로운 길의 모색이었다. 당시 중국 대륙은 신해혁명기. 박상진은 신해혁명과 혁명지도자 쑨원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
이미 만주에는 많은 애국지사들이 망명해 기틀을 다지고 있었다. 이동영, 이휘영 선생등이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교육하며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공자와 맹자는 시렁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된다며 전재산을 털어 독립기지를 세운 석주 이상룡. 그리고 만주뻘 호랑이 김동삼, 그들과의 만남에서 박상진은 투쟁의 방향을 세웠다.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독립운동 사정도 파악을 하고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할 동지를 규합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국내외를 많이 여행하십니다. 주로 서간도지역을 답사하시는데 그쪽을 주름잡던 분들이 안동유림들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미 친분이 형성되어있었기 때문에 독립운동기지, 서간도 환경을 보게 되면 그 현실을 목격하고 지원할 계획을 수립했다라고 할 수 있구요.
1907년 정미의병전쟁에서 패배하고 만주에서 힘을 키워 조국으로 진공하겠다는 꿈을 키우고있는 선배 독립투사를 위해서 박상진의 독립투쟁론, 무장혁명론이 서서히 꿈틀대고 있었다.
박상진은 독립투사를 처벌하는 영혼없는 법관의 길 대신 일본 제국주의자와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하는 고난의 길을 선택한다. 의병을 일으킨 배후가 누구냐는 검사의 심문에 침략자 이토히로부미가 나의 배후다라고 일관하며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 박상진의 스승 허위. 그리고 고위관료도 왕족도 아니었지만 모든 재산을 정리해 일가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한 후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한 석주 이상룡 선생. 청년 박상진은 이들의 애국투혼에 깊은 감명을 받고 방방곡곡에 의로운 사람들을 찾아나선다.
1920년 10월 21일 일본군은 청산리 80리 계곡으로 깊숙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은 일본군 3300명을 섬멸하는 성과를 거둔 청산리 대첩이었다. 이 전투는 봉오동 전투와 함께 독립전쟁사의 위대한 승리였고 패배감에 빠져있던 우리 민족에게 광복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었다. 청산리대첩의 주역 백야 김좌진 장군, 그런데 그 김좌진은 박상진과 깊은 관계였다.
광복회 지휘장을 지낸 백산 우재룡의 백산실기. 백산 우재룡 의사는 당시 비밀 지하 조직이었던 광복회의 강령과 지침, 조직도 등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광복회의 총사령관은 박상진, 지휘장은 우재룡, 권영만이었다. 놀랍게도 만주사령관을 김좌진이 맡고 있었다. 독립전쟁사의 영웅인 김좌진 장군을 부사령으로 거느린 박상진. 과연 광복회는 어떤 조직일까?
1907년 정미년에 일어난 의병전쟁은 서울진공작전의 폐태와 함께 커졌고 이후 일제의 대대적인 봉쇄로 국내에서 무장항쟁은 쇠퇴한다. 만주와 연해주가 독립투쟁의 중심지가 되고 국내에서의 투쟁은 불가능해진다. 이때 등장한 것이 국내 항일무장조직 광복회이다.
- 이성우 교수 ㅣ 충남대 사학과 -
독립운동을 국내에서 헌병경찰통치 내에서 전개한다는 건 상당히 어렵습니다. 여건상으로 본다고 하면 1910년대가 독립운동을 하기 가장 어려웠던 시기라고 할 수 있어요. 광복회가 가진 의미도 그런 것과 부합되는 거죠. 가장 어려운 곳에서 가장 어려운 시대에 독립전쟁을 준비했다는 광복회가 1910년대 독립운동사와 일맥상통합니다.
경주 외동읍 녹동.
이곳에는 박상진 의사의 귀중한 사료가 전해져오고 있다. 임기철씨는 집안에 내려오는 각종 편지와 제문등을 모아 병풍으로 꾸몄다. 그런데 뜻밖에도 박상진 의사의 친필편지가 한 통 있었다. 1911년 아버지의 회갑연 초청장이었다.
옛날에 종이가 귀했잖아요. 그리고 책이 되어 있는 건 찢으려고 하면 야단 맞으니까. 갈피 속에 들어있는 건 몰래 뜯으면 모른단 말입니다. 그래서 사실 책갈피 속에 있는 것이.. 어떻게 분실이 안 되고 여태까지 소장되었는가 하면 내가 철이 들었을 때니까 고헌 선생의 글이 있으니까 이건 도립운동가인데 이걸 제기를 만들던지 딱지를 만들면 안된다 싶었어요.
하지만 이 편지는 단순한 회갑연 초청장이 아니었다. 아버지 회갑연을 빌미로 지사를 모은 것이었다. 이날 만남에서 박상진 의사는 격동하는 중국대륙과 국제정세를 설명하고 만주의 독립기지 상황을 말했다. 그리고 국내에서의 활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말을 한다.
경북 풍기시 풍기읍.
이곳에는 특별한 전시관이 있다. 풍기 출신 독립투사를 만나기 위해서는 친일 우적을 밟고 지나가야 한다. 나라가 망한 이후에도 태백산에서 의병을 이끌고 투쟁을 계속했던 채기중 의사. 당시 독립운동 진영은 먼저 실력을 양성해야한다는 계몽주의와 전면적인 무장항쟁을 해야한다는 의병투쟁론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박상진은 의병투쟁론자인 채기중을 설득해 계몽주의계열과 함께 광복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한다.
- 이성우 교수 ㅣ 충남대 사학과 -
박상진 의사가 광복회를 조직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가 가지고 있었던 계몽주의적 성향, 의병적 성향 이런 것들이 광복회라는 조직이 합류할 수 있는 단체라고 할 수 있는데 양 성격을 다 소유하신 분이었기 때문에 리더쉽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왕산 허위선생의 제자라는 측면이 의병전쟁을 했던 분들을 광복회로 참여시킬 수 있는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죠.
1915년 8월 2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우리 독립투쟁사에 남을 역사적 모임이 있었다. 나라를 빼앗긴지 5년만에 전국적인 항일무장투쟁 조직이 결성된 것이다. 계몽주의계열과 의병투쟁계열을 총망라한 명실상부한 전국적 독립운동단체 광복회. 모임에서 박상진은 총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본부 조직은 물론 각 도에 지부를 설치했다. 눈에 띄는 것은 만주에도 책임자를 파견했는데 지위가 부사령급으로 비중이 높았다. 조직운영은 철저히 군대식이었다. 항일무장투쟁을 지향하는 광복회의 4대 강령은 비밀, 암살, 폭동, 명령.
우선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필요한 인력을 만주로 이민보내는 작업을 했다. 국내에서 자금과 인력을 만주로 보내고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해 국내로 들여보내 일제를 밀어내는 것. 그것이 광복회의 목표였다.
- 이성우 교수 ㅣ 충남대 사학과 -
기본적으로 전쟁을 통해서만 독립이 된다라고 생각했던 단체이기 때문에 조직도 군대식, 행동강령도 상당히 투쟁적인 성향이 보입니다. 무기를 구입하고 군대를 양성시키기 위해서 한인을 만주로 이주시키고 그 한인들을 배경으로 해서 무기를 구입한 것을 가지고 독립군을 양성하고 양성되면 일본하고 독립전쟁을 벌인다라는 것이 광복회가 가진 가장 큰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광복회가 결성된 후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업은 군자금 모집이었다. 비밀 결사 조직인 까닭에 남아있는 자료가 많지 않지만 이곳에는 당시 광복회의 활동을 알 수 있는 한 장의 문서가 있다. 일본 미쓰이 회사가 상덕태 상회 앞으로 발행한 영수증. 박상진은 양정의숙 동창인 김덕기, 오혁태와 함께 거금을 출자하고 각자의 이름을 한글자씩 따서 상덕태 상회를 열었다. 거래 품목과 거래량은 물론 26500엔이라는 거액의 대금을 통해 상덕태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상덕태 상회는 대구 양녕시 부근에 있었다. 겉으로는 고물상이지만 독립투쟁의 거점역할을 했고 광복회 설립 이후 이런 방식의 상업기지가 전국 곳곳에 세워진다. 북위에 만주와 대구 광주 예산 인천 등 전국 곳곳에 상회를 열어 사업을 통해 군자금을 마련하고 일본의 눈을 피하는 비밀거점의 용도로 사용했다.
사업만으로는 막대한 독립군 군자금을 조달할 수 없었다. 해서 광복회는 위조지폐를 제작해 사용하기도 했다. 만주사령관 이진용의 금광수송마차 습격역시 군자금 마련의 일환이었다. 광복회가 군자금 마련을 위해 가장 많이 쓴 방법은 국내 자산가로부터의 의연금 모집이었다. 특히 친일부자들을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의연금을 배당했다. 박상진이 작성한 포고문을 지휘장이자 대외군을 맡았던 우재룡이 책임지고 등사와 배포를 담당했다.
그런데 일본 경찰 기록에 따르면 신채호 선생도 광복회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충청도 지역에 발송된 고시문은 신채호선생이 작성한 것으로 일본군은 파악하고 있었다. 수사기록에 따르면 신채호가 작성한 고시문은 임봉주 의사가 지팡이 속에 숨겨 국내로 가져온 것으로 되어 있다.
철저한 보안유지가 일본군의 눈을 피한 광복회의 활동을 가늠케 했다. 국내의 부호들의 명단과 재산 내역을 정리해 본부에 보내는 비밀방식을 보자. 먼저 소금물로 백지에 글을 쓴다. 불에 쬐어야만 글씨가 나타나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기생이자 조직원인 어재하의 집에서 박상진과 김좌진의 이별이 있었다. 만주사령관 이진용이 체포되자 후임으로 김좌진을 파견한다. 청산리 전투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박상진은 김좌진에게 군자금 6만원을 지원한다.
- 이성우 교수 ㅣ 충남대 사학과 -
광복회가 가장 큰 활동을 한 것은 군자금모집활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광복회는 조직상으로 비밀조직이었고 군대를 양성하고 독립전쟁을 목표로한다는 큰 임무를 수행하지만 가장 급한 것이 군자금 모집이었기때문에 국내에서 만들어서 만주로 보낼 수밖에 없었죠. 비밀조직이라 군자금 모집 금액이라던지 총액은 확인되지 않지만 대부분 모여진 자금들이 만주로 보내져서 독립자금으로 활용되고 있었습니다.
목숨을 건 무장투쟁으로 만들어진 군자금은 이렇게 만주로 전해졌다. 독립군 기지건설과 국권회복이라는 목표는 차근차근 이루어지고 있었다.
비밀, 암살, 폭동, 명령. 광복회의 4대 강령이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열악하고 엄혹한 시기였던 1910년대에 건설된 항일무장조직 광복회. 박상진은 나라를 찾는 강력한 방법으로 무장투쟁을 선택한 것이다. 낯선 만주벌판에 독립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국내에서 자금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박상진과 광복회원들은 위험이 따르더라도 국내에서 무장투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자연히 광복회의 투쟁이 강력해질수록 일본제국주의자들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광복회 회원들은 사전에 조사한 친일 부호의 재산, 규모에 따라 군자금 모금액을 친일 부호에게 통고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일본 경찰에게 신고해버렸다. 마침내 광복회는 이들을 민족의 적으로 간주하고 처단하기로 한다.
벌교부호 서도현 사살 1916년 5월
칠곡부호 장승원 처단 1917년 11월 10일
이것은 친일부호를 공격하고 처단하고 해서 그 자금으로 나라를 되살리는 인재양성비용으로 쓰겠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그걸 테러라고 몰아서 의열투쟁을 테러공작이라고 911과 비슷하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우리 역사를 아주 비하시키고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죠. 이 광복단의 투쟁모순이라는 것 자체가 전체적으로 보면 독립전쟁론입니다.
친일행각이 극심하거나 지역민의 불만이 심한 자는 군자금 모금에 상관없이 일괄 처단했다. 광복회의 활동은 빼앗긴 국가를 되찾는 전투였다.
광복회에 반대하는 자는 단율에 따라 처단한다
도고 면장 박용하 처단
그리고 대담하게 청화에 격문을 남기고 사라진다. 자신들의 정체와 응징 이유를 밝혀 광복회의 존재를 알리고 조선 사람들에게 희망을 갖게한 것이다.
부호들은 이미 식민지 지배 체제에 안주하려는 경향으로 기울어져 의연금 모집에 비협조적이었습니다. 광복회는 이를 응징함으로서 친일부호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했고 광복회의 존재를 만천하에 알리고자 했습니다.
광복회의 대담한 활동이 계속되자 일본경찰도 치밀한 내사에 들어갔다. 모금액이 정확히 자산에 비례한 점을 본 일경은 해당 지역에 조직원이 있다고 판단했다.
중구 북정공원에 세워진 고헌 박상진 의사 동상1)
[출처] 잊혀진 조국의 영웅 박상진 그는 누구인가? |작성자 나라사랑
울산=뉴시스】 울산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일제시대 광복군 총사령을 지낸 고헌 박상진 의사의 동상. 15일 박맹우 울산시장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남구 울산대공원에 추가로 박상진 의사의 좌상을 세울 계획임을 밝혔다./강재순기자
박상진 의사 독립운동 자료 울산박물관 기증 (울산=연합뉴스) 울산 출신 독립운동가 박상진(1884∼1921) 의사의 증손자 박중훈(57)씨가 박 의사 관련자료 수 점을 울산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다. 기증하기로 한 박 의사의 사진. <기사 참고> |
박상진 의사 독립운동 자료 울산박물관 기증 (울산=연합뉴스) 울산 출신 독립운동가 박상진(1884∼1921) 의사의 증손자 박중훈(57)씨가 박 의사 관련자료 수 점을 울산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다. 사진은 박 의사가 법원에 낸 청구서. <기사 참고> sjb@yna.co.kr 28일 울산시에 따르면 박씨는 박 의사의 독립운동 활동상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 청구서 1점과 재판증인 청원서 1점, 사진 등 수 점을 내년 6월 개관할 울산박물관에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
대한광복회 결성·日警에 체포돼 사형
【서울=뉴시스】김종민 기자 = 65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대한제국 말 판사가 됐다가 "식민지 관리(官吏)는 되지 않겠다"며 법복을 벗고 항일운동에 투신한 애국지사가 주목받고 있다.
11일 대법원에 따르면 그 주인공은 '대한광복회'를 결성을 주도하고, '친일파 장승원 처단사건'으로 체포된 뒤 옥중에서 생을 마감한 고헌 박상진 선생(固軒 朴尙鎭,1884∼1921).
1884년 12월7일 전통적인 유가(儒家)가문에서 태어난 선생은 명성황후 시해, 단발령 등에 반발해 의병을 일으킨 허위 선생(許蔿, 1855∼1908)의 문하에서 반외세 민족의식을 키웠다.
이후 판사시험에 합격, 1910년 평양법원으로 발령받았으나 경술국치로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대한제국의 국민으로서 식민지의 관리는 되지 않겠다"며 판사직을 버렸다.
법복을 벗어던진 뒤 선생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1911년 망국의 한을 안고 중국으로 떠나 다양한 경험을 쌓은 선생은 1912년 귀국, 국내 독립운동단체에 몸을 담는다.
그리고 1915년 7월 반민족적 지주를 응징,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고 독립군을 양성할 목적으로 채기중 선생(蔡基中, 1873∼1921) 등과 함께 대구에서 대한광복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이후 친일 부호를 처단하는 활동을 벌이다 체포된 선생은 보안법 위반, 공갈, 살인방화, 강도죄 등로 기소돼 사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1년 8월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선생이 한일합방 직후 느꼈던 분노와 나라를 잃은 원통함, 의기는 대한광복회를 결성한 이후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당시 조선의 부호들에게 보낸 포고문에서도 잘 드러난다.
포고문에는 "우리 4천년 종사는 흔적없이 사라졌다. 2천만 민족은 노예로 변하여 섬 오랑캐의 악정 폭행은 날로 더해간다. 이를 생각하면 피눈물이 샘솟는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대한광복회의 의열투쟁은 암살단·주비단·의열단으로 이어져 독립운동을 크게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한편 대법원 법원도서관은 박상진 선생에 대한 조선총독부 고등법원(현재 대법원)의 판결문 등 1920년 민·형사 판결문이 담긴 '조선고등법원판결록' 국역본 7권을 작년 발간했다.
조선고등법원판결록은 1909∼1943년 대한제국 대심원·조선총독부 고등법원 등의 민·형사 판결문이 수록돼 있다. 법원도서관 홈페이지(library.scourt.go.kr)에서 열람할 수 있다.
박상진 의사 친필서한 |
(울산=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대한광복회 총사령을 지낸 울산 출신 독립운동가 고헌 박상진 의사(1884~1921)가 종숙(從叔)에게 독립운동 군자금을 요청하는 내용의 한문 서찰이 14일 공개됐다.
박시준씨의 손자인 박종해 울산예총 회장이 소장하고 있던 이 서찰(한지에 초서. 42×22cm)은 지난 2005년 10월 울산에서 활동하는 향토사학자인 박채은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이 박 회장의 소장자료를 정리하다 발견한 것으로 박 의사가 가까운 친척으로부터 군자금을 지원받아 독립운동에 쓴 사실이 초서체 한문으로 기록돼 있다.
청산리 대첩의 일등공신 김좌진 장군을 아는 사람은 많아도 박상진 그의 이름 세 글자를 아는 분은 드물 것이다. 백야 김좌진 장군을 거느렸던 이가 바로 광복회의 총사령관 박상진이었다!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잊혀진 영웅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그는 누구인가?
만주사령관 김좌진은 박상진이 거느린 부사령관이었다.
박상진은 비밀조직 광복회의 총사령관으로 한국과 중국으로 오가며 전인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입지적 인물이었다.
중구 북정공원에 세워진 고헌 박상진 의사 동상1)
추모비 비문 내용3)
무릇 사람이 한 번 나고 죽음은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일이로되, 한 생애 권력과 부귀를 누리고도 역사에 길이 비방과 모멸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일생을 고난과 역경 속에 헤매이고서도 세세생생에 흠모와 존경을 받을 사람이 있나니, 여기 불멸의 혼으로서 계신 박상진 의사야 말로 이 땅에 사는 우리가 영원히 잊어서는 안될 분이시다.
의사는 휘는 상진이요 자는 기백이며 호는 고헌으로 서기 1884(고종 21)년 12월 7일에 울산광역시 북구 송정동에서 밀양 박씨 승지 시규와 여주 이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나서 곧 백부인 홍문교리 시룡에게 출계하였다. 어려서부터 풍채와 기질이 당당하고 심성과 재기가 후덕총명하며 시문이 뛰어났는데, 경주시 외동읍 녹동으로 이사하여 성장하면서는 한문과 역사와 위인 열사의 사적을 즐겨 공부하였다. 그러나, 때가 일본을 비롯한 서양 외세가 몰아쳐 4천년 민족의 역사가 누란의 위기에 처하니 어찌 뜻있는 지사가 우국충정을 품지 않으리오. 의사께서는 16세에 경북 선산의 유학자요 의병대장인 왕산 허위 선생의 문하에서 정치와 병법과 역사를 배웠으며, 22세에는 허왕산의 권유로 양정의숙에 입학하여 법률 경제 등 신학문을 익히셨다.
을사조약(1905)으로 국권이 송두리째 일본 통감부로 넘어가자 스승 허위가 일으킨 항일 의병활동에 당시 신문사 둘을 세울만한 거금 5만원을 제공하였고, 1908년에는 전국의병연합군의 군사장인 허왕산이 일경에 의해 체포 총살당하자 감히 아무도 손을 댈 수 없던 스승의 시신을 찾아 그 고향인 선산군 임은으로 반장하였다. 1909년 가을에는 대한제국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이듬해 봄에 평양법원 판사로 발령났으나 많은 애국지사들이 역도로 몰리는 시대에 일본의 꼭두각시 판사로 부귀영달을 누린들 무엇하랴, 하고는 부임을 거부하였다.
1910년 마침내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잃고 민족의 역사가 끊어지자 전 생명과 재산을 바쳐 국권을 회복할 것을 결심하고는 만주로 가서 양제안, 허 혁, 이상룔 등 독립지사들과 독립군 군관학교 설립을 의논하였고 중국의 신해혁명(1911)을 몸으로 배우고자 중국 각지를 순찰하였다. 29세 되던 1912년에 귀국하여서는 독립자금 조달과 독립거점 확보를 위해 천석군 재산이 넘는 논밭 900두락을 내어 평양의 김덕기 전주의 오혁태와 더불어 상덕태상회를 대구에 설립하고는 전국 곳곳과 만주 및 중국까지 지점을 설치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달성군 안일암에서 윤상태, 서상일, 이시영 등 동지들과 조선국권 회복단을 결성하였고, 또 중국에 가서는 손문을 만나 군관학교에 한인특설부를 두게 하여 독립사관 양성의 길을 열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독립 의군부에 가담하고 신흥군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15년에는 드디어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과 풍기에서 채기중이 이끌던 풍기광복단을 통합하여 대구 달성공원에서 200여명의 독립지사들이 모인 가운데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그 총사령으로 추대되었으니, 이 단체는 박의사를 비롯하여 채기중, 우재룡, 장두환, 김한종, 이관구, 권영만, 장순필 등과 후일에 가입한 김좌진, 노백린, 신현대, 윤홍종 등등 쟁쟁한 독립투사들이 한반도와 만주에 걸쳐 활동한 거국 거족적 독립운동단체였다. 일찍부터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군대와 힘이 있어야 함을 통감한 의사께서는 군자금 모금과 무기 구입, 독립군 양성에 전력하였다. 그리하여 일제가 불법 징수한 세금을 경주에서 탈취하여 독립자금에 넣고 데라우치 총독암살을 시도하였으며, 허왕산에게 독립자금 20만원을 약속하여 경상관찰사가 되고는 약속을 어기고 독립투사들을 고발한 칠곡의 악질 친일부호 장0원과 아산의 악질 친일 반역자 도고 면장 박0하를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하고, 재력가를 몰래 찾아다니며 독립자금을 모금하는 등 종횡무진 활동하였으니, 그 노고와 울분이 어떠하였겠는가!
이렇게 동분서주 불철주야 조국과 민족을 위해 애쓰던 의사께서 1918년 1월 생모의 상을 당하여 녹동에 왔다가 수 백명의 일경에 체포되어 그 후 4년간의 갖은 고문과 악형을 받고서도 끝내 대한광복회의 조직과 독립자금 헌금자의 명단을 자백하지 않음으로써 수많은 동지들의 목숨과 재산을 건져 주고는 1921년 8월 11일 창창한 38세의 나이로 대구 형무소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니, 아 슬프다 단군의 피를 받은 자 그 누가 가슴 쳐 통곡하지 않으며 눈물로 피를 쏟지 않겠는가! 임종에 이르러 "다시 나기 어려운 이 세상에 다행히도 남자로 태어나서는 아무 일도 이룬 것 없이 떠나니 청산과 녹수도 비웃겠구나"하는 절명시를 남기셨으니, 간악한 일제가 아무리 우리 의사의 목숨을 베어간들 천추에 썩지 않을 그 굳은 정신이야 어찌 뺏어갈 수 있으리오!
의사의 전 재산과 생명까지 바친 그 길고 큰 애국애족의 생애와 정신이 마침내 기미독립운동을 불러일으키고 상해임시정부로 이어져 드디어 8.15 광복을 가져왔으니 어찌 이룬 일이 없다고 하며 청산녹수가 비웃는다 하겠는가? 이제 의사가 가신지 78년이 되었고 역사의 물결이 점점 아득해지니, 의로운 사람의 만대에 빛날 삶을 길이 잊지 않고자 하여 여기 정성으로 동산을 세우고 글을 지어 나치나니 의사의 혼령이여 길이 안식하소서!
알려지지 않았던 광복회의 숨은 활동
독립군 군자금 마련을 위해 환자로 위장해 세금마차 턴 광복회
일제의 폭정 아래서도 조국해방의 기치를 내건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바로 광복회원이다. 광복회는 그 조직적 특성상 모든 일이 비밀리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해방 후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조직의 주된 역할은 군자금 모집활동이었고, 해방 후 알려진 경주발 세금마차의 탈취 사건도 그들에 의해 이루어졌음이 드러났다. 이 사건은 독립군 군자금 마련을 위해 우재룡과 권영만이 주도한 일이었다.2)
그가 광복회의 총사령관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울산의 손꼽히는 명문가 출신으로 대일 의병을 조직한 왕산 허위의 제자였고, 1906년에는 양정고에 입학해 근대법률를 접하면서 계몽운동에 입문하게 된다.
의병투쟁이냐 VS 계몽운동이냐
그 당시 독립운동은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구분됐다.
박상진은 왕산 허위의 제자로서 의병투쟁의 정통성을 잇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양정고에서 받은 교육 덕택에 계몽운동에 있어서도 일각연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박상진만큼 두 조직을 하나로 통합시킬만한 인물도 없었던 것이다.
중국 신해혁명의 수장 쑨원의 영향을 받은 박상진
박상진은 전재산을 털어 독립군을 지원했던 석주 이상룡 등의 선배 독립투사들과의 만남을 통해 독립운동의 의지를 더욱 불태우게 됐다. 박상진은 아버지의 회갑연을 이용하여 일제의 눈을 피해 각지에서 활동하는 지사들을 모았고, 친일파를 처단하고, 금광을 습격하며 세금을 탈취하는 등 다소 적극적인 방법을 통해 조국광복을 꿈꿨던 광복회 회원들. 바로 그들의 수장이 박상진이었다.
최근 우재룡의 백산실기, 고헌실기 약초 등을 통해 그의 독립운동이 알려지면서 그의 전생애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원래는 광복회에서 서대문 형무소를 습격하여 그를 구출하려고 했으나 조직원들의 동의를 얻지 못한다. 후일담으로 그의 죽음 후 이 결정에 후회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박상진의 최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박상진. 귀향이 곧 죽음이라는 사실을 그 또한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어머니를 택했다. 결국 박상진은 고향에서 체포 되어 1921년 8월 11일 순국했다. 박상진이 순국한 후 그의 부인은 배고픔에 시달리다 눈감았다. 이것이 바로 조국광복에 목숨과 재산을 바쳤던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을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다.4)
[출처] 잊혀진 조국의 영웅 박상진 그는 누구인가? |작성자 나라사랑
박상진 의사..
요약
한말의 독립운동가. 1916년 노백린·김좌진 등을 대한광복회에 가입시켜 광복단으로 개칭한 후,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친일파 근절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체포, 사형되었다.
본관 밀양
호 고헌
활동분야 독립운동
출생지 경남 울산
주요수상 건국훈장 독립장(1963)
본문
본관 밀양(密陽). 호 고헌(固軒). 경상남도 울산(蔚山) 출생이다. 1910년 국권피탈 후 대구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활동하였으며, 또 채기중(蔡祺中)·유장렬(柳璋烈) 등이 조직한 대한광복단에도 가담하였다. 1916년 노백린(盧伯麟)·김좌진(金佐鎭) 등을 대한광복회에 가입시켜 광복단(光復團)으로 개칭한 후,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채기중 등과 함께 친일파 부호 장승원(張承遠)·양재학(梁在學)·서도현(徐道賢) 등에게 독립운동자금을 요구하다가 실패하자 이들을 사살하는 등, 친일파 근절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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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朴尙鎭, 1884년 12월 7일 ~ 1921년 8월 13일)은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다. 아호는 고헌(固軒)이다.
생애
경상남도 울산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영남 지역의 명망 있는 유학자로 의병 운동을 일으켜다가 사형 당한 허위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1910년 양정의숙을 졸업하면서 신학문도 익혔다.
그는 졸업후 판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판사 임용을 거절하고 1911년 만주 지역의 망명자들을 만나러 갔다. 만주에는 허위의 형인 허겸을 비롯하여 이상룡과 김동삼, 손일민, 김대락 등이 망명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영남 지역의 유학자 출신으로 해외 독립 운동 기지 설립을 위해 만주로 건너간 인물들이었다.
귀국한 뒤에는 해외의 독립 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안둥 삼달양행과 창춘 상원양행, 지린에 연락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하였고, 1915년에는 비밀 결사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해 활동했다. 계몽 운동가 중심의 이 단체는 곧 채기중 등이 결성한 구 의병 운동가 중심의 풍기광복단과 연합하여 대한광복회를 조직했으며, 박상진은 이 대한광복회의 총사령을 맡았다.
대한광복회의 강령은 부호에게서 군자금을 반강제적으로 기부 받아 독립 운동 자금으로 사용하고, 만주 지역에서 무장 독립 운동을 위한 학교를 세워 운영하며, 해외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일본인 고관이나 한국인 친일 인물들을 수시로 처단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독립 운동 자금을 모집하던 중 협조하지 않는 칠곡의 부호 장승원(장직상과 장택상의 아버지)을 살해하는 등 대한광복회의 여러 테러 활동을 주도한 혐의로 1918년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대구 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1]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우리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한 박상진의사의 생가를 볼수있으며, 조국광복활동을 한 박상진 의사의 일대기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다양한 전시 및 영상시설 등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박상진의사생가 (朴尙鎭義士生家)
종목 : 문화재자료 5호
지정일 : 1997.10.09
소재지 : 울산 북구 송정동 355
고헌 박상진 의사는 울산의 대표적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1884년 12월 7일 울산시 송정동 밀양 박씨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박 의사는 1902년 허위(許爲)에게 한학을 배운 후 양정의숙에 진학, 법률과 경제를 전공하고, 지난 1910년 우리나라 최초로 판사등용시험에 합격했으나 “일본놈 밑에서 판사를 해서 무엇하나”며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복원후]
[복원전]
대지 2천245㎡(695평)에 연면적 340.7㎡(103평) 규모로 1850년께 건립된 목조기와 6채로 안채와 사랑채는 1997년 시 지정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됐다.
독립 운동가로 활약하던 고헌(固軒) 박상진(1884∼1921)이 태어나고 자란 집이다. 박상진은 1915년 비밀 결사대인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총 사령관으로서 광복을 위해 활약한 분이다. 대문채와 사랑채, 안채 등 여러 부속 건물을 ㅂ자형으로 배치하였다. 사랑채는 마루와 방을 갖추고 있으며 뒤의 중문을 지나면 ㄱ자형 안채가 있다. 남녀의 공간을 작은 문으로 간단히 구획하여 각각의 공간에 독립성을 확보하고 있다.
박상진은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력으로 독립을 달성할 목적으로 대한광복회 총사령관을 맡아 활동하다가 체포 되어 1921년 교수형을 당했다. 대구형무소에서 일생을 마감하기 직전 박 의사는 그 당시 심경을 시로 남겼다. ‘다시 태어나기 어려운 이 세상에/ 다행히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아무일도 이루지 못하고 저 세상에 가려하니/ 청산이 조롱하고 녹수가 비웃는구나’
1963년 국민장이 주어졌다. 최근 들어 일부는 현대식으로 개조되었으며, 또한 2003년 안채가 복원 되었다.
▣ 현 황
▣ 연 혁
문화재명 | 수량 | 소재지 | 지번 | 지목 | 지적면적 (㎡) | 지정면적 (㎡) | 토지소유자 및 관리자 | |
주 소 | 성 명 | |||||||
박상진의사 생가 | 1 개소 | 북구 송정동 | 355 | 대 | 2,245 | 2,245 | 울산광역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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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 시레나 ㅣ 민긍호 의병장 손녀 -
나는 민긍호 할아버지의 큰손녀입니다. 할아버지는 한국의 민족영웅입니다.
- 민긍호 ㅣ 원주 진위대대 특무정교 -
군대가 없는 나라를 어찌 나라라 할 수 있겠는가.
참령 박승환
시위대 제1연대 1대대장
1907년 8월 1일.
한 발의 총성, 그것은 구국전쟁의 신호탄이었다.
1907년 여름 대한제국 국군의 총권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구국항전이 시작된 것이다.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인 한국 광복군이 창설되었다.
한국 광복군은 일찍이 1907년 8월 1일 국방군이 해산되던 때에 성립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국군을 해산하던 날이 곧 우리 광복군 창설의 때이니...
-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보고서 중 -
한국 광복군과 우리 국군의 뿌리인 대한제국 국군, 그들은 대한제국 사수 전쟁에 몸을 바친다.
1편 대한제국을 사수하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막대한 국민의 세금을 들여서 군대를 양성하는 것은 단 한가지의 목적이다. 그것은 바로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내기 위함이다. 때문에 국군은 외적의 침략이 있을 때 목숨을 던져서라도 격퇴해내야 한다. 오늘 우리는 쓰러져가는 조국을 지켜내기 위해 산화한 진정한 군인들을 만나본다. 지난 1월 전주 4대륙 피겨스케이팅 선수권 대회가 열렸다. 아사다 마오를 비롯한 세계적 선수들이 벤쿠버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기량을 겨뤘다. 그런데 이 대회에 특별한 선수가 참가했다.
카자흐스탄 국가대표 선수인 데니스 텐. 카자흐스탄에서는 우리나라의 김연아 선수와 같은 존재다. 17살인 그는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선수이다. 데니스는 감성적인 피겨 연기로 항상 관객에게 감동을 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날, 데니스는 실수로 아쉽게 4위에 머물렀다.
어제는 기분이 별로 안 좋았는데 오늘은 좀 낫습니다. 경기를 마치자마자 바로 내일 있을 프리 경기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물론 실수를 만회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아직은 괜찮습니다. 내일은 더 잘하고 싶습니다.
대회가 끝난 후 데니스는 빠듯한 일정에도 어디론가 향했다. 그가 찾은 곳은 강원도 원주의 한 야산에 위치한 한 묘소이다. 익숙치는 않지만 엄마와 같이 한국식 참배를 했다. 놀랍게도 민긍호 의병장의 산소였다. 민족영웅 민긍호. 그는 1907년 정미의병 전쟁 당시 강원도와 충북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군인 출신 의병장이다.
할머니와 이모할머니는 우리 형제, 사촌들에게 민긍호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해줍니다. 당시에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옛날 이야기처럼 마치 요즘 사람들이 슈퍼맨 이야기를 듣듯이 들었습니다. 마치 재미있는 동화 같았습니다.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고 우리들은 다들 할아버지를 닮고 싶어했습니다.
데니스 텐은 바로 민긍호 의병장의 5세손이었다. 민긍호 의병장과 카자흐스탄의 데니스 텐과는 이름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긴 백년의 간격이 있다. 중앙아시아의 방대한 나라 카자흐스탄, 왜 의병장의 후손이 카자흐스탄 국가대표일까? 친구들과 어울리는 그의 모습은 여느 카자흐스탄 소년과 다를 바가 없지만 그는 이곳의 유명인이다.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언론에서 데니스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벤쿠버 동계올림픽 쇼트와 프리 프로그램 경기 출전권을 따낸 데니스에 대한 관심은 대단히 높다. 데니스는 어릴 때부터 피겨를 배웠고 지금은 러시아에서 세계적인 코치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하고 있다. 데니스 텐의 할머니는 민긍호 의병장의 손녀이다. 데니스는 집에 들를 때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다.
아마 그 중에 배신자들이 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일본인들이 그들을 에워쌌지. 할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셨고 다른 의병들도 죽었어. 그 틈에도 할아버지는 부하들이 도망갈 수 있도록 했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졌지.
이 곳에는 민긍호 의병장의 후손들이 벌써 6대째 50여명이 일가를 이루고 살고 있다. 그런데 식사가 끝나자 민긍호 의병장 손녀 며느리가 뭔가를 취재진에게 보여준다. 그것은 옛날 조선의 백자 항아리와 밥그릇이었다.
- 유가이 로자 ㅣ 민긍호 의병장 손자며느리 -
어머니가 물러주신 겁니다. 국이나 김치를 담았습니다.
그리고 또다른 뭔가를 보여주었다.
원본입니다.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여흥 민씨의 족보였다. 민긍호 의병장의 부인이 한국에서 떠나올 때 품에 간직하고 온 것이라고 했다. 여흥 민씨 27세손 민긍호라는 글이 뚜렷하다. 원주 진위대의 특무 장교를 지냈다는 내력도 기록되어 있다. 아들 영욱까지는 같은 글씨로 쓰였고 손자 안똔은 서툰 한국말로 기록했다. 여흥 민씨 가계보, 그것은 민긍호 의병장과 데니스 텐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었다.
할머니들은 민긍호 의병장의 부인 사진도 보여주었다. 100년전에 순국한 그의 부인과 이들, 그의 후손들이 불쑥 나타난 느낌이다. 그들은 취재진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 알렉산드라 ㅣ 민긍호 의병장 손녀 -
할머니는 평생토록 아버지와 함께 할아버지 묘지에 가서 절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단 한번도 남편의 산소에 가보지 못한채 증조 할머니의 한이 오늘 카자흐스튼 피겨 국가대표가 된 데니스를 통해 전해질 수 있을까?
할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돌아가셔서 슬프기도 합니다. 할아버지가 이루신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할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여기에 오니까 힘을 얻는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가 언젠가 이곳에서 사셨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도 바로 이 자리에 서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하사관의 출신으로 군을 장악하고 의병투쟁의 중심에 섰던 민긍호, 그의 치열했던 1907년의 전쟁과 그 후손들의 백년에 걸친 유랑을 따라가보자.
의병장 민긍호 장군. 그리고 그의 5대손인 카자흐스탄 피겨 국가대표 데니스 텐. 나라를 위해 목숨을 잃은 의병장의 자손들은 머나먼 카자흐스탄에 있었고 우리는 그들의 존재조차 모른채 백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 걸까요? 1907년 8월 4일자 프랑스의 르쁘니주르날지이다. 보는 것처럼 화염사이로 태극기가 보인다. 그리고 건물 사이에는 대한제국군과 일본군의 치열한 백병전이 묘사되어 있다. 바로 이 장면은 실제 1907년 8월 1일 서울에서 있었던 사건을 묘사한 것이다. 데니스 텐, 민긍호 의병장의 후손이 카자흐스탄의 국가대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날의 사건으로부터 비롯된다.
1907년 8월 1일,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의 편저에는 각군 한국군 부대장들이 속속 도착했다. 곧바로 병부대신 이병무가 순종황제 조서를 낭독했다. 그것은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라는 청천벽력같은 내용이었다. 군대해산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온 몸으로 저항한 사람이 있었다. 대한제국 시위 제1대대 제1대장 박승환 참령. 나라에 군병이 있는 이유는 나라를 지키기 위함인데 지금 왜적인 온 강토에 가득한데 홀연히 군대를 해산한다는 것은 황제의 뜻이 아니고 적신이 황명을 위조한 것이다. 나는 죽을지언정 명을 받을 수 없다. 그는 군대 해산은 곧 망국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박승환은 186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8살에 무과에 급제했지만 명성황후가 시해당하자 강력한 군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896년 9월 무관학교에 입학, 이듬해에 보병 참위로 입대했다. 황궁 수비대에 배치된 그는 1899년 제1연대 2대대 소대장, 1900년 제1연대 중대장을 맡았다. 1904년 2월, 참령으로 진급했고 군대에서 당시는 제1연대 1대대장이었다. 망국을 지켜봐야만 하는 치욕적인 군인, 대한제국 군인 박승환은 그 치욕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 시각 일본군은 해산식장인 훈련원을 포기한채 한국군의 반발에 대비했고 박승환의 대대원들도 무기 반납 후 훈련원으로 향하던 참이었다. 한 장의 유서로 모든 것을 정리했다.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 번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다. 그의 나이 38살이었다. 박승환의 죽음은 방범령이 제일 먼저 발견했고 대대원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1연대 군인들의 놀라움은 순식간에 분노로 바뀌었고 격분한 군인들은 무기고를 부수고 총기를 되찾았다. 한편 그 시각 인접한 제1연대 1대대도 무기를 반납하고 해산식장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제2연대 1대대는 대대장 이기표 참령이 군을 통제하는 회의에서 해임되어 격양되어 있었다. 이럴때 이웃대대로부터 총성과 함성이 들리더니 1연대 1대대원 세명이 총을 쏘며 달려왔다. 곧바로 제2연대 1대대 병사들도 무기고를 파괴하고 무기를 되찾은 후 일본군과 격전에 대비하였다. 이때부터 제1연대 1대대, 제2연대 1대대원들은 일본군과 전면전에 들어간다. 그리고 두 대대 이외에도 300여명의 다른 부대들도 항전에 참여했다. 그것은 기나긴 구국전쟁의 장엄한 서막이었다.
죽음으로 항전하라
대한제국 시위 제1연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 그는 명령을 따라야만 했던 군인이라는 길과 망해가는 조국이라는 갈림길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하지만 대대장 박승환의 자결은 부하들에게 강력한 구국성전의 명령이었다.
일본 도쿄에 방위연구소에는 백년 전의 사건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자료가 있다. 하세가와 한국주둔 일본 사령관이 일본 육군에게 보낸 전투보고서이다. 대한제국군의 항쟁이 시작된 뒤 일주일 뒤인 8월 7일에 보낸 보고서로 시간대별 기록과 전력투입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첨부된 작전지도에는 진행상황, 주격전지등이 정밀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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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만주독립운동의 거점, 신흥무관학교
독립전쟁 최고의 승첩, 청산리 전투. 30년대 한중연합군의 대승리 쌍승리, 영릉가 전투. 한일비밀결사 의열단,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 광복군까지 독립전쟁 선봉에는 언제나 신흥무관학교의 정예군들이 있었다.
역사교사 1000명이 뽑은 역사 이야기, 세번째 주제는 55분의 교사가 적어주었다. 독립군에 대한 이야기였다. 독립운동사는 너무나 복잡해서 배우기도 가르치기도 힘들었지만 독립운동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려 한다. 국사 교과서를 보면 연해주에 대한 독립군, 블라디보스톡에 대한 광복군, 봉오동에 대한 독립군, 황성보에 한국 독립군, 유화에 서로 군정서군, 홍경에 조선혁명군, 청산리에 북로 군정서군이 있었다. 노선에 차이가 있었지만 조국 독립이라는 목표를 가진 이들의 마음은 하나였다.
의열단장 김원봉,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임시정부 부통령 이동녕, 군정부 독판 이상룡,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 그리고 이 무명의 독립투사들까지. 이런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있던 곳 바로 신흥무관학교이다. 앨범 속에 보이는 분들은 모두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던 학생이거나 그곳의 교관들이었다. 만주에 세워진 독립군 양성기관으로 오늘날의 육군사관학교 같은 곳이었다. 다른 독립운동단체들이 몇년, 몇달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던 것과는 달리 이 신흥무관학교는 10년간이나 지속되며 3천5백명이 넘는 장교와 군사들을 배출해냈다. 이 앞서 본 독립군 부대의 많은 군인들이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거나 이곳 출신 장교들의 지휘를 받았다. 우리 독립운동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신흥무관학교는 과연 어떤 곳일까?
압록강 건너 조선인들이 최초로 정착한 삼원포. 현재 길림성 유아현에 속해있는 삼원포는 총 인구 1만6천여명 가운데 3천여명이 조선족이다. 이곳에 한국 이주민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910년경부터, 그다지 풍요로운 땅은 아니었지만 일제시대 삼원포는 만주지역의 독립운동의 중심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삼원포를 벗어나 신흥무관학교의 주무대인 합리하로 가는 길.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이덕일 박사와 중국인 학자의 도움을 받아 합리하로 향했다. 합리하는 삼원포에서 동쪽으로 40KM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현재 지명은 광화, 합리하는 경운기와 마차가 주요 운송 수단인 산간오지였다.
- 탕운성 ㅣ 90세 -
여기가 학교가 있었다는데 알고 계십니까?
들어는 봤는데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학교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들어보셨나요?
저기 산과 강 근처에 있었다고 했어요. 저기 강이 있잖아요.
백년전의 흔적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마을에서 가장 연로한 노인도 신흥무관학교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학교의 위치를 추측해볼 수 있는 다른 자료는 신흥무관학교 생도대장이었던 원병상의 수기이다. 수기에는 합리하강 북쪽 언덕 위에 학교 터를 신축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노인이 말해준 강가와 일치하는 부분이었다. 강을 따라 탐색한 결과 언덕 위에 넓은 분지를 찾아냈다. 언덕을 감싸고 합리하강이 돌며 흐르고 있었다. 뒤로는 험한 산을 연달아 두고 앞으로는 강줄기를 해자로 삼은 곳. 신흥무관학교의 지형은 그 자체가 뛰어난 천연요새였다. 군사학교를 세우는 데에는 더없이 알맞은 조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학교터는 옥수수밭으로 뒤덮여있었다.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는 우물 하나 밖에 없었다. 주민들이 밭을 일구면서 큰 돌들을 모두 치워버려 남은 주춧돌도 별로 없었다. 취재팀은 옥수수밭 한 가운데에서 건물 자리로 추정되는 곳을 찾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