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위인들의 회심, A. J. 크레일샤이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8, 5-15쪽.
머리말
기독교만이 회심의 체험이 일어나는 유일한 세계 종교도 아니며, 엄밀한 의미에서 회심의 체험이 종교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마르크스주의나 모택동 사상과 같은 세속적인 종교에도 회심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기독교 안에는 이슬람교나 유대교와 같이 기독교와 대단히 유사한 종교들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본질적인 회심의 양식이 있는 것 같다. 그리스도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선포되어 온 기독교의 진리는 기독교인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과의 특수하고도 인격적인 관계를 가진다는 데 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라는 부름은 대부분의 주와 제자 종교(Master-disciple religions)에 공통적인 것이지만, 그 자신이 곧 하나님이며 인간인 한, 주님 (Master)과의 엄격한 인격적인 관계에로의 소명에 대한 응답은 기독교의 독특성이라고 여겨진다.
어떤 종교든지 그것이 제도화되자마자 그 종교의 순수한 힘만이 아니라 일종의 타성에 의해서 유지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모든 시대의 대부분의 세계 종교의 신봉자들에게 적용되는 “신자”라는 용어는 그 신앙의 역동적인 정신적 내용을 나타내기보다는 교리나 의식의 수동적인 수용에 따르는 순응주의(conformism)를 형식적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회심의 현상이 기독교 자체 안에서 일어나는 것과 기독교 밖에서부터 기독교 안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어느 정도의 공통성을 가지는 이유는 신자의 내면적인 생활과 행동 사이의 불일치가 너무나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외적인 행동의 극적인 변화는 회심의 결과도 아니며 또 회심에 원칙적이고도 필수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회심이 어떻게 나타나든지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인격적 관계야말로 기독교적 회심의 결정적인 특징이라고 하겠다. 기독교인 개인 혹은 특수한 집단들이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느끼고 나타내는 정도는 분명히 다양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실용적인 목적으로 그 체험의 통계적 평균치를 추정할 수 없을 것이다. 논의할 것도 없이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가 일으켰던 역동적인 변화가 경험적인 현실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누구나 인식할 수 있다는 점이다.
회심에 관한 주제는 신학의 영역이기도 하고 직접적인 감정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양자가 언제나 같은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니다. 신학은 물론 단순한 영혼의 문제와는 거리가 먼, 때로는 감성을 파괴하거나 불신하는 지적인 활동이며 학문적인 기초 위에 서있다. 다른 한편 감성은 자기 망상과 주관성의 수렁으로 빠지는 경솔함을 저지르는 도깨비 불과 같은 것처럼 보인다. 지적인 신념이 회심에 병행하거나 또는 그것을 선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적인 신념만이 회심에 영향을 끼치는 것같지는 않다. 지식을 찾는 신앙 (Fides quaerens intellectum)은 여전히 기독교의 규범으로 남아있다. 심리학이 언젠가는 종교적 신앙에 내재해 있는 감성의 요소를 설명해내고 정리해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신학과 마찬가지로 심리학도 하나의 지적 활동이며, 지금은 학문적 기초를 정립해가고 있지만 회심의 문제는 여전히 명상적인 차원에 남아있는데 그것은 회심이 비지성적이고도 정리되어 있지 않은 인간 행동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의 관계, 혹은 회심이 신학자들과 심리학자들에 의해서 정당하게 분석되고 모의될 수 있다는 것은 타당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탐구는 경험된 현실을 첨가하는 데 있어서 화학자가 좋은 숲과 나쁜 숲의 맛의 차이를 분석하거나, 모짜르트의 심포니의 미학적 영향을 대중음악으로 편곡된 모짜르트의 심포니로부터 구별해내려는 음향기술자의 노력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신앙의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인간적 경험을 유추해내는 방법일 것이다. 그것은 물론 그리스도 자신이 그의 처음 제자들을 가르친 것을 유추해내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어떤 분석적인 기술이 이것을 증명해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 후에 나타날지라도 이해의 기초는 여전히 우리들 각자의 실제적인 체험이거나 그런 체험의 가능성이라고 하겠다.
기독교의 핵심에는 상징이며 또 현실이기도 한 십자가가 놓여있다. 즉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이다. 창조자의 능력과 영광, 그의 자비와 정의, 그의 선과 진실은 기독교를 포함한 많은 종교의 특징적인 요소이다. 인간은 그런 신관에 의해 고양된 보다 훌륭한 삶을 살도록 인도되어 왔다. 특히 유대교와 이슬람교에 있어서 그런 신의 목소리가 예언자들에 임하였다. 동방종교에서도 때로는 그런 신과 인간과의 만남이 신비적으로 체험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만이 처음부터 그런 체험을 인간적이고 인격적인 것으로 받아 들었다.
구약성서의 유대인들, 혹은 그들의 후손들이 기대된 메시야를 어떻게 이해하든지간에 기독교인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구세주 –특히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구세주- 로 이해한다. 원죄론에 대한 신학적 해석에는 통일된 의견이 없지만 어느 점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에게 그들의 죄를 용서받았던 사람들은 모든 사람의 죄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들의 죄에 관심을 기울였다. 각자가 자신의 죄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든 –그것이 유전적인 것이든 광기나 본성의 사악함이든간에 – 죄는 바로 그들 자신의 것이며, 용서를 갈구하는 것도 바로 그들 자신인 것이다. 속죄와 구속의 신학은 결코 일치되어 있지 않지만 그 신학 안에는 그리스도가 결정적으로 인류의 죄값을 지불하였다는 기독교인의 고백이 있어야 한다. 십자가는 막연히 어떤 사람을 위한 것도 아니었고, 우리 선조들의 모호한 죄들을 속죄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십자가가 무엇인가 의미한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의 인격적인 죄 – 물론 우리가 집단적인 범죄도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인식을 의미한다 – 와의 관계에서 그렇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는 말은 하나님의 집단적인 소명이지 특정한 범죄를 지은 사람에게 주어진 초대가 아니다. 외인은 회개하라고 요청받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사람도 의롭지 못하다.” 그래서 자신의 죄와 쓸모없음을 날카롭게 느낀 사람들의 눈에는 의인이 가장 신실하고 도덕적으로 결함이 없는 사람으로 빈번하게 이해되어왔던 것이다.
죄와 범죄에 대한 진술은 필연적으로 죄와 벌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지나치게 많은 기독교 문학이 이런 측면에서 창작되었다. 율법이 생활의 기반이 되고 율법의 파괴에 엄격한 형벌이 따르는 구약성서의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종교와 세속적인 권력가들은 언제나 그런 원칙적인 규약을 선포해 왔다. 수세기 동안 예술과 문학의 영역에서 인간의 판단과 최후의 심판, 천국과 지옥, 지상에서의 보상과 형벌 사이에 법적인 유추가 시행되어왔다. 그런 유추가 아무리 조잡하고 왜곡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대부분의 기독교인의 대도에 영향을 끼친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는 정도에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인들이 기독교를 그런 혹독한 심판이 완화되는 종교로 이해했다면 혹은 덕행이나 악행의 기록만이 인간의 운명을 규정한다고 이해했다면 -이런 태도는 계속적으로 유지되어 왔음이 분명하다-그것은 복음의 교훈을 전체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편파적으로 봄으로써 인간의 본질을 오해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런 공포로부터 안전한 피난처를 언제나 발견했었다.
현대의 신학자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든지간에 성육신을 믿지 않고서는 기독교를 고백한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십자가에 달린 인간 예수를, 속죄를 위한 하나님의 의지와 연결시키지 않고서는 성육신을 믿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그런 구속 –그것이 엄격한 형벌의 의미로 이해되든 아니면 함축적인 형벌의 의미로 이해되든간에 - 사랑을 포함한다.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십자가는 영원한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연결시키는 신비한 성욕심인데, 이 두 가지 사건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최후의 거점이라고 하겠다. 이런 기본적인 신조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는 우리들의 희생과 봉사를 포함하게 되지만 그것은 두려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랑에 의해서만 타당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회심 전후의 연속적인 국면을 형벌이나 희생의 측면에서 파악하지 않는 것이 더 유익하다. 소외와 죄, 화해와 일치도 우리가 연구해야 할 것들이지만, 어떤 인간 관계에서는 나타나는 죄와 상실, 기쁨과 이해도 영혼의 역사 속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인간적인 열렬한 사랑도 지속적인 관계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그 반대일 경우가 더 많다. 그와 마찬가지로 계획적인 결혼이라고 해서 거기에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간 관계가 어떻게 시작되든지간에 그 관계의 가치는 오랜 세윌 속에서 혹은 고난 속에서 정당하게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인간 관계 안에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처럼 성적 욕망이 배제된 상태일지라도 그 관계가 계속되고 발전되기 때문에 대단히 불공평한 상태가 있기 마련이다. 여기가 바로 최상의 인간 관계와 그리스도가 신자와 맺는 관계 사이의 유추가 오해되는 지점이다. 신의 진노에 대한 개념은 다른 모든 종교에서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안에 있는 특징이지만, 그리스도의 진노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스도는 인류가 범하기 쉬운 모든 죄와 약함을 위해서 이미 그리고 영원히 고통을 받으셨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떠날 뿐, 그리스도는 우리를 거부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소명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응답함으로써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응답이 갑작스러운 것이거나 점진적인 것일 수 있으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영원하다.
통과제의 방식 (세례나 성찬식 같은)에 의해서 회심에 이르는 어떤 단계가 취해지거나 공개적인 죄의 고백과 같은 방식으로 어떤 단계가 취해질 수는 있으나 결혼예식 같은 것은 두 사람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를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겠다. 결혼은 신성한 것이지만 어떤 방법으로도 그 관계의 타락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응답은 단 하나의 행동이나 사건 -그것이 아무리 위대하다고 할지라도 – 과 동일시되지 않고 끊임없이 지속되어야만 한다. 성례전적인 전통을 가진 교회는 교인들에게 고해성사, 성만찬 등의 감정적이고도 영적인 참여를 통하여 계속적인 갱신의 체험을 준다. 어떤 사람들은 설교나 공적인 말씀의 증거에 초점을 맞추기도 한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에 대한 우리들의 응답이 신앙을 통한 교제의 기초로서 유지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기도생활이 끊임없이 고양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실제적으로 기독교인이라는 것, 혹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언제나 교회나 공통체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때때로 그런 형식적인 충성이 비판을 받고 있지만, 그들의 예배 행위도 배타적으로 독자적인 것은 아니다. 성탄절과 부활절 같은 때에도 그들은 라디오나 텔리비젼을 통하여 다른 예배자들과 자리를 함께 하거나 어떤 점에서는 서로 협력하기도 한다. 기독교적 소명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요소는 타인과 그리스도의 형제애를 나누는 것이다. 운둔자도 형제애를 자기에게만 적용시키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가 기도와 명상을 통하여 현실적으로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인간성을 깨닫는다면 그것도 여전히 형제애를 나누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적 유아론자(A Christian solipsist)라는 말은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며 타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질주하는 기독교인을 생각하기도 쓸모없는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특별한 형태의 인간 관계가 기독교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유추가 된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어떤 형태의 인간 관계도 뚜렷한 규범이 되지는 못한다. 성 테레사 (St. Teresa)와 같은 여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인간의 성적 표현에 속박시키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감성의 직접성과 강렬함을 표현하였다. 남자들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한 친구이거나 가까운 형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보기도 한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욕망과는 구분되는 사랑에 기초한 어떤 충만하고 자비스러운 관계가 다양한 욕구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방법이라는 점이다. “너희는 이제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다” 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가 그의 제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서술한 방식이며, 그것이 지금까지 기독교의 모범이 되고 있다. 기독교인은 한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 구성원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들과 함께 같은 권리와 의무를 나누어 가져야 한 것이다.
회심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는 과거에 대한 무조건적인 용서와 현재 있는 그 자리에서 과거의 삶이 또 다시 반복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미래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유명한 죄인이 갑자기 선한 시민이 된다면 왜 그런 변화가 일어났는지 명백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회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행동 – 험악한 범죄나 비열성과 같은 – 도 분명히 용서될 수 있다. 그런데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사람, 가난하고 수치스러운 사람들을 사랑하는 데서 만족을 느끼는 겸손한 사람의 자기 부정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변화도 참된 회심의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밖으로 드러나는 변화가 별로 없는 생활을 하는그러나 전적으로 다른 이유에서 그런 생활을 하는 수도승이나 수녀, 사제나 평신도들의 급격한 정신적 변화도 일종의 회심이. 모든 회심의 경우, 과거와의 단절이 공통으로 나타나는데 그런 과거와의 단절이 없이는 새롭고 성숙한 영적 생활이 결코 성취될 수 없었을 것이다. 회심의 결과중의 하나는 과거가 전에는 흠없는 과거일지라도 언제나 재평가된다는 점이다. 회심자는 새롭게 발견된 자기 정체성 (identity)을 보고 현실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응답하게 될 것이다. 과거에 그를 사로잡고 있던 것들이 어리석고 공허한 그림자처럼 보이게 된다. 죄의식은 인습적인 죄된 생활과 동시에 일어나지만 허무의식, 성서적 의미의 "무상함" 은 보다 근본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관계가 발전할수록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소모된 과거의 시간들이 점점 더 쓸모없는 것처럼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리스도의 소명을 처음 듣는 사람과 그리스도의 소명을 오랫동안 받았지만 거기에 유의하지 않는 사람 사이에는 어떤 구별이 있어야 할 것이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모든 기독교인이 회심자였다. 그리고 세계의 도처에서 선교사들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했는데 거기에서 생긴 새로운 기독교인도 역시 회심자라고 하겠다. 초기의 십자군 정신이 잘 나타나 있는 11세기의 “로랑의 노래”(Chanson de Roland, 11-13세기 북부 프랑스 시인들이 지은 중세 프랑스의 무훈시 중의 하나)에는 교묘한 구별점이 나타나 있는 데, 그것은 패망한 사라센 사람들에게 보인 관용성 – 기독교를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고통스러운 죽음을 선택할 것인지 한두 시간을 허락한 것 – 과 사라센의 여왕을 살리방의 수도인 엑스(프랑스 동남부 마르세이유 북쪽에 있던 도시)로 사로 잡아가서 수개월에 걸쳐서 집중적인 교육을 시켜 마침내 그녀로 하여금 세례를 받고 베일을 쓰게 한 것과의 차이가 그것이다. 역사를 통하여 그리고 세계의 도처에 회심은 이런 두 가지 극단적인 방법과 아니면 그 중간의 방법으로 전개되어 왔다.
역사를 통하여 나타난 그런 회심의 내용과 영적인 의미를 연구하는 것은 교훈적이고도 매혹적인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신앙을 위하여 무서운 순교를 당한 사람들의 진정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불행하게도 그들을 회심하게 한 분명한 이유가 언제나 객관적인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시간적, 공간적 거리, 문자의 차이, 교육의 부족, 사라져가는 목격자 등이 신뢰할 만한 기록의 유지를 어렵게 하고 있다. 성자 언행록이나 선교 이야기 등은 선한 믿음에 의해 기록되었지만 해결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실제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광대한 회신자들이 이 책에 포함되지 않은 단순한 이유는 그 기록들의 부적당한 성격 때문이다. 그들이, 필자가 이 책에서 취급하려고 하는 인물들의 사회적 명성이나 교육 수준에 있어서 영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필자가 이들을 선택한 것은 단순히 그들의 기록이 풍부하고 명료하기 때문이다. 회심한 선교자들과 순교자들이 그들의 옛 생활을 거부하였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그들이 옛 생활을 반복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대중적 회심은 필연적으로 피상적이고 그런 만큼 또 불안정하다는 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런 대중적 회심을 통한 회심자들은 사람들이 흔히 기독교인의 타락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똑 같은 인간적인 이유 때문에 또 다시 타락하게 된다. 서로 다른 성격의 회심자들이 한때 그들이 받아들인 기독교를 본질적으로 다르게 이해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들이 회심에 이른 과정은 분명히 다를 수 있다.
우리가 회심자라고 할 수 있는 또 다른 형태의 회심자들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취급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의 중심적인 진리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키지 않은 채 교만을 옮긴 사람들이다. 예들면 종교개혁이나 반종교개혁에 의해서 회심을 강요당한 사람들 외에도 19세기에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한 영국 국교도들 – 뉴만(Neuman)과 같은 사람들 – 이 그리스도를 재평가함으로써 그들의 순종이 교회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신념에 모순된다고 생각하여 회심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 말은 그들이 발견한 영혼의 평정이나 신앙의 새로운 강렬성,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한 회심의 내용을 문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단순히 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근본적인 관계가 새로운 상황을 요구했다 –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변하지 않은 채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또한 그것을 통하여 계시가 왔다고 믿어지는 어떤 특별한 조직체의 구성원에 연결된 생동적인 신앙(그것이 과거에는 수동적이었지만)에도 직접 소명을 받았다고 느낀 결과로 타인을 위하여 상속받은 충성에 대한 순응을 변화시킨 사람들―그들이 카톨릭교도이든 영국 국교도이든 비국교도이든간에 진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죽은 신앙이 다시 생동하게 될 때마다 그것이 형식적인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해도 -그 경우는 일종의 회심으로 취급될 수 있을 것이다.
회심에 대하여 작품을 쓴 카톨릭 작가들은 카톨릭에의 개종만을 진실한 것으로 취급해왔지만, 이것은 개심자들에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태도라고 하겠다. 서로 다른 교회는 각각 서로 다른 회심의 양식을 보여주었다. 이 책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회심의 양식을 모색하는 데 있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교회가 참된 기독교인을 독점하고 있다거나, 그리스도가 교회의 본질에 대한 어떤 태도를 고백하는 사람들에게만 자신을 계시하였다는 주장은 분명히 방법상의 오류라고 하겠다. 서로 다른 것이 필연적으로 더 좋거나 더 나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 자체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논점을 피해가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어쨌든 카톨릭 교토 비카톨릭 교도가 모두 이 연구에서 취급될 것이다.
여기에서 거론될 인물들에게 적용되는 여러 가지 조건들은 가능한 대로 엄격하게 지켜질 것이다. 필자가 취급할 인물들은 자신의 생애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켰고 대단히 특별한 체험을 했으며, 언제 어디에서나 그 정체성을 증명할 수 있는 인물들로서 삶을 전체적으로 변화시켜 공허와 혼돈이 있는 곳에 새로운 감성과 의미를 준 사람들이다. 이 각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체험과 그 체험의 결과에 대한 일차적인 자료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자료가 없는 경우의 여러 다른 인물들은 유감스럽게도 여기에서 취급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취급된 인물들을 동시대인들에게도 예외적인 인물로 인식되었고 그들이 죽은 후에도 하나의 모범으로서 혹은 그들의 저작을 통하여 여전히 영향력을 끼쳐왔다. 이들은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대단히 뚜렷한 인물들이다. 연구의 범위를 보다 못한 사람들에게까지 확대하거나 빈약한 근거만으로 일반화시키기보다는 분명하게 중요한 인물들에게 제한시키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된다. 인물 선택의 기준이 증거 자료에 의해서 크게 제약을 받았기 때문에 시대나 국적, 교회나 성격 등의 균형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마 처음에 나타났던 것보다는 더 광범위한 전망에서 연구될 것이다. 만일 이 책에서 눈에 보일 정도로 생략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필자의 무지나 불완전한 판단에서 기인된 것일 뿐, 불합리한 논거를 무리하게 강요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려는 의도에서 그런 것이 아님을 밝혀두고 싶다. 특히 동방교회 (Eastern Orthodoxy)의 대표적인 인물들거기에도 분명히 많은 후보자들이 있다 을이 연구에 포함시키지 못한 것은 필자의 언어와 역사에 대한 능력 부족이라고 하겠다.
많은 인물들이 제외된 또 다른 이유는 제한된 지면에서 가능한 대로 다양하게 연구하려는 필자의 욕심 때문이며, 어떤 한 측면에 대한 부당한 강조를 취하기 위해서였다. 클로들(Claudel)과 마리땡(Maritain)도 유명한 회심자이다. 그러나 다른 네 명의 프랑스 인물들이 더 타당성을 가진 것으로 생각되었다. 영국의 개신교 전통 안에 있는 퀘이커교의 조지 폭스(George Fox)와 존 웨슬레(John Wesley)는 번연 (Bunyan)과 부드(Booth) 때문에 생략하였는데, 그것은 폭스의 회심의 체험에 관하여 우리에게 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며, 웨슬레는 그리 중요한 인물로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존 돈(John Danne)도 처음에는 취급될 인물도 보였으나, 그의 결정적인 업적에 대한 해석과 그의 역사에 대한 전문가의 의견이 너무 폭넓어 비전문적인 탐구를 위축시키기 때문에 제외시켰다. 이렇게 광범위한 주제에 관한 책은 처리할 수도 없고 포괄적인 것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인 것이 될 수도 없다. 나는 다만 인물 선택의 근거를 나의 개인적인 동기 – 즉 다른 사람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다는 – 에서 정당화할 수 있을 뿐이다. 독자들이 스스로 여기에 포함시킬 다른 인물들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명문집의 하나로 쓰지 않았다. 더구나 어떤 주장을 하기 위해서 쓴 것도 아니다. 나는 13명의 예외적인 인물들의 회심의 체험을 상세하게 검토함으로써 그들의 근본적인 영적 체험을 깨닫게 되기를 원했을 뿐이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내가 이미 알고 있던 인물이고, 또 어떤 사람은 이전에 내가 간과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한두 사람은 내가 실제로 싫어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연구의 결과 나는 그들을 모두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 그들은 기독교와 회심에 대한 나의 이해를 풍요하게 해주었다. 나는 독자들이 여기에서 간단하게 소개한 자료를 통하여 스스로의 연구를 더 시도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