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79
11월19일[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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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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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2QuQtsnVhN0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집전(ACN 한국지부 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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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 내게 부여해주신 탈렌트는 무엇입니까?>
어려운 경제적 여건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묵묵히 기업을 운영해 나가고 계시는 기업인들을 알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탁월한 경영 능력과 불굴의 노력과 헌신으로 이익을 창출해서, 몇십명 몇백 명의 직원과 가족의 안정된 생활을 보장해 주시니,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기업을 경영하기가 너무나 힘겹답니다. 외교와 경제는 언제나 함께 간다는 것, 말 한 마디 실수로 수많은 기업이 큰 타격을 입는다는 것은 상식인데, 진중하지 못한 발언들로 인한 심각한 타격은 고스란히 기업인들의 몫이랍니다. 차라리 다 접고 빠져나오고 싶다고들 하십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당부드립니다. 정말 애국자이십니다. 그 많은 직원과 가족들 생각하면 힘드셔도 조금 더 버티셔야 합니다. 지금 하고 계시는 일, 저희 사제나 수도자들 몇 십명 하는 일보다 훨씬 더 큰 일을 하고 계십니다. 지금 하느님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탈렌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걸맞은 선물, 곧 탈렌트를 부여하셨습니다. 탈렌트를 선물하신 이유는? 그 탈렌트를 잘 사용해서 자신을 성장시키고, 그로 인해 공동체에 기여하고, 공동선을 추구하며, 최종적으로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라고 탈렌트를 선물하셨습니다.
오늘 제게 부여하신 탈렌트는 과연 무엇인가? 묵상해봅니다. 우리 각자에게 부여하신 탈렌트는 각양각색입니다. 내게 주어지지 않은 남의 탈렌트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내게 없는 것을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하기보다는,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에 감사하며, 어떻게 하면 그 소중한 탈렌트를 잘 계발하고 극대화 시켜서 이웃과 공동체와 하느님을 위해 선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탁월한 경제 관념을 선물로 주셔서 막대한 부를 창출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그런 탈렌트가 아니라 따뜻한 연민의 마음을 선물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부신 연기 능력이나 가창 능력을 선물로 주시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꼼꼼한 손재주를 선물로 주십니다.
오늘 하루 주님께서 내게 부여해주신 탈렌트가 무엇인지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그 탈렌트를 공동선을 위해 얼마나 계발하고 성장시키고 공유하였는지 깊이 성찰해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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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OEYCtim9o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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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일종의 투자다>
사제가 되어 보니 저에게 돈을 달라고 찾아오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가능한 액수라면 일단 줍니다. 그러면 대부분은 처음에는 한 번만 도와달라고 하고, 그 다음은 마지막이라고 하다가, 결국엔 계속 달라고 하고 그 액수는 점점 커집니다.
결국엔 재정적인 부담도 되고 내가 호구가 되는 느낌도 들고 심지어 돈을 갈취당하는 기분마저 듭니다. 그럴 때라도 사랑은 주는 거니까 계속 주어야 할까요? 그들은 아마도 사랑은 한없이 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이 확장되다 보면 하느님의 사랑도 오해하게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지옥’의 존재도 부정하게 됩니다. 하느님이 무한한 사랑인데 인간을 만들어놓고 어떻게 지옥에 보내느냐는 것입니다. 자녀가 잘못했다고 불구덩이에 집어넣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도 일종의 ‘투자’입니다. 투자는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지속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탈렌트의 비유입니다. 주인은 하인들에게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한 탈렌트를 맡기고 떠납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하인은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고, 두 탈렌트를 받은 하인은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그러나 한 텔렌트를 받은 하인은 주인이 무자비하다고 여겨 무서워서 그 돈을 땅에 묻어놓고 불리지 않았습니다.
불리지 않은 종의 운명은 그 한 탈렌트를 열 탈렌트를 가진 종에게 빼앗기고 영원한 불 속으로 추방당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주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주고 그 열매를 살핍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존재에게는 그동안 주던 사랑마저 거두어들입니다. 쓸데없이 자기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사랑을 줍니다. 그런데 이것도 투자입니다. 자녀가 자신들처럼 자녀를 낳고 키울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자녀는 부모가 주는 사랑에 감사하여 그렇게 성장합니다. 그러나 감사하지 못하는 자녀도 있습니다. 그런 자녀는 심지어 부모의 돈을 훔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부모가 준 은총은 그에게 저주가 된 것입니다. 그를 도둑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받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이들만이 그 은총이 구원의 은혜가 됩니다.
1994년 5월 서울 삼성동 고급 주택에서 불이 나서 부부가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한약 유통업을 하며 그 부부는 200억 대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들 박한상 군이 유산을 노리고 부모를 무참히 살해하고 방화로 위장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유학 중에 많은 돈을 유흥과 도박으로 날리자 부모가 돈을 주기를 거부하자 그러한 일을 벌인 것입니다. 그동안 그 아이에게 무분별하게 주었던 돈이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지옥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루카복음 13,6-9절엔 포도밭에 심어진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 비유가 나옵니다. 포도밭에 한 그루 무화과나무가 있었는데 삼 년 동안이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그것을 베어버리라고 하였으나, 종은 1년만 더 가꾸고 거름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래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베어버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무화과나무는 자신만 특별하다고 여기는 바리사이를 상징합니다. 오늘 한 탈렌트를 받은 종입니다. 불만을 가진다는 말은 자신은 더 받아야 하는 특별한 존재라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가 받은 것에 감사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감사하지 못하니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를 위해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심어 그것은 당신께 되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감사하지 못하면 결국 열매 맺지 못하여 하느님 사랑의 투자가 멈추게 될 것이기 때문에 마련한 장치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불만을 자아내는 뱀의 말에 솔깃하여 그 소출의 십분의 일도 바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고 결국 에덴에 살 자격을 잃게 되었습니다.
얼굴에 모반이 있어 부모에게 버려졌지만, 결국 끝까지 감사를 찾아내 기쁘게 살아가는 김희아 씨는 자신의 두 딸에게도 감사를 가르칩니다. 딸들은 남들보다 외모가 못난 엄마를 보면서도 “엄마는 엄마가 없어서 참 불쌍하다!”라고 하며 엄마 없이 산 엄마를 불쌍하게 여깁니다. 이때 부모는 자녀에게 목숨까지도 내어놓습니다. 자녀가 본인이 투자한 대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저주가 아니라 은혜로 만들기 위해 무조건 받은 것에 감사의 피를 뿌려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면 이 세상에서부터 에덴동산에 살게 되지만, 불만을 품으면 뱀의 소굴로 들어가게 됩니다. 주님 사랑의 투자에 수익을 내지 못하는 존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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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운동 경기 중에 좋아하는 종목은 ‘야구’입니다. 어려서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982년 프로야구가 창립되면서 자연스럽게 야구팬이 되었습니다. 저는 고향이 전라도라서 광주가 연고인 ‘해태 타이거즈’의 팬이 되었습니다. 제가 응원하던 해태는 한국시리즈 9승을 올리는 명문구단이 되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야구선수가 많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던 선수는 ‘이종범’ 선수였습니다. 1번 타자인 이종범 선수는 ‘공격, 수비, 주루’의 3박자를 고루 갖춘 선수였습니다. 공격은 잘 하지만 수비가 불안하면 좋은 선수가 될 수 없습니다. 수비는 잘하는데 공격을 못하면 팀을 승리로 이끌 수 없습니다. 루상에서 달리기를 잘하면 본인도 살아남을 확률이 높을 뿐만 아니라 상대팀의 실수를 유발할 수 있기에 달리기를 잘하는 선수는 팀을 위한 공헌도가 높습니다. 이종범 선수는 유격수가 전문이지만 팀이 위기에 처하면 포수도 하였고, 외야수도 하였습니다.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유능한 선수였습니다. 예능에도 재주가 있어서 방송에도 몇 번 출연하였습니다. 이종범 선수의 아들도 야구선수가 되었다니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미국에서 지낸지 5년이 되어갑니다. 한국어는 물론 영어와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신부님들은 교구에서 환영합니다. 한국어만 해서는 미국 공동체에 적응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미국 교구에서도 한국에서 사제를 파견할 때는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제를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저는 신문사에 있어서 영어로 미사 할 기회가 많지 않지만 영어 미사를 할 수 있도록 준비는 하고 있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은 후에 신심단체인 꾸르실료와 ME 프로그램을 수료하였습니다. 꾸르실료는 1992년에 받았고, ME는 2005년에 받았습니다. 꾸르실료에서 강의를 하였고, 차수 지도신부도 하였습니다. ME 발표 신부도 하였고, 한국에서 ME 대표 신부도 하였습니다. 미국에 오면서 자연스럽게 ME 대표 신부를 하였고, 지금은 꾸르실료 지도신부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경험이 있기에 신심단체에서 지도신부와 대표신부를 부탁하였고, 저도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하였습니다. ME 대표신부를 하면서 팬데믹 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줌으로 하는 강의를 할 때면 ME 식구들이 도움을 주었습니다. ME 대표 신부는 자연스럽게 다음 신부님에게 넘겨주었고, 지금은 꾸르실료 지도신부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10월에 미 동북부 남성 제42차 꾸르실료에 지도신부로 함께 했습니다. 3박 4일의 교육은 제게도 큰 감동이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성당의 주일미사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어느덧 4년이 되어갑니다. 제가 도움을 주는 것도 있지만 저 또한 공동체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 또한 감사할 일입니다.
제가 신문사의 일만 했다면 그것도 좋았을 것입니다. 신문사의 일만 했다면 지금보다는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문사의 일만 했다면 팬데믹의 어려움을 이겨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신문사의 일만 했다면 외롭고 따분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다른 일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고, 힘을 주셨습니다. ME, 꾸르실료, 부르클린 한인 성당의 일을 함께 했기 때문에 저는 팬데믹의 시간도 큰 어려움 없이 보낼 수 있었습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가진 시간과 마음을 나눌 수 있었기에 저는 미국에서의 생활을 더욱 즐겁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제 추억의 창고에도 많은 것들이 채워졌습니다. ME와 더불어 주말 체험을 했고, 피정을 했고, 가을 소풍도 다녀왔고, LA로 총회를 다녀왔습니다. 꾸르실료 교육을 통해서 미지근한 신앙이 뜨거운 신앙으로 변화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진심으로 회개하는 눈물을 보았습니다. ‘이상, 순종, 사랑’의 정신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와 함께 하면서 물고기는 물속에 있어야 살 수 있듯이 사제는 신자들과 함께 있어야 된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탈렌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종이 열심히 일해서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말씀을 뉴욕에 살면서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신문사의 일, ME의 일, 꾸르실료의 일,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의 일은 주님께서 제게 맡겨 주신 탈렌트라고 생각합니다. 제게 주어진 일을 거절하지 않고, 열심히 했으니 감사할 일입니다. 오늘 LA 성 프란치스코 한인 성당에 신문홍보를 왔습니다. 여러분들이 신문구독을 해 주신다면, 신문을 위해서 후원을 해 주신다면 지난주에 예수님께서 복음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신랑을 맞이할 수 있는 ‘기름’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신문 구독을 해 주신다면, 신문을 위해서 후원을 해 주신다면 여러분들은 모두 주어진 탈렌트를 하느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더 큰 은총과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주어진 일이 있다면 충실하게 하면 좋겠습니다. 일을 마친 후에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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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5,14-30: 탈렌트에 대한 이야기
오늘의 전례도 우리의 삶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깨어 기다리라고 한다. 그 기다림은 활동적인 면이다. 깨어있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들이 열매를 맺도록 실천적으로 준비하는 것이다. 마태오는 탈렌트의 비유를 통하여 마지막 때의 의미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주인이 종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기는 행위는 신뢰에서 비롯된 행위이다. 이에 맞추어 종들도 그 재산이 자기 것인 양, 잘 관리하여 그 신뢰에 보답하여야 한다. 이 때문에, 맡긴 돈을 땅에 묻었던 게으른 종은 주인의 신뢰에 대해 신뢰로 보답할 줄 몰랐기 때문에 지탄받는다. 한 탈렌트는 금 42kg의 매우 많은 액수의 돈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의미한다. 여기서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한 탈렌트를 준 것은 그 종들의 능력에 대한 평가이다.(15절) 여기서 주인이신 그리스도는 인색한 분이 아니라, 베풀어 주신 선물에 비례하여 요구하시는 의로운 분이시다. 하여간 앞의 두 종은 그 돈을 이용하여 두 배로 늘렸지만,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18절)
“오랜 뒤에” 주인이 돌아와 종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19절) 주인은 돈을 두 배로 늘린 종들을 칭찬하고 상을 주었는데 “많은 일을 맡기겠다.”(21.23절) 한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주님의 기쁨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그분이 가지시는 통치권에 참여함으로써 누리게 되는 기쁨이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23절). 반면에 게으른 종의 태도에서 비유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는 두 사람의 좋은 결과를 보고 자기의 염려가 헛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는 두려운 나머지(25절) 그가 맡은 한 탈렌트마저 잃어버릴까 염려하여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25절) 한다. 이것을 잘못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받은 것을 되돌려 주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주인은 이러한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두려움이란 신뢰의 관계에서는 의미가 없다. 그 종은 주인이 신뢰의 관계를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단순히 고용 관계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이것이 바리사이 같은 모습이다.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주인의 뜻에 맞게 살지 못하고 탈렌트를 사용하지 못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어야 했다. 그 게으른 종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땅에 묻었다.
그렇다고 무책임한 모험을 하라는 것도 아니다. 용기는 개방이며,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어머니의 행위와 같은 사랑의 봉헌 행위이지 자기 자신의 안위 때문에 위험을 두려워하는 행위가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선물 모두가 마땅한 결실을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권고가 담겨있다. 이때 하느님은 더욱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우리가 성장한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속해있는 공동체의 성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 개인이 성숙하지 못하면 교회도 성숙하지 못한다. 땅에 숨겨 놓은 우리의 탈렌트는 곧 모든 이를 위한 기회의 상실을 말한다. 이 때문에 주인의 판결은 준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해 자신의 탈렌트를 열매 맺도록 하라는 것은, 이러한 마지막 때라는 긴박 때문에 용기를 내야 하고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신앙은 단순히 신경을 암송하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의 신앙은 내가 잘못될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더라도 이 세상에서 용기 있게 행동할 수 있게 밀어주는 그런 신앙이어야 한다. 무엇인가 잃을까 두려워서 무기력하게 있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28-29절). 이것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은 자기가 받을 상급보다도 더 큰 상급을 받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며, 없다고 생각하여 땅에 묻는 사람은 그것이 있는지도 모르는 것과 같아서 잃어버려도 잃어버린 줄조차 모르게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충실하고 열심한 그리스도인으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주실 더 큰 선물을 기다리면서, 그분이 이 지상 생활에서 베풀어 주시는 모든 선물에 대해 감사드려야 한다.
사도 바오로께서도 테살로니카 신자들이 곧 다가올 주님의 재림에 대한 걱정을 없애주고자 하면서 “그 시간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며 주님께서 “밤도둑처럼”(1테살 5,1-2) 오실 것이니 깨어있으라고 한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빛 속에 살면서 빛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살 때는 도둑처럼 덮쳐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깨어있는 삶이기 때문이다. 태만하지 않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켜 가면서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러한 삶으로 주님께서 나누어주시는 선물들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분이 오시는 날, 우리는 그분을 맞이하기에 합당한 자가 될 것이다. 그분이 오시는 날은 심판과 수확의 날이다. 그날은 우리가 이룬 결실에 대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항상 그분의 선물에 감사하면서 생활한 삶으로 열매를 맺어 내어놓을 수 있는 생활을 이루어 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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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어떻게 준비하며 어떤 열매를 맺고자 노력하여야 할까요? 제1독서는 하느님과 그분 백성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칭송을 받는다.”라는 구절에서 잠언 전체의 주제, 곧 ‘지혜의 근원은 주님을 경외함’이 드러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주님의 날’이라는 표현과(이사 2,11; 예레 30,5-7; 요엘 1,15; 스바 1,14.15; 아모 5,18 참조) ‘빛과 어두움’, ‘낮과 밤’의 대립 명제를 사용하며, ‘깨어 있으라’는 종말에 대한 가르침을 전합니다. ‘잠들어 있음’과 대조되는 ‘깨어 있음’은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마태 25장; 루카 12,35-46 참조)
한편 복음에서 주인이 여행을 떠나며 종들에게 재산을 맡긴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종들의 사명은 각자에게 맡겨진 탈렌트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한 탈렌트’는 당시 일꾼이 6,000일, 약 16년 반 동안 일하여야 벌 수 있는 액수며, ‘두 탈렌트’는 약 33년, ‘다섯 탈렌트’는 약 82년 동안 일하고 받는 품삯의 총합입니다. 이 비유는 각자에게 다르게 맡겨진 조건과 재능과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준비하라는 초대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빈부, 교육, 주거, 심지어 꿈의 격차까지 많이 벌어져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서로 다른 탈렌트를 맡기셨습니다. 이 같은 차이에도 그리스도인에게는 ‘주님의 다시 오심과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라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공동의 지향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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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탈렌트의 비유>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마태 25,14-15)
여기서 ‘탈렌트’는 ‘재능’을 뜻합니다. 그 재능은,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재능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건설에 참여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재능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그 재능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탈렌트를 ‘성령의 은사’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그리하여 어떤 이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에 따라 지식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 안에서 믿음이, 어떤 이에게는 그 한 성령 안에서 병을 고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일으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십니다.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1코린 12,7-9.11.29)
우리는 세속의 사회적 불평등을, 즉 빈부 차이, 교육 여건과 환경의 차이, 주거 여건과 환경의 차이, 정치적 여건과 환경의 차이 등을 ‘탈렌트의 차이’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런 사회적 불평등은 분명히 악이고, 그것을 방치하는 것은 명백하게 ‘죄’입니다. 사회의 ‘악’을 모두 ‘탈렌트의 차이’ 라고 생각하는 것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하느님께서 주신 복’이라고 착각했던 바리사이들과 같은 사고방식에 빠진 것입니다. ‘탈렌트의 차이’는 그런 불평등이 아니라, 바오로 사도가 설명한 것처럼 ‘은사의 차이’이고 ‘직분의 차이’입니다. 따라서 더 좋거나 덜 좋은 것이 없고, 더 높거나 낮은 것이 없습니다. <다섯 탈렌트가 가장 좋은 것도 아니고, 두 탈렌트와 한 탈렌트가 덜 좋은 것도 아닙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그렇게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마태 25,16-18)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노력’입니다. 다섯 탈렌트와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는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한 탈렌트를 받은 이가 그 돈을 땅에 숨겼다는 것은, 아무것도 안 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하다가 실패한 것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만일에 한 탈렌트를 받은 이가 그 돈으로 투자를 했다가 원금까지 잃어버렸다면? 주인은 그를 꾸짖지 않고, 위로하고 격려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좀 더 실감나게 표현하려면,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돈을 땅에 숨기고, 두 탈렌트와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그 돈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애를 쓴 것으로 재구성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안 한 죄’의 대표적인 예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입니다.(루카 10,31-32) 강도당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가버린 그 두 사람은, 사랑을 실천해야 할 상황에서 ‘아무것도 안 한 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성직자라는 자신들의 직분을 더럽혔고, 그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을 모독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의 이야기에 나오는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냐고 헤로데가 물었을 때, 그들은 미카서 5장 1절을 인용하면서 ‘베들레헴’이라고 곧바로 대답했습니다.(마태 2,4-6) 동방박사들을 통해서 메시아가 태어나셨다는 소식을 들었고, 태어나신 곳이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성경 지식도, 또 그들의 직분도 모두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주인이 첫째 종과 둘째 종에게 한 말을 보면 똑같은 말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23) <똑같은 말을 했다는 것은 결과보다 노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맡긴 일을 잘한 것에 대한 ‘상’으로 ‘많은 일’을 맡긴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작은 일’은 지상에서의 신앙생활로, ‘많은 일’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는 일로 해석됩니다. <따라서 주인이 맡기겠다는 ‘많은 일’은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일”입니다.>
29절의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는 말은, 주님께서 주신 은총에 합당하게, 또 충실하게 응답하는 사람은 더 큰 은총을 받겠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은 받은 은총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30절의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라는 말은, 산상설교에 있는 ‘소금에 관한 말씀’에 연결됩니다,(마태 5,13) 아무것도 안 하는 신앙인은 하느님께도, 사람들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아무 쓸모없는 존재가 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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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나충열 요셉 신부님(사회사목국 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
<가난한 이의 벗이 되어…>
예전에 어느 종합사회복지관에서 한 달 동안 현장 실습을 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주로 했던 일 중 하나는 기초생활 수급자나 차상위 가정을 대상으로 가정방문 상담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오후에 대여섯 집을 방문할 생각으로 한 집에 대략 30분 정도씩 시간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첫날 첫 집부터 난항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유인즉슨 제가 다른 집으로 가기 위해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하면 또 다른 얘기를 하시며 거의 한 시간 동안 저를 붙잡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음 집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 예상에서 어긋나는 당황스러운 첫날을 보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으면 그러셨을까?" 그래서 다음날부터는 아예 시간 계획을 세우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갔습니다. 가뜩이나 없는 살림살이지만 가는 곳마다 하얀 종이컵에 정성스럽게 탄 커피믹스 한 잔을 부끄러운 듯 내어놓는 주름진 손을 보며 이내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꼈습니다.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 그 시간만큼은 가난이 주는 삶의 무게를 잊게 만드는, 서로에게 너무나도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가난을 결핍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핍을 무언가가 없다는 물질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려 합니다. 그러기에 가난한 이를 위한 자선은 곧 내가 가진 물질을 나누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도 맞습니다. 지금 당장 배고픈 이에게 지금 당장 목마른 이에게는 허기를 채울 빵과 갈증을 해소할 물이 최선일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들이 겪고 있는 가장 큰 가난의 고통은 물질의 결핍이 아닌 마음의 결핍이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제 경험처럼 더 이 상 혼자가 아닌 누군가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이 내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벗이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큰 힘과 위안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우리 삶의 자리를 돌아보아도 우리의 사랑을 애타게 갈구하시는 예수님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단, 우리가 외면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탈렌트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모두 넘치도록 풍성하게 받았음을 설명해 주십니다. 가장 적게 받은 것처럼 보이는 한 탈렌트도 당대 기준으로는 6천일 간의 일당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었습니다. 남과 비교하며 정작 우리 자신의 탈렌트를 바라보지 못한다면, 사랑의 실천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은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향한 자비와 연대, 형제애를 실천하도록 일깨우고 촉구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시어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멸시받던 가난한 이들과 늘 함께하셨습니다. 그분께서 몸소 보여주셨던 삶의 모습에 따라 우리 신앙인들도 가난한 이의 벗이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를 청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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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주보》 말씀의 향기
[대전교구 노승환 요셉 신부님(사회복지 국장)]
<능력자들>
전 프란체스카 할머니.. 늘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고 계셨다. 하실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파리가 얼굴에 앉아도 손을 올려 쫓을 수 없으셨다. 먹는 것도. 내보내는 것도 도움이 필요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다 해드려야 했다. 항상 누군가에게 몸을 맡겨야만 했다. 그림에도 할머니는 늘 한결같이 웃음 띤 하얀 얼굴로 나를 맞이하셨다.
"신부님 안녕하세요?" "신부님 식사하셨어요?"
"신부님 축복합니다."
아침마다 프란체스카 할머니의 축복을 받는 그 순간은... 나의 안식이며 나의 하느님 나라였다.
한 탈렌트, 두 탈렌트, 다섯 탈렌트... 상관없다. 몇 개인지, 얼마나 가졌는지는 내 재산이 얼마 건, 내가 할 줄 아는 것이 무엇이건 상관없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종의 것이 아니라 주인이 맡겼다.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맡기셨다. 그것이 중요하다.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것이 있다는 것.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종들은 주인의 재산이 더 많아지기 바랐기에 주인을 사랑했기에 탈렌트를 열심히 불렸을 것이다. 가진 능력을 열심히 사용했다. 열심히 나누었다. 그러한 마음. 그 과정과 결과가 다 하늘나라다. 주인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탈렌트의 활용 능력의 사용이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에서 하늘나라를 펼치게 한다.
우린 그 어느 때, 어떤 상황에서라도 주님께 받은 능력으로 다른 이를 행복하게 하고, 기쁘게 하고, 위로해 주고 치유해 주며 내 가족, 내가 속한 공동체를 아름답게 만들 수 있고, 결국 나를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맡겨주신 주님의 진정한 탈렌트이다.
전 프란체스카 할머니에 대해 아무것도 하시지 못한다는 말을 취소한다. 할머니는 나를 위해 기도하는 능력자셨다. 나에게 위로를 주는 능력자셨다. 나에게 하늘나라의 추억을 한가득 주시고 주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기 위해 머나먼 여행을 떠나신 사랑의 능력자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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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주보》 오늘의 말씀
[인천교구 정용호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선학동성당 보좌)]
<사랑은 미소짓게 하는 것>
제7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맞이하여,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담화문에서 “가난한 이들은 찰나의 영향을 줄 수 있는 영화의 한 장면이 되지만, 우리는 살과 피를 지닌 그들을 거리에서 마주친다면 성가셔 하며 외면합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각종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가난을 극복하거나 불우한 환경을 이겨내서 성공하는 이야기를 그려냅니다. 올해 가장 따뜻한 드라마. 가장 감동적인 영화라며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하며 티켓을 구매하게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가난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그저 내 마음이 촉촉해질 뿐입니다.
“이제 우리 삶에 날마다 동반자가 된 조급함은 우리가 멈추어 서서 다른 이를 돌보지 못하게 우리를 가로막습니다."(제7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교황 담화)
우리는 너무나 조급하게 달려갑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그들과 같은 것을 가져야 하고,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하고, 그들과 같은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남의 행복이기에 성에 차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 좋은 것. 더 자극적인 것. 더 물질적인 것을 소유하고자 애씁니다. 그 조급함은 끊임없이 '나'에게 몰두하게 하며 '너'를 바라보지 못하게 눈을 가립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한 탈렌트를 받은 이의 모습과 같습니다. 내 생각 속에 갇혀서 주인님은 '모진 분이며,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시는 분이라 생각하고 주인이 맡겨 놓은 한 탈렌트를 땅속에 숨겨두었다가 돌려줍니다. 자신이 이성적이라 생각했지만, 주인의 말을 듣고는 자신이 어리석었음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이미 주인 이 명령한 일은 마감되었고, 그는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졌습니다. 주신 탈렌트를 꼭꼭 감춰두고, 땅속에 차곡차곡 묻어두기만 하며, 그것을 보고 만족해합니다. 그 결과 어리석은 종은 어둠 속에서 울며 이를 가는 슬픈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섯 탈렌트를 받은 종과 두 탈렌트를 받은 종은 그 돈을 활용하여 두 배로 벌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자신이 갖고 죽기까지 품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탈렌트를 활용'하고, 주인께 돌려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탈렌트는 내 삶의 목적이 아닌, 내가 삶을 살아가는 도구임을 명확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삶에서 주님께 받은 것이며, 죽기 전에 돌려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탈렌트를 가장 잘 활용해서 주님께 잘 들려드리는 방법은 이웃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단순히 돈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손을 맞잡고 웃음을 지으며 따뜻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며,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른 이들이 자선을 베풀도록 성금을 내는 것을 넘어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인 자선에 직접 참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은 어떤 연민이나 동정심에서 비롯된 행위가 아니라, 그저 이웃의 미소를 보고 싶어 손을 건네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동기는 단순하고, 또 주님께서 주신 탈렌트가 그렇게 많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 작은 행위가 주님께 돌려드리는 가장 큰 예물이며, 이웃에게 전하는 가장 따뜻한 사랑일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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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고을》 빛의 소리
[광주대교구 이건승 토마스아퀴나스 신부님(미국 잭슨빌 교포사목)]
<바르게 판단하고 의롭게 행동학;(마태 25,14-30)>
바르게 판단하고 의롭게 행동하는 삶이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보고, 겪고, 느끼고, 생각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람처럼 그렇게 살자고 말합니다. 1990년대 신학교에 입학하여 새내기 시절에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가 '판단력'이었고, 힘들고 두렵게 만들었던 단어가 '판단력 부족'이었습니다. 신학생으로서, 사제로서 중요하게 요구되는 덕목인 판단력을 다양한 상황들 안에서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지를 깊이 있게 생각했던 그 시간이 떠오릅니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날 때 각자 제 몫의 복을 타고난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태어날 아기에게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라고 능력을 주시어 착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든 말처럼 들립니다.
오늘 복음은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라고 시작하면서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라고 전합니다. 어떤 사람은 누구실까요? 하느님이시겠지요. 맡기신 탈렌트은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 세상에 태어날 아기에게 주신 '제 몫, 능력'이 아닐까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주인이 종들을 불러 셈을 합니다. 종들이 맡겨진 탈렌트를 '어떻게 판단하고 어떻게 행동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주인의 의중을 잘 판단하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 두 종은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주님의 것'에서 '나의 것'을 보태어 보여 준 두 종에게 주인은 극찬합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주인이 매우 너그럽고 인자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을 잘못 판단하여 '주인의 것'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한 종은 주인에게서 받은 한 탈렌트를 그대로 전해 주었습니다. '주님의 것'에 '나의 것'을 보태지 않은 종이 무슨 말을 한들 주인의 처지에서 너그러워질 수 없습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정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탈렌트의 의미를 잘 판단하고 이에 따라 성실히 살아내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결실로 이어지기를 바라야 하겠습니다. 그 가운데 주님과 함께 영적인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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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주보》 말씀의 향기
[춘천교구 배광하 치리아코 신부님(미원성당 주임)]
<착하고 성실한 종>
신학생 때 제 동창이 사제 서품 상본의 성구를 “먹고 즐기자”(루카 15. 23)로 정하겠다고 하여 크게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다시 술을 찾아 나서야지!"(잠언 23.35)를 서품 성구로 택해야겠다고 하여 더 크게 웃었던 행복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의 동창들이 이제는 사제 수품 30년을 넘기고 60의 나이, 이순을 넘긴 노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결같이 본인의 고귀한 자리를 충실히 지키며 성실히 살아가는 착한 동창들의 모습에 늘 새로움을 배우게 됩니다.
초등학교부터 수석을 지켰던 수제였고, 이 나라 최고 명문 대학을 나오고 뒤늦게 사제가 되어 유학까지 다녀와 평생 노숙인들을 위해 무료 급식소의 그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성실히 일하고 있는 동창 신부, 독일로 유학을 다녀와 평생 신학교에서 사제 양성에 힘을 쏟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신학 서적을 번역하는 열정의 동창 신부… 등, 저마다 성소의 동기가 다르고 사목의 일터가 다르더라도 구상 시인의 시처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 바로 꽃자리니라”의 삶을 소중히 살아가는 동창 신부들 모습에서 오늘 저 또한 주님께서 주신 귀한 탈렌트를 땅에 묻어 두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으려 노력해 봅니다.
착하고 성실히 살아 세상 모든 사람에게 존경과 사랑으로 기억되는 그리운 사람,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는 그 사람은 하느님께도 잊히지 않는 귀한 사람인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하늘의 수많은 천사가 이렇게 찬미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고귀한 평화는 누구나.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닌,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착하고 성실히 살았던 종들. 주님 마음에 드는 일을 하고 있었던 종들이 평화와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소중한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우리네 인생 또한 그러합니다. 다시 복음의 일꾼으로 충실히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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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빛》 복음 묵상의 향기 '말씀'
[원주교구 성원경 대건안드레아 신부님(은총의 성모 마리아 기도학교)]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배론 구석구석을 아름답게 수놓았던 은행잎과 단풍잎이 거의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았습니다. 나무들이 겨울을 지내기 위해 자신의 나뭇잎들을 떨구자, 성지를 찾던 많은 사람의 발길도 거의 끊어졌습니다. 자연이 겨울이라는 죽음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위령성월의 의미도 생각하게 되고, 다음 주면 연중 34주간으로 끝이 나는 올 한 해를 잘 마무리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연중 시기 마지막을 보내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탈렌트의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한 주인이 여행을 떠나며 종들에게 각자의 능력에 따라 탈렌트를 맡깁니다.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를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를,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인의 평가가 정확했는지 다섯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탈렌트를 벌었고, 두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두 탈렌트를 벌었습니다. 문제는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일을 할 생각을 하지 않은 채 그냥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주인은 다섯 탈렌트를 번 종과 두 탈렌트를 번 종에게는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라고 칭찬합니다. 반면 한 탈렌트를 맡긴 사람에게는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호통치며, 한 탈렌트마저 빼앗아 가버립니다.
오늘의 말씀을 들으면 이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처음부터 탈렌트를 공정하게 나누어 주었으면 안 됐을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주변 사람들과 많은 비교를 하곤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내가 저 사람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과 비교를 하며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 좌절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내가 잘났다는 생각보다는 잘나 보이는 사람과 비교하며 왜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더 좋은 능력을 주시지 않았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능력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주인이 다섯 탈렌트를 번 사람과 두 탈렌트를 번 사람에게 똑같이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라고 말했듯이, 우리가 받은 탈렌트가 얼마나 크고 작은지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 뜻에 맞게 충실히 살아간다면 모두 같은 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행복을 말입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적은 능력을 받았다고 착각한 채 한 탈렌트를 받은 좀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충실하지 않게 살아간다면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리듯 우리는 결국 하느님 품에 안기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 환호송에서 "내 안에 머물러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라고 노래하듯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며 충실히 살아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이번 한 주간 살아가면서 나에게 주신 하느님의 탈렌트가 무엇일까 생각하며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 봅니다. 그 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보내며 내 탈렌트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에 사용한다면 2023년 더 좋은 마무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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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주보》 말씀 중심의 삶
[청주교구 정구용 마르코 신부님(중앙경찰학교 담당)]
<'나의 탈렌트는 어디에 있나요?'>
주인은 종들에게 각각 다섯 탈렌드, 두 탈렌트, 한 탈렌트씩 맡기고 여행을 떠납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그들과 셈을 하는데 다섯 탈렌트와 두 탈렌트를 받은 종은 그걸 두 배로 불립니다. 반 면에 한 탈렌트를 받은 좋은 땅속에 묻어두었다가 다시 주인에게 돌려주죠. 그러자 주인은 돈을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종에게 주라고 합니다. 얼핏 보면 가진 사람은 더 갖고 못 가진 사람은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빈익빈 부익부'의 세상 부조리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하느님 나라도 가진 사람에게 후한 걸까요? 오늘 복음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느 님께서는 '얼마만큼 가졌냐? 얼마나 벌었냐?'를 보시지 않고, 얼마나 잘 활용하였나?를 보십니다. 주인은 다섯 탈렌트를 번 종에게 했던 칭찬을 두 탈렌트를 번 종에게도 똑같이 합니다. 세 탈렌트나 적게 벌었음에도 같은 칭찬을 하고 있죠. 만약 한 탈렌트를 받은 종이 그 돈으로 얼마를 벌었다면 주인은 그에게도 똑같이 칭찬해주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기에 가진 것마저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탈렌트(talentum)는 무게를 재는 단위이자 화폐단위이지만 사람의 재주와 능력'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복음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해보면,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당신의 좋은 능력들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들을 잘 활용하여 불리기를 바라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주님께서 주신 탈렌트를 잘 활용하고, 잘 불릴 수 있을까요? 이 좋은 능력을 '나만을 위해. 내 성공과 안락함을 위해서만 사용한다면 돈을 땅속에 묻어둔 불성실한 종과 같을 겁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을 위해, 그들을 돕고 함께하기 위해 나의 재능을 사용한다면, 탈렌트를 몇 배로 불린 성실한 사람이 됩니다. 그에게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큰일을 함께하자고 손을 내밀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탈렌트는 어디에 있나요? 부디 땅속에 묻혀 있지 않기를, 잘 활용되어 몇 배로 불어나 있기를 희망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더더욱 오늘 복음 말씀이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황님께서는 토빗기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말라'(토빗 4.7)고 권고하십니다. 단지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거나 관심 가지는 것을 넘어, 연민을 느끼고 연대하기를 청하십니다. 그들 안에 함께 계신 주님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와 그들을 구분하지 않고, 소외하지 않으며, 함께 살아가도록 기꺼이 우리의 능력과 재능을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나에게 탈렌트를 맡기신 이유이고, 우리가 그것을 불릴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나눔과 성실한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함께 영원한 기쁨을 나누고자 우리를 초대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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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정이》 강론
[전주교구 유정현 대건안드레아 신부님(고산성당)]
<나의 값진 탈렌트>
어렸을 때, 성당 주일학교 에서 종이로 된 '탈렌트'를 열심히 모았던 기억이 납니다. 다른 아이들과 경쟁하듯, 기도하고 착한 일을 하면서 종이 한 장 한 장의 탈렌트들을 열심히 모았습니다. 그리고 성탄절에 모아놓은 탈렌트를 탈탈 털어 어묵과 떡볶이를 마음껏 사 먹으며 뿌듯함과 즐거움을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그 기억이 어른이 된 지금, 무언가 내가 착한 일을 해서 탈렌트를 받고 그것으로 신앙의 즐거움을 얻고 싶게 하는 흐뭇한 욕심을 갖게 합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몇 주간 묵상했던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가 떠오릅니다. 포도밭에 나간 아들의 이야기(연중 제26주일: 마태 21.28-32), 제 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이라는 이야기(연중 제27주일: 마태 21,33-43),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에 대한 이야기(연중 제28주일 마태 22.1-14)가 다시 묵상의 재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 말씀 안에는, 성실한 이에게 주어지는 보상도 제외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성실함과 보상은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받은 탈렌트로 더 벌어들이는 종에게 주님은 주인의 말을 빌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좋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23)
성실히 포도밭에 나가 일하고 성실하게 그 포도밭의 소출을 내고, 혼인잔치의 초대받은 손님으로서 자격을 갖추고, 탈렌트를 더 벌어들이는 일은 성실히 신앙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지만, 동시에 이에 따른 보상을 잊지 않으시며, 신앙인으로서 성실한 모습에 대해 용기와 격려도 주십니다.
주님은 성실한 종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시는 자비로운 주인이십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삶 안에서 성실히 당신 말씀 지켜가며 탈렌트를 모으고 벌다 보면, 천상의 잔치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될 것입니다. 정녕 그 손이 거둔 결실을 그에게 돌리고, 그가 한 일을 성문에서 칭하여라."(잠언 31.31)라는 말씀에 어김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인생을 아주 소중하고 값진 탈렌트로 받았습니다. 아무리 우리 자신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을 두고 가진 것이 별거 없는 인생이라 생각할지 몰라도, 그 양과 모습은 다를지 몰라도 우리는 주님에게서 각자에게 맞는 값진 탈렌트를 받았으니, 우리의 이 값진 인생을 소중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열매를 맺고, 분명히 기쁨의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말한 것처럼, 우리는 결코 다른 이들처럼 어둠에 잠든 사람이 아니어야 하고, 빛 속에서 맑은 정신으로 우리의 값진 인생을 주님께 소출을 봉헌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성실한 삶을 보시고 기쁨이 가득한 은총을 나누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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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주보》 말씀
[군종교구 오승수 미카엘 신부님(비룡성당 주임)]
<탈렌트>
오늘 예수님께서는 복음에서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라고 하시며 탈렌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종들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저마다의 탈렌트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탈렌트를 사용하는 모습은 다르지요. 주인이 여행에서 돌아올 때까지 다섯 탈렌트를 받은 종과 두 탈렌트를 받은 좋은 자신이 받은 만큼이 탈렌트를 더 벌어들여 '착하고 성실한 종'이라 불리지만, 한 탈렌트를 받은 종은 그것을 숨겨둔 채 변명만 늘어놓을 뿐이었고 결국 그 종은 나쁜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받은 탈렌트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하시기 위해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탈렌트 역시 하느님의 사랑에 의한 것이겠지요.
사랑은 기본적으로 상대방을 향합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공동체로서 살아가는 원동력은 사랑의 실천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께서부터 받은 탈렌트를 사랑으로 표현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탈렌트를 얼마나 받았느냐를 따지지 않으십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받은 탈렌트를 얼마나 잘 사용하느냐, 그것을 하느님이 뜻에 맞게 사용하느냐를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도구로 잘 살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탈렌트를 잘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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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부산》 강론
[부산교구 김성한 안드레아 신부님(사직대건성당 주임)]
<사랑의 능력>
오늘은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주고 그들과 연대해야 한다고 당부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사랑의 탈렌트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탈렌트라는 말은 "무게가 나가는 값진 돈"을 뜻합니다. 이 탈렌트를 서로 나눔으로써 가난한 이에게 손을 펼치고, 불쌍한 이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주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를 얻을 수 있는 상황에 대한 말씀이며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주인이 종들에게 나눠 준 탈렌트는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이란 시간의 선물입니다.
복음에서 다섯 탈렌트로 다섯 탈렌트를 더 벌고 두 탈렌트로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는 것은 경제적인 개념이 아니라 은총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총이 모두 다른 이들에게 잘 흘러갔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은총의 장사꾼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구원의 도구, 당신 은총의 통로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사실 한 탈렌트는 노동자 하루 품삯(데나리온)의 육천 배나 되는 굉장히 큰 화폐단위입니다. 복음에서 한 탈렌트를 받은 종이 '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주인에게 혼이 납니다. 은총은 흘러 흘러서 고달픈 이들을 달래주고, 허기진 이들은 채워주고 쓰러진 이들은 일으켜 세우고, 죽어가는 이들은 살려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땅속에 묻혀 썩고 있었음에 혼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된 사랑을 묻어두지 말고 하늘나라 건설을 위해 자신의 삶과 사회 안에서 사랑의 능력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각자 받은 재능에 최선을 다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탈렌트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늘나라는 우리가 받은 탈렌트 곧 사랑의 능력을 키워서 기쁨이 충만한 사랑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내 몸과 마음이 하느님의 것이라 면 우리 삶은 더욱 정성스러워집니다. 정성을 다하는 이에게 맡겨진 재산은 더욱 풍성해지기 마련입니다. “맡기고” 떠난 주인은 반드시 돌아옵니다. 그 시간이 마치 밤도둑 처럼 오겠지만 우리는 맑은 정신으로 깨어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날은 우리의 성대한 잔칫날이 될 것입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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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주보》 말씀 담기
[수원교구 조윤호 윤호요셉 신부님(봉담성당 주임)]
<하느님과 올바른 거래>
어느 본당에 있을 때, 형제 친목회 총무를 맡으신 분이 계셨습니다. 눈에 잘 띄지 않던 분이셨지만, 본당 일이 있을 때면 남들이 주저하는 일에 항상 나서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형제님은 본당에서 어떠한 단체장도 해본 적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시간 이 지난 뒤 그분을 상임위 총무로 임명하였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친목회 총무일 때나, 상임위 총무일 때나 달라진 모습이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저는 형제님을 온전히 믿게 되었고, 더 많은 것을 함께하고자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이런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나에게 얼마를 주시든 상관없이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맡겨주십니다. '작은 것'에 성실하지 못한 이에게는 '큰 것'을 맡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탈렌트의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은 세 명의 종에게 각각 다른 금액을 맡기게 됩니다. 각각 다른 금액을 맡기는 이유는, 금액의 많고 적음의 차원이 아니라 각자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능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결국, 금액은 차이가 있으나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 을 다해야 한다는 것에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합니다.
또한, 주인과 종의 입장 차이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로마법에 따르면, 주인은 종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겨 불릴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종은 거기에 순종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으로 주인에게 보답해야 합니다. 하지만 한 탈렌트를 받은 종은 그것을 땅에 숨겨뒀다가 주인이 맡긴 금액 그대로 되돌려 줍니다. 주인은 그 종에게 한 탈렌트를 기대하였지만,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종은 주인이 모진 분이라고 착각하는 잘못된 인식을 하고 있었던 것이죠. 주인에 대한 올바른 관계 정립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잠언의 마지막 내용인 '훌륭한 아내'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제2독서인 테살로니카 첫 번째 서간에서는 '도둑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니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결국, 전례문에서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사명에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노고를 잊지 않으시고 더 많은 것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준비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 신뢰를 바탕으로 내가 가진 최선의 노력을 보일 때, 내가 가진 것의 몇 곱절에 이르는 보상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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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안동》 말씀의 샘
[안동교구 정철환 타대오 신부님(안동시종합사회복지관 관장)]
<탈렌트의 사용처>
“누구든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라.”
2022년 말 통계로 세계인구가 80억이 넘어섰다고 합니다. 실제로는 중국이나 인도 등 등록되지 않은 인구까지 예상하면 90억 이상이라고 생각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출산율을 걱정하고 인구가 줄어들어서 심각하다고 합니다만 세계인구는 가파르게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문제는 식량이 인구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곡물생산량은 기후변화 등으로 10년 전부터 정체가 되어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가지고 있는 것을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인구의 20%가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고, 아사자만 8억명 이상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구 반대편 쪽에선 비만 인구가 10억 명이 넘고, 과체중 인구는 30억 명이라고 합니다. 한쪽은 너무 많이 먹어 병이 오고, 한쪽에서는 너무 먹지 못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합니다.
오늘은 연중 제33주일이자 제7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탈렌트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해 가는 이 시점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받은 탈렌트를 잘 사용하였는지' 성찰해 보면 어떨까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가난한 이의 날을 맞이하여 담 화 서두에 "가난의 큰 강이 우리 도시를 가로지르며 범람할 정도로 차오르고 있다"며 "우리의 도움과 지원, 연대를 간청하는 형제자매들의 요구가 너무나 커서 우리를 압도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진단하십니다. 세상은 풍요로워지는 듯하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날로 심해지고 부와 가난의 강이 좁혀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교황님은 이러한 문제에 직면한 우리의 책임이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토비야에게 전해진 토빗의 유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누구든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라.”(토빗 4,7)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빈곤 퇴치를 위해 “개인적으로 참여하도록 부름받았다고 강조합니다. “한마디로 가난한 이를 만날 때마다 외면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주 예수님의 얼굴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신 탈렌트가 가장 값지게 사용되기 위해서는 자선을 베풀며 살아가야 함을 더 강조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 뵙고, 그들의 요구에 우리의 목소리를 실어 주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에게 귀 기울이며, 그들을 이해하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신 그 신비로운 지혜를 받아들이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복음의 기쁨」, 198항) 신앙은 모든 가난한 이가 하느님의 아들딸이며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하느님께 받은 탈렌트를 통하여 하느님의 현존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면, 탈렌트를 땅에 숨겨두지 말고 가장 가치 있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랑의 행위로 드러나게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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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김기현 요한 세례자 신부님]
하느님 앞에 우리의 탈렌트를 내어놓읍시다. 누구나 탈렌트가 있습니다. 신부의 외모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잘생기면 사목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신부님에게 들은 이야기인데요. 보좌신부 시절에 어떤 본당으로 인사이동을 했더니, 그 본당 청년들과 학생들이 엄청 많았답니다. 그래서 ‘이 본당은 학생들이 참 많은 본당이구나’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전임 보좌신부님이 굉장히 잘생긴 분이셔서 성당에 나오는 학생 수가 많아졌답니다.
비신자 학생들까지 신부님을 보러 성당에 나올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관심 있어 하는 학생들에게 그 신부님의 이야기는 다른 신부님의 이야기보다 더 잘 들릴 거라 생각합니다.
그럼 저는 어땠을까요? 외모 덕을 좀 봤을까요? 아마 예상하시겠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아이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왔을 때 안드레아가 하는 말이 저에게도 해당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소용없는 것이 아니었죠. 예수님은 그 보잘것없는 양식을 가지고 5000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마찬가지로 제 외모도 매력적이거나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쓰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언제냐면 시골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제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시골틱하다, 불쌍하다’고들 하는데요. 그 느낌이 도시에서는 별로 쓸 데가 없지만, 시골 본당에서는 아주 유용했습니다.
공소를 짓기 위해 모금하러 다니면서 외모가 쓰임이 있다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예전에 신학생 때 여러 가지 별명이 있었는데 그중에 ‘불쌍한 신학생’이라는 별명을 교수 신부님이 지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수업에 들어오시면 종종 저를 찾곤 하셨는데, 그 신부님이 동기들에게 농담 삼아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 기현이한테 잘해. 나중에 기현이가 본당 나가면 신자들이 불쌍하게 생겼다고 선물 많이 해 줄 텐데, 그거 하나라도 나눠 받으려면 미리 잘하라고. 또 만약에 본당에 모금할 일이 생기면 기현이 얼굴만 보여줘 그럼 헌금이 쏟아질 테니.”
일부러 그러고 다니는 건 아니지만 제 외모가 도움을 바라는 느낌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 덕에 -물론 신자들도 함께 노력해서이지만- 공소를 빚 없이 잘 지을 수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보잘것없는 것일지라도, 예수님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보잘것없는 것들로 더 큰 일을 하십니다. 내 탈렌트를 묻어두기보다, 무엇이든지 간에 그분 앞에 내어놓고 쓰임 받을 수 있도록 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시작이 중요합니다 중국에 있을 때 한 자매님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에 온 지 10년이 넘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한다. 나이가 많다. 외국어가 어렵다는 핑계를 댈 것이 아니라, 그저 하루에 한 단어, 한 문장씩만 공부했어도 많이 나아졌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그럼 저는 어땠을까요? 저도 1년 동안 말을 못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거의 매일 ‘하고 싶은 말’을 작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작문하고 선생님께 수정받고, 녹음해 달라고 해서 듣고, 실전에서 써 보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그래서 할 줄 아는 말이 조금 있습니다. 그리고 1~2년 지나면서 할 수 있는 말이 조금 더 늘었습니다.
물론 듣고 작문하는 수준이 높지도 않고 발음도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말’의 범위가 해가 지날수록 조금씩 늘어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열매가 혼자 다른 지역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방문하고, 현지 성당에서 강론하고 미사 봉헌하는 일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시작할 수 있다면 그 너머 자라고 성장하여 열매 맺는 일들을 보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성공이 아니라, 우리의 성실함입니다 학부 3학년으로 복학하기 전에 유럽 배낭여행을 갔다 온 이후, 외국어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영어를 공부해야겠다는 열정이 생겼는데, 마침 본당에 메리놀 외방 전교회의 신부님이 보좌신부님으로 계셨습니다. 그래서 신부님께 영어 공부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아침식사 시간을 내주셨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7시에 사제관에 갔습니다. 주로 제가 적어 온 영어 일기를 말하고 신부님이 고쳐 주시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영어 실력이 없었기 때문에, 영작하는 것이나 읽는 연습을 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편이지만, 그때는 아침 6시30분에 일어나는 것도 힘들어할 때였습니다.
몇 주는 신부님과의 아침 영어 공부가 잘 진행됐습니다. 그런데 한두 주 날짜가 지날수록 한두 번 빠지기 시작했고, 한 달이 넘어갔을 때는 한 주간을 빠진 적도 있었습니다. 죄송한 마음에 겨우겨우 아침에 나갔는데, 그날도 신부님은 밖에 있는 신문을 가지러 나와 계셨습니다. 신부님은 화를 내거나 저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 영어 공부를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끈기를 가지고 성실하게 하는 모습이에요.” 신부님의 그 말씀이 아직도 마음속 깊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무의식 중에 무언가를 잘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끈기와 인내를 가지고 끝까지 성실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모습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성공이 아니라, 우리의 성실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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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서춘배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작지만 비범한 영성>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마태오 25,21)
한강 변 들판은 하루가 다르게 색이 바래고 성기어만 갑니다. 그러나 작은 풀꽃들은 강한 생명력을 보입니다. 토끼풀과 민들레입니다. 땅바닥에 깔린 토끼풀들은 서로 힘을 보태 더욱 푸르게 작은 숲(군집)을 이룹니다. 민들레는 봄철보다 더욱 낮게 땅바닥에 깔려 꽃을 피우고 순식간에 장대처럼 쑥 키를 키워 그 위에 둥근 모형의 씨 뭉치를 올려놓습니다. 마치 지구를 들어 올린 형국입니다. 작은 풀꽃의 힘찬 모습입니다.
1. 작은 것의 영성
얼마 전, 요셉의원에 미사를 하러 갔습니다. 선우 요셉 선생님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노숙인 같은 가난한 이들을 진료하는 일을 소명으로 여기셨습니다. 결혼하지 않았지만, 자녀가 많았으니 바로 옹골진 구석이 없는 노숙인들이었습니다.
그분의 영성은 작년에 시성(諡聖) 되신 샤를르 드 푸코 성인의 작은 이의 영성입니다. 푸코 성인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 나자렛의 가장 작은 자로 남길 원하셨습니다. 푸코 성인이 사하라 사막에서 가난한 무슬림들의 형제로 사셨다면, 선생은 도시의 광야에서 노숙인들과 같은 작은 이들을 형제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앞선 두 종에 대해 주인이 칭찬하는 말마디는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습니다. “작은 일에 성실했기에 많은 일을 맡기고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라는 겁니다.” 작은 것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 됨됨이도 운명도 결정됩니다.
무릇 작은 것에서 큰 것이 나옵니다. 독일 경제학자 E. F 슈마허는 자신의 저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인간이 보이는 경제를 얘기하며 거대해진 현대사회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경제 논리에서 작은 것을 예찬하다니 선견지명이 놀랍습니다.
우리 신앙의 세계에선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사랑의 마음으로 감자를 깎는 것이 웅장한 성전을 짓는 것보다 하느님을 더 기쁘게 해드린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왕궁이 아니라 마구간에 태어나셨고 구유에 포대기로 싸여 세상에 오셨습니다. 역설적으로 세상 모든 이의 구세주임을 웅변적으로 보여줍니다.
2. 용기 있게 삶을 던져야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29절) 빈익빈 부익부를 옹호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얘야! 넉넉해지고 빼앗기는 것이 어디 돈(탈렌트)뿐이겠느냐? 용기가 있느냐? 넌 용기 대신 핑곗거릴 찾았구나. 너는 나의 사랑을 왜곡했다. 믿음으로 삶을 던질 용기가 없다면 가진 것마저 빼앗기고 만다. 나를 모진 사람으로 여겼다면 그리 대접받을 수밖에 없구나. 작지만 힘을 보태는 토끼풀들을 보아라. 성실하게 꽃을 피우는 민들레는 대롱 끝에 지구별을 달고 있지 않으냐. 난 작은 겨자씨 안에 하늘나라를 숨겨두었다.’
바오로 사도는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이라며 우리야말로 하느님의 자녀요 상속자임을 말합니다.(1코린 3, 21-23 참조)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대로 우리 자신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고난 가운데에서도 성실하게 인생길을 펴는 하느님의 종을 소개합니다. 성실은 용기와도 통합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자선의 날이 아닙니다. 교종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교회 여정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복음의 기쁨」 198항)
이스라엘 쪽에 사시는 푸코 신부님의 영성을 따르는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 수녀님에게서 들은 얘기입니다. 가난한 이슬람 형제를 돕는 것을 4번째 서원이라 할 정도로 중요시한다는 것입니다. 작고 소박한 지향이지만 비범합니다. 이 시대, 전염병처럼 번지는 증오와 참혹한 분쟁을 끝낼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와 다른 종교, 문화, 민족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보편적 형제애’는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그 마음에서 비롯될 것입니다.(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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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구약성경의 토빗은 자선을 베풀다가, 임금에게 재산을 몰수당하고, 잔칫상을 뒤로 미루기까지 하면서 길거리에서 죽어간 이를 장례 치러주고 돌아와 쉬다가, 참새의 분비물을 맞아 눈을 잃고 맙니다.(토빗 2,1-10 참조)
‘선행을 하는데 벌이 따르다니 이 무슨 운명의 아이러니인가!’ 이민족 사이에서 하느님을 섬기고 자기 목숨을 걸 정도로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용기와 내면의 힘을 토빗은 어디에서 얻었을까요? 성경에서 흔히 가르치듯이,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이들에게 시련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왜일까요? 이는 우리를 욕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우리 믿음을 굳건히 하려는 것입니다.
시련의 시기에 토빗은 자신의 가난을 발견하고는 가난한 다른 이들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그는 하느님의 법에 충실하고 계명을 지키면서도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가난을 직접 느꼈기에 실제로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보일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를 만날 때마다 우리가 얼굴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주 예수님의 얼굴을 뵙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허울뿐인 안녕을 지키려는 무관심과 빤한 핑계를 떨쳐버리고, 모든 가난한 이와 모든 형태의 가난을 알아보라고 부름받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필요를 특히 섬세하게 헤아리지 않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풍족한 생활양식을 택하라는 압박이 커져 가는 반면, 가난 속에 살아가는 이들의 목소리는 무시당하곤 합니다. 우리는 불쾌하거나 고통을 초래하는 것은 모두 무시하는 반면, 신체적 특질을 삶의 우선 목표인 양 찬양합니다.
가상 현실이 실제 삶의 자리를 차지하고 점점 더 쉽게 두 세계가 하나로 합쳐집니다. 가난한 이들은 찰나의 영향을 줄 수 있는 영화의 한 장면이 되지만, 우리는 살과 피를 지닌 그들을 거리에서 마주친다면 성가셔하며 외면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5-37 참조)는 그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저마다에게 끊임없는 도전입니다. 자선을 베푸는 일을 다른 이들에게 위탁하기는 쉽습니다. 다른 이들이 자선을 베풀도록 성금을 내는 것도 관대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자선에 직접 참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감사드립시다. 많은 사람이 가난한 이들과 배척받는 이들을 돌보는 데에 헌신합니다. 모든 연령대와 각계각층에서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을 이해하고 기꺼이 도우려고 합니다. 그들은 초인적 영웅이 아니라 ‘이웃집 사람’, 곧 스스로 묵묵히 가난한 이들 가운데 하나가 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그저 무엇을 주는 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경청하고, 관계를 맺으며, 가난한 이들의 처지와 원인을 이해하고 대처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들은 물질적 필요는 물론 영적인 필요에도 주의를 기울이고, 개개인의 온전한 발전을 위하여 힘씁니다.
반포 60주년을 기념하는 성 요한 23세 교황 성하의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의 다음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생존, 육신 전체, 생활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절대적인 권리를 갖고 있으며, 특히 양식, 의복, 주거, 숙식 등에 관한 권리가 있으며 의사들의 치료와 그 외 정당한 사회적 봉사 등을 받을 권리가 있다. 또한 인간은 병고, 노동력의 결여, 과부 신분, 노환, 실업 등에 처했거나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생존 방법을 상실하는 경우에도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11항)
말씀이 실현되려면, 특히 정치 지도자들과 입법자들의 진지하고 효과적인 헌신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모든 것을 ‘위로부터’ 받으려고 수동적으로 기다린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빈곤 속에 살아가는 이들 또한 변화와 책임의 과정에 참여하고 동행해야 합니다.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전쟁의 상황에 휘말린 사람들, 특히 평온한 현재와 품위 있는 미래를 빼앗긴 어린이들을 생각합니다.
또한 투기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는 많은 가정을 더욱 가난하게 만드는 극적인 물가 급등을 일으켜 왔습니다. 수입은 빠르게 바닥나고 모든 이의 존엄성을 위태롭게 하는 희생이 강요됩니다. 그렇다면 현재 노동계 안에서 빚어지는 윤리적 혼란을 어떻게 간과할 수 있겠습니까? 수많은 노동자에게 가하는 비인간적 대우, 노동에 대한 부적합한 대가, 고용 불안이라는 참상, 그리고 때로는 안전한 일터보다 즉각적 이익을 선택하는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과도한 재해 관련 사망자 수 등이 그렇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강조하신 말씀을 떠올립니다.
“노동의 가치를 부여하는 일차적인 근거는 …… 인간 자신이라는 것을 뜻할 뿐이다. …… 아무리 인간이 일할 운명을 타고났고 소명을 받았다 하여도 우선적으로 노동이 ‘인간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인간이 ‘노동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노동하는 인간’, 6항).
그 자체로 심각한 괴로움인 이러한 형태의 가난들은 이제 우리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빈곤의 실태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일 뿐입니다. 저는 특히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점점 더 두드러지는 가난의 형태를 바라봅니다. 젊은이들에게 자신을 ‘낙오된 패배자’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도록 부추기는 문화는 얼마나 많은 좌절과 얼마나 많은 자살을 일으키고 있습니까.
토빗기는,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든지 현실적이고 실질적이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정의에 관한 문제입니다. 공동체가 스스로를 정의롭다고 느끼는 데 요구되는 화합을 촉진하려면 우리가 서로를 찾아내고 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돌본다는 것은 그저 재빨리 내미는 도움의 손길 이상입니다.
이는 가난이 훼손한 올바른 상호 인격적 관계를 재정립하도록 요청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누구든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자비와 애덕의 유익을 누리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가난한 이들을 향한 우리의 관심이 언제나 복음의 현실주의로 특징지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나눔은 단지 남아도는 물건들을 처리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고 상대방의 구체적인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도 또한 성령께서 이끄시는 식별이 요구됩니다. 이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 희망과 열망이 아닌 우리 형제자매의 진정한 필요를 인식하기 위함입니다. 가난한 이에게 필요한 것은 분명히 우리의 인류애, 사랑에 열려 있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결코 다음의 사실을 잊지 맙시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 뵙고, 그들의 요구에 우리의 목소리를 실어주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에게 귀 기울이며, 그들을 이해하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신 그 신비로운 지혜를 받아들이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복음의 기쁨’, 198항)
우리의 집인 이 세상에서는 모든 이가 애덕의 빛을 경험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 누구도 그 빛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에 데레사 성녀의 굳건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누구든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고,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이며 신적인 면모에 언제나 초점을 맞추도록 도와주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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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을 보면, 다양한 삶 곧, 각기 다른 삶을 살았던 이들에 대한 표현들이 나옵니다. 제1독서 잠언에서는 훌륭한 아내(잠31,10), 화답송에서는 주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으로, 제2독서 테살로니카 1서에서는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로, 그리고 복음에서는 착하고 성실한 종;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 앞으로 큰일을 맡을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곧 오늘을 살고 있는 하느님 백성 모두가 살아가야 할 모습이라고 봅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25,14)과 같으며, 주인이 여행을 떠나있는 시간적 공백은 개인적으로 각자의 생애 기간이며, 이 기간은 우리 각자에게 온전히 맡겨진 시간이기에 각 사람은 자기 삶에 주인으로 각자가 받은 만큼의 탈렌트를 활용하여 주인의 신뢰에 부응하는 삶을 성실히 살아야 합니다. 각기 다른 탈렌트와 시간 안에서 모든 종에게 주인이 바라고 원하는 것은 주인이 믿고 맡긴 만큼 그에 따른 성실성이라고 보며, 이것이 곧 주인과 종 사이의 ‘셈, 결산, 책임’이라고 봅니다.(25,19) 그리고 그 셈의 중요한 기준은 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맡겨진 탈렌트를 어떻게 활용했느냐.’로 평가됨을 알게 됩니다. 결국 우리 각자의 마지막 순간, 죽음의 때가 되면, 우리는 셈을 할 때, 주인으로부터 칭찬받은 종들은 바로 이런 주인의 의도를 깨닫고 살았던 종들임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25,21.23)는 칭찬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런 축복받은 삶을 이룰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을 좀 더 깊이 이해하고 새로운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익히 잘 아시는 작가 ‘코엘료’의 유명한 「연금술사」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연금술사’의 주인공 산티아고는 지극히 평범한 청년이지만 다른 젊은이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오직 꿈을 좇아 살아가는 젊은이입니다. 그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이집트로 먼 길을 떠나고, 그 여정 중에 많은 사람을 만나기도 하며, 여러 가지 남다른 체험과 고생을 하게 되고 결국에는 죽음의 목전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일찍이 늙은 왕이 해준 말들을 가슴에 간직하고,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합니다.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 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부과된 유일한 의무이지. 세상 만물은 모두 한가지라네.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 준다네.』마침내 산티아고는 연금술사를 만나게 되고, 만물과 대화하는 ‘하나의 언어’를 이해하게 되어 그 스스로 영혼의 연금술사가 되지요. 그러자 그다음에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서, 큰 보물도 찾게 되고 아름다운 여인 파티마도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연금술사」에서 코엘료가 말하는 ‘연금술이란 과연 무엇일까?’하는 의문이 듭니다. ‘연금술사’에서 연금술을 공부하는 영국인 화학자가 몰랐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던 거지요. 그는 오직 ‘어떻게 하면 납을 금으로 만들 수 있을까?’ 에만 몰두했고, 자신 안에 감추어져 있는 참된 자기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결코 연금술사가 될 수 없었던 겁니다.
책의 맨 마지막에 <작가의 말>에 썼듯이, 코엘료도 자신의 젊은 시절 연금술에 관한 오랜 연구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간과했던 것입니다.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늙은 왕이 산티아고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그것을 잘 나타내 보여 줍니다. 『어떤 상인이 행복의 비밀을 알아 오라며 자기 아들을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현자에게 보냈답니다. 그래서 그 젊은이는 40일 동안 사막을 걸어가 산꼭대기에 있는 아름다운 성에 이르렀지요. 그곳에 현자가 사는 집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젊은이의 말을 들은 현자는 우선 자신의 아름다운 집을 모두 구경하고 오라고 했지요. 하지만 집을 구경하는 동안 기름이 담긴 찻숟갈을 가지고 다니는데, 다만 기름을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다녀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젊은이는 집안을 모두 둘러보았는데, 오직 찻숟갈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아무것도 보질 못했지요. 그러자 현자는 젊은이에게 다시 가서 집안의 아름다운 것들을 모두 살펴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젊은이는 이번에는 편안한 마음으로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보았지만, 그 사이에 숟가락의 기름이 흘러 없어져 버렸지요. 현자 중의 현자인 그 사람은 “내가 그대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요. 행복의 비밀은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을 보는 것, 그리고 동시에 숟가락 속에 담긴 기름 두 방울도 잊지 않는데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코엘료가 연금술이란 행복한 사람이 되는 비결이며,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물질적 금을 만드는 일’ 곧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을 경험해 보는 것이며, 동시에 ‘정신적으로는 자기 안에 있는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일’ 곧 숟가락 속에 담긴 기름 두 방울도 잊지 않는 것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지요. 코엘료는 우리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우리도 역시 연금술사가 되어야만 한다고! 그래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코엘료는 누구든 연금술사가 되려면 ‘자기의 신화를 살라.’ 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자기실현’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할 수 있느냐에 있는 게 아니겠어요? 왜냐하면 누구나 산티아고처럼 ‘이집트에 가면 보물을 찾을 수 있다.’는 식으로 꿈을 통해 자기의 신화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우리는 대부분 무엇이 자기의 신화인지 곧 어떻게 하면 자기실현을 이룰 수 있는지를 모릅니다. 이에 대한 해법을 그는 <작가의 말>에 자기의 스승인 ‘람’이 들려준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어느 수도원을 찾았을 때, 사제들은 시를 낭송하기도 하고, 성화를 그려 보이기도 하며 경배를 드렸다지요. 그런데 그중 맨 마지막에,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볼품없는 사람이 있었는데, 곡마단에서 일하던 아버지로부터 배운 공을 가지고 노는 기술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재주였습니다. 그래서 사제들은 그가 경배드리는 것을 막았지만, 그는 진심으로 아기 예수와 성모께 마음을 바치고 싶어 주머니에서 오렌지 몇 개를 꺼내 공중에 던지며 놀기 시작했다지요. 그러자 아기 예수가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쳤고, 성모께서는 오직 그 사람에게만 아기 예수를 안아볼 수 있도록 허락했다는 겁니다. 』
연금술은 바로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의 핵심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탈렌트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시는 바는 하늘나라는 선물이요 과제라는 것을, 은총이요, 초대이기에, 곧 현재와 임박할 종말 사이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이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만 마지막 날에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각자의 능력에 따라 나눠 준 액수가 당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액수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5탈렌트는 30,000데나리온, 2탈렌트는 12,000데나리온 그리고 1탈렌트는 6,000데나리온 정도인데, 당시에 농촌 일꾼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으니 그때도 지금도 엄청난 거금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첫째와 둘째 종은 주인이 맡긴 돈을 활용하여 큰돈을 벌어들입니다. 이는 자신들의 능력을 믿고 맡긴 주인에 대한 신의에 대한 응답이며 성실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셋째 종은 주인이 자신에게 맡긴 돈을 다만 안전하게 보관만 합니다. 이는 곧 자신과 자기 능력을 믿고 맡긴 주인에 대한 신의를 저버린 행동이었습니다. 아무튼 때가 되어 돌아온 주인은 종들을 불러 셈을 했고, 그에 따라 주인은 첫째와 둘째 종에게 똑같은 칭찬을 해줍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25, 21. 23) 여기서 주인은 두 종에게 같은 칭찬을 한 까닭은 두 종이 벌어들인 돈의 많고 적음보다 종들의 주인인 자신에게 대한 신의와 성실을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기보다 주인에 대한 됨됨이를 판단, 곧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시는 모진 분”(25,24)이시라고 판단하고 맡겨진 돈을 활용하지 못한 셋째 종에게서 빼앗은 돈을 첫째 종에게 주었습니다. 이로써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25,29)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지칭하는 경제용어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영적인 측면에서 타인과 비교하고 남을 시기하며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더욱더 초라해진다는 점을, ‘쓸모없는 인간으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질 것’(25,30)이라는 경고를 내포하고 있다고 봅니다. 때는 늦으리~ 아무리 이를 갈지라도.
“주님, 저희 각자에게 맡겨진 일에, 지금 주어진 삶에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하게 하여 주시고, 이 모든 일을 성실히 끝내고서는 자만하고 자랑하기보다, 당신께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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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하루살이’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루살이의 수명은 얼마나 될까요? 대부분 하루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로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런데 실제로는 여덟 시간 정도밖에 못 산다고 합니다. 이제 이 하루살이가 차에 치여서 태어난 지 4시간 만에 죽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마 다른 하루살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너무 안 됐어. 이렇게 젊은데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하다니….”
그러나 인간이 보기에 4시간이나 8시간이나 그다지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생각의 지평을 조금만 넓혀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하루살이를 바라보는 시선을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말입니다. 무한대의 시간 속에 계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10년이나 100년이나 별 차이를 느끼시지 못할 것 같습니다. 또 하나를 생각해 보지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능의 차이는 어떤 것 같습니까? 어떤 사람은 많은 능력이 있고, 어떤 사람은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우리이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앞에서 그 능력의 차이가 대단할까요?
우리의 생명도 또 우리의 재능도, 여기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 역시 하느님 앞에서는 별것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보다는 우리에게 주신 생명, 재능, 재산 등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 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받은 것보다는 받지 못한 것만을 바라보면서 불평불만 속에 계속해서 머무르고 있고, 쉽게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기도 합니다.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 게으른 주님의 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탈렌트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한 탈렌트를 주고서 주인은 여행을 떠납니다. 그리고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합니다. 다섯 탈렌트 받은 사람은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고, 두 탈렌트 받은 사람은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그러나 한 탈렌트 받은 사람은 주인이 두려워서 그냥 땅에 숨겨둔 뒤에 한 탈렌트만 가지고 오지요.
한 탈렌트 받은 사람의 입장이 틀린 것 같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또 겨우 한 탈렌트만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탈렌트는 당시 노동자가 6,000일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자그마치 16년 반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큰돈입니다. 따라서 본인이 의지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일을 충분히 많이 할 수 있습니다. 건강하지 않아서, 재능이 부족해서, 돈이 없어서…. 라는 할 수 없는 이유를 이야기하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그 이유가 먹히지 않고 쓸모없는 종이라면서 어둠 속에 내던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하느님의 일은 과연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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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낌없이 기꺼이>
마태오 25,14-30 (탈렌트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그렇게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가 나아가서 다섯 탈렌트를 더 바치며,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나아가서, ‘주인님, 저에게 두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아낌없이 기꺼이>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오 25,28)
나를 믿으시는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나의 믿음을
내가 믿는 벗에게
아낌없이 기꺼이
나를 바라시는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나의 바램을
내가 바라는 벗에게
아낌없이 기꺼이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나의 사랑을
내가 사랑하는 벗에게
아낌없이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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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인생 결산>
오늘 연주 제33주일은 연중시기 마지막 주일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연중 마지막 주일이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연중 제33주일의 주제도 ‘인생 결산’, ‘인생 최종 결산’이라고 함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도 이렇게 얘기합니다.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인생 결산을 할 때 우리는 일생을 잘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는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라는 칭찬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60세 환갑 되던 해에 마침 사제 서품 30주년이 되어 1차 인생 결산과 사제생활 결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의 결산은 ‘60년을 참 열심히 살았지만, 잘 산 것은 아니었다.’였습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반성을 한 셈입니다. 잘못된 길을 갔다면 열심히 간 것이 오히려 잘못이니 말입니다.
예를 들어 출세의 길을 열심히 갔다면, 그래서 천국의 길을 열심히 가지 않았다면, 하느님의 산은 오르지 않고 인간의 산을 열심히 올랐다면, 멀리 간 길은 돌아오고 높이 올랐던 산은 내려와야겠지요. 그리고 뒤처진 만큼 더 열심히 가고 더 열심히 오르기 시작해야겠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앞에서 인생을 결산할 때 잘했다고 칭찬받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하고, 그런 다음 그 삶을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겠지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어떤 삶입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것은 행복한 삶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으며 불행하기를 바라고 낳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하도록 창조하셨고, 자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바람보다 우리가 더 행복하길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세상의 잠깐 행복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행복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도 바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다시 묻게 됩니다. 무엇이 우리를 과연 행복하게 하는 것인지.
사실 훌륭한 가르침이 많지만 대부분 불행하지 않게 하는 법을 얘기할 뿐 진정한 행복의 길을 제시하지 못하는데 주님께서 그 길을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사랑의 삶입니다. 사랑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벌어야 할 것이 실은 달란트가 아니라 사랑이고, 일을 열심히 해야 할 것이 아니라 사랑을 뜨겁게 해야 할 것입니다.
사는 동안 우리는 물론 욕심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불행하지 않게 하는 소극적인 길일 뿐입니다. 우리를 참으로 행복하게 하는 적극적인 길은 사랑이고 주님과 이웃을 모두 사랑하는 더 적극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조금(한 달란트) 주시고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모진 분으로 여기지 않고 모든 것을 주시고 우리 행복을 바라시는 사랑의 하느님으로 믿고 사랑해야 합니다.
어제 성무일도 낮 기도의 마침 기도로 오늘 나눔을 마치겠습니다. “영원한 사랑에 불타는 빛이신 주님, 우리도 사랑으로 불타게 하시어, 만유 위에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위하여 같은 사랑으로 형제들을 사랑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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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행복한 삶>
-사랑하라, 깨어 있어라, 책임을 다하라-
화답송 후렴이 정신을 맑게 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시편128,1ㄱㄴ)
오늘은 제7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주님의 산상설교중 맨처음 참행복선언이 생각납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6,20)
참행복은 온전히 하느님 중심의 삶에 있음을 봅니다.
“누구든 가난한 이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마라.”(토빗4,7)
세계 가난한 이의 날, 프란치스코 교황은 위 성서 말씀을 주제로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이어 “우리는 허울뿐인 안녕을 지키려는 무관심과 뻐한 핑계를 떨쳐버리고 모든 가난한 이와 모든 형태의 가난을 알아보라는 부름을 받는다”며 가난한 이들과 연대를 요청했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자선에 직접 참여하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참 행복한 삶! 누구나의 소망일 것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참행복 역시 선택입니다. 주님을 선택하여 주님의 뜻대로 살 때, 참행복입니다. 오늘 연중 제33주일, 주님을 선택해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여러분들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1.길은 어디에?
많은 이들이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2.빛은 어디에?
많은 이들이 빛을 잃고 어둠속에 방황하고 있습니다.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3.진리는 어디에?
많은 이들이 진리를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4.희망은, 꿈은 어디에?
많은 이들이 희망을, 꿈을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길을 잃을 때, 빛을 잃을 때, 진리를 잃을 때, 희망을, 꿈을 잃을 때, 어둠속에 빠져들고 죄를 짓기 마련이며, 사회든 사람이든 병들기 마련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궁극의 길이자 빛이자 진리이자 희망이신, 꿈이신 주님 중심의 삶을 살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의 참행복한 삶입니다. 오늘은 “참 행복한 삶”에 대한 구체적 방법을 소개해 드립니다.
첫째, 주님을 사랑하라!
한결같이, 끊임없이, 열렬히, 항구히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행복의 우선적 조건입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수록 정체성 또렷한 삶이요, 주님 안에 날로 깊어지는 믿음의 뿌리와 더불어 늘 푸르른 희망입니다.
주님을 진정 사랑할 때 이웃들, 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잠언이 칭송하는 훌륭한 아내가 이런 주님 사랑의 모범입니다.
“훌륭한 아내를 누가 얻으리오? 그 가치는 산호보다 높다. 남편은 그를 마음으로 신뢰하고, 소득이 모자라지 않는다. 그 아내는 한평생 남편에게, 해 끼치는 일 없이 잘해 준다. 한 손으로는 물레질하고, 다른 손으로는 실을 잣는다. 가난한 이에게 손을 펼치고, 불쌍한 이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준다. 우아함은 거짓이고 아름다움은 헛것이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칭송을 얻는다.”
이런 아내들로, 어머니들로, 여인들로 가득한 사회라면 얼마나 맑고 밝고 생기차고 향기롭겠는지요! 참으로 주님을 경외하고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이들을 상징하는, 참행복한 훌륭한 여인들입니다. “우아함은 거짓이고 아름다움은 헛것이지만, 주님을 경외함은 영원하다”는 말씀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고 싶습니다.
둘째, 깨어 있어라!
막연히 깨어 있을 때 오래 못갑니다. 사랑하는 이를, 사랑하는 주님을 기다릴 때 저절로 깨어 있게 됩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을 기다릴 때, 주님께 희망을 둘 때 비로소 깨어 있게 됩니다. 사랑할 때 잠들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깨어 있음은 사랑이요 생명이요 빛입니다. 깨어 있음은 겸손이요 지혜입니다. 깨어 있어야 유혹에 빠지지 않고 죄도 짓지 않습니다.
깨어 있을 때 비로소 깨끗한 마음에 이어지는 깨달음의 은총들입니다. 주님의 날이 밤도둑처럼 올 때에도 주님을 사랑하는 이는 깨어 있다 주님을 맞이합니다. 우리를 격려하시는 다음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용기백배하게 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참으로 주님을, 이웃을, 나를 사랑할 때 깨어 있게 되고 빛의 자녀로, 낮의 자녀로 살 수 있습니다. 사랑의 훈련과 습관, 그리고 깨어 있음의 훈련과 습관과 더불어 주님의 참 행복한 삶의 선물입니다.
셋째, 책임을 다하라!
주님께 주어진, 맡겨진 책임을, 본분을 다할 때 비로소 참행복의 구원의 삶입니다. 책임과 본분을 다하는 사랑이요 믿음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깨어 있는 이들이 바로 이런 책임을, 본분을 다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을 살 때 주님과의 축복된 만남입니다.
오늘 비유는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언젠가의 하늘 나라가 아니라 주어진 능력에 따라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오늘 지금 여기서 실현되는 하늘 나라의 꿈입니다. 바로 오늘 능력에 따라 최선을 다함으로 좋은 성과를 올린 다섯 탈렌트, 두 탈랜트 받은 이들이 그 모범입니다.
그러니 이웃과 비교할 것도, 경쟁할 것도, 이웃을 부러워할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맡겨진 그 이상, 그 이하도 요구하거나 바라지 않습니다. 받은 능력에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그러니 경쟁 대상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입니다. 부단히 자기를 일깨워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자아초월의 삶이 절실합니다. 이래야 공동체 형제들간 상호 평화로운 공존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다섯 탈렌트 받아 다섯 탈렌드 남긴 이나, 두 탈렌트 받아 두 탈렌트 받아 두 탈렌트 남긴 이나 주인은 똑같이 기뻐하시며 칭찬하십니다. 주인이 상징하는 바 주님입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바 삶의 “업적의 양”이 아니라 “삶의 충실도”, “삶의 순도(純度)”입니다. 5/5나 2/2나 삶의 충실도는 똑같이 1입니다.
이 둘은 주님을 사랑했기에 주님을 알았고 자기를 알았던 겸손하고 지혜로웠으며 깨어 자기의 책임을 다했지만, 한 탈렌트 받은 이는 참으로 안타깝게도 주님을 너무나 몰라 오해했고 무책임하고 태만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깨어 살지도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저자에게서 그 한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스스로의 무지의 태만으로 자초한, 스스로 선택한 화요 재앙이요 심판이니 누구를 탓합니까! 영적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진리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라는, 깨어 살라는, 제 책임을 다하라는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하늘나라 비유입니다.
삶은, 행복은 선택입니다. 주님을 한결같이 사랑하는 적극적 삶의 선택과 노력이요, 깨어 사는 적극적 삶의 선택과 노력이요, 자기 책임을 다하는 적극적 삶의 선택과 노력입니다. 이렇게 선택하고 노력하여 습관화할 때 오늘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하늘 나라의 참 행복이요 축제인생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1.주님을 사랑하며, 2.깨어 각자 주어진 삶의 제자리, 꽃자리에서, 3.제 책임을 다하며 하늘 나라의 참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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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25,21.23)
<탈렌트!>
오늘 복음(마태25,14-30)은 '탈렌트의 비유'입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우리 모두는 하느님으로부터 탈렌트(능력.힘.카리스마)를 받았고, 이를 잘 활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모두에게 탈렌트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탈렌트가 잘 활용되어지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탈렌트를 잘 활용하지 않으면, 하느님으로부터 이런 큰 꾸지람을 듣게 됩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25,26.30)
'하느님께서는 탈렌트가 어떻게 활용되어지기를 바라실까?'
'하느님의 일, 곧 공동선과 공동이익이라는 우리의 구원과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활용되어지기를 바라시지 않을까?'
연중 제33주일인 오늘은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복음을 보면 가난한 이들은 예수님의 친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셨고,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주님이신 예수님처럼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사랑)을 두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며 형제애를 나누어 주는 일이야말로, 받은 탈렌트를 잘 활용하는 모습입니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1테살5,2)
어느날 갑자기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셈을 하자고 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준 탈렌트를 어떻게 했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1테살5,5)
그런 자녀답게 먼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탈렌트가 무엇인지를 찾아내서, 이를 너와 공동체를 위해 내어놓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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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RKFYMssk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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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마태 25, 21)
하느님께로
향하는
모든 만남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착하고
성실한 삶이
아름다운
삶의
본모습입니다.
작은 일에
최선을 다 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것이기에
더더욱 소중한
생명입니다.
이렇듯
삶과 죽음의
모든 문제는
우리모두의
가장 중요하고
절박한
주제입니다.
이와 같이
생명의 기쁨은
요란스럽거나
거창하하지 않으며
오히려
작은 것에서
참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성실하신
사랑입니다.
하찮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하찮은 것들이
아님을 발견합니다.
복음은 생명의
참모습에
눈 뜨게 합니다.
사람은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있기에
삶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모두는
예외 없이
하느님 앞에서
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잘 살지 못하면
잘 죽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우리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음을
반성합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깨닫고
신앙인으로서의
삶의 모습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성실한
하느님 자녀들의
가장 중요한
삶입니다.
작은 일에
성실하고
작은 것도
기쁘게 나누며
하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사랑의 여정
저 끝에는
기쁘게 뵈올
우리의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도
기쁘고
우리도 기쁜
착하고
성실한
사랑의 실천이
펼쳐지는
은총 가득한
주일 되십시오.
삶이란
두려움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고
기쁘게 사랑하고
기쁘게
나누는 기쁨의
만남입니다.
기쁜 날
기쁜 복음
기쁜 만남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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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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