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남양주시 역사
〔고 대〕 이 시는 한강의 북안에 접한 지역으로서 구석기시대부터 많은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구석기유적은 화도면 감터, 와부읍 송촌리ㆍ진중리ㆍ능내리에서 발견되어 남양주 일대에는 이미 전기 구석기부터 사람들이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지금동ㆍ수석동ㆍ동막동ㆍ선암리 등 한강변의 하상퇴적지와 구릉 말단부에서 주로 발견되는데, 흑요석기와 즐문토기 등이 있다.
청동기시대 유적은 신석기시대의 유적에 비해 분포밀도가 급증하고 있음을 볼 때,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동ㆍ가운동ㆍ수석동ㆍ이패동삼패동ㆍ도동동과 와부읍의 도곡리ㆍ덕곡리, 도안면의 진중리 등지에서 돌화살촉ㆍ다두석부(多頭石斧)ㆍ반달모양돌칼ㆍ간돌창 등이 발굴되었다.
청동기시대에 이어 철기시대는 역사적으로 삼한시대로, 남양주일대는 마한에 속했던 곳으로 추측된다. 마한 54국 중 고리국을 풍양ㆍ양주일대로 비정하는 학자도 있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남양주는 백제의 영역에 속했으며, ≪동국여지승람≫과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475년(장수왕 63)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한강 남안 지역이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된 뒤 매성군(買省郡) 또는 창화군(昌化郡)에 속하였다.
또한 고구려 영역하에 진건ㆍ진접읍 지역은 한산주(漢山州)에 속한 북한산군(北漢山郡) 관내의 골의노현(骨依奴縣)으로 불렸다. 551년(성왕 29) 나제동맹(羅濟同盟)으로 백제가 다시 이 곳을 회복한 뒤에는 백제에 잠시 귀속되었다.
신라 진흥왕은 2년 후에 백제가 점유한 한강 하류지역마저 탈취하여 한강유역 일대는 신라에 의해 모두 점유됨과 동시에, 이 곳에 북한산주(北漢山州)가 설치되었다. 757년(경덕왕 16) 군현제를 정비하면서 양주지역 일대는 내소군(來蘇郡)으로, 진건ㆍ진접읍 지역인 골의노현을 황양(荒壤)으로 개칭하였다. 이 때 황양은 북한산에서 이름이 바뀐 한양군(漢陽郡), 치소 慶州)에 속하였다.
〔고 려〕 ≪고려사≫에 의하면, 935년(태조 18) 한양군이 양주 또는 남경(南京)으로 바뀌었는데, 양주라는 지명은 후삼국시대에도 사용되었으나 고려시대에 이르러 보편화되었다. 고려 태조 때 현 양주군 지역은 견주(見州)로 되었고, 동두천 지역은 사천(沙川), 남양주의 진건면ㆍ진접읍 지역은 풍양현(豊壤縣)으로 불렸으며 양주의 속현이 되었다. 이때 평구도(平邱道, 남양주시 양정동)는 남경에, 조안면 지역은 광주에 속하였다.
983년(성종 2) 양주에 목사가 두어졌고, 995년(성종 14)에는 관내도에 속했으며, 양주는 좌신책군절도사(左神策軍節度使)의 부임지로서 광릉(廣陵)으로 별칭되기도 하였다. 1012년(현종 2) 양주에 절도사가 폐지되고 안렴사가 설치되었으며, 1018년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되었다.
1067년(문종 21) 양주가 남경유수로 승격되었다가 곧 격하되었으며, 1099년(숙종 4) 남경에 도성이 축조되었다. 이를 전후하여 풍양현ㆍ견주ㆍ사천 등은 남경의 직할지가 되었으며, 그 뒤 1308년(충렬왕 34) 남경은 한양부로 격하, 개칭되었다.
〔조 선〕 1394년(태조 3) 조선왕조가 한양부에 도읍을 정하면서 한성부(漢城府)로 개칭되었고, 양주의 치소가 아차산(峨嵯山) 남쪽의 대동리(지금의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부근)로 옮겨졌고, 양주가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되었다. 이듬해 양주부로 승격되었고, 1397년에는 치소가 견주(고주내, 지금의 양주군 주내면 고읍리)로 옮겨지고 이 곳이 양주로 불렸다.
1413년 양주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1419년(세종 1)에 잠시 양주의 관할로 되었으며, 1430년 양주목이 되어 진(鎭)이 설치되었다. 1466년(세조 12) 풍양현이 양주목의 속현으로 되었으며, 1504년(연산군 10) 양주목이 폐지되고 왕의 사냥터가 되었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인 1511년(중조 6) 양주목으로 복구되었다.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봉선사에 있는 조선 전기의 범종. 1469년 주조. 높이 230㎝. 보물 제397호. 정상부에 쌍룡의 유가 있고 음통이 없는 것이 조선 종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 때 양주의 치소가 불국산 남쪽(지금의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으로 옮겨졌는데, 지금의 남양주시 지역을 포함하여 35개 면을 관할하였다. 남양주의 옛 이름은 풍양인데, 이 고장은 바로 풍양조씨(豊壤趙氏)의 관향이기도 하다.
이 고장에서는 조선시대의 학문과 사상을 빛낸 많은 인물을 배출했는데, 수석등 석실서원(石室書院)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힘썼던 17세기 중엽의 학자 이단상(李端相, 호 靜觀齋)의 문하에서는 이희조(李喜朝)ㆍ김창협(金昌協)ㆍ민진후(閔鎭厚)ㆍ김창흡(金昌翕)ㆍ임영(林泳) 등 학문의 일가를 이룬 쟁쟁한 학자들을 많이 배출, 조선 중기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큰 학맥을 형성하였다.
특히 19세기 조선 후기 실학의 집대성자로 불리는 정약용(丁若鏞, 호 茶山)은 지금의 와부읍 능내리 마재〔馬峴:조선시대 광주부 초부면〕에서 출생, 유배에서 풀려난 뒤 이 곳 향리의 여유당(與猶堂)에서 만년의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을 마무리하였다.
〔근 대〕 1895년(고종 32) 지방 관제 개정에 따라 8도제가 폐지되고 전국이 23부로 나뉠 때 한성부 소속 양주군이 되었다가, 이듬해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로 개편될 때 경기도 양주군이 되었다.
1906년 광주군 초부면(草阜面)이 양주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군면 통폐합에 따라 양주군은 주내ㆍ희천ㆍ은현ㆍ광적ㆍ백석ㆍ시둔ㆍ별내ㆍ진접ㆍ진건ㆍ화도ㆍ와부ㆍ미금ㆍ구리ㆍ노해ㆍ이담ㆍ장흥의 16면 148개 이를 개편 관할하였는데, 이 중 남양주 지역과 관련된 것은 7개 면이었다.
1938년 10월 군청이 주내면 유양리에서 시둔면으로 옮겨지면서 동시에 양주면이라 개칭되었고, 1942년 10월 양주군이 의정부읍으로 승격되었다. 1919년 3월 13일 미금면민들의 독립만세시위를 비롯하여 각 면민들이 봉기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고장이 배출한 근대의 인물로는 1905년 을사조약에 분격하여 자진한 조병세(趙秉世), 의병운동을 전개하다가 순국한 의병장 하상태(河相泰) 등이 있다.
〔현 대〕 1946년 연천군의 남면이 양주군에 편입되었고, 1950년 6ㆍ25사변 때 수동면을 무대로 활약한 대한민국백혼대(大韓民國白魂隊)의 반공활동은 특기할 점이다. 1963년 1월 1일 이담면이 동두천읍으로, 의정부읍이 시로 승격되었다.
이 때 화도면의 3개 이(운수ㆍ송천ㆍ지둔)와 진접면의 1개 이(수산), 그리고 가평군 외서면의 3개 이(입석ㆍ외방ㆍ내방)가 병합되어 수동면이 신설되었다. 또한, 노해면과 구리면의 5개 이(묵동ㆍ중화ㆍ상봉ㆍ신내ㆍ망우)가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다. 1973년 7월 1일 구리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79년 5월 1일 미금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0년 4월 1일 구리ㆍ미금 2개 읍과 별내ㆍ진접ㆍ진건ㆍ수동ㆍ화도ㆍ와부의 6개 면, 68개 이가 분리되어 남양주군이 신설되었는데, 이 때 별내면의 고산ㆍ산곡의 2개 리가 의정부시에 이속되었다. 이 해 12월 1일 와부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3읍 5면이 되었고, 1983년 2월 15일 진건면의 양지ㆍ오남ㆍ팔현의 3개 이가 진접면에 편입되었다.
1986년 1월 1일 구리읍이 시로 승격 분리되었고, 4월 1일 와부읍 조안출장소가 조안면으로, 퇴계원출장소가 퇴계원면으로 각각 승격되었다. 1989년 1월 1일 미금읍이 시로 승격 분리되었고, 4월 1일 진접면이 읍으로, 1991년 12월 1일 화도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이듬해 4월 1일 진접읍 오남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95년 1월 1일 도농통합에 따라 미금시와 남양주군이 통합되어 새로운 남양주시가 되었으며, 5월 6일 양지ㆍ오남ㆍ팔현의 3개 이가 오남면으로 승격되었다.
나. 남양주시 유물ㆍ유적
한강유역에 위치한 이 고장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화도읍 금남리 고인돌에서는 빗살무늬토기ㆍ민무늬토기조각이, 퇴계원면 퇴계원리의 고인돌에서는 빗살무늬토기가 각각 나왔으며, 조안면 진중리 고인돌 중 3기에서 간돌도끼ㆍ간돌화살촉ㆍ빗살무늬토기ㆍ민무늬토기ㆍ방추차 등이 출토되었다.
지금동ㆍ가운동ㆍ삼패동에서도 돌화살촉ㆍ홈도끼〔有溝石斧〕 등이 출토되었고, 수석동ㆍ가운동ㆍ와부읍 도곡리에서도 선사주거지가 발굴되었으며, 도농동에서는 선돌이 발견되었다.
미금시가운동지석묘(加雲洞支石墓,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80호)는 기반식 지석묘로서 주변에서 돌화살촉들이 수습된 바 있고, 수석동의 수석리토성(경기도 기념물 제94호)은 백제 초기의 토성으로서 그 일대에는 선사시대부터 집단거주한 흔적이 발견된다.
불교문화재로는 진접읍 부평리에 봉선사(奉先寺), 별내면 덕송리에 흥국사대웅보전(興國寺大雄寶殿,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6호), 와부읍 월문리에 묘적사(妙寂寺), 조안면 송촌리에 수종사(水鍾寺) 등의 사찰이 있다.
봉선사 경내에는 봉선사대종(보물 제397호), 수종사 경내에는 수종사부도유물(보물 제259호)ㆍ수종사오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호)ㆍ남양주수종사부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7호), 진건면 송능리에 봉인사부도암사리탑(보물 제928호)등이 있다.
불교관련 전적류로는 별내면 화접리 불암사(佛巖寺)에 석씨원류응화사적책판(釋氏源流應化事蹟冊板, 보물 제591호)ㆍ불암사경판(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3호)등이 있다.
능묘로는 금곡동에 홍릉(洪陵)ㆍ유릉(裕陵)(사적 제207호), 진접읍 부평리에 광릉(光陵, 사적 제197호), 내각리에 순강원(順康園, 사적 356호), 장현리에 영빈묘(寧嬪墓, 사적 제367호), 부평리에 휘경원(徽慶園, 사적 제360호), 송릉리에 광해군묘(光海君墓, 사적 제363호), 진건면 사릉리에 사릉(思陵, 사적 제209호), 송릉리에 성묘(成墓, 사적 제365호)ㆍ안빈묘(安嬪墓, 사적 제366호) 등이 곳곳에 있다.
또한, 조안면 능내리에 정약용선생묘(경기도 기념물 제7호), 화도읍 창현리에 흥선대원군묘(興善大院君墓, 경기도 기념물 제48호), 별내면 덕송리에 덕흥대원군묘(德興大院君墓, 경기도 기념물 제55호), 조안면 시우리에 유량(柳亮)선생묘(경기도 기념물 제78호), 와부읍 덕소리에 김상용(金尙容)선생묘(경기도 기념물 제99호)ㆍ김상헌(金尙憲)선생묘(경기도 기념물 제100호)가 있다.
또한 도곡리에 이맹현(李孟賢)선생묘(경기도 기념물 제114호), 화도읍 차산리에 이순지(李純之)선생묘(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4호), 조안면 능내리에 한확(韓確)선생신도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7호) 등 역사적 인물들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고가옥으로는 진접읍 내곡리에 여경구가옥(呂卿九家屋, 중요민속자료 제129호), 평내동에 궁집(중요민속자료 제130호)이 있다. 이밖에도 수동면 지둔리에 계명주(鷄鳴酒, 경기도무형문화재 제1호)와 별내면 덕송리에 덕릉마을산신각(경기도 민속자료 제9호)이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진접읍 부평리에 광릉크낙새서식지(천연기념물 제11호), 오남면의 양주양지리에 향나무(천연기념물 제232호)가 유명하다.
그 밖에도 와부읍 월문리에 묘적사팔각칠층석탑, 삼패동에 김육(金堉)선생묘 및 신도비, 화 도읍 녹촌리에 능원대군(綾原大君)신도비, 평내동에 의안대군사당(義安大君祠堂), 별내면 화접리에 남재(南在)선생묘 및 신도비가 있다.
또한 와부읍 도곡리에 박원종(朴元宗)선생묘 및 신도비, 별내면 청학리에 남선(南銑)선생묘 및 신도비, 수석동에 조말생(趙末生)선생묘 및 신도비 등이 있으며, 진건면 용정리에는 고려 말의 공신 변안렬(邊安烈)선생의 신도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