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지안시(집안시)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에 세겨진 1775자의 글 내용은 고구려의 건국신화 내용과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세겨져 있다.
주몽은 중국의 역사서 "위서"에 주몽이라 기록되어 있고, 후한서에는 구려후 "추"라고 기록하고 있다.
강의 신 하백의 딸 유화, 그리고 천제의 아들 해모수
주몽은 어머니 하백의 딸 유화와 아버지 천제의 아들 해모수 사이에서 하늘의 빛으로 임신하고 유화의 옆구리에서 낳은 알에서 태어났다고 건국신화는 기록하고 있다.
기원전 37년 20대초반에 동부여를 떠난 주몽과 일행이 남으로 내려와 졸본 오녀산성에서 건국한 고구려는 20년이 지나 스스로 하늘의 부름을 받고
주몽이 (나이40대) 하늘로 승천했다고 신화에서 기록하고 있다. 신화는 신비롭게 만든 이야기 일뿐
실제 역사를 감추는 수단이기도 하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어떠했을까?
제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주몽 또는 구려후 "추" 라고 불린 주몽은 유방이 세운 전한의 황제 한무제가 선대 황제 경제가 합의한 흉노와의 조약
화해서를 파기하고 전쟁을 선포한다.
한무제는 곽거병과 왕망 등과 흉노토벌에 일생
40여년간에 걸쳐 흉노와 전쟁을 한다.
중국 대륙의 북서쪽 오초령을 넘어 하서주랑에
유목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흉노는 만리장성을 넘어 한족들을 약탈해 왔다. 하서주랑은 폭40~100km, 길이는 800km에 달하는 넓고 긴 초원을 이룬 지역이다.
한나라 황제 경제는 흉노와 화해하고 서로 침략과 약탈을 하지않고 조공을 받치고 흉노의 공주와 한 황제의 핏줄과 혼인을 통한 합의를 하였다.
그러나 흉노의 약탈이 계속되었고 한무제가 황제가 되자 합의를 파기하고 흉노토벌에 매진한다.
그렇게 전쟁은 계속되었고,
흉노는 휴도왕이 한무제의 곽거병에 잡혀 죽었고, 알씨 부인과 아들 일제와 윤은 생포되어 노예가 되었고, 달아난 흉노족들은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쪼개진다.
이때 휴도왕의 큰아들 일제(리디)가 생포되었고
한무제의 노예로 말을 돌보는 마부가 되었다.
후에 일제는 한무제에게 김씨 성을 하사받고 김일제는 한무제의 목숨을 구해준 댓가로 거기장군이 되었고 김일제는 죽기전 한의 제후인 투후라는 호칭을 받게된다.
한무제의 처가세력 왕망이 한을 멸하고 서기8년 즉 AD8년에 신나라를 세울때 흉노 출신 투후집안이 도와서 신나라 건국의 공신이 된다.
한무제에 의해서 전쟁에서 패한 흉노족은 결국
사방으로 흩어지고 흉노들 일부는 동으로 이동해 졸본 근처의 6부촌에서 살다가 6부촌장들이 모여 주몽을 추대하고 천연의 요새 오녀산성에서 건국을 선포하고 BC37년 국호를 고구려로 나라를 세운 것이다.
건국 신화에서 주몽이 동부여의 금화왕 밑에서 말을 돌보는 일을 하게되는 데, 이는 김일제가 한나라 노예로 말을 돌보다가 한무제를 죽이는 반란이 일어나고 이때 한무제의 목숨을 구해주는 은인이 되는데, 그 공으로 거기장군에 봉해지고 한무제는 김일제를 흉노토벌에 내보낸다. 김일제는 흉노 토벌에도 공을 세운다.
그래서 김일제는 한나라의 제후(죽기직전 투후)가 된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투후는 한나라의 제후로 왕과 같은 높은 관직이다.
그런데
한나라의 수도 시안에서 도망간 흉노의 왕족(당시 선우,칸)들은 동으로 동으로 이동해 살았기 때문에 주몽도 이때 부여국 쪽으로 도망갔던 것 같다. 한무제의 처남인 왕망이 동으로 도망간 흉노를 쫓아가서 결국 주몽은 왕망에게 잡혀 죽었다.고 후한서에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건국시기에 왕망이 한나라의 권력을 잡고 실세였고 신나라를 건국하기전의 시기가 일치한다.
흉노는 한나라의 토벌 대상이지만 투후가 된 김일제 집안은 흉노토벌에 앞장서 한의 제후가 되기도 했다.
그 뒤에 왕망은 한의 어린 영제를 몰아내고 AD8년 자신이 황제가 되고 나라를 "신"이라 했다. 그러나
왕망은 15년뒤 유방의 후손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유씨 광무제가 다시 한을 세워 후한 또는 동한으로 불린다.
이때 투후집안은 광무제의 추적을 피해 살기위해 동으로 도망치고 숨어 살다가 7대후손에 이르러 서해 바다를 건너 가야땅에 도착하고 투후라는 한의 제후이니까 나이가 많았던 김수로가 가야의 왕이 되었고 어린 알지는 신라로 가지만 석탈해의 차기 왕 제안에 거부한다. 그러나 알지의 6대후손
미추가 신라의 최초 김씨왕이 되었다.
왕망에 주몽이 살해 된때는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20년정도 지난 기원전17년 (BC17)경이고 주몽의 나이는 40대초반 이었다.
신라에 석탈해왕 제위때인 AD65년경 김알지가 신라에 왔고 그 시기와 비교하면 투후 집안이 산동반도에서 7대를 이어 살다가 신라로 오기 약82년전에 주몽이 사망한 것을 알수있다.
흩어진 흉노들 중에서 가장 강해서 살아 남았던 북흉노가 동부여 근처로 가서 고구려 건국을 했던 것이다. 지금의 북한의 북흉노의 피를 물려받아서 그런지 악날하게 전쟁준비에만 광분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싶다.
중국 집안(지안)시 소재 광개토대왕릉비 근처에 왕릉과 가까이 있다. 장수왕릉과 함께 모두 중국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어 직접 보니
마음 한 구석이 답답한 것이 남.북한 모두 옛 조상의 문화유산도 못 지키면서 서로 대치해서 전쟁하고 휴전중인 현재의 시국이 한심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