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유석근 목사의 '알이랑민족'의 위험성?
정윤석의 졸렬한 <알이랑민족> 비평 기사 [1]
兪昔根 목사
(알이랑코리아 대표, 한국기독교상고사학회 선임연구원, 알이랑교회 담임)
이단에 대한 정보를 집중적으로 취급하는 「기독○○○뉴스」라는 웹사이트가 있다. 같은 정보를 다루는 한 온라인 매체에서 소위 이단전문기자로 활동했던 정윤석이라는 인물이 2012년 가을 개설한 사이트이다. 말하자면 사원생활 접고 자영업을 시작한 것... 누구나 성장하는 것은 축하할 일이다.
기자들은 대부분 이른바 ‘특종보도’에 대한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 기삿거리가 없을 때에는 그러한 압박감이 더욱 상승한다. 왜? 소위 ‘특종’이라는 것을 한 건 날려야 위신이 서고 또한 존재감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기자들에게는 늘 사회적 쟁점이 필요하고 일부 악랄한 기자들은 조작을 해서라도 이슈를 부각시킨다. 그것을 단독보도라면서 마치 특종 기사처럼 대서특필 한다.
신문, 방송이나 온라인 매체가 뉴스를 보도하기만 해서는 시청률이나 조회수를 올리기 어렵다. 그래서 ‘특종’을 만들어야 하고, 뉴스를 알려만 주다가는 독자를 잃게 될 것 같아서 뉴스를 만든다. 심지어 조작까지 하면서 자극적이고 독특한 풀이를 하여 관심을 끌기도 한다.
정윤석 기자가 이러한 유혹에 빠진 것 같다. 그는 유석근 목사의 저서 <알이랑민족>을 위험한 사상이라고 매도하는 날조 기사를 자신이 운영하는 사이트에 올려 자칭 ‘이단사이비전문기자’로서의 존재감을 천하에 과시했다. “보라! 내가 누구냐? 17년 경력을 가진 ‘이단사이비전문기자’가 아니더냐!”
필자가 그의 기사를 읽어보니 정윤석은 유석근 목사를 여러 종류의 이단들과 엮어보려고 나름 심혈을 기울였다. 그렇게 해서까지 ‘이단사이비전문기자’ 행세를 해야 할까? 가히 애처로울 정도다.
정윤석이 유석근 목사를 위험한 사상가로 조작하려는 야비한 의도를 깔고서 기사를 작성했다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는 그가 비열하게 <알이랑민족>의 일부 내용을 전후문맥을 무시한 채 억지로 이단과 연루시키는 꼼수를 부렸다는 사실이 입증해준다. 그가 ‘아리랑’의 어원이 ‘알이랑’이라는 해석을 일부 무식한 교수들의 천박한 견해를 내세워 애써 부정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하겠다. “알이랑신학”의 키워드 중 하나가 ‘알이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전체적으로 내용이 궁색하고 심지어 유치하기까지 하다. 17년 경력을 자랑하는 기자가 작성한 논문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는다.
그래서 이 기사는 두고두고 정윤석의 얼굴에 먹칠을 가하게 될 것이다. 기사의 내용이 너무도 부실하고 졸렬하기 때문이다. 정윤석이 작성한 <알이랑민족> 비판 기사를 한 마디로 평가하자면 이렇게 규정할 수 있겠다. “졸렬하다!” 이제 정윤석이 어떻게 유석근 목사의 뺨을 때렸는지 그가 교묘하게 날조한 기사 내용을 자세히 분석해보겠다. 이 분석 기사는 본 사이트에 7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다.
졸렬함 No.1 - 알이랑 찬송가론에 대한 논박 없는 부정
어떤 학자가 발표한 새로운 연구 결과를 반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그러한 결과를 도출한 이론적 근거들이 오류가 있는지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왜 오류인지를 설명해야 한다. 즉 반론과 비평도 근거와 더불어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아니다’ ‘틀렸다’ 하면 설득력이 없다.
필자는 저서 <알이랑민족>에서 아리랑은 현존하는 인류 최고(最古)의 찬송가라고 설했명다. 그것은 근거 없는 자의적 해석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객관적이고 인문과학적인 논거들을 명료하게 제시했다. 그러므로 아리랑 찬송가론을 부정하려면 그러한 결론을 도출한 논증에 오류가 있는지를 조사해야 할 것이다. 그게 바른 순서다. 유석근 목사가 아리랑을 찬송가로 해석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 스테디셀러 <알이랑민족> 2001년 초판 표지
아리랑 찬송가론의 인문과학적 근거들
①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논하려면 종교적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배달 동이겨레는 하느님을 섬기던 제천민족(祭天民族)으로서 단순한 정치세력(민족, 국가)이 아닌 ‘종교적’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겨레는 다신숭배가 만연한 고대 세계에서 제천신앙으로 유일신 하느님을 숭배하던 독특한 민족이었다.
단군조선시대에는 제천의식이 북으로는 백두산에서, 남으로는 강화도 마리산 산정의 참성단에서 행하여졌다. 이 제천행사야말로 동이문화의 정수(精髓)이며, 우리 문화의 본성(本性)이다. 그러므로 동이의 후예인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도 종교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그 비밀이 드러날 것이다.
② 먼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아리랑은 한자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아리랑’이라는 한자가 기록된 책이 어디선가 고서(古書) 가운데 한 권이라도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도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리랑은 구전으로만 전래되어 온 순 우리말의 민요이기 때문이다.
③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다(알이랑=아리랑).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
그런데 오랜 세월동안 글이 없는 가운데 구전으로만 전승되다 보니,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로 부르게 되었고 결국 ‘알이랑’이 ‘아리랑’으로 고착되고 만 것이다. 그러니까 원래의 가사를 상실한 것! 따라서 아리랑이 진정 어떤 노래인지를 알려면 가사부터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로 복원해야 한다.
④ 아리랑의 비밀을 해석하는 열쇠, ‘연음법칙’
왜 본래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라는 가사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로 부르게 되었을까? 우리말의 발음에는 ‘연음법칙’이라는 음절의 연결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자음으로 끝나는 음절에 모음으로 시작되는 음절이 이어질 때 앞 음절의 끝소리가 뒤 음절의 첫소리가 되는 음운 규칙을 말한다.
예, “깊이→기피” “옷을→오슬” “책이→채기” “낮에→나제”
“벗이랑→버시랑” “가물어”→“가무러” “하늘이→하느리”
알이랑 → 아리랑 / 알알이요 → 아라리요
이제야 비로소 우리가 왜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요”가 아닌
“아라리요”라고 노래하고 있는지 그 의문이 해소되었다!
(지금까지 어떤 아리랑 연구가도 이 문제를 명확히 규명한 적이 없다.)
⑤ ‘알이랑’은 ‘알’과 ‘이랑’으로 구분된다. ‘알’은 ‘하느님’을 의미한다. ‘하느님’이라는 신명(神名)은 처음에 ‘알’이었다. 그런데 ‘알’ 앞에 ‘한’이라는 관형사를 붙이고, ‘알’ 뒤에 ‘님’이라는 존칭명사를 붙여서 ‘한알님’이라고 했다. 그것이 [한알님→하날님→하늘님→하느님]으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알’은 ‘하느님’이다. 창조주 하느님 곧 유일신을 뜻하는 원시 언어가 ‘알’이었다.
⑥ 유대인의 ‘엘(EL)’, 아랍인의 ‘알아(알라)’는 바로 이 ‘알’에서 소리바꿈 된 말이다(‘알라’는 아랍어로 하느님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인 아랍 사람들도 이 단어를 사용한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의 이름인 ‘엘로힘’(단수는 Eloah)은 ‘알라(alah)’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벌코프 조직신학 239쪽 * 크리스천 다이제스트 간). 즉 창조주 하느님(하나님)을 뜻하는 인류 최초의 신명(神名)이 ‘알’이었다. 이 ‘알’이 ‘엘(EL)’의 어원인데, 노아에 의해 홍수 이후의 세대로 전해졌다.
⑦ ‘이랑’은 ‘~와 함께’라는 토씨로서(언어학자들은 ‘토씨’는 6천년 이상 간다고 한다) 영어의 ‘With’이다(예, 갑돌이랑=갑돌이와 함께, 갑순이랑=갑순이와 함께). 그러므로 ‘알이랑’은 “하느님과 함께”(With God)라는 말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 겨레가 잃어버린 아리랑의 원의(原意)이다.
서울 강남의 차병원에서 개최된 학술대회에서
“아리랑의 원의”라는 주제로 유석근 목사가 발제강의를 하고 있다.
⑧ 왜 ‘알’이 유일신 하느님을 뜻하는 말이었을까? ‘알’이 수많은 생명을 낳기 때문이다. 쌀도 볏알(볍씨)에서, 과실도 씨알에서 생기고, 하늘과 땅과 바다의 허다한 생물들이 또한 ‘알’에서 탄생한다. 그래서 ‘알’은 ‘모체(母體)’요, ‘근원(根源)’이요, ‘시작(始作)’과 같은 뜻을 갖는다. 따라서 창조주 하느님(하나님)도 ‘알’이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만물의 모체이시고 근원이시며 시작이시기 때문이다.
⑨ 다만 우리 겨레는 그 ‘알’이 ‘큰 모체’이시고 ‘큰 근원’이시며 ‘커다란 시원(始原)’이시기에 ‘알’ 앞에 ‘한’이라는 관형사를 붙였다. 또한 그 ‘알’이 인격적 존재이심으로 ‘알’ 뒤에 ‘님’이라는 존칭어미를 붙였다. 그래서 창조주 유일신을 ‘한알님’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 ‘한알님’이 [한알님→하날님→하늘님→하느님]으로 변했다. 그러므로 ‘알’은 ‘엘(EL)’과 동의어로서 하느님을 뜻하는 말이다.
⑩ 고구려, 신라 그리고 가야의 지도자들이 모두 ‘알’에서 탄생했다는 이른바 ‘난생설화’(卵生說話)가 있다. 박혁거세가 큰 알에서 나왔다는 것, 주몽이 알의 껍질을 깨고 나왔다는 것, 김수로왕이 알에서 뛰쳐나왔다는 것은 모두 그들이 ‘한알님’의 자손 곧 천손(天孫)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태어난 사람이란 뜻이다. 바로 이것이 난생설화 이면에 숨어 있는 진정한 의미이다.
▲ ‘알’에서 나온 신라 시조 박혁거세
난생설화의 주인공들이 말 그대로 알에서 태어났다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유치한 발상이다. 실제로 알에서 태어날 수는 없다. 그렇게 파악하기보다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손 즉 천손(天孫)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난생설화는 시조의 탄생에 신적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이야기이다.
⑪ 더욱이 ‘하늘’은 둥글어서 ‘알’인데, ‘하늘’이라는 말도 처음에는 ‘한알’, 즉, ‘큰 알(大卵)’이었다. 한알→하날→하늘로 변한 것이다. 만물을 내신 한알님(하느님)은 한알(하늘)에 계신다. ‘큰 알(大卵)’, ‘큰 모체(母體)’, ‘큰 근원(根源)’ 같은 뜻으로서의 ‘한알’에 ‘하늘’이라는 말의 기원이 있다.
⑫ ‘알’이라는 것은 우리 조상들에게 있어서 사물(事物)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시작’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커다란 시원(始原)’으로서의 ‘알’이 곧 한알→하날→하늘로 된 것이다. 그러한 하늘(한알)이었기에 삼라만상(森羅萬象)은 곧 당신의 것이었다. 당신이 낳으시고, 당신이 기르시고, 또 당신이 주재하시는 것이었다. 홍수 전 사람들이 창조주 유일신을 ‘알’이라고 불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⑬ 하느님을 뜻하는 성경 원어 ‘엘(EL)’은 바로 이 ‘알’에서 소리바꿈 되어 나온 말이다. ‘엘’은 ‘다스리는 이’, ‘강하신 분’이란 뜻을 가진 신명(神名)으로 셈어(Shemitic)에서 전반적으로 사용된 ‘하느님’ 또는 ‘신성(Divinty)’에 관한 호칭이다. 이 ‘엘’은 바로 ‘알’의 변음이다.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알’이라고 불렀다. 이 ‘알’이라는 단어는 창조주 하느님(하나님)을 뜻하는 일종의 원형 언어로서 노아에 의해 홍수 이후의 세대로 구전되었다. 저명한 조직신학자 벌코프는 다음과 같이 썼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의 이름인 ‘엘로힘’(단수는 Eloah)은 ‘알라(alah)’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벌코프 조직신학 239쪽 * 크리스천 다이제스트 간). 즉 ‘엘’보다 ‘알’이 먼저였다. ‘엘’은 ‘알’의 변음이다.
⑭ 종교철학자 오강남 교수(캐나다 리자이나 대학)는 그의 저서 ‘길벗들의 대화’에서 ‘알다’는 동사가 ‘알’에서 나왔음을 가르쳤다. 알은 천지창조의 모태였다. 또 알의 열림 혹은 깨어짐은 밝음의 시작이었다. 실로 ‘알’(하느님)을 ‘앎’(지식)이 가장 큰 ‘앎’이다! 하느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큰 지식이다.
⑮ 한국인의 무덤은 동그란 모양의 봉분인데 그것은 ‘큰 알’(大卵=한알)을 뜻한다(경희대 국문학과 서정범 교수의 강의). 셈의 후손으로서 ‘한알님’께 제사지내며 삶을 영위했던 한국인의 선조들은 스스로 천손민족(天孫民族), 즉 ‘한알님’의 백성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죽음이란 ‘한알’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덤이 동그란 모양의 ‘알’인 것이다. 그들은 ‘한알님’의 백성으로서 ‘알’에서 왔으니 ‘알’로 돌아가고자 했다. 실로 한국인은 ‘알이랑 정신’으로 살고 죽는 ‘알이랑 민족’이 아닐 수 없다.
▲ ‘알이랑민족’의 무덤 양식은 ‘한알’
필자는 이상과 같이 인문과학적 논거들을 제시하면서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며, 그 의미는 “하느님과 함께”(with God)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에 오류가 있나? 아전인수격 주장인가? 유 목사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했나? NO! 아리랑이 찬송가라는 해석은 고증학적 근거 자료들이 풍부하다.
그러므로 아리랑이 찬송가라는 필자의 해석을 그릇된 이론이라고 반박하려면 그러한 결과를 도출한 이상의 논증들이 무엇이 왜 오류인지를 먼저 바르게 설명하라. 그래야만 반론이 설득력을 갖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정윤석이 작성한 기사에는 논박 없는 비평과 억지 주장만 가득할 뿐이다.
신학 교수라는 몇 사람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지만 그들은 황당하고 무식한 소리만 했을 뿐이다. 수긍할 만한 반론을 제시한 학자는 아무도 없다. -뒤에서 자세히 지적하겠지만 정윤석이 자문을 구한 신학 교수들은 우리 문화와 사상에 대해서는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자들이다- 결국 정윤석은 타당한 근거도 없이 알이랑 찬송가론을 위험한 사상이라고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도 논문인가?
알이랑이 찬송가인 이유
앞서 설명한 바처럼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으로서 그 의미는 “하느님과 함께”(with God)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는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이요”라는 뜻이고(with God, with God, with God, just God),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는 가사는 “하느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 간다”라는 뜻이라고 해석했다(accompany with God, I will cross over the mountains).
그리고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는 가사에 나오는 그 ‘고개’란 우리 조상들이 대홍수 후 동방으로 천동(遷動)할 때 넘어 온 고개들 곧 “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이라고 설명했다. 이것은 유석근 목사가 소설을 쓴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이 알타이에서 왔다는 것은 역사학자들도 인정하는 것이다. 더욱이 필자는 그것이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해주는 일종의 물증으로서 다음과 같은 ‘언어유물’도 제시했다:
“파미르고원을 지나(支那) 사람들은 총령(蔥嶺: 파총, 재령)이라고 하는데, 이는 한국어 파(蔥) 마루(嶺) 그대로 파마루(파미르)이다. 지리학에서도 역시 파미르고원(蔥嶺)에서는 파(蔥)가 많이 야생한다고 한다. 파미르고원은 ‘파마루’로서 파(蔥)가 많이 자생하는 산마루(嶺)이기에 파마루(파머루) 고원인 것이다. ‘파미르’의 어원이 한국어 ‘파마루’이다.
한국인은 남자를 사내라고 한다. 사내는 원래 ‘산아이’가 [산아이→사나이→사내]로 변한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고대에 산지, 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을 넘어 동방으로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어적인 연관성은 한국인이 참으로 아득한 옛날 ‘파미르고원’을 넘고 ‘천산산맥’을 넘고 ‘알타이산맥’을 넘어서 동방으로 이동해 왔음을 가르쳐주는 하나의 고고학적 증거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아리랑’은 대홍수 후 창조주 하느님을 섬기던 고대 한국인이 이 땅에 오기까지 수많은 산과 언덕과 고원들을 넘어 오면서 부른 ‘찬송가’였다고 해석했다. 따라서 우리 겨레의 전통 민요 아리랑은 현존하는 인류 최고(最古)의 찬송가라고 했다. 그러므로 아리랑은 당연히 ‘세계무형문화유산’이며 7천만 한민족의 노래만이 아니라 70억 세계인의 노래가 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아리랑이 찬송가라는 해석은 이상의 논증과 같이 고증학적으로 풍부한 증거들을 갖고 있는 것이다.
< 하나님과 함께 알이랑 - 왕성교회 성가대 찬양 동영상 보기 >
< 오페라타 길선주 중에서 강명숙 교수의 독창과 합창 알이랑 듣기 >
▲ 예수원 유석근 목사 <알이랑민족> 특강 (2009-12-23)
성경의 본질적 진리를 훼손했나?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아리랑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성경의 본질적 진리를 훼손했는가? 그러한 내용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유석근 목사는 한국인으로서의 주체적 입장을 갖고, 성경의 본질적인 진리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복음을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에 맞게 기도하며 연구했을 뿐이다. 바로 그것을 <알이랑민족>이라는 제목의 도서로 출간한 것이다. 이것은 필자가 부여받은 사명이다. 예수원 설립자 대천덕 신부님(성공회)은 한국교회를 향해 이렇게 도전한 바 있다:
“우리가 선교사들에게서 전수받은 성경 해석은 서양의 입장에서 해석한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한국사람 자신의 내부로부터 우러나오는 복음과
한국과의 새로운 대결을 통해서만
기독교가 한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많은 열매를 내릴 수 있다는 점을 깊이 생각해볼 때이다.
오직 이런 대결을 통해서만 예배가 진정 한국인 자신의 예배가 될 것이며,
성경이 진정 한국인 자신의 성경이 될 것이다.
이것은 한국 문화와의 진지한 대화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한국의 참된 주체성을 발견하는 문제인 것이다.”
< 대천덕, 「대천덕 신부와의 대화」, 생명의 샘터, 1987, pp.71~72 >
< 대천덕, 「우리와 하나님」, 도서출판 예수원, 1988, p.161 >
서구 신학을 그대로 베껴서 전달하는 게 전부인 한국교회 신학자들이 경청해야 할 말씀이다. 그들은 구미 신학자들을 천혜의 보스처럼, 멘토처럼 따른다. 다만 백인들의 신학을 열심히 카피해 가르치기 바쁘다. 서구 신학을 영주 내지 종주로 모시고 섬기는 봉건시대 하인 같다. 비유컨데 돈키호테의 뒤를 따르는 산초 같다. 언제까지 이럴 것인가? 이것은 영적 사대주의일 뿐만 아니라 문화적 사대주의다.
유석근 목사의 <알이랑신학>은 대천덕 신부님의 메시지에 잘 부합한다. 그것은 실로 성경의 본질적인 진리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한국 문화와의 진지한 대화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한국의 참된 주체성을 찾아낸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알이랑민족>이 스테디셀러 도서가 된 이유다.
그러므로 “한국인으로서의 주체적 입장을 갖고, 성경의 본질적인 진리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복음을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에 맞게 연구하라”고 장려하면서, 동시에 아리랑에 대한 필자의 연구를 타당한 증거도 없이 성경의 권위를 훼손했다고 비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어떤 인물일까?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인간이라고 규정해야 할 것이다. 정윤석이 작성한 기사에 그런 위인이 보인다.
『<아리랑신학>(대한기독교서회刊)의 저자 정행업 교수(대전신대)는 “한국인으로서의 주체적 입장을 갖고, 성경의 본질적인 진리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복음을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에 맞게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연구하는 것은 권장하고 싶다”고 전제하면서 “그러나 아리랑의 의미가 ‘하나님과 함께’라는 것은... 성서의 권위를 희석시키고 저하시키는 것이다”고 비판했다.』
정행업 교수가 실제로 이런 말을 했다면 그는 자가당착에 빠진 것이다. 그의 발언은 ‘자체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아리랑’의 어원이 ‘알이랑’이며, 그 의미는 ‘하느님과 함께’라는 해석이 성경의 권위를 희석시켰다? 정 교수의 말은 옹졸하고 비겁하며 위선적이다. <알이랑민족>은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킨 바 없으며 성경의 본질적 진리를 조금도 훼손하지 않았다. 어디에도 그런 내용이 없다. 유석근 목사의 <알이랑신학>은 대천덕 신부의 말씀에 부응하는 하나의 건실한 주체적 토착화 신학이다. 정행업 교수의 개풀 뜯는 소리 같은 언사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지적하겠다.
필자는 근거 없이 아리랑 찬송가론을 발표한 것이 아니다. 앞서 기술한 바처럼 인문과학적 근거들을 분명히 제시하였다. 그러므로 아리랑 찬송가론을 부정하려면 그러한 해석을 도출한 논증들이 무엇이 왜 오류인지를 먼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정행업 교수는 수긍할 만한 반론의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그냥 아리랑의 의미가 ‘하느님과 함께’라는 해석이 성경의 권위를 훼손했다는 독선적 주장만 했을 뿐이다. 학자로서의 양심과 자질에 저으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 교수는 과연 <알이랑민족>을 읽어보기나 하고 그렇게 비판적인 견해를 표명했을까? 그렇지 않다는 의혹이 있다. 그는 제3자로부터 ‘알이랑’에 대해 요점 정도만 가볍게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억지 주장과 표리부동한 행동이 입증해주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시 확인할 것이다. 문제는 정윤석 역시 <알이랑민족>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알이랑민족>을 읽어본 적도 없는 인물들이 그 도서의 핵심 내용을 비평했으니 말이다.
▲ <알이랑민족> 개정판 1쇄 표지 (2005년)
읽지도 않은 책을 비판한다며 펜대를 굴린 정윤석
정윤석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며 쟁점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이 맞으려면 아리랑의 ‘알’이 성경이 계시하는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인가에 대해 입증이 가능해야 한다. 그래야 찬송가일 수 있지 않을까? 만일 ‘알’이 ‘하늘에 계신 옥황상제’라는 개념이라면, 또는 이슬람의 신 ‘알라신’의 개념이라면 이는 찬송가일 수 없다.”
옳다! 아주 타당한 지적이다. 그런데 이 기사는 정윤석이 <알이랑민족>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함부로 펜대를 굴렸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알이랑민족> 244~282쪽에는 우리 조상들이 섬긴 ‘한알님’(한알님~하날님~하늘님~하느님)이 성경에 계시된 유일신 하느님(하나님)과 동일한 신이셨음을 입증해주는 자료들이 분명히 수록돼 있기 때문이다. 두 개의 장으로 책에 편집된 그 원고들은 본 사이트 「알이랑 코리아」에도 전부 게시되어 있다. 아래에 링크한 제목들을 클릭하면 읽을 수 있다.
< 성경의 하느님과 일치하는 민족경전의 유일신 하느님 사상 >
< 성경에 계시된 삼위일체 하느님과 동일한 한민족 고유의 삼위일체 하느님 사상 >
< 고대 한국인의 삼위일체 유일신 신앙에 관해 기록한 ‘표훈’의 정체 >
< 셈 ․ 수메르 ․ 코리아 >
위에 링크한 자료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 조상들이 고대에 숭배한 하느님은 성경에 계시된 유일신 하느님과 동일한 존재이셨다. 정윤석은 <알이랑민족>을 읽지도 않고서 오만과 편견에 가득 차 함부로 펜대를 굴리며 유석근 목사를 모욕하고 <알이랑신학>을 매도했다. 어떻게 타인의 저서를 읽지도 않고 그 책의 내용을 비평할 수 있나? 그것은 일종의 폭력이다. 이래도 되는가? 이런 인물에게 기자 호칭을 붙여주는 것이 합당한지 의문이다. 기자는 확실한 팩트를 갖고 기사를 써야 한다.
정윤석이 제시한 3류 신학교수들의 천박한 견해들
① 김진태 교수
위에 링크한 자료들을 정독한 성도들은 다음과 같은 김진태 교수의 견해가 얼마나 무지몽매한 소리인지 갈파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기독교가 전래되기 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하나님이란 개념은 성경적인 유일신 개념과는 거리가 먼 개념이었다. 우리 고어의 한알 혹은 한울에서 유래한 것으로 우주를 큰 알로 본 것이며 우주 자체를 신격화한데 지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이야기하는 조물주의 개념과 한알(울) 님의 개념은 별개의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한알(울)님의 개념은 타민족들에게도 있었던 흔한 개념이다. 조물주의 개념은 기독교적인 개념으로 기독교와 함께 우리말에 들어온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김진태, <창세기에 관련된 오해 (3): 한민족이 아브라함의 후예인가?>, 얼라이언스대학원 소논문, 2002년 10월).
이 인용문은 정윤석이 아리랑 찬송가론을 비판하고자 그의 기사에 삽입한 것이다. 김진태 교수는 이 논고에서 자신의 학문적 깊이가 얼마나 얕은지 드러냈다. “기독교가 전래되기 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하나님이란 개념은 성경적인 유일신 개념과는 거리가 먼 개념이었다” “조물주의 개념은 기독교적인 개념으로 기독교와 함께 우리말에 들어온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김 교수가 갖고 있는 이러한 인식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 조물주 하느님의 개념은 외래사상의 영향을 받기 전에 우리 겨레가 민족 내적으로 이미 지니고 있었던 한민족 고유의 사상이었다. 한국교회가 2천년 교회사에서 유례가 없던 대부흥이 일어난 가장 큰 요인도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김진태 교수가 어느 대학 교수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제자들이 가련할 뿐이다. 제자는 스승을 닮기 때문이다.
대체로 그리스도인들은 고대에 유일신 하나님을 알고 섬겼던 사람들은 오직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인 유대민족 뿐이었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기독교가 전래되기 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하나님이란 개념은 성경적인 유일신 개념과는 거리가 먼 개념이었다... 조물주의 개념은 기독교적인 개념으로 기독교와 함께 우리말에 들어온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생각한다”는 김진태 교수의 주장도 실은 그러한 인식이 저변에 깔려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입견은 조속히 깨져야 할 아주 그릇된 고정관념이다. 왜? 아브라함 이전 시대와 동시대에 유일신 하나님을 알고 섬기던 이방인들이 엄연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 귀한 이방인들은 누구일까? 아래 제목을 클릭하면 자세히 알 수 있다.
결국 정윤석은 김진태 교수의 무식한 글을 ‘알이랑’을 비판하겠답시고 창피한 줄도 모르고 용감하게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우리 겨레의 고대 역사와 뿌리정신에 관해 30년 이상 연구하고 있다. 또한「한국기독교상고사학회」라는 학회의 선임연구원으로도 20년 째 활동하고 있다. 관련 분야에 많은 자료와 정보를 갖고 있는 필자가 볼 때 정윤석이 작성한 <알이랑민족> 비평 기사는 그 내용이 전체적으로 졸렬하고 너무도 부실하다. 기사 수준이 무명 대학 학보사의 견습기자가 쓴 글 같다.
② 허호익 교수
편견과 오만으로 가득한 정윤석의 ‘헛발질’은 김진태 교수의 글을 인용한 실수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며 그 의미는 “하느님과 함께”라는 뜻이라는 필자의 해석에 대해 허호익 교수(대전신대)에게 비평을 구한 모양이다. 그리하여 <알이랑민족>을 매도하려고 작성한 자신의 논문에 허 교수의 황당한 견해도 한 가지 더 추가하는 잘못을 범하고 말았다. 아래 기사가 그것이다.
『허호익 교수(대전신대)는 아리랑의 ‘알’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상에 대해 “평소 한국사상에 관심이 많아 ‘알이랑’에 대해 들어본 바가 있었다”며 “그러나 ‘아리랑이 하나님과 함께를 의미한다’는 해석은 성경과는 관계없다”고 지적했다. 허 교수는 “한국 신화에 ‘알’이 많이 나오는데 그 대부분이 천신이 아니고 지신, 땅의 신”이라며 “물론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개념이 있다 해도 한국인의 ‘알’은 농사와 관계된 개념이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정윤석은 자기처럼 필자의 저서를 제대로 읽지도 않은 인물에게 자문을 구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허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평소 한국사상에 관심이 많아 ‘알이랑’에 대해 들어본 바가 있었다.” 들어본 바가 있었다? 허 교수는 ‘들어본 바가 있었다’고 토로했다. 필자의 저서 <알이랑민족>을 읽은 적은 없고 단지 ‘들어본’ 수준이라면 허 교수는 ‘알이랑’에 관해 비평할 자격이 없다.
<알이랑민족>은 16쇄가 리프린트된 스테디셀러다. 출간 이래 매년 두 번씩 재판되고 있다. 그만큼 읽은 성도들이 많다는 뜻이다. 그래서 허 교수도 ‘알이랑’에 대해 누군가로부터 들어본 적이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허 교수는 다음과 같이 그저 요점만 간략히 들었을 개연성이 크다.
“유석근이라는 목사가 아리랑에 대해 이렇게 해석했다... 아리랑은 원래 ‘알이랑’이다. 알이랑은 ‘알’과 ‘이랑’으로 구분된다. ‘알’은 하느님’(God)을 의미한다. ‘이랑’은 ‘~와 함께’(with)라는 토씨이다. 그래서 ‘알이랑’은 ‘하느님과 함께’(with God)라는 뜻이다... 그래서 아리랑은 찬송가다...”
‘알이랑’에 관한 지식이 귀동냥으로 들은 이 정도가 전부였다면 허호익 교수는 ‘알이랑’에 관한 비평을 사양해야 옳았다. 필자의 저서를 읽지 않았다면 ‘알’의 개념 및 ‘알이랑’의 의미에 대한 심도 있는 지식이 당연히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허 교수는 결례를 범한 것이고 아주 경솔한 행동을 한 것이다.
<알이랑민족>의 독자들은 ‘하느님’의 어원이 ‘한알님’이라는 사실을 비롯해 -한알님~하날님~하늘님~하느님- ‘알’에 관한 인문학적 지식과 이해의 폭이 크게 증대될 것이다. 그러나 허 교수는 그 책을 읽은 적이 없다. 그러니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아래와 같이 무식하고 황당한 소리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 신화에 ‘알’이 많이 나오는데 그 대부분이 천신이 아니고 지신, 땅의 신이다.” “물론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개념이 있다 해도 한국인의 ‘알’은 농사와 관계된 개념이다.”
‘알’이 대부분 천신이 아니고 지신, 땅의 신이라고? 허 교수의 이런 주장은 궤변이 아닐 수 없다. 그가 ‘하늘’이라는 말의 어원이 ‘한알’, 즉 ‘큰 알(大卵)’이었다는 것 하나만 알았어도 이런 무식한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늘’은 둥굴어서 ‘알’이다. ‘하늘’이라는 말은 처음에 ‘한알’, 곧 ‘큰 알(大卵)’이었는데, 한알→하날→하늘로 변한 것이다. 즉 ‘알’이 지닌 개념은 땅(地)이 아니라 하늘(天)인 것이다!
그러므로 ‘알’은 성경의 ‘엘’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곧 ‘알’은 ‘천신’(天神) 즉 창조주 하느님을 의미하는 일종의 원시 단어였다. 이 ‘알’에서 ‘엘’도 ‘얼’도 소리바꿈 되어 나온 것이다. 높은 분의 말씀을 뜻하는 ‘왈’(曰)도 ‘알’에서 파생된 말이다. ‘알’(한알님)은 가장 높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를 의미하는 단어 ‘일’(1)도 바로 ‘알’이 어원이다. ‘알’은 유일신으로서 오직 하나(1)이기 때문이다. 즉 ‘알’에서 ‘엘’ ‘얼’ ‘왈’ ‘일’ 등의 단어들이 전부 가지쳐 나왔다. 이와 같이 ‘엘’은 ‘알’의 변음이다.
만약 ‘알’이 천신(天神)이 아니라 지신(地神)이라면 우리 역사에서 난생설화(卵生說話)라는 것은 아예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앞서 설명한 바처럼 고구려, 신라, 가야의 지도자들이 모두 ‘알’에서 탄생했다는 난생설화는 모두 그들이 ‘한알님’의 자손 곧 천손(天孫)이라는 말이다. 즉 자신의 시조가 천신(天神)의 자손이라는 것을 과시하여 권위를 부여하려고 만들어진 것이 난생설화였다. 그러니까 난생설화의 모티브가 된 것이 바로 천신사상인 것이다. 이래도 ‘알’이 대부분 지신(地神)이란 말인가?
난생설화의 예증으로도 입증되듯 ‘알’이 천신(天神)이 아니고 지신(地神)이라는 허 교수의 주장은 극히 몰상식한 말이다. 그는 알지도 못하면서 박식한 체 한 것 같다. 관련 분야는 전공과목도 아니고 전문적인 식견도 없으면서 말이다. 허 교수는 우리 문화와 사상에 관해 더 깊이 연구하기 바란다.
한편 정윤석 기자는 허호익 교수가 아리랑이 ‘하나님과 함께’를 의미한다는 해석은 ‘성경과는 관계없다’고 지적했다고 썼다. 천만에 말씀이다. 허 교수의 이러한 발언 역시 성경을 잘 모르는 자의 단견이다. <알이랑민족>을 정독한 적이 없다는 허 교수가 이런 주장을 할 자격은 전혀 없다.
‘알이랑’은 성경과 엄연히 관계가 있다. 왜? 우리 겨레의 성경상의 조상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던” 셈의 현손(玄孫) 욕단이었기 때문이다(창 10:21~30). 에벨의 자손인 욕단의 가계는 형인 벨렉의 가계와 더불어 셈족 중에서도 선택된 특별한 종족이었다(창 10:21). 그러므로 에벨의 혈통인 이 두 계열은 셈족을 대표하는 족속으로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 거룩한 종족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대홍수 후 가장 먼저 산맥(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을 넘어 동양으로 이주한 족속이 벨렉의 아우인 욕단의 가계였다는 것이다(창 10:30). 그런고로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 종족답게 ‘알이랑’ 곧 ‘하느님과 함께’라는 유일신 신앙을 갖고서, 고개 즉 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이라는 ‘산지’를 넘어 동방의 새 땅(새파르=새바르=새발=새벌=스발)으로 멀리 천동(遷動)했다. 그리고 마침내 광명의 본원지인 동방 땅 끝에 도달하여 유일신 하느님께 천제를 드리고 배달(밝달)나라를 세웠다. 그리하여 ‘제천민족’인 우리 배달겨레의 조상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알이랑’은 성경과 관계가 있다! ‘알이랑’은 우리 겨레가 셈의 현손(玄孫) 욕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외증(外證)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알이랑민족” 97~133쪽에 상세히 설명한 바처럼 욕단의 가계가 아라비아 남단에 정착하여 아랍 족속의 조상이 되었다는 서구주석가들의 해석은 오류다.) ‘알이랑’은 한국인의 조상이 욕단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외증(外證)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인류 최고(最古)의 찬송가 ‘알이랑’은 기록된 계시인 성경과 엄연히 관계가 있다.
알이랑이 ‘하나님과 함께’를 의미한다는 해석이 성경과 관계가 없다는 허 교수의 말은 “나는 성경(내증)도 모르고 역사(외증)도 모릅니다”라고 스스로 실토한 허 씨의 ‘무식 자랑’이다. <알이랑민족>을 정독한 적이 없는 허 교수는 ‘알이랑’에 대한 비평을 삼가야 옳았다. 그것이 학자의 도의다. 물론 그 책을 읽은 바 없는 허 교수의 천박한 소리를 교묘히 기사로 다룬 정윤석의 의도가 한층 더 나쁘다.
③ 정행업 교수
놀랍게도 정윤석은 <알이랑민족>을 읽은 적이 없는 또 하나의 인물에게 ‘알이랑’에 대한 비평을 요구하여 기사로 취급했다. 그는 허호익 교수와 같은 대학에 있는 대전신대의 정행업 교수. 과연 정 교수는 정윤석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아래는 정윤석의 기사에서 발췌한 정행업 교수의 궤변이다.
“아리랑의 의미가 ‘하나님과 함께’라는 것은 고증학적으로 매우 빈약하여 오히려 기독교인들에 대한 신뢰성과 성서의 권위를 희석시키고 저하시키는 것이다.”
아리랑의 의미가 ‘하느님과 함께’라는 해석이 고증학적으로 매우 빈약하다? 정 교수는 필자의 저서를 읽어보고 이런 폭언을 했나? <알이랑민족>을 읽은 성도들은 정 교수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즉각 알 것이다. 고증학적으로 빈약한 게 아니라 대단히 풍부하기 때문이다. 아리랑이 ‘하느님과 함께’라는 해석은 앞서 확인한 바처럼 여러가지 인문과학적 논증과 자료들로써 충분히 고증되었다. 그것은 객관적 이론이다. 그런데 고증학적으로 빈약하다? 정행업 교수는 국어도 독해가 안 되나?
어떤 이론에 대한 반론은 반드시 근거와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 교수는 그러한 상식적인 과정 없이 무조건 ‘알이랑’을 폄하하는 독선적인 말을 내뱉었다. 이런 인물이 진정 학자란 말인가?
필자는 정 교수 역시 허호익 교수처럼 ‘알이랑’에 대해 간략히 ‘들어본 바’ 만 있을 뿐, 직접 <알이랑민족>을 정독한 경험은 없다고 확신한다. 참으로 양심 있는 지성인으로서 이 책을 읽었다면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며, 그 의미는 ‘하느님과 함께’라는 뜻이다”는 해석을 고증학적으로 빈약한 이론이라고 결코 매도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왜인가? 아리랑 찬송가론은 인문과학적 논거들로써 철저히 고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실이다. 정 교수는 <알이랑민족>을 읽은 적이 없을 것이다.
민요 아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일은 누구보다 국어학자, 그리고 음악과 노래를 가르치는 음대 교수들의 과제일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8년 전 이화여대 음대학장인 주영자 교수로부터 ‘알이랑’에 대해 직접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대를 방문, 음대교수들만 모인 자리에서 아리랑의 원의에 대해 특강을 한 적이 있다. 그들은 아리랑의 어원이 ‘알이랑’며, 그 뜻은 ‘하느님과 함께’라는 해석을 객관성을 확보한 타당한 이론이라고 했다. 고증학적인 증거 및 자료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아리랑의 의미가 ‘하나님과 함께’라는 해석이 고증학적으로 너무 빈약해 기독교인들에 대한 신뢰성을 저하시킨다는 정 교수의 발언은 100% 거짓이고 독선적 주장이다.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며, ‘하느님과 함께’라는 뜻이다”는 해석은 객관적 근거를 확보한 이론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해석이 기독교인들에 대한 신뢰를 저하시킬 이유는 조금도 없다. 물론 기독교를 무조건 반대하는 안티 기독교 세력은 예외다. 현금 기독교인들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고 있다면 그 이유는 전혀 다른 데 있을 것이다. 타인의 저서를 자세히 읽지도 않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 정행업 교수는 학자도 지성인도 아니다.
정행업 교수의 친구이며 장신대 미주지역 총동문회장을 역임한 한화영 박사(트리니티신학대학교 대학원장)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알이랑민족>은 한국인이 또 하나의 성민(聖民)임을
‘외증(外證)’과 ‘내증(內證)’으로 증명한 역저이다.
....외증으로는 역사적, 지리학적, 고고학적, 과학적인 사실을
연역적이고 귀납법적인 방법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증거하고 있다.
예컨대 지금까지 불러온 민족의 노래 ‘알이랑’에
‘하느님과 함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것은 ‘외증(外證)’의 하나이다.”
정 교수는 “한국인으로서의 주체적 입장을 갖고, 성경의 본질적인 진리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복음을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에 맞게 어떻게 받아들일지 연구하는 것을 권장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기에 아리랑 찬송가론에 대한 정 씨의 근거 없는 폄하 발언은 치졸함을 넘어 아주 위선적이다.
정 교수의 독선적 견해와는 다르게 아리랑이 ‘알이랑’이라는 해석은 오히려 비교독교인 아리랑 연구가들로부터도 기존의 아리랑에 대한 어떤 해석보다 설득력이 있다는 평가를 종종 받고 있다.
한 가지 더 지적해야겠다. 성서의 권위를 희석시켰다고? 앞서 확인했듯이 아리랑의 의미가 ‘하느님과 함께’라는 해석은 성경의 본질적 진리를 조금도 훼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성경의 권위를 저하시킨 바 전혀 없다! 정 교수가 참으로 양심적인 학자라면 이런 억지 주장을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정행업 교수도 학자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인물이 대학교수라는 사실이 경이로울 뿐이다. 학자의 자질이 의심되는 정 교수의 궤변은 사실상 정윤석에게 더 큰 책임이 있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에게 거두절미하고 “아리랑은 어원이 ‘알이랑’으로서 그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라고 설명하는 목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간단히 질문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알이랑민족>에 수록된 전체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정 교수처럼 얼마든지 옹졸하게 답변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심지어 생뚱맞다고 반응할 수도 있겠다. 따라서 그러한 비평을 유도해 기사로 취급한 인간이 더 추악하다 할 것이다.
정행업, 허호익 교수와는 달리 포항 한동대의 라원기 교수, 명지대의 외래교수인 림헌원 목사는 <알이랑민족>에 수록된 내용으로 자신의 과목을 수강하는 학생들에게 강의를 했다. 미국 Faith Theological Seminary & Christian College, Genesis University 등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윤사무엘 박사 역시 <알이랑민족>의 핵심 내용을 소개하고 강의한다. 아래 제목을 클릭하면 확인할 수 있다.
< 자랑스러운 알이랑 민족 >
필자의 은사이신 신성종 교수(전 총신대 신학대학원장, 전 충현교회 담임)는 유석근 목사의 아리랑 찬송가론에 대해서 자신은 견해가 일치한다고 했다.
< 알이랑 찬송가론에 대한 신성종 교수의 평가(동영상) >
이 분들은 정행업, 허호익 교수보다 학적 수준이 떨어지는 분들일까? NO! 오히려 이 두 교수들보다 학문적 깊이와 지평이 더 깊고 훨씬 넓은 탁월한 학자들이다. 물론 정윤석과는 비교할 바도 아니다.
정행업, 허호익 교수는 모두 대전신대 교수들이다. 필자는 우리나라에 대전신대라는 학교가 있다는 사실을 정윤석의 기사를 통해 처음 알았다. 이 두 교수들은 필자로 하여금 대전신대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허나 정윤석은 이 대학의 교수들을 대단히 존중하는 모양이다.
▲ 스테디셀러 <알이랑민족> 의 달라진 표지
오만과 편견, 무례의 전형인 정윤석의 기사
한편 정윤석은 조롱하는 듯한 어조로 다음과 같은 질문도 던지고 있다. “만일 아리랑이 찬송가라면 아리랑에 종종 등장하는 ‘스리랑’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리고 ‘아라리가 났네’는 뭔가?” 질문하는 태도가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다. 딴지 걸기의 달인은 다 그런가? 모르면 겸손하게 가르침을 구하고 배워야 할 것이다.
‘아리랑’이 찬송가가 아니라 ‘알이랑’이 찬송가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는 원래 ‘알이랑’이었던 가사가 연음범칙에 의해 ‘아리랑’으로 굳어진 이후 한참 후대에 만들어진 가사로서 단순히 흥을 돋우는 조흥구, 여흥구일 뿐이다. 따라서 굳이 가사의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다.
관련 분야에 지식이 없으면 오만방자히 굴지 말고 해당 분야의 전문가에게 공손하게 질문해야 할 것이다. 그게 옳은 자세다. 아마 기독교 목사로서 필자 만큼 아리랑에 대해 오랜 시간 깊이 연구한 이들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아리랑은 우리 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이다. 이 아리랑에 관해서는 정윤석은 물론이고 그가 인터뷰한 교수들보다 유석근 목사가 월등히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갖고 있을 것이다.
결국 정윤석의 ‘알이랑’ 비판 기사는 객관적 설득력이 전무한 아주 졸렬한 기사다. 사실상 정윤석은 수긍할 만한 반론의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도 않으면서 아리랑의 어원이 ‘알이랑’이며 그 의미는 ‘하느님과 함께’라는 해석을 옹니부리기식으로 마구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논문이란 말인가?
이단사이비 문제를 집중 연구하는 ‘아레오바고 사람들’이라는 단체가 있다. 이단종파를 다루는 월간지 「현대종교」의 편집위원과 편집장을 장기간 역임한 이영호 목사가 대표로 있다. 그는 지금도 ‘사이비종교 피해대책연맹’ 사무총장으로서 ‘아레오바고 사람들’을 이끌면서 이단사이비집단을 척결하는데 힘쓰고 있다. 이영호 목사는 필자의 저서 <알이랑민족>에 대해 “잃어버린 민족의 뿌리와 정체성을 밝혀주는 도서로서 불신자 전도에도 큰 도움이 되는 귀중한 자료들이 수록된 책”이라고 평가했다. (필자는 ‘아레오바고 사람들’ 모임에 초청을 받아 아리랑의 어원은 ‘알이랑’이며, 그 뜻이 왜 “하느님과 함께”라고 해석되는지 강의도 했다. 또한 우리 민족이 셈의 현손(玄孫) 욕단의 후손으로 간주되는 근거들을 ‘내증(內證)’과 ‘외증(外證)’을 들어서 발표하고 질의응답의 시간을 가진 바 있다.)
침례신학대학의 원어교수를 역임한 김선기 목사(페트라성경원어연구원장)는 <알이랑민족>의 추천서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참으로 놀랍고 획기적인 책이다. 이 책을 처음 대했을 때의 감격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 지... 단재 신채호 선생님을 위시한 민족사관 학자들의 한국사를 오랫동안 탐구해 오던 나에게 유석근 목사님의 ‘또 하나의 선민 알이랑 민족’은 모든 것들을 단번에 정리시켜 주는 통쾌한 저서였다.”
성막론의 권위자 강문호 목사(갈보리교회)는 CTS에서 "아리랑은 인류 최고의 찬송가"라는 제목으로 연속 방송 특강을 했다. CTS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시청할 수 있다. 본 사이트에도 올려져 있다.
< 강문호(갈보리교회 담임) 목사님의 CTS 알이랑 특강 >
이 모든 분들이 정윤석이란 인간보다 우둔하거나 성경을 모르는 분들이 결코 아닐 것이다. 그들은 <알이랑민족>을 정독한 분들이다. 그러나 정윤석은 필자의 저서를 제대로 읽지도 않았다. 아마 알이랑 코리아 사이트에 익명으로 슬그머니 들어와서 일부 내용만 수박 겉 핧기식으로 훌터본 듯하다. 그런 빈약한 정보를 토대로 해당 분야에 전문적 지식도 없는 인물이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혀 필봉을 야비하게 휘두르며 유석근 목사를 모욕했다. “나 정윤석은 ‘이단사이비전문기자’가 아니더냐? 위험한 도서 <알이랑민족>을 쓴 유석근 목사를 배격해라! 내가 그의 책을 금서로 지정하노라! 오, 나 정윤석이 아니면 그 누가 한국교회를 지키랴!”
유석근 목사는 자기를 영웅인줄 착각한 돈키호테와 같은 인물로부터 어이없게 뺨을 맞았다. 두고 보라. 정윤석은 자신의 그 비열한 행위에 상응하는 대가를 반드시 지불해야 할 것이다.
이화여대 바른역사 연구회 주최 “한국 기독교 역사 바로잡기” 특강
(이화여대 포스코관/ 2012-05-22)
주제: “아리랑의 비밀과 한민족 고유의 유일신 신앙”
‘알이랑교회’라는 교회 명칭
필자는 예장합동 교단에 소속된 목사로서 현재 경기도 부천에서 목양사역을 하고 있다. 교회의 이름은 “알이랑교회”이다. 원래는 ‘상동중앙교회’였다. 경기도 부천의 신도시 ‘상동’에서 가장 중심가에 위치한 교회이므로 ‘상동중앙교회’라고 작명을 한 것이다. 그러나 수년 전 ‘하느님과 함께’(with God)라는 성스러운 의미를 지닌 ‘알이랑교회’로 전 성도들의 결의를 얻어 교회명칭을 변경했다.
그런데 필자가 소속된 예장합동 교단은 교회명칭을 변경하려면 반드시 ‘교회명칭변경신청서’를 노회에 제출하여 봄과 가을에 있는 노회의 정기회에서 허락을 받아야 한다. 노회의 허락 없이 지교회 차원에서 임의로 교회명칭을 변경할 수 없다. ‘교회명칭변경신청서’에는 교회명칭변경사유 및 명칭의 의미를 기재해야 한다. 우리 교회 역시 ‘알이랑교회’로 교회명칭을 변경할 때 이러한 과정을 거쳤다. ‘교회명칭변경신청서’를 미리 제출했고 노회의 상비부 조직 중 하나인 정치부에서 먼저 심사한 후 노회 정기회에 상정되어 합법적으로 ‘알이랑교회’로 명칭변경을 허락받았다.
물론 그들이 유석근 목사의 총신대 신학대학원 동기, 선후배라서 무조건 편든 게 아니다. 예장합동은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교단이다.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판단했으면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회에서는 아리랑의 어원이 ‘알이랑’이며 그 뜻은 ‘하느님과 함께’(with God)라는 해석이 과연 타당한지 검토했다. 그 후에 교회명칭변경을 허락한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이름은 “대한예수교 장로회 알이랑교회” 이다. 아마 이런 교회이름은 전국에서 아직 하나뿐일 것이다.
이렇게 <알이랑민족>의 저자 유석근 목사의 소속 노회는 ‘알이랑’을 교회명칭으로도 사용할 수 있음을 인정했다. 그런데 정윤석이 무슨 자격으로 필자가 소속된 예장합동 교단의 노회에서도 추인한 <알이랑신학>을 위험한 사상이라고 함부로 매도하는가. 타당한 논리적 근거도 없이 말이다. 소위 이단사이비전문기자로 활동 좀 한다고 무슨 위세 부리나? 그렇게도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은가?
“아리랑은 원래 ‘알이랑’인데 연음법칙으로 인해 ‘아리랑’으로 발음하게 된 것이다.
아리랑의 어원이 ‘알이랑’이다.
따라서 아리랑의 비밀이 무엇인지 찾으려면
가사부터 원래의 가사인 ‘알이랑’으로 복원해야 한다.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
‘알이랑’은 ‘알’과 ‘이랑’으로 구분된다.
‘알’은 하느님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어원이 ‘한알님’이다
(한알님~하날님~하늘님~하느님).
‘이랑’은 ‘~와 함께’라는 토씨이다(갑돌이랑=갑돌이와 함께).
그래서 ‘알이랑’은 ‘하느님과 함께’(with God)라는 성스러운 뜻이다.”
아리랑의 원의(原意)를 풀어준 이러한 해석은 기독교계 내부는 물론이거니와 기독교 밖에서도 아리랑에 대한 기존의 어떤 이론보다 타당성이 있는 해석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해석을 정윤석은 무조건 ‘아니다’라고 옹니를 보이며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까닭일까? 기사 목적이 유 목사를 위험한 사상을 가진 사이비 목사로 날조하려는데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졸렬하지 않은가!
※ 아래는 계속 연재될 기사의 소제목입니다.
< 졸렬함 No.2 - 한국인이 욕단의 후손이라는 대천덕 신부의 교훈을 왜곡, 부정한 정윤석의 꼼수 >
알이랑 코리아 제사장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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