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시기’ ‘덕시기’에 얽힌 사연들
(작성 중 ; ‘깔개’시리즈 4회)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는 ‘멍시기’와 ‘덕시기’라는 ‘깔개’가 있다. 표준어로는 ‘멍석’과 ‘덕석’을 말한다. '멍석'은 주로 곡식을 널어 말리는 데 쓰는 짚으로 엮은 큰 '자리'로 월여농가(月餘農歌)에는 ‘관도점(摜稻簟)’이라 표기되어 있다.
멍시기(멍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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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 따라서는 외동읍의 경우와 같이 ‘멍석’을 '멍시기'라고도 하고, ‘덕석’을 '덕시기'라고도 하나, '멍석'을 덕서기, 덕석, 턱성, 터서기라고 하는 지방도 있다.
일부에서는 '덕시기'는 '멍석'의 호남지방 사투리라고도 하는데, '멍석'과 '덕석'은 같은 것이 아니고, 그 용도에 있어 서로 다른 것은 사실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멍석’은 곡식(穀食)을 말리거나 사람이 앉거나 눕는 ‘깔개’의 한 종류이고, ‘덕석’은 소나 말의 방한용(防寒用) 옷으로 사용하는 ‘덮개’의 한 종류라 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멍석’은 사람이 자는 방에 깔 정도로 정갈하고 조밀(稠密)하게 짜는 ‘깔개’였고, ‘덕석’은 대충 엮어 겨울철에 소나 말의 등을 덮어 주는 ‘덮개’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깔개’는 사람이 앉거나 눕는 자리에 까는 물건을 말하고, ‘덮개’는 이불이나 처네(덧덮는 얇고 작은 이불), 홑이불 따위의 덮는 물건을 말한다. 따라서 '덕석(덕시기)'은 소나 말의 '이불'이라고 보면 된다.
멍석(멍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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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석'과 관련된 용어도 즐비하다. 먼저 ‘등멍석’은 ‘등덩굴’을 가느스름하게 쪼개서 엮어 만든 ‘멍석’을 말하고, ‘멍석딸기’는 장미과(薔薇科)의 덩굴성 갈잎떨기나무로 산기슭과 밭둑에 자생하며, 열매는 크고 달다.
‘멍석자리’는 자리로 쓰는 ‘멍석’ 또는 ‘멍석’을 깔아 놓은 자리를 말하는데, ‘콩멍석’은 콩을 널어놓은 ‘멍석’을 말한다.
‘멍석’은 예로부터 잔치나 상(喪)을 당했을 때 손님을 모시기 위하여 마당에 깔았고, 가난한 집에서는 장판이나 삿자리 대신 방바닥에 깔기도 했었다. 거친 일을 하는 머슴방이나 초당방(草堂房)에도 ‘멍석’을 까는 경우가 많았다.
삿자리를 깐 ‘초당방’이라도 그 집 머슴이 ‘멍석’을 짤 때는 시작단계에서는 짜던 ‘멍석’을 윗목으로 말아 치우고 잠을 잤지만, 절반 이상 짜졌을 때는 방바닥에 그대로 깔아두기 때문에 자연스레 ‘멍석방’이 되고 만다.
필자도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를 졸업한 뒤 초군(樵軍)의 삶으로 들어선 후에는 동네 ‘머슴방’에서 새끼 꼬고 짚신 삼으면서 ‘멍석방’생활을 3년여 경험한바 있다.
입실리(入室里) 새말 자취집에서 악동(惡童)들과 어울려 안동사범고등학교(安東師範高等學校) 진학을 실패한 후 완고하신 선친 앞 황토 흙 마당에 무릎을 꿇고, 이제는 앞뒤 쳐다보지 않고 성실한 ‘농부’가 되겠다고 다짐하고부터였다.
초당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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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멍석’ 위에서 어떻게 잠을 잘 수 있었느냐고 의아(疑訝)해 할 수 있으나, 당시의 서민(庶民)들은 처녀들이라도 삿자리 방에서 기거했고, 머슴을 비롯한 초군들은 ‘멍석방’에서 새끼를 꼬고 짚신을 삼다 피곤하면 구석에 밀어놓은 짚단을 베고도 숙면(熟眠)을 하곤 했었다.
어릴 때부터 삿자리와 ‘멍석방’에서 길들여진 체질(體質) 탓도 있었지만, 워낙 고된 농사일을 하기 때문에 맨땅이든 ‘멍석방’이든 눕기만 하면, 잠에 골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웃고 떠들고 음담패설(淫談悖說)을 늘어놓다 걸쭉한 탁배기 한 바가지씩을 나누어 마시면, 쩔쩔 끓는 초당방에서 한겨울에도 적삼을 벗어던지고 잠을 자고나면, 온몸에 ‘멍석무늬’ 도장이 굵직하게 찍히기도 했었다.
그 옛날, 그 시절 ‘멍시기’ 깐 동네 초당방(草堂房)에서 함께 웃고 뒹굴던 머슴친구들이 윗목에 밀어놓은 짚단을 베고 곤한 잠에 떨어지던 모습들이 지금도 눈앞 가득 펼쳐진다.
필자보다 한두 살씩 더 많았던 그들 머슴친구들은 이제 ‘멍석’ 대신 칠성판(七星板)을 짊어지고 모두들 또 다른 ‘멍석방’을 찾아 다시는 되 오지 못할 피안(彼岸)의 길로 떠나버렸다.
순진무구(純眞無垢)한 그들 머슴친구들은 비록 가난뱅이의 자식으로 태어나 불학무식(不學無識)한 무지렁이로 천대받으며 살다갔지만, 필자에게 있어서는 가장 절친하고 진솔한 친구들이었다. 필자가 평상시 ‘친구’라고 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들을 말한다.
그 시절 필자의 머슴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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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로 다소 굵은 새끼줄을 날고 가로로 짚을 엮어 나가던 ‘멍석’짜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었다. 한 장을 짜려면 능숙(能熟)한 사람이라도 1주일은 걸린다.
필자는 짧은 초군생활(樵軍生活) 때문이기도 했지만 ‘멍석’은 짜보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고 말았다. 사랑방에서 아버지께서 짜시던 ‘멍석’의 일부를 시험 삼아 짜보기는 했었다.
‘멍석’은 대개 직사각형(直四角形)으로 만들지만 둥근 것도 있으며, 둥근 것 중에는 ‘맷방석’이라 하여 맷돌질을 할 때 까는 것도 있다.
맷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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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들아, 비 온다 ‘멍시기’ 말어라.” 굵은 빗줄기가 후드득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하면 텃밭에서 일하던 아낙들은 급한 마음에 애들부터 부른다. 곧이어 한걸음에 마당 앞까지 줄달음친다.
다 마른 곡식이 물에 젖을 새라 사색(死色)이 된 얼굴이다. 재빠른 손놀림으로 마당과 고샅에 깔린 ‘멍석’을 추녀 밑 축담으로 옮긴다.
아이들은 비가 오는지 바람이 부는지 딴청을 부리면서 그저 놀기에 바쁘다. 어머니로부터 ‘꿀밤’ 한 대씩을 얻어맞고 나서야 급박(急迫)함을 알아차린다.
멍시기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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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잠시 지난 1989년 KBS 창작 동요대회(童謠大會)에서 입상(入賞)한 ‘멍석놀이’ 가사를 일별해 본다.
멍석놀이
작곡 : 홍사인
작사 : 이은집
노래 : 김현정
야, 저 건너 앞산에 노루비 몰려온다
멍석말자 멍석말자 고추멍석 말자
푸르른 하늘에 뭉게구름피더니
우르릉 꽝꽝 번개 번쩍 천둥소리
첨지덕 마당에 술래잡던 아이들
저마다 집으로 허둥 지둥 뛰어가며
야, 저 건너 앞산에 노루비 몰려온다
멍석말자 멍석말자 고추멍석 말자
멍석말자 멍석말자 고추멍석 말자
야, 등 넘어 뒤산에 여우비 그쳐간다
멍석 널자 멍석널자 참깨멍석 널자
먹물 빛 하늘에 빗줄기가 그치니
눈부신 햇님 방긋 웃고 나타나네
큰 사랑 마루에 공기 놀던 아이들
또다시 집으로 허위단숨 달려가며
야, 등 넘어 뒷산에 여우비 그쳐간다
멍석널자 멍석널자 참깨 멍석 널자
멍석널자 멍석널자 참깨 멍석 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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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깨 널어놓은 멍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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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사회(農耕社會)에서 ‘멍석’의 쓰임새는 너무나 다양했고, 곡식을 거둬들여 건조(乾燥)시키는 유일한 도구이기도 했었다. 때문에 ‘멍석’의 숫자로 가세(家勢)를 가늠하던 시절도 있었다.
‘멍석’은 곡식 건조용(乾燥用)만으로 쓰는 도구는 아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사람을 ‘멍석’에 둘둘 말아 몽둥이로 때리는 ‘멍석말이’에도 요긴(要緊)하게 이용되었다.
당시의 ‘멍석말이’는 세도가(勢道家)에서 하인이나 상민에게 가하던 사형(私刑)제도의 하나였고, 마을에서는 촌락사회의 규범을 위배한 자를 ‘멍석’에 말아서 매를 때리는 자치적 사회통제(社會統制) 방식의 하나로 ‘덕석말이’라고도 했다.
멍석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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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지은 사람은 ‘멍석말이’를 당한 후에 자신의 죄과(罪過)를 마을사람들에게 사과한 다음에 풀려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관습은 공서양속(公序良俗)의 일탈적(逸脫的) 행위를 제재하여 마을의 질서(秩序)와 규범을 유지시키는데 그 의의가 있었다.
‘멍석말이’의 방법은 지방(地方)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개의 경우 사람을 ‘멍석’에 둘둘 말아 얼굴을 땅 쪽으로 향하도록 엎어놓고, 지게 작대기로 볼기를 두들겨 패는 방식이었다.
얼굴이나 하초(下焦)가 위쪽으로 향하게 두고 매질을 하면 얼굴이나 가장 중요한 하초를 다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볼기가 위쪽으로 향하게 엎어 놓고, 볼기에 매질을 하곤 했었다.
옛적에 관아(官衙)에서 죄인에게 시행하던 태형(笞刑)도 죄인을 형틀에 엎어놓고 볼기에만 매질을 했다.
태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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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가 큰 장정이나, 죄질(罪質)이 나쁜 경우에는 ‘멍석’으로 말아놓고, 물을 흠뻑 뿌려 매질을 했었다. 물을 뿌리면 통증(痛症)이 거의 배에 달하도록 심했다고 한다.
우리들의 선대(先代)들이 ‘멍석말이’를 지역사회의 형벌(刑罰) 제도로 채택한 데는 깊은 의미의 배려가 숨어있었다.
‘멍석말이’는 우선 범법자(犯法者)의 전신과 얼굴을 ‘멍석’으로 말았기 때문에 누가 자기에게 매질을 하는지를 알 수가 없다.
자신에게 징벌(懲罰)을 가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게 하여 맞은 사람이 보복(報復)을 받거나 원한을 싸지 않게 함으로써 징벌자의 신변을 보호(保護) 받게 해 준 것이다.
멍석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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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에서는 머리까지 멍석 속에 말아 징벌자를 알지 못하도록 한다)
징벌이 끝나면 징벌을 가한 장정들이 모두 귀가(歸家)한 후에 촌장이 ‘멍석’을 풀어주고, 징벌에 참여하지 않은 노인들과 부녀자(婦女子)들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사죄(謝罪)하도록 함으로써 징벌자의 신변안전과 사죄의 진정성(眞正性)을 함께 제고(提高) 되도록 한 것이다.
당시의 ‘멍석말이’는 주로 남녀 간의 교제(交際)에 있어 남성이 일방적(一方的)으로 휘두르는 성폭력(性暴力)이나 그 미수행위가 발단이 되곤 했었다.
같은 집에서 이십여 년 간 종살이를 하면서도 끝내 속마음을 몰라주는 ‘점순이’를 ‘먹쇠’가 억센 힘으로 겁탈(劫奪)이라도 하게 되면, 주인은 어김없이 ‘멍석말이’로 다스렸다.
먹쇠와 점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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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멍석말이’ 감이다)
그리고 이 경우 ‘먹쇠’는 반드시 ‘점순이’를 아내로 맞아 백년해로(百年偕老)를 하도록 했다. 때문에 옛적에는 마음에 드는 처녀가 있으면 일단 일을 저질러 놓고 보자는 식이었고, 상대방 처녀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
‘멍석말이’를 당하여 몰매를 한 번 맞고 꿇어 앉아 용서(容恕)를 빌면 사모(思慕)하던 사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청상(靑孀) 과부의 이불 밑을 기어든 ‘난봉꾼’의 경우도 그 집 가족들에게 발각되면, 어김없이 동네사람들이 합세(合勢)하여 ‘멍석말이’의 중형(重刑)으로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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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석말이’와는 달리 세시풍속(歲時風俗) 놀이로서의 ‘덕석말이’라는 놀이도 있었다. 가을에 농촌에서 곡식을 말리는 데 쓰이는 ‘멍석’을 말았다 풀었다 하는 동작(動作)을 흉내 내는 놀이로 ‘덕석몰이’라고도 한다. 물론 여기에서의 ‘덕석’은 ‘멍석’을 말한다.
‘덕석말이’ 놀이의 형식에는 ‘덕석몰기’와 ‘덕석풀기’가 있다. ‘덕석몰기’와 ‘덕석풀기’는 ‘덕석’을 말고 푸는 동작을 흉내 낸 동작으로, 전자는 원무대형(圓舞隊形)을 감아나가는 동작을 말하고, 후자는 감았던 원무대형을 풀어나가는 동작을 말한다.
덕석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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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석말이’ 놀이에서 부르는 노래는 ‘자진모리’ 또는 빠른 ‘중중모리’ 장단으로 부른다. ‘멍석’을 말고 푸는 것처럼 대형(隊形)을 좁혀나가는데, 풀 때는 뒤쪽부터 풀어야 된다.
다른 방법으로는 앞 사람이 말뚝처럼 박히고, 맨 끝 사람부터 실타래 감듯 말아 들어가는 방법도 있다. ‘자진모리’ 가락에 맞춰 놀이꾼 전원이 서로의 몸을 부딪치며 하나의 ‘덕석’을 말아감으로써 친밀감(親密感)과 일체감을 느낄 수 있다.
덕석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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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악(農樂)의 진법과도 비슷한데, 강강술래 놀이 중에서는 제일 역동적(力動的)인 놀이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농악에서는 ‘달팽이’처럼 말아 들어간다고 해서 ‘달팽이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에서 잠시 ‘덕석말이’에서 부르는 노래가사 한 자락을 음미하고 넘어간다.
덕석말이 노래
몰자몰자 덕석몰자 비온다 덕석몰자
비야비야 오지마라 딸밭에 장구친다
몰자몰자 덕석몰자 비온다 덕석몰자
풀자풀자 덕석풀자 비갠다 덕석풀자
풀자풀자 덕석풀자 볕난다 덕석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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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의 ‘멍석’은 그 용도가 무궁무진(無窮無盡)하기도 했었다. 잔칫집이나 상가(喪家)에서는 마당과 골목 어귀에 깔아 손님을 받았고, 전통 혼례(婚禮) 때는 ‘멍석’ 위에서 신랑신부(新郞新婦)가 맞절하는 의식을 치렀다.
초례청 멍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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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喪主)와 슬픔을 나누기 위해 밤을 지새우는 문상객(問喪客)들도 ‘멍석’ 위에서 술판과 화투판을 벌였다.
명절(名節)이나 농한기면 마을 앞 광장이나 여염집 마당에서 윷판용으로도 애용(愛用)되었다. 누더기가 된 ‘멍석’ 위에 쑥이나 풀잎으로 ‘말금’을 그려 넣고 종지에 넣은 윷가락을 하늘높이 치켜 올리곤 했었다.
멍석 윷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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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생활 곳곳에서 ‘판’을 벌일 때 꼭 등장(登場)하는 것이 멍석이었다. 그래서인지 ‘멍석’은 요즘도 먹고 마시는 업종의 상호(商號)에 부지런히 등장하기도 한다.
‘멍석골 보신탕집’ ‘멍석촌음식점’ ‘멍석마당’ ‘멍석마루’ 등 넉넉함과 정겨움을 풍기는 이름들이 거리와 유원지(遊園地)마다 듬성듬성 매달려 있다.
그뿐이랴. 전래되는 속담(俗談)에도 ‘멍석’이 자주 등장한다. “하던 지랄도 ‘멍시기’ 피주머 앤한다(하던 지랄도 ‘멍석’ 펴 놓으면 안한다)”는 말은 “하던 일도 더욱 잘하라고 떠받들어 주면 안 한다”는 뜻이다.
“가아지 메주 ‘멍시기’ 맽긴 거 같다(강아지 메주 ‘멍석’ 맡긴 것 같다)”는 말은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 중요(重要)한 일을 맡겨 불안(不安)하다는 의미다.
짚이나 새끼를 촘촘히 엮어서 만드는 ‘멍석’은 긴 공정상(工程上) ‘사랑방 문화’를 만들어 낸 매개체(媒介體) 구실도 했다.
시골집 사랑방에서 삼삼오오 모여앉아 ‘멍석’을 삼으면서 긴긴 겨울밤을 지새우며 정담(情談)을 나누던 시절을 말한다.
멍석 엮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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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은 산업기술(産業技術)의 발달로 품과 시간이 많이 드는 ‘멍석’을 대신해 플라스틱류 등의 화학제품(化學製品)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때문에 지금은 민속박물관(民俗博物館)에나 가야 ‘멍석’을 볼 수 있는 정도다.
잔칫집이나 술판에 으레 깔리던 ‘멍석’이 추억(追憶)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속도(速度)와 경쟁하듯 살아가는 우리네 마음의 여유(餘裕)를 되돌아 보게 하는 물건들이다.
여기에서 잠시 박현희가 노래하는 ‘여름밤에 얽힌 추억’을 음미하고 넘어간다.
여름밤에 얽힌 추억
박현희
아파트 빌딩 숲 너머로
까만 밤하늘에 총총히 떠있는
은빛 영롱한 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노라니
문득 어린 시절 여름밤에 얽힌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네요.
구수한 흙냄새 솔솔 풍기는
너른 마당에 볏짚으로 짜놓은
커다란 멍석을 깔고
엄마 다리를 베게 삼아 다소곳이 누워
마치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
까만 밤하늘을 예쁘게 수놓은
반짝이는 별을 하나 둘 헤던 밤.
개구쟁이 동무들과 어울려
어둠 속을 헤엄치는 반딧불이 찾아
동네 어귀를 한 바퀴 돌고 나면
어느새 빈 유리병에 가득 담긴
반짝이는 반딧불이 어찌나 신비롭던지
밤이슬에 바짓가랑이 함초롬히
젖는 줄도 몰랐답니다.
동그랗게 모아쥔 작은 두 손에
가득 채운 반딧불이를 만지작거리며
마냥 즐겁고 행복해하던 순수한 어린 시절
여름밤에 얽힌 아름다운 추억은
어느덧 중년에 접어든
도심 속 오늘의 내 정서를 밝혀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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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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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의 ‘멍석’은 그 위에 그득히 곡식(穀食)을 널고 햇볕에 말리는 일을 담당했고, 잔치나 상(喪)을 당했을 때나 굿판 등 큰 행사 때는 마당에 깔아 놓고 많은 사람들이 앉도록 했다.
옛적의 ‘멍석’은 또 농민(農民)들에게 있어 푸근함과 즐거움의 대명사(代名詞)이기도 했었다.
풍년(豊年)이 든 한해 농사를 여러 개의 ‘멍석’에 가득히 널고, 이를 바라보는 농심(農心)의 푸근함은 한 해 동안 얽히고설킨 모든 시름들을 잊기에 충분했었다.
곡식 넌 멍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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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이들에게는 때로 귀찮은 존재(存在)가 되기도 했었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곡식(穀食)을 말릴 때 ‘멍석’으로 접근하는 닭 쫓기는 아이들의 몫이었다.
논밭으로 일을 나가시는 어른들은 몇 번이고 “달 잘 바라(닭 잘 봐라)”라고 신신당부(申申當付)를 하지만, 놀이에 정신이 팔린 아이들은 금방 잊어버리고 만다.
‘멍석’ 위에 널린 곡식을 포식한 닭들이 놀이 삼아 곡식(穀食)을 멍석 바깥으로 파헤치면, 그때사 아이는 닭을 쫓는다.
그러나 닭들은 도망가지도 않고, ‘멍석’ 안을 뱅뱅 돌며 아이와 술래잡기를 벌인다. 닭도 아이는 별수 없다고 생각한 탓이다.
단체 멍석 엮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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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난 아이는 신발을 신은 채 ‘멍석’위로 뛰어들지만, 닭은 푸드득 푸드득 날개 짓을 하며 오히려 곡식(穀食)을 사방으로 흩어 버린다.
옛적 서민들의 ‘멍석’은 가난한 삶의 상징(象徵)이기도 했었다. 흉년(凶年)으로 입에 풀칠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되면, 어머니께서 피죽을 쑤기 위해 손이 부르트도록 훑어온 피를 말렸고, 아버지께서 하루 종일 찬물로 배를 채우시며 벗겨 오신 송기껍질을 말리기도 했었다.
‘피쌀’의 원료인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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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멍석’만큼 온 가족을 행복(幸福)하게 하는 것도 없었다. 여름철,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 모깃불을 피우고 마당 한복판에 ‘멍석’이 깔리면, 온 식구가 모여 앉아 행복하고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어른들은 농사일에 밀린 삼삼기와 새끼 꼬기 등 밤일에 바빴고, 심심한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옛날이야기를 졸랐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는 차례로 호랑이 이야기며 몽달귀신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멍석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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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푼 몽달귀신 이야기에 아이들은 등골까지 오싹해 하면서도 밤마다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웃집에 마실을 가기도 했었다. 한여름 동안 이어지던 시골집 아이들의 납량특집(納凉特輯)이었다.
‘멍석’ 옆에 피워둔 모깃불이 잦아들면, 옥수수를 뜯다 잠이 든 아이들의 가무잡잡한 종아리에 모기들이 넘나들었고, 삼태성(三台星)이 서쪽 하늘로 기울어지면, 어른들도 ‘멍석’ 위에 하나 둘 쓰러져 잠이 들었다.
이처럼 그 시절의 깔개로 요긴(要緊)하게 쓰이던 ‘멍석’, 그러나 이제는 비닐류 등이 보편화(普遍化)되면서 본래의 역할은 빛을 잃은 채 더러는 태워지고 버려졌으며, 일부는 고전 한식점이나 유흥업소(遊興業所) 등에서 바닥 장식(裝飾)으로 이용되고 있다.
멍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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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소수(極少數)는 마을 사람들의 윷놀이에 들려 나와 숯검정으로 윷판이 그려져 잠깐잠깐 이용되고 있고, 일부는 아직도 시골집 마굿간 ‘더금’ 위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햇빛조차 보지 못하고 쌓여 있기도 하다. 여기에서 다시 이동순의 ‘멍석’을 잠시 음미해 본다.
멍 석
이동순
우리 마실 멍석쟁이 고타관씨 솜씨는
아마도 이 땅에선 겨룰 사람이 없을 걸
겨울 해 노루꼬리만큼 짧은 날도
고타관씨는 열 날을 하루같이
흙방 멍석틀 앞에 앉아서
덜커덩덜커덩
짚으로 새낏날 도톰히 감고
촘촘한 맵씨로 걸어가는데
자기말로 목포서
두만강까지 갈 거라는구먼
펴면 마당 말아 세우면 굴뚝
추운 날 쇠등에 덮으면 쇠덕석
콩 고추 우케 널어 말릴 때는 널개멍석
똑같은 연장을 두고
덕석 다르다느니 멍석 다르다느니
굳이 이편저편 갈라놓으려는
저 엔간한 사람들 속을 알다가도 모르겠네
한 번만 멍석자리 둘러앉아
살아갈 걱정 함께
도란도란 해보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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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옛적과 같은 추위가 없다. 사실 지구 온난화(溫暖化)란 말이 나와서가 아니라 최근에는 예전 보다 그리 혹독(酷毒)하게 추운 겨울을 격어보지 않은 것 같다.
옛적의 추위는 김장독이 얼어 깨지고, 문밖의 오줌독이 얼어 깨질 정도였다. 지금보다 공기(空氣)가 맑고 물이 맑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공기와 물은 그만큼 오염(汚染)이 많이 되어있고, 때가 묻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추위에는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動物)들이 힘겨운 추위와 싸워야 했다. 불 때는 쇠죽솥에서 김이 올라 뜨끈뜨끈한 쇠죽을 기다리는 외양간 암소가 내뿜는 허연 콧김까지 고드름이 되던 시절이었다.
옛말에 사람은 발이 따듯하면 잠을 잘 자고, 개는 코가 따듯해야 잠을 잘 자고, 소는 등이 따듯해야 잠을 잘 잔다고 했다.
그래서 외양간의 소에게는 밤마다 ‘덕석’을 덮어주고 흘러내리지 않도록 ‘뱃대끈’으로 묶어주곤 했었다.
쇠덕석
![](https://t1.daumcdn.net/cfile/cafe/1450B00E4CDBFDE403)
그리고 이런 일은 거의가 아이들의 몫이기도 했다. 때에 따라서는 소의 뒷발에 걷어채어 혼이 나기도 했었지만, 어른들은 아이들과 소와의 친숙(親熟)함을 쌓도록 하기 위해 가급적(可及的)이면 아이들에게 ‘덕석’을 씌워주도록 지시를 내리셨다.
여름이면 그 소를 몰고 이산 저산을 돌아다니며, 소맥이기를 다녀야 했기 때문에 미리 아이와 소의 사이를 돈독(敦篤)하게 해야 할 필요성(必要性)이 있었기 때문이다.
헌 이불 쇠덕석
![](https://t1.daumcdn.net/cfile/cafe/1203352F4CDC03E21C)
예나 지금이나 닭들은 어미닭이나 병아리를 막론(莫論)하고 ‘멍석’에 널어놓은 곡식을 쪼아 먹는다.
그리고 쪼아 먹은 곡식으로 배가 부르면, 그냥 나가지 않고 남은 곡식을 ‘멍석’ 밖으로 놀이삼아 파헤쳐 낸다.
배부르게 쪼아 먹었으면 고마운 마음에서라도 얌전히 물러가야 상식(常識)인데, 심술을 부리듯 남은 곡식까지 ‘멍석’ 밖으로 파헤쳐 흙투성이를 만드는 것이다.
병아리
![](https://t1.daumcdn.net/cfile/cafe/1558DF324CDC042E25)
이러한 병아리들의 예쁘듯 못된 버릇은 오랜 옛적부터 전래(傳來)된 것으로 시인 양경우(梁慶遇)는 이들 병아리들의 모습을 한 폭의 정겨운 풍경화(風景畵)로 묘사하고 있다. 양경우의 ‘村事’를 음미하면서 파일을 접는다.
枳殼花邊掩短扉
餉田邨婦到來遲
蒲茵朜穀茅畩靜
兩兩鷄孫出壞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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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자나무 울타리에 낮은 사립 닫아걸고
참을 내간 아낙네는 돌아올 줄 모르네.
멍석에 나락 쬐는 추녀 밑은 조용한데
병아리는 짝을 지어 울 틈새로 나온다. |
시의 운치(韻致)를 잠시 되새겨 본다. 길 가던 나그네는 목이 말라 물이라도 한잔 얻어 마실까 싶었겠다.
길가 집은 번듯한 담장도 없이 가시 많은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둘러쳤다. 들여다봐도 인기척이 없다.
주인 아낙은 참을 내러 들에 갔는지 낮은 사립을 비스듬히 닫아걸었다. 처마 밑 양지녘에는 ‘멍석’을 깔고 갓 거둔 곡식을 말리려 널어놓았다. 고요하다.
어디선가 무슨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주인 없는 빈집 터진 울타리 사이로 병아리 떼가 뿅뿅뿅 짝을 지어 나서고 있다. 오랜만에 마음 놓고 포식(飽食)을 해 볼 참이다.
까치발을 하고 주인 없는 담장 안을 들여다보는 시인(詩人)과 천연덕스럽게 삐약대며 곡식을 향해 약진(躍進)하는 병아리 떼의 행진(行進)이 읽는 이의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멍석을 둘러싸고 엮어지는 평화와 풍요(豊饒)의 마당이라 할 수 있다.
곡식 먹는 병아리 떼
![](https://t1.daumcdn.net/cfile/cafe/19578B304CDC046D52)
여기에서도 마땅한 배경음악이 없어 본문과 별로 부합(符合)하지는 않지만, ‘옛날’과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정진성의 ‘청포도 고향’을 게재(揭載)하여 음미하고자 한다.
이 노래는 필자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기 전 술 마시고 춤출 때 애창(愛唱)하던 노래 중의 하나였다. 지금은 찬송가(讚頌歌)가 아닌 대중가요는 듣기는 해도 입에 올리지는 않는다.
청포도 고향
정진성 노래
청포도 익어오는 우물가 샘터는
수줍은 아가씨가 기다리던 곳
못 잊어서 찾아온 고향 그 사람은 떠나고
청포도 송이송이 옛날이 그립구나
청포도 우물가는 어여쁜 아가씨가
붉그래 수줍어서 미소 짖던 곳
그리워서 돌아온 고향 그 아가씬 떠나고
청포도 송이송이 옛 시절 그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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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희 마을에서는 주로 덕시기라고 했지요...잔치를 할때는 온 동네 덕시기 다 빌려다 쓰기도 했고....비 설거지 할때 덕시기 치우는게 보통 일 아니었지요..ㅎㅎㅎ
참으로 추억어린 얘기가 가득 찼네요...멍석말이를 각오하고...좋아하던 처녀을 건드리는 마음을 요새 아이들은 이해할수 있을 런지...ㅎㅎㅎ그러고 보면 옛날 연해 하는 풍습이 더 낭만적인거 같기도 하고...
요오님은 안동사범 실패한것 오히려 잘된것 아닌가요? 나도 '체신고'에 실패경우에 대비하여 안동사범시험준비하고 있다 ;체신고(특차)에 합격했다는 전보 받고 사범학교 시험치러 가지 않았지요... 그때 인생이 바꿨지요.. 다행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요오후배의 전통문물연구가 집대성되어 보존되었으면 좋겠는데, 요즘 이런것 책으로 내면은 팔리지는 않을것이라, 국가차원에서 보존하는 방법을 연구해야될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