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행어사 박문수 묘 답사,
1,일 시 : 08 ,7 , 12. 10 ;-- 12 : 30
2,위 치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면 은지리 산 1- 1번지
3,답사자 : 덕초 장승민 @ 진솔 김진욱 4,사 진 설명
사진 1) : 사진에서 보이는곳이 천안시병천면 아우내장터이고,
날씨가 맑은날씨에는100리거리인 청주 시내가 보인다.
또한 묘소가 명당(장군지지) 라고 하는데 군사가 없으므로 아우내 장터로 군사를 상징한다는 전언도 있슴.
사진 5) : 장군석의 특징
장군석은 위엄과 근엄함을 표현함이 일반적이나
본 장군석은 해맑은 웃음을 띄고 있어 찿는 이들에게 웃음을 주고 있음이 특징이다.
※ 참 고
★ 암행어사 박문수의 생애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 본관은 고령(高靈). 1723년(경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로 뽑혔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기용되자 사서(司書)에 등용되어 영남암행어사로 나가 부정
한 관리들을 적발했고, 1730년 충청도에 암행어사로 나아가 굶주리는 백성의 구제에 힘썼다. 1734년 예조참판으로 있을 때 진주사(陳奏使)의 부사(副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1737년 병조판서가 되었고, 병조판서의 인신(印信)과 이군
색(二軍色)의 인신을 만들어 줄 것을 주청하여 성사시켰다. 1742년 병조판서로 있을 때 지리적 여건으로 봉군(烽軍)의 충원이 어려운 북도(北道)에 각지방에서 정배(定配)된 봉무사(烽武士)로써 변통할 것을 주청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1749
년 호조판서, 1750년 수어사(守禦使)를 거쳐 1751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1753년 우참찬에 올랐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정치적으로 소론에 속하였으며, 명문벌열(名門閥閱) 중심에서 벗어나 4색(四色)의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의 실(實)
을 강조하였다. 군정(軍政)과 세정(稅政)에 밝아 당시 국정의 개혁논의에 중요한 몫을 했다. 1749년 영조에게 주청하여 《탁지정례(度支定例)》를 출판하였고, 글씨로는 안성의 《오명항토적송공비》가 전한다. 시호는 충헌(忠憲).
|
|
|
|
|
|
|
충청남도 천안시 북면 은지리 |
|
|
|
은석산(455m)에 위치한 이 사찰은 신라 문무왕 때의 고승 원효대사가 창건 하였다고 전하나 확실치 않다. 창건 당시는 큰 사찰이었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수차 개수하면서
옛날의 모습은 사라지고 작은 사찰로 변했으며, 옛날부터 시인 묵객들이 많이 모여 시와 문장을 연마했던 사찰로 유명하다. |
|
|
|
1. 도로망 ① 철도(경부선, 호남선, 장항선) - 천안역 ② 경부고속국도 - 천안IC, 목천IC ③ 서해고속국도 - 포승IC - 천안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