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달성의 측백수림
종 목 천연기념물 제1호
지 정 일 1962.12.03
소 재 지 대구 동구 도동 산180
측백나무는 중국 및 우리나라에 분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단양, 달성, 안동, 영양 등지에서 자라고 있다. 절벽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숲을 이루는 경우가 많으며, 주변환경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주택과 마을 주변에 많이 심고 있다.
달성의 측백수림은 나무의 높이가 5-7m 정도되는 100여 그루의 나무가 절벽에 자라고 있으며, 측백나무 외에도 소나무, 느티나무, 말채나무 등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주변의 숲은 사람들이 나무를 함부로 베어가서 황폐해졌지만 측백나무는 절벽의 바위틈에 자라기 때문에 베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을 수 있었다.
달성의 측백수림은 천연기념물 제1호라는 이유로 많은 관심을 모으는 숲이다. 또한 측백나무는 중국에서만 자라는 나무로 알려져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자라고 있어 식물 분포학상 학술적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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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불로동 고분군
종 목 사적 제262호
지 정 일 1978.06.23
소 재 지 대구 동구 불노동 335
시 대 삼국시대
대구시 불로동과 입석동 구릉 서남면에 있는 수십기의 크고 작은 무덤들이다.
무덤의 지름은 15∼20m, 높이 4∼7m 정도가 보통이며, 내부구조는 냇돌 또는 깬돌로 4벽을 쌓고, 판판하고 넓적한 돌로 뚜껑을 덮은 직사각형의 돌방이 있으며, 그 위에 자갈을 얹고 흙을 덮었다. 껴묻거리(부장품)로 금제 혹은 금동제 장신구와 철제무기 무늬를 새긴 토기 등 많은 출토물이 있다.
이 무덤들은 대개 4∼5세기경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되며, 이 지역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토착 지배세력의 집단무덤으로 추측한다.
불로동 무덤들은 위치가 구릉이라는 점, 무덤 내부가 돌무지 무덤과 비슷하게 깬돌로 지은 점, 그리고 돌방이 지나치게 가늘고 긴 점에서 낙동강 중류 지역 계통임을 알게 해 준다. 그러나 유물의 형태나 질이 신라와 유사하여 이 지역 세력의 복잡한 문화양상을 보여주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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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신숭겸장군 유적
종 목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호
지 정 일 1982.03.04
소 재 지 대구 동구 지묘동 526
시 대 조선시대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을 기리는 유적이다.
신숭겸(?∼927)은 평산 신씨의 시조로서, 918년 배현경, 홍유, 복지겸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의 건국에 이바지한 인물이다. 고려 태조 10년(927) 대구 공산에서 후백제 견훤의 군대와 싸우다가 태조가 적군에게 포위되어 위급해지자, 태조의 옷을 입고 변장하여 맞서다가 전사하였다.
태조는 그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그의 시신을 거두어 광해주(지금의 춘천)에 묻고 순절단, 지묘사, 미리사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
조선 선조 40년(1607)에 경상도관찰사 유영순이 지묘사의 자리에 표충사를 지어 신숭겸을 모셨으며, 후에 이 서원에 사액을 내려 관리하였다. 고종 8년(1871)에 서원철폐령으로 표충사가 없어지자, 후손들이 표충재를 새로 지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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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동화사
소재지 : 대구 동구 도학동 35번지(팔공산 중턱에 위치)
대구 도심에서 동북쪽으로 22km떨어진 팔공산 남쪽 기슭에 신라 소지왕 15년(493년)에 극달화상이 세운 절로, 그때 이름은 유가사였으나, 흥덕왕 7년(832년)에 심지왕사가 다시 세울 때 겨울철인데도 경내에 오동나무가 활짝 피었다고 해서 동화사라 이름을 고쳐 불렀다고 한다.
절 입구는 수목이 우거져 있고 사철 맑은물이 폭포를 이루며 흐른다. 지금의 대웅전은 1727년에 중건한 것이며 염불암을 비롯 6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대웅전 앞 누각에 "영남치영아문"이라는 현판이 있어 사명대사가 임진왜란때 승군을 지휘한 본부가 동화사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동화사 경내에는 통일을 기원하는 높이 33m의 통일약사여래대불을 세워 온 국민의 통일 염원을 모으고 있으며, 대구 경북지역을 관리하는 대한 불교 조계종의 9교구 본사이다.
주요문화재명
- 마애불좌상 보물 제243호
- 비로암석조비로자나불상 보물 제244호
- 비로암3층석탑 보물 제247호
- 금당암3층석탑 보물 제248호
- 당간지주 보물 제254호
- 지방문화재 : 대웅전, 극락전, 부도군
- 지방민속문화재 : 수마제전, 사명당대장진영
5.대구달성
종 목 사적 제6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대구 중구 달성동 294-1
시 대 삼국시대
평지의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쌓은 삼국시대의 성곽이다. 높이는 일정치 않으나 4m정도이며, 둘레는 약 1,300m이다.
성벽의 아랫부분에서 초기철기시대의 조개더미와 각종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지방의 중심세력이 성장하여 초기적 국가 형태를 이루면서 쌓은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경주의 월성처럼 평지에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쌓은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달성은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 초기 성곽의 전형으로 평가되고 있다.
성벽은 주로 흙으로 쌓았고, 성벽 윗부분에는 큰 돌덩어리들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어 후대에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성안에는 조선시대 전기까지 군대의 창고가 있었고, 우물과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성의 서남쪽으로 연결된 구릉지대에는 돌방무덤(석실분)이 많이 흩어져 있고, 무덤에서 금동관을 비롯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대구 달성은 우리나라 성곽 발달사에 있어 가장 이른 시기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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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달성 삼가헌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04호
지 정 일 1979.12.28
소 재 지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 800
시 대 조선시대
충정공 박팽년(1417∼1456)의 자손들이 정착하여 온 박씨마을 묘골과 낮은 산 하나를 경계로 하여 자리잡은 조선시대의 주택이다. 넓은 터에 대문간채·사랑채·안채·별당·연못이 배치되어 있다. 충정공의 11대손인 삼가헌 박성수가 영조 45년(1769)에 사랑채를 짓고 자신의 호를 현판으로 걸어 삼가헌이라 이름지었다. 그 이듬해에는 삼가헌 서쪽편에 별당을 세우고 주변과 연못에 각각 국화와 연꽃을 심은 뒤 하엽정이라 불렀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건물이 사랑채이며, 안채는 사랑채를 거쳐야 출입을 할 수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대략 트인 ㅁ자형의 구조를 하고 있으며 안채로 드나드는 중문채와 곳간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사랑채는 ㄱ자형 평면으로 넓은 대청과 골방이 딸린 온돌방 2칸·마루방·청지기방을 두었다. 안채는 ㄷ자형으로 부엌·안방·대청·건넌방·개방된 툇마루 등으로 꾸몄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서쪽으로 장독대·곳간채·안변소가 자리잡고 있다.
원래 서당으로 쓰던 별당은 고종 11년(1874)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이 별당은 안채의 서쪽 넓은 터에 따로 자리잡고 있는 ㄱ자형 건물로 온돌방 3칸과 마루방 1칸으로 구성되었다. 왼편 끝방의 앞에는 1칸의 누마루를 꾸미고 그 옆 마루와 다른 방들 앞에는 툇마루를 놓았다.
전체적으로 조선 중기에 건축된 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남긴 대표적인 주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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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선화당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
지 정 일 1982.03.04
소 재 지 대구 중구 포정동 21 경상감영공원
시 대 조선시대
선화당은 경상도 관찰사가 공적인 일을 하던 건물로 원래 안동에 있던 것을 조선 선조 34년(1601)에 김신원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그 뒤 현종 11년(1670), 영조 6년(1730), 순조 6년(1806) 3차례에 걸친 화재로 타버렸다.
지금의 건물은 순조 7년에 윤광안이 다시 지은 것이다. 그 후 경상북도 도청으로 사용되다가 1969년 도청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 1970년 중앙공원을 만들면서 현 모습으로 고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관청건물은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귀중한 자료이며, 경상감영의 상징이 되는 건물이라는 데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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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봉무정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
지 정 일 1984.07.25
소 재 지 대구 동구 봉무동 939
시 대 조선시대
조선 고종 12년(1875)에 봉촌 최상룡이 행정사무를 볼 수 있도록 마을사람들과 의논하여 지은 것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달성군 공산면 4개 마을(강동·독좌·위남·단산)에서 쓰던 초가 사무소가 있었다. 이 4개 마을을 합쳐 봉무동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자 초가를 헐고 이 건물을 지었다.
강당을 중심으로 동쪽에 덕교재, 서쪽에 예용재가 있다. 강당은 농민들의 계몽과 마을 규약 등을 가르치고, 선비들이 모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덕교재와 예용재는 마을사람들이 모여 의논하던 곳이다.
화강석의 둥근 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운 5칸 규모의 집으로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옆면에 내림지붕을 달았다.
봉무정은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대표하는 건물이며, 이 시대 공공건물의 예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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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성재서당
종 목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9호
지 정 일 1984.07.25
소 재 지 대구 동구 미대동 169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인조(재위 1623∼1649) 때 선비 채명보(1574∼1644)가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그 뒤 후손들이 선생의 덕행을 널리 기리고자 새로 짓고 ‘성재서당’이라 이름을 고쳤다.
채명보의 휘는 선견, 자는 명보, 호는 양전헌이며 본관은 인천이다. 광해군 9년(1617)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서궁유폐사건이 일어나자 선비들과 함께 상소를 올려 잘못된 점을 지적하였다.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 때에는 향병을 모집하기도 하였으며, 인조 4년에 희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받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와 성재정을 짓고 선비들과 학문을 논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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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구향교 대성전
종 목 문화재자료 제1호
지 정 일 1982.03.04
소 재 지 대구 중구 남산동 735-4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지방에 설립한 국립교육기관으로서,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기능과 학생을 교육하는 강학 기능을 동시에 담당하였다.
대구향교는 조선 태종 7년(1407)에 처음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선조 32년(1599)에 달성공원 근처에 다시 세웠다가 선조 38년(1605) 교동으로 옮겼고,1932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재·서재·문묘·삼문 등이 있다.
대구향교로 들어서면 교육 공간인 명륜당과 학생들이 숙식하는 동재·서재가 있으며,내삼문을 열고 뒤채로 들어서면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나타난다. 대성전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성현 18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건물로,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지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을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대구향교 대성전은 대구 시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향교의 중심 건물로,전체적으로 엄숙하고도 단아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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