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별 종류-김씨(18)
▲ 이천김씨(利川金氏)
시조 김순걸(金順傑)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그의 아들 김춘 과 김언남 은 통정으로 이천에 대대로 살아온 선비 집안이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이천으로 했다.
과거 급제자는 김난세(金亂世, 1590 庚寅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김유량(金有良, 1608 戊申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김열손(金悅孫, 1603 癸卯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등 모두 3명이다. 무과 3명이다.
이천은 경기도 이천시의 지명이다.
2000년에 441명이다.
▲ 인동김씨(仁同金氏)
시조 김정(金淀)은 신라 경순왕의 제4자 대안군 김은열의 손자인 수원김씨 시조 김품언의 22세손이다.
그는 1456년(세조 2) 식년문과에 정과(丁科)로 급제하고 남학교수(南學敎授), 승문원교리, 인동부사를 지냈다.
그가 인동김씨 시조로 나오는 점을 미루어 보면 인동부사를 역임한 연유에서 그의 후손이 본관을 인동(仁同)으로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원김씨세보에는 그의 후손이 수원김씨 경북 영일군 대송면 사정리파로 되어 있다.
과거 급제자는 김금복(金今福, 1593 癸巳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김익현(金益鉉, 1661 辛丑生) : 무과(武科) 숙종21년(1695) 별시 병과(丙科), 김주철(金柱喆, 1874 甲戌生) : 사마시(司馬試) 고종25년(1888) 식년시 삼등(三等), 김호윤(金鎬潤, 1871 辛未生) : 사마시(司馬試) 고종28년(1891) 증광시 삼등(三等), 김낙도(金樂道, 1734 甲寅生) : 사마시(司馬試) 영조41년(1765) 식년시 삼등(三等), 김덕윤(金德潤, 1874 甲戌生) : 사마시(司馬試) 고종28년(1891) 증광시 삼등(三等), 김익용(金益鎔, 1655 乙未生) : 역과(譯科) 숙종13년(1687) 식년시, 김상길(金象吉, 1791 辛亥生) : 역과(譯科) 순조9년(1809) 증광시, 김위(1760 庚辰生) : 음양과(陰陽科) 순조1년(1801) 증광시, 김응(金應, 1764 甲申生) : 음양과(陰陽科) 순조3년(1803) 증광시 등 모두 11명이다. 무과 2명, 사마시 4명, 역과 2명, 음양과 2명, 율과 1명이다.
본관 인동(仁同)은 경상북도 구미시에 위치하는 지명이다.
1985년에는 총 118가구 637명,
2000년에는 총 389가구 1,282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 임실김씨(任實金氏)
고증할 수 없으나 임실김씨인 김희보(金禧寶,숭의여고 근무)씨에 의하면 그의 11대조인 김의인(金義仁) 삼형제 대에서 임진왜란 때 각기 평안도로 입북(入北)하였다고 한다.
1985년 조사에서는 나타나지 않았고,
2000년에는 총 4가구 12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 임진김씨(臨津金氏)
시조 김인조(金仁朝)는 신라 종성이며 김일신의 아들로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을 지냈다.
본관의 유래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과거 급제자는 김인후(金麟厚) : 문과(文科) 성종20년(1489) 식년시 을과(乙科), 김인후(金麟厚) : 사마시(司馬試) 성종14년(1483) 식년시 삼등(三等), 김사근(金思謹) : 사마시(司馬試) 중종26년(1531) 식년시 삼등(三等) 등 모두 3명이다. 문과 1명, 사마시 2명이다.
1985년에는 총 4가구 16명,
2000년에는 총 35가구 115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 임피김씨(臨陂金氏)
시조 김한추(金漢樞)는 신라 경순왕의 제4자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9세손인 김여흥(金余興,고려시대 시중)의 손자다.
그는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로 임피군(臨陂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임피(沃溝屬面)로 하게 되었다.
김수옹(金守甕)을 시조로 하는 문헌도 전한다.
과거 급제자는 김경남(金京男, 1605 乙巳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김의선(金義善, 1629 己巳生) : 무과(武科) 현종3년(1662) 증광시 갑과(甲科), 김덕린(金德隣, 1555 乙卯生) : 무과(武科) 선조16년(1583) 별시 병과(丙科), 김종남(金從男, 1555 乙卯生) : 무과(武科) 효종2년(1651) 별시 병과(丙科), 김언봉(金彦鳳, 1555 乙卯生) : 의과(醫科) 선조3년(1570) 식년시 등 모두 5명이다. 무과 4명, 의과 1명이다.
본관 임피는 옥구(沃溝)에 속한 면이다.
지금은 군산시 임피면이다.
1985년에는 총 14가구 61명,
2000년에는 총 38가구 117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 장단김씨(長湍金氏)
시조 김선(金璇)은 신라 대보공(大輔公) 김알지의 후손으로 전하고 있으나 사적(事蹟)이 없기 때문에 그 세계(世系)를 상고할 수 없다.
그는 장단부원군(長湍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장단(長湍)을 본관으로 했다.
신라 경순왕의 제9자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 김덕지(金德擊)의 후손으로 전하는 김일신(金日新)을 시조로 전하는 문헌도 있다.
과거 급제자는 김춘희(金春希, 1598 戊戌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김용규(金容圭, 1815 乙亥生) : 음양과(陰陽科) 헌종1년(1835) 증광시, 김광흡(金光恰, 1762 壬午生) : 음양과(陰陽科) 정조7년(1783) 식년시, 김헌규(金獻圭, 1787 丁未生) : 율과(律科) 순조9년(1809) 증광시 등 모두 4명이다. 무과 1명, 음양과 2명, 율과 1명이다.
1985년 조사에서는 나타나지 않았고,
2000년에는 총 4가구 13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 장성김씨(長城金氏)
시조 김극신(金克信)이 1405(조선 태종 5) 문과에 급제하여 판교(判校)를 지냈다고 전해올 뿐, 본관의 유래 등은 알 수 없다.
과거 급제자는 김극신(金克信) : 문과(文科) 태종5년(1405)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1명이다.
1985년에는 총 113가구 488명,
2000년에는 총 159가구 525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 장연김씨(長淵金氏)
시조 김정신(시호는 문정)은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다.
그는 1047년(고려 문종1년) 문과에 장원하고 벼슬은 시중에 이르렀다.
1930년 평남 대동군 청용면에 22가구, 평북 정주군에 62가구, 평북 선천군 수청면 고읍동에 23가구가 살았다.
과거 급제자는 김은위(金殷位, 1600 庚子生) : 무과(武科) 인조2년(1624) 증광시 병과(丙科), 김정록(金廷祿, 1613 癸丑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김정우(金正禹, 1753 癸酉生) : 사마시(司馬試) 순조9년(1809) 증광시 삼등(三等), 김덕연(金德淵, 1847 丁未生) : 사마시(司馬試) 고종25년(1888) 식년시 삼등(三等), 김동혁(金棟赫, 1806 丙寅生) : 사마시(司馬試) 순조34년(1834) 식년시 삼등(三等), 김인혁(金仁赫, 1790 庚戌生) : 사마시(司馬試) 순조7년(1807) 식년시 삼등(三等) 등 모두 6명이다. 무과 2명, 사마시 4명이다.
본관 장연(長淵)은 황해도 장연군의 지명이다.
1985년에는 총 122가구 558명,
2000년에는 총 102가구 334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 적성김씨(積城金氏)
시조 김상환(자는 문원)은 1636년(조선 인조 14년)생으로 평양에서 살았다.
1669년(현종 10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벼슬이 감찰에 이르렀다.
1930년 평북 평원군 공독면 송매리에 21가구, 평북 의주시 탑산동에 10가구가 살았다.
적성은 현재의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의 지명이다.
과거 급제자는 김상환(金尙煥, 1636 丙子生) : 문과(文科) 현종10년(1669) 식년시 병과(丙科), 김진(金進, 1613 癸丑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김필성(金弼成, 1613 癸丑生) : 무과(武科) 효종2년(1651) 별시 병과(丙科) 등 모두 3명이다. 문과 1명, 무과 2명이다.
1985년에는 총 191가구 801명,
2000년에는 총 208가구 669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 정산김씨(定山金氏)
시조 김복수(金福壽)의 자는 광유(光酉)로 신라 경순왕의 제4자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15세손(구 안동김씨) 김한(金漢)의 제2자다.
그는 관직이 현감(縣監)에 이르렀고 무오사화(戊午士禍)에 관련되어 정산(定山)으로 이주했다. 다시 평안도에 정착하여 세거 후 김광유(金光酉)로 개명하고 전 거주지였던 정산을 본관으로 했다.
각분종보(各分宗譜)에 의하면 김은열(金殷說)의 9세손으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김태서(金台瑞)의 4세손으로 공부시랑(工部侍郞)을 지낸 김행경(金行敬)을 시조로 전하기도 한다.
과거 급제자는 김진모(金鎭模, 1828 戊子生) : 문과(文科) 철종12년(1861) 식년시 병과(丙科), 김남즙(1749 己巳生) : 사마시(司馬試) 순조1년(1801) 증광시 삼등(三等) 등 모두 2명이다. 문과 1명, 사마시 1명이다.
본관 정산은 충남 청양군(靑陽郡)에 있는 지명이다.
1985년에는 총 49가구 211명,
2000년에는 총 218가구 673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