予又何違斯 | 내가 또 어찌 이 사람과 이별할까 |
爲酬明主知 | 이별주 나누는 것을 주상은 아시겠지 |
爲臣匪躬日 | 신하된 자 나라 위해 몸 바치는 날이요 |
適我未衰時 | 나에게 밀려드는 일 줄어들지 않을 때로다 |
志氣虹千丈 | 뜻과 기개는 천 길 무지개 같은데 |
離情酒一巵 | 이별하는 심정 한 잔 술로 달래네 |
贈言慙老耗 | 시를 지어주면서도 늙은 것이 부끄럽지만 |
見義莫三思 | 의를 보거든 세 번까지 생각지 마소 |
우선 送全羅監司 金廷雋에 대하여 살펴보면 공에게는 1414년(태종 14년)에 전라도 관찰사(監司)에 제수 되었는데 이때에 送全羅監司 金廷儁 시가 지어 졌다. 그런데 이 시는 공이 전라감사에 제수 되어 부임하러 가는 것을 송별할 때 어떤 다른분이 지은시를 보고 독곡 성석린이 지은 차운시이다.
따라서 총제공의 전라감사 부임을 축하하고 송별하는 시가 당시에 여러 편이 지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송별시 등을 짓는 경우의 예를 살펴보면 경직(京職)에 있다가 지방의 목민관으로 부임하러 떠날때는 과거시험 동방합격자나, 동료관원들이 잔치를 열어 축하하며 임지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고 훌륭한 목민관으로 성공하라는 염원을 담은 축하송별연을 베풀어 주었다. 예를 들면 관찰사로 부임 한다든지 목사, 부사는 물론 군수, 현령으로 나갈 때도 이러한 관행이 있었다고 한다. 축하 송별시는 참석한 관원들이 모두 돌려가며 지었기 때문에 이러한 송시는 여러 편이 지어졌을 것이지만, 전해지고 있지 않아 애석하기 짝이 없다. 지금에 와서 한편이라도 발굴되었으니 아주 다행이지만 계속하여 많은 시문이 발견되기를 간절히 고대한다.
그리고 송별연을 베풀어 시를 짓는 장소는 3군데이었다고 한다. 광나루와 압구정, 다락원37)에서 많이 열었는데 다락원은 명나라나 청나라로 왕래하는 사람이 많아 번잡하여 주로 광나루와 압구정 쪽에서 송별연을 베풀며 송시를 짓고 장도를 축원했다고 한다.참으로 운치있고 멋있어 보이는 조선시대 상류사회 문화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다. 어쨌든 600년 전 총제공과 관련된 사료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어서 대단히 기쁘고 가문의 기운이 융성할 징조가 아닌가 하는 흐뭇한 생각이 든다.
어떤 가문에서는 이러한 송별시를 하나의 문집으로 엮어서 전승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우리 문중에서도 이러한 자료가 어느 후손 집에 보관되어 있다가 출현하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총제공이 전라감사로 부임할 때 송별시를 지은 독곡 성석린 선생은 조선 초기의 공경대부(公卿大夫)로 구리시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신도비(국가지정 보물 1803호)의 비문글씨를 쓰신 당대 조선 최고 명필이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종2품 이상의 벼슬아치의 일대기를 담아 무덤 동남쪽 길가에 세우는 석비(石碑)를 이른다. 총제공의 송별시를 이러한 연배도 높은 명신 명필이 지었다는 것은 총제공의 당시의 위상이나 명망이 어떠하였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6. 총제공의 얼과 효성(孝誠)이 서린 월당원(月塘院).
후손은 600년 동안 이를 잊고 있었다....
- 부윤 김정준이 월당원의 재호(齋號)를 세우다 -
회맹연시와 관련된 자료를 보내면서 이해준 박사가 보내준 자료에는 필자의 가슴을 벅차게 하는 자료가 또 있었으니 그것은 ‘신증동국여지승암 전라도 전주부 역원조’인데 월당원(月塘院)은 부의 동쪽 4리에 있다. 부윤 김정준이 세우고 재호는 월당을 따서 이름 하였다. ◦ 정이오의 시에 “일은 백년이나 지나 햇수는 멀지만, 그 이름은 한읍에 전하니 월당의 맑음이여” 하였다, 피계원 부의 남쪽 11에 있다.
위의 동국여지승람 자료는 공께서 전주부윤(1418~1426)으로 봉직하고 계실 때 전주부 관할에 역원을 설치하고 역원의 재호(齋號 이름)를 명명할 때, 고려말에 보문각 대제학 등을 지내시고 문장과 시문이 당대에 독보적이라 명성이 높았으며 시편이 동문선에 기록되어 있는 조부인 문충공 월당 김대경(나주김씨 15세)의 호를 따서 ‘월당원’으로 지으신 것을 알 수 있고, 이를 보고 조선 초 문신으로 시문에 재능이 뛰어나 명성이 높았으며 세종때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교은 정이오(1374~1434)가 이를 기념하여 지은시까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되어 있어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이 자료를 통해 보면 총제공께서는 당시에 영의정을 지낸 명필 성석린과 대제학을 지낸 정이오 등 공경대부들과 교유할 정도로 총제공의 덕망과 위상이 상당 했다고 볼 수 있으며, 조상에 대한 효성과 공경심이 지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총제공은 우리 나주김문에게 전통적으로 전래 되어온 정신인 가전충효를 몸소 솔선 실천하신 훌륭한 선조이시다.
우리 나주김문은 출발 당시부터 비조이신 계자 황왕자 범공선사께서 충절과 효경심이 높은 분으로 평가되어 왔었다. 조선 중기 1778년에 안정복이 지은 동사강목에 “신라가 귀려(歸麗)시에 季子가 충절을 지켜 기처자(棄妻子) 하고 범공스님이 되시어 종신하신 일은 중국의 촉한의 멸망시 북지왕 유심의 충절과 관련한 고사에 비견할 정도로 의기가 장렬하지만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아 참으로 애석하다.”고 했는데 조선 초에 처음으로 출사하신 총제공께서 국가에 공을 세워 공신의 반열에 오르시었고 추원보본(追遠報本)의 효심을 십분 발휘하여 훌륭하신 조부님의 호를 따서 전주부 역원 재호를 ‘월당원’으로 지으신 것은 대단한 효심의 발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우리 후손은 600년간 이러한 위대한 사실을 모르고 살아 왔다는 것이 죄송스럽고 한없이 부끄럽기 짝이 없다.
훌륭한 조상님과 관련한 자료를 발굴하고 보존하고 선양(宣揚)하는 일은 문중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확립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런 일을 체계적이고 학술적으로 고증 발굴 할 수 있는 시스템구축과 인력 양성에 대하여 중앙종친회 차원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
7. 총제공이 졸(卒)한 후 예장(禮葬)을 사(賜)하다.
공께서는 세종 8년(1426년)에 5년간 봉직하던 전주부윤을 끝으로 관직에서 은퇴하였다. 은퇴한 후의 구체적인 행적이 알려진 바가 없어 아쉬움이 크지만 은퇴한 후 7년만인 1433년(세종 15년) 4월 3일의 세종실록에 예장을 사(賜)했다고 볼 수 있는 기록이 명시되어 있다. “총제 김정준이 졸하니 부물을 보내서 조상 하였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실록에 위와 같이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나주김씨세보’ 내용도 ‘공은 벼슬이 가정대부 중군총제이며 예장을 사하다’라 기록되어 있다. 이는 1402년 ‘동북면의 난에 세운 공으로 공신에 책훈되고 공이 졸한 후 예장을 사했다’는 것을 이른다.
조선시대 예장은 종친, 공신, 종1품 이상의 관원이 서거하면 나라에서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주던 제도로 1405년(태종 5년)에 제정된 ‘예장증시법’에 종1품 이상의 관원은 예장 중시하고, 정2품 중시치부하며, 종2품은 치부만 한다. 공덕이 있으면서도 벼슬이 이에 해당하지 못한 자가 있을때는 사헌부에서 품신하여 의정부의 의논을 거쳐 왕명을 받아서 시행한다고 밝히고 있다. 공께서는 동북면의 난의 공신이기 때문에 예장을 사한 것이다. 조정에서 공신이 졸하면 예장도감(禮葬都監)에서 예를 갖추어 장례일과 절차를 논의 하고 조묘(造墓)등 장례 일체를 맡아 하였다. 예장을 할 때는 인근지역의 수령방백들과 수많은 백성들이 참석하여 고인의 생전의 공덕을 기리고 정중한 조문을 했다.
실록에 기록된 1433년 ‘총제 김정준이 졸하니’의 ‘졸(卒)’의 뜻은 봉건시대는 사람이 사망하면 신분에 따라 부르는 호칭이 다름에 따른 것이다. 천자의 죽음을 붕어(崩御)라 부르고, 제후(諸侯)의 죽음을 훙(薨)이라 하고, 대부의 죽음은 졸(卒)이라 하고 벼슬하지 않은 선비의 죽음을 불록(不綠)이라 하였고, 서인의 죽음을 사망이라고 불렀다.
8. 실전 되었던 공의 묘소를 찾게 된 전말
조선실록 세종 15년 계축(1433년 선덕8) 4월3일(병술)의 기록에 따르면 ‘총제 김정준(金廷雋) 卒하니 부물을 보내 조상하였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렇게 보면 공의 묘소는 1433년에 예장으로 모셔졌기 때문에 금년(2014)에서부터 환산하면 581년 전에 모셔진 현존하는 최고의 나주김문의 묘로서 우리 나주김문의 자랑이고 문화유산이다.
공의 산소는 500년 동안 굴곡진 모진 풍진 세상을 지내면서 일시 실전되어 한동안 자손들이 진배(進拜)하여 향화(香火)를 받들지 못하는 망극한 일도 있었으나 1926년 발간한 대동합보인 병인보 발간을 계기로 1925년 기환(32세 무안), 영구(34세 홍성), 승구(34세 공주) 등 3인의 문중 어른들께서 구보(舊譜)에 포천 기을산 서향이라고 표시된 묘도를 갖고 현지일대를 정밀 답사하는 각고의 노력 끝에 다시 찾게 되었다. 1926년 편찬된 병인보는 승구의 주관으로 전국 각 종중의 대표 유사 등이 참여하여 전18권으로 발간한 대동보인데 수많은 종친들의 명단이 수록된 값진 보책이다.
이 병인보 편찬을 주관한 승구는 구한말에 가선대부 품계에 올라 우리 나주김문을 빛낸 금당(金堂)용래(用來)33세)씨의 차남이다.
실전되었던 총제공의 묘소를 찾게 된 경위와 그 기쁨을 생생하게 기록한 기환의 글이 대동보에 기록되어 있어서 후손들에게 조상 애호하고 존중하는 귀감이 되고 있다. 총제공 묘소는 국가에서 장례해준 예장 묘인데다 우리 나주김문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묘소이고 묘소의 원형이 예장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 보존되고 있어서 우리 문중의 자랑일 뿐 아니라 민속학적으로 보나 문화사적으로 매우 값진 민족유산이기 때문에 우리 후손들은 이 묘소의 영구보존과 관리를 위해 특단의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며 문화재행정 당국과도 교감을 갖고 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9. 총제공의 묘역 상단에 나주김씨 조경단(肇慶壇)을 설단하다.
나주김씨 세보와 신라김씨 등의 자료에 의하면 우리 나주김씨의 비조(鼻祖)이신 경순왕 계자 湟왕자와 관조이신 나주군 문하시중 운발공의 묘소가 개성 동북방 오룡산(五龍山)에 모셔져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1945년 민족의 비극인 남북분단으로 우리 나주김문을 여신 황왕자와 나주군 두 분의 영위에 대한 향화(香火)를 봉행치 못하고 있어서 2004년부터 두분의 제향단을 설단하고자 고심 끝에 중앙종친회에서 총의를 모아 많은 종친들의 협조와 성원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세수가 높은 총제공 묘소 상단에 나주김씨 종인 모두가 소망하고 염원하던 조경단을 설단하게 되었다,
추진과정에서 입지를 선정할 때 설단 후 관리 문제, 세향을 봉행하러 오는 자손들의 접근성, 토지 소유권 문제, 조경단 설치시의 법적인 문제 때문에 적지 않은 논란도 있었지만 현 토지의 소유자인 청주양씨종친회(회장 양재창, 감사 양영찬) 측의 양해와 협조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총제공 묘소가 있는 이 곳의 산 이름이 ‘하늘을 떠받히는 기둥’이란 뜻을 가진 천주산(天柱山)이고 옛날부터 이 묘역의 산기슭이 능(陵)마루라는 이름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하여 하늘을 받치는 기둥과 같은 훌륭한 인물이 우리 나주김문에서 연이어 탄생하기를 고대하는 마음에서 조경단을 천주산 릉마루에 설단하게 되었고,
나주김씨조경단
羅州金氏 肇慶壇建壇記
천년을 향기롭고 튼실히 이어온 문중의 면면하고 빛남이여
湟王子와 羅州君의 가없이 은근하고 고귀한 蔭德과 恩澤이여
크나 큰 立志와 敎訓이여 感服하고 崇仰할 따름이다.
이 壇은 나주김씨 鼻祖이신 신라 敬順大王(妃 竹房朴氏)의 季子 湟王子(914~?) (梵空禪師 諡 懿英公)와 貫祖이신 나주군 문하시중 諱 雲發(932~?)의 祭享壇이다.
三國遺事 東史綱目 增補文獻備考등 사서와 신라김씨 문헌을 상고하면 나주김씨의 원래 뿌리인 신라김씨는 西紀六十五年 聖祖대보공 세조대왕 閼智께서 鷄林에 誕降하신 이래 신라 천년의 五十六王 중 三十八王이 즉위하여 三韓을 통합하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며 만세융성할 倍達의 터전을 다졌지만 九三五年 五十六代 敬順大王에 이르러 천년사직을 高麗에 遜國하게 되자 太子鎰과 季子湟은 “어찌 천년사직을 하루아침에 남에게 줄 수 있는가”라고 불가함을 극간하였으나 가납되지 않자 통곡하며 太子는 妻子와 함께 금강산에 입산하여 麻衣 草食으로 종신하시었고 季子는 忠節과 義烈로 고려 태조가 제수한 평장사를 辭爵不受하고 王子嬪 (시중 沃沮河氏 元澔의 따님)과 雲發, 雨發 두 아들을 속세에 두고 父王의 影幀을 그려 모시고, 가야산 法水寺로 永辭入山 梵空 스님이 되어 海印寺를 왕래 주접하며 모든 것이 자신의 업보인양 참회하고 중생제도와 국태민안을 위해 발원 하다가 涅槃에 드니 조정에서는 湟王子의 아름답고 거룩한 행적과 덕망을 기려 懿英公의 諡號를 증시하고 개성 동북편 오룡산에 葬禮하였다.
湟王子가 사작불수 영사입산하자 長子 雲發에게 羅州를 食邑으로하는 羅州君에 책봉하니 이로부터 후손들이 貫鄕을 나주로 하게 되었고, 次子 雨發은 慶州君에 封하여 경주김씨의 先系가 되었다.
羅州君께서는 시중 능성具氏 민구의 따님과 혼인하여 슬하에 重輪, 聖輪, 仁輪 三兄弟를 두었고, 평장사 문하시중 등을 역임하며 어질고 자애로운 姿稟으로 고려 초의 안정과 통합, 濟世安民에 크게 기여 하다 영면하시자 역시 개성 오룡산에 안장 하였다.
이 후 나주김씨는 고려와 조선조때 문하시중, 대제학, 대장군, 평장사, 판서 등 문무 내외 현관은 물론 충신열사를 배출하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정관법조계, 학예술계, 산업계 등 각계에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한 삼한의 명문가로 그 명성을 드날리고 있다.
그러나 一九四五年 남북한이 분단된 이래 우리 나주김문을 여신 湟王子와 羅州君의 香火를 봉행 할 수 없어 불경함에 예손들의 염원과 정성을 모아 天柱山의 十七世孫 摠制 廷儁의 묘역 상단에 나주김씨 조경단을 설단 하는 바이다.
一族의 繁昌에 보은하고 두 즈믄해를 이어온 정통성과 정체성을 다지며 문중의 기운이 대하장강,장대한 산맥과 같이 천추만대에 繼繼承承 이어지기를 염원하고, 永遠하여야 할 후세의 尊祖崇先을 다짐하면서 이 비문을 바친다.
二千十年 五月 日
羅州金氏 中央宗親會長 三六世 金謹鶴 謹撰 삼가짓다.
羅州金氏 三十八世 金壯峴 삼가쓰다.
동시에 청주양씨와의 아름다운 600년의 인연을 기리는 가연비도 입석하였다.
제향단을 설단하면서 단의 이름을 조경단이라 명명한 것은 조경이라는 말이 ‘시작됨을 경축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고 이 말의 기원은 신라김씨 도시조인 대보공 세조대왕(추존) 알지의 묘전(廟殿)인 계림세묘(鷄林世廟) 내문 편액에 조경문으로 되어 있어 나주김씨 시조의 제향단을 포천 천주산에 설단하면서 조경단으로 이름 지었다.
조경단의 디자인은 문중의 번성과 화목을 기원하는 형상을 기본 원형으로 하였고 우리 나주김씨의 탄생을 황왕자와 나주군 운발공을 분리하여 생각 할 수 없으므로 함께 모시고 병향38)(竝香)하도록 하였으며 조경단의 형태는 받침석, 몸체, 갓석의 3단으로 하였는데 받침석은 8면 연화모양 통돌, 몸체는 8면 기둥 통돌, 갓석은 통돌 반원형으로 조성 하였다.
받침석의 연꽃은 생명의 창조, 다산, 풍요, 장수, 번영, 행운, 명예, 연성귀자의 뜻을 갖고 있어 연꽃처럼 번성 하였으면 하는 염원을 담고자 한 것이고 8면 기둥은 나주김씨의 羅(나)자가 팔방으로 번성하라는 염원을 담고자 한것이고, 갓석의 반원은 문중의 기운이 떠오르는 태양과 같이 온누리를 비추는 것을 상징 하였다. 단소 바닥에는 선조님의 얼이 서린 경주, 성주, 개성, 나주와 자손들의 인연이 숨 쉬는 전국의 흙을 취합하여 혼합 살포함으로서 자손들의 염원과 단결을 다짐하며 설단 하였다.
단비의 전면은 황왕자와 나주군의 영위를 각자하고, 뒤 3면에는 당시 중앙회장 金謹鶴(김근학36세)이 짓고, 38세 장현이 글씨를 쓴 조경단 단비문을 음각하고 우측 첫 면에는 신라김씨의 적통임을 강조하여 신라김씨 도시조 김알지의 탄강도를, 바로 이어서 황왕자께서 범공스님이 되신 인연이 서린 법수사지 3층 석탑을 부조 하였으며, 좌측면에는 황왕자와 나주군의 묘도를 부조하고 이어서 단의 설명문을 각자 하였다.
조경단은 333명의 종친(회)들의 정성과 헌성으로 설단 하여 비로서 우리 나주김씨가 전통있는 명문가문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하였다. 따라서 우리 후손들은 이 묘역에 우리 문중에 현존하는 최고의 묘소인 총제공 묘소가 있는데다, 조경단까지 설단한 성스러운 곳인 만큼 잘 가꾸고 기리 보전하여야 할 것이다.
가연비는 나주김씨와 청주양씨 두가문의 600년 된 갸륵한 인연을 형상화 하였고 전면 비문은 당시 중앙종친회장(김근학)이 600년 된 아름다운 인연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앞으로 세세연연 이 인연이 이어가자는 염원을 담아 비문을 지었고,
뒷면에는 청주양씨 병사공파 종친회 양재창 회장이 양 가문의 아름답고 뜻있는 인연을 한시로 축수하는 시를 지어 음각하여 그 뜻을 영원히 기리도록 하였다.
양재창 회장께서는 자서전 금암록에도 이 사실을 글과 사진으로 남기셨다. 따라서 후손들은 청주양씨에 대해 항상 고맙게 생각하면서 포천 천주산의 조경단과 총제공 묘역을 우리 나주김문의 유일의 성역메카로 알고 흔들림 없이 수호하고 잘 가꾸고 선양하는데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10. 총제공의 휘 金廷雋과 金廷儁에 대하여
총제공 김정준 선조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26번이나 나오는데 실록기록은 모두 雋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나주김씨 족보인 병오보(1786)는 물론 그 이후에 발간된 임진보(1832년), 정해보(1887년), 을묘보(1915년)에 모두 廷雋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병인보(1926년) 이후부터는 廷儁으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어 의아한 감을 금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각적으로 검토 하였던바 이는 한때 총제공 묘소를 실전 하였다가 1925년 다시 찾았을 때 당시 땅속에 묻혀 있던 비석을 발굴하여 흙을 털어내고 살펴보니 비 전면에 가정대부 중군총제 금성 김정준묘(嘉靖大夫 中軍摠制 錦城 金廷儁墓)라 하고 음기(陰記)에 선덕 8년(1433) 계축 6월초 3일이라 되어 있고, 제 2행에 장자계공량......기각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이 후 부터는 이 묘비를 근거로 하여 공의 휘를 廷儁으로 고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공의 묘비문 전면에 보이는 금성 김정준(錦城 金廷儁)의 금성은 나주의 고호(古號)이며 나주김씨를 혹은 금성김씨라고도 한 예가 보책 여러 곳에 보이고 있다. 즉 족보의 기록은 검토해 보면 나주군 10세 이신 득장(得章)을 공신으로 “금성 안로현주를 봉하다”라 하였고, 18세 도(堵) 선조는 “정난공신으로 대장군을 봉하고 금성군을 봉하다”라 기록되어 있다. 후손 중에 일부는 족보에는 나주김씨로 되어 있으나 호적에는 금성김씨로 등재되어 있어 정정하는 사례가 종종 있어 왔다.
이로 보면 가장 오래되고 공이 돌아가신 직후에 건립된 1433년의 옛 묘석 기록이 더 맞을 듯 하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또 다른 유적이 있어 우리를 혼돈되게 하고 있다. 즉 공의 증손 봉서(鳳瑞, 19세 참의공 경근의 외아들, 행위호위호군 증 병조참판 1454-1533)의 묘비에는 공의 휘를 廷雋, 관직은 도총부 부총제로 적고 있는 것이다.(公諱鳳瑞 字著聖 羅州人 曾祖 諱廷雋 都摠府副摠制). 물론 증손의 비석이라 후대이기는 하지만, 이 묘비문을 1533년에 지은 분이 조선중기의 유명한 학자이며 경세가이고 영의정을 지낸 사재 김정국(思齋 金正國)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 비석은 현재 벽제 선영에 원형 보존되어 있다.
아울러 경국대전에 의하면 3품관 이상은 고조부까지 4대 봉사하도록 한 제례규정으로 보아 제례를 직접 집례 했던 효증손(孝曾孫)이며, 총제공께서 관직이 바뀔 때 마다 받으신 수많은 교지를 보관하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고, 또한 당시에는 후손들이 과거를 응시할 때는 물론이고, 특히 음서(蔭敍)로 출사할 경우 조상들의 사조단자(四祖單子, 친가 처가 쪽의 고조부 증조부 조부 부친과 외조부의 성명, 생년월일, 벼슬 등을 적던 단자)가 항용 되던 시기였음을 생각할 때 묘비에 휘를 잘못 기재한다는 것은 상상 할 수가 없다. 특히 이 기록과 같은 글자로 조선왕조실록, 최고(最古)의 나주김씨 족보에 기록되어 있어 공의 휘를 廷雋으로 사용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용단을 내리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일성 싶다. 다만 우리 후손들이 이러한 사실들을 정확하게 알고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더 정확한 기록의 출현을 기다리는 마음에서 검토해 보았으며, 공의 이름이 바뀐 경위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어 어차피 추측일 수밖에 없지만 풍수지리(風水地理)에 조예가 높은 분들과 성명학(姓名學)에 밝은 분들에게 자문을 구하였더니 자손의 번창과 부귀공명에 관련하여 부족한 기운을 보강하기 위하여 사후에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다는 의견을 말하고 있어서 참고로 적어본다.
11. 공의 가족 사항
공의 가족사항은 정부인(貞夫人) 평양조씨 와의 혼인 하였는데 장인은 조선 개국공신 조곤(趙琨)이며 포천 신북지역에 세거한 명문거족이다. 정부인 조씨와의 사이에 3남을 두셨는데 장자인 양(壤)은 관은 통훈대부 청주목 판관과 해주목 판관을 역임하고 졸한후 증직은 통례원 우통례를 받으셨고 양의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전주이씨로 조선왕실의 일원인 완성군 유의 손녀 이다. 차남 증(增)은 음서로 사옹원 직장을 지내셨는데 장인은 6진을 개척하고 여러 관직을 거치고 좌의정을 지내시다 계유정난에 순절한 충익공 절제 김종서 장군이다. 셋째 도(堵)는 성균관 진사로 계유정난에 공을 세운 정난공신으로 대장에 봉하고 금성군을 군봉 받았다.
공의 장손인 해판공 양의 장자 경근은 좌군 섭사용을 지냈고 통정대부 형조참의로 증직 되었는데 배위는 숙부인 전주이씨로 태조의 4왕자 방의의 증손녀이다. 해판공의 차남 우운은 능성현령을 지냈고, 3남 이첨은 한성소윤을 역임 하였다. 공의 차남 중의 아들 취장은 통훈대부 춘추관 기주관사와 공조정랑을 지내셨다. 공의 3남 도의 장남 우문은 승선랑을 지냈고 차남 취형은 북평사를 지냈다.
조선 중기 대학자 동춘당 송준길은 공의 손녀의 후손이다.
12. 총제공 묘역과 분묘기지권(墳墓基地權)
공의묘소는 우리 문중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묘역이다, 공이 1433년(세종 15년) 졸(卒)하자 조정에서 예장을 사하였고 산소가 위치한 곳은 풍수지리상으로 천주산 능마루 옥녀직금형의 가장 요지로서 입지와 좌향이 주변에 있는 어떤 묘소보다도 빼어나고 훌륭한 풍수지리 조건을 갖춘 산소이고 명당으로의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600년 가까이 된 우리 문중의 역사와 숨결이 살아 있는 선산으로 이 묘역에는 공의 예장묘 뿐 아니라 약 50보 아래에 공의 배위이신 정부인 평양조씨, 그리고 약간 떨어진 아래쪽에는 장자부인 해판공 양(壤)의 배위 숙부인 전주이씨가 모셔져 있고 그 아래 약30보 정도에 총제공 정부인의 여동생으로 청주양씨 병사공 배위 정부인 평양조씨가 모셔져 있는 전통있는 묘역으로 해마다 수백 명의 자손들이 모여 향화를 봉행하고 있는 묘소임에도 확실한 연대는 미상이나 구한말 조선이 멸망하고 근대화의 바람이 광풍같이 몰아치는 굴곡진 세월속에 이 묘역의 소유가 공의 손아래 동서 문중인 청주양씨 병사공파의 소유로 바뀌어 있다.
그 연유는 지금 밝히기도 쉽지않을뿐아니라 밝힌다 한들 실익이 없다. 때문에 우리 종친회에서는 이 총제공묘역이 문화사적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전통 있는 예장묘이지만 혹시 수호관리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 염려가 되어 근래에 들어 수차례 이 묘역을 매입하려고 몇 번 시도해 보았지만 이 묘역 아래쪽에 청주양씨 병사공(兵使公) 퇴은(退隱) 양치(楊治)의 정부인 평양조씨의 묘소가 모셔져 있고 청주양씨 병사공파 종친회가 수백 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이해가 엇갈려 논의가 많아 성사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조상 묘소를 매우 중시하는 전통이 있음을 감안하여 분묘(墳墓)에 대하여는 비록 남의 땅에 있다 하더라도 일정한 조건을 갖추고 있으면 현실을 감안한 엄격한 현상을 존중하는 관습법상 인정되는 분묘지상권이 적용되고 있어 적어도 법률상으로는 문제가 될 수 없음을 확신하고 있다. 분묘기지권에 관해 법률가의 자문을 받은 바에 의하면
분묘기지권[ 墳墓基地權 ]
타인의 토지 위에 있는 분묘의 기지(基地)에 대하여 관습법상 인정되는 지상권에 유사한 일종의 물권.
분묘기지권은
① 토지 소유자의 승낙을 얻어 분묘를 설치한 경우,
② 토지 소유자의 승낙을 받지 않았더라도 분묘를 설치하고 20년 동안 평온·공연하게 점유함으로써 시효로 인하여 취득한 경우,
③ 자기 소유의 토지에 분묘를 설치한 자가 분묘에 관해서는 별도의 특약이 없이 토지만을 타인에게 처분한 경우 가운데 한 가지 요건만 갖추면 성립한다.
그 범위는 그 분묘의 기지뿐 아니라 분묘의 설치 목적인 분묘의 수호 및 제사에 필요한 범위 안에서 분묘기지 주변의 공지(空地)를 포함한 지역에까지 미치는 것으로 본다(대법원 판례 85다카2496). 그 존속기간은 민법의 지상권 규정을 따를 것이 아니라, 당사자 사이에 약정이 있는 등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그에 따른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경우에는 권리자가 분묘의 수호와 봉사를 계속하는 한 그 분묘가 존속하고 있는 동안은 분묘기지권이 존속한다고 해석한다(대법원 판례 81다1220).
분묘기지권은 종손(宗孫)에 속하는 것이나 분묘에 안치된 선조의 자손도 분묘의 기지를 사용할 수 있다(대법원 판례 78다2117). 이상과 같이 분묘기지권이 성립하는 경우에는 그 분묘를 마음대로 이장(移葬)할 수 없으므로 임야 등을 경매할 때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다가 2010년 포천 천주산 총제공 묘역 상단에 우리 나주김씨 비조인 湟왕자와 관조인 나주군의 영위를 모신 조경단이 600년 된 두 가문의 아름다운 인연을 더욱 돈독히 하고 다지며 기리는 가연비(佳緣碑)를 동시에 입석하는 것으로 청주양씨 종친회에서 합의 하고 양해하여 설단 하였기 때문에 총제공 묘역에 대한 분묘기지권은 이론의 여지가 있을수 없다.
가 연 비
佳緣碑文(전면)
아, 이 세상에 이처럼 귀하고 아름다운 인연이 어디 또 있으리요. 이곳 天柱山 기슭은 나주김씨와 청주양씨의 600년 각별한 인연이 숨쉬는 곳이다.
고려말 조선초 이곳에 世居하던 名門巨族인 平壤趙氏 開國功臣 漢城判尹 趙琨公의 長女가 新羅金氏 王孫인 羅州金氏 摠制公 金廷儁(?~1433)과 혼인하고, 三女는 淸州楊氏 兵使公 楊治에게 출가하므로써 나주김씨와 청주양씨의 뜻 깊고 아름다운 인연이 시작되었다.
총제공과 병사공은 태조, 정종, 태종, 세종조에 벼슬길에 나아가 南征北伐(남정북벌)과 輔國安民(보국안민)으로 혁혁한 업적을 쌓았으며, 同壻이자 同志로서 각별한 情理를 나누며 이름을 드날리셨다.
총제공 金廷儁은 영면 후 玉女織錦形의 명당으로 일컬어지는 이곳 天柱山에 禮葬을 하였고, 아래편에 총제공의 配位 貞夫人 平壤趙氏의 묘소가 있으며, 그리고 연이어 좌측 아래쪽에는 병사공 楊治의 配位 貞夫人 平壤趙氏의 묘소가 있다.
아! 세월은 아득하여 同氣(동기)와 同壻(동서)의 연을 맺은 지 육백여년이 지났음에도 총제공과 병사공 및 두 정부인 자매의 在世시는 물론 영면하신 후에도 같은 묘역에 계시면서 인연을 이어가고 계시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오.
이후 두 가문의 후손들은 이후 문무현관은 물론 충신열사와 정관계, 학계, 법조계, 예체능, 실업계 등 각계에 훌륭한 인재를 두루 배출하여 三韓의 名門家로 자리 매김하고 있으니 하나의 인연에서 비롯됨이 지극히 크다 할 것이다.
이에 각별하고 두터운 인연을 기리고, 世世孫孫 변함없이 그 인연이 이어져서 양 가문의 교류 화목은 물론 융성과 번영이 함께하기를 기원하고자 두가문의 협의로 이 비를 세운다.
2010년 6월
나주김씨 중앙종친 회장 金 謹 鶴 전면 비문을 삼가짓다.
청주양씨 병사공파 종친 회장 楊 載 昌 후면 헌시 삼가 짓다.
나주김씨 三十八世 金 壯 峴 삼가 쓰다.
佳緣碑(후면)
祝佳緣碑竪立 (축가연비수립)
淸州楊氏 兵使公派 宗親會長 楊載昌
居諸流水又陽天
(거제유수우양천) 세월은 물처럼 흘러서다시 오월이 되었는데
先祖佳緣問幾年
(선조가연문기년) 선조들의 아름다운 인연 묻노니 몇 해이던가
摠制王孫施善政
(총제왕손시선정) 왕손 총제공께서는 훌륭한 정치 베프셨고
兵使退隱盡忠虔
(병사퇴은진충건) 퇴은 병사공께서는 삼가 충성을 다하셨네
非凡後裔柯亭笛
(비범후예가정적) 비범한 후예들은 나라에 큰 인물 되었고
繁衍英材棟幹椽
(번연영재동간연) 뛰어난 영재들은 국가에 큰 재목 되었네
懿蹟燦然靑史載
(의적찬연청사재) 훌륭한 공적은 찬연하여 청사에 실려 있고
美談碑刻永遺傳
(미담비각영유전) 미담들은 비문에 새기어 영원히 전해지게 남기네
※분묘기지권이 있는 묘지를 이장해야 할 때는 공공사업으로 인한 토지수용을 당할 때는 예외가 될 수 있다.
13.맺음말
총제공에 관한 역사기록은 필자가 중앙종친회장으로 재임하고 있을때인 2007년11월 사학자 이해준박사의 자문을 받아 조선왕조실록 등 사료를 발굴정리하기 전까지는 오로지 나주김씨대동세보에 기록된 “李朝에 들어 嘉靖大夫 중군도총부 副摠制이며, 예장을 사(賜)하다”가 유일한 기록이었다. ‘예장을 사하다’라는 기록에 주목하여 혹시 총제공께서 보국안민한 공을 세우시어 실록등 사서(史書)에 기록된 공신은 아니었을까?에 착안하여 자문을 구한것이 었는데 놀랍게도 실록에 26차례에 걸쳐 기록되어 있을뿐 아니라 기록내용에는 공께서 조선개국 초 태조대 부터 태종,세종대에 걸쳐 나라와 백성을 위한 보국안민과 국리민복을 위해 봉공헌신한 문무내외직의 관력(官歷)은 물론 1406년 동북면의난(조사의의난) 공신으로 책훈되고 사패지30결을 받은 기록과 졸하신후 부물(賻物)을보내서 조상하였다는 지금까지 자손들이 모르고 간과했던 그야말로 역사적인 아주 소중한 사료를 발굴하게 되었다. 이어서 공께서 찬한 회맹연시와 공이 전라관찰사로 배명되어 갈 때 조선개국 9공신중의 한분으로 태조 이성계의 신도비 글씨를 쓰신 성석린공의 송별시가 발견되었으며, 공이 전주부윤으로 재임하실 때 조부인 월당 김대경의 호를 따서 역원의 재호를 월당원으로 명명한 사료가 발굴되어 후손들에게 크나큰 감격을 안겨주었다 실록등 일련의 자료의 발굴에 결정적 역할을 해준 본인의 청주고등학교후배인 이해준 문화재위원의 적극적인 협조와 관심에 대하여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공의 자료를 찾아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공께서 면면히 천년을 이어온 우리 나주김문의 자랑스런 훌륭한 선조님 중의 한분이라는데 무한한 자랑과 긍지를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자랑스러운 선조님의 실록 등의 사료들을 근600년 동안 모르고 살아온 불민 불찰에 참괴함을 금할 수 없다. 이번 공의 생애에 대한 조명을 통해 공에 관한 근간이 되는 기록은 어느 정도는 발굴된 것으로 생각되지만 아직도 미진하게 생각되는 부분은 공의 자(字)와 호(號)는 어떻게 쓰여졌으며, 공신인데 시호(諡號)나 졸한 후 추증(追贈)은 없었는지, 관직이 이동될 때 공을 위해 지은 송별시나 송축시 등이 더 많이 있었을 텐데 어떻게든 발굴 정리하여 후세에 전해주는 보람과 기쁨을 갖을 수 있도록 많은 종친들의 참여와 협조, 더큰 노력을 경주하길 간절히 기대해본다.
용어 설명
1)출사 : 선비가 벼슬아치가 되어 관아에 나감
2)책훈 : 공훈이 있는 사람의 공신록 등 문서에 기록함
3)예장 : 왕족 공신의 장례를 국가가 예도를 갖추어 치르는 장례
4)경화사족 : 서울에 거주하며 조정에 진출한 문벌이 좋은 선비 집안
5)창수 : 시가나 문장을 지어서 서로 주고받음
6)청요직 : 학식과 덕망, 문벌이 높은 사람이 받는 중요 관직
7)시호 : 현신이나 유현들이 죽은 뒤에 그 생전의 공덕을 기리어 임금이 추증하던 이름
8)불사이군 : 신하가 절개를 지켜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함
9)역성혁명 : 이전의 왕조를 뒤집고 새로운 성씨의 왕조가 들어서는 일
10)삼한 : 우리나라의 별칭, 한반도를 말함
11)정사공신 :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을 평정한 공신에게 준 공신 칭호
12)좌명공신 :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한 공신에게 준 공신 칭호
13) 동북면의 난 : 조사의, 강현 등이 1402년에 태조의 비호 아래 일으킨 난, 조사의 난이라고도 함
14)영자 : 그림자, 여기에서 영정 인물화를 일컬음
15)유후사 : 조선 초 개성에서 서울을 한양으로 옮긴 후 뒤처리 하기 위해 설치 했던 관청
16)기내좌도 : 공양왕 때 경기도를 좌도와 우도로 나뉘었다가 태종 때 합쳐졌다.
17)적전 : 국왕이 친경하여 그 수확으로 신농후직에게 제사하기 위해 국가 공유지 위에 설정된 토지
18)시정기 : 나라일 중에 역사에 남길 만한 것들을 사관이 가려서 적은 기록
19)경차관 : 조선시대 중앙정부의 필요에 따라 특수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된 임시 관직, 주로 5품관 이상 관원이 뽑혔는데, 때로는 당상관이 파견되기도 했다.
20)추쇄 : 빼돌린 재산이나 부역, 병역을 기피한 사람을 붙잡아 본대로 돌려놓는 일, 빼돌린 말을 찾아내어 징발하는 일
21)횡천 : 지금 경남 하동군 횡천면의 이름, 당시는 전라도 땅이었음
22)경외종편 : 유배된 죄인을 적소에서 풀어주어 서울 밖 어느 곳에서든지 뜻대로 살게 함
23)고신 : 관원에게 품계와 관직을 임명할 때 주는 임명장
24)외방유배 : 죄인을 외방의 일정한 곳에 유배하는 것
25)삼별초의 난 : 고려 - 몽고 전쟁이 끝난 뒤 삼별초가 몽골 및 고려 왕조에 대하여 일으킨 항쟁
26)탐라총관부 : 원나라가 삼별초의 난을 토벌한 후 제주도를 직할령으로 편입한 후 설치한 관청
27)골피 : 힘들게 일을 시켜 피폐하게 함
28)상마 : 다 자란 수말
29)피마 : 다 자란 암말
30)견마성 : 견마지성, 임금이나 나라에 바치는 자기의 정성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31)서생 : 회맹하는 글을 쓰며 희생하기로 한 것을 말함
32)풍운의 계합 : 명군과 헌신이 서로 만나 의기가 투합함
33)화수회 : 친목 따위를 위하여 일가끼리 모이는 모임이나 잔치
34)비궁 : 신하가 국사를 돌봄에 있어서 자신의 안위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국사에만 힘을 다하는 것을 말한다.
35)적아 : 시경 북문(北門)에 ‘王事適我 政事一埤益我(나라 일이 나에게 몰려들거늘 정사가 한결같이 나에게 더해지는 구다)’라는 말에서 따온 듯하다. 適은 之의 뜻.
36)삼사 : 노(魯)나라 계문자(季文子)가 어떤 일이든 “세 번 생각한 뒤에 행한다.〔三思而後行〕”라는 말을 공자가 듣고는 “두 번이면 된다.〔再斯可矣〕”라고 말한 고사가 《논어》 〈공야장〉에 나온다.
37)다락원 : 조선시대 서울 도봉구에 있던 공용 여행 중인 관원 및 일반인에게 편의를 제공하던 공영 숙박시설
38)병향 : 두 분이상의 조상님 제사를 같은날 모심
39)회맹연 : 왕조 때 공훈이 있는 사람을 책훈할 때 군신이 모여서 맹세하던 잔치
******** 이글은 나주김씨 17세 김정준공과 관련된 사실(史實)을 2008년3월부터 2014년1월에 걸쳐 틈틈히 역사학자인 이해준 박사의 자문을 받아 국립중앙도서관, 고전번역원 등에 이어 제주시 청을 수차례 방문하여 조선왕조실록, 제주사인명사전, 선생안,신증동국여지승람, 독곡집(성석린) 등 관련내용을 고증하여 이를 종합적으로 분석, 검토, 정리한 내용입니다. 선조님에 관한 사료가 다행히도 600년 동안 묻혀 있다가 근래에 들어 드디어 다수 발굴 되어 사실에 기초한 자료를 정리함으로써, 천년 신라김씨 적통 후예인 나주김씨 문중의 정체성과 정통성 확립은 물론, 구심점과 일체감 조성에 기여하게 된 것은 더없는 보람과 자부심, 당당함을 새삼 느낍니다. 앞으로도 선조님의 보국안민의 얼과 정신을 선양·계승 발전하는 일에 미력한 힘이지만 아끼지 않겠습니다.********
2014,6 지상 김근학 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