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린도 루오톨로 신부(1882-1970)의 생애와 그의 십자가 여정은 아직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분명 20세기의 아주 위대한 사제들 중의 한 명인데도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생애 내내 그를 신비로 가득한 십자가의 길로 이끄셨는데 오로지 당신만을 의탁하고 당신께 헌신하면서 성령의 영감 가득한 글들을 남기고 당신의 겸손한 도구로 쓰시려고....
“하느님의 활동”
돌린도 루오톨로 신부는 그 몇 년 동안 겪어야 하는 사건들 속에서 자신의 사명을 알아들었다. 주님께서는 그 사명을 위해서, "하느님의 활동"이라고 직접 칭하셨던 그 활동을 위해서 돌린도 신부를 오래전부터 준비시켜 완전히 당신의 도구로 삼으셨다.
그 사명은 교회를 쇄신하는 일이고, 교회 쇄신을 통하여 세상을 쇄신하는 일이다. 성체를 통하여, 사제직 그리고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 영적인 모성을 통하여 진실한 정신으로 행해야 하는 쇄신이다. 이에 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성체는 너희가 가장 갈망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너희 활동의 유일한 목적이어야 한다."
돌린도 신부가 삶과 사랑에서 사제로서 지고 있던 고난은, 숨겨진 뿌리처럼 이 사명을 위한 활동의 핵심이었다. 실제로 1910년 8월 예수님께서 돌린도 신부에게 장엄하게 말씀하셨다.
“너의 이름을 돌린도 Donlindo(고통)라고 하도록 네 아버지에게 말한 것은 바로 나다. … 너는 고통이고, 너의 고통에 나는 나의 새로운 사랑의 나라를 세우려고 한다. 나의 이 말을 명심하여라."
그리고 1918년 3월에는 성모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다.
"나는 너의 엄마다. 나에게 너 자신을 의탁하여라. 그리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완전히 변화시키도록 하여라.… 네가 나의 이름(고통의 성모, 아돌로 라타Addolorata)을 지니기를 나는 원했다. 나의 고통으로 나는 주님 구원사업의 협력자가 되었다. 너의 고통으로 너는 주님께 온전히 헌신할 수 있다. … 네게 그와 같은 말을 받아쓰게 한 것을 환상으로 여기지 말아라. 하느님의 활동이 널리 퍼지고 앞서 나가는 것을 너는 이미 보고 있다.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왜냐하면 네 마음에 그것을 심은 이는 바로 나이며, 그리고 나는 어머니로서 그것을 감시하기 때문이다."
그 활동의 핵심에 여성들의 모임이 있었고, 그 여성들을 주님께서 1915년부터 돌린도 신부에게로 이끄셨다. 그는 그 여성들이 마리아의 모범을 따르며 단순하면서도 깊은 내적 삶을 사는 열렬한 사도들로 만들었다. 그 여성들은 영적인 어머니들이며 채널”이 되어야 했다. 그 채널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시 초자연적인 삶이 전해지기를 주님께서 원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린도 신부도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여성들을 보내신 이유를. "사실 처음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내적인 회복과 외적인 사도직의 사명을 통해서, 여성은 하느님 나라를 준비해야만 합니다."
기도는 항상 승리합니다
1935년 돌린도 루오톨로 신부가 편지에 쓴 이런 글은 매우 풍부한 기도 경험이 없으면 할 수 없는 말이다.
"기도는 일입니다. 그건 오락이 아닙니다. 또한 기도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노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영혼이 기도에 친숙해진다면, 기도는 말할 수 없이 달콤한 것이 됩니다. 하느님과의 대결을 이기기위해서, 기도하십시오." 다른 편지에서는 이렇게 썼다.
"기도하는 영혼은 그 어떤 인간적인 활동보다 더 위대한 일을 완성합니다. 그리고 외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보다 사도직에 더 많은 것을 기여합니다. 기도의 도움은 천사의 도움보다 훨씬 더 값지고, 심지어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든 천상적인 힘보다 더 값집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정말로 무장을 갖추었기에 강하며 패배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기도만으로 모든 인간적이고 악마적인 계획들을 흔들리게 하며, 심지어 하느님을 움직여 사랑과 자비 가득한 새로운 계획들을 세울 수 도 있습니다. 기도는 정신과 물질은 물론이요 피조물과 창조주에게까지 영향을 끼치는 경탄할 만한 힘입니다. 기도는 그 어떤 수단들보다, 가장 강하다는 수단들보다 더 강합니다. 기도는 자연의 법칙마저도 넘어서며, 가장 반항적인 힘도 지배할 수 있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전능과 같습니다."
"우리의 가련한 눈길로 보면, 기도는 소용 없어 보이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도는 항상 승리합니다. 우리 눈으로는 하느님의 경탄하리만큼 선하신 계획을 꿰뚫어 볼 수 없습니다."
골고타를 향하여
35세에는 몰이해와 적대적인 비방이라는 외적 공격뿐만 아니라, 영적인 딸들마저도 그의 영적 지도를 불신하는 허리케인이 닥쳤다.
“그 모든 것이 새삼스럽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제를 통하여 하신 일인데 그게 이상한 일입니까? 그러나 그것에 무언가 죄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저에게 여러분의 논리로 설명해주십시오." 다시금 교황청의 "경고를 받았다." 그가 "거짓말, 위험한 공상, 혁명적인 광기, 이교의 이단을 전하는 사제"로 고발되었단다. 나중에 밝혀졌는데, 이 터무니없는 고발과 비난 뒤에는 그의 영적인 딸이 숨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1918년 8월부터 강론이 금지되면서 큰 고통을 당했다. 대신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영혼들을 위해서 편지를 쓰고, 기도와 글쓰기에 더 매달렸다.
그로부터 2년 반이 지난 1921년 2월 초, 그는 로마로 소환되어 고소 내용에 대한 심문을 받았다. 한달간의 심문 끝에 재판관들은 그를 미쳤다고 판정하면서, 최종 판결이 날 때까지 사제직 전권을 박탈했다! 마침내 돌린도 신부는 골고타에 도착한 것이다.
그날부터 그는 평신도처럼 성체를 받아 모시는 크나큰 굴욕을 견뎌야 했다. 심문과 재판이 이어지는 고통 가득한 그 몇 달 동안, 그는 로마에서 검은 옷을 입고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내적 생명이 위험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익숙하고도 겸손한 호의로 사람들을 만났다.
39세이던 그해 10월, 그의 모든 것을 무無로 만드는 판결이 떨어졌다. 사제 직무가 정지된 것이다. 1937년 7월에 복권될 때까지, 그 처벌은 16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 기간에 돌린도 신부가 완전히 의지적으로 교회와 사제들을 위해서 바친 희생은 유일무이하리만치 영웅적이었다.
“나는 매우 불쌍합니다. 불쌍하고 무가치한 사람입니다. 불쌍한 바보입니다. 나의 힘은 기도입니다. 나의 인도자는 하느님의 뜻이며, 그분께 내 손을 맡겨드립니다. 평탄하지 않은 길에서 나의 안전은 천상의 어머니 마리아이십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가 1931년과 1933년에 받은 직무 정지는 단지 2년이었고, 그럼에도 비오 신부는 수도원에서 개인적으로 미사도 드릴 수 있었다! 그나마 돌린도 신부에게 단 하나의 큰 위로는 그 판결이 그의 사목활동이 아니라 개인 인격을 문제 삼았다는 점이다. "1000년 동안 무덤에 누워 있는 것 같았던" 그 기간에 그는 서른 번 이상 이나 로마 성무성성의 소환에 응하는 고통과 굴욕을 감내해야 하였다.
“너를 걱정하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린도 루오톨로 신부는 음악과 공부와 사목에 열정적으로 매진했다. 미사를 비롯한 성사 집전도 안 되고, 강론도 해서는 안되었지만 .... 대부분 자신의 영적 딸들에게 보낸 것이지만 편지 왕래는 만 통이 넘었으며, 교회의 쇄신을 위한 활동을 글로 표현한 것이다. 특히 그는 점점더 기도의 거인이 되어 갔다!
하느님께서는 돌린도 신부를 사람은 결코 생각하지 못하는 길로 이끄셨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것에 매달렸으며, 그 작업은 위기에 빠진 한 사제를 구하기 위해 성경의 개별적인 장을 주석하는 데 까지 확장되었다. 그 결과물인 주석들을 여러 사람들이 돌려가며 읽으면서, 점점 더 많은 이들이 감명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하여 1928년부터 1964년 사이에 성경에 대한 완전한 주석 33권이 탄생하게 되었다!
여러 주교들 그리고 교황 비오 11세까지도 그 방대한 작업의 결과물인 주석서를 매우 높이 평가했지만, 1939년 교황 비오 11세 1922년:1939년 재우)의 서거 후 다시금 돌린도 신부에 대한 비방의 폭풍이 거세졌다.
그리하여 1940년 11월에 교황청 성무성성은 그의 주석서에 제재를 가했는데, 바로 그 며칠 후인 11월 27일에, 새로 시작되는 깊은 고난의 시점에 주님께서 58세의 돌린도 신부에게 "너를 걱정하여라"는 의탁의 말씀을 받아쓰게 하셨다.
예언적 말씀들
1924년 12월 23일 돌린도 신부는 교황 비오 11세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서 그는, 1925년 희년 개회 직전의 교회 상황을 예언적으로 분명하게 교황에게 드러내 보였다. 그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가장 심각한 악이 교회와 세상을 위협합니다. 악은 인간적인 임시 해결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생명과 함께하여야 방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의 피가 부족합니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삶을 더 이상 살지 않으며, 교황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강력한 투쟁이 선과 악, 질서와 무질서, 진리와 오류, 교회와 배교 사이에 시작될 것이며,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심적으로 무력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사제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의 암울함에 신음하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 영혼들도 거룩하게 살지 않습니다. 온갖 추문들이 도시와 나라를 어지럽힙니다. 목자들은 졸고 있다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앞으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이미 달아난 양 떼에게 생기를 줄 힘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고, 활발한 성직자도 더 이상 없습니다."
오상의 성 비오 신부는 자신을 찾아온 이들 중 나폴리에서 온 이들에게는 이렇게 말하며 돌려보냈다고 한다.
“뭐하러 굳이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나폴리에는 돌린도 신부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분에게 가십시오!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성인입니다."
이처럼 이미 나폴리의 돌린도 신부를 알고 있던 오상의 비오 신부와 돌린도 신부의 직접적인 만남은 1953년 10월에 산 죠반니 로톤도에서 이루어졌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그 만남은 돌린도 신부가 영혼의 문제로 비오 신부를 찾아가면서 이루어졌다.
"고난으로 가득한 나의 길과 활동에 대한 빛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 헤어지면서 비오 신부님이 나를 포옹하면서 그랬습니다. '천국 전체가 신부님의 영혼 안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며, 영원히 그럴 것입니다.' ... 비오 신부님에게서 내 영혼에 필요한 빛을 받고 싶었던 내 소원에 대한 그분의 대답이었습니다." 비오 신부의 이 말은 하느님께서 자신 안에서 하시는 일이 자신의 착각은 아닌지 항상 걱정하고 있었던 돌린도 신부에게 크나큰 위로가 되었다. 그것은 바로 항상 주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또한 비오 신부는 돌린도 신부에게 이 조언도 잊지 않았다. “신부님의 마음이 인간적인 부당함에 휩쓸려 슬프게도 소란스럽거나 혼란스럽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 의미는 구원 질서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돌린도 신부의 저서에 관해서도 비오 신부의 보증이 있다. 비오 신부가 비서인 펠레그리노 신부를 통해서 돌린도 신부의 한 영적 딸에게 쓴 1967년 3월 13일 편지에서 이렇게 전하게 한 것이다. "돌린도 신부님이 쓴 글들 중 어느 하나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비오 신부님이 말했습니다."
1965년 7월 2일 돌린도 신부는 비톨드 라 스코브스키(폴 마리아 흐닐리카 주교의 폴란드의 협력자)에게 아주 특별한 내용이 담긴 엽서를 보냈다. 즉, 성모님께서 당시 공산독 재정권으로 큰 고통을 당하고 있던 폴란드와 동유럽 국가들을 위로하시면서 지켜보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거의 300년 전인 1683년 오스트리아 비인은 이슬람 오스만 제국에 두 달이나 포위되어 있었는데, 폴란드 왕 요한 소비에스키가 20,000명의 기병들을 이끌고 비인 인근 칼렌베르크에서 오스만을 물리치고 오스트리아와 유럽을 구한 것도 성모님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한편 돌린도 신부의 그 엽서는 13년이나 지난 어느 날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폴란드 출신의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으로 선출(1978년 10월 16일)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 엽서에는 돌린도 신부를 통하여 성모님께서 전한 이러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마리아께서 영혼에게: 세상은 몰락을 향해 가고 있다. 그러나 폴란드는 내 성심을 공경하였기에, 요한 소비에스키가 유럽과 세계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구할 때의 20,000 명 역할을 할 것이다. 이제 폴란드는 세계를 가공할 공산주의의 독재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다. 한 새로운 요한이 나타나 영웅적인 걸음으로 공산주의의 독재를 강 요받는 경계선을 넘어서 그 사슬들을 끊어 버릴 것이다. 이를 명심하여라. 나는 폴란드를 축복한다."
1950년부터 이미 돌린도 신부는 기도와 글쓰기에 하루 중 20시간을 쏟으며 살았다. 78세이던 1960년 가을부터 중풍으로 몸의 반이 마비되어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의 일상은 그대로 지속되었다. 그의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고, 책상 위에는 도저히 처리할 수 없을 정도로 우편물이 쌓여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불평이라곤 한 마디도 없었고, 오로지 칭찬과 감사만 흘러나왔다.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남긴 책 100 권 중에서, 마지막으로 끝낸 책은 성모님에 관한 내용이었다. 돌린도 신부는 3일간 폐렴으로 고생하다가 1970년 11월 19일 포기와 비움의 길을 완수하고 세상을 떠났는데, 여든여덟 해의 삶 동안 그의 입에서 끊이지 않던 말은 바로 “아베 마리아"였다.
돌린도 루오톨로 신부의 무덤은 나폴리의 산 쥬세페 데이 베키 성당 안에 있다. 그의 친형인 엘리오 루오톨로 신부가 사목하는 그 성당에서 1942년부터 돌린도 신부는 보좌신부로 형을 도왔었다.
지금도 많은 신자들이 전 세계에서 돌린도 신부를 찾아와 어린아이와 같은 신뢰로 자신의 관심사를 청하면서, 그의 무덤의 검은 돌판을 두드린다. 왜냐하면 생전에 돌린도 신부가 이렇게 약속했기 때문이다.
"내 무덤에 와서 노크하고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러면 내가 여러분에게 대답할 것입니다."
<Triumph des Herzens nr. 161>에서
이정은 옮김
(마리아지 2023년 11•12월호 통권 242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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